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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의 氣象 淸나라의 威力 滿洲國의 侵奪 朝鮮族의 混沌|新東亞

한 글字로 본 中國 | 지린省

高句麗의 氣象 淸나라의 威力 滿洲國의 侵奪 朝鮮族의 混沌

吉 | 韓中이 함께 키워낸 沙果배

  • 글 · 寫眞 김용한|中國硏究가 yonghankim789@gmail.com

    入力 2017-05-11 18: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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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랴오닝의 대흥안령, 헤이룽장의 소흥안령, 지린의 長白山脈이 그리는 三角形 안에 랴오허(遼河)와 쑹화(松花)江이 흐르고 滿洲 벌판이 펼쳐져 있다. 지린은 滿洲의 地理的 中心이다. 古代王國 扶餘에서 近代 日帝의 滿洲國에 이르기까지, 滿洲를 掌握하려는 이들은 반드시 지린을 中心으로 삼았다. 發興과 沒落이 共存하는 곳, 그러나 民草는 고단하다.

    “東北三星(東北三省)을 왜 여름에 가?”
    中國人 親舊는 내 旅行 計劃을 듣고 疑訝하게 여겼다.
    “東北은 겨울에 눈과 얼음祝祭(?雪節)를 보러 가는 곳이라고. 여름에 가면 재미없어(沒意思).”

    나는 생각했다. ‘그래. 너희 한족들에게 東北은 눈 구경을 하러 가는 곳이겠지. 하지만 나는 高句麗 사람들이 어떤 땅에서 살면서 말을 타고 疾走했는지 보고 싶어. 너희는 決코 理解하지 못할 거야. 高句麗가 우리 韓民族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어떤 意味를 갖는지를.’

    지린(吉林)性은 高句麗 初期 根據地인 國內城이 있던 곳이다. 廣開土大王비가 있고, 民族의 聖山(聖山) 白頭山이 있다. 이런 곳을 돌아다니려면 추운 겨울보다는 北方의 바람이 爽快한 여름이 제格 아닌가!

    지린省의 略稱은 ‘吉할 길(吉)’字. 지린省 한복판에 있는 지린시는 쑹화江이 흐르는 丘陵地帶다. 滿洲語로 ‘江가의 마을’을 ‘지린우라’라고 불렀고, 이 말을 漢字로 音借限 ‘吉林?拉’를 줄여 ‘지린’이 됐다. 현지어를 音借해서 中國式 地名을 지었다는 點에서 구이저우(貴州)城과 類似하다. 두 地域 모두 한족의 손이 미치지 못하고 原住民들이 勢力을 떨치던 變更이었다.





    ‘江가의 마을’ 吉林?拉

    랴오닝의 대흥안령, 헤이룽장의 소흥안령, 지린의 長白山脈. 이 세 山脈이 그리는 三角形 안에 랴오허와 쑹화江이 흐르고 滿洲 벌판이 펼쳐져 있다. 지린은 滿洲의 地理的 中心이다. 古代王國 扶餘에서 近代 日帝의 滿洲國에 이르기까지, 滿洲를 掌握하려는 이들은 반드시 지린을 中心으로 삼았다.

    지린 北쪽의 平野는 漸漸 높아져 中國과 韓半島의 地理的 境界線을 이루는 長白山脈이 된다. 長白山脈의 最高峯 長白山, 卽 白頭山은 2750m 높이에서 滿洲 벌판을 威風堂堂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白頭山 天池(天池)는 鴨綠江, 豆滿江, 쑹화江이 發源하는 三綱支援(三江之源)이다. 하늘에 닿을 듯 威嚴 있고, 生命 같은 물을 아낌없이 보내주는 白頭山은 韓民族뿐 아니라 東北亞 여러 民族의 城山이요, 靈山(靈山)이다.

    扶餘는 지린 北部 平野地帶의 첫 主人公이었다. 진수의 ‘三國志 동이전(三國志 東夷傳)’李 말해주듯 扶餘는 “동이 地域에서는 가장 平平하고 앞이 탁 트여 있고, 五穀을 심기에 適當”韓 2000里 땅에 8萬 號(戶) 住民을 거느린 强國이었다. 扶餘는 紀元前 2世紀 初盤에서 3世紀 中盤까지 500年 동안 東北의 王子였으며, 494年 滅亡할 때까지 700餘 年을 存續했다.

