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朝鮮 帝政黨社會團體 代表者 連席會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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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協商 (南北協商) 또는 前朝鮮 帝政黨社會團體 代表者 連席會議 (全朝鮮諸政黨社會團體代表者連席會議), 또는 南北 連席會議 (南北連席會議) [1] 는 南韓만의 單獨政府(現 大韓民國 ) 樹立을 反對하는 南北의 政黨·社會團體 代表들이 5·10 單獨選擧 를 沮止하고 統一民主國家 樹立을 위해 對策을 論議한 會談을 말한다. 1948年 4月 19日 부터 始作된 이 會議는, 金九 , 김규식 等 南韓 單獨 總選에 反對하는 南韓 一部 政派 代表들과, 蘇聯의 代理人으로 北韓의 實質 權力을 掌握해 가던 金日成 김두봉 과 같은 南北의 人士들이 多數 參席하였으나 아무런 成果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를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樹立에 利用만 되었다는 評價와 비록 失敗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統一運動의 한 指針을 提供했으며 韓國民의 統一意志를 發散시킨 것으로 解釋하는 見解가 兩尊하고 있다. 그러나 ≪레베데프 備忘錄≫李 1994年 公開되면서, 連席會議의 背後에 스티코프 , 레베데프 等 蘇聯軍政 核心人士들이 깊숙이 介入한 것으로 드러나, 朝鮮人들間의 統一政府 樹立을 위한 主體的 努力이라는 말과는 距離가 멀다는 것이 밝혀졌다. 大體로 아래 內容은 各州引用한 文獻에서 보듯이 韓國의 右派 저널리즘의 視角으로 쓰인 內容이 많으니 讀者들은 이를 勘案해서 判斷해야 한다.

統一 政府 樹立을 위한 努力 [ 編輯 ]

美蘇共同委員會 의 決裂 以後, 美國의 韓半島政策이 中道派 中心의 南北 統一政府 樹立方案에서 李承晩 한국민주당 中心의 南韓 單獨政府 樹立으로 바뀌고, 韓半島 問題가 美國이 主導하는 國際 聯合 (UN) 으로 넘어가게 된다. 蘇聯은 美國의 房안에 맞서 스티코프 가 1947年 9月 26日에 1948年 初까지 南北韓에서 美ㆍ蘇 兩軍을 撤收한 다음 韓國人들끼리 協議해서 政府를 樹立하도록 하자고 提案했다. [2] 美國은 이러한 蘇聯의 提議가 그들이 北朝鮮에 設置한 傀儡政權이 前朝鮮에 共産政權을 樹立하려고 祈禱하는 것이라며, 그 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엔總會에서의 韓國問題 討議를 밀어붙였다. 當時 서울에 있던 美國의 高位官吏는 美ㆍ蘇 兩軍이 早期에 撤收하고 나면 北韓에는 20萬 名으로 推算되는 軍의 支持를 받는 共産政權이 남을 것이고, 南韓에는 政府가 없는 狀態에서 右翼이 優勢한 過渡立法議會와 都合 5萬 名 程度의 警察官, 國防警備隊 및 海岸警備隊가 남게 될 것이라고 分析했다. [2]

1947年 7月 서울에서 열린 美蘇共同委員會에서 談笑하는 兩側 代表. 左路부터 美軍政廳 司令官 하지(John R. Hodge) 中將, 蘇聯側 代表 레베데프 所長과 스티코프 上場. 이 會談이 決裂되면서 美國은 韓國問題를 UN에 想定하게 된다. 以後의 南北協商에서 레베데프와 스티코프는 南側 代表들을 自身들이 準備한 안에 同調하도록 强壓하는 緻密한 計劃을 마련하는 等 幕後에서 깊숙히 干與하였다.
1946年 2月 8日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成立 慶祝 大會. 아래로 드리워진 懸垂幕에 臨時人民委員會는 "우리의 政府이다"라고 쓴 것이 또렷이 보인다. 北韓에는 蘇聯의 操縱을 받기는 하지만 이미 김일성을 委員長으로 하는 單獨政府가 세워져 있었다는 證據이다. 이런 北韓이 南韓의 總選을 통한 單獨政府 樹立을 反對한 것은 賊反荷杖이고, 南北協商을 主導한 것도 總選 妨害工作에 不過하다.

UN 監視下에 韓半島 全地域에서 總選擧를 實施하여 單一政府를 세우는 方案을 蘇聯이 拒否하자 南韓만의 單獨政府樹立 可能性이 높아졌다. 이에 左右合作運動 을 主導하던 김규식 여운형 이 暗殺된 後 民衆同盟·신진당·社會民主黨 等 中道派 勢力을 糾合하여 民族의 自主路線을 標榜하는 ' 民族自主聯盟 '을 結成하였다.

信託 統治 反對 運動 을 하던 李承晩 勢力 및 한국민주당 等과 같이 金九 亦是 1947年 12月 初까지도 北韓이 總選을 拒否할 境遇 南韓의 單政樹立을 支持하였다. [3] 47年 10月부터 趙素昻 主導下에 韓獨黨의 一部 幹部가 中道派勢力 中心의 各 政黨協議會에 參加하면서 南北協商論에 同調하자 金九는 南北協商을 主張하는 韓獨黨 幹部들을 害黨行爲者로 規定하고 除名하기도 했다. [4]

그러나 1947年 12月 2日 에 한민당 黨首 장덕수(張德秀, 1894 ~ 1947. 12. 02) 暗殺事件이 發生하고 그 背後로 金九 가 指目되었다. 當時 中國 總領事 類胃脘(劉馭萬)李 本國에 報告한 前文에는 "金九는 한민당 黨首 張德秀 暗殺事件에 連累된 嫌疑가 적지 않습니다. 金九 本人은 비록 어떠한 處分도 받지 않았지만 暗殺犯을 비롯하여 8人이 美軍司法廷에 依해 死刑에 處해졌습니다. 이는 金九로서도 어쩔 수 없었고 以後 金 氏와 美軍政當局의 關係는 斷絶되고 말았습니다." [5] 라 하였다. 金九 는 自身이 法廷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李承晩 의 도움을 要請했지만 李承晩은 拒絶하였다. [6] 當時 李承晩은 하지 軍政 司令官과 사이가 좋지않아, 金九 側의 要請을 接受한 李承晩 側近들이 비록 하지에게 要請한다 해도 오히려 逆效果를 낼 것으로 判斷하여 李承晩에게 그러한 事實을 報告조차 하지 않았다는 主張도 있다. 李承晩 張德秀 暗殺事件 으로 危機에 處한 국민회의 를 放置하면서 한민당 과 連帶하며 獨自的으로 '韓國民族代表團'을 構成하자 金九는 크게 憤怒하였다. 1947年 12月 22日 金九는 單獨政府 絶對反對와 '韓國民族代表團'의 解散을 主張하였다. 李承晩 金九 의 連帶에 批判的이던 한민당 은 이 事件을 政治的인 好材로 利用하고자 하였다. [6] 金九 는 이들과 訣別하고 다시 김규식 과 함께 路線을 같이했다.

1948年 1月 8日 , 總選擧 問題 論議를 爲해 UN 韓國臨時委員團이 入國했다. 1月 26日 , 27日 兩日間 韓國臨時委員團과 金九 · 김규식 · 李承晩 사이에 열린 會談자리에서, 金九 는 '美·蘇 兩軍 撤軍→南北要人會談→總選에 依한 政府 樹立'의 3段階 方案을 提示했다. 이어 2月 4日 에는 北쪽의 金日成 · 김두봉 에게 南北要人會談을 提議하는 書信을 보냈다. 또 1948年 1月 8日 에는 總選거 問題 論議를 위해 韓國에 들어온 UN 韓國臨時委員團에게 南北協商 方案을 提示하는 한便, 2月 10日 에는 南韓만의 單獨政府 樹立을 反對하는 聲明人 ' 三千萬 同胞에게 揖告함 '을 發表한 後 3月 8日 , 또다시 南北協商을 提議했다.

이에 金日成 · 김두봉 3月 25日 , 自身들이 屬한 '北朝鮮民主主義民族統一前線'의 名義로 受諾에 答하였다. 金日成 , 김두봉 等은 聲明書를 통해 평양방송을 통해 朝鮮의 政治現象에 關해 意見을 交換하고, 南朝鮮 單獨政府 樹立을 前提하는 유엔 總會의 總選擧 決定을 反對하기 爲한 對策을 樹立하는 한便, 朝鮮의 統一과 民主主義에 立脚한 統一政府의 樹立에 關한 對策 等을 討議하기 위해 "朝鮮의 統一的 自主獨立을 爲하는 前朝鮮 政黨社會團體 代表者 連席會議를 開催하자"고 發表했다. 그러나 이미 金日成 김두봉 等은 事實上의 議會와 같은 機能을 하는 團體인 最高人民會議 를 構成해놓고 있던 狀態였다.

38線 에서 訪北直前 포즈를 取하는 金九 김신 (郵), 선우진 (左)(48年 4月)

이로부터 닷새 後인 3月 30日 에는 北朝鮮勞動黨 을 비롯한 北쪽의 9個 政黨·團體의 이름으로 南쪽의 韓國獨立黨 等 모든 政黨·社會團體 앞으로 '前朝鮮 帝政黨社會團體 代表者 連席會議' 開催를 提議하는 書信을 보내기에 이른다.

