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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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선
尹日善
동호 윤일선 교수
董狐 윤일선 敎授
大韓民國 保健社會部 諮問委員 兼 顧問
(大韓民國 保健社會部 諮問委員 兼 顧問)
任期 1961年 10月 2日 ~ 1962年 6月 1日
大統領 윤보선 大統領
송요찬 大統領 權限代行
總理 송요찬 內閣首班
受賞 송요찬 內閣首班
長官 정희섭 保健社會部 長官
次官 최영근 保健社會部 次官
한국진 保健社會部 次官 職務代行 서리
한국진 保健社會部 次官

身上情報
出生日 1896年 10月 5日
出生地 日本 帝國 도쿄都 도쿄
死亡日 1987年 6月 22日 ( 1987-06-22 ) (90歲) 午前 10時
死亡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銅雀區 鷺梁津2棟 225-236番地 自宅에서 兵士
國籍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學歷 日本 교토 帝國對學校 大學院 醫學博士
經歷 醫師
醫學者
敎育者
大學 敎授
政治人
社會機關團體인
著述家
正當 無所屬
父母 윤치오 (簿)
이숙경 (某)
尹고라 (繼母)
현송자 (繼母)
兄弟姊妹 윤명선 (아우)
配偶者 조마求禮( 兒名 은 조영숙)
子女 膝下 5男 2女
(그 中 아들 윤석구 , 윤탁구 , 윤종구 , 윤용구)
親姻戚 할아버지 윤영렬 , 從祖父 윤웅렬 , 누나 尹視線 , 字形 민원식 , 異腹 동생 윤영선 , 堂叔 윤치왕 , 堂叔 윤치호 , 叔父 윤치소 , 叔父 윤치병 , 四寸 동생 윤보선 , 四寸 동생 윤원선 , 曾祖父 윤취동 , 査頓 이병도 , 査頓 金性洙 , 六寸 윤영선 , 六寸 동생 윤기선 , 六寸 동생 윤장선
宗敎 天主敎 [1] 改新敎 ( 監理敎會 )

윤일선 (尹日善, 1896年 10月 5日 ~ 1987年 6月 22日 )은 日帝强占期 大韓民國 의 醫師, 大學敎授, 大學總長, 社會 運動家이다. 서울대학교 總長 을 지냈다.

日本 교토 帝國對學校 (京都帝國大學校)에서 受學한 後 歸國, 세브란스 醫科 大學 서울大學校 醫學部에서 敎授로 活動했으며, 專攻으로는 病理學과 解剖學, 癌 硏究 分野였다. 大韓民國學術院 의 元老 會員이자 初代 院長이었으며, 서울大學校 醫科大學 學長, 1954年 서울大學校 副總長, 1956年 總長, 1961年 서울대 醫大 講師와 名譽敎授를 지냈다. 1956年부터 1973年까지는 癌硏究會 會長을 지냈다.

1963年 1月 朴正熙 等의 軍政에 參與한 뒤로는 共和黨 創立에 參與하고, 1964年 9月 과 이듬해 1965年 9月 오스트리아 에서 開催된 國際原子力機構(IAEA) 總會 韓國代表로 두 次例 다녀왔으며, 科學技術後援會 理事長과 科學技術財團理事長 等을 歷任하였다. 윤영렬 의 孫子이자 大韓帝國 의 官僚이자 敎育者인 윤치오 의 첫째 아들이다. 윤승선 의 兄이며, 大韓民國 4大 大統領 을 지낸 윤보선 (尹潽善)의 四寸 兄이며, 舊韓末의 改革政治가 윤치호 의 糖質이다. 그밖에 함께 醫師로 活動한 윤치왕 이 그의 堂叔이고, 윤유선 은 그의 四寸 동생이다.

그는 韓國 最初의 病理學 者이기도 했고, 경성제국대학 ( 서울大學校 의 前身)에서는 韓國 人 最初의 醫學博士들을 養成하였다. 그는 大學 敎授와 學生들이 直接 選出한 最初의 비(非)官選 서울대학교 總長 이었다. 日本 도쿄 에서 出生하였고 지난날 한때 日本 긴키 地方 교토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으며 日本 도쿄 를 떠나 大韓帝國 으로 歸國 後 忠淸南道 牙山郡 을 거쳐 漢城府 에서 暫時 幼年期를 보낸 적이 있다. 本貫은 해평 이며, 雅號 는 동호(東湖)이다.

生涯 [ 編輯 ]

初期 生涯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從祖父 윤웅렬(왼便 담배 피우는 이)
아버지 윤치오

董狐 尹日善은 1896年 (高宗 34年) 10月 5日 日本 도쿄 (東京)의 어느 傳貰房에서 日本 에 留學 中이던 아버지 윤치오 (尹致旿)와 어머니 이숙경(李淑卿, 다른 이름은 敬淑)의 長男으로 出生했다. [2] 勿論 實際 出生地는 日本이지만 先代의 故鄕이 忠南 牙山 이고, 아버지 윤치오와 家族이 牙山에 居住했으므로 忠南 牙山 出身으로도 본다.

朝鮮 宣祖 때의 兄弟 政丞 윤두수 (尹斗壽), 윤근수 (尹根壽) 兄弟의 後孫으로, 그의 家計는 오래前에 沒落했으나 曾祖父 윤취동 (尹取東)이 지 中樞府 社(知中樞府事)로 出仕하고, 할아버지 윤영렬 과 從祖父 윤웅렬 兄弟가 武官으로 中央에 進出하여 加勢를 일으켰으며, 堂叔 佐翁 윤치호 (尹致昊)는 大韓帝國 末期의 敎育, 啓蒙運動家이자 獨立運動家, 政治人이었다.

그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 윤치오 는 開化黨의 黨員으로 김옥균 , 서재필 等의 開化派 와 가까이 지내다가 甲申政變 으로 日本에 避身한 뒤, 歸國, 다시 日本 留學生 監督에 任命되는 等 日本과의 往來가 잦았다. 以後 동생들이 태어났는데 윤명선 은 高等文官試驗에 合格하여 滿洲國 의 官僚로 赴任했으나 일찍 죽었고, 다른 동생 윤왕선 美國 으로 留學갔으나 헤이스팅스 大學 在學 中 病을 얻어 入院 中 死亡했다. 다른 동생 윤승선 (尹昇善)은 大韓民國 建國 以後 海軍 工兵團 創設에 寄與하였고, 이병도 의 6寸 女同生인 이을남과 結婚했다. [3]

男便과 함께 日本 에 出國했던 어머니 이숙경 1895年 배便으로 하여금 濟物浦로 歸國하였으나 [4] 다시 日本 으로 돌아갔다가 그를 出産하였다.

學業을 繼續하던 아버지 윤치오 의 生活은 넉넉한 便이 아니라더 도쿄 地球 司國政(芝區四國町)의 어느 敎授의 집에 貰들어 살았다. [5] 일찍 西歐文化에 눈을 뜬 그의 父母는 비록 貰房 身世였으나 부지런히 社會活動을 했고 子女들에게 쏟는 敎育熱 또한 대단하였다. [5] 當時 그의 父母는 留學 中이었으므로 그는 社說 어린이집에 다니다가 누이同生 尹視線 , 동생 윤명선 과 함께 小學校에 入學하게 된다.

幼年期와 少年期 [ 編輯 ]

도쿄에서 자라면서 그는 그 곳의 曉星小學校(曉星小學校)에 다녔다. 曉星 小學校는 가톨릭 界 學校로 1學年 때부터 프랑스語 를 가르쳤다. 學校 財團이 프랑스系였던 탓으로 學校 生活도 프랑스 式으로 서구화되었다. [5] 그가 入學한 뒤 女同生 視線과 男동생 명선이 連이어 曉星小學校에 入學한다.