    夫餘의 傳說的인 名聲은 韓半島까지 흘러들어 高句麗와 백제 모두가 扶餘의 後孫임을 自處했다. 特히 백제는 王의 星氏도 부여氏였다. 예컨대 近肖古王의 이름은 扶餘區, 義慈王의 이름은 扶餘椅子다. 백제 聖王은 國號를 ‘南夫餘(南扶餘)’로 바꾸고 泗沘城을 首都로 삼았다. 泗沘城은 오늘날 忠淸南道 扶餘郡 부여읍이 되었으니, 扶餘의 名聲은 21世紀에도 살아 있는 셈이다.

    한便, 扶餘의 한 무리가 南쪽으로 내려와 現地 土着勢力과 함께 세운 나라가 바로 高句麗다. 高句麗는 “傘下의 形勢가 險하고 堅固”韓 卒本(랴오닝省 환런縣)을 첫 都邑으로 삼았다가, 鴨綠江 流域의 國內城(지린省 지안)으로 首都를 옮겼다.



    扶餘, 高句麗, 백제

    高句麗의 터전은 扶餘와 크게 달랐다. 진수가 말했듯, 高句麗는 “높은 山과 깊은 溪谷이 많고, 平原과 湖水는 없다. 山과 溪谷을 따라 居住하고 溪谷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으므로 비록 힘써 農事지어도 배불리 먹기에는 不足하다.”

    진수는 부여인과 高句麗人에 對해 크게 다른 評價를 내렸다. 부여인은 “키가 크고 性格이 强靭하고 勇猛하지만 操身하고 淳厚해 다른 나라를 侵略해 掠奪하는 일이 없”는 反面, 高句麗人은 “性格이 사납고 急하며 掠奪과 侵略을 좋아한다.” 이는 兩國의 自然環境이 크게 달라 扶餘는 自體 生産力이 높아 自給自足하기 充分해 안으로 지킬 뿐 밖으로 遠征을 나가지 않아도 됐던 反面, 高句麗는 周邊 地域을 征服해 物資를 確保하는 것이 重要했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高句麗는 草創期부터 對外征服이 重要한 事業이었다. 都邑을 選定할 때는 “山과 물이 깊고 험”해 防禦에 유리한 것이 最優先 考慮事項이었고, 都城을 지을 때도 平地城 하나, 山城 하나로 두 個씩 지었다. 高句麗人은 平素에는 平地城에서 살다가 戰爭 時에는 酸性에서 籠城했다. 이처럼 高句麗는 徹底하게 戰爭을 念頭에 둔 國家였다.

    그러나 征服戰爭을 成長의 原動力으로 삼은 것은 危險性이 매우 컸다. 草創期에 周邊의 만만한 小菊을 칠 때는 問題가 없었지만, 어느 程度 成長하자 剛한 相對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勿論 가장 强力한 적은 中國이었다. 魏나라의 毌丘儉이 國內城을 陷落해 불을 질렀고, 5號16國試臺 前燕(前燕)의 慕容皝이 또 한 番 國內城을 破壞했다. 前緣에 慘敗한 고국원왕은 南部 征伐로 高句麗를 中興시키려다 逆風을 맞았다. 백제의 全盛期를 이끈 近肖古王은 高句麗軍을 擊退하고 平壤城을 包圍했으며 故國原王을 戰士시켰다.

    急迫한 危機 狀況에서 卽位한 小獸林王은 律令을 頒布하고 佛敎를 公認하는 等 一大 改革을 遂行했다. 高句麗는 三國 中 가장 먼저 古代 國家 體制를 整備해 反戰의 기틀을 마련했다. 때맞춰 廣開土大王이 나타났다. 廣開土大王은 不過 18歲에 卽位해서 20餘 年間 南으로 百濟, 北으로 거란·肅愼, 西쪽으로 後燕, 東쪽으로 東扶餘 等 東西南北을 縱橫無盡 征伐했다. 長壽王이 平壤으로 遷都하고 백제의 首都 漢城을 占領하며 高句麗는 全盛期를 맞았다.

    그러나 全盛期 다음은 衰退의 내리막길이다. 高句麗가 擴張되자 貴族들은 自己들끼리 征伐의 成果를 두고 다툼을 벌였고, 王權은 統制力을 잃고 弱化됐다. 이때쯤 中國은 5號16國이 끝나고 南北朝 時代가 되어 多少 安定을 찾았다. 또한 백제와 新羅는 同盟을 맺어 高句麗의 南進을 막고 逆攻을 펼쳐 高句麗의 漢江 流域을 빼앗았다.

