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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準杓의 ‘倜儻不羈’(氣槪가 있고 뜻이 커서 남에게 얽매이지 않다)|신동아

김재욱의 大選 三國志

洪準杓의 ‘倜儻不羈’(氣槪가 있고 뜻이 커서 남에게 얽매이지 않다)

權力意志는 크나 모래城을 쌓다

  • 김재욱|‘群雄割據 大韓民國 三國志’ 著者 kajin322@hanmail.net

    入力 2017-04-21 14:5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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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新東亞 3, 4月號에는 各各 進步 陣營의 문재인과 안희정을 다뤘다. 現在의 支持率만 놓고 본다면 安哲秀를 다뤄야 하나 安哲秀는 傳統 保守 勢力을 代表하는 候補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番 號에는 保守의 代表走者 中 한 사람인 洪準杓에 對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마침내 各 黨의 代表走者가 定해졌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自由韓國黨 洪準杓, 國民의黨 安哲秀, 바른政黨 劉承旼, 正義黨 沈想奵이 決戰을 벌이게 됐다. 4月 10日 現在까지 輿論의 推移를 살펴보면 문재인·안철수 候補가 先頭圈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洪準杓·劉承旼·沈想奵 候補가 뒤따르고 있지만 좀처럼 上昇勢를 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特別히 洪準杓 自由韓國黨 候補에 注目해야 할 理由는 있다. 문재인, 안철수 兩强構圖에서 保守 陣營의 代表走者인 洪準杓 候補가 大選에서 完走해 얼마만큼 票를 獲得하느냐에 따라 本選 勝者가 갈리는 캐스팅보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모래時計 檢事’ 洪準杓의 誕生 過程부터 살펴보자.?



    警備員의 아들이 大統領 候補로

    1989年 全斗煥의 兄 전기환은 鷺梁津水産市場을 所有하고 있던 在日同胞 노상욱을 脅迫해 市場의 經營權을 强奪한 嫌疑로 起訴됐다. 前職 大統領의 兄을 搜査한 檢事는 서울地方檢察廳 南部支廳 所屬 洪準杓(洪準杓)였다. 以後 洪準杓는 몇 件의 굵직한 權力型 非理 事件을 搜査하면서 名聲을 쌓기 始作했다.

    1993年에는 슬롯머신 業界로부터 賂物을 받은 嫌疑로 노태우 政權의 實勢였던 박철언을 拘束했다. 1995年에 ‘모래時計’라는 드라마가 全國的인 人氣를 얻는데, 이 드라마에 登場하는 主人公 檢事의 모델이 洪準杓였다는 事實이 알려지면서 以後 洪準杓는 ‘모래時計 檢事’로 불리게 된다.

    “한나라당은 오늘 國民에게 希望의 메시지를 보내줬다. 현대 造船所에서 一黨 800원을 받던 警備員의 아들, 고리 私債로 머리채 잡혀 길거리 끌려 다니던 어머니의 아들이 執權與黨의 代表가 될 수 있다는 希望을 國民에게 보여줬다.”(2011년 7月 5日 오마이뉴스)



    이처럼 洪準杓는 가난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으며, 刻苦의 努力 끝에 檢事가 됐고, 執權與黨의 黨 代表가 된 데 이어 道知事에 選出된 사람이다. 東西古今을 莫論하고 後代에 英雄으로 膾炙되는 사람 中엔 어려움을 견디며 最高의 자리에 오른이가 많다.

    그러나 옛 英雄과 洪準杓의 行跡을 比較해보면 內容에서 差異가 난다. 亂世의 英雄은 줄곧 가시밭길을 헤쳐나가지만 洪準杓는 檢事가 된 後 比較的 쉬운 길만 골라 갔다. 政界 入門을 當時 與黨인 신한국당으로 한 것만 봐도 그렇다.?

    “政治를 하려면 與黨에서 해야지. 아무 소리 말고 신한국당으로 入黨해라.”(이동형의 ‘와주테이의 박쥐들’)

    김영삼 前 大統領의 이 한 마디에 洪準杓는 1996年 신한국당에 入黨했다. 그리고 乘勝長驅했다. 1996年 第15代 國會議員選擧에서 松坡(甲) 地域區 신한국당 候補로 出馬해 當選된 以來 第16代(補闕), 17, 18, 19代 總選에서 東大門(을) 地域區에 出馬해 모두 이겼다. 以後 2012年 當時 慶南知事였던 金斗官이 民主黨 大選候補 競選에 參加하기 위해 知事 職에서 辭退하자 洪準杓는 慶南知事에 出馬해 當選됐고, 再選에 成功했다. 以後 2017年 3月, 朴槿惠 大統領이 罷免되자 執權與黨이던 새누리黨은 自由韓國黨과 바른政黨으로 갈라졌고, 洪準杓는 어렵지 않게 自由韓國黨의 大選候補가 됐다.


