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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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1968년 타이완 방문 당시 모습
1968年 타이완 訪問 當時 모습
大韓民國의 中央情報部 次長
任期 1973年 1月 6日 ~ 1973年 9月 6日
大統領 朴正熙
總理 金鍾泌
長官 이후락 中央情報部 部長

大韓民國의 第11代 建設部 長官
任期 1974年 9月 18日-1976年 12月 5日
前任 이낙선
後任 신형식
大統領 朴正熙
總理
歷代 國務總理

大韓民國의 第8代 中央情報部長
任期 1976年 12月 6日-1979年 10月 26日
前任 신직수
後任 윤일균 (職務代行)
大統領 朴正熙
總理 최규하

이름
別名 德山(德山; 號)
身上情報
出生日 1924年 4月 9日 ( 1924-04-09 )
出生地 日帝 强占期 朝鮮 慶尙北道 善山郡 先山面 이문리
死亡日 1980年 5月 24日 ( 1980-05-24 ) (56歲)
死亡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西大門區 현저동 서울拘置所
所屬 豫備役 大韓民國 陸軍
正當 無所屬
父親 김형철
母親 勸誘金
兄弟姊妹 김항규(男동생)
김재선(女同生)
김재숙(女同生)
金正淑(女同生)
김단희(女同生)
김순희(女同生)
김영규(男동생)
配偶者 김영희(情實), 壯丁이(내연녀)
子女 3男 1女(딸 김수영, 兩者 金玟秀)
宗敎 佛敎
軍事 經歷
服務 大韓民國 陸軍
服務期間 1946年 ~ 1973年 4月 25日
最終階級 中將(中將)
指揮 6師團
保安司令部
3軍團
主要 參戰 韓國 戰爭

김재규 (金載圭, 1924年 4月 9日 ~ 1980年 5月 24日 )는 大韓民國의 軍人 , 政治人이다.

第9代 國會議員( 유신政友會 , 全國區), 建設部 長官 , 中央情報部長 을 지냈다. 朴正熙 의 執權 期間 동안 代表的인 最側近으로 있었으나, 1979年 10月 26日 朴正熙 等을 暗殺한 10.26 事件 을 일으켰다. 本貫은 김녕 (金寧)이고 慶尙北道 善山郡 出生이며 號는 德山(德山)이다.

生涯 [ 編輯 ]

軍人 生活 [ 編輯 ]

朴正熙 의 動向( 慶尙北道 龜尾 ) 後輩이자 陸士 2期로 朴正熙와 動機이다.

1943年 안동농림학교를 卒業한 後 日本 海軍 飛行 豫科 練習生에 選拔되어 戰鬪機 操縱訓鍊을 받고 所謂 任官을 앞둔 渦中에 解放을 맞았다. 解放 後 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 第2期生으로 入敎하여 1946年 12月 卒業하였다. 그러나 在職 中 部隊 內 死亡事故의 責任을 지고 免職되어 暫時 金泉中學校와 대륜중學校에서 敎師生活을 하다가 復職하였다. 1952年에 陸軍大學 을 卒業하고 1970年 한양대학교 大學院 을 卒業하였다.

1963年부터 1966年까지는 步兵第6師團 師團長으로 있었으며 1954年 陸軍 第5師團 36聯隊長을 거쳐 陸軍 第101聯隊長을 지냈고, 1956年 陸軍 准將 進級, 1957年 陸軍大學 副總長을 지냈다. 1961年 5.16 軍事政變 直後 反革命 勢力으로 몰려 一時 監禁되었으나 朴正熙 의 命令으로 풀려나 軍事政府에 積極 協助했다.

朴正熙 政權 時節 [ 編輯 ]

軍部에서 新任 [ 編輯 ]

以後 軍事政權 治下에서 1961年 湖南肥料 社長, 1963年 陸軍 第6師團長으로 赴任한다. 1964年 6ㆍ4戒嚴令 이 宣布되어 이 6師團은 서울의 戒嚴을 책임지게 된다. [1] 이때 6師團長은 金鍾泌 除去에 앞장서고 戒嚴令下의 警察業務에 軍을 動員하는 것을 拒否한다. [1] 그리고 1966年 陸軍 第6管區司令官, 1968年 陸軍 保安司令官, 1971年 陸軍 第3軍團長을 歷任하고 1973年 1月 6日 中央情報部 次長 職責에 就任하였으며 該當 職責 在職 中이던 1973年 4月 25日 陸軍 中將으로 豫編하였다. 그는 陸軍 第6師團長 時節이던 1964年, 6.3事態 當時 戒嚴軍을 指揮하여 朴正熙에게 더 큰 信任을 받게 된다.