이렇듯 北朝鮮人民委員會가 金九 · 김규식 의 會談 提議를 水落瑕疵, 한국민주당 을 除外한 南韓의 모든 政黨·社會團體는 卽刻的인 支持와 積極的인 參與를 闡明함으로써 4月 19日 平壤 에서 前朝鮮 帝政黨社會團體 代表者 連席會議가 열리게 되었다.

中國 總領事 類胃脘(劉馭萬)李 本國에 報告한 前文에는 金九, 金奎植의 訪北 成事 背景에 對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5] [7] [8] [9]

金奎植은 會議 成功에 懷疑的인데 남으로 돌아온 뒤에는 政界에서 隱退할 것이라 합니다. 金九의 行動은 豫測不許인데 全體的인 狀況으로 보아 蘇聯은 南韓의 選擧를 妨害하려는 陰謀를 갖고 있는 듯합니다. 2金이 北上을 決定하기 前 連絡員을 통해 會議 先決條件 5가지를 提案하였고, 北韓은 이를 完全히 受容하기로 하여 2金의 北上이 成事되었습니다. 2金이 提案한 5가지를 아래에 보고 드립니다.

韓國의 獨立과 統一을 위해 國際援助의 條件 下에 2金은 아래 5가지를 主張하였습니다.
첫째, 眞正한 民主政府를 建立하며 어떠한 獨裁體制度 拒否한다.
둘째, 私有財産制를 承認하며 獨占的 資本主義를 拒否한다.
셋째, 全國的인 補選을 實施하며 統一된 中央政府를 建立한다.
넷째, 어떤 友邦도 韓國 領土 內에 軍事根據地를 設置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美蘇 兩國은 卽刻 談判을 開始하여 占領軍의 鐵槌 時間과 條件을 討議해야 한다(이는 撤兵의 先決問題와 先後方法을 稱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撤兵方法을 全 世界에 恐怖해야 한다.

訪北 前 兩金氏 周邊 人物들의 動向 [ 編輯 ]

民族自主聯盟 의 黨首 김규식
金九, 金奎植이 南北協商을 위해 北으로 出發하기도 前에 北韓은 두 사람이 이미 降伏했다고 宣傳하고 있었다. : 『兩金氏(兩金氏) 이미 降伏(降服)』 北朝鮮(北朝鮮)의 謀略宣傳(謀略宣傳) : 現代日報 1948年 4月 15日 2面 [10]

金九가 周圍 사람들의 많은 反對에도 不拘하고 訪北을 決心하고 强行한데는 巨物 間諜 성시백(成始伯, 1905 ~ 1950) [11] 의 說得이 크게 作用한 것으로 보인다. 성시백은 中國共産黨員 資格으로 重慶에서 地下工作을 하면서 韓國獨立運動團體에 對한 工作을 맡고 있었는데, 臨時政府 要人들과 隔意 없는 關係를 形成하였고, 金九, 엄항섭, 조완구 等과도 親했으므로 쉽게 金九에게 接近할 수 있었다. [12] [13] [14] [15] 송남헌의 『解放3年史』에는 그가 金九에게 김일성의 書信을 傳達한 것으로 나온다. [16] [17]

또한 解放 後 祕密裏에 서너 次例 北韓을 訪問한 적이 있는 홍명희 가 金九의 訪北을 說得한 것도 影響을 미쳤다고 한다. [18] . 洪命憙는 金九 等과 함께 南北協商의 當爲性을 主張하는 所謂 "7거두 共同聲明(七巨頭共同聲明)"을 發表하기도 했고 [19] , 京橋莊을 訪問하여 金九와 密談을 나누기도 했다. [20] 그러나 南北協商段의 一員으로 北韓으로 간 洪命憙는 서울로 歸還하지 않았고, 平壤에 남아 北韓 初代 內閣의 副首相까지 되었다. 김일성의 妻 金正淑이 死亡하자 맏딸이 1950年 1月 김일성과 結婚하여 그의 丈人이 되기도 했으므로 [21] 일찍부터 北韓에 包攝된 人物로 보인다. 洪命憙의 딸은 김일성과 結婚 얼마 後에 일찍 죽어 그 事實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金奎植의 祕書였던 송남헌의 證言에 依하면 自身이 잘 모르고 속아서 推薦했던 金奎植의 또 다른 祕書 권태양(權泰陽, ?~1965) 은 北韓에 包攝된 人物로 間諜 성시백의 直系였으므로, [22] 倦怠讓渡 金奎植의 訪北 決心에 影響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金奎植의 訪北을 遂行했다가 서울로 돌아왔지만, 6.25 當時 金奎植의 拉北에 直接 干與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4] 金奎植이 訪北을 決心하는데는 文化인 108人이 支持 聲明 發表를 準備하고 있다는 消息이 相當한 影響을 주었다고 한다. [7] [23] [24] 聲明書를 發表한 文化인 108人 中에는 洪命憙의 長男으로 亦是 越北한 홍기문(洪起文, 1903 ~ 1992) 같은 人物도 끼어 있었다.

南北協商에 參與한 要因 中 한 名인 조완구 는 北韓에 殘留한 홍명희 의 姑母夫이기도 하다. 이 外에도 訪北한 要因들의 周邊에는 北韓 間諜들이나, 北韓에 包攝된 人物들이 많아서, 訪北을 誘導하는데 相當한 役割을 했다. [25]

連席會議와 '4金 會談'의 開催 [ 編輯 ]

4月 19日 부터 平壤 牡丹峯 劇場 에서 열린 連席會議에는 南韓의 41個 正當·社會團體와 北朝鮮 의 15個 正當·社會團體에서 選出된 695名의 代表者들이 參席했는데 이는 當時 南北을 통틀어 座·右翼勢力 大部分을 網羅한 것이었다. 實際로 南韓 쪽에서는 남조선로동당 · 勤勞人民黨 左翼系列 政黨뿐 아니라 韓國獨立黨 · 民族自主聯盟 右翼系列 政黨들도 參與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헌영 · 백남운 · 金九 · 김규식 · 趙素昻 等 名望있는 左翼 右翼 人士들도 參席했다.

會議 始作日인 19日에는 連席會議를 이끌어 갈 主席團 選擧, 祝文·祝電 紹介가 있었고, 20日에는 休會, 21日에는 金日成 의 '北朝鮮 政治情勢報告'를 始作으로 백남운 · 박헌영 의 '南朝鮮 情勢報告'를 들었으며, 22日에는 前날 發表된 情勢報告에 對한 活潑할 討論이 進行되었다. 特히 22日의 討論에서는 UN 韓國臨時委員團의 單獨選擧 實施를 糾彈하고 5.10 單獨選擧 의 實施를 沮止하는 것은 勿論 南北 모두에서 外國軍이 當場 撤收해야 한다는 總意를 모았다. 이들 討論을 基礎로 會議 마지막 날인 23日, 南北의 代表者들은 單線을 沮止하기 위한 各 政黨·社會團體의 具體的인 行動統一을 規定한 '南朝鮮 單選單政反對鬪爭 對策에 關한 決定書'와 "朝鮮人民이 自己의 뜻대로 民主的 選擧를 實施하여 統一 民主國家를 創設할 수 있도록 美蘇 兩國軍이 同時에 韓半島에서 撤軍해줄 것"을 公式的으로 要求하는 '美蘇 兩國 政府에 보내는 前朝鮮 政黨社會團體 連席會議 要請書'와 함께 '南朝鮮 政治情勢에 關한 決定書'·'展 朝鮮 同胞에게 激함' 等이 滿場一致로 採擇하였다. [26]

連席會議가 끝난 4月 26日 부터 30日 사이에는 김규식 이 訪北 直前 提案한 獨裁政權 排擊·總選擧 實施·戰爭防止方案 마련 等 5個項을 重點的으로 다룬 '前朝鮮 帝政黨社會團體 指導者協議會'(또는 '15人指導者協議會')가 열렸다. 이 '15人指導者協議會'에는 南側의 金九 · 김규식 · 趙素昻 · 조완구 · 홍명희 · 김붕준 · 이극로 · 엄항섭 (以上 右翼 허헌 · 박헌영 · 백남운 (以上 左翼 )과 北側의 金日成 · 김두봉 · 최용건 · 주영하 (北은 모두 左翼 )이 모였다. 한便 이와 함께 金九 김규식 의 要請으로 金九 · 김규식 · 金日成 · 김두봉 간 4金 會談, 김규식 金日成 의 兩金會談度 열렸다. 그러나 重要한 이야기는 論議되지 못하였으며, 여기에서 金九 김규식 은 團地 1. 南韓에 對한 送電繼續, 2. 鉛白水利組合 의 開放, 3. 조만식 의 越南許容 等을 金日成 에게 披瀝하였고, 金日成 은 1項과 2項은 受諾하였으나 3項에는 異見이 있어 合意를 얻지 못했던 것으로 傳해진다. (그러나 金日成 白凡 尤史 가 南韓으로 歸還하자마자 電氣와 農業用水를 모조리 끊어버렸다.) [27]

