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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慈寵을 産業化勢力과 民主化勢力 和合의 求心點으로 만들겠다”|신동아

焦點 인터뷰

“慈寵을 産業化勢力과 民主化勢力 和合의 求心點으로 만들겠다”

就任 1年 김경재 한국자유총연맹 總裁

  • 최호열 記者|honeypapa@donga.com

    入力 2017-05-04 12: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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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名譽와 職分에 맞게 살아왔을 뿐”
    • ‘朴正熙와 김대중이 꿈꾸던 나라’ 만들고 싶다
    • 光化門廣場에 李承晩, 朴正熙, 김영삼, 김대중 銅像 建立 構想
    • 太極旗 集會에 自由總聯盟 組織 動員한 적 없다
    • 統一先鋒隊 100萬 名 組織해 北韓 自由化 이끌 것
    지난해 10月부터 올 3月까지 이어진 朴槿惠 前 大統領 彈劾 局面에서 韓國自由總聯盟(以下 自由總聯盟)은 前例가 없을 만큼 言論에 많이 오르내렸다. 김경재(74) 總裁 때문이다. 一部 言論에서는 太極旗集會 參與者들의 ‘組織 動員’과 ‘金品 提供’ 疑惑을 提起하며 그 背後로 自由總聯盟을 指目했다.

    또한 김경재 總裁가 太極旗集會에서 한 發言에 對해 고 盧武鉉 前 大統領 側이 ‘名譽毁損 嫌疑’로 告訴했다. 以外에도 金 總裁가 自由總聯盟 會長에 當選된 것에 對해 靑瓦臺 介入과 不正選擧 疑惑이 提起됐는가 하면, 金品收受·不正人事 等 여러 疑惑이 잇따라 提起됐다. 事實이라면 金 總裁는 말 그대로 ‘積弊淸算 對象’의 象徵이라 할 수 있다.

    ‘신동아’는 金 總裁에게 이러한 疑惑들에 對해 質疑書를 보냈다. 그는 “내 名譽를 더럽힐 處身을 한 적이 없다”며 堂堂하게 인터뷰에 應했고, 疑惑에 對한 解明과 함께 지난 1年 동안 自由總聯盟을 이끌어온 所懷와 앞으로의 비전을 들려주었다. 김경재 總裁는 지난해 2月 第16代 者總會長 選擧에서 當選, 4月 正式으로 就任했다. 올 4月로 꼭 1年이 됐다.



    金大中에서 朴槿惠로

    잘 알려져 있듯이 김경재 總裁는 代表的인 김대중(DJ)맨이다. 1971年 김대중 신민당 大選候補 宣傳企劃委員으로 政界에 入門해 維新 體制下에서 在野運動을 하다 16年間 美國에서 亡命生活을 하기도 했다. 이때 現代政治史에 한 劃을 그은 김형욱 回顧錄 ‘革命과 偶像’을 펴내기도 했다. 1987年 歸國, 政界에 復歸해 15臺와 16代 國會議員을 지냈다. 18代 大選 때는 박근혜 候補 캠프에서 國民大統合委員會 首席副委員長을 맡았으며, 2015年 말까지 靑瓦臺 弘報特報를 지냈다.



    -지난 大選 때 한광옥 現 大統領祕書室長과 함께 박근혜 候補를 支持해 話題를 모았다.
    “當時 동교동系 人士 20餘 名을 데리고 왔다. 박근혜에게 온 理由는 김대중 大統領 時節 하지 못한 꿈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個人的 政治 欲心은 全혀 없었고, 오직 南北이 잘 어울려 하나가 됐으면 좋겠다는 念願뿐이었다. 美國 亡命生活을 하며, 돌아와 政治生活을 하며 極左와 極右를 包含해 別別 사람을 다 만났다.