    ‘狙擊手’와 ‘막말 政治人’

    剛直하다고 해서 반드시 野黨으로 가야 한다는 法은 없다. 따라서 洪準杓가 신한국당에 入黨한 것을 두고 굳이 非難할 理由는 없다. 與黨은 아무래도 自身의 所信을 相對的으로 좀 더 現實化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그럼에도 不拘하고 무언가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事實이다. 洪準杓의 行跡을 좀 더 仔細히 살펴보자.

    앞서 밝힌 것처럼 洪準杓는 1989年 ‘鷺梁津水産市場 事件’과 1993年 ‘슬롯머신 事件’을 搜査하면서 ‘剛直한 檢事’의 이미지를 얻었다. 그러나 內容을 살펴보면 肯定的으로만 評價하기 어렵다.

    洪準杓는 權力을 ‘잃은’ 全斗煥의 兄 전기환을 搜査했고, 김영삼 政權에 反旗를 들었으나 亦是 權力을 ‘잃은’ 박철언을 搜査해서 ‘政治 報復이라는 誤解’를 사기도 했다. 特히 슬롯머신 事件에는 박철언뿐 아니라 김영삼의 側近들도 連累돼 있었는데 이들은 쏙 빼고 박철언만 搜査했다. 게다가 박철언은 現在까지 賂物을 받은 事實을 認定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박철언은 무엇 때문에 罰을 받았을까. 側近들의 ‘證言’이 全部였다. ‘證據’ 없이 ‘證言’만으로 박철언은 罰을 받은 셈이다. 이를 두고 洪準杓는 이렇게 말했다.

    “賂物 事件의 80%는 證據 없는 事件이다.”

    嚴正하게 搜査하고 起訴해야 하는 檢事가 ‘證據 없이도 잡아들일 수 있다’는 趣旨의 發言을 한 것은 理解하기 어렵다. 어찌되었건 남는 건 記錄이다. 一介 檢査가 權力의 몸通過 한 版 싸운 것만으로도 大衆은 洪準杓에게 높은 點數를 줬다.

    洪準杓가 政治를 始作한 以後의 行跡을 살펴보자. 洪準杓는 政界 入門 첫해, 第15代 總選 選擧運動 過程에서 運動員한테 2400萬 원의 活動費를 주고 虛僞로 支出報告書를 꾸민 嫌疑로 起訴된 後 當選 無效 判決을 받고 議員職을 잃었다. 檢事 時節의 ‘剛直한 이미지’와는 距離가 멀다.?

    한便 언제부터인가 大衆은 洪準杓에게 ‘狙擊手’라는 別名을 붙여주었다. 洪準杓는 特定人을 向해 송곳 같은 말로 注目을 받았는데 大體로 保守 陣營은 歡呼했지만 進步 陣營은 ‘막말하는 政治人’이라며 貶下했다.

    “김영삼 大統領 집 앞에는 駐車할 곳도 없어요. 前職 大統領, 살고 계시는 現況을 한番 살펴보세요. 只今 盧武鉉 大統領처럼 阿房宮 지어서 살고 있는 사람이 없어요.”(이동형의 ‘와주테이의 박쥐들’)

    洪準杓의 말이다. 이뿐만 아니다. 金大中 前 大統領이 몇 千億의 祕資金을 造成했다고 暴露했다가 거짓임이 들통나자 “野黨議員이 그 程度 말도 못하냐?”고 한 말은 只今까지도 人口에 膾炙된다. 政治的 라이벌에 對해 저런 程度의 말은 할 수 있다고 認定해주기로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狀況은 容納하기 어렵다. 2012年 洪準杓는 放送局에 出入하면서 身分證을 보여달라고 하는 ‘警備員’에게 이렇게 말했다.

    “날 불러놓고 왜 기다리게 하느냐. 이런 데서 放送 안 하겠다.……넌 또 뭐야. 니들 面上을 보러 온 게 아니다. 너 까짓게.”(2012년 11月 15日 한겨레新聞)

    이 瞬間 自身의 아버지가 警備員이었다는 事實을 잊은 것일까. 2011年, 洪準杓는 三火貯蓄銀行 不法 政治資金 流入 疑惑 事件에 連累됐다. 한 女記者가 洪準杓에게 質問했더니 이런 反應이 돌아왔다.

