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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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
金俊淵
大韓民國 法務部 長官

이름
別名 號 浪士(朗山)
身上情報
出生日 1895年 3月 14日 ( 1895-03-14 )
出生地 朝鮮 全羅道 靈巖郡 靈巖面 교동리
死亡日 1971年 12月 31日 ( 1971-12-31 ) (76歲)
死亡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鍾路區
國籍 大韓民國
學歷 獨逸 베를린 大學校 大學院 法學碩士
經歷 朝鮮共産黨 中央委員
國民大會準備委員會 最高委員
한국민주당 代表最高委員
민주국민당 代表最高委員
護憲同志會 特任拷問
民主黨 常任顧問
통일당 前任拷問
自由民主黨 特任委員
新民黨 拷問
正當 新民黨
父母 김상경(簿), 淸州 韓氏 否認(某)
子女 膝下 1男3女
長男 김규식(金圭植)
長女 김자옥(金子玉)
次女 김자향 (金子香)
三女 김자선(金子善, 김홍섭 과 結婚)
宗敎 儒敎 ( 性理學 ) → 佛敎 改新敎 (監理會) → 天主敎 (洗禮名: 요셉)

김준연 (金俊淵, 1895年 3月 14日 1971年 12月 31日 )은 日帝强占期 言論人 利子 獨立運動家 였고, 大韓民國 政治가 이다. 또한 朝鮮共産黨 의 한 分派인 엠엘派 의 重要 人事였다. 獨逸 베를린 大學 을 優等으로 卒業하고 歸國 後에는 朝鮮共産黨 結成 運動에 參與했다. 1925年 부터는 朝鮮日報 에 入社하여 記者로 活動하다 1928年 東亞日報 로 옮겼다.

解放 後 右翼으로 轉向하여 1945年 9月 한민당 創黨에 加擔했으며, 1948年 大韓民國 單獨 政府 樹立에 支持를 보냈다.

민주국민당 1954年 護憲同志會에 參與하였으며 민주당에 參與하였으나, 親與 人物로 分類되어 批判을 받던 中 脫黨하여 自由민주당을 創黨 組織하기도 했다. 1961年 5月 1963年 第5代 大統領 選擧 當時 朴正熙 의 思想 經歷에 疑惑을 提起하여 論難을 일으키기도 했다. 1925年 부터 2年間 朝鮮日報 의 記者와 駐러시아 特派員 等으로 活動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幼年期 [ 編輯 ]

浪士 金俊淵은 1895年 3月 14日 全羅南道 全羅南道 靈巖郡 영암읍 교동리에서 아버지 김상경(金相逕)의 3兄弟 中 長男이며, 어머니는 淸州 韓氏 이다. 그는 金海 金氏 都沙工派 21世孫이다. 朝鮮 時代 以後 鄕里가 되어, 代代로 全羅南道 의 衙前으로 生活하였다.

아버지 김상경은 6男 3女의 9男妹를 두었는데 그는 淸州 韓氏 所生 3兄弟 中 長男이었고, 나머지 3男 3女는 배다른 동생들이었다.

어려서 그는 外家에서 成長하였다. 家庭敎育이 嚴格하였으며 일찍부터 成人과 비슷하게 對하였다 한다. 그는 後日 '父親의 性格이 嚴하였기 때문에 마치 내게 對한 敎育을 長成한 어른에게나 하는 式의 敎訓을 하여, 내 어린 마음에 父親이 무서워 모처럼 집에 갔다가도 父親의 신발이 뒷돌에 있으면 들어가려 하지 않고 되돌아 오기가 일쑤였다. [1] 한다. 한番은 그의 어머니 韓氏가 外祖母에게 '어머니 書院 앞에 있는 밧 닷마지기를 샀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1] 그러자 어린 金俊淵이 말하기를 '어머니, 그것이 어찌 當身 밭이오? [1] '라고 唐突하게 대꾸하였다 한다. 이 말을 들은 그의 外祖母는 '저 놈이 저희 밭을 當身 밭이오?가 뭐냐? [2] '라며 꾸중하였다 한다.

數學 [ 編輯 ]

6歲 때부터 月出山을 보며 書堂에 나가 漢文을 배웠다. [2] 마을 書堂에서 工夫하다가 形便이 좀 나아지자 영암읍 에서 10里 떨어진 송계리 英明再(永明齋)에 가서 宿食을 하며 痛感 둘째 卷부터 새로 工夫하기 始作 [2] , 문명흠(文明欽 [3] )의 門下에서 修學하였다.

그는 어려서 漢學을 受學하였으며 늦은 나이인 1908年 13歲에 靈巖普通學校(初等學校)에 入學하였다. 그해 門中의 周旋으로 같은 마을에 살던 4年 年上의 김옥성(金玉聲)과 結婚했다. 以後 그는 60年間 蓄妾夏至 않고 아내와 偕老하였다.

1910年 2月 靈巖普通學校를 卒業하고 京城 으로 上警, 漢城高等普通學校 ( 景氣中學校 · 경기고등학교 의 前身)에 入學하였다. 韓日合邦 前이었으나 경기고등보통학교에는 日本人 交感이 있었는데, 이때의 日本人 校監은 朝鮮人 學生들이라 하여 無視하지 않았다 한다. 그는 오래도록 이를 記憶하였다. 그해 7月 21日 에 어머니 韓氏가 死亡하였다. 어머니 賞 直後 한때 彷徨하였으나 다시 마음을 다잡고 工夫에 專念하였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를 離別한 傷處가 가시지 않아 絶望하여 彷徨했으나, 반드시 學業을 成功해 보겠다는 決心으로 여름放學을 지난 다음에 다시 學校로 돌아갔다. [3]

高等學校 在學 中 韓日合邦 以後 校名이 漢城高等普通學校에서 경성고등보통학교로 變更되었다. 경성고보 在學 中 日本 에 留學中이던 이가 도쿄 帝國 大學 이 最高의 大學이라고 紹介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 湖南學生親睦會 主催로 當時 도쿄帝國大學에 在學 中이던 남궁영氏와 그 外 몇분을 招待하여, 歡迎會를 한 적이 있다. 이 때 社會를 보던 어떤 이가 도쿄帝國大學은 東洋에서 第一가는 學校라고 紹介하여 나는 期於코 도쿄帝國大學을 가려고 마음먹었다. [4]

그의 紹介를 듣고 그는 日本 도쿄 帝國 大學 에 進學할 決心을 한다. 1914年 3月 23日 京畿公立高等普通學校 를 全校 6等으로 卒業하고, 日本으로 留學을 決心한다.