    그러면서 느낀 게 ‘이데올로기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이다. 國民을 어떻게 먹여 살리느냐의 差異다. 只今도 이데올로기 때문에 싸우는 건 地球上에서 우리밖에 없다. 世界的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더 以上 서로 죽기살기로 싸우지 않고 南과 北이 共存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南과 北이 共存하는 나라?
    “첫 段階로 南韓은 平壤에, 北韓은 서울에 서로 大使를 派遣하는 것도 方法이다. 窮極的으로는 1國家 2體制로 가는 것이다. 지난해 初 ‘朴正熙와 김대중이 꿈꾸던 나라’를 펴냈는데, 그 冊을 쓰면서 느낀 게 朴正熙 前 大統領이 構想한 統一 方案과 金大中 前 大統領이 追求한 1國家2體制 統一 方案이 共通點이 많다는 것이었다. 1國家2體制가 되면 北韓 住民의 人權도 더 많이 保護되고, 우리나라도 지나친 反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保守政黨인 새누리黨의 박근혜 候補가 執權하면 可能하다고 본 것인가.
    “極과 極은 통한다. 美國과 中國의 修交만 해도 中國에 友好的이던 美國 민주당은 ‘죽의 帳幕’을 열지 못했다. 오히려 强勁派인 공화당 닉슨 大統領과 키신저가 열었다.”


    나는 自由主義者

    自由總聯盟은 1954年 아시아民族反共聯盟으로 創立해 지난 60餘 年間 大韓民國의 唯一한 理念團體이자 代表的인 國民運動團體로 자리매김해왔다. 1989年 4月 韓國自由總聯盟으로 名稱을 바꾼 後 ‘反共’보다는 自由民主主義와 市場經濟 體制를 擁護·발전시키며 國家 正體性을 바로 세우는 일에 注力해왔다. 全國 17個 市·道 支部와 228個 市·郡·區 支會, 3500餘 邑·麵·桐 分會와 海外支部, 職能團體로 이뤄져 있으며, 會員 數 350萬 名이 넘는 國內 最大 組織이다.

    -自由總聯盟은 保守團體의 맏兄 格으로 불린다. 그래서 金 總裁가 出馬했을 때 保守層에서 適任者가 아니라는 말도 나왔다.
    “그렇다고 내가 左派는 아니지 않은가. 나는 自由民主主義者다. 나도 自由總聯盟이 ‘꼴통保守’ 集合所인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 無作定 共産主義 反對만 외치는 世上은 지났다. 새로운 時代에 맞춰 改革, 革新이 있어야 한다. 내가 그걸 할 수 있다고 自信한다.”

    -靑瓦臺 弘報特報를 그만두고 自由總聯盟 會長에 挑戰하게 된 契機는.
    “元來는 20代 總選에서 比例代表 出馬를 準備했다. 그런데 政治란 게 아사리판 같아서 選擧 때가 되면 온갖 루머가 亂舞한다. 자칫하면 내 얼굴에 먹漆을 할 수도 있겠더라. 그때 後輩들이 ‘自由總聯盟 會長을 하시는 게 어떠냐’고 勸誘했다.”

    그의 會長 出馬에 對해 靑瓦臺가 介入했다는 疑惑이 提起된 바 있다. 그에게 “後輩들이란 靑瓦臺에 있는 後輩들이냐”고 單刀直入으로 물었다. 金 總裁는 “全혀 아니다. 黨에 있는 後輩들”이라며 具體的 失明까지 밝혔다.
     
    -當時 조윤선 靑瓦臺 政務首席이 自由總聯盟 選擧에 關與했다는 報道도 있었는데.
    “趙允旋은 까마득한 後輩인데 敢히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겠나. 靑瓦臺와는 全혀 상관없는 決定이었다. 오히려 當時 李秉岐 祕書室長이 ‘(허준영 會長과 맞붙는데) 되겠습니까’ 하고 걱정했을 程度였다.”



