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昇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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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昇和
國家再建最高會議 의 最高委員
任期 1961年 6月 18日~1961年 9月 29日
大統領 윤보선
議長 장도영 最高會議 議長
朴正熙 最高會議 議長
受賞 장도영 ( 內閣首班 )
송요찬 ( 內閣首班 )

國防部 人事國 의 副局長
任期 1964年 1月 8日~1964年 5月 31日
大統領 朴正熙
總理 최두선
정일권
長官 김성은
次官 강서룡

國防部 運營次官補
任期 1966年 1月 14日~1966年 2月 11日
前任 정병주
後任 정재석
大統領 朴正熙
總理 정일권
長官 김성은
次官 강서룡

이름
別名 號: 벽송 碧松
身上情報
出生日 1929年 2月 27日 ( 1929-02-27 )
出生地 日帝强占期 慶尙北道 김천군 봉산면
居住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死亡日 2002年 6月 12日 ( 2002-06-12 ) (73歲)
死亡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西大門區 新村洞 세브란스病院
國籍 大韓民國
學歷 國防大學院 行政學 碩士
經歷 第22代 육참總長 兼 戒嚴司令官
大韓體育會 理事長
統一民主黨 常任顧問(1987年)
正當 無所屬
本館 連日
父母 아버지 정시영
어머니 仁川 李氏
兄弟姊妹 4男 2女 中 長男
配偶者 신유경
子女 3男 1女
宗敎 天主敎 ( 洗禮名 : 베드로 )
軍事 經歷
服務 大韓民國 陸軍
服務期間 1948年-1979年
勤務 陸軍 第3師團
陸軍本部
國家再建最高會議
最終階級 大將
指揮 陸軍 第1軍司令部 司令官
陸軍 第3軍團 軍團長
陸軍士官學校 校長
陸軍綜合行政學校 校長
主要 參戰 韓國 戰爭
베트남 戰爭
12·12 軍事叛亂 抵抗 作戰

鄭昇和 (鄭昇和, 1929年 2月 27日 ~ 2002年 6月 12日 )는 大韓民國의 軍人 出身의 政治人 이었다. 韓國 戰爭 이 勃發할 무렵에는 陸軍 第3師團(白骨部隊) 大隊長 으로 活動했고 後날 제22대 陸軍參謀總長 을 歷任했다. (號)는 벽송(碧松)이다. [1]

12.12 쿠데타 以後 하나회 를 비롯한 新軍部 勢力에 依해 當時 前職 中央情報部 部長 을 지냈었던 김재규 가 恣行한 暗殺 事件에 連累되어 補充役 二等兵으로 豫編되었다가 後날 YS 文民 政府 時代 에 와서 無罪 判決을 받고 復權되었다. 그의 遺骸는 國立大前賢充員 에 安葬되어 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정승화는 1929年 2月 27日, 慶尙北道 金泉 에서 出生하여 지난날 한때 慶尙北道 尙州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다. 그의 19代祖 정종소는 成均館 四星을 歷任했으나 端宗 復位 運動 이 失敗로 돌아가자 落鄕하였다. 그 뒤 18代祖 정이교 司憲府 掌令과 弘文館 의 敎理를 歷任했지만 戊午士禍 로 禍를 當하자 정이교의 妻와 子息들은 外家인 金泉 으로 가서 隱居하였고 以後 金泉 에서 定着生活을 했다. 1947年에 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 에 5期生으로 入學하여 1948年 4月 卒業과 同時에 少尉로 任官하였다.

軍人으로서의 生涯 [ 編輯 ]

6.25 戰爭과 5.16 軍事 政變 [ 編輯 ]

以後 大韓民國 國軍 이 出帆하면서 陸軍 少尉가 되었고, 高速昇進 後 大尉가 되었다. 1950年 6·25 戰爭 이 일어나자 3師團 大隊長으로 洛東江 戰鬪 機械 - 안강 戰鬪, 兄山江 渡河 作戰에 指揮官으로 出戰했다. 현리 戰鬪 에서는 中共軍에게 捕虜가 되었다가 脫出하기도 하였다. 이어 陸軍 第3步兵師團 作戰參謀로 在職 中 1953年 休戰을 맞이하였다.