韓國企業의 中東進出에 寄與 [ 編輯 ]

國會 入門은, 1973年 유신政友會 (維新政友會) 所屬의 9代 國會議員 이 되어 國會에 入門하게 되었다. 中央情報部 次長을 지내기도 한 그는 1974年 9月, 建設部 長官 에 任命되었다. 朴正熙 大統領은 韓國企業의 中東進出을 위한 決定을 내리는데, 그 中東進出 過程에 寄與를 하며 建設部 長官으로 任命된 것이다. [2]

軍事 政權에 反撥의 表面化 [ 編輯 ]

建設部 長官때 이미 維新政權이 獨裁를 維持하는데 對해 懷疑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그러한 點은 大學生들이 데모로 連行되거나 拘束되는 것 等에 對해 影響力을 行使하여 석방시킨 事例도 있는 것으로 보이며, 放送에 따르면 建設部 長官 在職때 朴 大統領을 獨對하는 狀況을 맞아 暗殺을 試圖하려고 轉役當時 所持하고 있던 拳銃을 所持하였지만 理由는 不明이지만 不發에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情報機關長 就任 [ 編輯 ]

1976年 12月 中央情報部長 자리를 맡으면서 議員職을 辭退하였다.

以後 頻繁한 騷擾事態 發生과 緊急措置令의 濫發에 따른 政治勢力間의 軋轢과 葛藤이 尖銳하게 展開되던 狀況 속에서, 그는 周到綿密한 情報蒐集과 事態撫摩의 任務를 遂行하였다.

朴正熙 暗殺과 死刑 [ 編輯 ]

그러나 1979年 8月 11日 YH 貿易 女工 籠城 事件 (YH貿易 女工 籠城 事件), 10月 4日 신민당 總裁 金永三 (金泳三)의 國會議員 除名 事件, 10月 16日 釜馬事態 等 繼續된 政局不安事件을 收拾하면서, 維新政權의 正當性에 對한 疑問과 懷疑를 느끼기 始作하였다. 同時에 時局 收拾策을 둘러싸고 强勁派인 大統領 警護室長 차지철 (車智徹) 과 深刻한 摩擦을 빚고, 차지철과 그를 擁護하는 朴正熙 에 對한 反感과 不信을 가지게 되었다. 이 渦中에 週 프랑스 工事 이상열 (李相悅)을 買收하여 1979年 10月 7日 前(前) 中央情報部長 김형욱 (金炯旭)을 誘引 殺害하도록 誘導한다.

1979年 10月 26日, 서울 鍾路區 궁정동 中央情報部 安全家屋에서 朴正熙 大統領과 김계원 大統領 祕書室長 및 차지철 大統領 警護室長과의 宴會 술자리 途中, 朴正熙 大統領과 차지철 警護室長을 발터 PPK 拳銃으로 弑害, 10.26 事態 를 일으키고 逮捕되어 軍事裁判에 回附되었다.

궁정동 安家에 남겨둔 朴 前 大統領을 國軍病院으로 옮긴 것을 몰랐으며, 김계원 祕書室長이 屍身을 옮기는지 알았다면 許諾 안했을 것이라며 "革命의 失敗는 김계원 祕書室長 때문이라고 말했다. [3]

以後 1980年 1月 28日 陸軍 高等戒嚴軍法會議에서 "內亂目的殺人 및 內亂未遂罪"로 死刑을 宣告받고 그 해 5月 24日 서울拘置所에서 死刑이 執行되었다.

김재규의 生存 루머 [ 編輯 ]

死刑 執行이 끝나고 김재규의 屍身을 바꿔치기 했다는 所聞이 돌았다. [4] 親同生 김항규氏는 김재규 前 中情部長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說은 루머이며, 屍身을 받아서 或如나 屍身이 바뀌었는지 耽讀했던 探偵 小說에서처럼 여기 저기 살펴본 結果 兄이 틀림이 없었고 屍身의 목에는 絞首刑 때 밧줄 자국이 鮮明하게 있었다고 한다. [5]

軍事法院에서 再審의 餘地 [ 編輯 ]