그리하여 4月 30日 , '前朝鮮 政黨社會團體 指導者協議會'의 名義로 共同聲明書가 發表되었다. 共同聲明書 4個項의 要旨는 다음과 같다. [28]

  1. 蘇聯이 提議한 바와 같이 外國軍隊는 우리 疆土로부터 卽時 同時에 撤去하는 것이 朝鮮問題를 解決하는 가장 正當하고 唯一한 方法이다.
  2. 南北 朝鮮 政黨·社會團體 指導者들은 外軍이 撤去한 以後 內戰이 發生할 수 없다는 것을 確認한다. 이들 大 正當·社會團體들 間에 成就된 約束은 우리 祖國의 完全한 秩序를 樹立하는 튼튼한 擔保이다.
  3. 外國軍隊가 撤去한 以後에 下記 諸 政黨들의 共同名義로 前朝鮮政治會議를 召集하여 朝鮮 人民의 各界 各層을 代表하는 民主主義臨時政府가 卽時 樹立될 것이며 國家의 一切 政權과 政治·經濟·文化生活의 一切 責任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政府는 그 첫 課業으로서 一般的·直接的·平等的 祕密投票에 依하여 統一的 朝鮮立法機關 選擧를 實施할 것이며 選擧된 立法機關은 朝鮮憲法을 制定하며 統一的 民主政府를 樹立할 것이다(全文임).
  4. 南朝鮮 單獨選擧는 絶對로 우리 民族의 意思를 表現하지 못할 것이며, 이 聲明書에 署名한 正當·社會團體들은 南朝鮮 單獨選擧의 結果를 決코 承認하지 않을 것이며 支持하지 않을 것이다.
    (≪全朝鮮政黨社會團體代表者連席會議報告文及決定書≫, 54∼55쪽;金南植·李庭植·韓洪九 便,≪韓國現代史資料總署≫13, 돌베개, 1986, 305∼306쪽).

그러나 1項은 南北韓 同時 總選을 拒否하고 蘇聯의 主張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兩軍 撤收 後 北韓이 剛한 軍事力을 바탕으로 南韓을 侵略, 적化시킬 憂慮 때문에 美軍政과 南韓 右派들이 受容할 수 없는 것이었다. 2項과 3項은 北朝鮮 으로서는 同意하기 어려운 內容이었다. [29]

民族自主聯盟 의 幹部 여운홍

南側 人士들의 反撥 [ 編輯 ]

이렇듯 協商 過程에서 北側이 一方的인 態度를 보이자, 南側의 人士들의 反撥이 甚하였다. 民族自主聯盟 김규식 은 病을 핑계로 4金會談에만 參席한 뒤 會議에 參席하지 않았고, 連席會議 中 參席者인 장건상 · 여운홍 等은 意思決定過程에 問題가 있다고 抗議하기도 했다.

장건상 은 連席會議 中 "우리 겨레는 共産主義 를 갖고는 살 수 없다. 우리가 勤勞人民黨 運動을 하는 것은 公算 社會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平等의 理念으로 평화롭게 살려는 데 있다"고 主張하였다가 이를 問題 삼은 北朝鮮에 依해 한동안 年金 되기도 하였다. [30] 張建相은 金九 , 김규식 이 떠난 지 보름 뒤에 서울 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도 그와 親分이 있던 북로당 委員長 홍명희 · 김두봉 德澤이었다고 한다. [30]

指導者 連席會議 起草委員會의 委員으로는 홍명희 , 엄항섭 , 여운홍 이 補選되었는데 [31] 起草委員會 小委員會 會議에서 박헌영 이 美國을 帝國主義로 5.10 總選擧 參加者를 亡國奴, 反動分子 等으로 過激한 言語를 驅使하며 批判하자, 이에 激忿한 呂運弘은 "以北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決定書가 좋을지 모르지만 우리 다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안되겠으니 漁具 修正이라도 하라"고 抗議하였다. [31] 그러자 박헌영 은 "個人이 曰可曰否하지 말고 民主主義的 人 決定으로 可否를 決定하자"고 했다. 結局 草案은 滿場一致로 通過되었고, 다시 反對發言을 했다가는 서울에 돌아갈 수 없다는 恐怖感을 느낀 여운홍 은 一切의 發言을 中止하고 票決 等에서도 棄權을 宣言하였다. [31] 以後 여운홍 은 消極的으로 參與하다가 1948年 5月 , 南韓으로 歸還하였다.

金九 는 南北協商에서 金日成 에게 이용당한 것을 알고 沈鬱하게 보냈다. 金日成 이 2次 會議를 提議해 왔을 때는 完全히 拒絶해 버렸다. [32] 趙素昻 은 南北協商 參加 後 인터뷰에서 이番 訪北 길은 完全히 失敗다. 우리가 完全히 모욕당하고 들러리를 섰다. [33] 고 하였다.

連席會議 以後 [ 編輯 ]

서울 로 돌아온 金九 김규식 은 平壤에서의 連席會議 經緯와 合意事項을 說明하는 共同聲明을 發表하였는데, 要旨는 南朝鮮(南朝鮮)의 單線(單選), 단정(單政) 反對와 美蘇兩軍鐵槌(美蘇兩軍撤退)를 要求(要求)하는데 南北 代表者들이 意見 一致를 보았고, 北朝鮮 當局者도 斷定(單政)은 絶對 樹立하지 않겠다고 確言했으며, 斷電(斷電)도 하지 않고, 貯水池(貯水池)도 圓滑히 開放(開放)할 것을 快樂(快諾)했으며, 조만식(曺晩植)의 南行(南行) 要求에 對해 미구(未久)에 成事되도록 努力하겠다고 約束했다는 것 等이다. [34] 美軍이 記錄한 "金九, 金奎植이 發表한 共同聲明(Kim Koo and Kim Kiusic issue joint statement: 1948-05-06)" [35] 에 나오는 兩金氏의 말을 要約하면 : 金九는 南韓만의 5.10 總選擧 를 反對하는 發言은 繼續할 것이지만 妨害하지는 않겠다고 하고, 金奎植은 單線에 反對하지는 않으나 參與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兩金 모두 美蘇兩軍이 撤收하더라도 北韓의 南侵은 없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金奎植은 金日成이 丹田을 하지 않고, 農業 龍樹도 繼續放流히겠다고 했다고 하였으며, 自身은 共産主義를 좋아하지 않지만, 宮寂寂으로는 韓國 全體에 共産主義가 壓倒할 것으로 느꼈다고 했다. 金九는 北韓式의 政權이 南韓에도 들어서는 것은 願하지 않는다고 했다. 金奎植은 政界에서 물러나 田園生活을 하겠다고 말했다는 것 等이다.

以後 北朝鮮人民委員會 에서는 第2次 連席會議를 海州 에서 開催할 것을 金九 김규식 에게 提議하며, 北쪽에서도 選擧를 實施하여 政府를 樹立할 豫定이라 發表했다. 그러나 金九 김규식 은 南쪽에서 單獨政府를 樹立한다 하여 이에 맞서 北쪽에서도 單獨政府를 樹立하겠다는 것은 또다른 民族分裂이라 하여 參加를 拒否하였다. [36]

이에 1948年 6月 29日 金九 · 김규식 의 參加 없이 平壤 에서 '第2次 前朝鮮 帝政黨社會團體 指導者協議會'가 一方的으로 開催하여, 南韓의 5.10 總選擧 로 構成된 大韓民國 制憲 國會 를 非法的 組織體로 規定하고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中央政府를 樹立할 것을 決定했다.

이에 7月 19日 , 金九 · 김규식 은 "그들이 一方的으로 決定한 憲法에 依하여 人民共和國을 宣布하며 國旗까지 바꾸었다. 勿論 時期와 地域과 手段方法에 있어서 差異가 있을지언정 半조각 國土 위에 國家를 세우려는 意圖는 一般人 것이다. 그로부터 南韓·北韓은 護喪 競爭的으로 國土를 分裂하여 民族相殘의 길로 나아갈 것이다."는 共同聲明을 發表하여 韓國 戰爭 을 豫言했으며, [36] 趙素昻 은 餘弦이라는 곳에서 聲明을 發表, "南北協商은 (南側 人士들이) 이용당한 것이다"라고 主張하기도 했다. [ 出處 必要 ]

그러나 金九 · 김규식 의 第2次 指導者協議會 拒否 後인 8月 21日 , 南쪽의 各 市·郡 '代表'가 海州 에 모여 '南朝鮮人民代表者大會'를 열고 남로당願 132名을 비롯하여 朝鮮人民共和黨員 68名, 신진당원 31名, 社會민주黨員 43名, 民主韓獨黨員 35名, 근민당원 62名, 前評會員 66名, 民主독립당원 53名 等 앞서의 連席會議에 남加했던 모든 政黨·社會團體 代表로 構成된 360名의 代議員을 選出했다. [36] 北側의 一方的인 '第2次 前朝鮮 帝政黨社會團體 指導者協議會'와 그 結果로 열린 '南朝鮮人民代表者大會'는 結局 北朝鮮 의 單獨政府인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成立을 가져와, 南北 모두가 單獨 政府를 세워 分斷을 固着化하는 結果를 가져왔다.

