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政府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 參與政府 에서 넘어옴)

參與 政府
2003年 2月 25日~2008年 2月 24日
(總理 權限 代行: 2004年 3月 12日 ~ 2004年 5月 14日)
大統領 盧武鉉
國務總理
目錄
內閣 노무현 政府의 國務委員 參照
與黨 새千年民主黨 (2003年 2月~2003年 9月)
열린우리당 (2003年 10月~2007年 8月)
選擧 第16代 大統領 選擧 (2002年)
大統領의 揮帳
公式 웹사이트

노무현 政府 (盧武鉉 政府, 2003年 ~ 2008年)는 大韓民國 第6共和國 의 네 番째 政府이다. 參與政府 (參與政府)는 노무현 政府의 別稱으로 言論에서 자주 쓰인다. [1] 노무현 政府는 國政 目標로 國民들과 함께 하는 民主主義, 더불어 사는 均衡 發展 社會, 平和와 繁榮의 東北아시아 時代 等을 提示하였다.

參與政府는 第16代 大統領 選擧 에 當選된 盧武鉉 의 就任과 함께 2003年 2月 25日 에 就任과 同時에 새千年民主黨 이 與黨이 되었으나 盧武鉉 은 任期 中에 새千年民主黨 을 脫黨하고, 以後 열린우리당 에 入黨하여 열린우리당 이 與黨이 되었다. 參與政府는 2008年 2月 24日 子正에 任期가 滿了되었다. 2004年 6月 에 出帆한 第17代 國會는 憲政史上 最初로 民主 系列 政黨이 議會權力을 掌握하면서 出帆부터 政治改革에 對한 國民的 期待를 모았다.

그러나 4大 改革 立法 및 過去事 調査 委員會 推進을 놓고 與野間 對立이 激化되면서 政爭이 深化되었다. [2] 그 結果 여러 改革立法을 爲한 努力이 進行되었으나 野黨과의 衝突로 霧散되었고, 또한 理念 志向的인 問題에 執着한다는 批判을 받기도 했다. 또한 夫人의 賂物收受疑惑으로 退任後 盧武鉉이 自殺하여 論難이 되었다.

名稱 [ 編輯 ]

'參與政府'라는 名稱에는 國民의 參與가 日常化되는 參與 民主主義로 發展시키고, 眞正한 國民主權, 市民主權 時代를 열겠다는 意味가 담겨 있다. 政府 公式名稱 決定 過程에서 인터넷 을 통한 對國民 提案으로 名稱을 採擇해, 參與 民主主義를 더욱 强調했다는 評價를 받았다. [3]

國政의 原理, 目標, 課題 [ 編輯 ]

外交, 統一 [ 編輯 ]

外交 方針은 東北亞 均衡者론 을 標榜하였다.

2005年 參與政府는 日本과 中國의 歷史歪曲과 領有權主張을 長期的·體系的으로 對應하기 위해 만든 東北亞歷史財團 을 設立하였다. 2006年에 新生國 몬테네그로 와 手交하였다. 2007年에는 모나코 와 手交하였다.

對北 政策 [ 編輯 ]

參與政府의 對北 政策은 前任 大統領 金大中 햇볕政策 을 根幹으로 하였다. 이는 韓半島의 統一 을 이루기 위해서는 共存政策을 통해 大韓民國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以下 北韓) 間의 緊張 關係를 緩和하고 北韓을 刺戟하지 않으면서 經濟的 支援을 通해 經濟 發展을 꾀해야 한다는 것으로, 一部 保守派들은 北韓에 對한 지나친 宥和政策이 오히려 暴壓的인 北韓 政權의 崩壞를 沮止했다는 批判도 한다.

參與政府는 第2次 北核危機 直後에 出帆하였다. 2006年 7月과 10月 北韓이 長距離 미사일 發射와 核實驗을 實行한 以後에는 6者會談을 中心으로 核廢棄를 위한 努力을 기울였다. 2007年 2月에는 2·13 合意 가 있었고, 2007年 10月 2日 徒步로 軍事分界線을 넘어 10月 4日 까지 平壤을 訪問, 김정일 國防委員長과 頂上會談 을 가진 뒤 8個 條項의 共同宣言文 을 發表했다. 代表的으로 海州經濟特區 로 經濟協定의 指標를 넓혔다. 以前의 金剛山 觀光 에 이어 個性觀光 , 白頭山 觀光 事業을 擴大했다.

대한항공 858篇 爆破 事件 造作 論難 [ 編輯 ]

2003年 MBC, SBS 放送 프로그램에서 김현희의 居住地 周圍 撮影場面이 露出됐다. [4] 이에 對해 2011年 김현희는 노무현 政府가 KAL機 爆破 事件을 安企部 造作 事件으로 몰고 가려는 放送에 出演하지 않는다는 理由로 自身의 居住地를 露出시켰다고 主張했다. 김현희는 放送 內容은 김현희에게 "내가 北韓 工作員이 아니라 安企部 工作員임을 告白하라는 것이었다"고 말하면서, "居住地 露出은 自己들이 直接 나를 손댈 수는 없고 北韓에서 와서 나를 殺害하라는 것이었다"고 主張했다. 김정일의 妻조카인 이한영度 1997年 居住地 住所 流出로 殺害됐던 만큼 居住地 露出이 김현희와 그의 家族의 生命과 直結되는 重要한 事項이었기 때문이다. [5]

國家情報院 過去事件 眞實糾明을 통한 發展委員會 [6] 가 이 事件을 "7代 于先調査對象 事件"으로 選定하여 調査하였고 2006年 8月 2007年 10月 두 次例에 걸쳐 이 事件에 對해 "造作이 아니다"라고 調査結果를 發表하였다. 한便 2010年 言論報道에 따르면, 2007年 中國 에서 6者會談이 열렸을 當時, 北側의 리근(李根) 美國局長은 私席에서 "우리는 KAL機 事件 以後 한番도 테러한 적이 없다"는 發言을 하여, 858篇 爆破事件을 일으켰음을 間接的으로 是認한 것으로 알려졌다. [7]

韓美 關係 [ 編輯 ]

盧武鉉 大統領(오른쪽)과 콘돌리자 라이스 美國 國務長官

大統領 選擧에서는 韓美 間의 水平的 外交 關係와 未來志向的인 脫冷戰 外交를 志向한다고 强調하여 2002年 7月 美軍 裝甲車 女中生 死亡 事件 촛불 集會 等으로 高調된 反美 情緖에 呼訴하였으나, 2003年 出帆 以後로는 大韓民國軍 이라크 派兵 을 決定하고 美國에 對해 旣存과 다름없이 宥和的인 外交를 펼쳐 進步 陣營으로부터 "保守와 다름없는 親美主義 外交"라는 批判을 받았다.

當時 美國은 조지 W. 부시 를 爲始한 네오콘 이 執權하고 있었다. 이로 因해 參與政府와 美國 政府와의 對北政策에 對한 微妙한 衝突이 자주 일어났다. 就任 後 부시行政府와 對北政策의 立場差異가 發生하자 美國의 공화당 保守派는 疑問을 가지기도 했으나, 實際로 參與政府가 對北政策 以外로 美國에 對해 獨自路線을 걸은 痕跡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北韓과 美國의 衝突을 仲裁해 '中立外交'라고 評價받기도 한다.

反面에 北韓 問題와 關聯해서는 美國과 立場差를 보여 保守陣營으로부터 "危險한 反美 外交"라는 批判을 받았다. 參與政府는 이러한 對美 外交를 美國에서 願하는 것들은 큰 損害가 나지 않는 線에서 美國의 要求를 받아들이되, 이를 빌미로 北韓 問題와 關聯하여 美國에 할말을 하는 '實用主義' 外交라 主張하였다.

實際로 美國 白堊館 東아시아太平洋 選任補佐官을 지낸 마이클 그린은 國內 日刊紙와의 인터뷰에서 노무현에 對해 "부시 大統領이 만난 正常 中 가장 豫測할 수 없는 人物이지만 그 어느 大統領보다도 韓美 同盟을 强化시킨 大統領"이라고 評價한 바 있다. [8]

美國이 主導하는 MD 體制에는 參與하지 않았으며, 韓美聯合司令部가 갖고 있는 展示作戰統制權을 返還하도록 要求하였다.

2007年 4月 2日, 14個月間의 긴 協商을 마치고 大韓民國과 美國 間의 自由 貿易 協定(FTA)인 韓美自由貿易協定 이 最終 妥結되었다. 2007年 5月 25日에 協定文 內容이 公開되었다.

