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완
(李載完,
1855年
陰曆 12月 5日
~
1922年
8月 11日
)은 朝鮮 末期의 文臣이자 王族이며
大韓帝國
의 皇族, 官僚이다. 本貫은
全州
, 初名은 乙頃(乙經), 字는 순칠(舜七), 號는 석호(石湖)이다.
興완군
이정응
의 兩者이며,
思悼世子
의 玄孫이다.
1899年
에 婉順軍에 封爵되었고,
1910年
韓日 倂合
以後에 日本 政府로부터
侯爵
으로 封爵되어
朝鮮貴族
이 되었다.
1884年
12月
서재필
,
김옥균
,
이규완
等이 일으킨
甲申政變
當時
兵曹
板書
에 任命되었다.
1897年
(
光武
元年)에
漢城銀行
(漢城銀行)의 創立을 主管하였다.
生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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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生涯 初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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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5年
(哲宗 6年)에
朝鮮 宣祖
(宣祖)의 아홉째 庶子
경창군
移住(慶昌君 李?)의 9代孫이자
陰
縣令
을 지내고
增
左贊成
에
追贈
된 이신응(李愼應)
[1]
의 다섯째 아들로
京畿道
楊州郡
瓦工面에서 태어나
1864年
高宗의 指示로
興완군
이정응
(興完君 李晸應)의 養子를 選拔할 때, 養子로 落點되었다.
淫書
로 官職에 올라 敎官(敎官)을 지냈다.
1873年
(高宗 10)
7月 23日
童蒙敎官
(童蒙敎官)李 되고
1875年
興완군
의 還甲을 記念하여 特別히 이재완에게
過去 試驗
에 直赴(直赴)할 資格이 附與되었다.
官僚 生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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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5年
(高宗 12年) 4月에
文科
에 及第하여
[2]
,
5月 20日
假注書(假注書)에 任命되었고,
6月 20日
다시 假注書에 任命되었다. 12月 8日 分假注書에 任命되고 1876年 1月 한림에 들었다.
1876年
(高宗 13年)에 藝文館 檢閱 兼 春秋館記注官으로 選拔되어 6품으로 昇進하였다. 그해 兼說書와 兼春秋를 兼職하였다.
1877年
(高宗 14年)에 政3품으로 昇進하였고, 承政院 同副承旨를 除授받았다.
1878年
谷山府使로 나갔다.
1879年
(高宗 16年)에 種2품으로 昇進하였다. 그해 10月 承政院都承旨가 되고, 12月 議藥廳 副提調가 되었다.
1880年
(高宗 17年)
2月
에
李朝
參判
을 除授받았고,
[3]
5月 18日에 弘文館 副提學(弘文館副提學)에 任命되었다.
[4]
1882年
(高宗 19年) 春川 府使(春川府使)로 나갔가 그해
7月
山陵都監 書寫官(書寫官)에 差出되었다. 그해 가을
寧邊
都護府使로 赴任했다가
[5]
곧
承政院
承旨
에 任命되어 돌아왔다.
[6]
1884年
(高宗 21年)
12月
甲申政變
當時에
開化黨
(開化黨) 內閣의
兵曹判書
에 任命되었다.
[7]
甲申政變
이 失敗로 돌아가고
서재필
,
김옥균
,
이규완
等은 亡命하고
홍영식
等은 射殺되었다. 그러나 이재완은 王室의 가까운 親戚이며,
開化黨
圓이 아니라 하여 處罰받지는 않았다.
1885年
(高宗 22年)에 政2품으로 昇進하였으며, 刑曹判書와
[8]
, 知經筵事를 거쳐 司憲府 大司憲을 除授받았다.
[9]
1886年
(高宗 23年)에 藝文館 提學, 弘文館 提學과
[10]
侍講院 左副賓客,
[11]
藝文館 提學,
[12]
漢城府 判尹을 除授받었다.
[13]
1887年 申飭하라는 命을 어겼다는 理由로 이재원과 함께 競技도 沿海로 流配되었다가 釋放되었다.
1890年
(高宗 27年)
漢城府
判尹, 다시 刑曹判書, 弘文館 提學 等을 거쳐
1891年
(高宗 28年)에는 吏曹判書, 禮曹判書를 歷任하였다.
1892年
(高宗 29年)에 種1품으로 昇進하였다. 그해 12月 判義禁府事
1894年
(高宗 31年)
5月 20日
工曹判書
,
5月 29日
判義禁府事,
6月 13日
議政府 左參贊(議政府左參贊)을 歷任했다.
大韓帝國期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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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年
(高宗 32年)
5月 5日
宮內府 特進官(宮內府特進官) 勅任官(勅任官)에 서임되었다.