以後 金九 · 김규식 은 南韓만의 單獨選擧 가 實施된 後에도 韓獨黨 民族自主聯盟 을 中心으로 斷定 反對勢力을 糾合하여 1948年 7月 21日 , "統一獨立運動者의 總力量 集結"과 "民族問題의 自主的 解決"을 目的으로 하는 統一獨立促進會 를 結成하여 民族統一運動을 繼續하는 한便, UN 에 南北 두 分斷國家 의 解體와 南北 總選擧에 依한 統一政府 樹立을 要求했다. [36] 그러나 結局 1949年 6月 26日 , 金九 의 暗殺과 이듬해 6月 25日 韓國 戰爭 의 勃發, 김규식 의 拉北 等으로 이 運動은 빛을 보지 못한 채 終結되었다.

리極老 民主主義獨立戰線 을 結成했던 조봉암 은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는 가지 않았으나, 南北協商의 失敗를 認識하고 바로 1948年 5月 10日 5·10 單獨 總選擧 에 參與하였다. 南北協商 自體를 失敗로 規定한 趙素昻 韓國獨立黨 을 脫黨, 社會黨 을 創黨하였고, 大韓民國 政府를 認定하고 1950年 第2代 國會議員 總選擧에 黨員들의 出馬를 積極 勸誘하기도 했다. 김규식 亦是도 民族自主聯盟 議員들의 第2代 國會議員 總選擧에 參加할 사람은 參加해도 좋다는 意見을 表示하였다.

訪北 後 北韓에 殘留한 사람들 [ 編輯 ]

南北協商에 參與하러 訪北한 사람들 中 相當數가 돌아오지 않고 北韓에 殘留하였다. 代表的인 越北 人事는 홍명희(洪命熹, 1888 ~ 1968) , 金元鳳(金元鳳, 1898 ~ 1958) , 백남운(白南雲, 1894 ~ 1979) , 이극로(李克魯, 1893 ~ 1978) , 성주식(成周寔, 1891~1959) , 손두환(孫斗煥, 1895~?) 等이다. 이들은 平壤에 가서 갑자기 殘留를 決定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일찍부터 北韓에 包攝되어 서울에서 要因들 訪北에 바람잡이 役割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熱誠的인 共産主義者로 보이지는 않았던 洪命憙도 解放 直後부터 祕密裏에 서너 次例 北韓을 다녀와 北韓에 包攝된 人物로 밝혀졌다. [37]

金九 - 類胃脘(劉馭萬) 對話錄에 나타난 訪北 後의 金九의 立場 [ 編輯 ]

1949年 3月 모스크바를 訪問한 金日成 박헌영 홍명희 (맨 오른 쪽). [38] 訪北했던 金九 一行이 서울로 歸還한지 不過 10個月 後에 김일성은 스탈린을 만나 南侵 戰爭 承認과 支援을 要請했으나 拒絶 當했다. [39] 김일성은 처음부터 武力 赤化統一을 目標로 하고 있었으며, 南北協商은 南韓의 總選을 妨害하기 위한 工作이라는 證據이다. 서울서 金九의 訪北을 說得하던 洪命憙는 平壤에 눌러 앉아 副首相이 되어 김일성의 南侵 求乞 訪蘇를 遂行했다. 이들은 나름대로 自身들이 願하는 方式의 統一政府 實現을 위해 이렇게 全力投球하고 있었다. 이들이 果然 10個月 前에는 南側代表들과의 統一政府 樹立 協商에 眞摯한 態度로 臨했겠는가?

訪北 後 서울로 돌아온 金九는 勿論 總選에는 參與하지 않았고, 總選 後에도 斷定 反對의 立場을 固守하였다. [40] 中國 總領事 類胃脘(劉馭萬)은 1948年 7月 13日 11時 京橋莊으로 金九를 訪問하여 1時間假量 要談을 나누었다. [41] 類胃脘이 英文으로 記錄한 當時의 對話錄이 이화장 文書에서 發掘되어 全文이 公開되어 있다. [42] 이 文書에는 金九가 “共産主義者들이 앞으로 北韓軍의 擴張을 3年間 中斷하고, 그사이 南韓에서 무슨 努力을 하더라도 共産軍의 現在 水準에 맞서는 軍隊를 建設하기란 不可能하다”든가, 또“蘇聯 사람들은 아주 손쉽게 北韓軍을 南進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短時間에 여기서 人民共和國이 宣布될 것”이라 말한 것으로 나온다. 金九의 發言의 意味에 對해 論難이 있지만 [43] , 北韓이 이미 南韓이 相對하기 힘든 强大한 軍事力을 保有하여 南侵할 可能性이 크고, 그 境遇 南韓이 쉽게 赤化될 것으로 豫想한 말로 볼 수 있다. 이런 豫想을 하면서도 表面的으로는 戰爭은 없다고 하며, 美蘇 兩國軍 同時 撤收를 主張한 것은 眞意를 疑心받을 만한 것으로 보인다.

美蘇兩軍이 同時 撤收하면 南北間의 힘의 均衡은 이미 强力한 軍事力을 갖춘 北韓 쪽으로 기울 수 밖에 없고, 南北 合意에 依한 統一이 아니라 武力 赤化 統一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은 豫定된 手順이었다. 그렇게 해서 不過 2年 뒤 6.25 南侵 戰爭이 일어난 것이다. 뉴욕 타임스 韓國 特派員이었던 존스턴(Richard Johnston)이 쓴 1947年 10月 27日子 뉴욕 타임즈(NY Times)의 記事에 “오늘 이 곳의 美軍政 高位層이 말하길 蘇聯軍과 美軍 撤收 以後 北韓 共産主義者의 南韓 攻擊 計劃에 關한 報告書는 正確했다”고 하였다. [44] 이처럼 美軍政 高位層에서도 微笑 凉君이 撤收하면 北韓의 南侵을 豫想하는 觀測이 있었다. 존스턴은 또한 1948年 2月 18日 京鄕新聞 記者에게 北韓에는 이미 1946年 2月에 臨時人民委員會라는 政府를 樹立해 놓고 憲法도 準備해 놓은 狀態에서 軍備도 强化해 왔으므로, 總選을 통한 南韓 單獨政府 樹立은 不可避하며, 南韓이 北韓에 對應할만한 充分한 軍事力을 갖출 때까지 美軍이 駐屯할 必要가 있고, 南韓만이 UN의 承認을 받는 國家가 될 것이라는 展望도 내놓고 있다. [45] 外國人 記者도 當時 南北의 狀況을 보고 이 程度 判斷을 했는데, 南北協商 같은 것은 애初에 成功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6.25 南侵과 南北 協商 參與 要因들의 拉北 [ 編輯 ]

金九가 豫想했던대로 北韓은 不過 2年뒤 6.25 南侵 戰爭을 開始하였다. 이는 南北協商에 臨한 北韓의 意圖가 南韓의 總選을 妨害하는 것이 目的이고, 그들이 願하는 南北韓 單一政府는 애初부터 南侵 戰爭을 통해 南韓을 敵化하여 達成한다는 計劃이었음을 立證한다. 戰爭 準備는 하루 이틀 사이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北韓이 解放 直後부터 軍事力 强化에 熱誠的이었다는 것도 이런 目的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蘇聯의 代理人으로 蘇聯軍의 全幅的 支援을 받아 北韓의 實質的 權力을 掌握하고 있던 金日成이 自身의 權力을 잃을 수도 있는 南北合意에 依한 統一 政府 樹立을 眞摯하게 考慮했을 理는 萬無하고, 自身이 統一 政府의 最高 權力者가 되는 赤化 統一만이 그가 願한 唯一한 統一政府 樹立 方式이었을 것은 自明하다.

連席會議가 열린지 不過 10個月 後인 1949年 3月에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訪問하여 스탈린을 만나 [38] 統一을 위한 南侵 戰爭을 許諾해 줄 것을 要請하였으나 拒絶 當하고, [39] 以後 48次例나 스탈린에게 專門을 보내 懇請한 끝에 [46] [47] 艱辛히 승락을 얻어 6.25 南侵 戰爭을 일으킨다. 利로보아 北韓이 統一政府 樹立을 위한 南北協商에 나선 것은 南韓에 分裂과 混亂을 造成하고 總選을 妨害할 目的이 있었을 뿐이고, 애初부터 戰爭을 통한 赤化統一을 準備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正確할 것이다.