韓中 關係 [ 編輯 ]

東北工程 [ 編輯 ]

  • 2004年 6月 東北工程 事務處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公正 內容을 公開하면서 韓國 媒體에서 報道, 한-中 사이 外交問題로 飛火.
  • 2004年 8月24日 한-中, 高句麗史 問題와 關聯해 "이 問題를 政治爭點化夏至 않고 學術 硏究에 맡기며, 歷史敎科書 等에 '韓國 政府의 關心'을 考慮한다"라는 內容의 다섯 港으로 이뤄진 '구두合意'. [9]

韓日 關係 [ 編輯 ]

2003年 6月, 頂上會談에서 共同宣言文을 통해 2005年 韓日 友情의 해 2005 로 指定하였다. 하지만 고이즈미 內閣이 들어서며, 야스쿠니 神社 參拜와 歷史敎科書 歪曲 , 獨島 領有權 主張 問題가 불거지자 政府는 親和政策에서 强勁對應策으로 旋回했다. 外交部 는 抗議 聲明을 發表하고, 駐韓日本大使를 招致하는 等 韓·日 外交는 危機를 맞게 되었다. [10]

盧武鉉 大統領 逝去 以後 公開된 文書에 따르면 獨島에 日本 船舶이 侵犯하였을 때 遲滯없이 發砲하라는 命令을 내렸고, 日本 船舶은 卽時 退却한 것으로 드러났다. [11]

國防 [ 編輯 ]

參與政府는 國防政策을 自主國防 으로 標榜하였다.

' 國防改革 2020 '이라는 國防改革의 '法制化'로 文民化를 目標로 하여 進行 中이고, 長期的으로 增加된 豫算을 바탕으로 國防力이 强化되었다는 評價를 받고 있다. 또한 2006年 政府에서는 戰時作戰權 을 還收를 美國에게 要求하여, 美國은 3年안에 韓半島 有事時 韓國軍에게 移讓하도록 하기로 했다. 一部 國防 專門家는 國防改革 2020이 核心 威脅인 北韓의 軍事力을 제대로 反映하지 않은 채 마련되었다는 批判을 하기도 한다. [12]

兵役制度 改善案으로는 2014年 까지 軍 服務 期間 6個月을 短縮할 計劃을 세웠다. [13]

政治, 行政 [ 編輯 ]

立法府 [ 編輯 ]

'政黨名簿式 比例代表制 '가 처음 導入되어 進步政黨 민주노동당 李 院內進出에 成功했고, 政治 改革에 對한 國民의 要求 및 彈劾 事態로 인하여 全體의 62.5% 187名의 初選이 當選되는 異變을 낳았다. 平均 年齡은 51.7歲였다. 18代 國會는 134名의 初選 議員이 當選됐고 平均 年齡은 53.5歲였다. 여기에 比例代表 折半이 女性으로 채워지면서 女性 議員의 急增現象度 두드러졌다. 17代 女性 議員은 모두 39名으로 地域區 10名, 比例 29의 女性議員이 國會 入城에 成功했다. 16代 國會는 21名의 女性議員을 排出하는데 그쳤다. ' 國務委員 人事聽聞會'도 制度化되었다. [2]

權威的 政治文化의 克服 [ 編輯 ]

平檢事들과의 對話 및 檢察權 獨立에 對한 意志(或은 抛棄), 黨權 抛棄 等 旣存 大統領에게 手足과 같은 權力 機能에 對한 統制를 스스로 抛棄하면서 權威的 政治文化의 克服(或은 淸算)을 達成하였다. 또한, 脫權威的 大統領을 내세웠으며, 이로 인해 오랫동안 韓國社會에서 금기시되었던 大統領을 公開的으로 非難(或은 貶下)할 수 있는 狀況에 一助하였다. 盧武鉉 大統領은 "大統領 辱하는 것은 民主社會에서 主權을 가진 市民의 當然한 權利입니다. 大統領 辱함으로써 主權者가 스트레스를 解消할 수 있다면 전 기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라며 받아들였으나, 인터넷 文化 發達 等 時代의 흐름에 따른 不可抗力的인 側面도 있었다. 어찌됐든 이러한 權威 克服에 對한 評價는 리더쉽 不在로 評價하는 部類와 時代精神의 實現으로 評價하는 部類로 나뉘고 있다.

地域構圖 淸算 [ 編輯 ]

大選에서 그는 總投票者 2455萬票中 1201萬票로 約 48.9%의 得票率로 當選되었다. 2位 이회창 候補는 1144萬票를 얻어 노무현 候補에 비하여 57萬票程度 뒤졌다. 嶺南(金海)인 出身으로 새千年民主黨 으로 出馬하였다.

地域別 得票率을 보면 그는 慶南 27.08 %, 釜山 29.86%, 慶北 21.65%, 大邱 18.68%를 얻고 全南 93.39%, 光州 95.18%, 全北 91.59% 얻었으며 서울 51.30% 等을 얻어 地域構圖를 어느 程度 깼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嶺南과 湖南의 得票率이 큰 差異가 있어 地域構圖의 完全한 淸算은 아니다.

以後 새로 創黨된 열린우리당 이 與黨이 되어 全國政黨을 標榜하면서 地域主義 打破를 외쳤다.

地方 分權 [ 編輯 ]

노무현 政權의 國政 核心 課題 中 하나로 國家 均衡 發展을 위해서 地方 分權의 政策을 施行하였다. 參與 政府는 首都圈 集中에 따른 弊害를 막기 위해선 國家均衡發展을 追求해야 한다고 主張하였고 그동안의 國家均衡發展 計劃이 首都圈 集中을 막을 수 없다고 判斷하여 中央 政府를 地方으로 移轉하는 計劃을 樹立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國家均衡發展特別法 , 新行政首都建設特別法 , 地方分權特別法 으로 國土均衡發展 3代 特別法을 制定하였다. 이 外에도 여러 公共機關의 地方 移轉에 따른 革新都市 計劃을 樹立하였다.

新行政首都(世宗特別自治市) 移轉 [ 編輯 ]

新行政首都建設特別法 制定으로 執權 初期에 施行한 것이 新行政首都 移轉 計劃이었으나 憲法裁判所의 違憲 決定에 依해 首都移轉은 不可能하게 되었다. 그 後 新行政首都 移轉 計劃은 修正되어 行政中心複合都市建設特別法 으로 修正되어 世宗特別自治市 建設로 이어지게 된다.

經濟自由區域 [ 編輯 ]

첫 番째로 指定된 仁川經濟自由區域 의 業務를 總括 擔當할 經濟自由區域靑 이 出帆했다. 이로써 '東北亞 비즈니스 中心國家 實現'을 위한 本格的인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 밖에는 仁川 松島新都市 永宗島 , 청라地區 經濟自由區域으로 開發하는 計劃等이 있다. 外國人 投資活性化를 위해 經濟自由區域內에서는 各種 稅金을 減免한다. 仁川空港 松島新都市 를 잇는 連陸橋와 首都圈 南部地域과 永宗島 를 連結하는 仁川大橋 , 第3 京仁高速道路 가 着工했다. [14]

革新都市 [ 編輯 ]

革新都市는 行政中心複合都市 事業과 連繫하여 노무현政府가 推進한 地方 均衡發展事業으로 公共機關 地方移轉과 산·학·연·관이 서로 協力하여 地域의 成長據點地域에 造成되는 未來形 都市이다. 革新都市는 모두 4가지 類型으로 建設되며 各各 地域의 市道別 地域産業과 都市別 테마를 設定하여, 地域別로 特色있는 都市로 開發된다.

4大 改革立法 [ 編輯 ]

彈劾 逆風 속에서 院內 過半數를 達成한 열린우리당은 2004年 17代 國會 첫 定期會議에서 國家保安法, 私立學校法, 過去事眞相糾明法, 言論關係法의 4個 法案을 改革 對象으로 指目하였다. 이러한 '4大 改革立法' 論難으로 與野는 2004年 첫 國會부터 跛行을 거듭했다. 한나라黨 은 이를 '4代 國論 分裂法'으로 規定하고 激烈하게 抵抗했다. 結果的으로 4大 改革 立法은 與野間에 適當히 妥協되어 '누더기 法'으로 轉落했다. [15]

經濟 [ 編輯 ]

參與政府의 經濟 政策은 韓國 內의 補修, 進步 兩側으로부터 相反된 評價를 받고 있다. 保守 陣營은 그의 經濟 政策이 '反市場注意'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는 反企業 情緖로 이어지고 投資를 위축시켜 結局 景氣 沈滯로 이어진다고 非難한다. 反面, 進步 陣營은 盧武鉉 大統領은 新自由主義者 로 친 企業的, 半 勞動者的 經濟政策을 推進하고 있다고 非難한다. [16] 親勞動者的이라는 指摘에 對하여 盧武鉉 大統領 本人은 靑瓦臺에서 열린 財閥 總帥와의 會同에서, "參與政府의 經濟政策을 親勞動者 政策이라고 말하면 勞動者들이 화낸다"면서 "제가 全經聯에 立會도 안했지만, 全經聯 會員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라고 言及한 적이 있다. [17]

盧武鉉 大統領의 經濟 政策은 相反된 評價를 받고 있다. 于先 實質的인 成果가 거의 없었다는 쪽이다. 不動産 對策의 境遇는 數次例의 對策에도 不拘하고 暴騰을 막지 못했으며, 體感 經濟 指數는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純債權國이 되었으나 開放을 擴大한 餘波로 企業 投資가 萎縮되어 成長 潛在力이 減少했다는 評價 [18] 도 있다.

