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 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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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
三國
國家 高句麗 百濟 新羅
수도 1. 졸본성
2. 國內城
3. 平壤城
1. 慰禮城
2. 熊津城
3. 泗沘城
金星
君主
 -建國君主
 -滅亡君主
28 國王
동명성왕
保障王
31 國王
온조왕
의자왕
56 國王
赫居世 居西干
경순왕
成立 紀元前 37年
(朱蒙 졸본성 定着)
紀元前 18年
(온조 慰禮城 移住)
紀元前 57年
( 赫居世 居西干 推戴)
滅亡 668年
(平壤城 陷落)
660年
(泗沘城 陷落)
935年
(敬順王 高麗 投降)
375年 , 百濟 의 全盛期.( 近肖古王 30年, 근구수왕 元年)
476年 , 高句麗 의 全盛期.( 장수왕 64年)
576年 , 新羅 의 全盛期.( 진흥왕 37年, 진지왕 元年)

三國 時代 (三國時代)는 紀元前 1世紀 부터 7世紀 까지 高句麗 , 百濟 , 新羅 三國이 滿洲와 韓半島 一帶에서 中央集權的 國家로 發展한 時期를 일컫는다. 新羅 唐나라 聯合軍에 依해 百濟(660年), 高句麗(668年) 次例로 滅亡하면서 韓半島 中南部에는 統一新羅 北部에는 渤海 가 들어서 南北國 時代 로 넘어간다. 各國의 全盛期로 評價되는 時期는 百濟 4世紀, 高句麗 5世紀, 新羅 6世紀 巡이다.

一部 史學者들은 實質的으로 三國이 定立되어 三國 時代가 展開된 것은 高句麗, 백제의 起源인 扶餘 가 滅亡하고( 494年 ), 또, 伽倻 가 滅亡한 562年 以後부터 新羅가 백제를 征服한 660年까지 約 100年 동안의 期間 뿐이므로 扶餘 , 伽倻 를 包含하여 誤國 時代 或은 四國 時代 [1] 라는 用語를 使用하기도 한다.

歷史 [ 編輯 ]

三國 時代의 背景과 元三國 時代 [ 編輯 ]

高句麗 [ 編輯 ]

한족 과의 鬪爭 過程 속에서 漸次 勢力을 擴大한 高句麗 유리왕 때에 이르러 傳한 의 뒤를 이어 일어난 新나라 와 衝突할 程度로 그 勢力이 成長하였다. 이어 태조왕 때부터는 强力한 對外 發展을 꾀하여 沃沮 를 服屬시키고 요동군 玄菟郡 을 자주 攻擊하였다. 또 高句麗 遼河 地域을 차지하고 있던 恭遜씨를 逐出하고, 中國이 三國의 對峙 로 混亂에 빠진 틈을 타 위나라 를 攻擊하는 等 征服 國家로서의 面貌를 誇示하며 執權 體制를 가다듬었다.

以後 고국천왕 臺에 이르러 을파소 等의 有能한 代身이 登場하고, 賑貸法 等을 통해 內政의 安定을 꾀하였지만, 고국천왕 事後에 告發機 를 비롯한 故國川王의 兄弟들 間에 일어난 싸움 으로 混亂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勃起의 난 에서 告發氣를 鎭壓하고 王이 된 산상왕 에 이어 동천왕 이 卽位하면서부터는 다시 大陸과의 關係를 다양하게 展開, 위나라 에는 能動的으로 對處하고 新羅 를 持續的으로 侵犯하였다.

이러한 征服戰爭 結果 高句麗 는 莫大한 土地와 人間을 占有하였고, 王室을 固定하고 富者相續을 確立하였으며, 또 5部를 改編하는 等 國家體制의 整備를 꾀하여 4世紀에는 律令制 가 갖추어진 古代 國家로서 發展하였다.

新羅 伽倻 [ 編輯 ]

只今의 慶州 를 中心으로 成長한 斯盧國은 中國의 金屬 文化와 接觸할 機會가 적어서 高句麗 · 百濟 보다 社會 發展이 늦었다. 그러나 漸次的으로 東部 海岸에서 定着해 온 石氏와 聯合하여 聯盟體를 이루어 갔다. 그리하여 탈해 尼斯今 때는 國號를 鷄林 (鷄林)으로 고치고, 6寸을 改編하여 6部의 行政 區域으로 하였다. 이 時代에는 部族長의 稱號도 軍將이라는 意味로 解釋되는 ‘ 居西干 ’에서 무당 또는 祭司長 을 의미하는 ‘ 次次雄 (次次雄)’으로, 그리고 다시 部族長 權限의 ‘繼承者’라는 意味의 ‘ 尼斯今 (尼師今)’으로 變했다. 그 後 味鄒王 의 卽位를 起點으로 김알지 의 後孫 金氏 가 王位를 차지하였다.