    바보 溫達과 平岡公主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浪漫的인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에 注目하지만, 歷史的 價値가 있는 것은 이야기 뒷部分이다. 溫達 將軍은 “漢江 流域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悲壯하게 出戰했지만 結局 漢江을 되찾지 못하고 戰死한다. 사람들이 溫達의 屍身을 棺에 넣고 돌아가려 했으나, 여러 壯丁이 들려 해도 官은 꼼짝하지 않았다. 平岡公主가 와서 棺을 쓰다듬으며 “죽고 사는 것이 이미 決定됐으니 어서 돌아가도록 해요”라고 말하자 비로소 棺이 움직였다. 이 說話는 高句麗의 全盛期가 끝났음을, 高句麗人들이 漢江도 지키지 못하게 된 處地를 원통해했음을 알려준다.



    權力鬪爭

    外部의 挑戰은 더욱 거세졌다. 中國에서는 統一帝國 數·糖이 登場했고, 韓半島에서는 百濟와 新羅가 成長했다. 高句麗의 權力다툼은 끝내 淵蓋蘇文의 殺戮으로 이어졌다. 淵蓋蘇文은 反對派 貴族 180餘 名을 죽이고, 榮留王을 죽이고는 屍體를 토막 內 도랑에 버렸다. 當時 高句麗의 貴族 聯立 體制는 3年마다 最高의 貴族이 ‘代代로’에 올라 나라를 다스렸지만, 淵蓋蘇文은 ‘太大對盧’에 就任해서 平生 鐵拳統治로 反對派를 彈壓하고 莫强한 權勢를 누리며 아들들에게 높은 자리를 주었다.

    高句麗는 超强大國 數·黨의 侵攻을 막아냈지만, 傷處뿐인 榮光이었다. 防禦戰에 成功했을 뿐, 나라는 滿身瘡痍가 되었고 百姓의 살림은 거덜 났다. 淵蓋蘇文이 죽자 억눌려왔던 矛盾이 暴發했다. 게다가 아들들끼리 權力 다툼을 벌이자 高句麗는 안에서부터 무너졌다.



    大祚榮의 大長程

    그래도 700餘 年 東北의 强者였던 高句麗의 偉名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高句麗 復興運動이 잇따라 일어나자, 唐나라는 高句麗 遺民을 요서 영주에 끌고 와 살게 했다. 이 地域은 오늘날 랴오닝(遼寧)省 차오양(朝陽)으로, 베이징과 랴오닝城의 聖徒 선양(瀋陽)의 中間에 있는 곳이다. 唐나라가 滿洲를 掌握하며 高句麗人, 말갈족, 거란족 等 여러 北方民族을 이곳에 收容했다. 榮州 管理가 무거운 稅金을 거두는 것에 反撥해 거란족이 叛亂을 일으키자, 大棗影島 自身을 따르는 高句麗人·말갈족과 함께 叛亂에 同參한다.

    그러나 唐나라의 精銳軍을 相對하기에는 力不足이었다. 正面 對決에서 敗北한 大祚榮은 東쪽으로 逃亡쳤다. 中間에 천문령에서 黨의 追擊軍을 擊破한 後 다시 東쪽으로 被害 지린省 鈍化(敦化)에서 渤海를 建國했다. 榮州에서 長長 2000里, 現代의 道路網으로도 800餘 km에 達하는 大長程이었다. 渤海는 “高句麗의 옛 터전을 되찾고 扶餘의 風俗을 所有”했다며 扶餘와 高句麗의 後孫임을 自處했다.

    渤海 以後 滿洲는 요·금·원이 돌아가며 차지하다 明나라 때는 女眞族의 主舞臺가 됐다. 女眞族의 成長에는 朝鮮도 本意 아니게 한몫했다. 朝鮮은 成宗 때 全盛期를 맞이하며 漸漸 奢侈에 빠졌다. 담비 毛皮를 입는 게 流行이 되자 女眞族은 滿洲의 特産物인 담비를 팔고 代身 朝鮮의 소, 말, 철, 農器具, 소금 等을 사들였다. 이 物品들은 生活必需品인 同時에 戰略物資였다.

    燕山君 때 이미 “朝鮮 讓渡의 소가 모두 담비 毛皮를 사들이는 데 使用됐고, 그 結果 조선민은 말에 멍에를 메어 耕作하는 境遇도 있게 됐다.” 中宗 때에 이르면 소뿐만 아니라 말도 많이 流出돼 “예전에는 騎兵이 1000餘 名이나 됐지만 只今은 겨우 四五十 名밖에 되지 않아, 邊方에 事變이 생겨도 어떻게 막을 方法이 없는 地境에까지 이르렀다.” 國防力이 弱化되며 北方에서 女眞族이, 南方에서 倭寇가 氣勝을 부려 ‘邊方의 일을 對備한다’는 備邊司(備邊司)가 設置됐는데, 처음에는 非常 組織이었지만 外部의 侵略이 많아지자 나중에는 아예 常設機構化했다.