비록 김재규 前 中情部長의 革命 試圖가 設或 革命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朴正熙 大統領이 '부마抗爭을 鎭壓하지 못하면 直接 發砲命令을 내리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 만큼, 그랬다면 大韓民國은 그나마의 形式的 民主主義마져 破壞되고 캄보디아와 같은 極限의 內戰狀態가 招來되거나 北韓 김일성의 南侵이 促迫되었을 蓋然性도 있다고 보이며, 結局 김재규 前 中情部長이 비록 權力의 核心部인 中情部長이지만, 그 亦是도 찬밥待接을 받던 狀況에서 正規兵力을 動員할 수도 없는 民間人으로서 구테타를 할 수도 없는 狀況이라면 選擇肢는 暗殺뿐이었으리라고 判斷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재규 前 中情部長이 비록 殺人의 罪責을 받고 陸軍 高等戒嚴軍法會議에서 死刑이 宣告되었지만, 宣告된 罪名人 '內亂目的殺人 및 內亂未遂罪'는 適法한 犯罪構成要件이라고 할 수 없어보이며, '單純 殺人'(朴正熙, 차지철)으로만 處罰되었어야 한다고 보이며, 再審을 통해 陸軍高等戒嚴軍法會議의 宣告를 再考해야 한다고 본다.

學歷 [ 編輯 ]

朴正熙 暗殺의 動機 [ 編輯 ]

民主化 革命 [ 編輯 ]

YH 事件 으로 朴正熙 政權과 正面 對決을 宣布하는 記者 會見에서 新民黨 總裁 金永三 은 "朴正熙氏의 下野를 强力히 要求한다."라 發表한다. [6]

김재규 本人의 辯論 [ 編輯 ]

김재규는 1審 最後辯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의 10月 26日 革命의 目的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番째가 自由民主主義를 回復하는 것이요, 두番째는 이 나라 國民들의 보다 많은 犧牲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番째는 우리 나라를 積貨 로부터 防止하는 것입니다. 네番째는 血盟의 友邦인 美國과의 關係가 建國以來 가장 나쁜 狀態이므로 이 關係를 完全히 回復해서 敦篤한 關係를 가지고 國防을 爲始해서 外交 經濟까지 보다 積極的인 協力을 通해서 國益을 圖謀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番째로 國際的으로 우리가 獨裁 國家로서 나쁜 이미지 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國民과 國家가 國際 社會에서 名譽를 回復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革命의 目的이었습니다.

김재규는 ‘내가 (擧事를) 안 하면 틀림없이 釜馬抗爭 이 5大都市로 擴大돼서 4·19 보다 더 큰 事態가 일어날 것이다’고 判斷했다. 李承晩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朴正熙는 絶對 물러날 性格이 아니라는 判斷을 했다. 차지철은 ‘ 캄보디아 에서 300萬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萬~200萬 名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 그런 參謀가 옆에 있고 朴正熙도 ‘自由黨때는 최인규 곽영주 가 發砲 命令을 내렸기 때문에 死刑執行 했는데 내가 直接 發砲 命令을 내리면 大統領을 死刑시킬 사람이 누가 있겠어’라고 말을 했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犧牲을 막기 위해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차지철과 紛爭이 있기 前까지는 朴正熙의 忠臣이었다는 點에서 그가 急造한 것이라는 主張이 있다. [7]

하지만, 장준하 側近을 돕고 김대중을 풀어 김영삼과 만나게 하는 等의 巨事 前 行動과 美國의 記錄을 볼 때 民主主義에 생각이 많은 자라 볼 수 있어 김재규의 主張은 信憑性이 있다.

[出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年 4月 4日 (일) 第 78 回 ▣ 79年 10月, 김재규는 왜 쏘았는가 / “張俊河-김재규 '擧事' 密約 했다” | 日曜新聞 ]

暗殺 當時에 安家의 '가'棟에는 陸軍 參謀總長이 만날 約束이 잡혀서 情報部長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강신옥 辯護士에게 鄭昇和 總長도 自身에게 속아서 궁정동으로 왔다고 答한다. [8] 그곳엔 中央情報部 第2次長報道 함께 待機한 바 있었다. [1]

NPT 加入 後에도 核開發 推進 [ 編輯 ]

朴正熙 政府는 1968年 核擴散防止條約 (NPT)에 署名하였지만 北韓이 NPT에 加入하지 않았다는 理由로 NPT 批准을 미뤄왔다. [9] 1975年 4月 23日에 韓國 國會에서 批准이 이루어지면서 大韓民國은 條約 署名 後 7年 만에 NPT 會員國이 되었다. [9] 그러나 朴正熙 政府는 NPT 加入 後에도 持續的으로 核 開發을 推進하였다. [9] [10] 朴正熙 政府 關係 部處의 意見 變化를 살펴보면 朴正熙 政府는 NPT 加入 後 오히려 核能力을 增進하는 것이 可能할 것이라 생각하고 加入을 決定했다. [9] NPT 加入이 核 抛棄를 의미한다는 一般的인 主張에 合致하지 않는 事例이다. [9]