1961年 5月 5.16 軍事 政變 때는 陸軍 本部 隸下 防諜部隊長(現在의 名稱은 機務司令官)을 歷任하고, 現役 大領 階級으로써 陸軍 2軍團 作戰參謀를 거쳐 陸軍 2軍團 作戰과 課長으로 在職 中 國家再建最高會議 最高委員 [2] 等으로 電擊 任命, 兼任되었다. 그해 8月 11日 最高委員의 한 一圓 時節, 드디어 陸軍 准將 으로 進級하였다. [2] 1962年 2軍團 作戰課長에서 다시 防諜部隊長으로 轉任되었다. 1962年 7月 30日에는 北韓 에서 越南한 越南歸順者 원호審査委員會 審査委員을 兼任하였다.

1963年 11月에는 野黨으로부터 軍 不在者 投票 當時 選擧過程을 造作했다는 疑惑을 받기도 했다. 11月 21日 民主黨 이춘기 選擧事務長은 鄭昇和 防諜隊長이 차규헌(車圭憲) 陸本 情報處長과 함께 第2群團防諜隊와 大戰地區防諜隊에서 兵士들의 選擧 無關心을 誘導했다는 疑惑이었다. [3] 이어 이춘기 事務長은 그가 國會議員 選擧에서 不正選擧를 하도록 指令을 내렸다며 그가 내린 指令 一部를 入手하여 暴露하였다. [4]

  1. 各 部隊에서는 이미 指示한 대로 選擧活動을 하고 있는 것으로 認定한다. 그러나 士兵들은 如前히 選擧에 無關心하다. 따라서 軍의 本來의 時間 外에 敎育시키는 것을 止揚하고 優秀한 士兵을 選拔해서 浸透工作으로 成果를 絶對 擧揚하는 方法을 쓰라.
  2. 選擧法을 無視하고 中隊別로 投票所를 定해 投票를 시키되 選拔된 士兵의 指示에 依해서 투표하게 하도록 한다. [4]

그러나 민주당 等 野黨 側의 攻擊에서 그는 별다른 制限이나 制約을 받지 않았다. 以後 陸軍 步兵 第7師團 參謀長 等을 지내고 國防部 人事國 副局長, 1軍團 參謀長, 陸軍 第7師團 副師團長, 1965年 陸軍 第1軍團 副軍團長, 陸軍本部 特典감, 陸軍 第3軍團 參謀長, 陸軍 第3軍團 副軍團長, 1966年 11月 所長으로 進級, 1966年 12月 陸軍 第7師團長, 1967年 1月 國防部 人事局長이 되었다.

大韓體育會 關聯 活動 [ 編輯 ]

1967年 2月 初에는 베트남 戰爭 派兵 軍人들의 不在者投票 選擧管理團腸이 되어 選擧節次管理委員에 選定된 軍人들을 帶同하고 베트남 에 다녀왔으며, 그해 2月 24日 大韓體育會 理事에 選出되었다. 8月에는 문교부 體育審議委員에 委囑되어 兼任하였다. 1967年 11月에는 스페인 마드리드 에서 열리는 第22次 國際軍人體育大會(CISM) 年次 總會에 大韓民國 國軍 側 代表團의 한 사람으로 參席하고 12月 16日에 歸國하였다.

1968年 2月 17日에는 非常措置로 全 將兵의 轉役 保留 政策을 起案하여 上申시켰다. [5] 이로써 그 무렵 轉役 豫定된 將兵들의 轉役은 2~4個月 以上 延長되었다. 3月 4日 大韓體育會 理事에 再選任되고 3月 16日에는 陸本 人事局長으로 大韓體育會 海外派遣, 招請審議委員會 委員을 兼任했다.

陸軍綜合行政學校 校長과 陸軍士官學校 校長 [ 編輯 ]

以後 1968年 陸軍本部 人事參謀部 次長으로 8月 19日 陸軍綜合行政學校 創設委員會 委員長을 겸하였고, 1968年 10月 16日 陸軍 綜合行政學校 校長이 되었다.

1970年 1軍司令部 參謀長을 거쳐 그해 7月 陸軍本部 企劃參謀部腸, 8月 陸本 政策企劃部長이 되어 8月 29日 英國, 프랑스, 벨기에, 터키, 西獨, 스웨덴을 訪問하였으며, 유럽 巡訪 中 9月 初 다시 陸本 企劃參謀部腸이 되어 9月 6日 서종철 陸軍參謀總長 을 遂行하여 벨기에 카스討議 유럽駐屯 聯合軍 最高司令部(SHAPE)를 訪問 앤드류 J. 굿페스터 司令官을 面談하고 歸國했다.

