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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사랑, 孝道, 나눔 이걸 잊으면 價値 없는 삶일 뿐”|新東亞

이 사람의 삶

“나라 사랑, 孝道, 나눔 이걸 잊으면 價値 없는 삶일 뿐”

高宗 皇女 故 이문용 女史 養아들 권송性 氏

  • 최호열 記者|honeypapa@donga.com

    入力 2017-05-11 15: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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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拘束令狀實質審査 날 國立墓地 찾아 울었다”
    • 골드 어워드上, 마틴루터킹上, LA名譽市民上 受賞
    • “아이들 잘돼야 나라 잘되는 法” 後援 理由
    • ‘나라사랑’ ‘孝道’ ‘나눔’ 電波에 餘生 바칠 것
    오너가 아닌 以上 여든이 다 된 나이에도 月給을 받으며 일한다는 건 祝福이다. 권송性(77) 氏는 그런 點에서 祝福받은 사람이다. 只今도 國寶디자인, 東部電氣産業, 동아電氣部品, 亞太産業開發, 한양건설 等 5個 會社 顧問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過去 현대, 大宇, 聲援, 白江 等 수많은 建設社에서 會長, 顧問으로 모셨을 程度로 建設業界에서는 살아 있는 傳說로 通한다.

    그가 建設業에 本格的으로 뛰어든 것은 쉰 살이 되던 1990年頃부터였다. 前에는 全北 電柱에서 運輸會社와 서비스會社를 運營했다. 늦은 나이에 뛰어든 建設業界에서 여든이 다 되도록 現役으로 일할 수 있는 祕訣에 對해 權 會長은 “運이 좋아서”라며 謙遜해했다.

    “제가 福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저와 因緣을 맺은 會社마다 하는 일이 잘됐어요. 그래서 그런지 저를 믿고 쓰려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 點에 對해 늘 感謝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은 이렇게 해도 權 會長은 競爭이 熾烈한 建設業界에서 卓越한 工事 受注 能力을 가진 것으로 有名하다.

    “한番 因緣을 맺은 분들과 좋은 因緣을 쌓다 보니 人脈이 넓어진 德分이죠. 하지만 工事는 人脈보다 信賴가 重要합니다. 最善을 다해 좋은 建物을 만들어주고, 浪費를 줄여 會社 收益을 높여주고, 部下職員들의 隘路事項을 챙기는 데에도 疏忽히 하지 않으려 努力했습니다.”



    記者가 權 會長을 만난 理由는 朴槿惠 前 大統領과의 남다른 因緣 때문이다. 權 會長은 朴 前 大統領이 政界에 入門할 때부터 해마다 政治後援金을 보낸 熱誠 支持者다. 그의 當選을 위해 全國을 돌아다닌 것은 勿論, 2012年 大選 前날엔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當選을 위해 企圖했을 程度다.



    한마음病院 理事長 朴槿惠

    -朴槿惠 前 大統領과 특별한 因緣이라도 있나요.
    “身世를 진 일이 한 番 있어요. 제가 養어머니로 모신 분이 있는데, 高宗皇帝의 딸인 이문용 女史입니다. 朴槿惠 前 大統領이 靑瓦臺를 나온 後 量어머니께서 꼭 한 番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1980年에 한마음病院 理事長이던 박근혜를 찾아갔습니다. 當時 한마음病院은 서대문구 忠正路 鍾根堂 建物 뒤便에 있었어요. 朴槿惠 理事長은 欣快히 養어머니를 만났고, 病院長을 불러 直接 診察도 받게 해줬어요. 그 後 養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藥도 보내주었습니다. 그 고마움을 只今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後에도 因緣이 이어졌나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陸英修 女史와 朴正熙 大統領 期日마다 國立墓地를 찾았는데, 그때 種種 만났죠. 生辰 때는 꽃을 보냈어요. 大統領이 된 後에도 보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낸 것은 돌려보냈다는데 제가 보낸 것은 늘 받았어요. 따로 만난 적은 없고요.”
     