人民軍은 短期間에 서울을 占領한 後 洛東江 戰線까지 밀고 내려갔다가 더 以上 前進하지 못하고, 國軍과 UN軍의 反擊으로 南韓 赤化가 失敗할 可能性이 커지자, 南韓의 主要人士들을 拉北하기 始作했다. 前 北韓政務院 副部長 박병엽 (筆名 신경완) 의 證言에 依하면 南北協商에 參與했던 人士들은 于先 拉北 對象이었고, [48] 協商을 위해 訪北했던 김규식(金奎植, 1881 ~ 1950) , 趙素昻(趙素昻, 1887 ~ 1958) , 조완구(趙琬九, 1881 ~ 1954) , 엄항섭(嚴恒燮, 1898 ~ 1962) , 김붕준(金朋濬, 1888 ~ 1950) , 최동오(崔東旿, 1892~1963) [49] , 元世勳(元世勳, 1887 ~ 1959) [50] , 오하영(吳夏英, 1879 ~ 1960) , 박건웅(朴健雄, 1906 ~ ? ) [51] 等이 拉北되었다. 平壤까지 가서 共産主義者들의 實相을 겪어보고도 그들의 實體를 正確히 把握하지 못하고, 끝내 그들에 依해 悲劇的인 일을 當한 것이다. 金九 도 生存해 있었더라면 最優先 拉北 對象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박병엽 (筆名 신경완) 은 이들 被拉人士들의 拉北 後의 運命에 對해서도 證言한 바 있다. [48] [52]

南韓側 協商 參與 主要 人士 大多數를 拉北한 것만 보아도 北韓 側이 協商에 臨한 目的은 統一政府 樹立에 對한 論議가 아니라 總選을 妨害하기 위한 對南 工作 次元이었다는 것이 證明된다.

南北協商에 對한 美軍政의 立場 [ 編輯 ]

美軍政은 南北協商에 처음부터 反對하였다. [53] 美軍政은 元來 李承晩, 金九보다는 中道 穩健派인 김규식 을 指導者로 選好하였으나, 南北協商을 위한 그의 訪北에는 反對하였다. 그러나 金奎植은 美軍이 介入할 일이 아니라면서 訪北을 强行하였다. [7] [23] 美軍政은 南北協商에 反對했지만 協商派들의 訪北은 막지 않았고, 事態를 觀望하였다.

南北協商에 對해 美軍이 내린 評價는 "유엔韓國委員團 連絡將校 웨컬링 將軍의 報告書(Report of Weckerling, liaison officer with the 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 1948-06-25)" [54] 에 나오는데, 大綱의 內容은 아래와 같다.

蘇聯과 北韓의 目的은 南韓의 同調者들에게 資金을 대고 부추겨서 總選을 妨害하여 無力化 시키고, 美蘇 兩軍 撤收 後 外國의 干涉을 排除한 韓國人들의 政府를 樹立하자는 蘇聯의 提案을 받아들이도록 壓迫하는데 있다.

北韓은 訪北 人士들이 感銘을 받도록 平壤 거리를 깨끗이 淸掃하고 補修하며, 建物들을 塗色하고, 平壤 近郊의 道路들을 改補修하는데 엄청난 努力을 들였다. 訪北人士들은 國營工場 勞動者들의 熱意와, 마을 사람들의 집, 衣服, 裁縫틀, 寢室, 電氣 照明, 깨끗한 부엌 等에 感銘을 받았으며, 한 工場의 라운지에서 勞動者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南北連席會議를 祝賀하기 위해 김일성 廣場에 34萬名의 勞動者, 農民, 學生, 市民들이 모였다고 平壤 라디오는 자랑하였고, 그들의 宣傳煽動 主題는 "美國人의 走狗들만 南韓의 單獨選擧를 支持한다", "南韓의 單獨 政府 計劃을 打倒하라", "南韓의 單獨選擧에 參與하지 말라"는 等이었다.

이런 것들은 南韓의 反對政派 指導者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共産主義者들의 常套的인 計劃된 보여주기에 지나지 않지만, 金九나 金奎植이 繼續 이에 對한 發言을 하도록 하고, 美國 官吏들에게 北힌에서 본 것들에 對해 感動받았다고 말하도록 하는데에 成功했다.

하지만 다른 穩健派나 左派 귀患者들은 이 두 사람과는 全혀 다른 말을 했다. 相當히 著名한 左派 한 사람은 平壤의 主張을 完全히 받아들이지 않자 1週日間 拘禁을 當했고, 그는 北韓에 비해 南韓은 天國이라 했다. 다른 사람들은 北韓 共産 指導者들의 非妥協的 態度는 러시아를 代身해서 韓半島 全體를 支配하겠다는 一貫된 野望의 徵標라고 생각했다.

意味있는 結果를 만들어 낸 것이 없는 南北 指導者들의 會同은 全體的으로는 失敗이다. 明白히 南韓의 選擧를 破綻내기 위한 共産主義者들의 計劃의 一部일 뿐이며, 南北指導者들의 聯合을 이끌어 내기 위해 眞摯하게 努力한다는 意圖는 全혀 없었다.

共産主義者들이 會同을 통해 얻고자 하는 窮極的 目的은 選擧 며칠 前에 蘇聯軍과 美軍 司令官에게 보내는 卽刻的인 軍隊 撤收와 韓國 問題를 韓國人들에게 맡길 것을 要求하는 便紙를 準備하는 것과 人民委員會가 臨時憲法을 체擇하도록 하는 것 等이다.

北韓의 蘇聯軍 司令官은 會同에서 採擇된 이 便紙에 卽刻 答하며 "美軍도 同時에 撤收하도록 壓力을 加하기 위해 蘇聯軍은 撤收 準備를 完了했다"고 하였다. 이런 것은 南韓 選擧에 反對하는 最大의 宣傳效果를 노려 緻密하게 準備한 말套이며 選擧에 別 影響을 주지는 못했다.

美軍이 記錄한 "金九, 金奎植이 發表한 共同聲明(Kim Koo and Kim Kiusic issue joint statement: 1948-05-06)" [35] 에도 歸還한 金九, 金奎植의 發言들이 나온다. 두 사람 모두 微笑 兩軍이 鐵槌해도 北韓의 南侵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金九가 南韓에는 美國 大統領 트루먼 寫眞을 내 걸지도 않는데 北韓은 어디에나 스탈린 寫眞을 걸어놓은 것을 指摘하자 共産主義者들이 憤怒했다고 했다. 金奎植은 김두봉은 固執不通이었고, 金日成이 더 對話할만한 相對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出發 前에는 金奎植은 김일성은 假짜라는 所聞도 있고, 만난 적도 없는 모르는 사람이지만, 김두봉은 獨立運動 當時부터 잘 아는 사람이니 協商이 可能할 것으로 期待했었다. [23]

蘇聯 文書 公開로 드러난 새로운 事實 [ 編輯 ]

北韓을 占領한 蘇聯 第25軍의 軍事委원으로 南北協商 當時 民政司令官이었던 레베데프 (Nikolai Lebedev, 1901 ? 1992) 所長이 남긴 ≪레베데프 備忘錄≫李 1994年 公開되면서, 1948年의 봄의 南北政治協商은 스티코프 와 레베데프等 蘇聯軍政 核心人士들이 主導한 緻密한 政治工作에 따른 것으로 밝혀졌다. [55] [56]

≪레베데프 備忘錄≫에는 南北連席會議에 對한 具體的 計劃이 3月 17日부터 檢討된 것으로 쓰여 있다. 그리고 이 備忘錄 3月 24日子에는 連席會議 大會日程이 具體的으로 明記되어 있다. [57]

中央日報가 報道한 ≪레베데프 備忘錄≫의 要旨에서 南北協商 關聯 部分은 아래와 같다.

備忘錄에는 北朝鮮 人民委員長 김일성과 北朝鮮 勞動黨 委員長 김두봉이 韓國獨立黨 黨首 金九와 民族自主聯盟 代表 金奎植等 이른바 「4金會談」에서 金九와 金奎植에게 『憲法은 採擇하지만 當分間 內閣은 構成하지 않고 金九.김규식 두 先生에게 職位를 附與하고 憲法을 通過한 後 統一政府를 세울 計劃』이라고 提議, 두 政治指導者를 回游한 것으로 記錄돼 있다.

이와 함께 蘇軍政은 金九와 金奎植 一行이 南北(南北)指導者 連席會議를 決裂시키거나 會議에서 退場하면 이들을 「未濟(美帝)間諜」으로 暴露하는 對策을 樹立해 놓았다. 特히 備忘錄에는 南韓(南韓)으로부터 받은 情勢報告에서 金九가 記者들에게 『나를 5月10日까지 暗殺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記錄, 金九는 平壤으로 出發하기전 自身의 暗殺을 豫見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以後 平壤에 간 金九는 48年 5月 3日 1時間 30分동안 김일성과의 單獨會談에서 『萬一 美軍政(美軍政)이 나를 剛하게 壓迫하면 北韓에서 나에게 避難處를 提供할 수 있을 것이라고 期待해도 좋은가』라고 묻자 『김일성이 肯定的으로 對答했다』고 記錄돼 있다. 또 김두봉은 4月25日 밤 레베데프 所長에게『김규식을 5月10日까지 平壤에 滯留하도록 하자』고 建議, 金奎植이 美軍政에 依해 大統領으로 選出될 可能性이 있음을 勘案, 그를 北韓에 묶어 두려는 意圖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備忘錄에는 蘇軍丁이 蘇聯軍 極東(極東)司令部 政治委員이자 스탈린의 北韓問題 全權大使格인 스티코프 大將(大將)의 裁可를 받아 南韓의 金九와 金奎植이 提議한 南北 代表者 連席會議를 平壤에서 열겠다고 發表하고 連席會議에 金九와 金奎植을 平壤으로 불러 들여 ▲南韓의 總選 反對와 粉碎 ▲유엔 韓國(韓國)臨時委員會 朝鮮(朝鮮)에서 追放 ▲소.美軍 撤收 ▲臨時政府樹立을 위한 南北總選擧는 外國軍 撤收後 實施 等 韓半島의 소비에트化를 위한 4가지 指針을 貫徹토록 김일성에게 指示한 것으로 記錄돼 있다. 이를 위해 蘇軍丁은 「革命論理와 鬪爭戰略」을 主 內容으로 連席會議 參席者들의 決議文에 該當하는 「朝鮮人民에게 보내는 呼訴文」을 事前에 作成해 南韓代表들에게도 이같은 指針을 미리 示達하여 指針 內容대로 演說을 準備토록 指導하라고 했다.