1972年 陸軍本部 企劃管理參謀部 部長, 1973年 3月 6日 陸軍 中將 으로 特進하여 以後 陸軍 第3軍團 軍團長 等을 等을 두루 歷任하고 1975年 9月부터 1977年 12月까지 陸軍士官學校 校長을 歷任했다. 1977年 12月 陸軍 第1軍司令部 司令官, 1979年 2月 1日에 第22代 陸軍參謀總長 으로 昇進했다.

10.26 事態 顚末 [ 編輯 ]

그러나 그는 朴正熙 大統領이 被殺된 10.26 事態 때에 그 場所인 궁정동 安家 '가'棟에 있었으며(피살장소는 '나'桐이었음), 이러한 事實이 陸軍 保安司令部 司令官 全斗煥 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名分이 되었다.

10月 27日 새벽 4時 濟州島를 除外한 全國에 非常戒嚴이 宣布되었고, (戒嚴司令官 정승화) 國務總理 최규하가 大統領 職務代行이 되었다. [6] 10月 27日 새벽 4時附로 戒嚴司令官이 되어 김재규 逮捕 作戰을 指示하였다. 그러나 鄭昇華는 心證만 있고 確實한 證據를 잡지 못해 김재규 를 쉽게 逮捕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11月 19日 戒嚴司令部는 戒嚴布告 8號를 鞏固해서 全國 大學에 내려졌던 休校令을 거두어 들였다. 다시 學校에 나온 大學生들은 維新憲法 撤廢를 要求하는 示威를 벌인다. [7]

12·12 軍事 叛亂 前에 大權 論爭 [ 編輯 ]

정승화는 不利한 立場에 서 있었지만 野黨 人士들과 손잡는 것을 拒否하였다. 그는 野黨 人士들의 眞情性을 疑心하였다.

11月 26日에는 言論社 社長들을 招待한 點心 자리, 27日에는 言論社 編輯局長, 30日 國防部 出入記者들과 자리에서 김대중이 大統領 되는 길을 막겠다고 發表한다. [7] 정승화는 後날 그 發言에 對해 김대중에게 謝過하고 言論에 所懷를 “ 中央情報部 의 ‘김대중 파일’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고 밝혔다. [7]

그런데 本人이 當하고 나서 ‘정승화 파일’이라는 것을 들어보니 捏造된 것이 많았고, 只今은 그런 ‘文書’에 對한 本人의 생각이 달라졌다고 밝혔다. [7]

11月 28日 以後 大權 問題가 이슈가 되었다. 정승화는 言論社 幹部들을 세 次例나 陸軍本部로 招待하여 次期 大權을 둘러싸고 國民의 關心이 쏠린 세 사람을 極烈하게 非難했다. 卽 김대중은 思想이 의심스럽고, 김영삼은 無能力하며, 김종필은 너무 腐敗했다는 말이다. [8] [9] 이것은 當時 軍部의 一般的인 생각이었다. 이런 所信을 가졌던 정승화는 結局 野黨 人士들에게 어떠한 協力, 人情도 拒否하였다. 전두환이나 노태우에게 抵抗하기 위해서라도 野黨에 參與하라는 어느 後輩, 同僚들의 勸告도 冷靜하게 잘라버렸다. 이것은 非常戒嚴下에서 軍이 政治介入을 한다는 印象을 줄 憂慮가 있어 每日 열리는 時局對策會議에도 參席안하려 했으나 崔大統領 의 勸誘로 不得已 參席하는 等에 아주 조심스런 行步였다. [10] 또, 전두환氏가 鄭昇華 戒嚴司令官은 3金氏의 資質과 資格에 對한 批判을 했다고 證言했으나, 實際로는 김대중氏의 資格에 對한 批判만 했을 뿐 김영삼, 김종필氏에 對한 批判을 한 적은 없었다고 1990年 1月 3日 反駁 聲明에서 이 問題를 言及한다. [11]

12月 9日 전두환 保安司令官을 東海警備司令官 으로 轉補 시키겠다는 建議를 골프場에서 노재현 國防長官에게 했으나, 김재규 裁判이 繼續中일 때 搜査責任者를 轉補 시키는 것은 一般의 疑惑을 불러일으킬지 모르니 一時 留保하라는 國防長官의 말에 따랐다. [10]