한便 金屬文化의 傳播가 늦었던 變한 의 여러 部族 國家들도 3世紀 以後에는 伽倻 라는 聯盟體를 形成하기 始作했다.

百濟 [ 編輯 ]

百濟 의 境遇 馬韓 50餘 部族 中 十帝國에서 始作했을 것이라고 推測된다. 高句麗에서 逃走한 온조 集團이 처음에 定着한 곳은 彌鄒忽 慰禮城 이었고, 沸流가 自殺하면서 慰禮로 합쳐졌다. 古朝鮮 滅亡 後부터 波狀的으로 避難해 온 集團들은 目支國 支配權 內의 여러 勢力을 漸次 解體해 갔다. 그리하여 多婁王 · 초고왕 의 在位 期間을 거치는 동안 土着 不足 勢力을 結合하면서 漸次 馬韓 의 여러 不足과 摩擦을 일으켰다.

樂浪 · 大房 의 侵略을 받은 漢江 流域의 不足 國家들은 이에 對抗하기 위하여, 보다 큰 聯盟體가 要求되자 백제를 盟主로 鞏固히 團結함으로써 百濟는 部族國家로 成長할 수 있었다.

三國의 發展 [ 編輯 ]

大陸에서 後漢 (後漢)李 亡하고 (魏)· (蜀)· (吳)의 세 나라가 角逐을 벌이는 가운데 , 半島 에 對한 影響力이 漸次 減少되고 있던 4世紀 에서 6世紀 에 이르는 時期에 三國은 政治的으로 큰 發展을 이룩하였다. 그 中 하나는 古代 國家로의 발돋움을 위한 體制 整備이고, 다른 하나는 征服 國家로의 變貌다.

韓國의 古代 國家 體制 整備는 不足 國家 體制의 弱化에서 始作되었다. 元來 部族長 의 權限이 强大한 狀態에서는 地方 分權的인 社會 組織이 維持될 뿐 强力한 王權 이 存在할 수 없었다. 不足 聯盟 社會의 우두머리라 할 不足 聯盟長으로서의 道 各 部族長의 統治權을 認定한 바탕 위에서 成立된 것이기 때문에 强力한 專制 王權 의 行使가 不可能하였다. 따라서 王權의 世襲이나 王權의 父子相續 같은 것도 期待할 수 없었고, 다만 選擧 로써 王座(王座)가 變動되었다. 扶餘 에서 가뭄 장마 의 責任을 王에게 돌려 王을 廢位하거나 죽인 事例나 高句麗 의 五部(五部) 사이에서 王權의 移動이 있었던 事實, 新羅 의 세 省(朴·碩·김)李 王位를 번갈아 이어받았던 것은 이러한 것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部族 聯盟長의 勢力은 漸次 增大되고 部族長의 權限은 漸次 弱化되었을 뿐만 아니라, 地方의 部族長을 中央으로 끌어올려 適當한 地位를 주어 貴族 으로 編制시켰다. 新羅 骨品制 에서 나타난 眞骨 을 비롯한 各 頭品이나 17個의 管等 , 또 高句麗 百濟 에서의 官等의 成立 等은 이러한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를 통해 單純한 不足 聯盟의 軍將이었던 王은 從來의 部族長이 選出하던 軟弱한 王權의 所有者에서 富者 相續이 可能한 絶對的인 君主로 君臨할 수 있었다.

또 하나, 古代 王權의 構築과 古代 國家 體制의 整備에는 制度的인 面에 앞서서 思想 統一이 要請되었다. 過去의 地方 分權的이고 不足的인 思想 體系를 古代 國家的인 思想 體系로 승화시키는 데에는 보다 包括的이고 高次元的인 理念 倫理 綱領이 必要하였다. 韓國 의 古代에서 高句麗 ( 372年 ), 百濟 ( 384年 ), 新羅 ( 527年 )가 各各 佛敎 를 輸入, 或은 公認하는 것이 바로 이 時期였다는 것은 佛敎가 古代 國家 體制의 整備에서 觀念 體系的인 役割을 堪當했다는 것을 意味한다.