學校 制服은 짧은 바지에 긴 洋襪을 신었고 웃옷은 번쩍거리는 金단추를 달았다. 여기에 金테두른 둥근 帽子를 썼다. 그리고 學校에서는 가운을 입어야 했다. 點心은 學校에서 提供하였고 逍風을 가게 되면 學校에서 뷔페式의 樣式을 만들어 날라다주기도 했다. [5]

當時 東京엔 電車가 없던 時節이라서 돈있고 行世하는 집안의 아이들은 馬車를 타고 다녔다. [5]

曉星小學校는 一種의 私立初等學校였는데, 아버지 윤치오 가 이와 같은 특별한 學校에 그와 그의 女同生 尹視線 과 男동생 윤명선 을 次例로 입학시킨 것은 家庭이 넉넉해서가 아니라 單純히 子女들을 훌륭하게 키워보겠다는 敎育熱 때문이었다. [5] 윤일선度 後代에 回顧하기를 "德分에 나는 어려서부터 불어 를 배울 수 있는 幸運을 안았다. [5] "라고 回想하였다.

정동제일감리교회 禮拜堂

1906年 (光武 9年) 7月 24日 배便으로 歸國해 7月 26日 釜山港에서 내렸다가 列車로 釜山과 성환을 거쳐 牙山 둔포면 신항리 故鄕으로 上京하였다. 윤일선과 兄弟들은 祖父母에게서 우리말 工夫를 했다. 얼마 뒤 아버지 윤치오 가 學務局長에 任命된 뒤 定着하면서 저동(苧洞, 明洞聖堂 아랫 洞네)로 移徙하였다. [5] 上京 後 尹日善은 兄弟들과 함께 정동제일감리교회 에 나가게 되었고, 얼마 뒤 본 敎會 招待 牧師인 최병헌 (崔炳憲)에게 洗禮를 받고 以後 80年間 情動監理敎會에 다니게 되었다. [5] 이어 아버지의 職場 近處인 京城府 의 정동에 있는 日出小學校(一身初等學校의 前身)를 다녔다. 當時는 그의 아버지 윤치오 가 特別히 大韓帝國 學部의 學務局長에 任命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父母는 그가 日出小學校에 다닐수 있도록 일부러 저동으로 移徙했다고 한다. [5]

靑少年期 [ 編輯 ]

1909年(隆熙 3年) 겨울 도쿄 에서 어머니 이숙경을 여의었다. 어머니 이숙경은 1907年 1月 純宗 순정효황후 가 새로 揀擇될 때 賀禮式에 參席했는데, 感氣로 몸이 성치않은 狀態에서 賀禮式에 다녀오다가 感氣가 惡化되었고 [5] 結局 漢城病院 에 入院했지만 病院에서 死亡했다.

어머니 이숙경 은 아버지 윤치오 에게 遺言을 남겼는데 '一線이는 冊을 좋아하고 工夫하기를 좋아하니 大學까지 보내 學者가 되도록 하시고 명선이는 親舊들과 사귀기를 좋아하니 法과(고등학교 法과)에 가게 하도록 하시라 [5] '고 遺言을 남겼는데, 尹日善은 그의 遺言을 오래도록 記憶하였다.

이러한 어머님의 말씀은 그 後 내가 醫學을 擇해 病理學 을 專攻하게 된 契機가 된 것으로 생각한다. 父母님의 한 말씀이 그 子息들에게 얼마나 感銘을 주고 一生의 指針이 되는가를 알 수가 있다. [5]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는 人間이 무엇인가에 對해 疑問을 품게 되었고, 後일 醫師와 醫學者가 되는 契機가 된다.

1910年(隆熙 4年) 아버지 윤치오는 公開 求婚 廣告를 냈는데, 여기에 應한 김윤정 의 딸 金고라와 아펜셀러 牧師의 主禮로 再婚했다. 그의 繼母인 金고라는 再婚 後 城을 男便을 따라서 尹氏로 바꿔서 윤고라로 이름을 改名했다. 漢字名으로는 尹考慮이다.

開化 女性인 尹考慮는 前室 夫人의 子女인 윤일선의 5男妹를 親子女처럼 對하였다. 윤일선과 兄弟들은 " 美國 에서 오신 繼母로부터 英語 를 着實하게 배울 수 있었다. [5] "

1911年 3月 日出小學校를 卒業하고 京城中學校 (京城中學校)에 進學하였다. 그는 試驗을 보고 中學校에 進學했는데 '日出小學校를 卒業한 뒤 日本 學生들과 入試競爭을 치러 京城中學校 에 入學하여 5年間을 다니게 되었다. [5] ' 當時 小學校에서 中學校로 進學하는 데도 入試가 存在했고 그는 優秀한 成績으로 京城中學校에 入學하였다.

京城中學校 5學年 때 學科 科目 가운데 物理, 化學을 좋아했고 自然系 現象과 法則 等에 興味를 느껴 아이잭 뉴턴 萬有引力의 法則 찰스 다윈 進化論 , 멘델의 法則 等 自然眞理學에 心醉하였다. [6] 그 뒤 그는 "學問이나 科學의 眞理는 客觀的으로 存在하지만 그 眞理를 認識하는 것은 人間이 創造한 主觀의 産物 [6] "이란 信念을 갖게 된다.

日本 留學과 醫學 專攻 [ 編輯 ]

1915年 3月 京城中學校를 卒業, 그해 日本 으로 留學하여 日本 江山(岡山) 第6高等學校로 進學하였다. 집안에서 學費를 넉넉히 支援하였으므로 學費 調達은 곤란하지 않았으나 그는 日本 留學 中에도 直接 아르바이트와 勞動으로 自身의 學費와 用돈을 調達했다. 當時 도쿄 에는 社會主義 思想에 빠진 朝鮮人 젊은이들이 增加하였으나 그는 여기에 휘둘리지 않고 學業에 專念하였다. 1919年 4月 상하이 에서 上海 臨時政府 國務總理 李承晩 의 密命을 받고 資金을 거두러 온 四寸 동생 윤보선 을 만나 自身이 所持하던 돈을 喜捨하고 故國의 家族들에게 特別히 用돈을 調達하여 윤보선 便에 되돌려보냈다. 英國 留學 中이라던 윤보선 상하이 로 건너가 獨立運動에 投身했고, 中國人 外交官의 조카를 假裝하여 日本 으로 密入國한 것이었다.

日本 江山 第6高等學校는 第1部는 人文系, 第2部는 自然科學界이고 第3部는 醫學界로 나뉘어 있었다. 그는 제6고등학교 第3部를 選擇했는데 이때부터 醫學 에 專念하게 된다. 이 學校에 함께 다니던 朝鮮人 浪士 김준연 (金俊淵)과 1年間 함께 下宿生活을 하기도 했다. [7] 第2高等學校 2部에서 醫豫科에서 그는 김준연 , 이갑수 (中央大 敎授 李相敦의 父親), 김형달 等과 만나 交分을 쌓게 되었다. [6]

그가 醫學을 選擇하게 된 計器로는 몇가지 動機가 있었다. 日本 은 韓國과 달리 高等學校 內에 人文系, 自然系와 함께 醫學界가 있었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弱骨인데다가 어머니를 일찍 病魔로 여읜 그는 自然 人間을 疾病으로부터 지켜주는 醫學의 重要性을 認識하게 되었고, 當時 우리나라에서는 大學 出身 醫師가 全無한 때였던 만큼 醫師의 社會的 稀少價値라는 點에 눈을 뜨고 있었다. [7] 特히 朝鮮總督府 治下에서 다른 社會科學 分野를 工夫해서는 將來性이 없으리라는 判斷에서도 醫學徒가 될 것을 決心했다. [7]