前 情報機關長의 個人 財産 凍結 [ 編輯 ]

1978年 10月末 韓美關係調査報告書( 프레이저 報告書 )에 따르면 씨티은행이 美國과 海外計座에 있는 그의 財産 總額이 1500~2000萬 달러로 推定된다는 資料를 提出했다. [11] 그 資料가 提出되기 前에 김형욱 前 中央情報部長은 下院 聽聞會場에 證言臺에서 260萬 달러를 美國으로 가져와서 그 折半은 賭博으로 날렸다고 是認했다. [11]

朴正熙는 美國으로 亡命한 最側近 김형욱에 激怒하며 上疏禁止, 財産沒收, 闕席裁判에다 外國 逃避者·居住者 處罰 等 超法的 內容을 담은 ‘特別措置法’ 制定을 指示한다. [12] 그에 따라 1982年에는 反國家行爲者의 處罰에 關한 特別措置法 (反國家特別法) 違反罪로 김형욱은 財産 沒收刑까지 받게 되고 1998年에야 財産 沒收刑이 取消되어 家族들이 國家로부터 財産을 모두 돌려 받는다. [13]

최태민 朴槿惠 問題 [ 編輯 ]

不動産 1千億원, 동산 2千億원이던 救國女性奉仕團 總裁의 個人 財産 [ 編輯 ]

朴槿惠 大統領 彈劾訴追案의 國會 通過 時期에 김재규 一家는 言論 인터뷰에서 최태민 의 非理가 弑害 事件의 原因이 되었다고 밝혔다. [14] 최순실이 異腹 동생 되는 최재석은 2017年 PD手帖 放送에서 아버지 최태민의 個人 財産이 1994年 5月 死亡 時點에서는 不動産으로 1千億원, 동산은 個人 金庫에 2千億원해서 모두 3千億원 程度 되었다고 알린다. [15] 최재석은 네番째 夫人, 최순실은 다섯番째 夫人의 子女인데 최태민이 노란 封套 2個에 담긴 登記簿 謄本 等의 書類를 최재석 自身에게 보여주는데 不動産 財産 目錄이었다고 한다. [15] 그런데 최태민의 死亡直後 親戚들이 다 모이고 2~3日 後에 崔順實의 親母인 임선희는 에어콘까지 뜯어서 移徙를 갔는데 그 金庫의 돈도 모두 사라졌으며, 깡牌 3~40名이 최재석에게 와서 殺害 威脅을 하길래 112에 申告하였는데 警察 조차 오지 않았다. [15]

1975年 5月 救國女性奉仕團 總裁로 있는 似而非牧師 최태민이 自稱 太子媽媽라 稱하며 詐欺橫領 等은 勿論 女子들과의 醜聞도 있어 大統領에게 報告했으며 '情報部에서 그런 것도 調査하나'며 反問해서 金 前部長이 놀랬다고 한다. [14]

偶發的 犯罪설 [ 編輯 ]

김재규 本人은 1979年 12月 18日 戒嚴軍法會議 最後陳述 에서 "民主化를 위하여 野獸의 心情으로 維新의 心臟을 쏘았다", "計劃的인 革命 居士였다" 라고 主張한다.

김재규의 1·2·3審 辯護를 맡았던 안동일 辯護士에게 김재규는 10·26 以前에도 서너 次例 大統領 弑害 準備를 했지만 決行하지 못했다고 털어 놓았다. [8]

全國民에게 傳達하고 싶어 했던 "革命을 했다"는 메시지 조차 김재규는 獄바라지했던 동생에게 多急하게 傳해야 했다. [16] 12·12 軍事叛亂은 公組織을 병들게 하고 無力化한 軍部 안에 癌細胞 같던 私組織이 叛亂의 主體였지만 當時 國民은 이런 事實을 全혀 알지 못했다. [17] 12月12日이 水曜日이었으나 전두환氏는 12月 12日이 土曜日이어서 休日동안 搜査를 하고 조용히 마무리 지을 作定이었다고 말한다. [18]

美國의 朴正熙 除去 指令설 [ 編輯 ]