그러나 肯定的인 面 또한 存在한다. 不動産 對策으로 因해 投機 心理가 萎縮되면서 市中의 投機資金들이 大部分 株式 市場으로 몰렸고, 이는 綜合株價指數 코스닥 指數의 暴騰으로 直結되어 企業의 資金 運用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또한 貿易收支 및 經常收支 部門에서 김대중 政權 때부터 黑字를 記錄한 것을 5年 連續 이어갔고(경상수지 年平均 132億7千300萬 달러 黑字), [18] 輸出 實績도 歷代 政權 中에 最高이다. 그리고 換率의 影響이 있었지만 1人當 國內 總生産이 2萬 달러臺를 突破하였다. 그리고 國民의 政府에서 純債務國에서 純債權國으로 돌아선 以來 亦是 5年 동안 純債權國이 되었다. [18]

그밖에 社會 여러 分野에 미치는 莫大한 影響으로 贊反이 尖銳하게 對立하는 等 國內外 論難이 많았지만, 아시아에서 最初로 美國 과 歷代 最大規模의 自由貿易協定 을 締結하였다.

經濟 成長率 [ 編輯 ]

2004年 4.7%, 2005年 4.0% 等 任期동안 平均 成長率은 4.3%였다. 盧武鉉 大統領이 候補 時節 公約으로 提示했던 '任期 中 7% 成長'엔 못 미쳤다. 같은 期間 世界 平均 經濟 成長率 4.8%보다 낮았으나, [19] 參與政府는 ' OECD 國家들 中 最高 水準의 成長率을 記錄했다'고 밝혔다. 實際로 OECD 平均 成長率과 比較해볼 境遇 參與政府의 經濟 成長率은 OECD 平均 成長率보다 뒤진 적이 한番도 없다. [20] 參與政府는 '베트남 等 後進國들은 우리나라가 70~80年代 높은 成長率을 記錄했던 것처럼 只今 比較하는 것은 適切하지 않다'고 主張했다. 이에 全國經濟人聯合會 는 "2003∼2006年 아시아 主要 競爭國인 홍콩(6.5%), 싱가포르(6.4%), 中華民國(4.5%)에 비해 韓國은 年平均 4.2% 成長하는 데 그쳤다"라고 批判하기도 했다. 이어 "海外 事例와 比較해도 1人當 國內總生産(GDP)李 1萬8000달러 水準인 韓國에서 成長率 5%를 '넘을 수 없는 魔의 5% 壁'이라고 主張하는 政府 態度는 納得하기 어렵다"라고 批判했다. [21]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韓國이 中華民國의 1人當 GDP를 넘어선 것은 參與政府 時節이었다. 反面, 參與政府 時節 國民所得 水準은 史上 最高値를 記錄하기도 했다. 換率 900~1000원에 이르는 低換率로 인해 相對的으로 海外 物價가 低廉해지고, 國民所得이 높아지면서 2萬달러를 達成했다. [22]

實質 國內 總生産(固定 加重法 2005年 基準年 變更 適用, 韓國銀行)
鳶島 2003 2004 2005 2006 2007
實質國內總生産(%) 2.8 4.6 4.0 5.2 5.1

世界化 政策 [ 編輯 ]

支持勢力과 葛藤을 겪으면서 妥結한 韓美 FTA 가 成功的이라는 評價가 있다. 美國 外에도 유럽聯合(EU), 캐나다 等과 同時多發的 FTA를 推進하는 等 積極的인 開放政策을 통해 10年 後를 對備했다는 評價다. 妥結은 했지만 國會 批准을 받지 못해 未完의 成功으로 남겨 놓은 點은 限界로 指摘된다. [23] 2005年 ' APEC 頂上會議'에서 ' 釜山로드맵 (Busan Roadmap)'李 合意되었다.

不動産 對策 [ 編輯 ]

不動産 對策에 政權의 命運을 걸겠다고 公言하며 就任 初부터 不動産 對策을 내놓았다.

參與政府는 不動産 投機를 잡기 爲해 '半 市場的'이라는 非難을 甘受해가면서 無數한 對策을 쏟아냈지만 不動産 價格安定化政策은 失敗했다는 評價가 있다. 하지만 參與政府 때 만든 LTV DTI 等 金融 手段을 動員한 不動産 規制策은 逆說的으로 以後의 美國發 글로벌 經濟危機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不實 事態와 같은 危機를 對備하는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는 評價가 있다.또한 그 效果로 地域間 經濟力 隔差로 인한 問題가 相當 部分 解消되는 效果도 보였다. [23]

하지만 反論도 만만치 않다. 建設景氣 活性化와 不動産값 安定을 놓고 政策 混線이 빚어지면서 投機 現象이 빚어졌다는 主張도 있으며, [24] 黔丹 坡州의 新都市建設 같은 住宅供給 計劃에 對해서 김영봉 敎授는 韓國經濟에글을 寄稿하면서 이로 因해 江南 집값을 오히려 올릴 것이라고 指摘하기도 했다. [25] 李在雄 敎授는 서울經濟에 寄稿한 글에서 不動産 投機를 잡겠다는 參與政府가 오히려 組織的이고 大規模로 不動産 投機에 불을 질러서 집값이 暴騰함으로써 집 한 채를 갖고 있는 平凡한 俸給生活者나 집 한 채 뿐인 隱退한 高齡者들에도 無差別的으로 重課세하게 되었고, 이러한 納稅者들의 苦衷과 不滿을 노무현 政府는 無條件 '反社會的 行爲'로 賣渡했다고 批判했다. 또한 그는 價格은 市場에서 決定하는 것인데 參與政府는 無理하게 價格을 統制하였고 參與政府가 推進한 아파트 分讓價 上限制, 原價公開 等은 市場經濟 原理를 無視하는 措置라고 主張했다. [26]

敎育, 文化 [ 編輯 ]

參與政府는 大統領 直屬 諮問機構로서 敎育革新委員會 를 設置하였고, 公敎育 正常化, 수월性 確保, 敎育隔差 緩和, 職業敎育과 人的資源開發의 國際化 等을 推進하였다. BK事業 , 로스쿨 , 醫學專門大學院 轉換, 누리事業 , 內申等級第 , 水準別 移動授業, 敎員評價第, 敎育監 直選制, 開放型 里社制 等을 施行하였고, 本考査·寄與入學·高校等級制를 禁止하는 三不政策을 固守하는 等 ' 國民의 政府 '의 政策 基調를 이어나갔으나, 學閥과 試驗, 競爭을 重視하는 敎育의 弊害는 改善하지 못했다. [27] 參與政府 期間 동안 家庭에서 支出되는 私敎育費는 急激히 增加하였다. [28] [29] 實業界特別銓衡, EBSi 가 開設되었다.

2004年 10月, 開放型理事制를 包含한 '私立學校法 改正案'이 提出되었다. 이는 與野間에 重大한 對立을 가져왔다. 2005年 12月, 열린우리당은 私立學校法案을 强行 處理하였다. 한나라당은 이에 强力히 反撥하였다. 이로 인하여 國會가 空轉되었으며, 結局 2006年 法案 再改正에 合意하였고, 2007年 開放型理事를 縮小하는 內容을 骨子로 하는 私立學校法 改正案이 通過되었다.

2007年 國旗에 對한 盟誓 門이 修正되었다.

科學 [ 編輯 ]

2004年 大韓民國 最高科學技術人賞을 황우석 서울大 獸醫學科 敎授와 윤덕용 韓國科學技術院 新素材工學科가 夕座敎授가 받는다. [30] 그런데 問題가 생기고 서울大 는 황우석 敎授의 敎授職 解任을 2006年 3月에 決定한다. [31]

社會, 福祉, 女性 [ 編輯 ]

'參與福祉'라는 政策基調를 통해서 國民모두가 參與할 수 있는 福祉政策을 標榜하였다.

獨立運動家 徐薰 [ 編輯 ]

2005年 8月 3日 國家報勳處는 光復 60周年을 맞아 社會主義 系列 獨立運動家 47名을 包含한 214名의 殉國先烈과 愛國志士에게 敍勳이 追敍되었다. 지난 3.1節 呂運亨 先生 等 54名의 社會主義 系列 獨立鬪士 徐薰에 이어 主要한 社會主義 活動家들에 對해 再照明해 뒤늦게 敍勳이 追敍되었다. 하지만 保守派들의 反對와 勳格論難이 일기도 했다. [32]

非正規職 保護法 [ 編輯 ]

非正規職 保護法은 期間制 및 短時間勤勞者 保護 等에 關한 法律, 派遣勤勞者保護 等에 關한 法律, 勞動委員會法 等 非正規職保護 關聯 法律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簡單히 非正規職法이라고도 한다. 2006年 11月 30日 國會에서 通過되어 2007年 7月 1日부터 300人 以上 事業場에 適用되었다. 2008年 7月에는 100인 以上 事業場, 2009年 7月 1日에는 5人 以上 事業場으로 施行 範圍가 擴大되었다.

