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한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주요한
朱曜翰
大韓民國 第15代 商工部 長官
任期 1960年 9月 12日 ~ 1961年 5月 3日
大統領 윤보선 大統領
總理 場面 國務總理
次官 김재곤 商工部 次官

이름
別名 雅號(雅號)는 松蛾(頌兒), 송아지, 木神(牧神), 벌꽃, 洛陽(落陽)
日本式 이름은 마쓰무라 고이치 (松村紘一)
身上情報
出生日 1900年 12月 5日 ( 1900-12-05 )
出生地 대한제국 大韓帝國 平安南道 平壤
死亡日 1979年 11月 17日 ( 1979-11-17 ) (78歲)
死亡地 대한민국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學歷 중화민국의 기 中華民國 상하이 後場 大學校 工業化學과 學事
經歷 대한해운公社 社長
正當 無所屬
父母 주진우 (簿)
兄弟姊妹 주요섭 (아우), 주영섭 (아우)
宗敎 改新敎 ( 長老會 ) → 無宗敎

주요한 (朱曜翰, 日本式 이름: 松村紘一 ( 마쓰무라 고이치 ), 1900年 12月 5日 ~ 1979年 11月 17日 )은 日帝强占期 時代에 活動한 社會運動家·詩人·言論人이며 劇作家 兼 企業人으로 活動한, 大韓民國의 小說家 , 是認 , 飜譯 文學家 , 劇作家 , 言論人 , 企業家 , 政治가 이다. 大韓民國 第15代 商工部 長官 職責을 지냈다.

經歷 [ 編輯 ]

變節 [ 編輯 ]

불놀이 〉를 지어 韓國近代視 形成에 先驅者的인 業績을 남겼고 [1] 雅號 는 松蛾(頌兒)이며, '송아지'와 '牧神'(牧神), 주락양(朱落陽 [1] ), 벌꽃, 洛陽(落陽)이라는 筆名을 使用했다는 말만 들으면 文學家로만 여겨지겠지만, 朱耀翰은 變節한 親日派이다. 日帝强占期 상하이 大韓民國 臨時政府 에 參加하여 臨時 政府 機關紙 《 獨立新聞 》 記者로 活動하기도 했었으나, 1937年 修養同友會 事件 前後로 變節, 日帝 戰時體制때 總督府의 內鮮一體 體制에 順應하여 積極的인 協力活動을 한 親日派 이다. 民族問題硏究所 에서 2015年 8月 15日 富川市廳 廣場에 揭示한 宣傳 물에서 朱耀翰을 가리켜 "죽음과 삶을 超越한 皇國精神"이라고 했다. 그 根據로 朱耀翰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가실 때에는 빨간 댕기를 드리겠어요"라는 文章으로 始作하는 댕기(國民文學 1941年), "나는 간다. 萬歲를 부르고 天皇陛下 萬歲를 목껏 부르고, 大陸의 풀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라는 文章으로 始作하는 志願兵 이인석에게 줌(1941年 3月號 新時代)라는 글을 써서 日帝의 侵略戰爭을 '愛國'이라며 宣傳했다.

親日 未淸算 關聯 論難 [ 編輯 ]

解放 以後에는 政治人으로 活動하였고, 第2共和國 場面 內閣에서 부흥부 長官, 商工部 長官 을 歷任했다. 本貫은 新安 (新安)이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數學 [ 編輯 ]

原籍地는 平安南道 平壤 이며 亦是 平安南道 平壤 에서 改新敎 牧師인 주공삼 (朱孔三)의 8男妹 中 長男으로 태어났다. 朱耀翰은 주공삼 (朱孔三, 兒名 주진우(朱珍雨))의 4男 4女 中 長男으로, 小說家 주요섭 과 劇作家 주영섭 이 朱耀翰의 親同生이다.

1912年 平壤의 崇德小學校 在學 中 아버지를 따라서 度日하여 日本 에서 中學校와 高等學校를 卒業했다. 메이지 學院 在學 中에 文學에 뜻을 두고 學友들과 回覽誌를 發行하는 한便 日本 詩人 가와지 류코(川路柳虹)의 門下에서 近代詩를 工夫하다가 1919年 《창조(創造)》 同人에 參加하였다. 그 뒤 日本語 로 쓴 詩를 發表하며 文壇에 入門하였고,

1919年 時 에튜우드, 눈 等을 發表했다. 代表作으로 꼽히는 詩 〈불놀이〉(1919)도 이 時期에 김동인 , 전영택 等과 함께 發刊한 同人誌 《 創造 》 創刊號에 發表했다. 〈불놀이〉는 西유럽的인 形態의 最初의 近代詩로 評價된다. 그 後 繼續 〈아침處女〉 〈빗소리〉 等, 浪漫的인 抒情詩를 發表하였다.