10.26 事態 며칠 前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韓國支部長을 面談했다. 이 일로 美國이 朴正熙의 죽음에 介入했다는 疑惑이 提起됐다. [19] 김재규는 軍事裁判에서 史上 最惡에 이른 韓美關係의 改善을 自身의 擧事의 한 理由로 들었지만 美國의 直接的인 介入은 否定했다. 駐韓美國大使 글라이스틴 은 김재규의 韓美關係 發言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神經質的인 反應을 보였다. [19]

比較的 最近인 2011年 1月 18日에는, 한 在美 同胞에 依해 김재규에 關한 美國의 當時 祕密文書가 모두 非公開 處理되었다는 事實이 밝혀지고, 김재규가 朴正熙 大統領을 狙擊하던 當日 午後 2時에 글라이스틴 駐韓美國大使를 만난 事實이 뒤늦게 드러나서 [20] 김재규의 朴正熙 暗殺에 對한 疑問과 關心이 한層 더 높아지기도 했다.

中央情報部長으로서 其他 犯罪 [ 編輯 ]

김형욱 殺人敎唆 [ 編輯 ]

2005年 5月 26日 國家情報院 過去事件 眞實糾明을 통한 發展委員會 (委員長 오충일)는 1979年 9月 末 以前, 김재규가 中央情報部의 프랑스 據點長이었던 이상열 駐프랑스 公使에게 김형욱 前 中央情報部長 殺害를 指示하였다는 中間 調査 結果를 發表했다. 김재규의 指示를 받은 以上熱은 中央情報部 硏修生 2名을 適任者로 選定하였다. 硏修生 A는 第3國인 2名에게 殺人 請負를 하여 이들과 함께 1979年 10月 7日 乘用車로 김형욱을 拉致해 파리 近郊로 끌고갔고, 第3國人이 拳銃으로 김형욱을 殺害한 뒤 樂옆으로 屍身을 덮어놓고 現場을 빠져나왔다. 以後 硏修生 B는 第3國인 2名에게 美貨 10萬달러를 支給하였다. 官邸에서 硏修生 A로부터 結果를 報告받은 以上熱은 證據를 湮滅한 뒤 歸國할 것을 指示했고, 歸國한 A는 1979年 10月 13日 警 김재규에게 結果를 報告했다. 結果를 報告 받은 김재규는 A를 中央情報部長 直屬機關인 政策硏究室로 發令하고 300萬원과 20萬원이 든 封套 두個씩을 支給하며 殺害에 加擔한 B와 나눠 갖도록 했다. [21] [22]

2020年 2月 3日 김재규의 셋째 동생 김정숙氏는 中央日報와의 인터뷰에서 김형욱 前 中央情報部長 失踪事件은 우리가 아는 한 故人이 關與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23] 이스라엘 모사드에 派遣되어 特需 暗殺 訓鍊을 받은 要員이 中央情報部 暗殺 實行兆 一員으로 같이 있었으며, 1979年初 靑瓦臺 別館으로 불려 갔을 때 朴正熙 前 大統領이 술을 손수 따라주며 "나쁜 놈이로구나, 내가 믿었던 김형욱 이놈이 나쁜 놈이로구나"하고 痛歎을 하였다고 言及하였다. [24]

豫算 有用해 朴正熙 賂物 時計 製作 [ 編輯 ]

1979年 8月 下旬 김재규 中央情報部長은 朴正熙 大統領의 生日 膳物用 時計를 製作하기로 하고 中央情報部長 祕書室의 金某 行政祕書官을 통해 駐제네바代表部 N書記官에게 「日曜日 午前 10時에 취리히 空港에 到着하는 KAL機 便으로 緊急文書를 보내니, 機長으로부터 直接 文書를 受領해 結果를 報告하라」는 內容의 專門을 보냈다. 취리히 空港의 KAL 事務所長은 N書記官이 到着하자 <寫眞과 같은 懷中時計를 파텍 필립사나 피아제社에 注文하되, 11月 中旬까지 物件이 서울에 到着해야 한다. 懷中時計는 18K로 하고, 時計 全面과 後面의 圖案은 나중에 보내겠다>라는 內容이 담긴 中央情報部의 金某 行政祕書官이 作成한 便紙와 파텍필립사에서 製作한 懷中時計 寫眞이 들어있는 封套 하나를 건네주었다. [25]