高句麗 에서 古代 國家 體制를 整備한 소수림왕 고국양왕 의 뒤를 이어 卽位한 광개토왕 장수왕 搖動 에서 漢江 流域에 이르는 廣闊한 領土를 征服할 수 있었던 것과 新羅 에서 佛敎 를 公認한 법흥왕 의 뒤를 이어 卽位한 진흥왕 이 漢江 流域을 奪還한 것 等, 이러한 三國의 征服 君主의 登場은 大陸으로의 進出 뿐만이 아니라 三國의 版圖 또한 크게 바꾸는 契機가 되었다.

高句麗 광개토왕 은 北으로 滿洲 一帶를 攻略하여 領土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남으로 百濟 와의 對決에서 크게 이겼으며, 百濟 와 結託하고 있던 의 勢力을 꺾기도 하였다. 뒤이은 장수왕 도 領土 擴張에 努力하였는데, 이를 위해 長壽王은 首都를 平壤 으로 移轉하였다. 이러한 平壤 遷都 等 一連의 南進 政策으로 高句麗에 對抗하기 위한 新羅 · 百濟 間의 同盟 關係가 成立되었고, 120餘 年間의 羅濟 同盟 유지는 三國의 歷史에서 가장 뒤늦게 發展한 新羅 로 하여금 自體의 力量을 培養하여 後日 三國 統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充分한 時間을 주었다.

新羅 가 自體 整備를 서둘러 征服 體制를 갖춘 것은 법흥大王 代를 거쳐서 振興大王 臺에 이르러서이며, 當時에는 高句麗 광개토왕 장수왕 의 量 代에 걸친 正服 戰爭으로 많은 힘을 消耗한 때였다. 新羅 百濟 와 同盟하여 高句麗 의 治下에 있던 漢江 流域을 빼앗고 東北쪽으로 進擊하여 只今의 江原道 咸鏡南道 一帶까지 占領하였을 뿐 아니라 羅濟 同盟을 깨고 百濟 가 征服한 漢江 下流 地域마저 도로 빼앗아 버렸다. 羅濟 同盟을 깨고 百濟가 가지고 있던 漢江 流域까지 奪取한 新羅는 漢江 流域의 肥沃한 土地와 西海 안을 通한 唐나라 中國 王朝들과의 接觸, 高句麗 百濟 의 國境을 遮斷하는 것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았고, 內部로는 佛敎 를 公認하고 花郞 을 養成함으로써 三國 統一 의 基盤을 마련하였다.

新羅 법흥大王 · 振興大王 의 量 代에 걸친 伽倻 情服은 新羅 의 洛東江 西部 進出 政策이 成功하였다는 것을 意味한다. 오랫동안 新羅 · 百濟 의 勢力 角逐場이었던 伽倻 新羅 에 征服됨으로써, 百濟 勢力이 이곳에서 逐出되었을 뿐 아니라 이들과의 對決에서 新羅 는 有利한 高地를 占領하였기 때문이다. 新羅 가 韓半島의 새로운 强國으로 成長하여 勢力圈 形成에 큰 變化를 가져오게 하였다. 따라서 韓半島는 過去의 高句麗와 新羅 · 百濟 의 對立이 아니라 新羅 高句麗 · 百濟 의 對立 樣相으로 情勢가 크게 變했고, 이러한 外交 關係에 中國과 日本이 加擔하여 東아시아의 形勢는 · - 新羅 의 東西 勢力과 突厥 - 高句麗 - 百濟 - 의 南北 勢力으로 兩分시키게 되었다.

이 時期에 注目해야 할 文化的 事實은 佛敎와 儒敎 의 導入이다. 佛敎 는 古代 國家의 思想 統一에 寄與하였다는 것과 또 大規模 征服 戰爭에서 높은 詐欺를 發揮할 수 있게 하였다는 點에서, 또 儒敎 는 古代 國家의 集權的인 王權에 效率的인 制度의 運用과 그 思想的 바탕을 提供하였다는 點에서 그러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時期에 韓半島 를 活用한 우경법 (牛耕法)李 導入되어 韓半島 의 세 나라는 效率的인 樣式(糧食)의 增大가 容易해졌고, 우경법은 三國 時代 以後에도 韓半島의 農事에 있어서 큰 影響을 미치게 된다.