2006年 法案이 通過된 뒤 非正規職 의 量産을 憂慮하는 民主勞總 , 全國非正規勞組連帶會議 , 進步的인 政治勢力, 知識인 層으로부터 强한 反撥을 샀다. 이들은 該當 法案이 '非正規改惡案'이라고 主張하였고 一部 勞動市民社會團體들은 盧武鉉 大統領의 退陣을 要求했다. [33] 財界 도 100萬 解雇 대란이란 憂慮까지 提起하며 非正規職 保護法 改正을 要求했으나, [34] 解雇 大亂은 없었으며 2010年 4月 基準으로 勤續年收 2年이 到來한 非正規職 가운데 84%가 事實上 正規職으로 身分이 바뀌었다. [35]

性賣買 特別法 [ 編輯 ]

第16代 國會는 2004年 5月, 大韓民國의 性賣買 를 根絶하기 위해 旣存의 淪落行爲 等 防止法 을 改善하여 '性賣買斡旋 等 行爲의 處罰에 關한 法律'과 '性賣買 防止 및 被害者 保護 等에 關한 法律'(一名 '性賣買 特別法')을 制定하였다. 淪落防止法에 비해 性賣買特別法은 '淪落'이라는 單語 代身 '性賣買'라는 單語를 통해 性賣買 行爲를 倫理的 觀點이 아닌 性이 돈으로 去來되는 自體에 注目하고자 했다. 또한 旣存 淪落防止法에서는 淪落業에 從事하는 女性들에게도 責任을 물었지만, 性賣買特別法에서는 그런 內容이 大幅 사라졌다. 性賣買가 不法이라는 認識下에, 性賣買 斡旋者와 買收者가 모두 處罰되었다.

性賣買特別法이 施行된 以後, 미아리 텍사스 , 청량리 588 과 같은 性賣買 密集地域에 對한 團束이 强化되었다. 그 結果, 性賣買 集結地는 줄어들었으나 다른 業所로 僞裝하거나 인터넷을 利用한 變種 性賣買가 流行하게 되었다. [36]

한총련 合法化 推進 [ 編輯 ]

노무현은 利敵團體로 規定돼 있는 한총련問題에 對해 時代의 變化에 맞지 않는다는 表現으로 한총련 手配解除 等 合法化 意志를 밝혔다. [37] 그러나 檢察은 이러한 要求를 拒否했다. [38] 特히 송광수 檢察總長은 한총련은 合法團體가 아니라는 立場을 밝혔다. [39] 政府는 이에 한총련의 合法化 및 手配學生의 一括 手配解除 等乙肯定 檢討했고 한총련 關係者들을 大擧 赦免措置했다. [40] 이러한 措置에 對해 野黨들은 檢事가 起訴하고 法院이 判斷하는 問題를 大統領이 介入하는 것은 不適切하며 政府가 法과 原則을 無視하고 한총련 手配者들을 特使할 境遇 利敵團體 英雄詩로 國紀 自體가 흔들릴 可能性을 排除할 수 없다. 는 反應을 보였다. [41] 한총련 合法化에 反對하는 輿論이 69%에 達했다. [42] 한총련은 以後 美軍基地에 進入하거나 5.18記念行事를 妨害하는 奇襲示威를 여는 等의 不法示威를 잇달아 開催하며 合法化를 要求했다. [43] [44] 이러한 事態는 政府의 한총련에 對한 오락가락 政策, 寬容, 龍仁 方針때문이라는 批判이 提起되었다. 與黨內에서도 反對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45] 그러나 政府는 한총련 合法化 方針에는 變함이 없다고 밝혔고 [46] 이러한 論難 가운데 結局 政府는 한총련 加入 學生들에 對해 手配解除 措置를 내렸다. [47]

戶主制 廢止 [ 編輯 ]

戶主制 는 憲法裁判所의 憲法不合致 決定과 2005年 3月의 法律 改正에 따라 盧武鉉 大統領 執權 마지막 해인 2008年 1月 1日 새해에 廢止되었다. 2008年 以後 個人의 家族關係는 家族關係登錄法이 施行되어 價(家)가 아닌 個人을 基準으로 家族 關係 登錄簿에 作成되고 있다.

國民參與裁判 [ 編輯 ]

國民의 司法不信을 解消하려면 結局 裁判過程에 國民들이 監視者로 參與해야 한다는 것이 參與政府의 新潮로써, 學界에서도 陪審制度를 하면 判事들의 獨斷을 막을 수 있다는 意見이 提示돼 國民參與裁判制度 가 採擇했다. [48]

IT事業 開發 [ 編輯 ]

政府의 IT839 戰略 에 따라 와이브로 , DMB 等 獨自技術이 開發되었다.

電子政府 構築 [ 編輯 ]

參與政府는 國家政策決定過程에 國民들의 參與를 擴大시키기 위해 電子政府 로드맵의 核心課題로 '온라인 國民參與 擴大'를 選定했다. 2004年 9月 온라인 國民參與포털 構築을 위한 BPR (業務프로세스재설계), ISP (情報化戰略計劃)를 施行했다. 이를 통해 苦衷民願, 國民提案, 政策參與 等 3個 分野 온라인化 方案을 導出하고, 段階別 시스템 構築을 위한 中長期 履行計劃을 마련했다. '온라인 國民參與 擴大課題'를 遂行함에 따라 時間과 場所의 制約 없이 參與마당 申聞鼓 를 통해 모든 行政機關에 對한 民願과 國民提案 等을 할 수 있는 對政府 接近性이 높아졌다. 또한 모든 處理過程을 인터넷과, 이메일, 携帶폰 短文메시지서비스를 통해 實時間으로 案內, 對國民 信賴度가 向上됐다는 評價가 있다. 이와 함께 同一事案의 頻發民願에 對한 識別이 可能해지고, 民願과 國民提案을 統合的으로 管理ㆍ審査할 수 있어 制度改善이 活性化되는 等 旣存 政策의 잘못된 部分을 改善하는 效果를 낳았다. 이를 基盤으로 새로운 政策을 立案함으로써 民願을 根源的으로 解消할 수 있는 土臺를 마련했다. 아울러 中央, 地方, 公共機關間 온라인으로 民願移送·移牒 等을 함으로써 民願處理 期間을 大幅 短縮하고, 人件費ㆍ郵便料 等 豫算을 切感하며 業務生産性을 向上하는 效果도 거뒀다. 政府에 따르면 民願人 滿足度는 지난 2005年 30%에서 2007年 1分期 52.2%로 向上됐다. 여러 機關이 同時 處理해야 하는 複合民願 處理時間은 2004年 44日에서 2006年 15.1日로 短縮됐다. 온라인 民願移送 件數는 2005年 1萬139件에서 2006年 4萬5117件으로 增加했다. 參與마당申聞鼓는 2006年 프랑스 에서 열린 '第 7回 世界電子政府포럼' 電子民主主義 分野에서 6位로 選定되는 等 國內外에서 높은 評價를 받고 있다. 甚至於 初等學校 4學年 敎科書에 電子民主主義 窓口로 收錄돼 '現代版 申聞鼓'로 敎育되고 있다. [49]

'디지털 本會議場 構築 事業'을 통해 國會 本會議場을 '디지털化' 시켰고, e支援을 導入했다. [50] 施行豫定이던 次世代 電子政府 事業, u시티, RFID 擴散事業이 李明博 政府 들어서는 中斷되었다. [51]

  • 出入國審査서비스(KISS), 나라場터, 革新指數(GII): UN PSA 受賞
  • 情報化마을: 世界電子政府 포럼上 受賞
  • 郵便物類 서비스: World Mail Awards 受賞
  • 홈택스, 電子通關, 參與마당 申聞鼓, 電子貿易 等: 國際優秀事例 選定
  • SPI-1357, 國際特許出願시스템, 原子力災難管理 等: 國際標準으로 採擇 [52]

取材 支援 시스템 先進化 方案 [ 編輯 ]

取材 支援 시스템 先進化 方案은 2007年 合同 브리핑 센터 運營과 電子 브리핑 시스템 導入을 主要 內容으로 하는 參與政府의 對言論 政策이다.

環境 [ 編輯 ]

公論化를 거치지 않은 參與政府의 政策 推進(管理地域內의 工場設立面積 廢止, 首都圈內 工場 新·增設 許容, 全國 골프場 230個 建設 및 大幅的인 規制 緩和, 企業都市 特別法 制定 推進, 經由商用車 排出가스 基準 猶豫措置 等)에 反撥한 環境團體들이 2004年 11月 10日 '環境非常時局'을 宣言하고, 새萬金 , 核廢棄場, 천성산 · 금성산 貫通 高速鐵道, 경인운하 , 大型댐 建設 等의 大型國策事業의 再檢討를 要請하였다. [53] [54] 2006年 2月에 민·관 環境政策協議會가 構成되었다.

改閣 [ 編輯 ]

參與政府 第1期 內閣(彫刻) [ 編輯 ]

2003年 2月 國務總理에 櫜鞬 前 서울市長을, 經濟部總理 에 김진표 前 經濟首席을 內定하는 等 조각을 完了했다.