N書記官은 封套를 건네 받은 다음 날 아침 파텍필립과 피아제를 次例로 訪問하였는데, 파텍필립의 營業 擔當 責任者는 「時計의 金型을 새로 製作해야 한다. 時計 表面의 彫刻과 附屬品 製作을 匠人들이 手作業으로 해서 빨리 만들 수 없다. 時計를 만들고 나서 韓國의 氣候와 濕度 等을 考慮해 한 달 동안 試驗 稼動을 해야 한다. 最小限 6個月 前에는 注文해야 한다」는 說明을 하며 김재규의 中央情報部 側에서 怨恨 11月 初旬까지는 時計를 만들기가 어렵겠다고 하였다. [25]

같은 날 午後 피아제를 訪問한 N書記官은 極東地域 營業 擔當者에게 中央情報部의 注文 內容을 傳達하였고, 다음 날 아침 『時間이 너무 빠듯하지만, 韓國과의 去來 關係 等을 考慮해 時計를 製作하겠다』는 連絡을 받았다. 피아제는 當時 金浦空港 免稅店에서 自身들의 製品을 販賣하고 있었다. [25]

이같은 事實을 N書記官으로부터 報告받은 金甲洙 中央情報部 祕書室長은 <時計 製作 問題는 김재규 部長님의 각별한 關心事項이니 蹉跌 없이 處理하라. 時計는 반드시 파텍 필립사에서 製作하되, 期日 內에 서울에 到着할 수 있도록 하라>는 피아제社에서 時計를 製作하는 것은 안된다는 內容의 全文과 製作할 時計의 圖案을 駐제네바代表部에 보냈다. 時計 圖案은 懷中時計 덮개에 鳳凰 文樣의 大統領 文章이 새겨지고, 가운데에는 勳章을 佩用한 朴正熙의 半身像 寫眞이 들어가도록 도안되어 있었으며 懷中時計 뒷面 左右 兩쪽에는 여러 個의 無窮花가, 가운데에는 「根軸 誕辰 1979」라는 글씨가 새겨지게 되어 있었다. [25]

다음 日曜日 N書記官은 김갑수의 專門을 傳達받았고, 파텍필립의 營業 責任者를 다시 만났다. 파텍필립 側은 時間 外 作業을 하겠다며 김재규가 注文한 時計 製作을 맡기로 하였다. 注文額 保證金은 제네바 代表部 官印을 捺印한 作業要請 公翰으로 代身하였다. [25]

1979年 10月 中旬 파텍필립은 1萬 9000달러의 製作 費用을 請求하는 송장을 駐제네바代表部에 보냈고, N書記官은 제네바 現地 時刻 基準 10月 26日 午前에 外交 行囊 篇으로 송장을 韓國으로 보냈다. 韓國 時間으로는 10月 26日 午後 무렵에 該當하였고, 注文한 時計 價格인 1萬 9000달러는 N書記官의 1年値 俸給과 各種 手當을 합친 金額과 비슷하였다. [25]

송장을 보낸 後 얼마 지나지 않은 時點인 10月 26日 午後 9時頃(제네바 現地 時刻 基準), 英國 BBC 放送이 「서울에서 쿠데타가 發生했다」는 緊急 뉴스를 내보냈고 제네바 代表部 職員들은 大槪 이 放送을 聽取하였으며, 얼마 뒤 김재규가 朴正熙를 弑害한 事實도 傳해졌다. [25]

이에 時計의 必要를 喪失한 中央情報部와 제네바代表部는 注文 取消를 考慮하였으나 時計 完成을 앞두고 있던 파텍필립 側은 製作 繼續 意思를 밝혔다. 1980年 4月 10日頃, 中央情報部 本部는 「懷中時計를 購入하기로 決定했으니, 價格과 物品 引受 可能 일자를 報告하라」는 專門을 제네바代表部에 보냈고, 中央情報部는 中途에 購入을 保留하였다가 다시 時計 購入 決定을 確定하였다. [25]

中央情報部의 擔當 局長은 파텍필립으로부터 받은 時計를 全斗煥에게 傳達하였고, 전두환은 保安司令部를 통해 1980年 頃 朴正熙의 딸인 박근혜에게 傳達하였다. [25]

評價 [ 編輯 ]

肯定的 評價 [ 編輯 ]

2019年 5月 1日 部隊管理訓令 改正을 國防部 次元에서 마무리 하였다고 밝혔다. [26] 그에 따라 陸軍 3軍團과 6師團의 歷代 指揮官으로 寫眞이 揭示되며, 部隊의 歷代 指揮官 名單에도 40餘年 만에 다시 올라간다. [26]

