申師任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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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師任堂
申師任堂
사임당 신씨의 초상화
師任堂 신氏 의 肖像畫
身上情報
本名 不明
別稱 師任堂(師任堂)  · 人林塘(姻姙堂)  · 임사재(姙師齊)
出生 1504年 12月 5日 ( 1504-12-05 )
朝鮮 江原道 江陵 죽헌리 北坪村
死亡 1551年 6月 20日 ( 1551-06-20 ) (46歲)
朝鮮 京畿道 坡州郡 주내면 栗谷村
職業 文人  · 儒學者  · 畫家  · 作家  · 是認
言語 中世 韓國語
國籍 朝鮮
宗敎 儒敎 ( 性理學 )
父母 아버지: 신명화, 어머니 龍仁 李氏
配偶者 李元壽
子女 아들 이선  · 이番  · 栗谷 李珥   · 이우
딸 매창 等 4男 3女
主要 作品
草蟲圖  · 수박과 들쥐  · 梅花島 等
影響
李珥   · 이매창   · 이우

師任堂 신氏 (師任堂申氏, 1504年 12月 5日 ~ 1551年 6月 20日 )는 朝鮮 時代 中期의 文人이자 儒學者, 畫家, 作家, 詩人이다. 朝鮮 時代 中期의 성리학자 兼 政治人 栗谷 李珥 , 畫家 이매창 의 어머니다. 江原道 江陵 出身으로 本貫은 평산 (平山)이다. 本名은 신인선 (申仁善)이라고도 하나 確實하지 않으며 師任堂은 그의 堂號(堂號)이다.

槪要 [ 編輯 ]

外할아버지 移徙온 과, 己卯士禍 로 官職을 斷念하고 鄕里에 隱居한 아버지 신명화로부터 理學을 敎育받았으며, 아버지가 아들없이 죽자 京畿道 坡州 의 媤宅과 江原道 江陵 의 親庭집을 오가며 親庭어머니를 極盡히 모셨다. 어린 子女들을 두고 일찍 病死하였지만 아들 李珥 는 大學者이자 政治人으로, 딸 이매창 과 아들 이우 等은 文人 畫家로 名聲을 날렸다. 同時代의 女性인 文定王后 , 鄭蘭貞 , 황진이 等과 比較된다.

그림, 書藝, 時 재주가 卓越하였고, 性理學 敵 素養도 있었으며, 十字繡 와 옷감 製作에도 能했다. 性理學 的 知識과 道學, 文章, 古典, 歷史 知識 等에 該博하였다. 胎敎 에서부터 精誠을 기울여 아들 周나라 主 文王 을 얻은 賢淑한 婦人 태임 (太任)을 본받는다는 意味에서 辭任(師任)으로 雅號를 定하였다. 後代에서 女性임을 確實히 하기 위하여 別채를 意味하는 黨(堂)을 붙여 부르기 始作하였다. 別號는 人林塘(姻姙堂) 또는 임私製(姙師齊)이다.

2007年 韓國 女性界의 反對와 集團 反撥에도 不拘하고 政府에 依해 50000원 紙幣 의 主人公으로 電擊 도안되었다. 壬辰倭亂 忠州 彈琴臺 에서 戰死한 申砬 은 그의 9寸 조카였고, 大韓民國 의 政治人 海公 신익희 는 14代 傍孫이 된다.

生涯 [ 編輯 ]

江陵 오죽헌

江原道 江陵部 죽헌리 北坪村(北坪村) 胎生으로 外家이자 그의 生家 오죽헌 은 只今도 保存되고 있다. [1] 師任堂의 兄弟에는 아들은 하나도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師任堂은 그 中에서 둘째 딸이었다.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龍仁 李氏 집안의 선비인 移徙온의 딸이었다. 스스로 師任堂(師任堂)이라는 號를 지었는데, 周나라 의 기틀을 닦은 文王 [2] 의 어머니 태임 (太任)에서 따왔다고 傳한다.

그의 祖上은 高麗 의 開國功臣이자 王建 代身 戰死한 신숭겸 의 먼 後孫으로, 高祖父는 문희共(文僖公) 신개 였다. 高祖父 신개는 世宗大王 時節 藝文館 大提學, 大司憲, 都總制 等等을 지냈고, 나중에 右議政을 거쳐 左議政까지 오른 人物이다. 할아버지 信宿圈은 寧越郡수를 지냈다. [3] 그러나 親庭아버지 신명화는 進士에 그쳤다. 아버지 신명화는 몇 次例 過去 試驗 에 應試했으나 落榜하다가, 1516年 (中宗 11年) 漢陽 에서 小科에 合格하여 進士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41歲였다. [4] 當時 조광조 가 登用되어 急進的 改革 政治를 實施하면서 신명화와 그의 四寸동생 신명인 等도 이들 新進 士類와 相當한 交流를 하였고, 동생 신명인은 그 重要한 멤버가 되었다. 1519年 (中宗 4年) 己卯士禍 가 일어났던 그날 신명인은 大田 뜰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中宗 에게 諫하는 上疏를 올렸고, 그때 申師任堂의 아버지 신명화度 親舊 儒生들 틈에 같이 있다가 붙잡혀 나흘 동안이나 獄苦를 치르기도 했다. 그 뒤 신명화는 官職을 斷念하고 妻家가 있는 江陵 으로 내려와 移徙온 內外를 모셨다.

師任堂은 어려서부터 記憶力이 뛰어났고, 다른 姊妹들보다도 일찍 글을 깨우쳤다고 한다.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에게도 性理學 과 글씨, 그림 그리는 法을 가르쳤다. 딸들 中에서도 그의 才能을 높이 본 아버지 신명화는 特히 그를 各別히 아꼈다.

親庭어머니 李氏는 죽은 父母에게 孝行을 다하고 죽은 男便에게 貞節을 지켰다 하여, 1528年 (中宗 23年) 나라로부터 烈女로 表彰을 받았다. [5] 따라서 故鄕인 江陵 에는 그 功績을 기리는 記念角이 세워지고 사람들의 尊敬을 받았다. [5] 朝鮮 中期까지만 해도 士大夫家의 女性들 亦是 再婚이 되거나 不倫行脚을 벌이는 일이 非一非再했고, 일찍 寡婦가 되어 홀로 5女를 키운 어머니 李氏에 對한 尊敬心은 대단한 것이었다. 또, 그가 일찍 죽은 뒤에도 오래 살아 外孫子인 栗谷 李珥 의 支持者이자 彷徨하는 外孫子를 다잡아주기도 했다.

幼年期 [ 編輯 ]

아버지 신명화는 妻家의 援助를 받아 漢城 의 本家에서 過去 工夫를 繼續하였고, 한 해에 몇 番 妻家를 들르는 生活을 繼續하였다. [6] 師任堂의 어머니 李氏는 自身의 親庭아버지와 男便이 對立하거나 摩擦을 일으키지 않도록 神經을 쓰면서 男便이 工夫에만 熱中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繼續했다. [7] 그러나 아버지 신명화는 進士試에 그쳤고, 己卯士禍 로 大科에 凝視하는 것을 抛棄하게 된다.

出家 뒤에도 繼續 親庭 父母와 산 師任堂의 어머니는 普通 結婚한 女子들이 겪는 精神的 苦痛이나 一家를 돌봐야 하는 분주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比較的 자유롭고 所信있게 子女 敎育을 할 수 있었다. 師任堂의 藝術과 學問에 깊은 影響을 준 外祖父의 學問은 賢明하고 冷徹한 어머니 李氏를 통해서 師任堂에게 傳授되었다. [8]

師任堂은 記憶力이 좋아 漢學 의 基本 書籍을 今方 精通하였고, 한 詩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9]

어려서부터 自首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師任堂은 詩와 그림에도 놀라운 才能을 보였다. [8] 일곱 살 때에는 火가 安堅 의 그림을 본떠서 그려 周圍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8] 特히 山水畫 와 葡萄, 풀, 벌레 等을 그리는 데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아울러 師任堂은 儒敎 의 經典과 좋은 冊들을 널리 읽어 學問을 담았다. [8] 어머니가 刺繡를 뜨는 것을 보고 흉내를 내자 外할아버지는 그에게 그림 才能이 있음을 알아보고, 7歲 때부터 그림을 正式으로 배우게 되었다. 그림 敎材로는 世宗 때의 有名한 畫家였던 安堅 의 山水畫를 사 주었다. [9]

結婚前 [ 編輯 ]

申師任堂은 女性이었으나 性理學 的 知識과 道學, 文章, 古典, 歷史 知識 等에 解縛하여 아버지 신명화나 男便 李元壽를 찾아온 士大夫들을 歎服케 하였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신명화는 조광조 等과 親分이 있었으나, 己卯士禍 로 선비들이 犧牲되자 官職을 斷念하고 江原道 江陵 으로 落鄕하였다. 아들 딸의 差別을 두지 않던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과 조카 딸들에게도 글을 가르쳤다. 申師任堂을 비롯한 다섯 딸들은 신명화에게 千字文 童蒙先習 , 明心寶鑑 , 儒敎 의 사서 六卿과 走者 를 배움으로써 일찍부터 性理學 學問 敵 素養을 갖추었다. 特히 신명화의 여러 딸들 中에서도 記憶力이 非常하여 아버지의 寵愛를 받았다.