新羅의 三國統一 [ 編輯 ]

韓半島에서 政治的·文化的으로 7世紀에서 8世紀에 걸치는 期間은 커다란 變化와 發展을 본 時期였다. 이 時期에는 政治的으로는 新羅의 三國 統一 이 있었고, 文化的으로는 佛敎 文化의 全盛期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新羅의 統一에 앞서 三國은 서로 政治的·軍事的으로 葛藤이 있었고, 그 위에 中國 大陸에서는 數世紀 以來 다시 天下를 統一한 隋나라 가 擡頭하여 韓半島를 侵略했다. 그러나 高句麗는 잘 싸워 이를 물리쳤고, 私費(泗批)로 遷都한 百濟도 告知(故地) 回復에 힘써 한때 큰 뜻을 펴 나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新羅는 안으로 佛敎를 통한 精神的 統一을 꾀하는 한便, 花郞 制度를 발전시켜 軍事的 一面을 擔當케 하였고, 對外的으로는 數에 代身하여 일어난 黨과의 聯合으로 먼저 백제를 쳤으며(660년), 다음으로 高句麗를 멸망시켰다(668년).

當時 高句麗와 百濟는 서로 聯合해야만 新羅에 맞설 수 있었고, 地理的 位置 또한 新羅에게 둘러싸여져 있었다. [ 出處 必要 ] 新羅가 이들을 征服하기 直前, 高句麗는 數次에 걸친 수· 의 侵略을 받았고, 百濟는 軍士를 總動員하여 新羅에게 빼앗긴 옛 領土를 攻擊하고 있었다.

그러나 高句麗는 權力層의 勢力 紛爭과 民心 離叛으로 國力이 크게 弱해졌고, 百濟는 義慈王의 實情과 貴族間의 權力 爭奪戰으로 結局 民心이 離叛되었다.

新羅가 이들을 征服하여, 드디어 韓民族의 統一을 가져왔으나 黨과의 聯合 勢力에 依한 軍事的 勝利 뒤에는 적지 않은 難關이 뒤따랐다. 黨은 黨대로 百濟의 高地에 5都督府(五都督部)를 두었고, 高句麗의 高地에는 9都督府(九都督部)를 두었으며, 이를 다시 42株(州)로 나누었다. 이것은 黨이 두 나라의 領土를 自己의 屬領으로 만들고자 하는 속셈이었고, 新羅는 이러한 黨의 計劃을 粉碎해야 했다. 이 鬪爭은 문무大王 16年( 676年 ) 高句麗가 亡한 지 8年이 지나서야 成功하여 新羅는 大體로 大同江과 원산만을 連結하는 線 以南의 領土를 차지했고, 黨은 平壤에 設置, 新羅까지도 包含하여 支配하려 한 安東都護府(安東都護府)를 撤去하게 되었다.

羅唐 戰爭에서 最終的으로 勝利함으로써 新羅 는 韓半島 最初로 統一 王國을 이뤄내었다.

高句麗 [ 編輯 ]

高句麗는 에서 書記 668年 까지 韓半島 北部와 滿洲 一帶를 支配한 古代 國家이다. 高句麗는 紀元前 37年 朱蒙 이 이끄는 夫餘族의 한 태조왕은 東濊와 옥저를 服屬시키고, 樂浪郡과 玄菟郡은 壓迫하여 領土를 넓혔다. 고국천왕 은 王位의 父子상속제 를 마련하였고, 5部의 行政區域을 設定하는 等 體制 整備를 斷行하여 王權이 보다 强化되었다.

미천왕 은 鉏安平을 確保하고, 樂浪郡 帶方郡 을 征服하여 韓半島에서 漢四郡의 勢力을 完全히 몰아내 古朝鮮의 옛 땅을 回復하였다. 高句麗는 고국원왕 百濟 全然 의 攻擊으로 一時的인 國家的 危機를 겪었으나, 소수림왕 代에 들어서 高句麗는 태학(太學)을 設立하고 佛敎를 國家的으로 公認하였으며, 律令을 制定함으로써 中央集權國家를 完成시키고 다시 나라를 整備하였다.