강창성 民主黨 國會議員은 美國의 壓力으로 核武器 開發努力이 水泡로 돌아갔으며 朴 大統領의 時해도 이와 關聯이 있는 것 같다고 主張했다. [27]

함세웅 神父는 "우리 時代 가장 큰 犧牲者는 김재규 部長이다. 김재규 部長이 歷史的으로 再評價될 때 韓國의 民主主義 가 確認되는 것이다."라고 말했고, 이것을 言論에서는 民主 人權 의 象徵이라는 存在의 發言으로 報道했다. [28]

김재규 前 中情部長의 妹弟인 오수춘 前 陸軍 中領은 金 前部長이 間諜事件을 操作하던 前任者와는 完全히 다른 사람이라며, ' 동백림 事件 ' 같은 種類의 '한 건'과는 距離가 먼 사람이라고 밝혔다. [14]

朴正熙 大統領을 糾彈하던 釜馬事態 時期에 馬山에서 示威隊에게 隊列을 갖추라고 하고 口號를 외치게 하던 경남대 女大生 2名은 示威 現場에서 逮捕되어서, 示威 主動者로서 性拷問을 받으며 取調 施設에 收監되어 있었다. [29] 그런데 朴 大統領 逝去後 한달 半이 지난 後에 面所 判決을 받고 풀려났으며, 釜馬事態 1番째 示威 主動者의 緊急措置法 違反 嫌疑는 無罪 判決이 났으며, 어느 示威 參加者의 無罪 判決을 내린 裁判官은 判決을 내리며 被告를 激勵한 바있다. [29]

新軍部 는 김재규를 悖倫兒로 만드는 言論 報道 管制(檢閱 및 對應) 프레임을 進行했다. [30] 김재규의 女同生 김단희는 言論에 '( 釜馬抗爭 等에) 民亂이 일어나면 大統領 家族들을 그냥 두겠느냐, 박근혜와 (朴正熙) 아이들이 光化門 네거리에서 悽慘한 모습으로 내쫓기는 모습을 어떻게 보느냐'고 김재규가 안타까워했었다고 했다. [31]

否定的 評價 [ 編輯 ]

朴槿惠 前 大統領은 1989年 5月 19日 TV放送에서 옛날에는 毒을 앞에 놓고도 임금에게 上疏라는 것을 했었고, 아버지 朴正熙는 김재규에게 情報部長이라는 높은 자리를 주었는데 維新 에 對해서 나쁘게 생각했다면 한番이라도 어떻다고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그런 式으로 背信을 하는 것은 悖倫이라고 말한다. [32]

10·26 事件 김재규 再審 與否 心理 [ 編輯 ]

民主社會를 위한 辯護士모임 과 김재규氏 女同生의 10·26 事件 再審 請求를 4年만에 2024年 4月 17日에 審理할 豫定이다. [33]

賞勳 [ 編輯 ]

忠武武功勳章, 大統領表彰, 保國勳章 천수장·三日葬·국선장·광복장·統一場과 킹압둘아지즈勳章(사우디아라비아) 等을 받았다.

家族 關係 [ 編輯 ]

  • 아버지: 김형철(1907年 ~ 1975年)
  • 어머니: 勸誘金(1905年 ~ 2001年)
  • 아내: 김영희(1930年 ~ )
    • 딸 : 김수영(1953年 ~ )
  • 男동생: 김항규(1928年 ~ 1997年)
  • 누이同生: 김재선(1933年 ~)
  • 누이同生: 김재숙(1935年 ~ 2019年)
  • 누이同生: 金正淑(1939年 ~ )

長男 김성신 長女 김성은

  • 누이同生: 김단희(1943年 ~ )

長男 오현석 長女 오영민

  • 누이同生: 김순희(1946年 ~ )