그래서 後代의 作家 오귀환은 師任堂이라는 號에는 申師任堂의 革命을 꿈꾸는 女人으로서의 氣象이 담겨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10] 그 外에 人林塘(姻姙堂) 또는 임私製(姙師齊)라는 號도 가졌다고 한다. 結婚 以後에는 本이름 代身 師任堂, 임사재, 人林塘 等의 號를 使用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신명화는 漢城府 에 居住했고, 漢城 에서 主로 生活하는 아버지와는 16年間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江陵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11] 7歲 때는 外할아버지인 移徙온 으로부터 婦德과 小學 , 大學 , 家禮에 對한 敎育을 받기도 했다.

일찍부터 그림과 글씨를 잘 써서 稱頌을 받기도 했는데, 明宗 兆에 살던 어숙권 (魚叔權)은 어린 人選의 作品을 보고 感歎, 自身의 著書 《稗官雜記》에서 “師任堂의 葡萄와 算數는 絶妙하여 評하는 이들이 ‘安堅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婦女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婦女子에게 合當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評하기도 했다. [11] 嚴格한 어머니로부터는 바느질과 부엌일도 배웠는데, 그 빠르게 익히는 模樣이 評判이 藉藉할 程度였다. [9] 普通 士大夫家의 아가씨들과 달리 살림살이와 飮食 솜씨도 있었다.

結婚 [ 編輯 ]

한便 신명화는 덕수 李氏 이기 , 履行 兄弟의 조카인 李元壽 를 사위로 定하였다. 當時 李元壽는 이렇다 할 官職도 없었고,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膝下에서 자랐다. 두 堂叔이 領議政 左議政 等을 歷任한 高官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가난했고 周邊에서는 사위감을 볼줄 모른다며 異常하게 봤다.

그러나 아버지 申 進士는 師任堂의 사위를 고를 때 第一 먼저 생각한 것은 家門이나 財力이 아니라 딸의 書畫 活動을 키워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2] 타고난 才能으로 이미 相當한 水準에 이르고 있는 自身의 딸을 藝術家로서의 길을 最大限 保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點이 申 進士의 주된 關心事였다. [12] 지체높은 權門勢家의 집안에서 새로 시집온 새宅의 그림 活動을 認定해 준다는 것은 期待하기 어렵고, 反對로 집안이 너무 볼품이 없거나 가난한 境遇에는 살림살이에 바빠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이라는게 申師任堂의 아버지 신명화의 생각이었다. [12]

딸의 才能을 키워줄 사윗감을 고르던 申師任堂의 아버지 신명화가 選擇한 人物은 李元壽라는 總角이었다. 李元壽는 敦寧府社 이명진의 4代孫으로 할아버지 이의석 최만리 의 사위로 縣監 을 지냈고, 曾祖父 泥鰍는 大提學 輪廻 의 사위로 郡守를 歷任한 바 있다. [12] 아버지 신명화를 만족시킨 條件은 李元壽가 偏母 膝下에서 讀者로 자랐기 때문에 딸에게 媤집살이를 시킬 만한 가까운 家族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申師任堂의 어머니 李氏 夫人처럼 媤집을 보내지 않고 親庭 살이가 可能할 것이라는 豫想에서였다.

結婚과 時間 [ 編輯 ]

結婚 初期 [ 編輯 ]

大關嶺의 어느 山 언덕

1522年 (中宗 17年) 8月 20日 兄弟 政丞인 이기, 履行의 조카인 덕수 李氏 의 李元壽(李元秀)와 結婚하여 사위가 妻家宅에 머무는 傳統 에 따라 江陵 에서 繼續 살다가 서울 로 移徙했으며, 5男 3女를 두었다. 栗谷 이이는 申師任堂의 셋째 아들이다. 後날 사이가 疏遠해진 男便과의 關係를 回復하기 위해 親庭을 떠나 李元壽의 宣祖 때부터의 터전인 坡州郡 율곡리에 居住하기도 했다. [ 出處 必要 ] 이때 故鄕에 對한 鄕愁와 親庭을 떠나면서 홀로 계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지은 時調들은 後日 그의 代表作으로 後代에 傳하게 되었다.

媤宅은 坡州에 있었지만 結婚하던 그해 말, 親庭아버지가 아들없이 죽자 京畿道 坡州 의 媤宅과 江原道 江陵 의 親庭집을 오가면서 親庭어머니를 極盡히 모셨다.

結婚 몇달 後 아버지가 世上을 떠나자 親庭에서 3年喪을 마치고 漢城 으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詩集의 先祖 때부터의 터전인 坡州郡 율곡리에 居住하기도 했고, 江原道 平昌郡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13] 漢城과 親庭 江陵을 오가던 生活이 많이 不便했던 그는 男便 李元壽에게 特別히 漢城 江陵 의 中間 地點인 平昌 에 居住地를 마련하기도 했던 것이다.

李元壽와의 사이에서 5男 3女를 두는데 셋째 아들 李珥 는 이름난 性理學 者이자 朝鮮 中,後記 西人 老論 黨의 思想的인 時調였다. 다섯째 아들 이우 는 官職은 鄭3品에 머물렀지만 市와 書畫로 이름을 날렸고, 長女 이매창 [14] 亦是 詩와 그림 재주에 能하여 작은 申師任堂, 소사임黨이라 불리기도 했다.

藝術 活動 背景 [ 編輯 ]

儒敎 敵人 規範을 내세웠던 朝鮮 王朝 環境에서 女子는 아무리 뛰어나도 結婚과 함께 모든 才能을 묻어야만 했었다. [15] 現在까지 傳해오는 古代의 뛰어난 女性 藝術家들이 妓女 임을 보면, 一般 家庭의 夫人이 집안 일 代身 藝術的 才能을 펼친다는 것은 거의 不可能한 일이었다. 그러나 申師任堂은 이런 社會的 制裁로부터 自由로울 수 있었다. [15]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女 亦是 아들 兄弟가 없었기 때문에 男便의 同意를 얻어 媤집에 들어가지 않고 親庭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15] 師任堂이 藝術의 才能을 發揮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두 가지 環境이 크게 左右했다. [15] 딸의 才能을 키워줄 사윗감을 고르던 [12] 아버지 신명화 의 努力의 結果이기도 했다.

男便 李元壽는 儒敎 社會에서 典型的인 男性 優位의 虛勢를 부리는 그런 男便이 아니었다. 男便 李元壽 는 師任堂의 資質을 認定해 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度量이 넓은 사람이었다. [15] 師任堂이 親庭에서 많은 生活을 할 수 있었던 것은 男便과 媤어머니의 道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는 아내와의 對話에도 인색하지 않아 對話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다. [15] 그러나 李元壽는 한便으로는 夫人인 師任堂을 어느程度 멀리하게 된다.

性理學的 婦德 [ 編輯 ]

當代의 人物인 文定王后 , 鄭蘭貞 , 황진이 , 장녹수 에 比較하여 賢母良妻의 典型으로 尊敬받았으나 男便에게 順從하는 것을 美德으로 여기던 性理學 敵 夫人棺과는 距離가 있었다. 여러모로 才能이 出衆한 딸을 보내기 싫었던 親庭아버지 신명화는 唯獨 둘째 사위감에게 妻家살이를 提案했고, 男便인 李元壽는 丈人 신명화의 提案을 받아들인다. 結婚한 첫 해에 丈人이 갑자기 죽게 되자 李元壽 는 어쩔수 없이 江陵 坡州 를 오가게 됐다.