KBS 라디오 《 國民과 함께 國軍과 함께 》에서 '軍服입은 民主 市民(citizen in uniform)'이라는 表現을 使用하였다.

보각 [ 編輯 ]

2003年 7月 16日 大韓民國과 칠레와의 自由貿易協定 締結에 責任을 지고 金泳鎭 農林部 長官이 辭退하였고, 後任에 虛像만 敎授가 內定되었다.

2003年 9月 27日 國會가 解任 建議案을 議決함에 따라, 金斗官 行政自治部 長官이 辭退하였다. 後任에 허성관 海洋水産部 長官 移動하였고, 海洋水産部 長官 에는 최낙정 次官이 任命되었다.

2003年 10月 18日 최낙정 海洋水産部 長官이 刺戟的인 發言 論難으로 更迭되었다.

2003年 12月 17日 윤진식 産業資源部 長官이 扶安 事態에 對해 責任을 지고 辭退하였다.

參與政府 第2期 內閣(第1次 改閣) [ 編輯 ]

2003年 12月 23日 윤덕홍 敎育部 長官이 辭退하였고, 後任에 안병영 이 內定되었다.

2003年 12月 28日 科學技術部 , 勞動部 等 3個 部處의 長官이 交替되었다.

보각 [ 編輯 ]

2004年 1月 15日 윤영관 外交部 長官을 更迭하였다. 後任에 반기문 이 任命되었다.

參與政府 第3期 內閣(第2次 改閣) [ 編輯 ]

2月 10日, 17代 總選에 出馬할 長官을 差出하기 위하여, 經濟部總理 를 包含해 6個 部處의 長官을 交替하였다.

櫜鞬 權限代行 體制 [ 編輯 ]

盧武鉉 大統領 彈劾 訴追 로 權限이 停止되면서 櫜鞬 國務總理가 大統領 權限代行을 맡게 되었다. 內閣構成權이 없다는 判斷下에 內閣은 그대로 維持되었다.

參與政府 第4期 內閣(權限停止 終了) [ 編輯 ]

2004年 5月 14日 彈劾 訴追로 停止된 權限이 復歸되었다.

總理人選 [ 編輯 ]

2004年 6月 櫜鞬 國務總理의 辭表를 受理하고, 後任에 李海瓚 열린우리당 議員을 內定하였다.

參與政府 第5期 內閣(第3次 改閣) [ 編輯 ]

2004年 6月 30日 統一部 長官에 鄭東泳을 임명하는 等 3部 長官의 改閣을 斷行했다.

보각 [ 編輯 ]

7月 28日 조영길 國防部 長官, 강금실 法務部 長官을 更迭하였다.

參與政府 第6期 內閣(第4次 改閣) [ 編輯 ]

2005年 1月 4日 敎育部 長官 에 이기준 前 서울대 總長을 內定하는 等 6個 部處의 長官을 更迭하는 中幅 改閣이 斷行되었다.

보각 [ 編輯 ]

1月 7日 이기준 長官이 各種 疑惑으로 인하여 電擊 辭退하였다. 1月 10日 後任에 金振杓 가 內定되었다.

3月 7日 이헌재 副總理가 更迭되었다. 後任에 한덕수 가 內定되었다.

7月 26日 金昇圭 法務部 長官을 國家情報院長으로 移動 配置하고, 後任에 千正培 를 임명하였다.

參與政府 第7期 內閣(第5次 改閣) [ 編輯 ]

2006年 1月 2日 鄭東泳 , 김근태 議員의 黨 復歸에 따라, 統一部 等 4個 部處의 長官을 交替하였다.

1月 4日 열린우리당 一角의 反對에도 不拘하고 김근태 長官의 後任으로 柳時敏 議員을 保健福祉部 長官으로 內定하였다.

參與政府 第8期 內閣(第6次 改閣) [ 編輯 ]

3月 2日 地方選擧 出馬者 差出을 위해 行政自治部 , 海洋水産部 等 4個 部處의 長官을 交替하였다.

總理 人選 [ 編輯 ]

3月 7日 李海瓚 國務總理가 3.1節 골프 波紋으로 更迭되었다. 後任에 韓明淑 이 內定되었다.

보각 [ 編輯 ]

3月 地方選擧 出馬者 差出을 위해 環境部 長官을 交替하였다.

參與政府 第9期 內閣(第7次 改閣) [ 編輯 ]

7月 3日 經濟部總理 , 敎育部 長官 等 3個 部處의 長官을 交替하였다.

보각 [ 編輯 ]

7月 千正培 法務部 長官이 辭退하였고, 後任에 金聖灝 가 內定되었다. 7月 金秉準 敎育部總理 가 國會 人事聽聞會 過程에서의 論文 剽竊 疑惑提起로 인하여 辭退하였다.

8月 10日 김신일 이 後任 敎育部總理로 任命되었다.

11月 반기문 外交部 長官이 UN 事務總長에 選出됨에 따라, 後任에 송민순 이 內定되었다.

參與政府 第10期 內閣(第8次 改閣) [ 編輯 ]

11月 2日 統一部 長官 國防部 長官 等 3個 部處 長官이 更迭되었다.

보각 [ 編輯 ]

11月 15日 추병직 建設部 長官이 不動産 價格 暴增에 제대로 對應하지 못한 責任을 물어 更迭되었고, 後任에 李庸燮 行自部 長官이 移動 配置되었고, 行自部 長官에는 朴明在 가 內定되었다.

12月 丁世均 産業資源部 長官이 交替되었다.

參與政府 第11期 內閣(第9次 改閣) [ 編輯 ]

2007年 4月 19日 文化관광부 , 海洋水産部 等 4個 部處 長官이 更迭되었다.

參與政府 第12期 內閣(第10次 改閣) [ 編輯 ]

2007年 8月 8日 環境部 , 情報通信部 , 法務部 等 長官級 7名이 交替되었다.

批判과 論難 [ 編輯 ]

政派들의 批判 [ 編輯 ]

2006年 10月 1日 강원용 은 保守 日刊紙인 朝鮮日報 와의 인터뷰에서 盧武鉉 政府의 意思疏通 不足과 獨善的인 것을 들어 批判을 加하였다. 朝鮮日報 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386世代니, 뭐니 해가지고 國民의 一部 몇 사람이 밀고 나가지, 廣範圍한 國民 參與의 길을 열어주고 있지 않다'고 하였고 盧武鉉 政府에 助言하는 市民團體가 있지 않느냐는 記者의 質問에 參與 對象에 對해 "노사모라든지 386世代라든지 요런 사람이 中心이 된 것 뿐"이라며 노사모 와 386側近 等參與 對象의 狹小함을 指摘하였다. [55] 盧武鉉 政權의 經濟政策에 對해서는 '南美(南美) 같은 失敗로 갈까 걱정이다'고 批判하였고, 言論 政策에 對해서는 政府에 批判的인 言論에 對해 그렇게 자꾸 敵對視해서 어떻게 自由民主主義를 하겠다는 것인가며 批判을 提起하였다. [55] 이처럼 한나라黨 을 爲始한 保守 勢力들은 參與政府가 推進하는 綜不稅法을 '稅金爆彈'으로 規定하여 反撥하기도 했으며, 韓美FTA 를 제대로 推進하지 못한 點과 4大 改革 立法 을 批判한다. 反對로, 민주노동당 進步 勢力들은 이라크 戰爭 派兵, 韓美FTA 推進, 흐지부지한 4大 改革 立法 等을 批判하였다.

勞動者 彈壓 [ 編輯 ]

한便 勞動運動 界에서는 參與政府에서 拘束되거나 犧牲당한 勞動者 數가 文民政府 의 두 배라며 批判하였다. [56]

一部 勞動團體는 노무현 政權에게 人權을 유린당했다고 主張하였으며 20餘名의 拘束勞動者가 無期限 斷食籠城에 突入한 일도 있었다. 斷食籠城에 參與한 拘束勞動者들은 하중근 死亡事件 關聯 싸움을 進行했던 浦項建設勞組의 9名, 타워크레인 勞動者 5名, 뉴코아-이랜드 關聯 2名, 非正規職 撤廢와 韓美FTA反對 集會에서 連行 拘束된 3名, 勞使關係로드맵 野合에 反對하며 韓國勞總 占據籠城을 進行한 2名의 勞動者 等이다. [56] 言論에서는 이렇게 많은 數가 監獄에서 斷食籠城에 突入한 것은 獨裁打倒를 외치던 80年代 以後 처음이라는 主張도 나왔다. [56]

斷食籠城 參與者들은 한 목소리로 " 盧武鉉 政權에게 人權을 유린당했다"라고 主張하였다. [56] 이들은 現在 原州矯導所에 收監 中인 邊外性 前 全國解雇者鬪爭委員會 執行委員長이 代表로 쓴 獄中鬪爭委員會 對政府 鬪爭 宣言文을 통해 “노무현 政權은 不當하게 自由를 빼앗긴 拘束勞動者, 良心囚들의 卽刻的인 釋放, 赦免이라는 正義롭고 民主的인 決斷을 내릴 것”을 促求하며, “韓美FTA 反對鬪爭, 뉴코아-이랜드 鬪爭, 非正規職 鬪爭, 浦項建設勞組 鬪爭 等으로 많은 勞動者들이 懲役을 살고 있다”라며 “이는 中世時代의 宗敎裁判, 魔女裁判의 復活이다”라고 指摘했다. [56]