    기울어진 選擧판

    -行政自治部에서 選擧에 過度하게 介入했다는 是非가 있었다.
    “選擧 過程에서 허준영 前 會長 側도 不滿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처음엔 荒唐했다. 기울어진 選擧판이었기 때문이다. 選擧期間 前에는 代議員과 接觸 自體가 不法이었고, 열흘間의 選擧 期間 동안에도 電話는 할 수 있지만 만나는 건 禁止였다. 現職 會長은 會長 業務라는 理由로 選擧 前에 代議員들을 直接 만나는 것은 勿論 食事 待接까지 可能했다. 現職 會長에게 絶對的으로 유리한 構造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겼나.
    “代議員을 直接 만날 수 있는 唯一한 機會가 投票 直前 30分 演說하는 時間이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한 말이 이거였다. 只今까지 自由總聯盟을 直接 찾은 大統領이 딱 두 사람 있다. 朴正熙와 金大中이다. 내가 두 분에 對한 冊을 쓰면서 느낀 게 ‘産業化’의 象徵 朴正熙 大統領과 ‘民主化’의 象徵 김대중 大統領이 꿈꾸던 나라가 結局은 같은 國家였다. 나도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自由總聯盟이 앞장설 수 있도록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그게 共感을 얻은 것 같다.”


    100萬 統一先鋒隊 陽性

    -自由總聯盟에서 서울 光化門廣場에 李承晩, 朴正熙, 김영삼, 김대중, 歷代 大統領 네 분의 銅像 設立을 構想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光化門은 大韓民國의 中心이다. 只今이 朝鮮時代도 아닌데 光化門廣場에 朝鮮王朝를 代表하는 李舜臣과 世宗大王만 있는 것도 異常하지 않나. 大韓民國을 象徵할 大統領 銅像을 세우는 게 當然하다. 그런데 어느 한 大統領 銅像만을 세울 수 없는 게 現在 우리나라 狀況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正體性이라 할 수 있는 李承晩과 朴正熙, 김영삼, 김대중 銅像을 함께 세우자는 것이다.”

    -왜 그 네 분인가.
    “우리나라의 産業化 勢力과 民主化 勢力이 和解하는 게 이 나라의 自由民主主義를 살리는 重要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네 분의 肯定的인 面을 잘 統合하는 게 大韓民國이 갈 方向이다. 또한 네 분의 大統領 銅像을 함께 세우면, 例를 들어 朴正熙 大統領을 보러 온 사람이 김대중 大統領도 보고 갈 것이다. 그러면서 産業化 勢力과 民主化 勢力이 和合할 수 있고, 國民도 兩쪽을 다 理解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參考로, 21世紀는 나중에 判斷하고 20世紀에서 끊자는 생각에 盧武鉉 前 大統領부터는 除外했다.”

    -就任한 지 1年이 지났다. 그동안 活動을 自評한다면.
    “지난 1年 동안 自由總聯盟 組織의 結束力을 다지는 데도 注力해왔다. 또한 自由總聯盟 中央會 代表가 언제부터인지 會長이었다. 이를 行政自治部와 協議해 正式으로 定款을 改正해 總裁로 格上시켰다. 自由總聯盟의 位相을 한 段階 높인 셈이다. 그리고 國家的으로도 많은 懸案이 있어서인지 精神없이 지나갔다.”

    -사드 配置 問題와 北核 威脅 等 유난히 安保 이슈가 많았다.
    “사드 配置와 關聯해 ‘사드 配置는 大韓民國 安保를 위한 不可避한 選擇이자, 大韓民國 生存의 問題’라는 原則 아래 다양한 活動을 벌였다. 7月 27日 光化門에 5000餘 名이 結集해 ‘사드 配置 支持’ 汎國民大會를 여는 等 全國的으로 12回에 걸쳐 決意大會와 記者會見을 갖기도 했다.

    또한 北韓이 核實驗이나 미사일 發射를 할 때마다 全國的으로 國民 安保意識을 結集하는 데 注力했다. 特히 北核과 關聯해서는 核武裝의 必要性을 先導的으로 提案했고, 다가온 安保危機와 사드 配置의 必要性에 對한 國民 輿論을 모으는 데 相當部分 成果를 거뒀다는 評價를 받고 있다.”