醫學은 獨逸語 原語로 배웠기 때문에 株當 獨逸語 時間이 13時間格이었다. 獨逸人 敎授가 直接 講義를 擔當한 時間도 꽤 많았기 때문에 이때 배운 獨逸語 實力으로 1937年 6月 獨逸에 갔을 때 別 다른 不便 없이 生活할 수 있었다. [6]

高等學校 다니던 時節에는 物理學, 化學, 獨逸語 時間이 많았는데 特히 化學 時間에는 擔當 敎科目 敎師가 리비히, 에밀, 피샤, 웰라 等 有名한 化學者들에 關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기 때문에 그는 나도 그런 學者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잠긴 일이 여러 番 있었다. [6] 그는 後日 "그래서 高等學校 時節의 이런 꿈으로 내가 病理學 을 選擇해 一生을 바쳤는지도 모른다. [6] "고 回想하였다. 이때 그는 괴테 , 실러 等 獨逸 文學作品과 日本 文學 作品도 많이 耽讀하였다. [6]

高等學校 在學 當時 그는 아미노산 을 發見한 有機化學者 에밀 피셔 (Emil Fischer)에게 크게 感銘받았다고 한다. [7]

日本 留學 生活 [ 編輯 ]

大學校 生活 初期 [ 編輯 ]

日本 留學時節의 김연수 (오른쪽 선 이)와 金性洙 (왼쪽 앉은 이). 金延壽는 그의 大學 同窓이고, 金性洙는 金延壽의 兄이자 叔父 윤치영의 査頓이다.

1919年 7月 日本 第6商業學校 第3部를 卒業한 뒤, 歸國하지 않고 바로 그해 9月 日本 교토 帝國大學 (京都帝國大學, 교토 大學 의 前身) 醫學部에 進學했다. 成人이 된 後 號를 동호(東湖)라 하였다. 따라서 동호 윤일선으로도 부른다.

딩시 日本 교토 帝國大學 은 入試 代身 高等學校 때 成績으로 學生을 選拔하였다. [7] 尹日善은 後날 " 교토 (京都)라는 古典的인 都市와 조용하고 學究的인 學校 雰圍氣가 모두 마음에 들었다"고 回想하였다. [7] 入學式 때 總長 아라키(荒木)의 訓示에 큰 感銘을 받아 앞으로 學問에 對한 覺悟를 確固히 다졌다. [6] 그는 入學 直後 3年間 大學內 基督敎 靑年 寄宿舍에서 生活하였다. [6] 이때 그의 同窓 金榮宇 (金英雨)는 그가 YMCA 寄宿舍에 生活할 수 있도록 周旋해주어 들어가게 되었다. 집안에서는 넉넉한 學費를 보내왔지만 그는 勤儉 節約하였다.

그 뒤 그는 同窓인 김연수 (金秊洙, 삼양사 會長)와 이관구 (李寬求, 新聞硏究所腸), 崔鉉培 (崔鉉培) 博士 等과 自炊를 했는데, 後日 '교토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김연수 (金秊洙, 삼양사 會長)와 이관구 (李寬求, 新聞硏究所腸), 崔鉉培 (崔鉉培) 博士 等과 함께 1年間 自炊를 했던 것이다. [7] 特히 同甲인 김연수 와는 生日마저 같은 8月 25日 ( 陰曆 )이라 그 때부터 共同으로 生日祝賀를 하는 것이 慣例가 되었다. [7] "고 한다. 김연수 와는 後日 査頓間이 되는데, 그의 三寸 윤치영 의 딸 윤성선 김연수 의 兄 인촌 金性洙 의 며느리가 된다.

교토 帝國 大學 에서 本格的으로 醫學 工夫를 始作한 尹日善은 重大한 選擇의 岐路에 서게 된다. 이는 그의 苦悶이었는데 '臨床醫學을 하느냐 基礎醫學을 하느냐'하는 것이었다. [7] 그에 依하면 '臨床醫學을 하느냐, 基礎醫學을 하느냐는 醫學徒라면 누구나 한番 쯤은 부딪치게 마련인 決斷의 苦悶이었다. 臨床醫가 되어 直接 患者를 治療하는 것이나, 臨床醫 발板이라 할 수 있는 基礎醫學을 硏究하는 것이나 人間을 疾病에서 求한다는 點에서는 輕重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다같이 重要하다. [7] '는 것이다. 그는 이를 두고 '나무와 꽃의 關係. [7] '라고 評하기도 했다.

그는 選擇의 苦悶 때문에 神經 衰弱에 걸릴 地境이었다. 同窓인 이관구 와 이 問題를 놓고 討論을 하다가 얘기가 哲學 的인 次元으로 번져 人生의 目的을 論하느라 밤을 새운 일도 있었다고 韓多ㅓ. [7] 尹日善은 여러 날 煩悶한 끝에 結局 '꽃보다는 뿌리'가 될 것을 決心했다. 臨床醫가 되어 患者를 治療하고 開業해서 돈을 버는 것도 좋겠지만, "疾病의 根源과 싸움으로써 醫學 發達의 基礎가 되는 것이 더 보람있는 일"이다라는 생각에서 그는 病理學 을 選擇했던 것이다. [7]

후지나미 敎授의 影響 [ 編輯 ]

교토 大學 醫學科에서 그는 獨逸 의 著名한 病理學 루돌프 피르호 (Rudolf Virchow)의 弟子인 후지나미 아키라 (藤浪鑑)를 만났다.

그는 當代 日本 의 이름난 病理學者였는데 講義가 어려웠으나 實際的이어서 學生들에게 人氣가 높았다 한다. [8] 그는 後日 評하기를 '후지나미 敎授 만큼 當代에 硏究를 많이 한 學者도 드물었다. [8] '라고 하였다. 후지나미 敎授의 講義는 理論 보다는 硏究를 통한 經驗 中心의 實際的인 講義를 많이 하였다. [8]

교토 帝國 大學 YMCA 寄宿舍 靑年會 理事長職을 겸하고 있던 후지나미 敎授는 篤實한 基督敎 人이었는데, 他地에서 工夫하러 온 學生들에게는 특별한 關心과 精誠을 기울였다. 후지나미 敎授는 每週 水曜日이면 正午에 寄宿舍 食堂에 나와 學生들과 함께 보리밥을 들며 人生과 學問에 對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었고, 每週 金曜日에는 韓國人 中國人 學生들을 집으로 따로 불러 茶菓會를 베풀어 주면서 후지나미 敎授 自身이 學校에 다닐 때 돈이 없어 苦學하던 일과 모든 일은 가장 밑바닥부터 着實히 해나갈 때 사람들의 認定을 받게 된다는 經驗談을 들려주며 熱心히 努力하면 반드시 成功하게 마련이라고 激勵해 주었다. [8] 그의 人品과 配慮에 感化된 尹日善은 오래도록 후지나미 아키라 敎授를 잊지 않았다. 그는 '大學生活을 통해서 교토 除隊 病理學 敎授로 있던 후지나미 아키라 敎授의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8] '고 하였다.

大學 在學 時節 [ 編輯 ]

그는 學生들 사이에서도 工夫에만 專念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 留學生들이 活動하는 서클에 加入하라는 勸告나 强要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이 關係하는 讀書會나 學生會에는 一切 關係치 않았다. [8] 그럼에도 김준연 等 少數의 親舊들과 가까이 지냈다.

교토의 書店들은 當時 웬만한 學生들에게 冊은 외상으로도 주었는데 그는 直接 費用을 주고 購入하였다. 當時 朝鮮總督府 學務局에서 月 50엔의 奬學金을 보내 도쿄 에 있는 留學生監督部를 통해 타쓰고 있었는데 生活費를 아껴쓰고 남은 돈으로 모두 冊을 사들였다. [8] 朝鮮에 있던 本家에서도 隨時로 用돈을 보내므로 學費 걱정은 거의 없이 넉넉한 生活을 하였다.