2007年 12月 3日 民主勞總 , 全國非正規勞組連帶會議 , 민주노동당 等은 靑瓦臺 앞 記者會見에서 '노무현 政權과 司法府의 法執行은 한마디로 엿장수 마음대로다'며 '罷業, 集會 等 勞動者 民衆의 基本權 行事에 對해서는 '合法保障, 不法必罰'이라는 엉터리 原則에 따라 處罰할 口實을 억지로 만들어 내기까지 하면서 정작 大多數 國民의 指彈을 받아 온 財閥 總帥, 高位官僚 等 特權層의 國紀紊亂 犯罪行爲에 對해서는 法이 있어도 處罰하지 않은 채 寬容으로 一貫해 왔다'고 糾彈하였다. [56]

한便, 言論誌 참世上 의 調査에 依하면 拘束勞動者後援會가 集計한 2007年 11月 30日 當時 拘束勞動者는 總計 62名으로 集計하였으며 盧武鉉 政權에만 1千 37名의 勞動者가 拘束된 바 있다고 主張했다. [56] 그 中 2007年 11月에만 17名이 拘束되었다. 이는 文民政府가 들어섰다는 김영삼 政權 때 632名보다 두 倍에 가까운 數다. 拘束勞動者들은 그外에 "强制 拘禁당한 移住勞動者의 數는 너무 많아서 集計가 不可能할 程度"라고 主張하기도 했다. [56]

政策報道 모니터링 시스템의 檢閱 論難 [ 編輯 ]

2005年 4月 27日 國政弘報處는 政策 報道에 對한 言論報道를 健全批判, 政策參考報道, 誤報, 問題性 報道 等 4가지로 分類해 中央部處 全 公務員인 閱覽토록 하는 온라인 政策報道 모니터링 시스템을 公開했다. 當時 모니터링 中인 對象 言論은 國內 79個 印刷媒體와 20個 電波媒體, 33個 인터넷 媒體였다.

2005年 4月 28日 한나라당 송영선議員은 國政弘報處의 政策報道 모니터링制에 對해 "政府 記號와 입맛에 맞는지 與否가 생생하게 判別될 수 있어 政府로선 뿌듯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온라인 記錄으로 남겨두고 있기 때문에 두고두고 確認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記者가 어떤 記事로 政府 立場에 對해 어떤 見解를 나타냈는지를"라고 批判했다. [57]

인터넷 實名制 導入 論難 [ 編輯 ]

參與 政府와 열린우리당 한나라黨 과 함께 인터넷 實名制 를 推進하였다. [58] 이로 인하여 16個 인터넷言論社와 市民社會團體들은 2007年 에 '인터넷選擧實名制廢止共同對策委'를 構成하였다.

이들은 인터넷實名制를 "選擧時期 實名制는 政府가 社會構成員의 政治的 意思表現을 一一이 監視하는 反民主的인 制度이며, 憲法에서 保障하는 表現의 自由와 通信祕密의 自由 그리고 프라이버시 等 情報人權을 深刻하게 侵害하는 惡法"이라고 主張하며 政府를 批判하였다. [59]

民間人 査察 論難 [ 編輯 ]

次的 照會 [ 編輯 ]

國務總理室 公職服務管理官室 2004年 6月부터 警察廳으로부터 次的 照會 端末機를 들여와 6年間 公務員과 民間人에 對해 次的 照會를 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노무현 政府 時節 固有의 公職者 監察業務를 뛰어넘어 厖大한 懸案調査 活動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調査審議官실은 摘發 實績을 늘리기 위해 公務員들에게 點數까지 매겨놓았다. '政府合同點檢班 監察要員 實績評價 基準 改善'이란 文件에 따르면 現場 摘發 및 非理諜報 對象의 境遇 6級 公務員 以下 1點, 5~4級 公務員 2點, 3級 公務員 以上 3點이며, 摘發金額은 100萬원 未滿 1點, 100萬~1000萬원 2點, 1000萬원 以上 3點 等이었다. [60]

盧會燦 議員의 主張 [ 編輯 ]

2005年 盧會燦 議員은 "國精院이 왜 현대자동차 勞動組合의 候補를 擧論하고, 왜 映畫인 協會 會長에 介入하는가"라고 말했다. '國精院의 國內 政治 査察이 問題이고, 이는 노무현 政府에서도 繼續되고 있다'고 指摘했다. 盧武鉉 大統領이 新任 國精院長에게 '土着非理에 國精院이 關心을 가지라'고 한 言及을 例로 들었다. [61]

査察文件 暴露 波紋 [ 編輯 ]

2012年 3月 30日 KBS 새勞組 는 인터넷 放送 리셋 KBS 뉴스9 에서 李明博 政府 國務總理室 公職倫理支援官室의 伺察 文件 2619件을 公開했다. 警察廳에서 總理室 公職倫理支援官室으로 派遣나온 金起炫이 保管하던 USB 5個에 들어있던 파일들이다. 최금락 大統領弘報首席祕書官은 다음날 記者會見을 열어 "80%에 該當되는 2200餘 件은 노무현 政府가 만든 것"이라고 反駁했다. [62] 이를 根據로 靑瓦臺 參與 政府 時節에도 民間人 査察이 이루어졌다고 主張했다. [63]

總理室 公職倫理支援官室 職員 金起炫의 USB 中 靑瓦臺가 "노무현 政府의 査察 資料 80%"라고 主張한 文件들은 파일 數가 가장 많았다. 하지만 이 文件은 參與 政府 時節에 警察에서 作成한 全國公務員勞組 公務員年金法 改惡鬪爭 動向, 貨物連帶 全國巡廻 宣傳戰 動向, 警察 內部 動向 等을 包含해 警察의 監察 職務와 보고 作成 要領에 對한 것이나 現職 警察官의 非理 事實 報告書가 大部分이었다. [64] 하지만 現 政府가 들어선 以後 만들어진 파일이 담긴 USB에는 民間人 不法査察로 드러나 刑事處罰로 이어진 김종익 KB 한마음 代表 關聯 資料를 비롯한 南景弼 議員, 박찬숙 前 議員, 金裕貞 議員에 對한 査察 資料가 있다. [65]

이명박 候補 關聯 論難 [ 編輯 ]

2007年 國精院 職員 한 名이 第17代 大統領 候補였던 李明博 의 親姻戚과 家族들의 뒷調査를 進行한 事實이 있었다. 2009年 7月 檢察은 2007年 大選을 앞두고 한나라당 大選 候補였던 李明博을 國家情報院 職員이 뒷調査했던 '李明博 X파일 疑惑 事件'에 對해 檢察이 國精院 職員의 單獨 犯行으로 結論내렸다. 檢察은 情報 蒐集이 組織的으로 이뤄졌는지 確認하기 위해 國精院 次長 等 幹部들을 불러 調査했으나 高氏가 上部 指示 없이 單獨으로 犯行한 것으로 調査됐다고 밝혔다. [66] 2011年 7月 서울중앙지법은 高氏에게 懲役 1年에 執行猶豫 2年을 宣告했다. 該當 職員은 上部에 報告를 하고 情報蒐集活動을 始作했다고 主張했으나, 上級者인 姜某 課長은 "이같은 內容을 지나가는 말套로 들었고, 絶對 無理해서 搜査하지 말라고 當付까지 했다"며 "政治的으로 敏感한 事案은 上級者에게 반드시 報告하라고 했지만 以後 高氏로부터 아무런 報告도 받지 못해 情報蒐集活動을 그만둔 것으로 생각했다"고 證言했다. 2011年 4月 大法院 은 參與政府나 國精院과 關聯없는 該當 職員의 單獨 犯行이라고 判決했다. [67]

法務部 長官의 搜査指揮權 發動과 靑瓦臺의 反應 [ 編輯 ]

公安事件에 對해 建國 後 첫 搜査指揮權을 發動해 檢察 獨立性 毁損 論難이 일었다. 6.25는 北韓의 統一戰爭이라고 發言한 강정구에 對해 檢察이 拘束令狀을 申請하자 千正培 法務部長官은 不拘束 指揮權을 發動했다. 檢察內部에서는 一線 檢察의 뜻을 無視하고 特定政黨의 意見을 反映했다며 좋지 못한 先例를 남겼다고 反撥했다. 한나라당은 "千 長官의 指揮權 發動은 憲政史上 初有의 일로 누구보다 앞장서 憲法을 守護해야할 法務長官이 憲法秩序의 根本과 自由民主主義를 무너뜨린 行爲"라고 批判했다. 與黨 內部에서도 "千 長官의 指揮權 行使는 國民情緖에 反하는 것"이라고 批判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論評을 통해 "千 長官의 指揮權 行事는 檢察의 獨立性을 一擧에 무너뜨리는 것은 勿論 政治的 外壓을 加하는 時代錯誤的 措置"라고 말했고, 바른사회를위한시민회의는 "千 長官의 行動은 檢察의 自律的 請求權과 法院의 判斷까지도 代身하려는 越權行爲"라고 批判했다. [68] 김종빈 檢察總長은 抗議의 뜻으로 辭意를 표하면서 內部反撥이 거세지자 靑瓦臺는 金 總長의 辭退를 不適切한 處身이라며 檢察은 政府方針을 따르라고 警告했다. [69]