《出處: 48年 南北政治協商은 蘇脚本-蘇民政司令官 레베데프 備忘錄 中央日報 1994.11.15 綜合 1面》

김일성은 蘇聯이 내세운 그들의 代理人에 不過했기 때문에 南北協商과 같은 重要한 事案에 對해 蘇聯이 幕後에서 操縱하고 있었다는 것은 充分히 豫想된 일로, ≪레베데프 備忘錄≫에서 事實로 確認되었다 해도 別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 그 동안 北韓이 金九가 김일성과의 單獨 會談에서 김일성에게 自身의 老後를 付託했다고 主張해 온 것의 事實 與否를 두고 論難이 있었는데, [58] 그러한 말이 이 備忘錄에 나오므로 事實일 可能性이 커 보인다.

蘇聯이 自身들의 代理人으로 拔擢한 金日成 뿐만아니라, 다른 共産主義者들도 蘇聯에 從屬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2004年에 飜譯 刊行된 《 스티코프 日記》에 依하면 박헌영 은 어떻게 行動할지 스티코프에게 자주 問議하고 있고, [59] 스티코프는 박헌영에게 指針을 내리는 한便 隨時로 南韓 左派들의 活動을 支援하는 方法을 講究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울의 蘇聯 副領事였던 아나톨리 샵新 은 박헌영이 自身의 心腹(henchman)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60] 이처럼 金日成, 박헌영 等 北韓의 權力을 掌握한 共産主義者들이 蘇聯과 한통속인 下手人들에 지나지 않았고 曺晩植 等 北韓의 反蘇 또는 反共 人士들은 오래 前에 모두 除去되었으므로, 南北協商이라는 것이 애初에 朝鮮人들끼리 自主的으로 統一政府를 세우는 協商을 하는 자리가 될 수 없었다.

이 協商의 實質的 當事者는 金日成, 김두봉을 代理人으로 내세운 蘇聯과 南韓의 總選 反對派들로, 애初에 意味 있는 結果를 만들어낼 수 있는 可能性은 없었다. 蘇聯은 남한서 온 代表들을 工作 對象으로만 생각했을 뿐 眞摯한 協商의 對象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이 協商에서 金九와 金奎植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蘇聯과 北韓은 南韓 社會를 分裂시키고 混亂을 빚게 만드는 所期의 目的을 達成한 것으로 보인다.

評價 [ 編輯 ]

連席會議 主要 要因.

李承晩 크렘린 當局이 合理的으로 事態를 收拾하려 한다고 豫想하는 것은 한낱 妄想 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미 判斷하고 있었다. [61]

連席會議의 決定에 따라 南韓에서는 5·10選擧 反對鬪爭이 全國的으로 展開되었지만, 이를 主導한 것이 主로 左派 勢力에 局限되어 큰 反響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26] 또한 北朝鮮 이 連席會議를 受諾하기 前인 1948年 2月 8日 朝鮮人民軍 을 創設하고, 2月 11日 부터는 1947年 12月 에 作成된 臨時憲法 草案을 '前(全) 人民 討議'에 붙이는 等 北韓政權 樹立을 위한 手順을 밟고 있었다는 點 [29] 이 드러나면서 連席會議가 結果的으로 김일성 體制 確立 戰略의 一環이었다는 批判論과 함께 ' 金九 김규식 이 利用만 當했다'는 嘲弄섞인 批判도 있다. [27] 또한 連席會議의 이러한 限界로 인해 以後 金九 · 김규식 大韓民國 制憲國會 總選 過程과 이에 對應한 北朝鮮 의 政府 樹立 等에 별다른 影響力을 發揮할 수 없었다는 評價도 있다. [26]

그러나 金九 김규식 北朝鮮 3月 25日 提議에 對해 "미리 다 準備한 잔치에 參禮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라 憂慮하고 있었으며, 4月 19日 부터 連席會議에 參加하면서도 人事말만 한 番 하거나( 金九 ), 아예 參加하지 않는 等 ( 김규식 ) 의 프로그램에 따라 一方的으로 進行되는 連席會議에 批判的이었다. [27] [29] 장건상 은 南北協商 中 '우리 겨레는 共産主義를 갖고는 살 수 없다. 우리가 勤勞人民黨 運動을 하는 것은 共産社會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平等의 理念으로 평화롭게 살려는 데 있다'는 發言을 한 것이 問題가 되어 한동안 北朝鮮에 監禁당하기도 했다. [30]

特히 김규식 은 北에 이용당하지 않으면서도 統一運動을 展開하기 위해, 獨裁政權 排擊·總選擧 實施·戰爭防止方案 마련 等 5個項을 北에 提示하기도 했다. [29] 趙素昻 은 南北協商을 失敗로 規定 '이番 訪北 길은 完全히 失敗다. 우리가 完全히 모욕당하고 들러리를 섰다.' [33] 고 否定的으로 評價하였다.

성균관대학교 敎授 서중석 은 連席會議는 1945年 8月 15日 光復 以後, 처음으로 南과 北의 指導者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點에서도 意義가 있으며, 이 자리에서 決議된 共同聲明書에 담긴 內容은 當場에 實現되기는 어려웠으나 統一國家樹立 方案을 具體化했다는 데 重要한 意義가 있다 [29] 고 評價했다.

蘇聯軍은 北韓에 進駐한 直後부터 自身들이 5年間 蘇聯軍 部隊에서 교육시켜 데려 온 金日成을 代理人으로 내세워, 조만식 等 反對派를 除去하여 그의 權力 基盤을 鞏固히 해주고, 土地 沒收等 各種 共産主義式 改革을 斷行하여 1948年에 들어서면 南韓과는 相當히 異質的인 社會가 되어 있었으므로 協商을 통해 統一政府를 세운다는 것은 거의 不可能에 가까웠다. 南韓 一部 政派의 代表에 지나지 않는 金九, 金奎植과 달리 김일성은 蘇聯軍의 一方的 支援을 받아 北韓의 實質的 權力을 掌握해 있었으므로 그가 願하는 統一政府라면 自身이 最高指導者가 되는 境遇 外의 다른 方案은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는 곧 赤化統一에 다름 아니다. 이를 위해 北韓은 連席會議 以後 不過 2年도 못되어 6.25 南侵을 敢行하였다. 이 또한 南北協商에 臨하는 北韓의 眞意는 協商을 통해 南北 單一 政府를 構成하는 데에 있지 않고, 南韓의 總選을 妨害할 目的이었다는 證據가 될 것이다.

또 解放 當時 國內에 支持基盤이 全혀 없던 김일성이 蘇聯의 代理人이 되어 蘇聯軍의 全幅的인 도움으로 北韓의 權力을 掌握해 있는 事情을 度外視하고, 그가 마치 北韓 住民들의 代表인 것처럼 看做하여 美蘇兩軍이 撤收하고 朝鮮人들끼리 主體的으로 單一政府를 세운다는 名分으로 그와 協商을 벌인 것도 지나치게 純眞한 發想으로 批判 받을 수 있다. 힘을 가진 美國도 美蘇共同委員會에서 蘇聯을 相對로 아무런 合意를 導出할 수 없었는데, 아무런 實質的인 힘도 못 가진 못한 南韓의 總選 反對派들이 北의 蘇聯 代理人들을 相對로 아무 意味있는 合意도 끌어 내지 못한 것은 當然하다고 볼 수 있다.

當時 北韓에는 全地域 到處에 스탈린과 김일성의 寫眞을 내걸어 놓고 있었다. 이는 김일성이 스탈린의 代理人으로 獨裁를 하고 있다는 露骨的인 證據임에도 不拘하고, 어떠한 獨裁도 反對하며 美蘇兩軍 鐵槌와 朝鮮人끼리의 統一政府 協商을 要求한다는 것은 空虛한 主張이 될 수 밖에 없었다.

金九와 金奎植이 平壤으로 出發하기도 前에 北韓은 兩金氏(兩金氏)가 이미 降伏(降服)했다고 宣傳(宣傳)하고 있었고, 서울의 新聞들도 이런 事實을 報道하고 있었다. [10] 北韓의 意圖는 처음부터 뻔한 것이었는데도 두 사람이 訪北을 强行하여 結果的으로 이용당했다는 批判을 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連席會議에 同行한 南側 人士 226名 中 홍명희 等 70餘 名이 서울로 歸還하지 않고 平壤에 殘留했다는 事實은 連席會議 參席者의 約 3分의 1이 純粹한 目的이 아니라 北韓의 意圖를 代辯하여 南北協商을 主張한 者들이었음을 示唆한다. [62] [63] 兩金氏의 訪北은 이들이 堂堂하게 越北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役割도 했다.