교토 大學 1學年 때 그는 解剖學 , 生化學 , 生理學 , 組織學 等을, 2學年 때는 微生物學 , 病理學 , 寄生蟲學 , 衛生學 , 診斷學 等 主로 기초적인 것을 배웠다. 그러나 처음 2年間 그는 醫學보다는 文學, 哲學, 音樂과 美術 分野에 더욱 興味를 느껴 이 分野의 冊을 많이 읽었다. [8] 寄宿舍에 돌아와서는 아예 醫學冊은 제쳐놓고 文學 作品과 哲學冊을 耽讀하였다. [8]

2學年 때 그는 '빛은 東方에 있다'고 主張한 印度 의 詩人 타고르 日本 特別 講演을 들었다. 이를 契機로 印度 哲學 은 勿論 東洋 哲學과 宗敎 哲學에 關한 많은 冊을 읽었는데 때로는 冊을 읽다가 講義를 빼먹은 일도 있었다. [8] 學校에 다니면서도 틈이 나면 專攻 外에 文學과 哲學 講義를 들었다. [8] 當時 日本 에는 世界的인 音樂家 짐벌리스트, 하이페츠엘만 等의 有名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들려서 演奏를 하였다. 그는 듣고 싶은 欲心에 25원을 주고 1週日 치 入場料를 購入하였다. 總督府 當局에서 나오는 그의 한달 치 生活費는 50원으로 그는 折半을 演奏會에 가기 위해 使用하였다. [8] 또한 美術展覽會는 가을에 日本 문부성 이 主催하는 門前과 民間人이 主催하는 理科前이 있었는데 그는 이를 빼놓지 않고 모두 觀覽하였다. [8]

大學院 生活과 硏究 活動 [ 編輯 ]

母校 교토 大學

1923年 6月 교토 帝國大學 醫學部를 卒業한 뒤 同 大學校 大學院 에 進學했다. 교토 帝國大學 大學院에서 그는 후지나미 아키라 (藤浪鑑)에게서 病理學 을 修學하였다.

크리스찬 人 후지나미 敎授는 틈만 있으면 學生들과도 잘 어울리는 仁慈하고 疏脫한 性格이었는데, 尹日善은 이때 '그로부터 學問 뿐만 아니라 精神的인 面에서도 크게 影響을 받은 것 같다. [7] '라고 回顧하였다.

同時에 母校 교토帝國大學 醫學部 病理學敎室의 附隨(副手, 助敎)로 就職하여 大學院 過程을 다니며 1925年 9月 日本 교토 帝國大學 大學院에서 病理學 碩士 學位를 받고, 同 大學 博士課程으로 進學하였다. 윤일선의 才能과 뜻을 알아본 후지나미 敎授가 그의 登錄金을 代身 納付해주는 代身 그는 無給 助敎로 活動하였다. 교토 帝國 大學 大學院 在學 中 세브란스醫學專門學校 敎授 副校長(校監)인 美國人 敎授가 후지나미 敎授에게 그를 儀典 敎授로 招聘해도 되겠느냐고 連絡이 왔다. 이어 美國人 세브란스 副校長은 후지糯米에게 윤일선을 세브란스 의전의 敎授로 招聘하려 하니 보내달라는 懇曲한 付託을 해오기도 했다.

尹日善은 助敎 處地에 月給 2百원이라는 條件이 마음에 끌리기는 했지만 아직 남을 가르칠 만한 實力이 없다는 理由로 拒絶했다. [7] 후지나미 敎授는 속으로 윤일선이 拒絶하기를 바라고 있었던지 무척 반가워하면서 그에게 硏究室을 마련해 주고, 大學院 奬學金과 日本 學士院 硏究費(日本學士院硏究費) 3千원 [7] 을 特別 支援으로 얻어주기도 했다.

1927年 10月 6日 이화여전 出身 조영숙 과 結婚하였다. 尹日善은 大學院을 거의 마칠 무렵 다시 세브란스醫學專門學校 ( 延世大學校 醫科大學의 前身)로부터 敎授 提議를 받았으나 固辭하고 硏究生活을 繼續했다. [9]

歸國과 鬪病, 剛斷 活動 [ 編輯 ]

否認 조영숙 (結婚式 무렵)
結婚式 무렵의 윤일선( 1927年 )

그러던 中 甚한 泄瀉로 入院하게 되었는데 잘 治療되지 않자, 結局 大學院을 自退하고 1925年 9月 歸國하여 1年間 故鄕에서 鬪病生活을 하였다. [9] 當時 國內에서는 意思를 養成할 醫科大學 敎授가 不足했고 大部分 美國 人 宣敎師들이 迎入해온 醫學者들에게 依存했다. 各地에서 그에게 自己 大學의 敎授職을 提議했으나 모두 固辭하였다.

그러던 中 1926年 윤일선이 回復되었다는 消息을 들은 후지나미 敎授는 그를 경성제국대학 醫學丈人 詩가(志賀潔)에게 推薦하였다. 市街는 다시 윤일선을 病理學敎室 도쿠미츠(德光美福) 敎授에게 紹介했고, 도쿠미츠는 欣快히 윤일선을 받아들였다. 尹日善은 1926年 京城帝大 部數로 始作하여 助手를 거쳐 1928年 3月 조敎授 發令을 받았다. 韓國人으로는 最初로 帝國大學의 敎授가 된 것이다. [9]

후지나마 敎授가 경성제국대학 醫學部長 市價 敎授에게 그를 助敎授로 積極 推薦했지만 日本人 醫學徒들에게 밀려 附隨(助敎)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에 依하면 '그래 日本人들도 未安했던지 윤부수에게 每月 50원의 月給을 주는 特惠를 베풀었다. [7] '는 것이다. 그런 緣由로 2年만인 1927年에 助手로 昇進하고, 1928年에 助敎授로 昇進했다. 助敎가 된 지 3年만에 講壇에 서게 됐다.

泄瀉 症勢가 完全히 낫지 않았으나 그는 다시 日本 으로 되돌아가 復學, 繼續 工夫한 끝에 '內分泌腺과 過敏症에 關한 硏究'라는 그의 論文이 1929年 교토 帝國大學 敎授會議를 通過하여 1929年 1月 교토 帝國大學 大學院에서 醫學 博士 學位를 받았다. 學位機는 1920年 1月 下旬 교토 帝國大學 에서 郵便으로 發送했다. 이로써 그는 日本 大學 出身 韓國人으로는 6番째로 醫學博士가 되었고, 韓國人 最初로 病理學者가 된 것이다.

韓國人 病理學者 養成 [ 編輯 ]

敎壇에 선 그는 國內 最初로 韓國人이 韓國人 醫學 碩士, 博士課程 學生들을 가르쳐 碩士, 博士들을 輩出하였다. 그의 弟子 李永春은 <生體에 있어서의 니코틴 作用이 性호르몬에 미치는 影響>으로 經度帝國大學에서 醫學 博士를 받았다. 이것은 當時 韓國에서 遂行한 硏究로 日本帝國大學의 博士 學位를 처음으로 받은 것이었으며, 病理學이란 範圍를 넘어 西洋 醫學 硏究의 土着化에 크게 貢獻하였다. [10] 이와 같이 세브란스의 硏究에서 中樞的인 役割을 遂行하던 尹日善은 朝鮮醫師協會의 創設에도 主導的으로 參與하였다. [10]

그는 65歲로 停年이 되던 1961年까지 256篇의 硏究를 指導했고 152名의 醫學 博士를 輩出하였다. [10] 그리고 數千餘 名의 醫學 碩士들과 醫科 大學 卒業生들을 길러냈다.