    -統一先鋒隊라는 것을 組織했다고 알고 있다.
    “北韓이 열릴 境遇 먼저 들어가 活動할 일꾼이 必要한데, 우리가 가장 適任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就任 初부터 統一先鋒隊 100萬 名을 組織하는 데 注力하고 있다. 北韓의 民族統一戰線과 비슷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統一先鋒隊는 北韓 社會가 열리면 北韓에 가장 먼저 들어가서 北韓의 自由化를 위해 일하게 된다. 무엇보다 北韓의 場마당을 活性化하는 데 寄與하는 等 北韓의 自由民主化와 市場經濟를 여는 데 求心點 役割을 할 것이다.”


    憲裁 評決 尊重

    -좀 더 具體的으로 說明해달라.
    “北韓 體制와 社會, 文化 全般에 對한 地域別·分野別 專門家를 養成해나갈 計劃이다. 이를 위해 統一先鋒隊에 對한 敎育을 꾸준히 進行할 計劃이다. 特히 京畿道는 平安道, 世宗市는 平壤 等 自銃 支部別로 北韓 地域을 하나씩 맡아 그 地域 特徵에 맞춰 도울 수 있는 方法을 硏究하고 있다. 以外에도 어린이들 育兒, 우리 企業이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일도 硏究하고 있다. 北韓 住民들의 人間的인 權利를 지키고 自由와 平和를 같이 즐길 수 있게 하는데 우리가 따뜻한 案內者, 協助者가 되겠다는 것이 모토다.”

    -現在 가장 力點을 두고 推進하는 事業이 있다면.
    “統一과 安保 關聯 敎育 分野를 더욱 擴大하고 地域社會와 國家에 寄與하는 人材를 養成하기 위해 橫城郡 옛 靑少年修鍊院 建物을 20年間 代父받아 聯盟의 硏修院으로 리모델링을 推進하고 있다. 올 下半期에 開館, 運營할 計劃이다. 이 地域은 6·25戰爭의 最大 激戰地였으며, 서울-江陵 高速鐵道와 第2嶺東高速道路 開通에 따른 交通便宜 等 立地 與件이 優秀해 앞으로 統一先鋒 國民運動의 求心點이자 對國民 安保敎育의 産室로 活用될 것으로 期待된다. 會員뿐 아니라 國民들도 利用할 수 있도록 많은 敎育 프로그램과 行事를 企劃해 橫城郡과 江原道 發展에도 寄與할 計劃이다.”

    -彈劾 政局에서 太極旗集會에 熱心히 參席했다. 이 때문에 野黨으로부터 非難도 많았다.
    “諮問辯護士에게 確認해보니 憲法裁判所 評決이 나오기 前까지는 贊反을 披瀝할 수 있다고 하더라. 나는 公務員 身分이 아니니까 個人 資格으로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個人的으로 彈劾 事由가 될 수 없다고 判斷해 參與했다. 하지만 憲裁 評決 以後엔 그것과 關聯한 말을 一切 안 하고 있다. 個人的으로는 憲裁 評決에 問題가 있다고 보지만, 決定을 尊重해야 하기 때문이다.”

    -自由總聯盟에서 太極旗 行事를 組織的으로 動員했다는 疑惑이 提起됐다.
    “全혀 事實이 아니다. 3月 1日 行事는 우리가 오래前부터 하던 年例行事였다. 그 行事에 彈劾을 反對하는 사람들이 個人 資格으로 參與해 發言하는 것까지 뭐라고 할 수는 없다. 나머지 太極旗集會는 個人 資格으로 參與한 것이고, 聯盟 次元의 組織 動員은 全혀 없었다. 組織 動員을 하려면 큰돈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聯盟에서 돈이 나가야 하는데, 나중에 會計監査를 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것이다.”