卒業式 날 同窓生인 이긍종, 민태원 等과 學校 運動場에서 놀던 中 校長 上典(上田)李 呼出하였다. 上典 校長은 그에게 日本 留學을 抛棄하고 判任文官 見習試驗을 보라고 勸告했다. [4] 그러나 그는 反抗하여 꼭 日本 東京帝國大學에 入學해야겠다는 固執을 꺾지 않았다. [4] 그리고 그는 日本에 가서 도쿄帝國大學에 들어가서 法律을 工夫하여 꼭 辯護士가 되겠다고 하였다. [4] 그러나 日本人 上典 校長은 그를 無視하였다.

辯護士? 흥. 只今은 西洋 法律思想이 처음으로 들어와서 事件이 많아서 辯護士들이 밥을 먹지만, 그대가 동경제대에 들어가려면 日本에 가서 다시 中學 5年을 다녀, 高等學校 3年을 더 다녀. [4] 그리고 大學 4年을 마치면 12年이 걸리는데, 그 안에 秩序가 잡히면 辯護士들이 할 일이 없게 되어서 살아갈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니 日本 內地에 가서 工夫하는 것을 斷念하는 것이 上策일 것이다. [4]

日本人 校長은 挽留했지만 그는 留學을 斷行한다. 成年이 되자 그는 號를 낭山이라 지었다.

日本 留學과 歸國 [ 編輯 ]

副統領 在職 時節의 인촌 金性洙
오랜 親舊 송진우

1914年 4月 日本 으로 留學하였다. 바로 세이소쿠 英語學校 (正則英語學校)의 3學年에 編入했다. [5] 그러나 그는 授業 進度를 따라가지 못해 苦生하였다. 當時 東京帝國大學에 다니는 김우영 이 그를 찾아와 '高等學校는 구태여 도쿄에서 다니지 말고 시골서 다니는 것이 좋겠다.'고 勸告했다.

1914年 7月 日本 오카야마(岡山) 第6高等學校로 編入學하였다. 編入學 試驗에서 그는 當初 不合格하였으나 그를 눈여겨본 日本人 先生의 特別 配慮로 入學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金性洙 , 송진우 , 김도연 , 김상덕 , 신익희 , 安在烘 , 여운홍 , 윤치영 等을 만난다. 1919年 留學中에 조선기독교청년회(朝鮮基督敎靑年會)의 副會長을 맡아 活動하면서 1919年 2·8獨立宣言에 主動的으로 參加하였다. [6] 1919年 11月 여운형(呂運亨)의 도일(渡日) 때에는 신인회(新仁會)를 中心으로 하여 그의 歡迎會를 組織하고 朝鮮獨立을 宣傳하였다. [6]

1917年 日本 오카야마(岡山) 第6高等學校를 卒業하고 東京帝國大學 法學部 讀法과(獨法科)에 進學했다.

1921年 東京帝國大學 法學部 毒法科를 卒業하였다. 以後 東京帝國大學 大學院 政治學科로 進學, 政治學科의 助手로서 일하였다. 1922年 獨逸 로 건너가 1922年 1924年 에는 獨逸 베를린 大學 에서 政治와 法律學을 硏究하였다. 以後 英國 런던 大學 에서 修學하였다.

그 뒤 歸國, 1925年 朝鮮日報 社에 入社하여 記者가 되었다.

日帝 强占期 活動 [ 編輯 ]

言論 活動과 獨立運動 [ 編輯 ]

金俊淵은 韓國 最初의 海外 特派員( 朝鮮日報 모스크바 特派員)으로 1925年 蘇聯 을 視察했고 1925年 조선일보社에 入社하여 記者로 生活했으며, 同時에 朝鮮一步 論說委員, 全 朝鮮共産黨 黨首 等을 歷任했다. 그리고 1926年 부터 民族主義者의 統合團體인 新幹會 (新幹會) 組織 準備에 參與하였다.

1927年 2月 新幹會의 發起人이 되고 新幹會 創立에 主導的 役割을 하였다. [6]

1927年 보성전문학교 의 講師로서 敎團에도 섰다. 1927年 現代評論 》이 創刊되자 그 創刊號에 이관용 (李冠鎔)· 安在烘 · 이순탁 (李順鐸)· 백남운 (白南雲)· 홍명희 · 이긍종 等과 함께 參與하였다. [7]

ML當 事件과 投獄 [ 編輯 ]

그 뒤 朝鮮總督府 의 彈壓으로 朝鮮日報 를 그만둔 뒤 1928年 金性洙 의 配慮로 東亞日報 社에 入社했다. 얼마뒤 凍死 編輯局長으로 任命되었다. 그 뒤 朝鮮共産黨 再建運動 組織에 關與했다가 안광천 을 몰아내고 黨首가 된다.

金俊淵은 안광천 日本 警察에 買收된 사람이라고 보았다. [8]

金哲秀 는 第3次 朝鮮共産黨을 組織한 直後 코민테른에 報告하기 위해 1926年 12月 서울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9] 그러면서 안광천에게 責任祕書 자리를 넘겼다. 안광천 責任祕書 時代는 1927年 9月까지 繼續되었다. 이어 김준연 責任祕書 時代가 始作됐는데, 警察의 注目을 받게 되자 金俊淵은 물러서고 1927年 11月 金世淵(金世淵)李 責任祕書가 된다. [9]

그러나 1928年 2月 마침내 幹部들이 檢擧되어 第3次 朝鮮共産黨은 解體된다. [9] 1928年 그도 東亞日報 編輯局長으로 在職할 때 제3차공산당사건(세칭 ML黨事件)에 關聯되어 投獄되었다.

釋放과 言論 活動 [ 編輯 ]

1936年 8月 25日子 東亞日報 에 실린 '日章旗 抹消 事件'

7年間의 獄苦를 치르고, 出監 後 1934年 동아일보에서 主筆을 지냈다. 1936年 東亞日報社 主筆로 活動하다가 손기정 (孫基禎)의 日章旗 抹殺事件으로 辭任했다. [10] 1936年 손기정 의 優勝을 報道한 記事에 日章旗가 抹消된 日章旗抹殺事件에 關聯되어 主筆職은 辭任한 뒤, 光復 때까지 京畿道 全曲에서 解凍農場(海東農場)을 管理하였다. [11]

朝鮮總督府 東亞日報 에 壓力을 넣어 그를 解雇하라고 하였으나 인촌 金性洙 의 特別 配慮로 그는 勸告辭職을 當했으나, 인촌 金性洙 의 個人 農場인 전곡 해洞農場에 派遣되었다.