獨立 運動과 歸國, 言論 活動 [ 編輯 ]

大韓民國 臨時政府 活動 [ 編輯 ]

1919年 3·1 運動 을 契機로 상하이 로 亡命하여 大韓民國 臨時政府 에 合流한 뒤 4月 臨時 議政院 議員 에 選出되고, 臨時政府의 機關紙인 《 獨立新聞 》 記者가 되었다.

臨時政府가 創造論, 改造論, 臨政 固守論으로 나뉘어서 派閥 싸움으로 瓦解狀態가 놓이자 失望한 그는 《 獨立新聞 》 記者職과 臨時 議政院 議員 職을 모두 辭退한다.

그 뒤 이광수 는 歸國하였지만 그는 바로 歸國하지 않고 상하이의 호강大學 으로 進學, 호강大學 을 卒業했다.

國內 言論인 活動 [ 編輯 ]

中國 호강大學 卒業 後 1925年 歸國하여 《 東亞日報 》에 入社, 동아일보 取材部 記者와 동아일보社 編輯局長 및 論說委員을 歷任했다. [1] 그 뒤 자리를 옮겨 《 朝鮮日報 》 等에 勤務했다. 그 뒤 朝鮮日報 社 編輯局長 및 論說委員을 歷任했다. 詩集 《아름다운 새벽》(1924), 《3人 媤家집》(1929), 《奉仕꽃》(1930)을 刊行하였다. 1927年 新幹會 가 組織되자 參與하였고 1929年에는 三人媤家집을 刊行하였다.

朝鮮日報 社 專務를 끝으로 辭退하고 企業 活動에 뛰어들었다.

日帝 强占期 後半 [ 編輯 ]

社會 活動과 轉向 [ 編輯 ]

그는 꾸준히 안창호 와 連絡을 주고받았는데 안창호 를 中心으로 組織된 대한인국민회 興士團 에 加入하여 活動하였다. 그 뒤 안창호 修養同友會 를 結成하자 加入하여 會員이 되었다. 1930年代부터는 化身産業 取締役 等 企業 活動을 하면서 始作이 뜸해졌고, 光復 後에는 文壇 活動을 접고 企業人, 言論人, 政治人으로만 活動했다.

1930年 代 後半 화신상회 理事로 選出되었다.

戰時體制機 活動 [ 編輯 ]

1942年 2月 18日子 每日申報에 실린 朱耀翰의 詩文.

日帝强占期 時期 동안 朱耀翰은 言論人으로 지내면서 '合法的인 空間'下에 實力養成運動과 社會啓蒙運動 發展에 힘써왔으나 1937年 修養同友會 事件 으로 知識人들이 大擧 逮捕되었을 때 주요한度 檢擧되었고, 이듬해 이광수 , 전영택, 현제명 , 홍난파 等과 함께 轉向하였다. [2] 以後 戰時體制機 동안 總督府의 體制에 順應하면서 積極的인 協力活動을 하게 된다. 朝鮮文人輔國會 , 조선임전보국단 , 朝鮮言論輔國會 等 여러 親日 團體에 加擔해 徵兵制를 宣傳하는 等 太平洋 戰爭 修行에 積極 協力했다. 創氏改名 한 이름도 日本의 八紘一宇(八紘一宇) 理念에서 따온 것이다.

1944年 鍾路의 人士들이 學徒兵 을 督勵하기 위해 組織한 鍾路翊贊委員會 의 會員 [3] 이 되었다. 1945年 初 朝鮮言論輔國會에 加入하였다.

光復以後 政治 活動 [ 編輯 ]

政界 入門 初期 [ 編輯 ]

光復 後 興士團 에 關係하여 活動하였으며 1945年 9月 한민당 이 創黨되자 그에게 迎入 提議가 들어왔으나 拒絶하였다. 그 해 朝鮮商工會議所 ( 大韓商工會議所 의 前身) 特別委員에 選出되었다. 그 뒤 大寒貿易協會 會長(1948)을 지냈고, 國際問題硏究所 所長에 被選되었으며, 1954年 護憲同志會에 參與한 뒤 民主黨 所屬 政治人으로 活動했다. 한便, 1949年 영풍그룹의 母體인 영풍企業社를 장병희, 최기호와 함께 共同設立했다. 그러나 以後 場面 內閣의 商工部 長官이 된 以後 영풍은 朱耀翰을 除外한 2人體制가 된다. [1]

1958年 5月 서울 中區에서 大韓國民黨의 윤치영 을 누르고 民議員에 當選되었으며 4·19 革命 으로 第1共和國 이 崩壞된 뒤 그해 5月의 民議員 選擧에 出馬하여 再選되었다. 8月 민주당이 政權을 잡은 第2共和國 內閣에 場面 에 依해 拔擢되어 부흥부 長官, 商工部 長官으로 立脚했으며, 1961年 初 經濟科學審議回 委員에 被選되었다.