大統領 親姻戚 搜査 論難 [ 編輯 ]

2003年 4月 大統領 査頓인 裵氏가 飮酒運轉으로 摘發되자 이를 擔當하던 景觀을 轉補措置하고 事件을 隱蔽하려 했다는 批判을 받았다. 裵氏는 靑瓦臺 民政首席室에 電話했고, 靑瓦臺는 事故當日 事故經緯를 把握했을 뿐아니라 民政首席室은 釜山까지 내려가 被害者를 만나 合意金을 提示하며 입막음을 强要해 論難은 더욱 커졌다. [70] 이 때문에 飮酒事故를 警察과 民政首席室이 介入해 組織的으로 隱蔽하려 했다는 疑惑이 提起됐다. [71] [72]

批判論者 彈壓 論難 [ 編輯 ]

2005年 9月에는 政府의 對北政策을 批判한 홍관희 統一硏究院 首席硏究員은 減俸과 1年間 對外活動 禁止 處分을 받은 以後 辭職했다. 2006年 6月에는 外部 講演을 事前에 申告하지 않고 國家政策을 批判했다는 理由로 김태우 韓國國防硏究院 責任硏究委員은 1個月 停職 處分받았다. [73]

言論 政策 [ 編輯 ]

廣告 偏重 論難 [ 編輯 ]

노무현 政權 當時 이른바 '親盧' 인터넷新聞에 對한 廣告 偏重이 深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노무현 政府 中 後半期인 2005年부터 2008年 1分期까지 執行된 政府 廣告 中 오마이뉴스가 總 8億1919萬원을 受注해 인터넷 新聞 가운데 越等히 많은 額數를 記錄했다. 오마이뉴스에 이어 데일리서프라이즈가 3年間 總 2億8140萬원, 프레시안이 1億1110萬원의 廣告를 各各 受注했고 모두 親盧言論이다. [74] 9個 綜合日刊紙 中 노무현 政府 期間(2003年 ~ 2008年)에 政府 部處 및 公企業 廣告 受注件數가 가장 많은 媒體는 政府가 出資持分을 갖고 있는 서울新聞(9070件)이었고, 이어 한겨레新聞(5417件), 京鄕新聞(4697件)의 順이었다. 特히 2004年 8月까지는 인터넷 廣告의 오마이뉴스 偏重은 더욱 심해져 政府 廣告 發注額(5億3880萬원)의 20.7%인 1億1135萬원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對照的으로 朝鮮·동아 等 現 政權에 批判的인 中央 日刊紙의 政府 온라인 廣告 受注額은 노무현 政權 出帆 後 漸漸 比重이 줄어든 것으로 드러났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2002年 各各 1,2位였으나 동아일보는 8位 조선일보는 順位안에도 들지 못했다. [75]

取材 活動 制限 論難 [ 編輯 ]

2007年 12月 政府는 取材支援先進化 方案이라는 名分으로 브리핑室과 記事送稿室을 統廢合하고 記者들의 接近을 統制했다. 代身 電子브리핑 制度를 導入해 브리핑 內容을 온라인으로 받도록 했다. 이런 措置는 記者들이 取材源(政府 關係者)과 얼굴을 맞대고 接觸하거나 部處 事務室을 訪問하는 取材活動을 制限하는 措置를 더욱 强化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에 言論界와 學界에서는 國民의 알권리를 統制하는 時代錯誤的 政策이라는 非難이 나왔다. [76] [77]

이에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는 2008年 3月 9日 노무현 政權의 言論 壓迫 政策과 이에 맞선 記者들의 取材自由 守護鬪爭을 다룬 '노무현 政權 言論彈壓 白書'를 發刊했다. 이 白書에는 靑瓦臺가 企劃하고 國政弘報處가 推進한 各種 取材 統制 方案들이 나올 때마다 部處 記者室에서 쫓겨난 記者들이 政府廳舍 複道와 로비에 臨時記者室을 차려 촛불을 켜고 찬 바닥에 앉아 記事를 썼으며 政權은 公務員들이 言論과 싸울 境遇, 昇進 等에 加算點을 준다는 당근을 내세워 言論을 相對로 訴訟을 하도록 誘導했으며, 國政브리핑·靑瓦臺브리핑 等 管制言論을 만들어 直接 批判的인 言論을 非難하기도 했다는 內容이 있다.

國際言論人協會 (IPI)는 IPI "取材封鎖 撤回"를 要求하는 書翰을 發送했다. 盧武鉉 大統領에게 韓國 政府의 取材封鎖 撤回를 促求하는 公開書翰을 보냈다. 政府가 "記者들이 (公務員과) 指定된 場所에서만 인터뷰하도록 한 것은 西歐에서는 確立된 慣行"이라고 主張한 것과 關聯, "마인츠에 모인 다양한 國家의 IPI 會員들은 '그 어떤 尊重받는 民主主義 國家에서도 이뤄지지 않는 일'이라고 否認했다"며 西歐의 慣行이란 主張은 거짓이라고 밝혔다. IPI가 이와 關聯해 盧 大統領에게 書翰을 보낸 것은 이番이 네 番째다. [78]

세계신문협회(WAN)도 政府의 取材支援시스템 先進化 方案에 對해 憂慮를 表明하는 內容의 書翰을 盧武鉉 大統領에게 보냈다. WAN의 개빈 오라일리 會長과 조지 브룩 世界編輯人포럼(WEF) 會長은 "參與政府의 이番 政策은 政府 管理에 對한 言論人들의 接近을 制限하고 報道에 否定的인 影響을 미칠 수도 있다"라고 指摘했다. [79]

公務員 댓글 論難 [ 編輯 ]

노무현은 政權의 政策 弘報를 위해 國政 弘報處를 新設하고, 擔當 公務員들이 인터넷 댓글을 달아서 直接 意見 開陳할 것을 勸告하였다. 이 時期 公務員 댓글은 人事 高價의 評價 基準에 反映되기도 하여서 論難이 되었다.

評價 [ 編輯 ]

執權 마지막해인 2008年 1分期의 參與政府에 對한 評價는 큰 差異를 보였다. [80] 參與政府는 權威主義를 打破하고 돈 안드는 選擧 風土를 確立했다는 一部 評價가 있는반면, [81] 政權初期 大選 祕資金과 當選 祝賀金 收受 事實이 밝혀져 側近이 監獄에 가는등 困惑을 치렀다.

2006年 發表된 國家競爭力 順位는 갈수록 낮아져 泰國보다 못한 38位를 記錄했다. 스위스의 국제경영개발원(IMD)과 世界經濟포럼(WEF).IMD는 韓國의 國家競爭力 順位를 지난해 29位에서 38位로 9階段 낮췄고, WEF는 19位에서 24位로 5階段 내렸다. IMD의 結果는 政府行政 效率性은 31位에서 47位로 企業經營 效率性은 30位에서 45位로 各各 큰 幅으로 떨어졌다. 政府行政 效率性 部門 中에선 價格統制(57位),換率 安定性·保護主義(各 55位), 人種·性 差別 程度(58位) 等은 最下位圈이었다. WEF도 IMD와 비슷해 政府效率性은 38位에서 47位로 떨어졌다. [82]

前任 美 國防 長官인 로버트 게이츠는 노무현을 가리켜 "反美的이고 若干 미친"인물이란 評價를 내려 論難이 있었다.

輿論調査 [ 編輯 ]

出帆 後 2年 6個月 後인 2005年 8月 한겨레와 리서치플러스에서 實施한 輿論調査에서 28.9%가 國政運營을 支持하였다. 이 調査에서는 不動産, 經濟, 敎育, 人士, 社會 葛藤 問題 等이 主로 問題點으로 指摘되었으며, 南北關係는 肯定的인 評價를 받았다. [83]

2007年 末에는 韓美 FTA 推進, 第2次 南北頂上會談 等으로 인해 支持率이 40-50%臺로 急上昇했다. [84] 任期가 끝나기 直前 執權 마지막 해인 2008年에는 約 30% 程度가 肯定的인 評價를 하였다. [85] 그러나 노무현의 任期中 支持度는 平均的으로 좋지 못했고, [86] 盧武鉉의 實情을 비꼬아서 "이게다 盧武鉉 때문이다"는 말이 流行語로 떠오르기도 했다.