    朝鮮이 弱해지는 反面, 女眞族은 剛해졌다. 女眞族은 朝鮮의 소와 農器具로 農業生産力을 발전시켰고, 말과 鐵製 화살鏃을 쓰며 軍事力도 크게 强化했다. 壬辰倭亂 때문에 明나라와 朝鮮이 滿洲 地域의 監視·統制에 疏忽해지자, 누르하치라는 英雄이 나와 萬株를 席卷했다. 以後 滿洲族의 淸나라는 中國을 征服해 明나라의 뒤를 잇는 大帝國이 됐다.

    滿洲族은 滿洲를 神聖視해 外部人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封鎖했지만, 外部人들은 滿洲族이 滿洲의 寶物인 人蔘·毛皮·鹿茸 等을 獨占하려는 酬酌이라고 여겼다. 嚴格한 人口統制에도 不拘하고 많은 한족과 朝鮮人이 滿洲로 들어갔다. 中原과 朝鮮에 凶年이 한 番 들 때마다 滿洲의 人口가 부쩍 늘어났다.



    大恐慌과 滿洲 侵奪

    滿洲族, 한족과 朝鮮人들은 함께 滿洲를 일구며 滿洲의 住民이 됐다. 그러나 淸나라가 亡한 後 滿洲를 차지한 것은 日本이었다. 日本은 한발 빠른 近代化 德分에 ‘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이 되자(脫亞入歐)’던 目標를 어느 程度 達成했다. 1894年 淸日戰爭, 1904年 러일戰爭에서 勝利하며 아시아 最强이라고 뽐냈다. 1918年 日本은 第1次 世界大戰의 勝戰國이 되면서 獨逸의 租界地였던 中國 산둥省 칭다오를 얻고 戰爭 特殊로 好況을 누렸다.

    그러나 1929年 大恐慌이 全 世界를 덮쳤다. 先進國이던 美國·유럽도 큰 混亂에 빠졌으니, 基礎體力이 훨씬 弱한 日本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1931年 日本은 破局으로 치달았다. 가난한 農村은 딸을 팔아 ‘딸地獄’이 됐고, 全國에 온 家族의 同伴 自殺이 잇달았다. 日本人들은 쌀을 要求하며 示威를 벌였고, 勞動爭議도 最高潮에 이르렀다. 아시아 最高의 人材라고 自他가 共認하던 도쿄帝國臺 法學部 卒業生조차 겨우 26%만 就業할 수 있었으니 全體 失業率은 悽慘할 程度였다.

    當時 日本 軍部의 엘리트로서 ‘智略의 이시와라’로 불리던 이시와라 干支는 主張했다.

    “(日本의) 國政은 거의 限界에 到達했고, 人口·食糧 等 重要한 問題는 모두 解決策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廣闊한 領土와 資源이 있고, 中國大陸 侵掠의 根據地가 되는 滿洲·몽골 地域을 차지하는 것만이 日本이 살아날 唯一한 길이다.”

    1932年 日本은 滿洲國을 세웠다. 滿洲國은 中國의 統制를 받지 않는 ‘獨立國’이지만 植民地 朝鮮처럼 日本의 뜻대로 움직여야 했다. 이를 爲해 日本은 淸나라의 마지막 皇帝(宣統帝)였던 푸이를 滿洲國 皇帝로 세웠다. 이미 中國은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中華民國 賤하였다. 푸이는 아무런 힘이 없으면서도 滿洲에서 創業한 淸나라 皇室의 嫡統이므로, 日本이 찾던 ‘바지 社長’ 노릇에 적합했다. 힘이 없으니 日本에 依存할 수밖에 없고, 淸나라의 天子였으니 滿洲國을 代表하기에 完璧했다.


    ‘바지 社長’ 푸이

    푸이는 淸나라 皇室을 中興하고자 自充手를 뒀다. 푸이는 主張했다. “짐, 日本 天皇陛下와 精神一體다.” 따라서 “滿洲國 皇帝에 불충한 者가 있으면 그것은 곧 日本 天皇에 對한 不忠이고, 日本 天皇에 불충한 者가 있으면 바로 滿洲國 皇帝에 不忠하는 것”이다. 푸이는 關東軍의 日本 天皇에 對한 忠誠心을 利用해 關東軍이 自身에게 忠誠하길 바랐다. 그러나 關東軍이 푸이에게 충성할 理 없었다. 오히려 푸이는 中國人들의 自尊心을 긁으며 ‘賣國奴’가 됐다. 안팎의 支持를 모두 잃은 敗着이었다.