5世紀 , 高句麗는 全盛期를 맞이하게 되는데, 광개토왕 은 백제의 首都인 漢城(漢城)을 侵攻하여 南쪽 領土를 臨津江과 漢江까지 擴張시켰고, 新羅 奈勿王 을 援助하여 倭寇 를 擊退하였다. 또한 北으로 後燕 을 쳐서 搖動을 完全히 차지하고, 아울러 요서 地方의 一部까지 進出하였다. 광개토왕은 肅愼 東扶餘 를 服屬시켜 滿洲와 韓半島에서 優越한 位置를 確保하였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 은 中國의 南北朝 와 通交하였고, 柔軟 (柔然) 等 塞外(塞外) 民族과도 通交하면서 外交關係를 擴大하여 中國을 牽制하였다. 427年 南下政策의 一環으로 首都를 平壤 으로 遷都하여 中央 集權的 政治機構를 整備하였다. 475年 高句麗는 백제의 漢城을 侵攻하여 陷落하고 개로왕 을 죽여 故國原王의 恨을 풀고 南쪽의 牙山灣(牙山灣)까지 支配하였다. 이때 백제는 首都를 熊進 으로 옮겼고, 함께 공격당한 新羅는 竹嶺(竹嶺) 以北의 땅을 잃었다.

6世紀 中盤에 들어서 내우 外換에 시달리던 高句麗는 國力이 크게 衰弱해졌다. 新羅의 진흥왕 羅濟同盟 (羅濟同盟)을 깨고 高句麗에게서 빼앗은 漢江 流域을 獨차지 하였으며, 只今의 咸鏡道 地域 一部에까지 進出해 高句麗를 壓迫하였다.

589年 中國에 새로 들어선 隋나라 는 高句麗를 4次例에 걸쳐 侵攻하였다. 高句麗-水 戰爭 에서 高句麗는 612年 을지문덕 이 이끈 薩水 大捷 과 같은 重要한 戰鬪에서 勝利함으로써 隋나라의 侵攻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 戰爭은 隋나라의 滅亡의 要因 中 하나가 되었다. 곧이어 中國을 統一한 唐나라 太宗 연개소문 의 臺當强勁策을 口實로 高句麗를 侵入하여 요동성 等을 陷落시키는 成果를 거두기도 했으나 安市城 에서 星州 楊萬春 (楊萬春 或은 梁萬春)에게 大敗하였다.

이처럼 高句麗는 中國 勢力의 攻擊을 成功的으로 막아냈으나, 攻擊을 받으며 國力이 衰退해갔다. 特히 연개소문 事後 支配層이 分裂되어 政治 狀況이 어지러웠고 民心이 混亂해져 있었다.

668年 , 羅唐聯合軍은 混亂해진 高句麗를 攻擊하여 首都인 平壤을 차지하고 高句麗를 멸망시켰다. 唐나라는 高句麗의 옛 땅에 安東都護府 를 設置하였고, 高句麗 領土의 一部는 新羅로 들어갔다. 그러나 高句麗의 空白은 後日 그 繼承國인 渤海 로 이어진다.

新羅 [ 編輯 ]

新羅의 石窟庵

新羅 (新羅)는 高句麗 , 百濟 와 함께 三國 時代의 三國 中 하나로, 現在의 韓半島 東南部 一帶를 約 1000餘 年 동안 支配하고 있던 國家 이다. 國號 新羅에는 王의 德業이 날로 새로워져서 四方을 網羅한다는 意味를 담고 있다. 新羅(新羅)는 慶州 地域에서 紀元前 57年 頃에 建國되었다. 新羅는 三國 中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國家의 틀을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다. 그러나 6世紀 진흥왕 臺에 이르러 全盛期를 맞으며 7世紀 漢江 流域을 차지하고 나·黨 聯合을 結成하여 660年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年 高句麗가 唐나라에 依해 滅亡하면서 漢江 以北의 一部와 漢江 以南 全域을 차지하여 三國 統一 을 達成하게 되었다. 669年 渤海 가 세워짐과 함께 南北國 時代 의 南쪽 軸이 되었다. 그러나 末期에 이르러 王과 貴族이 사치스러운 生活을 하고 政治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곳곳에서 叛亂이 일어나 892年 甄萱 後百濟 를, 901年 弓裔 泰封 (처음 이름은 후고구려)을 세움과 함께 後三國 時代 가 始作, 兩國의 攻勢에 버티지 못한 新羅 경순왕 935年 高麗 王建 에게 降伏하니 56代 992年 만에 滅亡했다.