參考 文獻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 南北 政治協商' , ' 南北(朝鮮) 帝政黨社會團體 代表者 連席會議' 라 부르기도 한다.
  2. 赤色政權企圖?備(赤色政權祈禱準備)?「슈」氏提案(氏提案)에 在京美高官談(財經美고관담) 1947.09.28 東亞日報 1面
    南朝鮮支配(南朝鮮支配)를 陰謀(陰謀) 美國官民側(美國官民側)의 反響(反響) 1947.09.28 東亞日報 1面
  3. 南北統一(南北統一) 不能視(不能時)는 南銑(南鮮) 選擧(選擧) 主張(主張), 金九氏(金九氏) 政府樹立聲明發表(政府樹立聲明發表) Archived 2018年 3月 14日 - 웨이백 머신 영남일보(嶺南日報) 1947.12.02
    南北(南北)을 桶(通)韓 選擧(選擧)아니라도, 政府(政府)는 統一政府(統一政府), 金九氏(金九氏)·聲明發表(聲明發表) Archived 2018年 3月 14日 - 웨이백 머신 婦女日報(婦女日報) 1947.12.02
  4. 김효선, '建國理念의 喪失'李 韓國未來 어둡게 해 한국논단 2009年 8月號
  5. 類胃脘(劉馭萬, 유어만) 總領事의 大田(代電) 1948年 4月 20日 [番號] 第119號
  6. 康俊晩 (2005年 4月 8日). 《韓國現代史散策 (1940年代篇 2卷)》. 서울: 人物과사상사. 67~68쪽. ISBN   89-5906-045-3 .  
  7. 南北(南北)의 對話(對話) <2> 老革命家(老革命家)들의 꿈과 挫折 (2) 密使(密使)의 往來(往來) 1971.10.05 東亞日報 4面
  8. 이완범, '南北協商과 建國' (Kim Koo and Kim Kyu-shik's Unification Talks with Kim Il-Sung, 1948) Archived 2018年 3月 16日 - 웨이백 머신 2008年 9月 第4回 世界韓國學大會 發表 Archived 2018年 3月 16日 - 웨이백 머신 原稿 p.3
    金博士(金博士)도昨日北行(작일북행) 出發前五個提案發表(出發前 5個案 發表) 東亞日報 1948.04.22, 1面
  9. 獨裁政治 排擊(獨裁政治排擊), 南北 選擧로 統一政府, 金博士 主張 5原則 自由新聞 1948年 4月 22日 01面
  10. 『兩金氏(兩金氏) 이미 降伏(降服)』 北朝鮮(北朝鮮)의 謀略宣傳(謀略宣傳) Archived 2018年 6月 8日 - 웨이백 머신 現代日報 (現代日報) 1948年 4月 15日 2面
  11. 성시백間諜事件(成始伯間諜事件) 韓國民族文化大百科
  12. 유영구,“巨物間諜 성시백 프로젝트”, 『월간중앙』 1992年 6月號, pp.634-667.
    유영구, 「解放空間과 성시백事件」『南北을 오고간 사람들』(圖書出版 글, 1993).
  13. 『勞動新聞』, 1997. 5. 26 者에 報道된 성시백 關聯 記事
  14. 金九를 包攝한 共産主義 革命家, 성시백의 一生 코나스넷 2006-06-06
    金九를 包攝한 金日成의 스파이 성시백 未來韓國 2006.03.25
  15. 이주천, 金九를 包攝한 共産主義 革命家, 성시백의 一生 블루투데이 2012.05.14
  16. 송남헌, 『解放3年史』(까치, 第2卷, 1985),p. 543.
  17. 양동안, 1948年 南北協商과 關聯된 北韓의 對南 政治工作 國家情報硏究 第3卷 1號 (韓國國家情報學會, 2010-08-17) pp.14~18 : Ⅲ. 南派 工作員들을 통한 工作 - 金九 包攝을 위한 間諜 성시백의 役割이 나옴
  18. 中央日報 特別取材班,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서울: 중앙일보사, 1993), 下卷 pp.212~223. 解放 後 洪命憙의 政治活動과 北韓과의 連繫에 對한 서용규(北韓 勞動黨 高位幹部 出身 박병엽의 假名)의 證言이 仔細히 나온다.
    양동안, 1948年의 南北協商에 關한 硏究 Archived 2018年 12月 14日 - 웨이백 머신 정신문화연구 2010.06 通卷119號
    양동안, 1948年 南北協商과 關聯된 北韓의 對南 政治工作 國家情報硏究 第3卷 1號 (韓國國家情報學會 2010-08-17)
    양동안, 解放空間에서의 南北韓 情報·政治工作 活動 2010-02-23 韓國國家情報學會 學術세미나 發表文
  19. 南北單政企圖는 慘禍만을 더 釀成: 金九氏等七巨頭共同聲明 Archived 2018年 3月 15日 - 웨이백 머신 群山新聞 1948.03.13 : 金九, 金奎植, 김창숙, 조완구, 趙素昻, 曺盛煥, 홍명희
  20. 홍명희, 京橋莊(京橋莊) 訪問, 金九와 要談 1948.03.18 京鄕新聞 1面
  21. 홍명희(洪命熹) 맏딸과 金日成(金日成) 再婚(再婚) Archived 2017年 3月 18日 - 웨이백 머신 연합신문(聯合新聞) 1950.01.25
    金日成(金日成)李 再婚(再婚), 홍명희(洪命熹) 맏딸 영숙(永淑)과 自由新聞 1950年 1月25日 2面 10段
    金日成(金日成) 再婚(再婚) Archived 2018年 3月 16日 - 웨이백 머신 漢城日報(漢城日報) 1950.01.25
    깨여지는 傀儡(傀儡)의 白日夢(白日夢) 熾烈化(熾烈化)韓 反訴反共運動(反蘇反共運動) 1950.01.25. 京鄕新聞 2面
    金日成(金日成) 專屬 看護婦 조옥희(趙玉姬), 逮捕 後 記者會見 釜山日報 1951年 3月 1日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 U.S. Army Far East Command, July 31, 1952; 原文 pp.90~91 (pdf pp.144~145) : In January 1950, he (KIM Il Sung) is said to have married a daughter of HONG- Myong Hui, a Vice Premier of the North Korean Regime.
    金昌順 著, 歷史의 證人 (서울, 韓國亞細亞反共聯盟, 檀紀4289 (1956) : 洪命憙의 둘째딸이 김일성과 結婚했다고 函.
  22. 내가 겪은 解放과 分斷 (한국정신문화연구원 韓民族文化硏究所 저, 線인, 2001) pp.34~36
  23. 南北(南北)의 對?(對話) <7> 老革命家(老革命家)들의 꿈과 挫折 (7) 金奎植(金奎植)의 心境(心經) 1971.10.16 東亞日報 4面
  24. 南北協商만이 救國에의 길, 薛義植氏等 108 文化人이 支持聲明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獨立新報 1948.04.29
    文化人 百八名 連署, 南北會談 支持 聲明, 兩軍 同時 撤兵은 大經大法이다. Archived 2018年 3月 14日 - 웨이백 머신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48.04.29 : 조선중앙일보는 間諜 성시백이 서울에서 刊行하던 新聞이다.
  25. 양동안, 1948年 南北協商과 關聯된 北韓의 對南 政治工作 國家情報硏究 第3卷 1號 (韓國國家情報學會, 2010-08-17) pp.14~18 : Ⅲ. 南派 工作員들을 통한 工作
    양동안, 1948年의 南北協商에 關한 硏究 Archived 2018年 12月 14日 - 웨이백 머신 정신문화연구 第33卷 第2號 (通卷 119號),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06) pp.13~15
  26. 尹煌 (國立警察大學校 治安政策硏究所 硏究官) (2006年 12月 1日). “南北連席會議” . 國家記錄院. 2011年 11月 2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10月 7日에 確認함 .  
  27. 誠信女大 産學協力團 (2006年 12月 1日). “南北協商(南北連席會議)” . 國家記錄院. 2011年 11月 2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10月 7日에 確認함 .  
  28. 서중석(徐仲錫), 新編 韓國史 52 大韓民國의 成立 > Ⅱ. 統一國家 樹立運動 > 2. 主要 政治勢力의 統一國家 樹立運動 > 4) 南北指導者會議-連席會議와 南北協商 > (3) 連席會議와 南北協商 > 나. 南北要人會談 및 南北朝鮮政黨社會團體指導者協議會
  29. 서중석 (2005年 4月 8日). 《寫眞과 그림으로 보는 韓國現代史》. 서울: 熊進 知識하우스. 56~62쪽. ISBN   978-89-01-04959-5 .  
  30. 康俊晩 (2005年 4月 8日). 《韓國現代史散策 (1940年代篇 2卷)》. 서울: 人物과사상사. 124쪽. ISBN   89-5906-045-3 .  
  31. 이정식 (2006年 6月 1日). 《大韓民國의 起源》. 서울: 일조각. 420~421쪽. ISBN   978-89-337-0496-7 .  
  32. 이철승·박갑동 《建國 50年! 大韓民國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 박갑동 共著, 계명사, 1998) 367페이지