日帝 强占期 後半 [ 編輯 ]

또한 興業俱樂部事件, 朝鮮語 學會 事件 等을 主動하여 國內에서는 가장 激烈한 抗日鬪爭을 벌였고, 8年의 投獄 生活과 9年 동안의 年金生活을 하였다. [11] 日帝 强占期 當時 김창숙 과 함께 抗日 勢力의 兩大 山脈이었으며 日帝가 가장 警戒하고 監視하는 0順位 人物이었다. 이 逸話가 立證하듯 낭山은 國民들로부터 人氣와 信望을 한몸에 받는 人物이며 國內에서 가장 影響力이 큰 人物이었다. 하지만, 以後 反民法 處理에 消極的인 立場을 보였다는 批判도 받고 있다. [11]

1940年 創氏改名이 떨어지자 그는 拒絶하였고, 繼續 農莊에서 生活하였다. 그러나 1942年 以後 李承晩 이 出演하는 美國의 소리 短波放送을 여러 番 祕密裏에 聽取하기도 하였다. 1945年 初 國內 不逞鮮人들을 京畿道의 野山에 집결시켜 銃殺시킨다는 所聞을 듣고 全南 의 野山에 潛跡해 있다가 8月 京城 에 나타났다.

光復 以後 [ 編輯 ]

한민당 創黨 組織活動 [ 編輯 ]

朝鮮總督府는 1945年 8月 11日 京畿道知事 이쿠다를 통하여 朝鮮의 資本家, 地主, 名士 勢力을 代辯할 수 있는 송진우 를 接觸하여 '行政委員會'를 構成하여 줄 것을 要請했으나 송진우 는 重慶 臨時政府 奉戴(奉戴)와 聯合軍의 承認을 理由로 대면서 그 要請을 拒絶하였고, 이어 朝鮮總督府는 1945年 8月 14日 송진우 와 가까운 김준연에게도 付託했으나, 金俊淵은 宋鎭禹의 參與 없이는 應하지 않겠다고 해서 이것 亦是 霧散되었고 治安權 委囑이 여운형 에게 돌아갔다고 後날 한민당 側에서 事實인것 마냥 主張하지만, 1957年 朝鮮總督府 政務總監으로 지낸 엔도 류사쿠 는 인터뷰를 통해 '한민당의 그 같은 主張은 事實無根'이라고 分明히 밝혔다.

(..中略..) 또 韓國에서는 내가 처음에 宋鎭禹氏에게 이 問題를 相議했으나 송氏가 拒否했기 때문에 여씨 를 擇한 것으로 傳해지고 있는 模樣이나 그것은 잘못으로 내가 宋氏 및 安在烘 , 장덕수 氏를 만난 것은 從前 前 總力 聯盟에 協力을 要請한 일이 있지만 그들이 깨끗이 拒否하여 왔기 때문에 나도 그들의 信念을 理解하여 두 番 다시 勸하지 않았다. 따라서 從前後 宋氏와 安氏에게 交涉한 일은 없다. [12]

以後 高下 송진우 (宋鎭禹), 장택상 等과 함께 國民大會 準備會 를 組織하였고, 한국민주당 創黨에 參與했다. 10月 南韓 에 駐屯한 美軍政 歡迎式에 參席하였다. 以後 송진우 , 윤보선 等과 함께 臨時政府 法統 運動을 하였다. 11月 大韓民國 臨時政府 奉戴委員會를 組織하고 11月 臨時政府 歸國 歡迎會를 主管하였다.

解放 政局의 政治 活動 [ 編輯 ]

1945年 12月 8日 서울特別市 腸 顧問官에 任命되었다. [13]

金九 모스크바 3上會談에 反撥, 强力한 反託運動을 推進하자 12月 30日 結成된 信託統治反對 國民總動員委員會 委員이 되었다. [14] 1946年 2月 14日 非常국민회의 最高政務委員의 한사람으로 選出되었다. [15] 곧 託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 副委員長으로 被選되었다. [14] 이어 한민당 內 信託統治 反對論者의 한사람으로 活動하였다. 그 過程에서 朝鮮이 自力으로 獨立하지 못한 以上 信託統治는 不可避하다는 持論을 펼치던 송진우 , 장덕수 等과는 葛藤하면서 距離를 두었다.

민주議員, 過渡立法委員 [ 編輯 ]

1947年 1月 過度立法委員會 新年辭

1946年 2月 민주議員 創設에 參與하였고, 민주議員 (民主議院)議員과 韓國민주당 常務執行委員에 選出되었다. 46年 3月 16日 發表한 '蘇聯에 反省을 促求'힌 放送 要旨와 美國無誠意 親疏勢力을 糾彈하는 記事를 동아일보에 揭載했다. [16] 以後 講演 活動을 다니며 信託統治 反對의 正當性을 力說하고 다녔다.

10月 南朝鮮過渡立法委員會 議員 候補로 出馬하여 當選되었다. 그해 12月 에 開院한 南朝鮮過渡立法委員會 에서 그는 한민당 의 立場을 代辯하는 位置에 있었으며, 左右合作運動과 美蘇共同委員會 開催에 否定的이던 金俊淵은 過度立法委員會 議長 김규식 (金奎植)과 隨時로 摩擦을 빚었다. 一部 社會主義 者 出身 轉向 人士들이 김규식 에게 怏心을 품고 金奎植이 美軍政 과 짜고 日帝의 敵産을 空짜로 竊取했다고 主張하자 그는 이 所聞을 根據로 公開 聲明書를 내고 김규식 에게 事實與否 解明을 要求하기도 했다.

1947年 1月 26日 京橋莊 에서 열린 反託獨立鬪爭回 結成에 參與하고 反託鬪爭回 指導委員의 한사람으로 選出되었다.

左右合作運動 反對 [ 編輯 ]

過渡立法議院의 基督敎 界 人士들은 基督敎 人 議長 김규식 을 支持하였다. 基督敎人 議員들은 基督敎人 議長 金奎植 博士를 歡迎하는 宴會를 서울市內 안국동 윤보선 의 집을 빌려서 베풀었다. [17] 여기에서 김규식 은 當時 美國 으로 訪問外交를 펼치는 李承晩 을 嘲弄했다.