1896年
(建陽 1年)
1月 1日
宗正院 警 兼 貴族院 警(宗正院卿兼貴族院卿),
10月
頻傳 製造(殯殿提調),
1897年
(建陽 2年) 山陵都監 製造(山陵都監提調)를 歷任했다.
1897年
(
光武
元年)에
漢城銀行
(漢城銀行)을 設立할 때 主導的 役割을 하였다.
1898年
弘文館 學士(弘文館學士), 宮內府 特進官(宮內府特進官),
1899年
(光武 3年)에 宮內府大臣으로 任命되었고, 같은 해 9月에 4代 承襲의 禮에 따라 婉順軍(完順君)에 封爵되었으며,
[14]
政1品 輔國崇祿大夫(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日本
과 列强이
大韓帝國
國內에 鐵道附設權을 獲得하려 하자, 이재완은 이규환(李圭桓), 박기종(朴琪淙), 윤기영, 이준호, 서오순 等과 함께 鐵道經營만은 우리 손으로 해야 된다며 나섰으며
[15]
,
1899年
大寒鐵道會社
의 設立에 參與하였다.
1903年
(光武 7年)에
漢城銀行
이 公立 漢城銀行으로 改編되면서, 이재완은 銀行長에 選出되었다.
1905年
(光武 9年) 1月에 報聘大使(報聘大使)로서 日本에 派遣되었다가 2月에 歸國하였다.
1907年
(광무 11年) 4月 27日에 陸軍部長에 任命되었고, 같은 해 8月에 承寧府(承寧府) 摠管을 除授받았다.
1909年
7月 28日
漢城銀行
株主總會에서 이재완은 頭取로부터 拷問으로 밀려나고
이윤용
(李允用)李 頭取로 就任할 것을 決意했다.
[16]
生涯 後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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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年
10月 2日에
大韓帝國
과
日本 帝國
사이에 〈
韓日 倂合 條約
〉李 締結되며 日本 皇室令 第14號 〈朝鮮貴族令〉(朝鮮貴族令)이 公布되면서 日本 政府로부터 侯爵에 封爵되었고, 恩師公採 336,000엔을 下賜받았다.
1912年
에 漢城銀行 銀行長을 辭退하였다.
1912年
9月 9日
興親王 이재면이 죽자 葬禮式을 回避, 外面하려던
映宣群 이준용
을 달래서 葬禮式을 擧行했다.
興親王
의 殯所에서 이준용은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하지 않았고, 婉順軍은
映宣群 이준용
을 叱責하였다. 그러나 이는
國王
의 親兄인 아버지가 自己 아들의 身元을 要請하지 못하고 刺客들의
日本
行도 막지 못한 點,
日本
亡命 中에 아버지이 充分한 經濟的 支援을 해주지 못했고 집안을 제대로 經營하지 못한 데 對한 失望感 等이 複合的으로 作用한 것이었다.
[17]
映宣群
은 自身의 暗殺威脅과 暴力,
김학우
暗殺 事件 當時 죽음의 危機,
日本
으로 浸透한 朝鮮 刺客들로부터 自身을 지켜주지 못한 아버지에 對해 怨望을 품은 그는 오히려 家族과 親戚들이 해준 것이 무엇이냐며 反撥했다. 그 뒤 3年喪을 擧行하였지만 形式的이었고, 小祥과 對象 때 高宗과 德壽宮(純宗) 等이 費用과 禮官을 보내 致祭하였지만 그는 形式的으로 應答하였다.
9月 9日
午後
李太王
이 된
高宗
이 이재면의 殯所를 찾았을 때,
映宣群 이준용
은 자리를 避하였다. 高宗의 問喪 情報를 미리 傳해들은 그는 자리를 避했고 神經戰을 避하였다. 이재완은 이준용을 달래가며
興親王
의 葬禮式을 마쳤다. 그는
朝鮮總督府
에서
中樞院
贊意의 자리를 提案하였지만 辭讓하고 就任하지 않았다.
1922年
8月 11日
午前에 死亡하였고,
8月 18日
京城府
자운동에서 葬禮式이 擧行되었다. 같은 해 10月에 侯爵의 爵位를 아들
이달용
이 相續하였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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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所는
京畿道
楊州郡
와부면
도곡리 안골(現,
南楊州市
와부읍
道谷1里 97-1 안골) 金臺産(金臺山)의 갓무봉
興완군
墓所 近處에 安葬되었다. 또한 婉順君의 墓 아래에는 그의 아들
이달용
의 墓가 있다. 墓所에 墓碑는 없고 床石과 石物만이 세워져 있다. 臨終할 무렵 그는
韓日合邦
條約에 對한 羞恥心으로, 遺言을 남기길 自身의 墓에 碑石을 세우지 말라하여 後孫들은 碑石을 세우지 않고, 床石 뒤便에 그의 이름만 남겼다 한다.