또한 男便 李元壽에게 고분고분 順從하지는 않았는데, 男便 李元壽에게 過去 試驗을 보기 위해 10年間 別居를 約束하고 좋은 名山을 알아내 男便을 보내기도 했다. 男便 李元壽는 過去 試驗을 보기 위해 10年間 別居를 約束하고 山으로 들어갔다가 아내가 보고 싶어 다시 되돌아왔고, 그는 決斷力 없는 男便을 나무라기도 하였다. 男便의 態度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女는 가위로 自身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제대로 工夫하지 않으면 比丘尼가 되겠다고 脅迫하여 男便에게 學問에 精進하도록 했다. 그러나 結局 男便 李元壽는 3年만에 學問을 丹念, 過去 試驗 에 合格하지 못하고 淫書 (蔭敍)로 官職에 進出하게 된다.

結婚 生活 [ 編輯 ]

그런 일이 있었던 以後 漢城府 平昌 等 各地로 移徙 다녔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申師任堂의 마음은 變함이 없어 33歲 때, 아이를 出産하기 위해 故鄕 江陵 으로 내려갔다. [5] 이때 태어난 아이가 大學 이다. [5]

1537年 師任堂은 李珥 를 데리고 親庭에서 漢城府 로 돌아가는 途中에 大關嶺 고개에 이르러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을 바라보며 親庭어머니에 對한 切切한 마음을 詩로 담았다. [5] 이는 後代에 男女老少를 가리지 않고 폭넓게 愛誦되었다.

慈親鶴髮在臨瀛 / 늙으신 어머님을 故鄕에 두고

身向長安獨去情 /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回首北村時一望 / 머리 돌려 북평 땅을 한番 바라보니

白雲飛下暮山靑 / 흰 구름만 저문 山을 날아 내리네. [5]

山처럼 내고향 千里硏磨는

자나 깨나 꿈 속에도 돌아가고파

寒松亭街에 외로이 뜬 달

鏡浦臺 앞에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톺에 혜락 모이락

고깃배틀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江陵 길 다시 밟아 가

色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16]

親庭어머니 생각으로 마음이 便치 못했던 師任堂은 38歲에 漢城府 에 새 집을 마련하고 媤어머니 洪氏와 함께 살았다. 洪氏 夫人 亦是 年老하여 살림을 모두 며느리에게 맡기고 며느리의 보살핌을 받았다. [5] 그女는 오랫동안 親庭 어머니를 그리워했고, 健康의 惡化와 함께 男便의 蓄妾, 外道가 繼續되면서 親庭어머니에 對한 그리움은 더해갔다.

男便의 外道 [ 編輯 ]

申師任堂은 男便 李元壽에게 아버지 신명화처럼 仔詳하고 仁慈한 態度를 期待하고 있었을 테지만, 그女는 男便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試鍊과 精神的 苦痛을 當하게 된다. [17] 그리고 男便에게 다른 女人이 생겨 房을 따로 얻은 것이다. 男便 李元壽가 妾을 두었다는 消息을 듣고 그女는 一時的으로 衝擊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 신명화 는 平生 漢陽 江陵 을 오가면서 夫人과 生活을 했지만, 周邊에 女人이 있다는 消息을 듣지 못하였고, 그의 外할아버지 移徙온 亦是 마찬가지로 그런 일 없이 平生을 살았다. [18] 때문에 男便의 外道는 申師任堂에게 豫期치 못했던 靑天霹靂과 같은 事件이었다. [18] 結局 男便 李元壽 는 外道에서 끝내지 않고, 妾을 한名 들이게 된다. 그러나 男便이 들인 첩 權氏는 술酒酊과 行悖가 甚하였다.u

  • 申師任堂 : 내가 죽은 뒤에 當身은 다시 장가를 들지 마시오. 우리에게 이미 아들 다섯, 딸 셋, 8男妹의 子女가 있는데, 다른 子息이 必要하며 또 다시 무슨 子息을 더 두어 禮記 에 가르친 訓戒를 어길 수가 있겠소?
  • 李元壽 : 孔子 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禮法에 合하는 것이오?
  • 申師任堂 : 孔子 魯나라 小功 때 亂離를 만나 齊나라 二界라는 곳으로 避難을 갔는데, 그 夫人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宋나라 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孔子가 그 夫人과 다시 同居를 하지 아니했을 뿐 아주 내쫓았다는 記錄은 없소.
  • 李元壽 : 孔子가 아내를 내친 記錄이 없다? 그러면 增資가 夫人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 申師任堂 : 增資의 父親이 찐 배를 좋아했는데, 그 夫人이 배를 잘못 쪄서 父母 奉養하는 道理에 어긋남이 있었기 때문에 不得已 내쫓은 것입니다. 그러나 增資 도 한 番 婚姻한 禮儀를 尊重하여 다시 새 장가를 들지는 아니한 것입니다.
  • 李元壽 : 朱子의 집안 禮法에는 이같은 일이 있지 않소?
  • 申師任堂 : 走者가 47歲 때 夫人 于氏가 죽고, 맏아들 숙은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아 살림할 사람이 없었지만 다시 장가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時調 詩人인 이은상 詩人이 쓴 師任堂과 栗谷에서 拔萃.

광해군 때에 出版된 冬季萬綠 에 적혀 있는 申師任堂과 그의 男便 李元壽의 對話를 보면 申師任堂은 男便이 다른 女子와 結合하는 것을 몹시 꺼려했고, 自身이 죽은 後에도 男便이 再婚하지 말 것을 剛하게 主張하고 있다. [18] 申師任堂은 禮法과 子女 敎育을 들어 男便의 再婚이나 外道를 强力히 拒否하고 있지만, 結局 現實은 그女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 申師任堂의 男便 李元壽는 酒幕집 女人 權氏를 만나 딴살림을 차렸고, 申師任堂 死後에는 그女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19] 男便의 첩이지만 自由奔放했고 술酒酊까지 甚한 權氏를 師任堂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生涯 後半 [ 編輯 ]

詩와 그림, 재주 [ 編輯 ]

申師任堂은 栗谷 李珥의 어머니로 有名하지만 才能있는 女性이었다. 그는 뛰어난 畫家 로서 7살 때 世宗 時代의 畫家 安堅 의 그림을 본따서 그림을 그렸고, 肅宗 , 송시열 , 이형규 等 여러 知識人 들이 그가 그린 그림에 跋文을 쓸 程度였다. 書藝 家이자 詩人이기도 한 그는 '어머니가 그리워'(思親)등의 漢詩(漢詩)를 여러 篇 지었다.

또한 政治 敵 感覺도 있어서 벼슬을 하지 못한 李元壽가 勢道家인 議政府 領議政 이기 를 찾아다니자 이를 挽留하였다고 傳해진다. 이기는 李元壽 의 5寸 堂叔이자 媤아버지 利川의 四寸 兄弟였는데, 明宗 初期에 少尹의 領袖 윤원형 과 結託하여 乙巳士禍 를 일으킴으로써 많은 선비들을 肅淸한 人物이었다.

申師任堂은 글이나 그림 實力이 뛰어났으나 自身의 實力을 함부로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20] 1550年 가슴 痛症을 앓다가 病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된다. 病은 心臟病 이었다.

그림 [ 編輯 ]

어느 날 잔칫집에 招待받은 申師任堂이 여러 貴婦人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국을 나르던 下女가 어느 夫人의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그 夫人의 치마가 다 젖었다. [20] '이를 어쩌나, 빌려 입고 온 옷을 버렸으니.....' 그 夫人은 가난하여 잔치에 입고 올 옷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새 옷을 빌려 입고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옷을 버렸으니 걱정이 泰山같았다. 그런데 申師任堂이 그 夫人에게 말했다. [20]

夫人, 저에게 그 치마를 暫時 벗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收拾을 해 보겠습니다. [20]

夫人은 異常하게 생각하였으나 申師任堂에게 옷을 벗어 주었다. 그러자 申師任堂은 붓을 들고 치마에 그림을 그리기 始作했다. 치마에 얼룩져 묻어 있었던 국물 자국이 申師任堂의 붓이 지나갈 때마다 탐스러운 葡萄 송이가 되기도 하고, 싱싱한 잎사귀가 되기도 했다.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그림이 完成되자 申師任堂은 치마를 내놓으며 그것을 팔아서 費用을 마련하게 하였다.