    -육영수 女史와 朴正熙 前 大統領 期日을 챙기는 理由는.
    “두 분을 尊敬하기 때문이죠. 박정히 大統領은 어쨌든 보릿고개를 없애고 우리를 이만큼 잘살게 해주신 분 아닙니까. 陸英修 女史는 全州에 있는 癩患者마을을 直接 訪問하셨는데, 患者들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리시는 걸 보고 큰 感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悲鳴에 돌아가신 後 40年 넘게 찾아뵙고 있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의 눈물

    -그렇게 支持했던 박근혜 前 大統領이 彈劾을 當하고 只今 拘置所에 있습니다.
    “안타까울 뿐입니다. 지난 1月 1日, 그리고 大統領이 拘束令狀實質審査를 받던 3月 30日에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어요. 내 마음이 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殉國英靈들 앞에서 罪悚하다고 謝罪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납디다.”

    -뭐가 未安하다는 건가요.
    “顯忠院에 묻힌 분들은 나라 위해 목숨까지 바친 분들입니다. 그런데 只今 우리나라 現實은 政治, 經濟, 社會的으로 엉망이 돼버렸습니다. 國民의 한 사람으로서 朴 大統領이 그렇게 될 때까지 補佐를 잘못해서 나라가 이 地境이 된 거니까, 先烈들 뵐 面目이 없었죠.”

    -補佐할 수 있는 位置도 아니었는데.
    “제가 靑瓦臺에 便紙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甓돌을 쌓을 때 99個를 제대로 쌓았더라도 하나를 잘못 쌓으면 다 무너지게 되는 法입니다, 燈盞 밑이 어두운 法이니 恒常 가까운 사람을 操心하십시오, 鳶을 띄울 때도 鳶줄을 풀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감아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狀況을 잘 判斷해 國政을 運用해야 합니다, 國民은 大統領이 따뜻한 마음과 配慮하는 마음을 가져주길 願하고 있습니다라고요.”

    “便紙에 그런 말을 쓴 것은 최순실 存在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냐고 묻자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그 程度까지일 줄은 몰랐다. 朴正熙 大統領 時節 靑瓦臺 執事 일을 했던 분과 兄님동생처럼 지냈는데, 그분에게 들은 게 있다”고 했다. 더 仔細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는 微笑만 지었다.

    -只今 박근혜 前 大統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첫째 健康管理를 잘하라고 말하고 싶고, 둘째 國民에게 罪悚한 마음을 갖고, 支持者들에게 罪悚한 마음을 갖고, 父母와 兄弟에게 罪悚한 마음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다음 大統領은 어떤 사람이었으면 싶은가요.
    “가장 重要한 게 安保를 지킬 수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國民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 私心 없이 나라를 사랑하고 國民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또한 進步와 保守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統合 大統領이었으면 좋겠고요.”



    리퍼트와 개고기

    몇 年 前, 그의 이름 석 字가 話題가 된 일이 있다. 2015年 3月 리퍼트 駐韓 美大使가 怪漢에게 被襲을 當한 事件이 發生하자 개고기를 들고 찾아갔기 때문이다.

    “大韓民國을 위해 일하러 온 분이 그런 일을 當했는데, 가만있을 수 없잖아요. 手術 後엔 개고기가 좋다고 생각해 直接 만들어 가져갔죠. 大使 夫人도 애를 낳은 지 얼마 안 돼 미역도 함께 準備했고요. 그런데 新聞 報道를 보니 리퍼트 大使가 愛犬人이라며 큰 失禮를 한 거라고 하더군요. 몰랐어요. 알았다면 그렇게 안 했죠. 그래서 내 眞心을 담은 便紙를 써서 보냈는데, 大使館에서 臺詞가 便紙를 잘 받았다고 連絡해 왔어요.”

    그의 行動을 두고 論難이 일기도 했다. 삐딱하게 보는 視角도 있었지만, 그의 履歷을 보면 純粹한 動機였음을 알 수 있다. 2001年 9·11테러가 發生하자 自身의 回甲宴에 들어온 돈 全額을 美國 政府에 寄附했다. 2013年 보스턴 마라톤 爆彈테러 事件 때도 私費를 털어 赤十字를 통해 誠金을 보냈다.

    “美國은 6·25戰爭 때부터 우리를 도와준 고마운 나라 아닙니까. 그런 나라가 어려움을 겪는데 外面할 수 없었죠. 恩惠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죠.”

    그의 眞心을 알았기 때문일까. 美國 政府는 2015年 오바마 大統領 名義로 ‘골드 어워드(Gold Award)’를 그에게 授與했다. 2016年에는 마틴루터킹財團에서 마틴루터킹상을 授與했을 뿐 아니라, LA市에서는 名譽市民賞을 授與했다.