只今 某 氏가 國際舞臺에 나가서 活動하고 있는 것은 이불 속에서 활개치는 꼴이다. [17]

이를 두고 김규식 이 '李博士를 非難하였다. [17] '고 確信한 金俊淵은 卽時 抗議하였고 言爭이 벌어졌으나 겨우 收拾되었다.

그에 對하여 金俊淵은 東亞日報 紙面을 통해 김규식 을 攻擊하는 글을 여러 篇 發表했다. [17] 이어 김규식 과 손잡은 金九 도 南北韓 統一政府를 세워야 한다며 南北協商 主張을 하자 그는 金九 도 猛烈히 非難하였다. [17]

斷定 樹立論 支持와 金九, 金奎植 攻擊 [ 編輯 ]

김준연, 1949年 무렵

1947年 12月 金性洙 한민당 黨首가 되면서 그는 한민당 副黨首로 選任되었다. 1948年 1月 總選擧의 性格을 놓고 選擧가 可能한 地域에 한해서 單獨政府를 세우자는 主張과, 南·北韓 總選擧를 해야 된다는 主張이 맞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北朝鮮人民委員會 側이 UN韓國臨時委員團(UNTCOK)의 入北을 拒絶하는 點을 들어 選擧가 可能한 地域 卽 南韓만이라도 選擧를 해야 된다고 主張하였다.

한민당의 宣傳部長이던 金俊淵은 金九 · 김규식 等 南北協商派가 共産黨 과 內通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發言을 하여 政界에 큰 衝擊을 던졌다. [18] 金俊淵은 金九 가 南北協商車 以北에 다녀온 以後 杜門不出하고 있는 것이 右翼陣營의 눈을 속여 暗暗裏에 共産黨 과 某種의 連絡을 取하기 위한 제스처라고 判斷했다. 그가 京橋莊 의 動態를 이렇게 判斷한 것은 김지웅(金志雄)李 그에게 提供한 情報에 根據를 둔 것이었다. [18]

美軍搜査機關으로부터 傳해들었다는 그의 情報는 共産黨 원이 金九에게 政治資金을 提供하기 위해 38線을 넘나든다는 것이었다. [18] 그의 主張에 金九 는 怒發大發했지만 結局 그를 處罰하지는 못했다. [17]

政治 活動 [ 編輯 ]

議政 活動 [ 編輯 ]

制憲 國會 參與 [ 編輯 ]
김준연, 1949年 무렵

1948年 5月 10日 制憲國會議員 總選擧 한민당 公薦으로 出馬하였다.

1948年 5月 30日 故鄕인 靈巖에서 大韓民國 初代 國會議員에 當選 되었고 6月 1日 憲法起草委員回 委員에 選任되었다. [19]

낭山은 한민당 副黨首 兼 宣傳部長으로 있으면서 制憲國會 議員, 憲法起草委員이 되어 直接 大韓民國의 憲法을 作成했고 '憲法과 政府組織法 起草委員會'委員으로 活動했다. 李承晩 大統領을 도와 大韓民國 政府 樹立에 힘썼다.

憲法起草委員 活動 [ 編輯 ]

憲法起草委員回 委員으로 在職 中 그는 刑罰에 關聯된 共同法案이 決定되었다. '現行犯인 境遇만 法官이 發付한 令狀 없이도 逮捕 等을 할 수 있도록 規定'한 것과, 令狀制度 에 ' 辯護人 의 助力을 받을 權利', '拘束適否審査第'의 追加, '拷問과 殘忍한 刑罰 禁止 條項'이었다.

그러나 그는 共同案을 反對하고 권승렬 안에 支持를 보냈다. [20] 原案인 共同안에서는 現行犯인 境遇만 法官이 發付한 令狀 없이도 逮捕 等을 할 수 있도록 規定하고 있었다. 이 規定에 對해 김준연을 筆頭로 한 한민당 側 議員들은 권승렬안의 立場을 支持하고 나섰다. [20] 권승렬 안에서는 現行犯日 때만이 아니라, 犯人의 逃避 또는 證據湮滅의 念慮가 있을 때에도 事後 令狀 請求로 代替할 수 있도록 例外 思惟를 擴大하고 있었다.

共同案에 對한 두 番째 攻擊 亦是 김준연을 비롯한 한민당 界 議員들이 앞장을 섰다. 共同案에 있는 令狀制度, 辯護人의 助力을 받을 權利, 拘束適否審査制에 對한 內憂外患 또는 이에 準하는 非常事態의 境遇 法律로써 그 適用을 停止할 수 있다는 規定을 追加하자고 나선 것이다. 김준연과 한민당 界 議員들의 마지막 攻擊은 拷問과 殘忍한 刑罰 禁止 條項에 모아졌다. [20] 共同안의 이 規定을 削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搜査上의 어려움으로 治安에 問題를 惹起할 수 있다는 現實的인 理由에서였다. 身體의 自由를 保障한다는 條項만으로 充分하다는 論據였다. [20]

조봉암 , 한때 日帝强占期 當時 그는 함께 共産主義 運動을 하던 思想的 同志이기도 했다.

한민당 界 議員들의 波狀攻勢에 無所屬의 조봉암 議員이 가 [20] 章 前面에서 激烈히 맞섰다. 當時 한 記者는 興奮한 曺奉巖의 辱說 섞인 抗辯을 記錄하였다. [21]

法律은 强者에게나 弱者에게나 公平하여야 한다. 民主主義 國家에 있어서는 事後令狀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며, 또 拷問과 殘酷한 刑罰은 當然히 禁止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김준연氏는 제2문제 規定은 當然하다고 하나, 이에 準할 非常 事態의 境遇 云云은 集會에도 適用될 憂慮가 多分히 있는 것이니 어찌 이것을 當然하다고 하는가. 이 天下가 언제나 너의 天下가 될 줄 아느냐? [21]

그러나 曺奉巖 等의 奮鬪度 非常事態 時 人身保護를 위한 節次 規定들을 停止할 수 있다는 規定의 揷入을 막는 데 그쳤다. [21] 첫 番째 問題는 事後令狀을 請求할 수 있는 例外 思惟를 擴大하는 쪽으로 쉽게 結論이 났고, 拷問과 殘酷한 刑罰의 禁止 規定을 削除하자는 修正案도 票決 結果 11代 10의 한票 差로 可決되었다. [21]

反民特委와 法務部 長官 [ 編輯 ]

國會議員 在任時, 國會 內의 反民特委 調査委員으로 活動하였다. [22] 그러나 反民特委는 强制로 解散되었다.