    事實과 다른 疑惑들

    이쯤에서 金 總裁를 둘러싼 疑惑에 對해 물었다.
    -‘法人카드 過多 使用 嫌疑 等으로 解任된 前任 事務總長에게 餞別金을 7000萬 원이나 주었다’는 所聞이 들린다.
    “잘못 알려진 事實이다. 前任 事務總長은 自身에 對한 抑鬱한 루머가 떠도니까 自尊心 傷해 辭表를 쓴 것이지 解任된 게 絶對 아니다. 法人카드 過多 使用도 調査 結果 解任될 程度의 事案은 아니었다. 額數도 많지 않았고 使用 內譯을 다른 사람 名義로 記載한 건 그럴 事情이 있었다고 들었다.

    聯盟은 餞別金으로 普通 3個月値 月給을 준다. 그런데 前任 總長은 聯盟에 數億 원의 利益을 안겨준 功勞가 있어 理事會에서 功勞를 認定해 6個月値를 주기로 議決한 것이다. 7000萬 원이라는 金額도 터무니없이 訛傳된 것이다. 또한 後任 事務總長이 諒解해 該當 期間 동안 無給으로 職務代行을 함으로써 聯盟 財政에 損害를 끼치지 않도록 했다.”

    自由總聯盟 總裁는 名譽職으로 月給이 따로 없다. 하지만 거의 每日 出勤해 會議를 主宰하고 業務를 보고 隨時로 全國 脂肪組織을 다녀야 하는 特性上 常勤에 準하는 活動費를 支給해왔다. 2014年부터는 活動費 支給과 支出內譯에 關해 理事會의 承認을 받아 執行해오고 있다.

    -前任 會長과 그 以前 會長職務代行은 對外活動費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金 總裁는 月 900萬 원씩 챙겨가고 있다는 批判이 있다.
    “前任 總裁 가운데 活動費를 고사하고 自費로 活動한 事例가 있었지만 例外的인 것이었고, 모두 總裁 任務 遂行에 따른 活動費를 支給받아 왔다. 다른 團體들도 代表에게 活動費를 支給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내 境遇도 通商 水準의 活動費를 받은 것이며, 오히려 最善을 다해 脂肪組織과 本部를 指揮해 財政을 2億 원 以上 確保해 聯盟 財政에 寄與한 바 있다. 全國 支部를 巡廻하다 보면 不可避하게 費用이 發生한다. 나는 活動費를 받은 만큼 最善을 다해 不必要한 豫算支出을 抑制하고, 其他 儀典 亦是도 大幅 縮小했다.”


    “怏心 품은 虛僞 告訴”

    -韓電産業開發은 自由總聯盟이 最大株主여서 人事權을 聯盟이 갖고 있다. 그런데 金 總裁 就任 後 管理本部長이던 순천고 後輩 주복원 氏가 社長으로 昇進하고, 亦是 순천고 後輩인 황명화 氏가 社外理事로 登載되더니 要職인 未來産業本部長으로 就任했다.?

    “前任 社長에게 주복원에 對해 물으니 ‘일을 잘한다’고 하더라. 알아보니 週 社長은 氣候變化와 에너지政策 專門家로, 國務總理室과 제주도청 等에서 關聯 實務를 맡은 바 있는 實力派였다. 勞組에서도 評判이 좋아 社長으로 遜色이 없었다. 황명화는 自銃 選擧 때 나를 도와줬고 그런 因緣으로 月 200萬 원 받는 社外理事로 推薦한 건 事實이다.

    이 程度 答禮性 人事는 어느 機關에서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以後 주복원 社長이 뜻밖에도 黃 理事를 常任理事로 임명하자고 提案했으나 누가 봐도 特惠로 비칠 것 같아 反對했다. 以後 黃 理事가 未來産業本部長으로 간 것은 한전産業開發 經營陣의 判斷이며 聯盟 總裁 權限 밖의 일이므로 내가 說明할 事案은 아니다.”