生涯 後半 [ 編輯 ]

1961年 5月 5·16 軍士政變 으로 場面 政權이 무너진 뒤에는 公職을 辭退하고 野黨 政治人으로 活動하다가 《 대한일보 》 社長과 대한해운公社 代表理事 等을 지냈다. 以後 政治淨化法에 걸렸다가 1963年 政治淨化法에서 解禁되면서 野黨 政治人으로 活動했으나 박순천 場面 , 정일형 等의 再建 민주당 에는 參與하지 않았다. [4] 이를 두고 野黨에서는 그가 軍事政權에 妥協한 것이라며 非難을 加했다.

1964年 經濟科學審議會議 委員, 1965年 부터 73年까지 대한일보 社 會長을 지냈다. 以後 文筆 活動에 專力하다가 1979年 에 80歲의 나이로 死亡했다. 京畿道 高陽郡 (現 高陽市 [5] ) 벽제면에 安葬되었다.

事後 [ 編輯 ]

〈불놀이〉는 韓國 近代 自由詩의 嚆矢로 韓國文學史에서 重要하게 取扱되는 作品이며, 朱耀翰은 金億 과 함께 初期 詩壇의 開拓者로 評價받고 있다. 浪漫的인 讚頌歌 作詞도 하여 韓國敎會 音樂發展에 貢獻하였다.

2002年 發表된 親日派 708人 名單 親日 文學인 42人 名單 ,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選定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文學 部門에 包含되어 있으며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와카 形式으로 쓴 日本語 詩集 《손에 손을( 日本語 : 手に手を )》(1943) 等 總 43篇의 親日 作品名이 公開 [6] 되어, 親日 文學인 42人 名單에 選定된 門人 가운데 이광수 다음으로 篇數가 많았다. 1979年 大韓民國 政府로부터 國民勳章 無窮花章을 追敍받았다. [7]

家族 關係 [ 編輯 ]

學歷 [ 編輯 ]

著書 [ 編輯 ]

詩集 [ 編輯 ]

  • 詩集 《아름다운 새벽》
  • 《3人媤家집(三人詩歌集)》(1929), 이광수 (李光洙)·金東煥(金東煥)과 共著

《奉仕꽃》(世宗書院) (1930)

論著 및 小說 [ 編輯 ]

  • 《自由의 구름다리》(1959)
  • 《復興論議》(1963)
  • 《안도산戰서》(安島山全書) (1963)

賞勳 經歷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54年 總選 3代 國會議員 서울 鍾路區 甲 無所屬 4,271票
14.57%
4位 落選
1958年 總選 4大 國會議員 서울 中區 甲 民主黨 17,492票
68.45%
1位 初選
1960年 總選 5大 國會議員 서울 中區 甲 民主黨 18,781票
65.42%
1位 再選

各州 [ 編輯 ]

  1.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9j3616b
  2. 修養同友會 事件 은 相當히 波長이 컸던 事件이다. 이 事件으로 數 많은 民族運動家,獨立運動家들 사이에 變節者가 續出하게 되었다.
  3. 編輯部 지음, 《이이화와 함께 韓國史를 橫斷하라》(한길사, 2004) 328페이지
  4. 주요한 外에도 郭尙勳 等 민주당 新派 一部는 再建 민주당에 參與하기를 拒否했다.
  5. 1992年 고양시로 昇格되었다.
  6. 김재용 (2002年 8月). “親日文學 作品目錄” . 《실천문학》 (67號): 123~148쪽. 2007年 9月 2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9月 3日에 確認함 .  
  7. 김덕련 (2005年 8月 31日). “{發掘} 主要 親日名單 120名 中 34名 解放後 勳·褒章·表彰 徐薰 - 金性洙는 2等級, 柳寬順은 3等級” . 오마이뉴스 . 2008年 4月 10日에 確認함 .  
  8. 박경수 (2014年 12月). “朱耀翰의 傷害時節 市와 二重的 글쓰기의 問題”. 《韓國文學論叢》 (68輯): 443~483쪽.  

參考資料 [ 編輯 ]

前任
전예용
第6代 부흥부 長官
1960年 8月 23日 ~ 1960年 9月 12日
後任
김우평
前任
이태용
第15代 商工部 長官
1960年 9月 12日 ~ 1961年 5月 3日
後任
태완선
前任
김우평
부흥부 臨時 長官
1960年 12月 ~ 1961年 1月 30日
後任
태완선
前任
태완선
第9代 부흥부 長官
1961年 5月 3日 ~ 1961年 5月 18日
後任
박기석
(建設部 長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