    “그걸 왜 물어봐? 너 眞짜……너 맞는 수가 있다. 眞짜 나한테 이러기야? 내가 그런 사람이야?……(야당이) 내 이름 擧論했어? …… 내가 그런 사람이야? 버릇없이 말이야.”(2011년 7月 14日 프레시안)

    이에 對해 ‘한나라당 側’李 謝過를 했지만 道知事로서 道民들을 對하는 態度를 두고도 많은 批判을 받은 바 있다.
     
    洪準杓의 行跡을 살피다 보니 떠오르는 人物이 있다. 동탁의 將帥로 동탁이 濾胞의 손에 죽자, 勇猛하지만 智略이 不足한 濾胞를 멀리 誘引해 손쉽게 皇帝가 머물던 長安을 占領하고 權力을 차지한 二刻(李?·?~198)이다.


    權力의 空白 노려 자리를 차지하다

    192年, 王胤은 濾胞를 利用해서 皇帝를 끼고 權勢를 휘두르던 童濯을 죽였다. 童濯을 따르던 무리들도 모조리 索出해서 죽이거나 監獄에 가뒀다. 동탁의 部下인 離角은 섬서 地域에 나가 있다가 이 消息을 듣고 復歸하지 못했다. 多幸히 離角의 陣營에는 뛰어난 參謀 駕後가 있었다.

    “王胤이 섬서 地域 사람들을 죽이러 온다고 所聞을 내십시오.”

    所聞을 듣고 섬서 사람들은 不安에 떨기 始作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離角의 軍隊는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소리 질렀다.

    “王胤은 너희들을 죽이려 한다. 이렇게 개죽음을 當하고 싶은가! 우리 便이 되어 王胤을 죽이자!”

    이렇게 해서 離角은 10萬 大軍을 거느리게 됐다. 離角은 軍隊를 네 部隊로 나눈 다음 皇帝가 있는 長安城으로 進擊했다. 濾胞는 勇猛했지만 머리가 좋은 장수는 아니었다. 離角은 濾胞를 誘引했다. 맞서 싸우다가 逃亡을 가고, 다시 멈추기도 하면서 濾胞의 약을 올렸다. 濾胞가 쫓아오면 싸우는 척하다가 또 逃亡쳤다. 이러는 사이 離角의 나머지 部隊가 長安城을 占領했다. 濾胞는 勇猛했지만, 앞뒤에서 敵軍을 만났고, 무엇보다 兵力 數에서 絶對的으로 不利했다. 單身으로 도망쳐버렸다. 이렇게 離角은 쉽게 首都를 占領했고, 皇帝까지 손아귀에 넣어 權力을 掌握했다.

    洪準杓가 無主空山이 된 慶南에 入城해 道知事가 된 일이나, 2016年 彈劾 局面에서 主張을 잃어버린 自由韓國黨의 大選候補가 된 일과 類似하다고 할 수 있겠다. 萬若 그때 金斗官이 辭退하지 않았거나, 朴槿惠 前 大統領이 罷免되지 않았더라면 洪準杓가 現在와 같은 威勢는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離角의 軍隊는 長安을 攻擊하면서 동탁의 怨讐를 갚는다는 名分으로 王胤과 그의 家族들을 죽였다. 그리고 離角과 그의 同僚 곽사는 동탁이 그랬던 것처럼 皇帝를 끼고 權勢를 휘두르기 始作했다.

    이에 皇帝는 離角의 勢力을 除去할 計劃을 세웠다. 몰래 西凉태수 馬등에게 便紙를 보내서 離角을 치라고 命令했다. 마等은 氣勢騰騰하게 長安으로 進擊했으나 駕後는 離角에게 持久戰을 하라고 勸했다. 두 달이 지나자 멀리서 遠征을 온 마等의 軍隊에 軍糧이 바닥나 어쩔 수 없이 退却할 수밖에 없었다. 離角은 이 機會를 놓치지 않고 攻擊해 크게 이겼다.

    離角은 自身을 除去하려고 한 皇帝가 미웠지만, 皇帝가 있어야 權力을 휘두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離角은 皇帝와 皇后를 別宮으로 옮겨놓고 조카 이섬에게 監視하게 했다. 이섬은 皇帝에게 제대로 된 飮食을 주지 않아 皇帝와 周邊 臣下들이 며칠씩 굶곤 했다. 참다못한 皇帝가 離角에게 사람을 보냈다.

    “쌀과 蘇 뼈다귀를 조금만 보내달라. 臣下들에게 먹이려 한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으면 됐지, 뭐가 不足해서 고기까지 달라고 하시오!”

    그러고는 일부러 썩은 고기와 물러터진 飮食을 보냈다.

    政治家 또는 行政家로서 洪準杓의 對應方式과 比較해보자.