이 치마를 市場에 갖고 나가서 파세요. 그러면 새 치마를 살 돈이 마련될 것입니다. [20]

失手로 빌려온 옷을 버렸던 그 貴婦人은 치마를 팔았는데, 實物과도 같아서 비싼 價格에 팔렸다고 한다. 이러한 그림과 詩 재주는 子女들에게로 이어졌다. 어머니를 닮아 書畫에 뛰어난 솜씨들을 보이며 이름을 날린 이우 와 큰딸 이매창 이 그들이다. 特히 이우는 "그림의 品格이 빼어나 弔花를 일찍 墨畫로 풀벌레를 그려 내어 길에다 던지자 뭇 들이 實際 벌레인줄 알고 한꺼번에 쫓았다"는 逸話가 있을 程度로 藝術的인 才能이 뛰어났으며, 兄 李珥 가 "내 아우로 하여금 學問에 從事하게 했다면 내가 따르지 못하였을 것이다. [21] "라고 말할 程度로 그림과 詩 재주가 있었다. 큰딸 매창 亦是 詩畫에 能해서 '작은 申師任堂'이라 불렸다. [21]

末年 [ 編輯 ]

男便인 李元壽가 酒幕집 女性인 權氏와 關係하는 것을 알고 갈등하게 된다.

李元壽가 妾살림을 始作하자 申師任堂은 反撥하면서 夫婦關係가 冷却되고 마침내 한때 그女가 金剛山 에 들어갔다 오기도 했다. [22] 이를 두고 後代의 同人 남인 들은 栗谷 李珥 는 勿論이고 師任堂度 佛敎 에 歸依해 僧侶가 되었던 것은 아니냐며 李珥 와 그의 政黨人 西人 (西人)을 向한 政治攻勢 꺼리로 活用한다.

죽음을 豫感한 申師任堂은 自身이 죽더라도 새장가를 가지 말라고 男便에게 要請했다. 그러자 反撥心 때문인지 李元壽는 孔子 , 增資 , 走者 도 새장가를 들었다고 主張했다. 그러나 師任堂이 하나 하나 論理的인 根據를 대면서 反駁하자 李元壽는 입을 꾹 다물었다. [22] 男便 李元壽 는 漢城과 坡州 율곡리와 江陵을 오가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 한 구석을 채워 줄 自身을 認定해 줄 수 있는 女人을 願했을 것이다. [19] 그리고 그때 마침 나타난 女子가 바로 權氏였다. 그러나 權氏는 申師任堂과는 正反對로 제멋대로 사는 蕩女였다. [19] 妾인 酒母 權氏의 存在를 알게 된 그女는 다시 李元壽에게 妾인 權氏를 집에 들이지 말 것을 付託하기도 하였다.

李元壽나 師任堂은 子女들 中 特히 李珥 에 對한 愛情이 각별했는데 夫婦關係가 圓滿하지 않아, 李珥 는 平生 和睦한 家庭에 對한 所望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았다. [23] 딸 매창은 時·西·化에 能했는데, 申師任堂은 딸의 才能을 알아채고 글과 그림을 直接 가르쳤다.

最後 [ 編輯 ]

이이는 어머니에 對한 孝誠이 至極하여 15歲 때에 어머니 申師任堂이 病으로 자리에 눕자, 外할아버지의 位牌를 모신 祠堂에 홀로 들어가 每日 1時間 동안 祈禱를 올릴 程度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行方不明이 된 이이를 찾던 家族들은 外祖父 신명화의 祠堂에 엎드려 어머니를 낫게 해달라는 어린 아이의 精誠어린 祈禱에 歎服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이 兄弟의 病구완에도 差度가 없이 世上을 떠나고 만다.

申師任堂은 죽기 直前 男便인 李元壽가 酒幕집 女性인 權氏를 집에 들이려는 것을 알고, 儒敎 經典을 引用하여 自身이 죽은 뒤에 再婚은 하지 말 것을 付託하였다. [24] 그러나 男便 李元壽는 그가 죽자마자 妾인 權氏를 本宅으로 들여오고, 아들 李珥 와 葛藤을 일으키게 된다.

作品으로는 山水도 (山水圖), 草蟲圖 (草蟲圖), 年로도 (蓮鷺圖), 자리도 (紫鯉圖), 蘆雁圖 (蘆雁圖), 腰眼조압도 (蓼岸鳥鴨圖)와 6幅 草書 屛風 等이 代表的이며 그림, 書藝作, 수自首 等의 作品을 多數 남겼다. 朝鮮 後期에 가서는 尤庵 송시열 , 명재 尹拯 等이 師任堂 作品의 藝術性을 높이 評價하기도 했다.

1551年 5月 水雲 判官 (水運判官)으로 在職中이던 男便 李元壽는 稅穀 運搬의 任務를 맡고 平安道 로 派遣되어 갔다.

1551年 여름 李元壽는 業務次 平安道 로 出張을 가게 되었다. 일찍이 任官한 長男 이선(李璿)과 셋째 아들 李珥(李珥)도 함께 떠났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便紙를 써 보냈다. [25] 前에 없던 일에 놀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女가 울면서 便紙를 썼는지 모두들 異常하게 생각했다. 그 무렵 李元壽는 任務를 마치고 子息들과 함께 배便으로 漢城府 로 돌아오는 中이었다. [26] 그런데 師任堂이 便紙를 보낸 며칠 後에 갑자기 病床에 눕더니 二三日 後에는 危篤해졌다. 그리고 病床에 둘러 앉은 다른 子女들에게 '나는 이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26]

申師任堂은 5月 14日 警 病이 심해져 死境을 헤매다가 5月 17日 心臟疾患으로 世上을 떠났다. 別世 當時 그女의 나이는 享年 48歲였다. 그의 죽음으로 아들 李珥 는 삶과 죽음의 原因에 對한 疑問을 품고 彷徨하다가 한때 佛敎 僧侶 가 되기도 한다.

事後 [ 編輯 ]

그의 子女들은 서모인 權氏 夫人에게서 受難을 겪어야 했다. [27] 溫厚하고 仔詳한 어머니였던 申師任堂과는 달리 權氏 婦人은 술을 무척 좋아해서 새벽부터 술을 몇 盞 마셔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고, 조금만 脾胃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빈 독에 머리를 넣고 큰 소리로 울거나 노끈으로 自殺 소等을 벌이는 等 行悖가 甚하였다. [27] 子女들이 當하는 苦痛은 말이 아니었다. 참다 못한 李珥 가 家出을 敢行할 程度였다. [27]

申師任堂은 女性이면서도 性理學 的 知識이 該博했다는 點과 아들 李珥 , 이우, 딸 이매창을 大學者와 畫家, 作家로 길러냈다는 點 亦是 死後 그가 讚歎되는 理由가 되었다. 그女와 같은 時代를 살았던 文定王后 鄭蘭貞 은 貪慾의 象徵으로, 황진이 等을 淫亂의 象徵으로 非難하던 朝鮮 의 士大夫들이 申師任堂을 婦德(婦德)과 賢母良妻의 典型으로 稱頌하였다. 또한 그女의 아들 李珥 西人 의 黨首이자 老論 의 學問的 始祖가 되면서 尤庵 송시열 , 명재 尹拯 等이 依해 國家的인 爲人으로 格上하였다.

京畿道 坡州郡 栗谷村에 安葬하였고, 後日 男便 李元壽를 그女의 墓所 곁에 安葬하였다. 後에 李珥 가 鐘1品 崇政大夫 議政府 右贊成 과 判義禁府事까지 昇進하여, 貞敬夫人(正1品)에 追贈 하였다. [28] 아들 栗谷이 西人 의 縱走이자 精神的 支柱로 推戴되면서 그는 不德의 象徵, 賢母良妻의 模範으로 追崇되었다. 또한 그女의 親庭 조카인 申砬 彈琴臺 에서 戰死하여 家門을 일으켰다. 그는 大韓民國 의 政治人 海公 신익희 의 先祖이다.

50000원 紙幣에 도안된 申師任堂

1960年代 第3共和國 當時 아들인 李珥 와 媤宅 親族인 李舜臣 을 國家的 英雄으로 推仰하면서, 申師任堂 亦是 다시 不德(婦德)의 象徵으로 顯彰하고, 國史와 國語 敎科書, 美術 敎科書에 市와 作品이 실리고 偉人傳으로 널리 알려졌다. 2007年 大韓民國 女性界의 集團 反撥이 거셌으나 政府는 大韓民國 50000원 紙幣 主人公으로 圖案하였다.