生涯 後半 [ 編輯 ]

二等兵으로 强制 豫編 [ 編輯 ]

1979年 12.12 事態 當時 전두환의 部下 허삼수 等에게 連行되고, 陸軍參謀總長 職이 剝奪됨과 同時에 陸軍 保安司令部 西氷庫 分室에서 當時 陸軍 首都警備司令官 장태완 所長 等과 함께 拷問을 받은 그는 國防部 軍法會議 裁判에 回附되어 첫 公判에서 內亂幇助未遂罪로 懲役 10年型을 宣告받았다. 裁判 直後 補充役 陸軍 二等兵 으로 强制 豫編되었고 곧이어 國防部 長官의 刑量 確認 過程에서 懲役 7年型으로 減刑되었다.

軍 矯導所에서 服役하다 1980年 6月 10日 刑執行停止로 釋放되었으며, 執行猶豫型이 내려졌지만 81年 3月 전두환 大統領 就任記念 特赦로 赦免, 復權되었다가 1988年 軍籍이 回復되었다.

生涯 後半 [ 編輯 ]

以後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987年 第13代 大統領 選擧 直前 電擊的으로 統一民主黨 에 入黨하여 統一민주당 常任顧問으로 김영삼 候補를 支持하였다. 하지만 1988年 4月 25日을 期하여 政界 隱退 以後 事實上 政治에서 完全히 손을 떼었다. 1993年에는 全斗煥 盧泰愚 를 內亂 性向 叛亂 主犯으로, 김계원 前 타이완 駐在 大使와 金鎭基 豫備役 陸軍 准將을 間接 道義性 責任 回避 關聯 從犯으로 모두 金永三 政府 에 告發하고자 장태완 , 李建榮 等과 함께 작은 모임을 가진 바 있다. 1997年 " 김재규 內亂企圖 幇助未遂嫌疑"에 對하여 無罪를 宣告받았다. 그 後 大韓民國 성우회 會長 等을 歷任하기도 했다.

1999年부터는 糖尿 高血壓 等 各種 疾患으로 苦生하였고, 晩年에는 파킨슨病 을 앓기도 했다. [12] 2002年에 病勢가 惡化되어 서울 신촌세브란스 病院에 入院했다가 그해 6月 12日 死亡했다.

事後 [ 編輯 ]

셋째 아들 정이열은 그의 生前에 陸士 38期로 卒業하고 陸軍本部 等에서 勤務하였다. 정승화는 事後 2002年 6月 陸軍張으로 葬禮式을 치른 뒤 大田 顯忠院에 安葬되었다. [13]

語錄 [ 編輯 ]

  • 大統領 死亡으로 保佐陣들이 모여드는 時間에 大統領 祕書室 김계원 室長은 최규하 大統領 權限 代行을 모시고 靑瓦臺에서 陸軍本部를 向하는데 大統領 警護室에 警護를 붙이지 않는다. [14] 정승화 陸軍參謀總長은 차지철 警護室長이 弑害 事件 犯人인 줄 알고 首都警備司令官에게 靑瓦臺 包圍를 指示하고, 이재전 警護室 次長에게 警護室 要員들의 出動 禁止를 指示하였다. [15]
  • 盧 國防長官 이 정승화와 전두환을 急히 불러 전두환 司令官에게 “鄭 總長의 도움을 받아서 김재규를 連行하라”고 指示했고 鄭 總長은 아래와 같은 內容의 口頭 指示를 전두환 司令官에게 내렸다고 한다. [16] 그리고 전두환은 安家에서 西氷庫 分室로 옮겨라고 指示했다고 한다. [16] 좀더 正確히는 憲兵監 김진기 准將과 전두환을 불러서 憲兵監이 逮捕를 하고 전두환 司令官은 護送과 搜査를 맡았다고 한다. [11]

鄭昇華 戒嚴司令官이 김재규를 保安司 安家로 데려가 鄭重하게 잘 모시라고 當時 保安司令官 全斗煥에게 指示한 것은 鄭昇和 自身은 大統領 弑害 現場에서 直接 弑害犯人 김재규를 봤으면서도 事件의 眞實을 숨기고 김재규를 個人的으로 保護하려 한 情況이 남는 證據가 되는 것이다.