    滿洲國의 以上은 매우 華麗했다. 滿洲에 사는 모든 民族이 協力하고 和合해(五族協和) ‘共存共榮’하는 ‘王都樂土’를 꿈꿨다. 滿洲國 弘報處는 自畫自讚을 아끼지 않았다.

    “滿洲國의 建國以上과 建國精神은 世界 歷史에 그 類例를 찾아볼 수 없을 程度로 崇高한 것이어서…(중략)…세계의 政治學者는 滿洲國을 위해 새로운 政治學說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어이없는 自畫自讚이지만, 悲慘한 現實에 厭症을 느낀 많은 日本人이 歡呼했다. 많은 理想主義者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世上을 만들 꿈을 품고 滿洲 凍土에 뼈를 묻었다. 오늘날 적지 않은 進步的 日本人조차 “그래도 滿洲國은 특별했다”며 滿洲國의 以上이 挫折됐음을 안타까워하는 理由다.

    그러나 以上과 現實은 悲慘할 程度로 달랐다. 모든 일은 關東軍에 依해 決定됐다. 한 프랑스 作家는 萬推理아(만주)를 ‘마느캉추리아(마네킹 王國)’로 불렀다. 프랑스語로 ‘마느킹(mannequin)’은 自己 意志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남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사람을 隱喩한다.

    實權을 쥔 日本人들은 滿洲 現地의 事情을 無視하고 獨斷的으로 일을 處理했다. 滿洲國은 後進國이므로 先進國 日本의 標準을 따라야만 한다고 主張했다. 이에 한 滿洲人은 抗辯했다. “晩計(滿洲系 人士)는 無能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럽 政治學을 日本 學校에서 飜譯해 滿洲에 가지고 와서 組織의 網으로 덮어씌우는 것보다 晩計 쪽이 萬人에 對해서는 더 잘 알 것이다.”

    民族差別은 日常까지 파고들었다. 電車를 탈 때 日本人만 特等칸에 탈 수 있었고, 中國人은 普通칸에만 탈 수 있었다. 滿洲國은 日本에서 온 移住民들에게 땅을 주기 위해 現地 中國人·朝鮮人 農民들이 애써 일군 땅을 强制로 歇값에 買收했다. 農民들은 울부짖었다. “匪賊(匪賊)은 金品을 掠奪하지만 땅까지 빼앗지는 않는다.”



    匪賊보다 무서운 官匪

    萬株가 兵站基地化瑕疵 收奪은 더욱 더 苛酷해졌다. 滿洲國은 生産費의 半값도 안 되는 價格으로 穀食을 사들였고, 온갖 物資를 徵發했다. 많은 農民이 집뿐만 아니라 옷과 이불까지 빼앗긴 채 零下 40℃의 酷寒을 맞아야 했다. “눈(雪)은 칼과 같이 벌거숭이 알몸을 亂刺했다. 온 天地에 怨聲이 가득했다. 토비(土匪, 盜賊)보다 더 무서운 것이 館婢(官匪), 法匪(法匪)다.”

    日本과 他民族의 不和 앞에 한 關東軍 幕僚가 吐露했다. “滿洲는 일·만 提携의 나라가 아니라 일·만 鬪爭의 나라다.” “只今 萬若 일·러 戰爭이 일어난다면 日本軍 가운데 10個 師團 程度는 滿洲人을 相對로 싸워야 한다.”

    그런 狀況에서도 日本은 滿洲國의 資源에 依支해 第2次 世界大戰을 遂行했다. 1932年부터 1944年 사이에 日本은 2億2300餘萬t의 石炭, 1100餘萬t의 銑鐵, 580餘t의 鐵鋼을 東北에서 掠奪했다. 그러나 끝내 日本은 敗亡했고, 1945年 8月 17日 滿洲國은 解體돼 13年의 짧은 歷史를 마쳤다.

    “낮에는 關東軍 司令部가 滿洲國을 支配하고, 밤에는 아마카스가 支配한다”던 幕後의 實力者 아마카스 마사히코는 遺言과 같은 한마디를 남기고 靑酸加里를 마셨다.