2007年 11月 韓國銀行에 依해 "白凡 金九는 獨立愛國志士, 申師任堂은 女性·文化藝術人의 代表的인 象徵性이 있다 [29] "며 50000원 紙幣 도안 人物로 選定되었다. 그러나 女性界는 이에 否定的이었다. 相當數 女性界 人士들은 申師任堂에 對해 否定的 意見을 披瀝했다. 文化未來 이프 김신명숙 理事는 “오늘날 申師任堂이 代辯하는 ‘賢母良妻’의 이데올로기는 日本 植民統治의 殘滓”라면서 “貨幣 人物 選定만큼은 絶對로 輿論調査에 依存해선 안 된다”고 批判했다. [29] 戶主制廢止 市民모임 고은광순 代表도 “旣存 男性中心 社會의 口味에 맞았던 人物을 女性이라는 理由로 다시 내세워선 안 된다”며 “새 貨幣에 들어갈 女性으론 柳寬順이 가장 合當하다”며 否定的인 視角을 披瀝했다. [29]

咀嚼 [ 編輯 ]

  • 〈유대관令望親庭(踰大關嶺望親庭)〉
  • 〈私親(思親)〉

(本文)

私親(思親)

千 里 먼 故鄕 山은 萬 겹 봉우리로 막혔으니, 千里家山萬疊峯

가고픈 마음은 오래도록 꿈 속에 있네. 歸心長在夢魂中

寒松亭 가에는 외로운 둥근 달이요, 寒松亭畔孤輪月

鏡浦臺 앞에는 한 줄기 바람이로다. 鏡浦臺前一陣風

모랫벌엔 白鷺가 언제나 모였다 흩어지고, 沙上白鷺?聚山

波濤 위엔 고깃배가 오락가락 떠다닌다. 波頭漁艇各西東

어느 때江陵 땅을 다시 밟아서, 何時重踏臨瀛路

色동옷 입고 어머니 곁에서 바느질할꼬. 更著斑衣膝下縫

갤러리 [ 編輯 ]

評價 [ 編輯 ]

肯定的 評價 [ 編輯 ]

申師任堂은 封建 時代의 制約을 받았으면서도 女性으로서의 自己 開發에 邁進했다. 詩文과 그림, 글씨 等 朝鮮 時代의 代表的 藝術家로서의 生涯를 開拓하였다. [30]

申師任堂 生前에도 文定王后 鄭蘭貞 , 황진이 , 장녹수 나 한世紀 前의 人物인 於宇同 , 유감동 等과 比較, 對照되어 훌륭한 女性, 賢母良妻의 典型으로 尊敬받았다. 死後에도 西人 의 理論的, 精神的 支柱인 李珥 를 기른 훌륭한 어머니로 尊崇되었고, 17世紀에는 송시열 에 依해 격찬되었다.

朝鮮 後期에 이르러 그女는 어머니와 父女의 模範으로 兩班 士大夫家의 女息들에게 訓育되었다. 朝鮮 後記 栗谷의 學統을 이은 尤庵 송시열 은 그女의 詩와 글, 書藝作, 그림 等 讚辭를 보내며 "그가 栗谷을 낳으실 만하다"라고 激讚하면서 그女에 對한 國家的인 尊敬, 崇拜는 强化되었다. 송시열 은 自身의 스승 李珥 를 추켜세우면서 栗谷의 父母 亦是 聖者(聖者)로 顯彰하려 하였으나 栗谷의 아버지 李元壽는 通德郞이라는 微官末職인데다가 無能力한 人物이라 結局 栗谷의 어머니인 申師任堂을 聖者로 推仰하게 되었다.

大韓民國 政府 樹立 以後에도 1960年 第3共和國 當時 韓國의 爲人의 한 사람으로 選定되어 推仰받았다. 그는 現在까지도 賢母良妻의 象徵, 훌륭한 女性 作家, 詩人으로 評價받고 있다.

否定的 評價 [ 編輯 ]

申師任堂은 知와 德을 兼備한 총명하고 仁慈한 어머니였지만 子息들의 곁에 그리 오래 있지는 못하였다. [27] 오늘날 申師任堂이 代辯하는 ‘賢母良妻’의 이데올로기는 日本 植民統治의 殘滓 [29] ', '旣存 男性中心 社會의 口味에 맞았던 人物을 女性이라는 理由로 否定的인 視角으로 보고 있다.

申師任堂이 女性의 平價切下의 手段으로 惡用되었다는 視角도 있다. '女性들은 지난 社會 雰圍氣에 따라 歷史로부터 외면당하고 평가절하되어 왔다. 敎科書에 女性을 代表하는 人物로 그려지던 申師任堂은 어떠한가. 申師任堂은 詩, 글씨, 그림 等에 뛰어난 實力을 가진 藝術家였지만 우리 歷史는 栗谷 李珥 의 어머니로서의 申師任堂을 强調한다. [31] '는 것이다. 그에 依하면 '申師任堂은 恒常 몸가짐을 操心하여 子息들을 교육시켰고, 男便에게는 올바른 길을 가도록 內助하면서 7男妹를 훌륭하게 키웠다. 媤父母와 親庭어머니를 잘 모신 孝女孝婦로 알려져 있다" 위의 文章은 申師任堂에 對한 資料 속에서 쉽게 接할 수 있다. [31] ' 이는 申師任堂의 個人의 能力이나 삶을 보여주기 보다는 누군가의 딸이면서 아내이면서 며느리이자 어머니였던 申師任堂을 表現하고 있다. [31] '고 事例를 들었다. 그에 依하면 '歷史 속에서 女性은 이렇게 限定的인 役割만을 맡아 왔다. [31] '는 것이다.

기타 [ 編輯 ]

그는 朝鮮王朝가 要求하는 儒敎的 女性像에 滿足하지 않고 獨立된 人間으로서의 生活을 스스로 開拓한 女性이라 할 수 있다. [11]

그밖에 '子息에게는 어진 어머니이고 男便에게는 착한 아내'라는 말뜻 그대로의 賢母良妻라면 申師任堂이 賢母良妻라는 말은 맞고도 틀리다. [32] '는 意見도 있다. 作家 김별아는 '스스로 지어 부른 師任堂이라는 呼價 聖君의 代表 格인 中國 周나라 文王의 훌륭한 어머니 태임을 배우고 본받는다는 뜻인 만큼, 大學者이자 政治家인 栗谷을 包含한 4男 3女의 子息들에게 師任堂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어머니였다. 실로 師任堂이 우리 歷史 속에서 `稀貴'하다시피 한 女性 人物로 우뚝 자리 잡은 데는 栗谷 李珥가 쓴 `어머니의 一代記'(先行狀)가 決定的인 役割을 했다. 栗谷은 아버지 李元壽의 行長은 쓴 적이 없지만, 어머니 師任堂에 對해서는 切切한 그리움이 담긴 行長뿐만이 아니라 母親喪을 當한 直後 슬픔과 虛無感에 빠져 金剛山에 들어가 蟄居했다는 記錄을 남기기도 했다. [32] '고 前提하였다.

그러나 '師任堂이 '賢母'였음에는 異見이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 典型的인 `賢母良妻'의 틀에 꼭 들어맞는다고는 決코 말할 수 없다. [32] '며 그 理由로 '栗谷의 行長에서 드러나는 師任堂의 모습은 놀랍게도 當時의 社會가 要求하던 女性像에 符合하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師任堂은 男子 집안 中心의 中國式 親迎禮가 자리 잡아 가던 朝鮮 中期에 傳統 婚禮 方式으로 오랫동안 故鄕에 머무르며 親庭 父母를 奉養했고, 좋게 表現하자면 男性 優位의 虛勢를 부리지 않고 아내의 意見을 尊重하는 `부드러운 男子'지만 實際로는 學問이나 才能이나 意志의 側面에서 師任堂에게 턱없이 不足했던 男便 李元壽에게 女必從夫하기보다는 “失手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옳은 道理로 간다”하였다. [32] '는 點을 指摘했다. 또한 김별아 는 그가 性理學 的인 價値觀에는 符合되지 않는다는 點을 指摘하기도 했다. 그에 依하면 '아내의 投機는 七去之惡의 하나로 꼽히지만 師任堂은 病弱한 自身이 먼저 世上을 떠날 것을 豫感하며 男便에게 子息들을 위해 새장가를 가지 말 것을 主張하는가 하면, 母親이 편찮을 때 몰래 外祖父의 祠堂에 가서 祈禱했다는 栗谷의 一火爐 미루어볼 때 師任堂의 子息들 또한 父系보다는 謀計에 더 큰 親和力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實際 모습을 알면 알수록 申師任堂은 `賢母良妻'라는 傳統 女性像에 묶일 수 없는 獨立的이고 進步的이며 剛한 自意識을 가진 女性林에 분명하다. [32] '라고 評價하기도 했다.