    “美國 最大 行事가 初代 大統領 워싱턴 記念日과 킹 牧師 記念日이라고 하더군요. 킹 牧師 記念日에는 LA市에서 40萬 人波가 모이는 大規模 行事가 열렸는데, 여기서 카퍼레이드를 하기도 했어요. 이때 太極旗를 목에 걸고 市街地를 돌았죠.”

    그는 冊床 서랍에서 太極旗를 꺼내 보였다.

    “當時 목에 걸었던 太極旗입니다. 聖地巡禮를 할 때는 勿論 10年 넘게 重要한 行事가 있을 때마다 이 太極旗를 목에 걸었어요.”


    이춘상 子女에도 學資金 支援

    -太極旗를 목에 거는 理由는.
    “愛國心 때문이죠. 國民이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게 道理입니다. 特히 우리 大韓民國은 日帝 36年 동안 나라 없는 설움을 겪었고, 6·25 때는 同族끼리 戰爭을 해서 많은 生命을 잃었어요. 只今도 南北이 갈려 있고, 南韓도 進步 保守로 分裂돼 있는 게 가슴이 아파요. 나부터라도 나라와 國民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이를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해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의 나라 사랑 精神은 想像 以上이다. 子女들이 어릴 때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子女들과 함께 國旗에 對한 敬禮를 하고, 愛國歌를 提唱한 後 하루를 始作했다고 한다. 當然히 國家的인 行事와 事故가 일어나면 外面한 적이 없다. 2015年엔 아내 七旬잔치에 들어온 돈 全額을 當時 交通事故 被害 女性을 돕다가 死亡한 特戰司 정연승 上司 遺族에게 傳達했다. 또한 1年間 生活費도 支援했다. 2013年엔 西北島嶼를 守護하다 숨진 將兵들을 위해 海兵隊에 誠金 1000萬 원을 快擲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을 기리고, 그 遺族을 돕는 건 當然한 일이죠. 그러지 않으면 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겠습니까.”

    權 會長은 誠金 傳達과 함께 ‘事後(死後) 眼球 寄贈’도 約束했다.

    “나라를 지키다가 視力을 喪失한 분들이 밝은 빛을 되찾는 데 내 눈이 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한 거죠.”

    2003年 大邱地下鐵 慘事 때도 誠金을 보냈고, 2002年 京義線 鐵路 連結工事가 合意되자 南北協力基金 1000萬 원을 統一部에 快擲했다. 2000年 南北頂上會談이 열리자 成功을 祈願하며 1000萬 원을 내놓기도 했다. 올해 1月에는 國民 健康을 위한 硏究에 써달라며 서울아산병원에 1000萬 원을 寄贈하기도 했다.

    “이건 朴槿惠 前 大統領도 모르는 事實일 겁니다. 十數 年 동안 朴 大統領을 補佐하다 大選 때 交通事故로 死亡한 이춘상 補佐官도 나라를 위해 일하다 事故를 當한 거잖아요. 그래서 이 補佐官 아들에게 學資金을 後援하고 있어요. 올해 高3인데, 저를 할아버지라 부릅니다.”



    月給 折半 以上 寄附

    殉國 遺家族뿐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돈을 아끼는 法이 없다. 그는 1970年代부터 平生 月給의 一部를 떼어 나누는 삶을 살고 있다.

    “제가 富者여서, 個人的으로 뭘 바라고 하는 건 아닙니다. 콩 한쪽도 나눠 먹자는 마음에서 하는 거죠. 特히 아이들을 돕는 데 躊躇하지 않는 것은 그 애들이 잘되면 나라가 잘되고, 나라가 잘돼야 나도 잘되는 거니까요.”

    -總 몇 名이나 後援했는지.
    “헤아릴 必要도 없고, 세어보려 한 적도 없습니다. 도와줬다는 事實 그 自體를 잊어버리려 합니다.”

    -後援한 사람 中 記憶에 남는 이가 있다면.
    “外換危機 때 授業料 42萬 원이 없어 아버지가 自殺했다는 消息을 接하고 搜所聞해서 도와주기 始作한 少年이 海軍士官學校를 卒業하고 只今 少領으로 나라를 지키고 있습니다. 將校 任官式 때 제게 帽子를 씌워주는 데 마치 月桂冠을 쓴 氣分이 들더군요. 正말 보람을 느꼈습니다.”