長女 이영신

김재규를 演技한 俳優들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김광희 (2021年 11月). “人間 김재규와 10ㆍ26에 對한 再認識” . 《韓國學硏究》 (인하大學校 韓國學硏究所) 63 : 409?434. ISSN   1225-469X .  
  2. “김재규 (金載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韓國學中央硏究院 . 2023年 12月 28日에 確認함 .  
  3. “김재규 "維新憲法은" 裁判官 "그만하십시오"···10·26의 最後” . 中央日報. 2020年 6月 1日.  
  4. “24日 死刑 當한 '朴正熙 弑害' 김재규, 하루前 조카에게 한 말은” . 아시아經濟. 2017年 5月 25日.  
  5. “親同生이 바라본 朴正熙 殺害犯 '김재규 ' . 事件醫內幕. 2017年 5月 26日.  
  6.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7回 "101號 作戰" SBS 2021-04-22
  7. 김재규는 두 가지를 錯覺했다. 週刊京鄕 2005年 11月 4日 2011-10-25 確認
  8. “[10·26 40周年]① 宮井洞의 銃소리…엇갈리는 評價” . 聯合뉴스. 2019年 10月 25日.  
  9. 주경민 朴正熙 政府의 NPT 加入 要因 分析 서울대학교 大學院 (2018年)
  10. ““朴正熙, 核武器 公開 뒤 下野하려 했다”” . 中央日報. 2010年 11月 8日.  
  11. “김형욱 “난 富者 아니다” … 씨티銀行 “財産 2000萬 달러”” . 中央日報. 2015?06-12.  
  12. “[오래前 '이날']8月28日 朴正熙 '背信'韓 김형욱의 無罪” . 京鄕新聞. 2016年 8月 28日.  
  13. “김형욱氏 財産 沒收 不當, 家族에 300億臺 返還判決” . 中央日報. 1998年 1月 23日.  
  14. “朴槿惠 彈劾 마주한 김재규 一家의 反應 뉴욕居住 김재규妹弟 오수춘 博士 單獨 인터뷰” . 선데이저널. 2016年 12月 15日.  
  15. PD手帖 1114回 최순실 財産, 또다시 代물림되는가 MBC 2017-01-24
  16. “親同生이 바라본 朴正熙 殺害犯 '김재규 ' . 事件醫內幕. 2017年 5月 26日.  
  17. ““數十年 ‘政治軍人’ 世上에서 男便이 살아남은 건 奇跡”” . 한겨레新聞. 2015年 12月 6日.  
  18. ““軍에 法을 無視하는 汚點 남겨”” . 시사저널. 1990年 1月 21日.  
  19. 「www.韓國現代史.com」(김진국, 민연, 2000) 229페이지
  20.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68380
  21. 지일우·鄭俊英 (2005年 5月 26日). “김재규 指示로 파리近郊서 김형욱 拳銃殺害” . 《聯合뉴스》.  
  22. 미디어칸 뉴스팀 (2005年 5月 26日). “김재규 指示로 김형욱 殺害했다” . 《京鄕新聞》.  
  23. ' 南山의 部長들' 본 김재규 遺族 "貶下도 美化도 願치 않는다 " . 《中央日報》. 2020年 2月 4日.  
  24. ““김형욱은 내가 죽였다”” . 《시사저널》. 2005年 4月 11日.  
  25. 배진영 (2005年 3月). “[追跡] 10·26 直前 金載圭가 朴正熙 生日 膳物로 準備한 2萬 달러짜리 파텍 필립 時計의 行方” . 《월간조선》 (2005年 3月號: ㈜朝鮮뉴스프레스).  
  26. “[單獨]‘10·26’ 김재규 寫眞, 出身 部隊 다시 건다” . 京鄕新聞. 2019年 5月 2日.  
  27. “5共, 核開發 抛棄” . KBS. 1995年 10月 5日.  
  28.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244回 '極祕解除' 10.26과 全斗煥! JTBC 2019-05-28
  29. 《2部 잊혀진 英雄들》 . 創社60周年 特輯 記憶하라 1979 2部作. 釜山MBC. 2019年 4月 29日.  
  30.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244回 '極祕解除' 10.26과 全斗煥! JTBC 2019-05-28
  31. " 朴槿惠 아꼈던 우리 오빠를 悖倫兒로 부르다니... " . 오마이뉴스. 2012年 5月 27日.  
  32. “뉴스打破 26回 視線 - "박근혜氏, 아버지를 말한다" [專門]” . 뉴스打破. 2012年 9月 14日.  
  33. “‘10·26 事件’ 김재규 再審 與否 다음 달 心理…請求 4年만” . KBS. 2024年 3月 13日.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陸軍防諜部隊長) 박영석
第15代 陸軍保安司令官
1968年 2月 17日 ~ 1971年 9月 23日
後任
강창성
前任
김치열
第6代 中央情報部 次長
1973年 1月 ~ 1973年 9月
後任
(第1次長) 李尙益
(第2次長) 李哲熙
前任
이낙선
第11代 建設部 長官
1974年 9月 18日 ~ 1976年 12月 5日
後任
신형식
前任
신직수
第8代 中央情報部長
1976年 12月 6日 ~ 1979年 10月 26日
後任
(職務代行) 윤일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