1949年 한민당 신익희 , 지청천 大韓國民黨 脫黨派가 聯合하여 민주국민당 을 創黨, 組織하자 參與하였으며, 그는 바로 민주국민당 常任黨務委員에 選出되었다. 1950年 5月 30日 의 總選擧에서 落選의 苦杯를 마시고 서울 로 올라갔다. [23]

6月 韓國 戰爭 때는 法務部 長官 으로 拔擢, 조병옥 內務長官과 함께 貧弱한 裝備로 武裝한 警察 兵力과 함께 大邱 死守에 臨했고, 1·4後退 때 法務長官 으로서 安全한 撤收를 위한 計劃을 입안하기도 했다(참고로, 이때 大邱는 白善燁 이 指揮하는 國軍 1師團, 美 8師團 10聯隊, 美 25師團 27聯隊, 國軍 8師團 10聯隊가 다부동 戰鬪 에서 北韓軍을 막아내어 지켜냈다.).

護憲同志會와 政黨 活動 [ 編輯 ]

第4代 國會議員 總選擧 무렵, 왼쪽 맨끝이 김준연, 中折帽를 쓰고 선 人物은 當時 민주당 所屬 國會議員 박영종

1954年 5月 實施된 第3代 民議院議員 選擧에서 故鄕인 全南 靈巖에서 出馬하여 當選, 第3代 民議院議員에 當選되었다. 그해 민주國民黨을 脫黨하여 통일당을 組織하고 委員長에 就任했다.

1954年 護憲同志會 에 參與하고, 1955年 東亞日報社 重役이 되었다. 1955年 統合 野黨 민주당이 出帆하자 민주당 常務委員에 選出되고, 유엔 韓國代表의 한사람으로 派遣되었다. 1956年 신익희 가 遊說 途中 死亡하자 5月 5日 민주당 舊派 몫의 代表委員으로 被選되었다.

1956年 5月 10日 第4代 民議院議員 總選擧에 出馬하여 當選되었다. 그러나 李承晩 을 支持하는 態度를 보여 黨員들과 葛藤하였다. 1957年 民主黨에서 除名되자 李承晩 大統領 支持를 宣言하고, 통일당 을 組織하여 委員長이 되었다.

1960年 3·15 不正 選擧 以後 이기붕 에게 辭退를 促求하는 書翰을 보냈다. 1960年 無任所 長官 으로 推薦되었다. 그러나 같이 無任所長官 候補者로 推薦된 윤보선 이 就任을 拒絶하자 그도 無任所長官職을 辭退했다. 4月 李承晩 大統領 에서 下野하고 이화장 으로 물러나자 그를 찾아갔다. 以後 李承晩 許政 에 依해 하와이 로 떠날 때까지 그를 찾아가 問安人事를 드렸다.

第2共和國 期間 [ 編輯 ]

第4·5代 議員이 되고, 1960年 3月 3·15 選擧에 통일당 副統領 候補 者에 出馬하였으며, 大統領 候補는 내지 않는 代身 大統領 候補로는 李承晩 의 支持를 闡明하였으나 3月 15日 의 不正選擧 開票 造作으로 落選하였다.

5月 第5代 國會議員 總選擧에 통일당 候補者로 民議院議員에 出馬하여 當選되었다. 以後 그는 第2共和國 이 出帆하였으나 윤보선 側이나 場面 側 兩側과 모두 一定 部分 距離를 두고 政局의 推移를 觀望하였다.

軍事 政權 退陣 運動 [ 編輯 ]

5·16 軍士政變 以後 金俊淵은 80歲의 高齡에도 不拘하고 7次에 걸쳐 軍事政權勢力을 向해 爆彈演說을 하여 軍事政權을 崩壞 直前까지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1961年 5月 26日 그는 1961年 5月 26日 者 美國 《타임》 誌의 朴正熙 프로필을 引用하여 主張했다. "朴正熙 所長은 前에 公認된 共産主義 者였다. 그는 軍 叛亂을 組織하는 데 協力했다. 그래서 그는 李承晩 氏의 將校들에 依해 死刑宣告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轉向하여 叛亂軍에 關한 情報를 提供하고 死刑을 免除받았다. 그는 只今 分明히 强力한 反共主義 者이다. [24] "

그러나 김준연의 發言이 나온 뒤 政界는 술렁였고, 朴正熙의 思想을 疑心하는 雰圍氣가 造成되었다.

1963年 통일당 自由民主黨 이 統合, 自由民主黨 出帆에 參與하고, 自由民主黨 代表最高委員에 被選되었다.

이에 對하여 朴正熙 는 "虛無孟浪한 일이어서 解明할 必要조차 없으며 法이 가려낼 것"이라고 應酬했다. [24]

1963年 3月 16日 朴正熙 가 軍政延長을 宣言하는 3·16 宣言을 發表하고 이를 거두지 않자, 3月 19日 윤보선 · 김도연 · 장택상 ·金俊淵· 이범석 等은 朴正熙 에게 3·16 聲明의 底意를 追窮下 [25] 였다. 4月 3日 에는 朴正熙 가 關與하지 않는 過渡 政府를 樹立할 것을 提議하였다. [26]

5月 公開狀으로 朴議長에게 忠告한다 는 題目의 公開書翰을 東亞日報 等 言論에 發表했다.

革命政府는 雜念을 버리고 8.15까지 政權을 民間人에게 移讓하고 出馬하지 마시오. 朴議長이나 金鍾泌 氏 같은 程度의 知識을 가진 者들은 數十萬名이나 있다. 自己가 잘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國民을 두려워할 줄 아는 謙遜한 態度를 가져라. 7月 8日 警 大統領 選擧와 國會議員 選擧를 同時選擧하여 8月 15日에 民政移讓을 할 수 없는가

民主공화당 에서는 그를 告訴해야 된다고 憤怒하였다.

朴正熙 史上 檢證 攻防戰 [ 編輯 ]

1963年 여름 그는 朴正熙 共産主義 者는 아니냐며 公開的으로 疑惑을 提起하여 波紋을 던졌다. 速히 윤치영 等이 그를 朴正熙 의 轉向은 確實하며 내가 內務長官 때 思想을 保證했다고 했지만 그가 다시 朴正熙의 史上 疑惑을 提起하면서 論難은 擴散되었다. 그는 朴正熙에게 思想 檢證을 하자고 하였다.