    -後援金은 어떻게 마련하나요.
    “月給의 折半 以上이 後援金으로 나갈 때도 있습니다. 全州에 살 때에는 月給만으론 不足해서 아르바이트로 牛乳配達을 하며 癩患者村 아이들을 도왔어요. IMF外換危機 때부터 나라 全體가 힘든데 나만 高級車를 타는 게 죄스러워서 大衆交通을 利用하기 始作했습니다. 그렇게 아낀 기름값으로 後苑을 더 할 수 있게 됐죠.”


    皇女의 養아들

    -家族들이 反對하진 않았나요.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 아내는 한 番도 싫은 내色을 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많이 베풀어야 福을 받아 더 많이 들어온다고 생각해요. 이 나이까지 月給을 받는 것도 그동안 나누었기 때문이 아니겠냐고 아내와 이야기하곤 합니다. 子息들은 大學 卒業 시켜주고, 結婚해서 집 사줬으면 됐지, 더 바라면 안 되죠(웃음).”

    -나눔을 實踐하며 살게 된 특별한 契機가 있나요.
    “제가 열일곱 살 때 肺結核을 甚하게 앓았어요. 다들 죽는다고 했죠. 그때 懇切히 祈禱했어요. 내가 살아나면 平生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고, 나라를 위해 일하고, 父母에게 孝道하겠다고. 그리고 奇跡的으로 健康이 回復됐어요. 그 約束을 지키려 努力하고 있습니다. 또한, 皇女 어머니께서 제게 늘 ‘착하게 살아라, 남이 힘들 때는 도와주며 살아라, 自己만 위해 사는 게 무슨 意味가 있느냐, 나누고 사는 게 사람의 道理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씀을 實踐하는 거죠.”

    權 會長은 인터뷰 내내 “베풀면 그만큼 돌아온다”는 말을 强調했다. “베풀면 하나님이 채워줍니다. 저도 착하게 사니까 사람들에게 信賴를 받아 오늘까지 돈을 벌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도움을 준 분들 中에는 奉仕와 나눔으로 맺어진 因緣이 많아요.”

    그에게 나눔의 삶을 일깨워준 養어머니 이문용(1900∼1987) 女史는 高宗皇帝의 마지막 딸로 알려져 있다. 王室 族譜에 正式으로 오르지 못한 채 波瀾萬丈한 삶을 살았다. 1974年 그의 삶을 다룬 드라마 ‘皇女’가 放映되면서 話題를 모았다.

    “高宗과 宮女 사이에 태어난 養어머니는 열여섯 살 때 結婚한 男便이 作故하는 等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戰爭 中에 北韓으로 갔던 媤同生이 南쪽으로 내려와 만난 事實을 머슴이 申告해 監獄에 가게 됐어요. 監獄에 있는 사이에 財産이 다 사라졌고요. 빈 몸으로 出所한 것을 當時 全北道知事가 周旋해 太祖 李成桂의 影幀을 모신 全州 慶基殿에 起居하게 했죠. 그 消息을 듣고 제가 每日 찾아가 집도 고쳐드리고 飯饌도 해다 드리며 모시면서 母子의 緣을 쌓게 됐죠.”

    그는 “只今도 養어머니가 꿈에 나오면 좋은 일이 생긴다”며 “그래서 父母에게 孝道하라고 强調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의 香氣

    權 會長은 요즘 새로운 일을 構想하고 있다. 國民에게 ‘나라 사랑’과 ‘孝道’ ‘나눔’ 이 세 가지를 傳播하는 일이다.

    “나라 사랑이 巨創한 게 아닙니다. 大衆沐浴湯에서 혼자 돌아가는 扇風機를 꺼서 電氣를 節約하고, 거리에 떨어져 있는 休紙를 줍는 것도 나라 사랑입니다. 이런 작은 것부터 實踐하고, 父母님에게 孝道하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는 社會를 만드는 게 只今 우리 社會에서 가장 必要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故鄕 全北 井邑에서부터 學生들을 對象으로 自身이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며 나라 사랑 精神과 나눔, 孝의 必要性을 講演할 計劃이라고 한다.

    “향기로운 꽃은 거지도, 權力者도, 甚至於 殺人者도 좋아합니다. 人間味도 마찬가지예요. 特히 힘이 있을수록 配慮하고 人間味를 보여주면 그 사람이 더 빛나는 法입니다. 온 國民이 人間味 넘치는 大韓民國을 만드는 데 微力하나마 第 老後를 바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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