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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年 10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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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윤숙
(毛允淑,
1910年
3月 5日
~
1990年
6月 7日
)은 日帝 强占期와 大韓民國의
是認
이며
隨筆家
이다. 本貫은
光州
(廣州). 雅號는
嶺雲
(嶺雲), 英文名은
메리 앤 某
(Mary Ann Moh)이다.
主要 履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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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年
UN 韓國委員會
訪問 時
크리슈나 메논
等을 說得하여 單獨 政府 樹立을 支持하는 立場에 서도록 說得했고,
大韓民國 政府
樹立 以後에는 UN總會에도 派遣되었다.
韓國 戰爭
때는 〈
國軍은 죽어서 말한다
〉는
時
를 發表하여 話題가 되었다.
안호상
의 夫人이었으나 離婚했다.
太平洋 戰爭
當時 各種 親日 講演을 했기 때문에
親日派
로 分類된다.
學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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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名譽 博士 學位
[
編輯
]
生涯
[
編輯
]
日帝 强占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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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出生과 初期 活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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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咸鏡南道
元山
에서 出生하였고 지난날 한때
咸鏡南道 咸興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는 그女는
開城
의
호수돈女子高等普通學校
를 卒業하고
1927年
京城府
의
李花女子專門學校
豫科에 入學하였다.
1928年
李花女子專門學校
英文科에 入學,
1931年
이화여전 英文科를 卒業했다. 그해 親知의 周旋으로
滿洲
北間島
舂精에 있는 名臣女學校(明信女學校) 敎師로 就職하였다. 以後 敎師로 勤務하는 동안 〈疲勞 索引 當身의 얼골을〉(1931)을 《
동광
》에 發表하면서 登壇한 뒤 敎師, 記者이자 詩人으로 活動했다. 이화여전을 卒業한 해에 萬株의 女子 中學校에서 1年 敎師를 하였고, 1932年 서울 排貨女子高等普通學校 敎師가 되었다.
作品 活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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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年
哲學者
안호상
(安浩相)을 만나 結婚하였으나 離婚하고, 以後 平生을 獨身으로 生活하였다.
太平洋 戰爭期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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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平洋 戰爭
中 各種
親日
團體에 加入하여 講演 및 著述 活動으로 戰爭에 協力했다.
朝鮮文人協會
에 幹事로 加擔해 親日 講演을 했고
臨戰對策協議會
(1941),
朝鮮敎化團體聯合會
(1941),
조선임전보국단
(1942),
國民義勇隊
(1945)에 加擔하였고 朝鮮總督府 機關紙인 《
每日申報
》等에 親日 論說을 寄稿했다.
特히
日本 帝國主義
의
大東亞共榮圈
論理를 形象化한 〈東邦의 女人들〉(1942)을 親日 雜誌 《
新時代
》에 寄稿하고 《
每日申報
》에는 〈호산나 小南道〉(1942)라는 戰爭 讚揚
時
를 發表하였으며, 志願兵 參戰을 督勵하는 詩 〈어린 날개 - 히로오카(廣岡) 少年 學徒兵에게〉(1943), 〈아가야 너는 - 海軍 記念日을 맞아〉(1943), 〈내 어머니 한 말씀에〉(1943) 等을 연달아 發表하는 等 自發的이고 積極的인
親日
活動을 했다. 이 時期 비슷한 主題의 詩들을 創作한
노천명
과 함께 文人 中 가장 露骨的인
親日派
로 分類되고 있다.
解放 以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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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光復 直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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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光復 後
美軍政
治下에서부터
李承晩
과 密着하여 單獨 政府 樹立에 協力하였다. 毛允淑은
크리슈나 메논
유엔韓國委員長이 南韓 單獨 選擧에 反對하던 것을, 美人計를 利用해
1948年
3月 12日
票決에서 南韓의 獨自的 選擧안에 贊成票를 던지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毛允淑은
김수임
의 單짝이기도 하며 또한
이강국
을 좋아했다는 說이 있는데,
KBS
드라마
서울 1945
에서 이 설을 借用하기도 했다. 한便, 김수임이 間諜 嫌疑를 받고 裁判을 받을 當時 毛允淑은 김수임을 積極 辯護하였다.