2010年 9月, 韓國社會輿論硏究所가 歷代 政府의 公正性에 對해서 輿論調査를 實施한 結果 '노무현 政府'라는 應答이 30.3%로 가장 높았다. [87]

主要 事件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새政府 別稱 '參與政府' 意味는] 盧當選者 國政哲學 反映 , 《파이낸셜 뉴스》, 2003年 2月 10日.
  2. 17代 國會 決算 - 成果와 限界
  3.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204243&plink=ORI&cooper=NAVER&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4. 김현희 "前政府와 放送이 나를 人民裁判했다" Archived 2015年 7月 7日 - 웨이백 머신 데일리 NK 2008年 11月 25日
  5. 김현희 노무현 政府 나를 殺害하려했다 데일리안
  6. 通稱: 國精院 眞實委, 2004.11.2. 出帆
  7. 노재현 (2010年 10月 3日). " 北高位當局者, 數年前 KAL機 爆破 是認 " . 聯合뉴스 . 2010年 10月 4日에 確認함 .  
  8. “盧 大統領, 부시 만난 正常 中 가장 豫測 不可能” , 《中央日報》, 2008年 2月 15日
  9. 東北工程 關聯 主要事件 :: 네이버 뉴스
  10. 한·日關係 意識 '憂慮타령'만
  11. "노무현 獨島 問題 때 日本 艦艇에 發砲令" Archived 2019年 8月 4日 - 웨이백 머신 한겨레 2010年 10月
  12. '國防改革 2020' 다시 길을 묻다
  13. 軍 服務 6個月 短縮, 女性도 社會服務 可能
  14. 東北亞 經濟中心地 本格 첫발
  15. 김형준 政治批評 작게 失敗하고 크게 成功하는 길
  16. 민노, "新自由主義 政策 抛棄 않는 限 聯立政府 不可能" Archived 2004年 10月 15日 - 웨이백 머신 , 《노컷뉴스》, 2005年 7月 7日.
  17. 盧 "財界 憂慮 檢察도 알 것" , 《경향신문》, 2004年 1月 19日.
  18. DJ政府 最大 經常黑字…經濟成跡 優秀 Archived 2011年 8月 7日 - 웨이백 머신 - 조선닷컴 2009年 8月 20日
  19. 經濟成長率 4%臺 '맴맴'… 國家 빚은 두 倍로
  20. 國家債務, 成長率 報道는 '난센스' 2007年 2月 25日
  21. "現政府 經濟成長率 걷는 동안 홍콩-싱가포르는 날아다녔다" 東亞日報
  22. 靑, "參與政府, 租稅負擔率 크게 늘지 않았다" 租稅日報 2007年 2月 22日
  23. 盧 前 大統領, 經濟政策을 돌아본다
  24. 景氣 浮揚
  25. 無知한 不動産政策의 弊害
  26. “參與政府 不動産政策 失敗理由” . 2011年 11月 2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1月 7日에 確認함 .  
  27. 게도 구럭도 놓친 改革… 개川에서 용쓰다 미꾸라지 된다? , 《신동아》, 2008.2.1.
  28. (詩論) 參與政府만 눈감고 있던 私敎育費 實態 Archived 2011年 8月 7日 - 웨이백 머신 , 《朝鮮日報》, 2007.11.23.
  29. "參與政府 期間 入試學院 市場 急膨脹"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머니투데이》, 2008.9.29.
  30. “황우석.윤덕용 敎授, 大韓民國最高科學技術人賞” . KCTC 消息. 生物資源센터. 2004年 4月 20日.  
  31. “서울大學校, 황우석 敎授 解任 (英文記事 添附)” . 過去 記事. 美國의 소리. 2006年 3月 20日.  
  32. 社會主義 獨立運動家 훈격은 全部 한等級씩 낮춰라?
  33. " 非正規職 다 죽이는 盧武鉉 大統領 卽刻 退陣 " . 2014年 2月 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6月 1日에 確認함 .  
  34. 勞動部, 100萬名 解雇大亂 '豫測 틀렸다' 認定
  35. 非正規職 84%, 正規職으로…'해고 大亂' 없었다 SBS 2010年 7月 14日子 記事
  36. (性賣買特別法 4年①) 世界가 注目한 聖殿의 빛과 그림자 , 《朝鮮日報》, 2008.9.21.
  37. 한총련 '利敵團體' 굴레벗나 2003-03-17
  38. 檢察, '保安法 儼存 手配解除는 困難' 文化日報 2003-03-18
  39. [1]
  40. 한총련 合法化 물건너가나 韓國日報 2003-05-19
  41.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336137 한총련 合法化 論難>聯合뉴스
  42. "한총련 合法化 時機尙早" 69% 文化日報
  43. [2]
  44. [3]
  45. 與黨도 "한총련 合法化-手配解除 反對"
  46. 靑瓦臺 "한총련 合法化 變化없다" 東亞日報
  47. 한총련 事實上 手配 解除 措置
  48. [인터뷰] 송광수 前 檢察總長 '뉴스 프로스' 인터뷰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9. “參與政府 5個年 革新리포트 電子政府事業, 온라인 國民參與 擴大” . 2014年 1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11月 5日에 確認함 .  
  50. 9月부터 종이 代身 電子文書…디지털 國會
  51. 9千億 規模 電子政府事業 `올스톱`
  52. 世界에 떨치는 "韓國 政府革新 成果"
  53. "盧 大統領 開發政策, 開發獨裁 때보다 더 危險" Archived 2011年 11月 23日 - 웨이백 머신 , 《濟州의 소리》, 2004.11.10.
  54. 더 깊숙한 開發主義로 빠져들고 있는 參與政府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環境非常時局會議
  55. 강원룡 "參與政府는 參與가 없다" Archived 2009年 6月 3日 - 웨이백 머신 朝鮮日報 2006年 2月 24日子
  56. 노무현 政權 拘束勞動者, 김영삼 政權의 두 倍 Archived 2012年 1月 18日 - 웨이백 머신 참世上 2007年12月03日子
  57. 송영선議員 ‘政策報道 모니터링第’ 批判 京鄕新聞 2005年 4月 28日子 記事
  58. 記事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009-10-01 14:50:32)
  59. 記事
  60. 盧武鉉 때 總理室度 民間人 査察 했었다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中央日報 2010-10-04
  61. “國精院, 手術로 回生이 可能할까?” . 2014年 2月 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5月 4日에 確認함 .  
  62. 記事 (2012-04-02 03:00:00) 東亞日報 곽민영 記者
  63. “靑瓦臺, 逆攻…"民間人 査察 大部分 노무현 政府 때 이뤄져 " . 2014年 2月 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5月 4日에 確認함 .  
  64. "靑瓦臺 "査察 文件 大部分 前 政權때"…"웬 물鬼神 作戰""
  65. "盧政府때 査察資料" 4番·5番 USB 폴더 보니…
  66. " 이명박 候補 뒷調査,國精院 職員 單獨犯行 " . 2014年 2月 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9月 2日에 確認함 .  
  67. '參與政府도 不法査察했다고?' (最終修正 2012-04-03 17:58)
  68. 千法務, 강정구 敎授事件 不拘束 指揮權發動 後暴風
  69. 檢察, 政府方針 따라야 警告 世界日報
  70. 大統領 査頓 飮酒運轉 確認 每日經濟
  71. "盧大統領 査頓 飮酒事故,靑·警察 隱蔽疑惑"…漢나라 "權力非理" 猛非難 데일리안
  72. 盧 大統領 査頓 飮酒疑心 交通事故 '입막음'? 데일리안
  73. 國防硏究院 김태우 博士 重懲戒 論難
  74. 노무현 政權, 오마이뉴스에 廣告集中
  75. 政府, 인터넷廣告 '오마이뉴스'에 몰아주기 朝鮮日報 2004.09.16
  76. 記者室 統廢合 確定… '받아쓰기 저널리즘' 非難 洑물
  77. 政府 브리핑室 統合해 버리면 記者는 '받아쓰기'만 해야하나 韓國經濟
  78. IPI “取材封鎖 撤回”… 盧大統領에 또 書翰 文化日報
  79. 세계신문협회 盧武鉉 大統領에 抗議 書翰 헤럴드經濟
  80. 參與政府 5年 決算..評價 極端으로 엇갈려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聯合뉴스》, 2008.2.22.
  81. 이 當選者 "參與政府는 權威主義·돈政治 根絶韓 政府" , 《한겨레》, 2007.12.21.
  82. 韓國 갈수록 낮아져 올해 泰國보다 못한 38位 韓國經濟
  83. 返還點 돈 노무현 政權, 한겨레 輿論調査 , 《한겨레》, 2008.8.24.
  84. 헉! 盧大統領 支持率 53%라니… 한나라黨 緊張
  85. 3名中 1名 "參與政府 잘한 일 없다" , 《한겨레》, 2008.1.1.
  86. “韓國갤럽 데일리 오피니언 第54號(2013年 2月 2週) - MB 5年 任期 評價 包含 > 歷代 大統領 分期別 職務 遂行 肯定 評價 比較” . 2013年 2月 15日. 2019年 12月 1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6年 2月 2日에 確認함 .  
  87. 政府 公正性, 盧武鉉>朴正熙>金大中>李明博 미디어오늘 2010年 9月 28日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