    “全敎組, 一部 從北勢力, 이에 迎合하는 反對勢力과 一部 學父母團體들이 連帶해 無償給食을 외치고 있다.”(2015년 4月 3日 京鄕新聞)

    “學校는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나는 어릴 때 水道물을 먹었다.”

    여기에서 無償給食의 是是非非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福祉와 何等 關係가 없는 ‘從北’을 끌어들이고, ‘財政 不足’으로 因해 無償給食을 中斷하겠다고 밝혔으면서 自身은 飛行機의 ‘비즈니스席’을 利用하고, 美國 出張 中 골프를 쳐서 口舌에 오르기도 했다.


    同僚와 權力鬪爭

    皇帝를 別宮에 모셔놓은 離角은 同僚인 곽사와 權力鬪爭을 벌이기 始作했다. 이 둘은 몇 달 동안 長安에서 市街戰을 벌였고, 이 渦中에 無辜한 百姓들만 죽어나갔다. 離角의 參謀인 駕後는 이런 狀況을 크게 憂慮했다. 이대로 가면 離角의 命이 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駕後의 속내를 알아차린 朝廷의 臣下는 皇帝한테 駕後를 만나 일을 圖謀해야 한다고 進言했다.

    駕後는 皇帝 名義로 便紙를 써서 于先 西凉兵科 强族(羌族)으로 構成된 離角의 主力部隊를 故鄕으로 돌려보냈다. 離角의 勢力을 徐徐히 약화시키기 始作한 것이다. 同時에 皇帝는 離角을 安心시키기 爲해 大司馬 벼슬을 내려주었다. 離角은 이 모든 게 무당들이 自身을 위해 企圖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部下 將帥한테는 賞을 내리지 않고 무당한테만 厚한 賞을 내렸다. 部下 將帥들은 士氣가 꺾였고, 이들 中 한 名은 叛亂을 일으켰다가 離角한테 죽임을 當하기도 했다.

    戰力이 弱해질 대로 弱해진 狀況에서 離角은 章帝(張濟)라는 사람에게 攻擊을 當해 皇帝를 빼앗긴다. 皇帝는 葬祭에게 長安을 지키게 하고 自身은 옛 都邑地인 落陽으로 돌아갔다. 皇帝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 離角과 곽사는 暫時 싸움을 멈추고 皇帝를 追擊했다. 이때 皇帝는 曹操를 불러들였다. 離角과 곽사는 曹操 陣營의 하후돈, 前衛, 調印, 허저를 當해낼 수가 없었다. 크게 敗해서 겨우 목숨만 救해 山積 무리 속으로 逃亡갔다. 曹操는 部下 將帥를 보내 離角을 죽였다. 곽사는 部下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洪準杓의 元來 이름은 홍판표(洪判杓)였는데 ‘世上 사람의 表象’이라는 뜻을 지닌 ‘준표(準杓)’로 改名했다고 한다.(2009년 1月 13日, 週刊京鄕) 姓名學에 밝은 사람의 勸誘가 있었다고 한다. 正말 이름을 바꿨기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일까. 어찌됐든 洪準杓는 現在 保守 陣營의 代表走者로서 一戰을 앞두고 있다.

    살펴본 바대로 洪準杓는 비록 쉬운 길을 擇했다고는 하나 自身의 能力을 發揮할 수 있는 곳에서 政治를 始作했고, 離角처럼 2人者 또는 非主流로 活動하면서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아온 사람이다. 앞서 그의 政治를 하는 態度를 多少 批判的으로 바라보았지만, 이 亦是 洪準杓가 政治하는 方式이고, 이를 통해 自身의 立地를 다져 現在의 位置까지 올라온 點은 그 自體로 認定할 만하다고 하겠다.

    끝으로 離角은 結局 敗亡했지만, 主張 동탁이 죽자 곧바로 權力을 掌握해 自身의 勢力을 構築했다. 洪準杓 亦是 離角처럼 主張이 사라지자 卽時 그 자리를 차지해 保守 陣營 有權者를 어느 程度 結集하는 데에는 成功한 듯하다. 그러나 本選에서의 相對가 曹操로 變身한 문재인이라는 點을 잊어서는 안 된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김재욱



    ● 1972年, 慶北 奉化 出生?
    ● 東國大 漢文學과(학사), 敎育大學院(碩士)
    ● 고려대 國文學科 漢文學 專攻(博士, 韓國漢詩, ‘목은 李穡의 영물시 硏究’)
    ● KBS 大河드라마 ‘懲毖錄’ 古典哲學 諮問
    ● 現 高麗大 漢字漢文硏究所 硏究敎授?
    ● 著書 ‘三國志人物展’ ‘한時에 마음을 베이다’ ‘群雄割據 大韓民國 三國志’外 5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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