當時 허화평 保安司 祕書室長은 정승화 總長의 잘 모셔라는 指示에 따른 전두환 保安司令官의 貞洞 安家로 잘 모셔라는 말을 듣고 保安司令官이 民間人을 主로 接見하는 곳으로 김재규를 直接 에스코트해서 데려갔다고 證言한다. [16] 그리고 허화평은 전두환 保安司令官에게 電話 連絡을 하고 安家에서 西氷庫 分室로 김재규를 犯人인거 같다며 옮긴다. [16]

  • 戒嚴司令官으로서 이 發言을 하니 모인 軍將星들은 웅성거리고 朴正熙 體制가 잘못됐다면 軍 指揮官도 책임지고 물러나야 하지 않느냐며 따지는 일도 생기고 會議가 흐지부지 끝났다고 한다. [16]

個人的으로 朴正熙 大統領이 돌아가신 것은 哀惜하나 國家와 國民 全體의 不幸은 아닙니다. 朴 大統領 體制 는 잘못됐으므로 是正돼야 합니다.

1979年 11月 24日 戒嚴宣布 後 첫 ‘民官(民官) 戒嚴擴大會議’ [16]

그의 見解 [ 編輯 ]

12·12軍士 政變과 關聯하여 "전두환 等 新軍部 가 政權을 奪取하겠다는 具體的 시나리오를 짠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17] 新軍部가 애初에는 軍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不安感 때문에 自身을 밀어내고 軍權을 掌握하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저질렀다고 看做 하였다. [17] 軍事 政變 後에 强力한 國民의 反撥과 光州 民主 抗爭으로 이어지면서 事態가 커지자 事後 安全을 위해 國權까지 奪取하게 된 것이 아니겠느냐는 解釋을 했다. [17]

咀嚼 [ 編輯 ]

著書 [ 編輯 ]

  • 《大韓民國 軍人 鄭昇和》
  • 《12.12事件 정승화는 말한다》

年譜 [ 編輯 ]

  • 1950年 韓國 戰爭 當時 白骨部隊 大隊長
  • 1952年 陸軍 第3師團 作戰參謀
  • 1956年 陸軍 第22師團 69聯隊長
  • 1961年 陸軍 准將 昇進
  • 1961年~1962年 陸軍 第2軍司令部 作戰處長 兼 國家再建最高會議 最高委員
  • 1962年~1964年 陸軍 防諜部隊長
  • 1964年~1967年 陸軍 步兵 第7師團 參謀長
  • 1967年 陸軍 所長 昇進
  • 1967年~1968年 國防部 人事局長
  • 1968年~1969年 陸軍綜合行政學校 學校長
  • 1969年~1970年 陸軍 第1軍司令部 參謀長
  • 1970年 陸軍本部 企劃管理參謀國葬
  • 1970年 陸軍本部 政策企劃部長
  • 1970年~1973年 陸軍本部 企劃管理參謀國葬
  • 1972年 陸軍本部 企劃管理參謀局長 在職 當時 陸軍 中將 昇進
  • 1973年~1975年 陸軍 第3軍團 軍團長
  • 1975年 9月~1977年 12月 第24代 陸軍士官學校 學校長
  • 1977年~1978年 陸軍 第1軍司令官
  • 1978年 陸軍 大將 昇進
  • 1979年 2月~1979年 12月 第22代 陸軍參謀總長
  • 1979年 12月 陸軍 大將 强制 豫編, 補充役 二等兵
  • 1981年 3月, 赦免 復權, 그러나 軍敵은 아직 完全히 回復되지 않음.
  • 1987年 11月~1988年 4月 統一民主黨 常任顧問
  • 1993年 軍籍을 完全히 回復
  • 1997年 " 김재규 內亂企圖 幇助未遂嫌疑"에 關하여 無罪를 宣告받아 名譽 回復

學歷 [ 編輯 ]

軍籍 剝奪 處分 [ 編輯 ]

1980年 3月 軍法會議에서 정승화는 全斗煥 때문에 內亂地圖幇助4로 懲役 10年을 宣告받았고 補充役 二等兵으로 降等, 軍籍을 剝奪되었다. [18] 정승화는 80年 6月 刑執行停止로 釋放된 데 이어 1981年 3月 2日을 期하여 赦免復權되었다. [18] 그는 自身의 軍的 剝奪 處分을 撤回해 줄 것을 여러 番 要請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鄭昇和 軍籍 剝奪은 撤回되지 않다가 1988年 6月 30日을 期하여 豫備役 陸軍 大將 階級을 되찾았고 1993年 5月 31日을 期하여 豫備役 陸軍 大將 軍籍을 事實上 完全히 回復하였다. [19]