    “큰 賭博, 元金도 利子도 없이 빈털터리.” 한판 賭博에 모든 것을 잃은 滿洲國과 日本의 處地를 正確히 꼬집은 말이었다.
    日帝가 낳은 副産物 中 하나는 朝鮮族이다. 日帝强占期 前後로 많은 朝鮮人이 滿洲로 갔다. 더러는 凶年의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더러는 出世하기 위해, 더러는 日帝에 맞서 싸우러 갔다. 그리고 더러는 日帝가 滿洲를 開發하기 위해 奴隸처럼 强制로 끌고 갔다.



    朝鮮族의 運命

    ‘지난날 江가에서 말 달리던 先驅者’가 ‘일송정 푸른솔’ 아래서 ‘한줄기 해란강은 千年 두고 흐르는’ 風景을 지켜보던 곳도 지린省이고, 獨立運動史에서 길이 빛나는 靑山裏·鳳梧洞 戰鬪가 벌어진 곳도 지린省이다. 악에 받친 日帝가 大虐殺(間島 慘變)을 벌인 곳도 지린省이다.

    朝鮮族이 日帝의 收奪에 시달리다 艱辛히 解放되자마자 6·25戰爭이 터졌다. 中國은 이 戰爭을 第2의 壬辰倭亂으로 보았다. 海洋勢力이 韓半島를 발板으로 大陸에 進出하려고 하고 있으니, 大陸이 아닌 韓半島를 戰場 삼아 海洋勢力을 逐出하는 것이 中國에 유리하다고 判斷했다. 이에 따라 中國은 6·25戰爭을 ‘抗美援朝(抗美援朝) 戰爭’, 卽 美國에 對抗하고 朝鮮을 돕는 戰爭으로 規定하고, 朝鮮族에게 “曺國이 米帝의 侵略을 當하고 있으니 戰爭에 支援하라”고 呼訴했다. 많은 朝鮮族 靑年이 中國 人民支援軍에 參戰했다. 通譯이 可能한 朝鮮族은 非戰鬪要員으로도 매우 重要한 資源이었다.

    戰爭이 끝난 다음에도 살아남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朝鮮族이 苦生 끝에 허허벌판 荒蕪地를 艱辛히 푸른 논으로 만들었더니, 人民公社가 모든 땅을 接受했다. 文化大革命이 일어나자 參戰했던 朝鮮族은 ‘北韓 間諜’이나 ‘南朝鮮 特務’라는 陋名을 쓰고 人民裁判을 받았다. 朝鮮族 大多數가 가난을 못 이겨 滿洲에 온 貧農 出身이었음에도 ‘朝鮮에서 地主였던 反動分子’라는 謀陷을 받기도 했다.

    酷毒한 試鍊 속에서도 朝鮮族은 固有의 文化와 言語를 꿋꿋하게 지켰다. 언젠가는 ‘曺國’의 품에 안겨 幸福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希望을 간직해서였을까. 朝鮮族 作家 里혜선의 表現대로 “高國文이 처음 열렸을 때만 해도 사람들의 트렁크 속에는 그리움 外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漸次 經濟에 눈을 뜬 朝鮮族은 淸心丸을 팔거나 일해서 돈을 벌려고 韓國에 오기 始作했다. “1989年부터는 ‘뽕도 따고 님도 보고’ 式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움 外에도 비즈니스 計劃이 더 들어 있었다.”



    韓國의 二重性

    再會의 感動은 瞬息間에 끝나고, 어느새 미움과 葛藤이 자라났다. 草創期에 일하러 온 朝鮮族은 相當數가 不法滯留者여서 基本的인 人權을 保護받지 못했다. 勞動量에 비해 턱없이 낮은 賃金을 제때 받기라도 하면 그나마 多幸이었다. 賃金 滯拂은 茶飯事고 아예 떼어먹히는 일도 흔했다. 不法滯留者 身分이어서 權利를 剝奪당하고도 罪를 지은 듯 숨어살아야 했다.

    “병들어 죽어도 묻힐 곳이 없고, 賃金 滯拂을 當하고도 申告할 곳이 없고, 産災 被害를 當해도 法을 利用해 自身을 保護할 수 없고, 檢問당하면 빚더미를 진 채 强制 出國을 當하고, 差別을 當해도 堪耐하기만 해야 한다.”

    朝鮮族은 貧富葛藤, 勞使葛藤을 겪을 뿐만 아니라 基本的인 人權도 없고 숨도 便하게 쉬고 살 수 없었다. ‘故國이고 同胞인데 너무하네’라는 怨望이 자랐다. 朝鮮族은 韓國과의 첫 만남인 出入國審査臺에서부터 差別을 느꼈다. 審査官이 美國 僑胞가 오면 반색을 하면서, 中國 朝鮮族이 오면 人相을 찌푸린다며 不滿을 吐露했다.