醫術, 學術 活動 [ 編輯 ]

세브란스 儀典 敎授生活과 施設 發電 [ 編輯 ]

윤일선 ( 1929年 )

歸國 後 경성제국대학 에서 醫師로 診療를 始作한 그는 韓國 最初의 病理學 者이기도 했다. 1927年 경성제국대학 醫學部 病理學敎室 助手, 1928年 경성제국대학 醫學部 病理學敎室 助敎授 等을 거쳐, 1929年 日本 에서 博士學位를 받고 그해 세브란스醫學專門學校 專任講師가 되었다. 當時 세브란스醫學專門學校의 水準은 劣惡했는데 그에 依하면 "圖書館이 없는 程度였으니까요. [7] "라는 것이다.

세브란스醫學專門學校 赴任 後 그의 첫 番째 事業은 校內 圖書室을 만드는 일이었고, 日本 과 龜尾 各國으로 醫學 書籍을 注文했다. [7] 圖書 費用은 모두 그가 直接 負擔했다. 그해 세브란스 醫學 專門學校 病理學 敎授에 任用되고, 1933年 세브란스 醫學 專門學校 敎授에 재임용되었다.

그는 세브란스 儀典에서 硏究室 制度를 처음 導入하였다. [7]

내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醫學 敎育에 本格的인 硏究 시스템을 導入한 셈이지요. [7]
1972年 京鄕新聞 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한便으로 '세브란스 메디컬 저널', '朝鮮醫學會誌'와 日本 의 各 醫學誌에 國內外의 論文을 發表하거나 轉載하여 세브란스 의전의 存在를 밖으로 널리 알리고 外國 學者들의 硏究 論文을 朝鮮人 醫學徒들에게 紹介해주는데 貢獻을 했다. [7] 그는 英語 實力과 漢字 , 日本語 實力이 流暢하였는데, 國內 醫學者들의 論文을 日本 의 各種 學術會議나 醫學, 醫科 大學 新聞에 揭示, 寄稿할 수 있도록 積極 推薦, 周旋해주었다. 세브란스 儀典에서 그는 病理學, 基礎 醫學 專攻 수많은 初級, 中級 醫師들을 길러냈고, 1940年 代 初盤에는 醫療 惠澤을 받지 못하던 朝鮮 各地의 中小都市와 邑面 地域에도 病院이 設立되었다.

日帝 强占期 後半 [ 編輯 ]

醫學者 李永春 (李永春), 醫學協會長을 지낸 小兒科醫師 조동수 (趙東秀), 後날 延世大學校 副總長을 지낸 外科의 민광식 (閔珖植) 等은 모두 윤일선이 세브란스의전 에서 길러낸 人材들이다. [7] 그는 1972年 京鄕新聞 과의 인터뷰에서 "그때 내가 길러낸 博士들만도 50,60名 以上은 된다. [7] "라고 자랑하였다.

1935年 세브란스醫科專門學校 의 敎務處長이 되고 그해 세브란스의전 學監(校監)李 되어 10年間 세브란스의전의 學監과 교무처장으로 校內 行政을 總括하였다.

日帝 强占期 後半에는 세브란스 大學校 醫科 大學 敎授로서 朝鮮醫師協會 創立에 參與하였고, 堂叔 윤치왕 (尹致旺) 等과 함께 朝鮮醫師協會에서 積極的으로 活動하였으며 以後 朝鮮醫保 의 編輯長 等을 지냈다. 同時에 경성제국대학 大學院에도 出講하여 學生들을 指導했는데, 1935年 2月 윤일선이 指導하던 學生들 中 李永春 을 비롯한 學生들이 最初로 國內에서 博士學位를 받았다. 이들은 國內에서 最初로 醫學博士 學位를 받았으며, 韓國人 敎授의 指導下에 最初로 醫學博士 學位를 받은 人物들이기도 하다. [11]

그의 집안에서는 윤일선 外에도 5寸 윤치왕 과 4寸 윤유선 이 모두 醫師였다. 또한 조카 윤창구 는 物理學者였다.

光復 直後 [ 編輯 ]

1945年 鏡城大學校 醫科大學 敎授 兼 醫學部長에 選出되고, 朝鮮醫學協會 會員이 되었다. 그해 8月 滿洲 에서 歸國한 金斗宗 (金斗鍾)을 경성제국대학 醫科大學에 薦擧하여 意思學(醫史學)을 講義하며 附屬病院長으로 推薦하였다. [12]

1945年 8月 京城府 滯留 中 光復 消息을 接하였다.

9月 尹日善은 金性洙 , 백낙준 , 崔奎東 (崔奎東), 조동식 (趙東植), 金活蘭 等과 함께 美軍政 淸 문교부 學務委員(學務委員)李 되었다. [7] 當時 學務委員會는 敎育法 制定權과 全國 學校 校長, 學長들의 人事權을 保有하였다. [7] 9月 20日 學務委員會의 決定에 따라 尹日善은 경성대학 ( 서울大學校 의 前身) 醫學部長(醫學部長)으로 轉任되었다. [7] 이는 當時 日本人 들로부터 京城大學(경성제국대학)을 빨리 引受하기 위한 美軍政廳의 措處였다.

그 뒤 한국민주당 이 創黨되면서 그에게도 迎入 提議가 들어왔으나 辭讓하였다. 1945年 12月 右翼과 左翼間의 싸움이 信託統治 의 贊反을 둘러싸고 한層 加熱되자 大學들 內에도 深刻한 影響을 주게 되었다. 人文系에 比較해 醫學徒들은 政治的인 問題에 對한 影響을 덜 받는 便이었는데도 醫科 大學 敎授들이 總辭職하는 事態가 벌어졌다. [7] 이어 一部 醫學徒들 亦是 信託統治 贊成, 信託統治 反對 問題에 介入, 데모대에 合流하기 始作했다.

尹日善은 敎授들을 一一이 집으로 찾아가 學校로 되돌아오도록 說得했다. [7] 解放 後 그는 京城大學 醫學部의 醫學部長에 就任했다가 國立 서울대학교의 病理學 敎授 및 서울大學校 醫科大學의 첫 大學院長에 任命되었다. [10]

서울大學校 副總長과 總長, 學術 團體 活動 [ 編輯 ]

서울大學校 正門

1946年 경성대學校 서울大學校 로 校名을 變更하면서 서울大學校 醫科大學 敎授가 되었다. 그 뒤 그 해에 경성대학이 國立大學으로 昇格되면서 서울大學校 醫科大學院長에 選出되었다. 10月 부터는 서울大學校 大學院長職을 兼職했다. 1948年 5月 1日 朝鮮醫學協會 2次 總會에서 會長에 選出되고, 大韓醫學協會로 名稱을 바꾸면서 大韓醫學協會 會員이 되었다. 1948年 심호섭 의 뒤를 이어 大韓醫學協會 2大, 3代 會長으로 選出되어 1952年 4月 30日까지 在職했다. 그밖에 세브란스 醫科大學 敎授, 서울大學校 醫科大 學長, 大韓醫學協會長 , 學術院 初代 會長 等을 지냈다.

1947年 7月 國際癌學會 (UICC) 會長 카워드理로부터 第6回 國際癌學會에 參席해달라는 招請狀을 받고, 그해 9月 경북대학교 醫科大學 敎授 고병간 (高秉幹) 等과 함께 세인트 루이스 에서 第6回 國際癌學會 學術會議에 參席하고 돌아왔다. 이때 發表한 韓國人의 癌에 對한 統計學的 硏究(1947), 안드라퀴논 을 投與하여 發生한 토끼 胃癌 (1947) 은 1948年 初 캔서리서치 雜誌에 紹介되었다. 1948年 10月 잡지 學風(學風)李 創刊되자 筆陣으로 參與하였다. [13]

1948年 3月 美國 프린스턴 大學校 高等物理硏究所에 있던 아인슈타인 을 訪問, "學問이나 科學의 眞理는 客觀的으로 存在하지만 그 眞理를 認識하는 것은 人間이 創造한 主觀의 産物"이란 것을 質問하자 아인슈타인 亦是 "科學的 眞理는 그 客觀性을 인정받지 않으면 그 存在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6] 尹日善은 곧 아인슈타인 의 親筆로 獨逸語 로 써 받아가지고 와 保管하였으나 [6] 韓國 戰爭 中 流失되었다.