大韓民國
[
編輯
]
歸國 後
이화여자대학교
에 講師로 出講하여 國文學을 講義하였고,
1949年
月刊 純粹文藝誌 ≪文藝 藝術≫를 創刊하였으며,
金九
의 國民葬에 參席하여 追悼詩를 朗讀하였다.
韓國 戰爭
勃發 後
朝鮮人民軍
이
서울
을 占領했을 때, 毛允淑을 卽決 處刑하고 屍身은 탱크에 매달고 다녔다는 所聞이 나돌았을만큼
極右
文壇에서도 代表的인 李承晩 系列 人物이었다. 毛允淑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占領 下衣 석 달 동안의 體驗을 極度로 否定的인 立場에서 記憶하고 描寫했는데, 이와 같은 觀點은 오랫동안 南韓에서 韓國 戰爭을 바라보는 視角의 主流를 이루고 南韓의 公式 立場을 代辯했다.
[2]
韓國 戰爭中에 그는
樂浪클럽
을 이끌고 高位 美國人들을 相對로 로비를 하였는데, 毛允淑은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論介
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 때 接待한 사람은
델레스
美 國務長官,
리지웨이
,
콜터
,
밴프리트
將軍과
무쵸
大使 等이었다. 그는 後日에 "
金活蘭
博士가 外國人과 對話하는 매너와 에티켓을 指導했고, 서툴지만 社交 댄스도 추었으며 때론 美人計度 썼지 뭐"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3]
1951年
釜山
의 避難地에서 열린
이화여자대학
에서 講義를 하였고, 休戰 後에는 繼續 이화여대 敎授로 出講하였다.
大韓民國 國軍
이 서울을 收復한 뒤 宣撫 放送에 參與해 從軍하였고, 以後로는 華麗한 經歷을 쌓았다. 1955年 國際펜클럽 韓國側 代表로 參加하였고, 以後 1960年
國際 팬클럽
韓國本部 會長을 지냈다.
生涯 後半
[
編輯
]
1971年에는
民主공화당
公薦으로
第8代 國會議員
을 歷任했고,
國民勳章
모란장,
3·1文化相
等을 授與받았으며
第5共和國
에서는
文學振興財團
理事長을 지냈다.
1981年
大韓民國 藝術院
會員이 되고,
1989年
作家 分野에서 隱退하였으며 같은 해(1989年) 藝術院 元老會員에 推戴되었다.
事後
[
編輯
]
事後
1991年
金管
文化勳章
이 追敍되었다.
後日
民族正氣를 세우는 國會議員모임
의
親日派 708人 名單
과
民族問題硏究所
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 모두 選定되었다. 總 12篇의 親日 作品이 밝혀져
[4]
2002年
發表된
親日 文學인 42人 名單
에 包含되어 있으며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著書
[
編輯
]
詩集
[
編輯
]
- 《빛나는 地域(地域)》(1933)
- 《
렌의 哀歌
》(1937) - 散文詩集
- 《玉비녀》(1947)
- 《風浪》(1951)
- 《政經(情景)》(1959)
- 《風土(風土)》(1970)
- 《論介(論介)》(1974)
- 《國軍은 죽어서 말한다》(1980)
隨筆集
[
編輯
]
- 《내가 본 世上》(1953)
- 《葡萄園》(1960)
- 《구름의 戀歌(戀歌)》(1964)
- 《느티의 一月》(1976)
全集
[
編輯
]
- 《毛允淑 詩 全集》(1974)
- 《모윤숙 全集》(1982)
禁慾主義
[
編輯
]
純潔
問題에 對해서 그는
禁慾主義
的인 價値觀을 披瀝하였다. 毛允淑은 '그 사람의 靈魂의 呼吸을 의식할 힘을 가졌거든 다시 그 사람의 肉體의 내음새를 그리워 苦悶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하여, 正祖問題에 關해 禁慾的인 態度를 보이기도 했다.
[5]
같이 보기
[
編輯
]
大衆文化에 나타난 모윤숙
[
編輯
]
TV 시리즈
[
編輯
]
映畫
[
編輯
]
- 1974年 映畫 《
證言
》 -
엄앵란
(配役: 女流 詩人)
參考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