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장

서울 이화장
(서울 梨花莊)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私的
이화장 內部 (2019年 4月)
種目 私的 第497號
( 2009年 4月 28日 指定)
面積 4,799.1m 2
時代 기타
所有 이인수
位置
이화장은(는) 서울특별시 안에 위치해 있다
이화장
이화장
이화장(서울特別市)
住所 서울特別市 鍾路區   이화장1길 32, 等 (梨花洞)
座標 北緯 37° 34′ 42″ 東京 127° 0′ 23″  /  北緯 37.57833° 東經 127.00639°  / 37.57833; 127.00639
情報 文化財廳 國家文化遺産포털 情報
이화장
대한민국 서울特別市 記念物 (解止)
種目 記念物 第6號
( 1982年 12月 28日 指定)
( 2009年 4月 28日 [1] 解止)
情報 文化財廳 國家文化遺産포털 情報
이화장 入口의 모습

이화장 (梨花莊)은 大韓民國 招待 大統領 李承晩 이 居住하던 곳으로 韓國방송통신대學校 뒤쪽 駱山 기슭에 있다. 東쪽으로 昌信洞 , 南쪽으로 忠臣童 , 西쪽으로 연건동 , 北쪽으로는 동숭동 에 둘러싸인 마름모꼴의 地形을 이룬 언덕진 곳에 位置하고 있다.

이 家屋은 본채, 別채인 조각當, 그리고 여러 附屬 建物로 構成되어 있다. 本채는 大韓民國 初代 大統領인 李承晩 內外가 살던 곳이고, 조각黨은 1948年 7月 20日 大統領에 當選된 李承晩 이 이곳에 조각 本部를 두고 國務總理와 12部 長官의 招待 內閣 을 構想한 곳이다.

1982年 12月 28日 서울特別市의 記念物 第6號로 指定되었다가, 2009年 4月 28日 私的 第497號로 昇格되었다. [2]

槪要 [ 編輯 ]

이 建物이 자리잡은 梨花洞 一帶는 元來 배밭이었고, 中宗 以前부터 이화정이라는 亭子가 있었기 때문에 이화貞洞(梨花亭洞)이라 하였다. 이 亭子는 日帝 때 없어졌다.

이곳은 일찍이 中宗 때의 文臣(文臣)인 記載(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옛 집터로 一名 신대(申臺)라 부르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었다. 中宗 때 文章·글씨·그림을 잘하여 當代의 三絶(三絶)이라는 稱頌을 받은 신잠(申潛, 1491∼1554)李 <이화정에서 술에 醉하여>라는 詩를 읊으며 젊은 날을 回顧하였는데, 거기에 "뜰 앞엔 배꽃만이 피었을 뿐, 노래하고 춤추던 그때 사람들 볼 수 없구나"라는 句節이 나온다.

隣近에는 孝宗의 潛邸(潛邸)인 용흥궁(龍興宮)이 있었으며, 또 人組 의 세째 아들 인평대군 (麟坪大君, 1622∼1658)의 夕陽루(夕陽樓)가 있었다. 《 동국餘地備考 》 第宅兆(第宅調)에 "仁平大君의 집은 乾德房 駱山 (駱山) 아래에 용흥궁과 東西로 마주 對하고 서 있는데, 夕陽壘가 있다. 기와·壁 等에 그림이 새겨져 있고 또 規模가 크고 華麗해서 서울 長安에서도 으뜸가는 집이었다. 只今은 長生殿(長生殿, 宮中 葬禮式에 쓰일 管을 製作하던 官衙 )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 이 長生殿은 李承晩이 이곳에서 조각(組閣)할 當時에도 建物의 一部가 이화장 正門 앞에 남아 있었다.

이화장 뒷門 개울가 바위에 神대를 記念하기 위해 正祖 때 書畫家이며 漢城判尹을 지낸 豹菴(豹菴) 강세황 (姜世晃, 1712∼1791)이 쓴 '紅泉翠壁(洪川翠碧)'이라는 큼직한 各自가 1960年代 初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4·19革命 以後 溪谷을 메우고 집이 들어서면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

歷史 [ 編輯 ]

1945年 韓半島가 解放되자 亡命地인 美國에서 歸國한 李承晩은 起居할 집이 없어 安定된 生活을 하지 못하였는데, 當時의 實業家 권영일(權寧一) 等을 비롯한 30餘名의 도움으로 동소문동 4街 103番地의 돈암장에서 이곳 이화장으로 옮겨서 1947年 11月부터 起居하였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政府樹立 運動을 展開하여 大韓民國 初代 國會議長에 當選되고, 이어서 初代 大統領에 當選되어 1948年 7月 景武臺로 移徙하였다.

李承晩은 大統領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끔 이곳에 들러 庭園과 뒷山을 散策하기도 하였다. 1960年 4月 27日 大統領의 자리에서 물러난 李承晩은 이곳 이화장으로 移徙했고, 같은 해 5月 29日에 하와이로 休暇를 떠났으나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1965年 7月 19日 하와이에서 逝去하자 7月 23日에 이화장에 安置되었다가 7月 27日 國立墓地에 安葬되었다.