9月 28日 尹潽善의 支持 遊說를 하던 김사만 (金思萬)은 '朴正熙는 旅順叛亂事件에 關聯되어 死刑 宣告까지 받았던 共産主義 者였다 [27] '는 發言을 引用하면서 "日帝에 抗拒하다가 死刑宣告를 받았다면 몰라도, 우리의 主敵인 共産黨 嫌疑를 받았던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투표할 것이냐"라며 朴正熙를 攻擊했다. [27]

김사만은 "旅順叛亂 事件의 關聯者가 政府 안에 있는 듯하다"라고 한 윤보선 의 全州 發言이 "(김준연의 暴露에 比較하면) 그 얼마나 점잖은 表現이냐"며 윤보선 을 擁護하고 "朴正熙氏는 그렇게 民族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람이 日本帝國主義의 軍人이 되겠다고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더 出世하겠다고 日本에 가지 않았느냐"며 猛非難을 加했다. [27] 바로 공화당에서 김준연을 告訴하겠다고 宣言하자 그는 告訴 할테면 해보라며 答辯할 價値가 없다고 應酬한다.

10月 그는 송요찬 의 錄音 演說會를 열기 위해 慶南 馬山 으로 내려갔다. 馬山에 온 그는 10月 2日 午前 10時 記者會見을 發表한다. [28] 이 記者會見에서 그는 朴正熙 金鍾泌 의 思想 疑惑을 提起한다.

間諜 황태성은 朴正熙氏의 親兄인 박상희氏와 親面이 있는 사이이고, 高 박상희氏는 大邱暴動 當時 軍威 人民保安序章으로 活躍했다가 討伐警察에 依해 射殺되었고, 旅順 叛亂 事件 때 朴正熙氏가 남로당 責任者였다는 것, 또한 朴氏의 조카사위인 金鍾泌 氏는 西歐式 民主主義를 否認하고 共産世界와 一脈이 통하는 所謂 敎道民主主義 를 提唱하였다는 것 等으로 미루어 그의 思想이 疑心되지 않을 수 없고, 國民들은 그러한 事實들을 알아야 할 것이다. [28]

1963年 末 自由民主黨 代表最高委員이 되고, 1963年 初 第5代 大統領 選擧에서는 大統領 候補間의 葛藤이 甚하여 立場表明을 하지 않다가 윤보선 으로 大選候補가 確定되자 그는 윤보선 을 支持하여 支援遊說를 다녔다. 第5代 大統領 選擧 遊說期間 中 윤보선 外에도 김준연 亦是 朴正熙 남로당 經歷과 旅順事件 關聯 經歷을 들어 朴正熙 思想의 健康性과 民主性을 疑心하였다.

韓日會談 反對 攻防戰 [ 編輯 ]

64年 4月 4日 午後, 共和黨은 1億 3千萬弗 流入說의 發說者인 金俊淵 議員을 名譽毁損, 虛僞事實 流布 嫌疑로 서울地檢에 告訴했다. [29] 共和黨은 또 김준연의 發言 가운데 朴正熙 總裁와 김종필 黨議長에 該當되는 名譽毁損 事項에 對해서도 아울러 檢察에 告發했다. [29] 그러자 野黨에서는 政治 彈壓이라며 김준연을 擁護하고 나섰다.

1964年 에는 朴正熙 의 韓日會談에 反對, 윤보선 , 함석헌 , 장택상 , 이범석 , 박순천 , 장준하 等과 함께 韓日協商 反對 運動에 參與하였다. 그는 各地에 韓日 協商 反對 講演活動을 다니며 朴正熙 의 思想이 健康하지 못하다는 點과, 率直하지 못하다며 批判을 加했다.

65年 3月 30日 그는 國會 에서 政府가 韓日協商을 하면서 日本으로부터 事前資金을 收受했다는 疑惑을 提起했다. [30] 그리고 이 疑惑은 장택상 이 提報해주었다고 發表하였다. [30] 김준연의 主張은 장택상 의 證言과 [30] 日本 雜誌에 記載된 記事, 우인기 의 告訴狀 內容 等이었는데 調査委員會는 몇名의 證言만 듣고 終結시켜버렸다. [31] 朴正熙 政權은 그를 處罰하려 했으나 민정, 민주 野黨의 强한 反撥로 霧散된다.

그러나 65年 4月 7日 民主공화당 은 김준연을 告發했고, 金俊淵은 朴正熙 金鍾泌 外患罪 嫌疑로 맞告訴했다. [31] 4月 18日 政府는 虛僞事實 流布罪로 김준연의 拘束同意 要請書를 國會 에 提出했다. [31] 그러나 司法府는 政府와 共和黨의 便을 들어주었고, 野黨에서는 그의 釋放, 救命運動과 함께 保釋金을 募金했다. 그는 保釋金을 내고 5月 初 釋放되었고, 議員職도 維持하였다.

生涯 後半 [ 編輯 ]

大統領 選擧 落選과 政界 隱退 [ 編輯 ]

1967年 민중당 總裁로 大統領 候補에 出馬하였으나 落選되었다. 以後 그는 事實上 政界를 隱退하였다.

著書로는 《獨立路線 獨立路線》(1947)·《나의 素筌(小傳)》(1957)·《나의 길》(1966)·《나의 遍歷(遍歷)》(1969) 等이 있다. 建國에 이바지한 功勞로 1963年 大統領表彰( 建國功勞勳章 )을, 1969年 에는 國民勳章 無窮花章을 授與받았다.

最後 [ 編輯 ]

1971年 3月 5日 新民黨 에 入黨하였다. [32] 1957年 民主黨에서 除名된 以來 李承晩 을 支持하는 等 黨論을 달리하던 그의 入黨을 놓고 신민당 黨內에서는 拒否해야 된다는 輿論도 있었으나, 入黨이 承認되었다.

1971年 12月 31日 午後 11時 50分에 서울 성동구 금호동 自宅에서 他界했다. 當時 그의 나이 享年 76歲였다. 永訣式은 1972年 1月 7日 서울市民會館 大講堂에서 열렸고, 葬地는 京畿道 楊州郡 주내면(現 양주시 양주읍) 天主敎墓地이다. [33]

事後 [ 編輯 ]

子女는 아들은 한名, 딸은 세 名 있다. 1998年 浪士 記念事業會가 構成된 뒤, 2009年 公式 出帆하였다. 2009年 故鄕인 全南 靈巖 에 낭山김준연 記念館이 建立되었다.