大韓民國 50000원 紙幣 도안 人物 [ 編輯 ]

'申師任堂이 貨幣 中心에 登場하는 最初의 女性 人物로 그 동안의 慣例를 깨는 데 意味가 있다.'는 視角도 있지만 그 人物이 申師任堂이어야 하는가에 對해서는 異見이 紛紛하다. 特히 女性界의 反對 意見은 强했다. 果然 申師任堂이 현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女性들에게 意味 있는 人物인가 라는 質問이 提起되었다. 申師任堂을 貨幣 도안 人物로 選定된 것에 對해서는 反撥과 批判 輿論이 存在하고 있다.

50000원 紙幣 主人公 選定過程 [ 編輯 ]

申師任堂이 50000원 紙幣의 도안人物로 有力視되자 女性界에서는 反撥했다. 女性言論 文化未來 이프 等은 이를 積極 支持하고, 支援하기도 했다. 韓國銀行이 2009年 發行 豫定인 高額券 새 貨幣의 女性 人物로 申師任堂 選定이 有力해짐에 따라, 女性界에서 反撥 움직임이 試圖되었다. 文化未來 이프 等은 '申師任堂 主人公 도안 反對 안티 페스티벌 文化運動 [33] '을 열기도 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는 10月 1日 홈페이지에 올린 緊急聲明을 통해 “새 貨幣 人物로 女性人物 選擇이 有力해지고 있는 것은 歡迎할 만한 일”이라고 前提한 뒤 “그러나 申師任堂은 個人으로서의 女性이 아니라 父系血統을 成功的으로 繼承한 賢母良妻로서 支持되고 있다”며 “(寺)文化未來 이프는 申師任堂이 새 貨幣 女性 肖像人物로 選定되는 것에 反對하며 앞으로 繼續的인 署名運動을 통해 이를 積極 沮止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34]

申師任堂 選定 反對 運動 [ 編輯 ]

一部 女性團體와 文化未來 이프 等의 反對 以後 여러 女性團體들이 申師任堂 選定을 反對하거나 否定的으로 評價하였다. 韓國女性團體協議會(會長 金花中)는 2007年 10月 23日 聲明을 내어 “個人의 成就가 共同體의 發展, 卽 他人의 삶에도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이 時代에 던지고 있다”며 柳寬順 支持 뜻을 밝혔다. 韓國女性團體聯合, 韓國女性勞動者會, 한국여성의전화연합, 韓國性暴力相談所, 性賣買問題解決을위한전국연대 等 5個 團體도 이날 聲明을 내어 “現在 擧論되는 貨幣 人物 中에는 柳寬順이 適合하다”고 主張했다. [35] 또 女性團體聯合 等은 國民輿論 反映 不足과 選定過程 未公開의 問題點 또한 指摘했다. 韓國女性團體聯合 幹事 한황주연 等은 “韓國銀行이 지난 5月부터 7月末까지 進行한 設問調査에 따르면 女性人物 中에는 柳寬順 에 對한 支持度가 가장 높았다”고 밝혔다. [35]

한便 申師任堂 反對에 먼저 나섰던 文化未來이프(代表 엄을순)도 申師任堂을 最終 女性候補로 올린 點을 批判하는 聲明을 냈다. 이들은 聲明에서 '50000원 紙幣 候補로 申師任堂-蔣英實을 競合시킴으로써 女性의 選定 可能性이 折半으로 떨어졌으며', '女性界가 反對意見을 냈음에도 이를 考慮하지 않고 論難이 많은 申師任堂을 最終 女性候補로 올려 놓은 것은 問題'라며 韓國銀行 과 政府의 處事를 聲討했다. [35] 文化未來 이프 事務局長 권희정 記者는 “女性界 人物을 반드시 넣어야 하는 것이 原則”이라며 “申師任堂을 蔣英實과 人爲的 競合構圖로 놓은 뒤, 女性界의 反對 때문에 霧散된 것처럼 핑계를 대려는 것 아니냐”고 主張했다. [35]

10月 末 이프는 聲明書를 통해 外國의 貨幣 女性人物은 “ 濠洲 · 노르웨이 · 스웨덴 의 境遇는 音樂家 小說家 가, 프랑스 · 이탈리아 의 境遇는 科學者가, 美國 이스라엘 의 境遇는 女性運動 가와 政治家가 貨幣人物로 選定되었고 最近 日本 메이지 時代 폭넓게 사랑받았던 小說家를 貨幣 人物로 選定”하고 있다면서 “世界的 흐름이 이러한데도 賢母良妻로 浮刻돼 있는 申師任堂을 貨幣人物로 選定하고자 하는 것은 國家的 亡身이자 女性人力 活用을 통한 國家發展이라는 政策方向과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批判했다. [33]

文化未來 이프는 ‘새時代 새女性’을 象徵하는 人物과 關聯 “朝鮮 時代 以前 이 땅에는 소서노 , 선덕 女王 等 헌걸찬 女性들이 있었고, 申師任堂이 살았던 朝鮮 時代에도 許蘭雪軒 , 萬德 等의 時代를 앞선 人物들이 있었다”며 “近世에도 柳寬順 뿐 아니라 나혜석 이 있다”고 主張했다. [34] 이프는 女性을 包含한 모든 貨幣肖像 候補人物에 對한 選定經緯를 透明하게 公開하고 女性界의 意見을 積極 收斂할 것을 促求했다. [34]

一部 女性團體들은 論難이 申師任堂 贊反으로 번지는 것을 警戒하면서도, 大體로 다양한 女性人物의 發掘과 再解釋을 통한 論議의 場이 必要하다는 데 共感하는 雰圍氣다. 韓國女性團體聯合 의 金恩京 政策弘報部長은 “會員들 사이에서도 意見이 紛紛하지만, 이참에 한두가지 이미지로 굳어진 女性人物들에 對한 再解釋 作業과 다양한 女性人物의 追加發掘이 必要하다는 데 共感하고 있다”고 밝혔다. [36] 이어 韓國 女性民友會 代表 유경희는 “一旦 女性인물이 새 貨幣에 反映되는 것은 贊成하지만, 되도록 個人의 正體性이 드러나는 人物이었으면 한다”고 신중한 意見을 밝혔다. [36]

女性團體와 이프 等 一部 言論을 中心으로 署名運動이 全國的으로 進行되었다. 署名運動은 온라인 이프 홈페이지와 포털 사이트 를 통해 進行되고 있는데, 3日 만에 500餘名이 넘는 支持者들의 署名이 이어지고 있다고 이프 쪽은 밝혔다. 이프는 5日 女性의 밤길 安全을 促求하는 第4回 女性專用파티 市廳앞밤마실 行事에서 一般人들을 對象으로 署名運動을 擴散되었고, ' 女性의 正體性 賢母良妻 안으로 捕獲되는 것에 對한 積極的 沮止 運動 [33] '을 推進했다. 그밖에 서울大學校 政治學 敎授 박효종 은 選定過程의 不透明性을 批判하기도 했다. [37]

家父長制 正當化 論難 [ 編輯 ]

2007年 10月 부터 12月 까지 大韓民國 의 女性團體들은 申師任堂 反對運動, 申師任堂 보이콧 運動을 벌였다. 女性團體에서는 10月 2日 申師任堂을 50000원 紙幣 圖案으로 選定하는 案件에 反對하는 聲明書를 내고 홈페이지와 포털사이트 等을 통해 署名運動을 펼쳐왔다. 申師任堂이 “父系血統을 成功的으로 繼承한 賢母良妻로서 支持되고 있다”는 것이 反對의 理由였다. 2007年 10月 15日 에는 女性 貨幣 人物로 어떤 女性이 選定되어야 하는가를 놓고 討論會를 開催했다. [36] 이 討論會에서 이프 理事 김신명숙 은 “새 貨幣에 들어갈 女性人物은 어머니나 아내 以前에 個人의 固有한 삶을 산 主體的인 女性, 家庭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社會와 共同體에 關心을 갖는 女性”이어야 한다고 主張했다. [36]

文化未來 이프 지는 “歷史的 人物로서 申師任堂은 儒敎 家父長制가 만들어낸 理想的 女性의 典型으로 自己 自身利己보다는 李栗谷의 어머니요, 李元壽의 아내로서 認定받고 있다”며 “‘어머니·아내’만이 普遍的 女性像으로 자리 잡는 것에 反對한다”며 批判했다. [34] 이어 “훌륭한 賢母良妻와 藝術的 才能까지 成功的으로 펼친 것으로 解釋되고 있는 申師任堂이 貨幣人物로 選定될 境遇 家父長制 社會가 女性에게 强要하는 典型的 二重勞動 勞動構造를 正當化할 憂慮가 있다”고 指摘했다. [34]