    “中國 朝鮮族이나 美國 朝鮮族이나 다 똑같은 사람인데 差別하지 마세요!” “富者집에 시집간 딸만 딸이고, 가난한 집에 시집간 딸은 딸도 아닌가요?”

    그런데 實際로 大韓民國은 朝鮮族을 말로만 同胞라고 했을 뿐 現實的으로 同胞로 여기지 않았다. 韓國의 在外同胞法은 “1948年 大韓民國 樹立 後에 나간 사람”만을 同胞로 認定했기에 日帝强占期에 移住한 朝鮮族은 法的으로 同胞가 아니었다. ‘在外同胞法이냐, 除外(除外)同胞法이냐’라는 批判까지 나왔다.

    2001年 ‘在外同胞醫出入國과법적지위에관한법률(재외동포법)’이 憲法裁判所의 憲法不合致 判決에 따라 2004年 法이 改正됐으나, 정작 法務部의 施行令은 ‘不法滯留 다발 國家’ 同胞들의 自由 往來를 制限했기 때문에 이름뿐인 法 改正이었다. 2007年 訪問就業制와 2008年 在外同胞法 改正을 통해서야 朝鮮族은 비로소 同胞로 인정받은 셈이다.

    2015年 現在 韓國에 滯留하는 外國人은 約 190萬 名이고, 그中 折半인 95萬 名이 中國人이다. 또 中國人 中 韓國系 中國人은 63萬 名으로 全體 外國人 中 33%를 차지한다. 卽, 韓國에 사는 外國人 3名 中 1名은 韓國系 中國人이다. 어느새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되었다.


    두 마리 도롱뇽

    그러나 그 이웃에 對한 우리의 視線은 如前히 곱지 않다. 檢索 엔진에서 ‘朝鮮族’이라고 入力하자마자 華麗한 自動檢索語들이 튀어나왔다. 朝鮮族 女子, 朝鮮族 犯罪, 朝鮮族 도우미, 朝鮮族 殺人, 朝鮮族 事件事故…. 朝鮮族이 韓國을 本格的으로 찾아오기 始作한 지도 於焉 20年이 넘었지만, 朝鮮族에 對한 視線이 如前히 곱지 않음을 如實히 보여주는 聯關檢索語들이었다.

    朝鮮族은 法的으로나 現實的으로나 同胞 取扱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朝鮮族 作家 금희는 小說 ‘世上에 없는 나의 집’에서 朝鮮族이 中國人·韓國人에게 느끼는 異質感을 吐露한다.

    “(韓國人과 朝鮮族은) 아주 많이 닮아 있었지만, 같은 背景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 곧 分化의 危機에 놓인 두 마리의 도롱뇽 같아서 도무지 같은 視角으로 함께 現實을 解釋할 수 없었다. 反面 (中國人과 朝鮮族은) 애初부터 한 背景 속에서 살고 있는 오리와 닭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時代와 背景을 充分히 共感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不拘하고 가장 個人的인 習慣과 趣向을 송두리째 共有할 수는 없었다.”

    韓國과 中國 中에서는 그래도 中國이 더 包容力이 있다. 韓國人은 朝鮮族더러 中國 사람 다 됐다, 中國 냄새가 난다고 非難한다. 그러나 “정작 中國 냄새의 震源地인 이곳(中國)에는 하나가 아니라 몇 十 個의 냄새가 뒤죽박죽 섞여 있어서 사람들은 누구의 냄새가 어떠한지 別로 神經을 쓰지 않았다. 냄새가 어딘가 自己의 것과 다르다고 여기면서도 於此彼 ‘中國’ 냄새라는 것에서는 同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朝鮮族은 法的으로 ‘中國 公民’이다.



    옌볜, 227萬 中 朝鮮族 80萬

    改革開放 以後 朝鮮族 社會는 큰 轉換期를 맞고 있다. 改革開放 前에는 移動이 자유롭지 못해서 오히려 朝鮮族 社會를 維持하기 쉬웠다. 그러나 改革開放 以後 移動이 자유로워지자 젊은 層은 더 나은 機會를 찾아 中國 大都市나 海外로 나가는 反面, 옌볜 等 朝鮮族이 많이 살던 地域에 한족이 大擧 移住해오며 朝鮮族 立地는 漸漸 더 좁아지고 있다. 2015年 現在 옌볜 朝鮮族自治州의 227萬 人口 中 80萬 名이 朝鮮族이다. 自治州가 되려면 少數民族의 人口 比率이 30% 以上이라야 하는데, 옌볜은 朝鮮族 比率이 35%에 不過해 아슬아슬하게 自治州 자리를 지키고 있다. 더욱이 이 比率은 繼續 減少 中이다.