著書 및 論文 [ 編輯 ]

著書 [ 編輯 ]

  • 《나의 素筌》 (동아일보사, 1954)
  • 《나의 길》(1966)
  • 《나의 遍歷》(1969)
  • 《浪士 김준연 : 建國의 院訓》 (浪士 김준연 記念事業會, 虛倒産 編著, 自由知性史, 1998)

論說 [ 編輯 ]

  • 《獨立路線》(獨立路線) (1947)

略歷 [ 編輯 ]

賞勳 [ 編輯 ]

學位 [ 編輯 ]

家族 關係 [ 編輯 ]

기타 [ 編輯 ]

政治人으로 活動하면서도 隨時로 東亞日報 等에 칼럼과 評論, 社說을 寄稿하기도 했다.

臨時政府 支持 撤回 原因 [ 編輯 ]

金俊淵은 8.15 直後 國內派인 建準 勢力과 海外波인 臨政 派가 對立하고 있을 때 海外派를 積極 支持, 建準 과의 鬪爭에서 그 先鋒에 섰다. [18] 그러나 이렇게 海外派에 積極 接近했던 그가 그 後 海外派를 反對하는 先鋒에 서게 된 데에는 臨政의 까다로운 條件 때문이었다.

當時 中國에서 돌아온 臨政에서는 앞으로 樹立될 統一政府 要因의 資格 規定으로서 大統領 은 30年 以上, 國務總理 는 20年 以上, 그리고 長官은 10年 以上 獨立運動을 唯一한 天職으로 하여 繼續 鬪爭한 人士에 한한다고 主張했던 것이다. [34] 그는 大韓民國 臨時政府 側의 이러한 主張에 너무 터무늬없는 主張이라고 公開的으로 反駁하고 나섰다.

金俊淵은 大統領이나 國務總理는 그래도 좋겠지만 長官까지 그런 規定을 둔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規定대로 한다면 自己가 屬해 있는 한민당 은 政府 要職에 參與할 수 있는 資格이 있는 人士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 때문 [34] 이었다. 以後 大韓民國 臨時政府 側은 金性洙 等을 臨政 國務委員(長官級)으로 入閣시키는 等의 措置를 取하지만 그는 臨政을 否定的으로 보게 된다.

이런 理由로 해서 金俊淵은 臨政을 反對하는 先鋒에 섰고, 臨政 要因이 一部 中心이 된 左右 合作이나 南北協商을 辛辣하게 非難해왔다.

金九, 金奎植 非難과 攻防戰 [ 編輯 ]

그는 當初의 臨時政府 支持를 撤回하고 1946年 以後부터는 臨時政府 勢力을 建國 妨害 勢力으로 規定했다.

金俊淵은 金九 를 頂點으로 하는 南北協商派와 김규식 을 頂點으로 하는 左右合作파를 모두 共産主義 路線과 비슷할 뿐 아니라 政府 樹立에 크나큰 妨害人物들로 斷定했다. [34] 그래서 (南北協商 當時) 共産黨 金九 에게 政治資金을 調達한다는 說이 있자 곧 《 東亞日報 》 紙上을 통해 다음과 같은 糾彈聲明을 發表하기에 이르렀다. [34]

親愛하는 同胞 여러분! 5·10 總選擧는 우리 5千年 歷史에 길이 빛날 光明의 轉換點입니다. ...(以下 中略)... 그러나 侵略主義 外勢 蘇聯 은 '弱小民族 解放'이라는 허울 좋은 탈을 쓰고 우리 民族을 다시 自己들의 奴隸로 만들려는 陰謀를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蘇聯의 主張을 支持하고 土地의 國有化를 原則으로 한 共産主義 的인 經濟政策을 試圖하는 무리들이 이 땅에 있다는 것은 痛歎해 마지 않을 일입니다.

이들은 民族의 宿願인 政府 樹立을 反對하고 所謂 南北協商이라는 빛좋은 統一方案을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所謂 南北協商에서 얻 [34] 어온 것이 무엇입니까. [35]

우리 民族을 奴隸化하겠다는 蘇聯의 軌道에 盲從한 것 外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러면 金九 , 김규식 等은 어째서 그런 行動을 했겠습니까? 同胞 여러분은 매우 異常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行動은 決코 異常할 것이 없습니다. 김규식 은 한때 共産黨 黨員이었고 [36] 金九 는 土地의 國有化를 主張했으니만큼 金九 亦是 共産黨 路線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직까지 民族的 立場을 저버리고 繼續 共産黨 과 손을 잡고 다시 南北協商 을 祈禱하고 있습니다.

同胞 여러분-나는 이들을 同胞의 이름으로 糾彈하거니와 同胞 여러분은 이에 새로운 認識과 覺悟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35]

                        한국민주당 김준연

며칠 後 한민당도 黨의 이름으로 같은 內容의 聲明書를 發表하여 金九 김규식 을 辛辣히 非難했다. 너무나 辛辣하고 攻擊的인 이 聲明은 곧 韓國 政界에 커다란 波紋을 일으켰다. 김준연과 한민당 의 聲明을 보고 누구보다도 齒를 떤 것은 韓獨黨 김학규 (金學奎)였다. [35]

各州 先生님, 이걸 좀 보십시오. 한민당 의 김준연이란 者가 우리를 아주 共産黨 으로 몰아세웠습니다. 世上에 이런 죽일 놈이 있습니까. [35]

김학규 에게서 新聞을 받아든 金九 는 돋보기로 김준연의 聲明을 읽었다.

音 내 머지않아 이런 聲明이 나올 줄 알았지. 나보다 김규식 博士가 더 안됐군! [35]

極度로 興奮한 김학규 를 鎭靜시키는 金九의 눈에도 憤怒와 鬱憤이 [35] 서려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있던 金九 는 冊床 위에 놓인 붓을 들었다. '小人閑居爲不善'-金九는 말없이 이런 글句를 써내려갔다. [37]

金九 , 김규식 을 爲始한 南北協商派를 正面으로 攻擊한 김준연과 한민당 의 爆彈 聲明은 督促 等 政府樹立派의 絶對的인 支持를 받았다. [37]

自身들을 共産黨 으로 몰고 간 일로 김준연과 한민당 을 極度로 憎惡하게 된 김학규 는 나중에 김준연과 윤보선 朴正熙 에게 思想 檢證 攻勢를 할 때 朴正熙를 公開的으로 支持하게 된다.