1950年 6月 初 國際癌會議에 參席키 위해 出發 準備를 하던 中 6.25 戰爭 이 터졌다. 國際癌學會 會議는 6月 28日 에 出發 豫定이었으나 그는 對外的으로 미리 出發한 것을 假裝하고 親舊들의 집에 避身했다. [7] 北朝鮮 에서는 속아넘어가 윤일선을 찾을 생각을 안했기 때문에 그는 3個月間을 無事히 넘길 수 있었다. [7] 1950年 10月 韓國 戰爭 中 避身하여 拉北의 危機는 謀免했다. 그러나 그의 누나 尹視線 과 妹夫 민원식 , 四寸 윤광선 等이 拉北되었다. 1952年 休戰 以後 서울로 되돌아왔다.

學術院 活動과 서울대학교 總長 時節 [ 編輯 ]

1952年 大韓民國學術院 出帆에 參與하여 會員이 되고, 1953年 1月 부터 4月 까지는 서울大學校 藥學大學 張이었다.

1954年 서울大學校 副總長에 推薦되었다. [14] 1954年 3月 서울대학교 總長이 副總長으로 提請한 윤일선에 對한 同意 投票를 實施, 當時 投票資格이 있던 助敎授 以上은 223名 中 158名이 單科大學別로 투표한 結果, 尹日善은 多數의 同意를 얻어 副總長에 就任했었다. [14] 副總長이 되면서 大學院長職을 辭退했다. 1954年 4月 大韓民國學術院 會長에 選出되어 1960年까지 在職했고, 1956年 에 서울대학교 總長에 薦擧되었다. 1956年 문교부 長官이 된 최규남 博士는 6月 19日 自身의 後任 서울대 總長으로 當時 副總長이던 윤일선을 指名하였으며, 이에 따른 投票에 따라 總長에 任命되었다. [14] [15]

1956年 문교부 長官이 된 최규남 博士는 同年 6月 19日 自身의 後任 서울대 總長으로, 當時 副總長이던 윤일선을 指名했는데 [16] , 當時 國立大 總長은 敎育公務員任命令 第7條에 依據, 문교부 長官이 指名하면, 當該 大學 敎授會議 同意를 얻어 임명하게 되어 있었으며, 助敎授 以上 在籍敎授 過半數의 出席과 出席 敎授 中 過半數의 同意를 얻어야 했다. [17] 따라서 總長 指名者 윤일선에 對한 同意 投票를 實施하기 위해 6月 28日 下午 2時 서울大學校 助敎授 以上 在籍敎授 2百70名 中 外遊(外留) 敎授 61名과 不參者 9名을 除外한 2百 名의 敎授가 出席(95%), 本部 講壇에서 敎授會를 開催, 윤일선에 對한 同意 投票를 實施했다. [14] 그 結果 가 1百81票, 部 13票, 無效 6表로서 尹日善은 90%의 同意를 얻었다. [14] [15]

그러나 그의 서울大學校 總長 就任을 李承晩 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서울大學校 總長을 任命制로 任命되지 않은 것에 不滿을 느낀 李承晩 최규남 문교부 長官에게 윤일선의 就任을 비토할 수 없겠느냐고 묻기까지도 했다. [7]

서울대학교 總長 在職 中 그는 서울大學校 美國 미네소타 大學校 와 姊妹結緣을 하도록 推進했고, ICA의 援助를 얻어 서울大學校 醫大, 工大, 農大를 整備, 增築하고, 醫大, 工大, 農大의 硏究 施設을 導入하였으며, 3百餘 名 以上의 서울大學校 敎授들을 交換敎授 形式으로 美國 留學을 推進했다. 이때 그는 美國에 간 敎授들은 交換敎授 또는 有給 休職의 形態로 美國 留學費와 留學生活 便宜를 모두 봐주었다.

學生들을 保護하다 [ 編輯 ]

3月 20日 頃부터 3.15 不正選擧에 抗議하는 學生 데모가 繼續되자 示威期間 中 尹日善은 敎授들을 데리고 直接 學生 示威隊의 곁을 지키며 그들을 保護하였다. 正體不明의 사람이 누군가가 接近하면 그대는 어느 學科의 누군가 라고 물어 身元을 確認하곤 했다. 이 때문에 不純한 마음을 품고 學生들을 煽動하러 왔던 正體不明의 젊은이들이 갑자기 그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기도 했다.

催淚彈과 銃彈이 날아오는 中에 그는 示威隊와 警察 사이에 서서 警察에게 學生들에게 過剩鎭壓하지 말 것을 呼訴하였다. 또한 逮捕된 學生들의 救命과 釋放을 위해서도 警察署 當局과 直接 交涉, 앞길이 蒼蒼한 젊은이들이 한瞬間의 失手로 人生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잘 봐달라고 善處를 呼訴하였다. 4.19 以後에도 그는 學生 示威隊의 歸家를 呼訴하는 한便, 3.15 不正選擧 直後 어수선해지고 洶洶해진 서울大學校 校內 授業雰圍氣를 다잡으려 努力하였다.

生涯 後半 [ 編輯 ]

4.19 革命 前後 [ 編輯 ]

4.19 革命

1960年 4月 18日 高麗大學校 學生 데모가 있던 날 저녁 當時 自由黨 國會議員 최규남 으로부터 "서울대學生들度 데모에 나올 週 모르니 操心하라"는 말을 들었다. 4月 19日 아침 8時에 尹日善은 各 單科大學 學長會議를 召集했다. 會議가 끝나기도 前에 서울對 文理大生들이 데모를 벌일 氣勢를 보여 學長들이 遑急히 달려나가 말렸으나 所用이 없었다. 以後 4.19 革命 이 發生하자 그는 學生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努力하였다. 警察廳과 法院에 電話를 걸어 學生들의 데모 參與를 挽留할테니 最大限 寬大한 處理를 要請하였다.

4月 19日 낮 尹日善은 신태환 서울법대 學長 等 7, 8名의 學長들과 함께 汝矣島 國會議社長 까지 간 서울대 데모대를 찾아가 學校로 되돌아가라고 說得했다. [7] 學生들은 工夫가 學生들의 本分이며, 自己 分野에서 最善을 다하는 것이 眞正한 愛國이라는 것이었다.

1960年 4月 27日 市民의 眞情을 呼訴하는 學生 示威隊

그가 學生들의 歸校 條件으로 내세운 것은 "連行된 學生들의 釋放 [7] "이었다. 이어 學生들의 歸校 條件으로 내세운 連行된 學生들의 釋放 問題를 協議하기 위해 東大門警察署長 을 만나고 왔는데 서울大 生들은 建大, 중앙대 等의 데모대 隊列과 함께 中央廳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7] 示威가 激化되면서 그는 學生들 옆을 따라갔다. 東亞日報社 社屋 앞에서 서울大生度 아닌 不良차림의 靑年이 데모隊列에 끼어들어 煽動하는 것을 본 尹日善은 "너 學生이냐"라고 물었다. [7] 學生들 사이에 끼어들어 流言蜚語를 煽動하는 者들을 막기도 하면서 그는 示威 學生들과 同行하였다. 국민대학교 앞에 이르러 警察들이 發砲 射擊을 加하자 그는 學生들의 앞에서 이를 가로막고 中止를 呼訴하기도 했다.