이프는 音樂家나 小說家,女性運動家 等이 貨幣 人物로 選定된 外國의 事例를 들며“현모양처로 浮刻돼 있는 申師任堂을 貨幣人物로 選定하고자 하는 것은 時代錯誤이자 國家的 亡身으로 女性人力活用을 통한 國家發展이라는 政策方向과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主張했다. [34] 이프는 ‘새時代 새女性’을 象徵하는 人物과 關聯 “朝鮮 時代 以前 이 땅에는 소서노, 선덕 女王 等 헌걸찬 女性들이 있었고,신사임당이 살았던 朝鮮 時代에도 許蘭雪軒, 萬德 等의 時代를 앞선 人物들이 있었다”며 “近世에도 柳寬順 뿐 아니라 羅蕙錫이 있다”고 밝혔다. [34]

안티페스티벌 等 文化運動을 펼쳐온 (寺)文化未來 이프(代表 엄을순·이프)에서는 2日 새 貨幣 女性 人物 申師任堂 選定을 反對하는 聲明書를 내어 全面的인 再檢討를 促求하는 署名運動으로 이를 沮止하겠다고 밝혔다. 이프 쪽은 “새 貨幣 人物로 女性의 選擇이 有力한 것은 歡迎할 만한 일이나, 申師任堂은 父系血統을 成功的으로 繼承한 賢母良妻로서 支持되고 있다”며 反對의 목소리를 높였다. [33]

이프 等은 “申師任堂은 歷史的 人物로서 男便과 子息들을 훌륭하게 立身揚名시킨 儒敎 家父長制 가 만들어낸 理想的 女性의 典型으로 賢母良妻에 藝術的 才能까지 成功的으로 펼친 것으로 解釋되는 申師任堂이 貨幣人物로 選定될 境遇, 母性 神話 가 살아있는 가운데 社會進出이 鼓舞되는 狀況에서 現代 女性들이 겪는 二重 勞動을 正當化할 憂慮가 높다”고 憂慮했다. [33]

申師任堂 50000원 紙幣 도안 輿論 [ 編輯 ]

2007年 政府에 依해 申師任堂은 50000원 紙幣의 主人公으로 도안되었으나, 도안 當時부터 選定 以後에도 女性界와 市民團體의 反撥과 批判으로 社會的인 이슈, 後遺症을 앓기도 했다.

申師任堂의 50000원 紙幣 도안설이 돌자 女性團體는 確定 前부터 申師任堂 選定을 反對해왔다. [38] 그러나 申師任堂으로 選定되자 女性界와 市民團體에서 反撥과 抗議가 이어졌다.

2007年 10月 권희정 이프 事務局長은 “貨幣에 女性이 한 名 들어간다는 事實보다는, 어떤 女性이냐가 重要하다”며 “女性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正體性이 있는데 그 中에서도 ‘어머니=女性’이라는 한 面만을 代表하기보다는 現代 女性들에게 肯定的 役割 모델을 提示할 수 있는 女性 人物이 必要하다”며 [33] 批判하였다. 이프는 代案으로 소서노, 선덕 女王, 許蘭雪軒, 萬德, 柳寬順, 羅蕙錫 等 다양한 女性들을 提示했다. 또 새 貨幣 女性人物 選定과 關聯해 ‘새 時代 새 女性’을 象徵할 수 있는 人物이 選擇될 수 있도록 폭넓은 論議를 始作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이를 위해 女性 各界의 意見을 收斂하고, 女性貨幣 人物 및 모든 候補 人物들에 對한 選定 經緯를 透明하게 할 것을 要求했다. [33]

2007年 11月 女性言論 文化未來 이프 지 代表 엄을순 記者는 “申師任堂이 賢母良妻라는 理由로 貨幣人物이 되는 것은 우리 社會가 文化的으로 많이 뒤처졌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또 모든 女性들에게 申師任堂처럼 슈퍼우먼 役割을 要求하는 것”이라고 거세게 抗辯했다. [38]

文化未來 이프 김신명숙 理事는 “오늘날 申師任堂이 代辯하는 ‘賢母良妻’의 이데올로기 日本 植民統治 의 殘滓”라면서 “貨幣 人物 選定만큼은 絶對로 輿論調査에 依存해선 안 된다”고 批判했다. [29] 戶主制廢止 市民모임 고은광순 代表도 “旣存 男性中心 社會의 口味에 맞았던 人物을 女性이라는 理由로 다시 내세워선 안 된다”며 “새 貨幣에 들어갈 女性으론 柳寬順이 가장 合當하다”며 否定的인 視角을 披瀝했다. [29]

韓國女性團體聯合 政策局長 김금옥은 “女性이 最初로 貨幣 도안 人物로 選定된 것은 바람직한 일이고 申師任堂이라는 人物 自體를 反對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選定 理由가 賢母良妻의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主體的으로 社會에 參與하는 現代 女性의 役割 모델로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批判했다. [37]

류근창 柳寬順烈士記念事業會長도 “21世紀 女性像으로 申師任堂이 適合한지, 아들인 栗谷 李珥 先生이 이미 貨幣 圖案에 있는데 굳이 넣어야 하는지 理解가 가지 않는다”며 “進取的이고 主體的인 女性像의 代表的인 人物인 柳寬順 烈士를 除外한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批判했다. [37] 서울大學校 政治學 敎授 박효종 은 “高額券 도안 人物 選定過程이 人氣投票처럼 進行된 것은 두고두고 問題가 될 部分”이라며 “輿論分裂을 助長할 수 있어 選定過程을 公開할 수 없었다는 韓國銀行의 主張은 窮塞하고 便宜主義的인 것”이라고 批判했다. [37]

30代의 한 主婦는 이렇게 主張했다.“솔직히 申師任堂의 아들이 栗谷이 아니라 망나니였으면 아무리 藝術的 才能이 있어도 認定을 받거나 이름을 남길 수 있었겠어요? 가뜩이나 아이들 成績表가 엄마 成績表이고 아이들을 名門 大學에 보내는 게 엄마의 平生 宿願事業인데 申師任堂을 每日 보는 紙幣에 담는다는 건 子息 社敎育 잘 시켜 名門大 보내라는 소리 아닌가요? [38] ”라며 敎育熱을 助長한다고 非難했다. 申師任堂이 50000원 紙幣의 主人公으로 도안, 發行되자 여기에 反撥한 一部 人士들과 네티즌들은 50000원 紙幣 使用 보이콧을 主張하기도 했다.

그女가 살아生前 朝鮮 을 이끌었던 적은 없다 또 自身이 살던 時代나 앞으로의 未來 政策을 위해 苦悶했던 女性도 아니다. 그런 人物을 大韓民國 의 얼굴로 紹介해야 하느냐는 批判도 있다.

國家主義 家族主義 를 意圖的으로 助長한다는 批判도 있다. 韓國銀行 이 “ 金九 는 愛國心을 鼓吹할 수 있고, 統一의 길을 摸索한 指導者로 國民에게 바람직한 人物像이며 申師任堂은 子女의 才能을 살린 敎育的 成就를 통해 敎育과 家庭의 重要性을 喚起하는 效果가 期待된다”는 選定理由를 밝힌데 對해 이는‘남성=국가,'‘여성=가족’이라는 傳統的 性役割을 그대로 踏襲했다는 것이다. [39]

기타 [ 編輯 ]

大韓民國 의 獨立運動家 兼 政治人 신익희 는 親庭아버지 신명화의 15代 傍系 後孫이 된다. 또한 彈琴臺 에서 戰死한 申砬 은 師任堂의 9寸 조카가 된다.

아버지 신명화의 6寸 동생은 身上 으로 身上 壬辰倭亂 忠州 彈琴臺 에서 戰死한 申砬 의 할아버지이며, 仁祖反正 의 功臣인 신경진 의 曾祖父이다.