같이 보기 [ 編輯 ]

關聯 書籍 [ 編輯 ]

  • 《나의 길》(김준연, 1966)
  • 나의 素筌 (東亞日報連絡所, 1954)
  • 《나의 遍歷》(김준연, 매일경제新聞 連載, 1969)
  • 紅友出版社, 政界野花 (前2卷) (紅友出版社, 1966)
  • 윤보선, 외로운 選擇의 나날들(동아일보사, 1991)
  • 김삼웅, 《한卷으로 보는 解放後 政治史 100場面》 (嘉藍企劃, 1999)
  • 이연복 《大韓民國 臨時政府 30年史》(국학자료원, 2006)
  •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2卷〉(人物과사상사, 2004)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48年 總選 1代 國會議員 全南 靈巖郡 한국민주당 無投票
0%
初選
1950年 總選 2代 國會議員 全南 靈巖郡 민주국민당 18,191票
37.95%
2位 落選
1954年 總選 3代 國會議員 全南 靈巖郡 민주국민당 21,198票
53.07%
1位 再選
1958年 總選 4大 國會議員 全南 靈巖郡 통일당 22,219票
51.99%
1位 3選
1960年 大選 5大 副統領 大韓民國 통일당 249,095票
2.4%
3位 無效
1960年 總選 5大 國會議員 全南 靈巖郡 통일당 14,878票
33.56%
1位 4選
1963年 總選 6大 國會議員 全南 靈巖郡·康津郡 自由民主黨 28,027票
39.76%
1位 5線
1967年 大選 6大 大統領 大韓民國 민중당 248,369票
2.24%
4位 落選
1967年 總選 7代 國會議員 全南 靈巖郡·康津郡 민중당 8,617票
9.70%
3位 落選

各州 [ 編輯 ]

  1. 김준연, 《나의 길》 (동아출판사, 1967) 1페이지
  2. 김준연, 《나의 길》 (동아출판사, 1967) 2페이지
  3. 김준연, 《나의 길》 (동아출판사, 1967) 3페이지
  4. 김준연, 《나의 길》 (동아출판사, 1967) 4페이지
  5. 김준연, 《나의 길》 (동아출판사, 1967) 5페이지
  6. 김준연:獨立有功者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7. 1927年 ~: 韓國歷代人物綜合情報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Archived 2007年 9月 30日 - 웨이백 머신
  8. 김학준, 革命家들의 抗日 回想 (민음사, 2005) 87페이지
  9. 김학준, 革命家들의 抗日 回想 (민음사, 2005) 86페이지
  10.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958a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1. 김지형 記者 (2003年 6月 23日). “反民特委에 스며든 不適格者들, 親日派 淸算 挫折의 한 原因” . 月刊民族21 . 2013年 12月 1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8月 9日에 確認함 .  
  12. 1957年 8月 18日 . 엔도 政務總監의 말을 뒷받침하는 資料는 總督府 農商課長 최하영 의 回顧錄.(월간중앙) 拔萃.
  13. 東亞日報 1945年 12月 8日子 2面 社會
  14. 아! 悲運의 歷史現場 京橋莊(1993, 白凡思想實踐運動聯合) 255
  15. 이연복 《大韓民國 臨時政府 30年史》(국학자료원, 2006) 91페이지
  16.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2卷〉(人物과사상사, 2004) 234쪽.
  17. 김준연, 《나의 길》 (동아출판사, 1967) 25페이지
  18. 송건호, 송건호 全集 13 (한길사, 2002) 386페이지
  19. '憲法起草委員回' - 네이트 百科事典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0. 이영록 , 《우리 憲法의 誕生 》 (서해문집, 2006) 109페이지
  21. 이영록 , 《우리 憲法의 誕生 》 (서해문집, 2006) 110페이지
  22. 國會 內의~: 民族正氣의 審判 Archived 2007年 3月 22日 - 웨이백 머신
  23. 김준연, 《나의 길》 (동아출판사, 1967) 31페이지
  24. 김진국, 《WWW.韓國現代史.COM》(민연, 2000) 143페이지
  25. 김용욱, 《韓國政治論》 (오름, 2004) 346페이지
  26. 京鄕新聞 1963年 4月 3日子, 1面 政治
  27. 京鄕新聞 1963年 9月 28日子 政治, 1面
  28. 東亞日報 1963年 10月 2日子 政治, 1面
  29. 京鄕新聞 1964年 4月 16日子 政治, 1面
  30. 이병주 《그해 5月》 3 (李炳注 지음, 한길사, 2006) 266페이지
  31. 이병주 《그해 5月》 3 (李炳注 지음, 한길사, 2006) 267페이지
  32. "金俊淵氏 新民黨에 入黨", 東亞日報 1971年 3月 5日子 1面, 政治
  33. “《東亞日報》(1972.1.4.) 1面” (PDF) . 2016年 4月 9日에 原本 文書 (PDF)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2月 25日에 確認함 .  
  34. 송건호, 송건호 全集 13 (한길사, 2002) 387페이지
  35. 송건호, 송건호 全集 13 (한길사, 2002) 388페이지
  36. 1921年 모스크바의 極東人民大會에 參席하기 위해 高麗共産黨에 加入한 前歷이 있다. 김준연度 한때 國內의 朝鮮共産黨 黨員으로 있었다.
  37. 송건호, 송건호 全集 13 (한길사, 2002) 389페이지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이우익
第4代 法務部 長官
1950年 11月 23日 ~ 1951年 5月 6日
後任
조진만
前任
손도심 , 임영신
第8代 無任所長官
1960年 4月 25日 ~ 1960年 4月 27日
後任
나용균 , 김선태
前任
(初代)
制憲 國會議員(靈巖郡)
1948年 5月 31日 ~ 1950年 5月 30日
한국민주당 민주국민당
後任
류인곤
前任
류인곤
第3代 國會議員(靈巖郡)
1954年 5月 31日 ~ 1958年 5月 30日
민주국민당 民主黨 통일당
後任
김준연
前任
김준연
第4代 國會議員(靈巖郡)
1958年 5月 31日 ~ 1960年 7月 28日
통일당
後任
김준연
前任
김준연
第5代 國會議員(靈巖郡)
1960年 7月 29日 ~ 1961年 5月 16日
통일당
後任
김준연
前任
김준연
第6代 國會議員(靈巖郡·康津郡)
1963年 12月 17日 ~ 1967年 6月 30日
自由民主黨 民政黨 민중당 新民黨 민중당
後任
尹在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