이화장은 垈地 約 5,500m 2 , 建坪 230m 2 인데, 正門을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이 나오고, 왼便 앞으로 '愚男리승만朴思想' 銅像이 서 있다. 그 뒤 작은 溪谷 너머에 'ㄷ'字形의 本채가 있으며, 오른便 언덕 위로 'ㄱ'字形의 조각糖이 서있다.

本채와 生活館 [ 編輯 ]

漢陽 都城의 左靑龍인 駱山 西쪽 기슭에 位置하여 西向〔卯坐酉向〕인 本채는 1920年代에 建立한 것으로 推定된다. 本채는 中央에 大廳마루가 있고 그 오른쪽에는 應接室(接見室)과 西齋가 있다. 大廳마루 왼쪽에는 寢室과 부엌이 있다. 本채는 그 自體로는 별다른 特徵은 없으나 大統領 內外의 儉素한 生活을 느낄 수 있는 建物로, 日帝强占期를 거치며 傳統 韓屋이 그 時代相을 受容하며 變貌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벌臺 長臺石 花崗石 基壇 위에 선 正面 7칸, 側面 6칸, 굴도리, 겹처마, 八作지붕 建物이다. 1988年 '大韓民國建國大統領雩南 李承晩博士記念館'으로 開館하여 歷史資料 및 平素에 使用한 機構와 遺品 等이 展示되고 있다. 本채 西쪽 언덕 아래에는 生活館이 있다.

조각當 [ 編輯 ]

이화장 本채에서 조금 떨어져 東南쪽 언덕에 막돌 花崗石으로 쌓은 築臺 위에 位置한 조각黨은 驛(逆)'ㄱ'字形의 平面을 한 아주 작은 建物인데, 若干 北쪽으로 튼 西向〔乙坐申向〕이다. 會檐골을 이룬 곳에 位置한 1칸 半 溫突房을 中心으로 南쪽으로 長마루를 깐 작은 大廳 한 칸이 西쪽을 向해 있고, 그 西쪽으로 부엌 한 칸이 딸려 있다. 굴뚝은 溫突房 東쪽 밖에 獨立하여 서 있으며, 溫突房 앞에는 작은 쪽마루가 놓였다. 基壇 없이 네모 花崗石 礎石 위에 四角기둥을 세운 납도리, 홑처마, 맞배지붕 建物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內閣을 組織하던 當時에 쓰던 돗자리와 나무椅子가 있고, 大廳마루 처마 아래에는 '組閣堂' 懸板이 걸려 있다. 本채와 조각當 周邊에는 地形을 따라 가꾼 庭園과 散策路가 있다.

令夫人 프란체스카 [ 編輯 ]

1948年 , 5·10 選擧 直後 李承晩 博士가 夫人 프란체스카와 이화장의 庭園에서 美國 雜誌 《 라이프 》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또한 李承晩 의 令夫人 프란체스카는 1945年 8ㆍ15光復과 함께 韓國에 왔고 李承晩 이 南韓 單獨 政府의 大統領이 되자 오스트리아 女性 프란체스카 는 퍼스트 레이디로 6ㆍ25와 4ㆍ19 等 波瀾萬丈한 韓國 現代史의 激動期를 體驗했다. 프란체스카는 李承晩의 돌아오지 못하는 하와이 休暇에 同行하여 1965年 李承晩이 死亡할 때까지 病床을 지켰고, 1970年 韓國 으로 돌아와 이화장에서 餘生을 보내다 1992年 死亡했다. 이렇게 1946年 蔣介石 總統이 韓國을 訪問할 때 가져온 冷藏庫는 無慮 35年間 使用했으며, 1958年 에 最初로 生産된 國産 毛織으로 만든 옷을 34年 동안이나 입었다. 이화장에서 老年을 보낼 때에도 燃料 節約을 위해 겨울철이면 本채代身 警備室에서 추운 겨울을 지냈다는 얘기도 傳해온다. [3]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서울特別市告示 第2009-178號 , 《서울特別市 記念物 指定 解除》, 서울特別市葬, 서울市報 第2907號, 10-11面, 2009-05-07
  2. 文化財廳考試制2009-35號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이화장 史跡 指定 및 地形圖面》, 文化財廳長, 大韓民國 官報 第16990號, 48-49面, 2009-04-28
  3. 「이야기로 읽는 大韓民國 經濟史」, 프란체스카 女史의 節約精神, 석혜원 저, 未來의창(2008년, 33p) 參照

參考 資料 [ 編輯 ]

  • 「朝鮮의 文化空間」, 이종묵 저, 휴머니스트(2006年, 100p)
  • 이화장 - 文化財廳 國家文化遺産포털 - 史跡 第497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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