그러나 國民大學 앞에서의 警察의 銃擊에 學生들이 쓰러지는 것을 目擊한 그는 事態를 돌이킬수 없다는 것을 直感할 수 있었다고 回想한다. [7] 이어 學生들의 學校 復歸를 促求하는 한便 警察에 찾아가 連行된 學生들의 釋放, 赦免을 呼訴하여 學生들의 釋放, 赦免을 위해 努力하였다. 이어 4月 26日 李承晩 이 下野하면서 데모대에 加擔했던 學生들도 自然 解散했고 그도 學校로 되돌아왔다.

4.19 革命 以後 學院街에는 無能敎授 排斥運動이 發生했다. 學院街에 일기 始作한 無能敎授 排斥 運動으로 波動을 겪자 大學 敎授들은 學生들에 對한 停學, 懲戒, 學點 不利益 等 强勁策을 推進했다. 그러나 尹日善은 學生들의 이러한 行動을 辯護하였다. "純粹한 批判行動으로 解釋해야 한다. [7] "는 것이었다.

敎育, 政治 活動 [ 編輯 ]

場面 國務總理

1960年 8月 四寸 동생 윤보선 李 大統領에 就任하면서 靑瓦臺에 다녀왔다.

場面 內閣 때에는 國務總理室 에 불려가 場面 總理로부터 데모를 막으라고 指示를 받았다. [7] 그러나 隨時로 學生 데모가 發生했고 그는 다른 大學 總長들과 함께 隨時로 總理室로 불려가 場面 總理에게 叱咤를 받았다. 第2共和國 期間 中 "데모 막으라"며 每日 場面 總理 에게 불려가 [7] 다시피 했다.

5·16 軍事政變 直後, 5月 16日 中央廳 앞에서 朴正熙 所長과 이낙선 少領, 박종규 少領

5·16 軍士 政變 當時 軍政을 支持하였다. 그는 大學生들에게 "學生은 政治에 關與해서는 안 된다. [7] "며 說得하였다. 그러나 政治 問題에 깊이 빠진 學生들은 그의 忠告를 듣지 않았다. 5.16 軍事 政變 直後 "學生은 政治에 關與해서는 안 된다. [7] "는 그의 忠告를 듣지 않은 大學生들이 政府 當局에 逮捕, 一齊 拘束되는 事態를 目擊하였다. [7] 그는 軍事革命委員會를 찾아가 철모르는 學生들이니 容恕해 줄 것을 歎願하여 學生들의 處罰, 拘束 數를 最少化하였다.

1961年 9月 서울大學校 總長職을 辭退했고, 그해 停年退任한 뒤에도 1961年 서울대학교 醫科大學 病理學 講師, 서울대학교 大學院 講師를 거쳐 1962年 서울대학교 醫科大學 名譽敎授에 選出됐다. 1963年 1月 軍政에 參與하여 정구영 , 金鍾泌 , 叔父 윤치영 等과 함께 民主공화당 創黨에 參與했고, 1963年 2月 22日 民主공화당 서울市지구당 創黨準備委員長에 選出된 뒤, 2月 26日 共和黨 서울市지구당 委員長에 選任되었다.

學校에서 집을 마련해주다 [ 編輯 ]

大家의 子孫으로 태어났지만 儉素하고 潔白했으며, 財産 欲心이 없어 집한칸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였다 한다. 敎授生活 내내 貰房살이를 轉轉하였다. 그는 個人的으로 自動車 하나도 없었다. 美國의 某 순복음敎會 主催로 美國人 牧師가 와서 汝矣島 廣場에서 大集會를 하고 돌아가던 길에 偶然히 윤일선을 만나고는 車는 어디에 두었는가를 묻자 그는 걷는 것이 上策입니다. 하늘이 준 健脚(健脚)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對答하였다.

그의 서울 용산구 漢江邊의 洋屋 집은 停年退任 以後 마련한 것으로, 1960年 8月 停年退職 後 弟子들과 同門會에서 마련해 주었다. 弟子들과 同門會에서 十匙一飯으로 誠金을 모아 집을 마련해주었다 하여 特別히 弟子들이 집을 사주다 라는 題目으로 放送과 新聞에 大書特筆되기도 했다.

社會團體 活動 [ 編輯 ]

1963年 大韓民國 國內에 原子力 醫學이 처음으로 導入되자 그는 原子力 病院의 初代 院長에 特別히 任命되었다. 이어 原子力 治療에 對한 硏究 및 支援에 힘써 原子力 治療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原子力 病院長에 選出된 뒤 原子力院 內 放飼地農學硏究所를 創設하였다. 1964年 8月 13日 아리앙스 프랭세즈 프랑스聯合會 韓國委員會 名譽會員에 委囑되고, 1964年 9月 오스트리아 비엔나 에서 開催된 國際原子力機構(IAEA) 總會 韓國代表로 다녀왔으며, 1965年 9月 다시 오스트리아 비엔나 에서 開催된 國際原子力機構(IAEA) 總會 韓國代表로 選拔되어 다녀왔다. 1966年 原子力病院長에 再選되었다.

1972年 韓國科學振興財團 顧問, 연암문화재단 理事, 韓國兒童財團 移徙에 委囑되었다.

그 後 유네스코 韓國科學技術情報센터 委員長, 原子力病院長, 科學技術 後援會 理事長 等을 거쳐 1980年 財團法人 韓國科學技術振興財團 理事長이 되었다. 學術院賞과 文化 勳章, 서울市 文化賞 等을 받았다. 1986年 2月 人間常綠樹 名譽 稱號를 授與받았다. 韓國 醫學界의 泰斗라는 評價를 받았다.

晩年에는 白內障 수술과 難聽 을 앓았다. 1987年 6月 22日 서울特別市 銅雀區 鷺梁津2棟 225의 236番地 自宅에서 老患으로 死亡하였다. 當時 그의 나이 享年 91歲였다.

事後 [ 編輯 ]

서울정동 第一監理敎會에서 發靷, 葬禮式 後 忠淸南道 牙山郡 음봉면 원남리 先塋下에 安葬되었다. 1989年 6月 3日 弟子인 이상국 (李尙國) 서울大學校 醫大 敎授 等에 依해 牙山 원남리 墓所 近處에 追慕碑가 除幕되었다. [18]

2008年 8月 學術誌 ‘韓國史 市民講座’ 下半期號(43號)에서 大韓民國 建國 60周年 特輯 ‘大韓民國을 세운 사람들’ 을 選拔, 建國의 基礎를 다진 32名을 選定할 때 敎育, 學術 部門의 한사람으로 選定되었다. [19] 2011年 8月 科學技術人의 名譽의 殿堂에 獻呈되었다.

略歷 [ 編輯 ]

著書 및 論文 [ 編輯 ]

論文 [ 編輯 ]

  • 《人體內分泌에 關한 硏究》
  • 《免疫體》(免疫體)
  • 《韓國人의 癌에 對한 統計學的 硏究》(1947)
  • 《안드라퀴논을 投與하여 發生한 토끼의 胃癌》(1947)

著書 [ 編輯 ]

  • 《윤일선博士華甲記念論文集》

賞勳 經歷 [ 編輯 ]

學歷 [ 編輯 ]

名譽 博士 學位 [ 編輯 ]

思想과 信念 [ 編輯 ]

敎育論 [ 編輯 ]

그는 國家가 富强해지려면 經濟가 發展돼야 하고 經濟가 發展되려면 科學이 發達돼야 한다는 見地에서 産學協同 의 具體化 [7] 를 支持하였다. 그러나 그는 "産業과 學問이 너무 密着되면 學問의 (純粹한) 目的을 자칫 忘却하게 되는 副作用이 생길 念慮가 있다. [7] "며 警戒하기도 했다.