2007年 11月 7日 社團法人 文化未來 이프는 記者會見을 통해 韓國銀行 二 十滿員 貨幣에는 金九 를, 五萬원 貨幣에 申師任堂을 選定한 것銀大韓民國 憲法이 規定한 性平等 原則에 違背되는 것이라며 批判하였다. [39] 文化未來 이프는 이 狀態로 貨幣人物이 決定된다면 國家人權委員會 에 '性差別' 事案으로 回附되어야 할 素地도 充分하다고 덧붙였다. [39]

이프는 또 肖像 選定節次가 民主主義 原則에 어긋난다고 主張했다. 團體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貨幣圖案諮問委員會 議長인 韓國銀行 이승일 副總裁가 現在 貨幣 肖像 人物인 李舜臣, 栗谷 李珥와 같은 덕수 李氏 宗親이며 栗谷의 어머니로 덕수 李氏 집안의 族譜 에 記錄되는 申師任堂이 女性 貨幣 人物로 選定된 것은 諮問委員團의 獨立性을 毁損할 憂慮가 있다“는 것이다. [39] 이에 對해 韓國銀行은 이승일 副總裁의 本貫은 덕수 李氏가 아닌 申平 李氏 라고 解明하는 한便 高額券 圖案 素材가 된 人物은 變更이 不可能하다는 立場을 表明했다. [40]

한 童話에서 師任堂의 이름을 '人選'으로 作名한 以後 師任堂의 本名이 '신인선'이라는 믿음이 存在하였으나 이는 事實이 아니며 師任堂의 本名이 적힌 文獻은 아직까지 發見되지 않았다.

家族 關係 [ 編輯 ]

  • 曾祖父: 신자승
  • 曾祖母: 宜寧 南氏 ( 朝鮮 3代 國王 太宗 의 4女인 旌善公主 의 딸)
  • 할아버지:新숙權
    • 아버지: 신명화
    • 어머니: 龍仁 李氏
  • 外할아버지: 移徙온
  • 外할머니: 江陵 崔氏(祖父:최치온,아버지:최응현)

+++ 烏竹軒: 최치온 所有 였으나 理事온이 妻 祖父에 遺産으로 받음(신사임당에게 烏竹軒은 重要한 場所임)

  • 男便 : 李元壽(李元秀, 1501年 ~ 1561年 )
    • 長男 : 이선
    • 長女 : 이매창(李梅窓)
    • 次男 : 이番
    • 次女 : 李氏
    • 三南 : 李珥 (李珥)
    • 子婦 : 橋下 盧氏 , 노경린 (盧慶麟)의 딸
    • 三女 : 李氏
    • 사남 : 이우 (李瑀), 文臣, 畫家

申師任堂 役割이 登場한 作品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後에 아들 栗谷 李珥를 烏竹軒 몽룡室에서 出産하기도 한다.
  2. 그의 孫子 武王 殷나라 를 滅하고 周나라를 세웠다
  3. [獵奇人物 韓國史]6.申師任堂의 男便 李元壽가 아니라, 李元壽의 아내 申師任堂이다.① 스포츠 傾向 2007年 9月 18日子
  4. 김재영, 朝鮮의 人物 뒤집어 읽기 (圖書出版 삼인, 1999) 65페이지
  5. 이은직, 《朝鮮名人傳》 (정홍준 驛, 일빛, 2005) 429페이지
  6. 이은직, 《朝鮮名人傳》 (정홍준 驛, 일빛, 2005) 424페이지
  7. 이은직, 《朝鮮名人傳》 (정홍준 驛, 일빛, 2005) 426페이지
  8. 박창수, 《꿈이 있는 10代 내가 만난 天才들》 (올댓北, 2008) 247페이지
  9. 이은직, 《朝鮮名人傳》 (정홍준 驛, 일빛, 2005) 425페이지
  10. 한겨레 21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2004年 2月 4日子
  11. “韓國歷代人物綜合情報” . 2012年 2月 2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3月 30日에 確認함 .  
  12. 김재영, 朝鮮의 人物 뒤집어 읽기 (圖書出版 삼인, 1999) 66페이지
  13. 박창수, 《꿈이 있는 10代 내가 만난 天才들》 (올댓北, 2008) 251페이지
  14. 許筠의 戀人과는 同名異人이다.
  15. 박창수, 《꿈이 있는 10代 내가 만난 天才들》 (올댓北, 2008) 249페이지
  16. 김재영, 朝鮮의 人物 뒤집어 읽기 (圖書出版 삼인, 1999) 72페이지
  17. 김재영, 朝鮮의 人物 뒤집어 읽기 (圖書出版 삼인, 1999) 67페이지
  18. 김재영, 朝鮮의 人物 뒤집어 읽기 (圖書出版 삼인, 1999) 68페이지
  19. 김재영, 朝鮮의 人物 뒤집어 읽기 (圖書出版 삼인, 1999) 69페이지
  20. 박창수, 《꿈이 있는 10代 내가 만난 天才들》 (올댓北, 2008) 253페이지
  21. 김재영, 朝鮮의 人物 뒤집어 읽기 (圖書出版 삼인, 1999) 70페이지
  22. 김태형, 《心理學者 正祖의 마음을 分析하다》 (歷史醫아침, 2009) 154페이지
  23. 김태형, 《心理學者 正祖의 마음을 分析하다》 (歷史醫아침, 2009) 155페이지
  24. 朝鮮 女性으로는 司書六卿의 內容을 完璧하게 理解하고 性理學 敵 素養을 갖춘 몇 안되는 女性이기도 했다.
  25. 이은직, 《朝鮮名人傳》 (정홍준 驛, 일빛, 2005) 431페이지
  26. 이은직, 《朝鮮名人傳》 (정홍준 驛, 일빛, 2005) 432페이지
  27. 김재영, 朝鮮의 人物 뒤집어 읽기 (圖書出版 삼인, 1999) 71페이지
  28. 男便 李元壽는 生前 官職은 通德郞 司憲府監察에 이르렀고, 事後 增 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에 贈職되었다.
  29. "申師任堂은 안돼"… 女性界 反撥 豫想 世界日報 2007.11.05
  30. 박창수, 《꿈이 있는 10代 내가 만난 天才들》 (올댓北, 2008) 250페이지
  31. 游泳, 《幸福한 나쁜여자》 (미네르바, 2008) 82페이지
  32. [歷史속의 江原人物] 申師任堂은 賢母良妻? 강원일보 2011年 1月 20日子
  33. 새 貨幣 人物 申師任堂 選定 有力…女性界 反撥 한겨레 2007年 10月 2日子
  34. 女性界 "'賢母良妻' 申師任堂 貨幣人物은 國家亡身" 反對 목소리 나와 朝鮮日報 2007.10.02
  35. 새 貨幣 人物 “申師任堂 代身 柳寬順을!” 한겨레 2007年 10月 23日子
  36. 高額 貨幣 女性人物 申師任堂 論難 加熱 한겨레 2007年 10月 18日子
  37. “申師任堂, 21世紀 女性像에 안맞아” 文化日報 2007年 11月 5日子
  38. [아지매通信] 申師任堂의 ‘부활’ 京鄕新聞 2007年 11月 8日子
  39. 女性團體 "5萬원券 申師任堂 選定은 性平等 違背" 노컷뉴스 2007年 12月 7日子
  40. 박상현 (2007年 11月 8日). “韓銀 "高額券 도안人物 變更 不可 " . 《聯合뉴스》 . 2020年 7月 20日에 確認함 .  

關聯 資料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바보, 《李德一의 女人列傳》 (김영사, 2003)

  • 노유진, 《申師任堂의 어머니 리더십》 (W미디어, 2009)
  • 조용진, 《申師任堂:풀과 벌레를 즐겨 그린 畫家, 어린이 美術館》 (나무숲, 2000)
  • 晏嬰, 《大韓民國 女性 NO.1 申師任堂》(위즈앤비즈, 2008)
  • 世上읽기, 《申師任堂:禍 幅에 담은 藝術》(世上읽기, 2009)
  • 이덕일, 《李德一의 世上을 바꾼 女人들》(玉堂, 2009)
  • 도지현, 《女性이여 自己만의 人生을 즐겨라》 (꿈科希望, 2007)
  • 정옥자, 《時代가 선비를 부른다》 (효형출판, 1998)
  • 이街園, 《이조명인列傳》 (을유문화사, 1967)
  • 李東洲, 《한국회화소사》 (서문당, 1972)
  • 손인주, 《申師任堂의 生涯와 敎育》 (박영사, 1976)
  • 이은상, 《韓國의 人間像 5》 (신구문화사, 1980)
  • 이은상, 《師任堂의 生涯와 藝術》 (성문각, 1957)

. 이양숙 그륜델 덕수 李氏 ,獨逸語 飜譯, 出版 《申師任堂 行狀記 Das haus im schwaryen Bambushain 烏竹軒》 ISBN   3-00-013842-0 , 《Grundel, 2004》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