    또한 中國 各地로 흩어진 朝鮮族은 예전처럼 朝鮮族끼리 뭉쳐 朝鮮族 社會를 이루기보다는 中國人과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이런 家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朝鮮族임을 自覺하지 못하고 中國人으로서 산다.

    中國이 弱했을 때 東北은 外勢 侵略의 橋頭堡였지만, 中國이 强해진 只今은 世界로 뻗어갈 수 있는 舞臺다. 그러나 지린省은 크나큰 脆弱點을 갖고 있다. 東海와 매우 가깝지만 港口가 없다. 不凍港을 탐내던 러시아가 第2次 阿片戰爭에서 勝利하고 1860年 베이징조약을 締結해 沿海州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東方을 征服하라’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세워 太平洋 進出의 據點으로 삼았다. 反面 지린省은 港口가 없어 랴오닝의 다롄을 利用해야 했다. 滿洲 한복판에서 港口까지 가는 物流費가 만만치 않아 오늘날 지린은 東北3星 中에서도 가장 落後한 地域이 되었다.


    港口 빌려 바다로…

    中國은 이 難關을 打開하기 위해 ‘港口를 빌려 바다로 나간다(借港出海)’는 戰略을 樹立했다. 北韓의 羅津·淸津港을 빌려 東海로, 太平洋으로 나가겠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中國은 지린省에서 北韓으로 가는 交通路인 창춘-지린-豆滿江 地域을 開發하는 ‘창지투(長吉圖) 開放 善道具’ 事業을 進行 中이다.

    于先 中國·北韓·러시아 3字 交易이 期待된다. 2011年 豆滿江의 國境都市인 지린省 훈춘을 訪問한 김연철 仁濟大 統一學部 敎授는 말했다.

    “러시아는 光學이 發達해 있어 望遠鏡이나 顯微鏡 等이 싸고 質이 좋다. 우리 一行 모두 러시아製 軍用 望遠鏡을 하나씩 샀다. 北쪽 地域을 잘 觀察하려고 中國 땅에서 러시아製 望遠鏡을 사니, 이곳이 세 나라가 얽혀 있는 國境都市라는 것이 實感났다.”

    여기에 韓國과 日本, 東南亞까지 加勢한다면 羅津港은 東北亞에서 손꼽히는 港口가 될 수 있고, 지린省 亦是 飛躍的으로 發展할 수 있을 것이다.

    2016年 이종석 世宗硏究所 硏究委員은 北·中 國境地帶를 踏査한 後, 유엔의 對北 經濟制裁에도 不拘하고 北·中 交易은 活潑하고, “特히 사드(THAAD·高高度미사일防禦體系) 配置 決定 以後 北·中 交易이 顯著하게 늘어나는 趨勢라는 것이 現地 貿易 關係者들의 共通된 評價였으며, 單純한 外部 觀察만으로도 北韓 經濟 狀況의 好轉 趨勢를 분명하게 感知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中國과 北韓의 政治的·經濟的·安保的 關係는 매우 끈끈하고, 지린省과 羅津港은 그 關係의 中心軸이다.

    里혜선의 ‘沙果배 아이들’은 朝鮮族이 沙果배를 키워내는 事緣을 담은 童話다. 朝鮮의 沙果나무는 滿洲와 風土가 맞지 않았다. 그러자 朝鮮族은 中國의 배나무와 朝鮮의 沙果나무를 接地해 沙果배를 탄생시켰다. 沙果배는 “沙果같이 예쁘고 달고, 배같이 물이 많고 시원”韓 “이 世上에 둘도 없는 새 과일”李 됐다. 里혜선은 沙果배에서 朝鮮族 自身의 모습을 發見한다. 朝鮮族은 中國의 風土에서 朝鮮의 文化를 품고 자란 獨自的인 存在임에 矜持를 느낀다. 事實은 朝鮮族의 故鄕인 지린省 自體가 中國과 韓國이 함께 길러낸 沙果배와 같은 땅이리라.




    김용한
    ●? 976年 서울 出生
    ●? 연세대 物理學科, 카이스트 Techno-MBA 專攻
    ●? 前 하이닉스반도체, 國防技術品質院 硏究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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