  33. 이철승·박갑동 《建國 50年! 大韓民國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 박갑동 共著, 계명사, 1998) 366페이지
  34. 兩金氏(兩金氏) 共同聲明發表(共同聲明發表) 1948.05.07 東亞日報 1面
  35. Kim Koo and Kim Kiusic issue joint statement (金九와 金奎植의 共同聲明) 文書番號 501.BB-Korea/5-648, 發信 JACOBS, 受信 國務長官, 날짜 1948-05-06.
  36. 강만길 (1994年 2月 5日). 《고쳐 쓴 韓國現代史》. 서울: 창작과비평사. 268~269쪽. ISBN   89-364-7015-9 .  
  37. 中央日報 特別取材班,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서울: 중앙일보사, 1993), 下卷 pp.212~223. 解放 後 洪命憙의 政治活動과 北韓과의 連結에 對한 서용규(北韓 勞動黨 高位幹部 出身 박병엽의 假名)의 證言이 仔細히 나온다.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 口述,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前 勞動黨 高位幹部가 본 祕密會同 (선인, 2010) "第4張 洪命憙의 越北"
  38. March 05, 1949 Meeting Between Stalin and Kim Il Ssung Wilson Center Digital Archive
  39. “러시아 ‘韓國戰爭 關聯 外交文書’<2>” 한겨레新聞. 1994年 7月 22日. 5面.
  40. 單政 不遠 無用化, 金九氏 記者團과 一問一答 Archived 2021年 5月 18日 - 웨이백 머신 조선중앙일보 (朝鮮中央日報) 1948年 6月 25日
  41. 劉領事京橋莊訪問(유영사京橋莊訪問) 金九氏(金九氏)와要談(요담) 1948.07.13 京鄕新聞 1面
  42. 英語 原文 : Record of Conversation between Kim Gu and Liu Yuwan : July 11, 1948  : Wilson Center
    飜譯文 : 조갑제, 이화장에 있는 ‘金九-類胃脘 對話 備忘錄’ 全文 公開 : 金九, “共産軍 곧 南侵, 共和國 세울 것”이라면서 駐韓美軍 撤收 主張 월간조선 2009年 9月號
  43. 金九 “蘇聯, 北韓軍을 南進에 써먹을 것”… 戰爭 可能性 豫見 中央日報 2015.07.18 綜合 15面
  44. FRUS 1947, The Far East Volume VI > 韓國 > 美軍 撤收 後 北韓의 南韓 攻擊을 豫見하는 뉴욕 타임즈 記事 關聯 韓國史데이터베이스
  45. 資料대한민국사 第6卷 > 1948年 > 뉴욕타임즈 서울特派員 존스턴, 北朝鮮 國家樹立설에 對한 展望 披瀝 韓國史데이터베이스
  46.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3 (Fall 1993), p.14: This was Kim Il Sung’s war; he gained Stalin’s reluctant approval only after persistent appeals (48 telegrams!).
  47. 蘇聯, “南侵 準備 不足, 게릴라전 注力하라” Kbs News 2010.06.24 (22:03)
  48. 《(現代史實錄) 鴨綠江邊의 겨울 : 拉北 要因들의 삶과 統一의 한》  : 이태호 著; 신경완(申敬完) 證言 (다섯수레, 1991) pp.22~24
    박영실, 韓國戰爭期 北韓의 南韓 主要人士 拉北 原因 分析 6?25 戰爭 61周年 記念 學術세미나 (統一部 主催 2011年 6月 21日) 發表 論文 pp.78~79
  49. 金日成(金日成)은 나의 弟子(弟子)다? 三八線(三八線) 넘는 최동오씨담(崔東旿氏談) Archived 2018年 3月 1日 - 웨이백 머신 民衆日報(民衆日報) 1948/04/22
  50. 元世勳(元世勳, 1887 ~ 1959) 韓國民族文化大百科 - 韓國學中央硏究院
  51. 金博士도 昨朝에 北行, 妨害를 一蹴 後 病軀 이끌고 發程 自由新聞 1948年 4月 22日 01面 - 김규식 訪北 同行者 名單 나옴.
  52. 《證言(證言) 拉北人士(拉北人士) 그때 그 瞬間 : 신경완(申敬完) 前(前) 北韓政務院 副部長(副部長) 公開》- 조선일보 連載 記事 (銃3回)
    拉北人士 死亡經緯 처음 밝혀져 金奎植 趙素昻 정인보 엄항섭 방응모 백관수氏等 亡命 前北韓 政務院 副部長 신경완氏 證言 朝鮮日報 1991.10.02. 1面
    신경완 前 北韓政務院 副部長 公開 (證言 拉北人士 그때 그瞬間 1) 爆擊被害 夜間 北送 처지면 山속버려 朝鮮日報 1991.10.02. 3面
    신경완 前 北韓政務院 副部長 公開 (證言 拉北人士 그때 그瞬間 2) 脫盡 김규식 入院要求 拒否當해 朝鮮日報 1991.10.03. 2面
    신경완 前 北韓政務院 副部長 公開 (證言 拉北人士 그때 그瞬間 3) 趙素昻 抗議斷食 끝에 숨져 朝鮮日報 1991.10.04. 2面
  53. 하지 中將(中將), 南北協商(南北協商)의 矛盾性 剔抉(矛盾性剔抉) 1948.04.07 京鄕新聞 1面
  54. Report of Weckerling, liaison officer with the 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유엔韓國委員團 連絡將校 웨컬링 將軍의 報告書) (文書番號 501.BB-Korea/6-2548, 發信 JACOBS, 受信 國務長官, 날짜 1948-06-25) pp.151~153
  55. 김영중(金英仲) 便, ≪레베데프 備忘錄 : 大邱, 每日新聞 1995.1.1.~2.28. 24回 連載記事 全文: 1947.5.14~1948.12.26 記錄≫ (濟州, 解凍印刷社, 2016) / (Naver 冊 : ISBN 480B170805082)
  56. 48年 南北政治協商은 蘇脚本 - 蘇 民政司令官 레베데프 備忘錄 中央日報 1994.11.15 綜合 1面
    <平壤의 4金會談>1. 레베데프 備忘錄 - 資料的 價値 中央日報 1994.11.15 綜合 8面
    <平壤의 4金會談>2. 金九 올 때까지 代表者會議 延期 中央日報 1994.11.16 綜合 8面
    <平壤의 4金會談>2. <解說> 蘇軍政 南韓情勢 손금보듯 中央日報 1994.11.16 綜合 8面
    <平壤의 4金會談>3. 蘇,김일성에 新聞報道 一一이 指示 中央日報 1994.11.17 綜合 8面
    <平壤의 4金會談>4. 白凡 "나는 김일성 만나러 왔을뿐" 中央日報 1994.11.21 綜合 8面
    <平壤의 4金會談>5. 蘇 朴憲永도 빠뜨려선 안된다 中央日報 1994.11.22 綜合 8面
    <平壤의 4金會談>6. 蘇 南代表에 總選後 政府樹立 約束 받아라 中央日報 1994.11.23 綜合 8面
    <平壤의 4金會談>7. 끝 조만식 南行 白凡 要求에 金日成 沈默 中央日報 1994.11.24 綜合 8面
    손세일 前 國會議員, 金九는 北韓 가서 大體 뭘 했나? Archived 2017年 4月 24日 - 웨이백 머신 朝鮮 Pub 2014-11-07
  57. 서중석, 新編 韓國史 52 大韓民國의 成立 > Ⅱ. 統一國家 樹立運動 > 2. 主要 政治勢力의 統一國家 樹立運動 > 4) 南北指導者會議-連席會議와 南北協商 > (2) 北의 連席會議 提案
  58. 신복룡, <光復 70周年 特輯 | 人物로 본 解放政局의 風景> 金九와 김일성의 다른 計算 : 南北協商 [주간조선 2371號] 2015.08.24
  59. 海外史料叢書 10卷 쉬띄꼬프일기 > 쉬띄꼬프 日記(飜譯) > 쉬띄꼬프 日記 Ⅱ部 > 1946年 12月 25日 :박헌영이 김규식에 對해 어떻게 行動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쉬띄꼬프일기 1946年 9月 9日  : 박헌영은 黨이 社會團體들을 어떻게 指導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60. 駐韓美軍司 2 > 2部. 1張. 韓國의 政治와 사람들, 첫 6個月 > 2. 共産黨 國史編纂委員會
  61. 許政. 《雩南 李承晩》 1970板. 太極出版社. p. 253-257쪽.  
  62. 양동안, 1948年의 南北協商에 關한 硏究 Archived 2018年 12月 14日 - 웨이백 머신 정신문화연구 2010.06 通卷119號 p.39
  63. 서울의 유어만(劉馭萬) 中國 總領事도 이番 北上한 1-2百 名 가운데 大部分이 南으로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 한다고 本國에 報告했다.
    劉馭萬 總領事의 代電 1948年 4月 20日 [番號] 第119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