興녕軍과 이재완의 墓所 近處에는 이재완의 아들
이달용
의 邸宅이 있었다. 이재완 墓所 近處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한때
承旨
를 지냈던
이달용
이 恒常 그 물을 길어다 마셨다 하여 承旨물 이라고 불렸고 그 近處를 承旨물마을이라 불렸다 한다. 興녕軍과 이재완 墓所 近處에는
이달용
의 큰 기와 邸宅이 있었고, 논이 많았다. 婉順軍 墓 近處에는 이달용의 墓가 있다.
評價
[
編輯
]
2002年
에
大韓民國 國會
의
民族正氣를 세우는 國會議員모임
이 發表한
親日派 708人 名單
에 收錄되었다.
2007年
에
大韓民國
의 大統領 所屬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이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195人 名單
에 收錄되었다.
2009年
에
民族問題硏究所
가 發刊한
친일인명사전
에 收錄되었다.
家族 關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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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養아버지 :
興완군
이정응
(李晸應,
1814年
~
1848年
)
- 養어머니 : 大邱西氏(
1810年
2月 23日
~
1834年
2月 28日
), 郡守 서탁수(徐鐸修)의 딸, 生前에는 軍部人이었고 事後
貞敬夫人
에 追贈되었다.
- 養어머니 : 順天朴氏(
1818年
2月 3日
-
1888年
8月 7日
), 박해익(朴海翊)의 딸, 生前에 郡夫人에서
貞敬夫人
의 封爵을 받았다.
- 生父 : 이신응(李愼應)
- 否認 : 貞敬夫人 徐氏(貞敬夫人 徐氏, ? ~
1923年
)
- 아들 :
이달용
(李達鎔,
1883年
~
1948年
)
- 며느리 : 安東金氏(1883年 3月 4日 ~ ?), 眞사 김회근(金會根)의 딸
- 아들 :
이규용
(李逵鎔,
1888年
6月 13日
~ ?, 參奉)
- 며느리 : 풍산洪氏, 門과 祕書院勝 홍순구(洪淳九)의 딸
- 妾며느리 :
李京洙
(李慶洙,
1893年
~
1968年
1月 18日
),
1924年
圓佛敎
에 歸依했으며 法名은 이동진화(李東震華), 法號는 陸楕圓(六陀圓), 아들 이규용의 첩
- 딸 : 李氏
- 사위 :
김병협
(金炳協, 祕書院勝 歷任), 道士 김면근(金冕根)의 아들
各州
[
編輯
]
- ↑
경창군의 長男인 창원군(昌原君)의 8代 宗孫(宗孫)
- ↑
韓國學中央硏究院.
“過去 및 取材, 이재완(李載完)”
. 2016年 3月 2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9月 5日에 確認함
.
- ↑
고종실록 (1880年 2月 11日).
“이최응 等에게 官職을 除授하다”
. 國史編纂委員會.
- ↑
고종실록 (1880年 5月 9日).
“이재완을 弘文館 副提學에 임명하다”
. 國史編纂委員會.
- ↑
《寧邊地》, 官師表 pp.148
- ↑
《寧邊地》, 官師表 pp.148
- ↑
고종실록 (1884年 10月 18日).
“서광범 等에게 官職을 除授하다”
. 國史編纂委員會.
- ↑
고종실록 (1885年 4月 7日).
“이재완 等에게 官職을 除授하다”
. 國史編纂委員會.
- ↑
고종실록 (1885年 5月 12日).
“이병문 等에게 官職을 除授하다”
. 國史編纂委員會.
- ↑
고종실록 (1886年 1月 13日).
“민응식 等에게 官職을 除授하다”
. 國史編纂委員會.
- ↑
고종실록 (1886年 2月 11日).
“이재완을 侍講院 左副賓客에 임명하다”
. 國史編纂委員會.
- ↑
고종실록 (1886年 3月 6日).
“이재완 等에게 官職을 除授하다”
. 國史編纂委員會.
- ↑
고종실록 (1886年 4月 11日).
“이재완 等에게 官職을 除授하다”
. 國史編纂委員會.
- ↑
고종실록 (1899年 9月 21日).
“章宗 大王을 追崇하는 것과 關聯하여 承襲한 사람들에게 法殿대로 封爵하다”
. 國史編纂委員會.
- ↑
"財界山脈 近世 100年?業과 人物 <36> 鐵道·海運特許 (3)", 每日經濟 1981年 6月 8日子 7面, 經濟面
- ↑
"財界山脈 近世 100年 産業과 人物 <90> 民族銀行 創業 (8)", 每日經濟 1981年 8月 10日子 7面, 經濟面
- ↑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42쪽.
參考 資料
[
編輯
]
- 이재완
- 韓國歷代人物 綜合情報 시스템
- 이재완
- 韓國近現代人物資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