    -靑瓦臺 弘報特報 時節 事業家 Y氏로부터 就業 斡旋 代價로 3000萬 원을 받고 詐欺嫌疑로 被訴된 事實은.
    “지난 大選 때 박근혜 候補를 支持하는 TV 政策演說을 했다 選擧法 違反으로 起訴돼 辯護士 費用으로 돈을 꾼 일이 있다. 그 돈을 빌려준 사람이 Y였는데 건너건너 빌린 것이라 누군지도 몰랐고 만난 적도 없다.

    그런데 내가 靑瓦臺 弘報特報로 任命되니까 Y가 찾아와서 돈은 안 갚아도 되니 조카를 취직시켜 달라고 付託하기에 拒絶한 일이 있다. 그러자 怏心을 품고 나를 虛僞 告訴한 것이다. 내가 無辜로 맞告訴하자 以內 告訴를 取下하고 謝過便紙까지 쓰며 내게 告訴를 取下해달라고 事情해서 容恕해줬다.”

    金 總裁는 Y氏가 法院에 낸 告訴取消長과 自筆로 쓴 謝過便紙를 보여주었다. 金 總裁는 “그동안 쌓아온 내 政治的 名譽가 있는데, 그깟 몇 푼 때문에 數十 年間 일군 名譽에 먹漆하는 구질구질한 짓은 하지 않는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어디서든 일할 때 깨끗하게 일했다. 그리고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이라며 옛날 祕話 한 토막을 들려줬다.

    “김대중 政府 때 對北 接觸을 처음 始作한 게 나였다. 頂上會談이 成事되기 前, 北韓에 쌀을 보냈는데, 條件이 어떻게 配給되는지 確實하게 모니터링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北韓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쌀 配給 現場을 보여주지 않아 쌀이 어디로 갔는지 確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김대중 大統領에게 現金을 北韓에 보내는 걸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確認하면서 하자고 助言했다. 그랬더니 버럭 火를 내더라. 그 일로 인해 對北 接觸 라인이 나에서 朴趾源으로 바뀌었다. 나는 김대중 大統領 앞에서도 할 말은 다 했다. 내가 朴 大統領에게도 할 말은 한다고 努力했으나 周圍 環境賞 力不足이었다.”



    DMZ를 平和區域으로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非武裝地帶(DMZ)를 開發해 平和區域으로 바꾸는 것이다. DMZ가 休戰線을 基準으로 南北 4km씩이니 總 面積이 2億5000萬 坪이다. 南北으로 4Km씩만 더 넓히면 5億 評이다. 여길 平和區域으로 만들자는 構想이다. 板門店을 中心으로 16個 參戰國 等 30個國에 땅을 나눠줘 마음대로 開發할 수 있게 해 國際都市를 造成한다.

    여기엔 카지노 等 慰樂施設이 들어서도 좋다. 代身 거기서 나오는 收益은 北韓 經濟를 발전시키는 데 쓰도록 한다. 鐵圓 地域은 쌀農事를 지어 北韓에 보내고, 다른 곳은 大規模 사파리 等 世界的인 公園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면 戰爭 威脅도 사라지고, 그야말로 平和의 象徵이 되는 것이다.”

    -DMZ에 유엔 第5事務局을 誘致하자는 主張도 했던데.
    “美國 뉴욕에 유엔 本部가 있다. 유엔은 스위스 제네바에 第2事務局, 오스트리아 빈에 第3事務局, 케냐 나이로비에 第4事務局을 두고 있다. 아시아에는 아직 유엔 事務局이 없다. 中國과 日本이 서로 牽制하기 때문이다. 日本과 中國의 中間, 南韓과 北韓의 中間인 DMZ에 세우면 平和의 象徵이 될 수 있다. 또한 現在 人類의 가장 重要한 이슈가 平和와 氣候, 海洋인데, 이걸 다루는 유엔 事務局이 없다. 充分히 說得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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