賞勳 [ 編輯 ]

  • 1等 保國勳章
  • 統一場

家族 關係 [ 編輯 ]

  • 配偶者: 신유경(申有慶, 1925年~)
    • 3男: 정이열(1958年~)

評價와 批判 [ 編輯 ]

  • 戰略戰術에 뛰어난 支障이라는 評價가 있다.
  • 10·26 事件 搜査實務 責任者였던 백동림 搜査第1局長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搜査初期에 이미 10·26은 김재규 의 偶發的 單獨犯行이었다는 結論을 내려 上部를 이해시켰고, 정승화 總長은 搜査에 協調的이었다”고 말한다. [11]

鄭昇和를 演技한 俳優들 [ 編輯 ]

關聯 書籍 [ 編輯 ]

  • 鄭昇和, 《大韓民國 軍人 鄭昇和》(휴먼앤북스, 2002)
  • 김진국, 《WWW.韓國現代史.COM》 (민연, 2000)
  • 鄭昇和, 《12.12事件 정승화는 말한다》 (圖書出版 까치, 1987)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hyunil@msnet.co.kr, 金泉 신현일 記者 (2015年 8月 4日). “[金泉의 門中이야기] 영일 鄭氏-韓國史 빛낸 정완영·鄭昇和” . 2023年 4月 26日에 確認함 .  
  2. "陸軍 將星級 大幅進級", 東亞日報 1961年 8月 11日子 1面, 政治面
  3. "軍의 不在者投票 미끼로 不正選擧를 祈禱", 東亞日報 1963年 11月 21日子 1面, 政治面
  4. "優殊한 士兵 選拔", 京鄕新聞 1963年 11月 21日子 1面, 政治面
  5. "全將兵 除隊 保留", 東亞日報 1968年 2月 7日子 1面, 政治面
  6. 서중석, 《韓國現代史 60年》 (역사비평사, 2007) 159페이지
  7. ““數十年 ‘政治軍人’ 世上에서 男便이 살아남은 건 奇跡”” . 한겨레新聞. 2015年 12月 6日.  
  8. 강원룡, 《歷史의 언덕에서 4》 134-135페이지
  9. 이도성, 《南山의 部長들(3)》 (동아일보사, 1993) 131~132쪽
  10. " 銃口 뺨에 닿인채 끌려갔다" 鄭昇華 前육참總長이 말하는 「12·12事態」” . 中央日報. 1987年 11月 11日.  
  11. ““軍에 法을 無視하는 汚點 남겨”” . 시사저널. 1990年 1月 21日.  
  12. [冥福을 빕니다] 鄭昇和 前 陸軍參謀總長…韓國現代史 犧牲羊 東亞日報 2002.06.13
  13. 鄭昇和 前陸軍參謀總長 別世 파이낸셜뉴스 2002.06.13
  14. 《KBS 다큐멘터리劇場 維新時代 7部, 有故》. KBS. 1993年 10月 31日.  
  15. “12.12 事件은 쿠데타도,군사반란도 아니다” . 韓國디지털뉴스. 2022年 12月 9日.  
  16.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허화평 前 大統領 政務首席 (上)” . 월간조선. 2012年 3月.  
  17. “故 鄭昇華 前 陸軍參謀總長 自敍傳 出刊” . 中央日報. 2002年 9月 25日.  
  18. '韓國 現代史 悲運의 主人公' 鄭昇和 前 陸軍參謀總長 韓國經濟 2002.06.13
  19. 階級降等 將星, 政府 31名 復權 中央日報 1988.06.30
  20. 劇 中에서는 정상호라는 이름으로 登場.

參考 文獻 [ 編輯 ]

前任
김재춘
第13代 陸軍防諜部隊長
1962年 7月 12日~1964年 1月 8日
後任
박영석
前任
이세호
第22代 陸軍參謀總長
1979年 2月 1日~1979年 12月 12日
後任
이희성
前任
이소동
第14代 1野戰軍司令官
1977年 12月~1979年 2月 1日
後任
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