科學 技術官 [ 編輯 ]

그는 實驗, 實習 爲主의 敎育이 科學 技術을 발전시킨다고 했다. "科學 敎育은 實驗 爲主라야 科學 精神을 體得할 수 있다. [7] "는 것이다. 理論 敎育의 重要性을 否定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實驗과 實習이 重要하다고 본 것이다.

또한 70年代 以後 入試 爲主의 우리나라 科學敎育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7]

家計 [ 編輯 ]

美國 에서 夭折한 셋째 동생 윤왕선
堂叔 윤치호

동생 윤명선 은 滿洲國 總務廳 社繼妻(司計處) 統計課長을 지냈고, 막내 윤승선 (尹昇善)은 日本軍 關東軍司令部 大尉를 지냈다. 둘째 아들 윤탁구 亦是 後日 原子力 病院長을 歷任하기도 했다. 繼母 尹考慮 는 韓國人 最初로 男便의 姓을 따라 性을 바꾼 新女性이었다.

評價 [ 編輯 ]

國立 高等 敎育의 틀을 갖추는데 크게 貢獻하였다 [10] 는 評價가 있다. 그는 1953年 서울대학교 大學院長, 1956年 서울大學校 總長을 歷任하면서 醫學敎育에 큰 寄與를 했다. [25] 또한 醫學發展에 많은 貢獻을 했으며 [25] , 1966年 韓國原子力원 院長, 1967年 韓國科學技術後援會 理事長, 1971年 科學技術團體 總聯合會 名譽會長을 지내는 동안 韓國 科學技術 發展에도 큰 힘을 쏟았다 [25] 는 評價가 있다.

한때 鄭雲鉉 은 그가 日帝 强占期때 美英打倒 大講演會의 演士로 參加 [26] 한 點을 들어 批判하기도 했다.

기타 [ 編輯 ]

  • 日帝强占期 當時 美英打倒 大講演會 演士로 參加한 적이 있다.
  • 둘째 아들 윤탁구 外에도 셋째 아들 윤종구가 醫師이고, 四寸 兄弟 윤유선은 保健社會部 議政局長과 國立醫療院長을 지냈다. [26] 윤종구는 小兒科 醫師로 서울大學校 醫科大學 醫學과 小兒科學敎室 副敎授와 敎授를 지냈다. 셋째 며느리 문이숙(文利淑) 亦是 醫師로 이화여자대학교 大學病院 看護課長을 歷任했다. 軍醫官 大韓民國 陸軍 義務感을 지낸 5寸 堂叔 윤치왕 亦是 醫師로 産婦人科 醫師였다. 윤일선의 長男 윤석구는 物理學者이다.
  • 그는 朴正熙 민주 공화당 의 出帆에 參與하였는데, 當時 朴正熙 는 그의 四寸 동생인 윤보선 의 靜寂이었다. 그러나 그는 叔父 윤치영 이나 四寸 동생 윤보선 等과는 달리 政治的인 立場 表明은 比較的 自制하여 批判받지 않았다.
  • 그가 서울大學校 總長에 選出된 것은 敎授들의 投票로 總長을 選出한 첫 先例가 되었다. 이러한 '民主的 方式으로 敎授會議 同意를 거쳐 總長을 選定한 것은 서울大學校 開校 以來 처음이었다. [14] 또한 敎育公務員法 施行 以後 첫 番째 일로서 大學自治의 成長에 매우 劃期的인 일이었다 [14] ' 한다. 따라서 이를 大學新聞은 1956年 7月 2日子 第154號 1面 머리記事로 "敎授會가 願하는 總長, 尹博士에 壓倒的 同意"라는 題目으로 大書 特筆했다. 그러나 軍事政權은 大學 自治와 學問 自由를 制限하기 위해 더 以上 投票制度를 施行 못하도록 했다. [14]

各州 [ 編輯 ]

  1. 曉星 小學校 時節
  2. 當時 그의 집住所는 牙山郡 둔포면 신항리 142番地였으므로 本籍地는 牙山의 집住所로 記載되었다.
  3. 그의 집안은 이병도 家門과 二重의 겹査頓關係를 形成했는데, 叔父 윤치영 의 첫 夫人은 李丙燾의 女同生 이병영이었고, 三寸 윤치소 의 딸 尹老德은 이병도 의 6寸 兄 이병림과 婚姻하였다.
  4. 每日經濟, 1987年 2月 23日子 9面
  5. 每日經濟, 1987年 2月 24日子 9面, 社會面
  6. 每日經濟, 1987年 3月 2日子 9面, 社會面
  7. 京鄕新聞, 1972年 5月 5日子, 4面 社會面
  8. 每日經濟, 1987年 3月 3日子 9面, 社會面
  9. [醫師이야기 28]윤일선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0. 最初의 産婦人科 醫師는 男子? 女子? 프레시안 2009.10.14
  11. 東亞日報 1935年 6月 19日子
  12.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KOR_A1896_1_0001497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3. 정진숙, 《出版人 정진숙》 (을유문화사, 2007) 180페이지
  14. 차배근, 《서울대학교 大學新聞社 1(1952-1961)》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180페이지
  15. 大學新聞 第154號(1956. 7.2) 1面 머리記事
  16. 차배근, 《서울대학교 大學新聞社 1(1952-1961)》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179페이지
  17. 總長任命 同意投票는 1953年 4月 制定된 '敎育公務員法'에 總·學長의 任命을 위해서는 敎授會議 同意를 必要로 한다는 規定에 依해 實施되었는데, 이 規定에는 助敎授 以上의 敎職員의 任用 昇進에도 敎授會議 同意를 必要로 한다고 되어 있었음. 그리하여 서울대학교 醫科大學의 境遇는 專任講師 以下 無給助敎를 任用할 때도 敎授會議 同意를 求하곤 했는데, 大體로는 通過되었지만 間或 否決되는 境遇도 있었음.
  18. 京鄕新聞 1989年 6月 1日子 4面, 社會面
  19. 混沌의 解放空間서 自由民主主義 礎石을 놓다 - 東亞日報 , 2008年 8月 22日子
  20. “保管된 寫本” . 2015年 10月 1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1月 5日에 確認함 .  
  21. 다른 이름은 조마求禮
  22. 京都帝國大學이라고도 부른다.
  23. 怪漢의 狙擊을 받고 암살당함
  24. 國民步 第41號, 1914年 1月 7日子 記事
  25.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2127a
  26. 鄭雲鉉, 《나는 皇國臣民이로소이다-새로 밝혀 쓰는 親日人物社》 (蓋馬高原, 1999) 160페이지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권이혁, 《馬耳東風》(조화로운 삶을 위해 버려야 할 것) (身元出版社, 2008)
  • 일조각 編輯部, 《韓國史 市民講座 第43輯》 (일조각, 2008)
  • 서울大學校 , 《韓國醫學人物史》 (서울대학교 韓國醫學人物史 編纂委員會, 太學士, 2008)
  • 김상선, 금동화 外, 《科學大統領 朴正熙와 리더십》 (MSD미디어, 2010.09) 435~436, 439페이지
  • 차배근, 《서울대학교 大學新聞社 1(1952-1961)》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 전택부, 《自畫像을 그리듯이 3》 (범우사, 2004)
  • 공덕귀, 《공덕귀-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 (여성신문사, 1994)
  • 윤치영 , 《東山回顧錄:윤치영의 20世紀》(삼성출판사, 1991)
  • 윤일선, 《윤일선博士華甲記念論文集》 (記念編纂委員會, 1956)
  • 사상계, 《學術界 創刊號》 (思想繫辭, 1958)

外部 링크 [ 編輯 ]

서울大學校 副總長
1954年 4月 ~ 1956年 7月 18日
前任
최규남
第6代 서울대학교 總長
1956年 7月 19日 ~ 1961年 9月 29日
後任
권중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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