新羅史는 크게 相對 , 中隊 , 下臺 로 나뉘는데, 相對는 朴赫居世 居西干 부터 진덕여왕 까지의 28代 771年으로, 建國 以後 部族國家 에서 古代國家 로의 發展 및 膨脹으로 高句麗 , 百濟 와 兩立하던 時期이다. 中隊는 太宗 武烈王 부터 혜공왕 까지의 8代 127年으로, 백제, 高句麗 滅亡 및 그 直後의 新羅文化의 黃金期이다. 下臺는 선덕왕 부터 경순왕 까지의 20代 156年으로, 繼續된 平和와 王位 繼承權 싸움으로 混亂해져 기울어간 時期이다. 新羅의 王은 朴氏 , 昔氏 , 金氏 가 번갈아 가며 王이 되었다. 新羅는 법흥왕 때 佛敎를 받아들여 王權 强化와 國民 의 團結을 꾀하였으며 섬세하고 華麗한 佛敎 遺跡과 遺物들을 남겼다.

伽倻 [ 編輯 ]

伽倻 (伽倻 或은 加耶, 伽耶)는 가락 (駕洛, 加洛), 가라 (加羅, 伽羅, 迦羅), 가량 (加良), 舊野 (狗耶)라고도 하며, 三國時代 大部分 동안 韓半島 南部에 位置해 있던 部族國家 의 聯盟體였다. 東쪽으로 新羅 , 西쪽으로 百濟 를 接하고 있었다.

2 ~ 3世紀 經에 金海 等地에 있던 金官伽倻 를 中心으로 大伽倻 , 星山伽倻 , 阿羅伽倻 , 古寧伽倻 , 小伽倻 의 5個國이 합쳐져 電氣 伽倻 聯盟이 成立되었으나 高句麗의 攻擊으로 인해 金官伽倻가 큰 被害를 입자 5 ~ 6世紀 警 被害를 거의 입지 않은 大伽倻를 中心으로 後記 伽倻 聯盟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亦是 新羅와 百濟의 사이에서 威脅을 받으며 徐徐히 무너져가 結局 562年 滅亡한다. 三國과 달리 제대로 된 國家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不足國家의 聯盟으로 轉落한 것이 滅亡의 原因으로 指摘되고 있다. 伽倻는 金海 地方에서 生産되는 質 좋은 을 바탕으로 國力을 키웠으며 왜 等地와 交易을 하기도 했다. 伽倻의 철기 文化는 뛰어난 水準으로 評價된다.

百濟 [ 編輯 ]

百濟(百濟)는 西紀前 18年 온조 에 依해 河南 慰禮城 에 建國되었다. 三國志 [2] 에는 백제가 馬韓의 一部였다고 한다. 百濟는 3世紀 頃 忠淸道 , 全羅道 一部 地域으로 勢力을 擴張해 나갔다. 또한 北쪽으로의 進出은 高句麗와 中國 郡縣 사이의 領土的 紛爭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4世紀 近肖古王 때는 馬韓 大部分을 倂合하여 全羅道 地域 大部分을 領土로 하였으며 北쪽으로 高句麗의 平壤을 攻擊하여 故國原王을 戰士시키기도 하는 等 全盛期를 이루었다. 一部 學者들은 이 時期 백제가 中國의 요서 地方, 日本의 규슈 等에 進出하였다고 主張하기도 한다. 그러나 以後 高句麗와 新羅에게 漢江 流域을 빼앗기는 等 受難을 맞았다. 聖王은 新羅와 同盟을 맺고 高句麗를 挾攻하여 漢江 流域을 되찾았으나 新羅의 背信으로 모두 虛事가 되고 結局 管山城에서 戰死했다.

그 後 백제는 復興을 위해 努力했으나 660年 에 新羅와 唐나라의 聯合 攻擊을 받고 首都 泗沘城이 陷落되며 滅亡하였다. 백제의 文化는 大體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特徵으로, 이러한 백제의 文化는 왜 等地에 많은 影響을 미쳤다.

歷史的 記錄 [ 編輯 ]

紀元前 57年 新羅가 小白山脈 南東쪽 에, 高句麗가 紀元前 37年 鴨綠江 流域에 세워졌다. 紀元前 18年 百濟는 高句麗 追慕聖王 의 아들 온조 가 漢江 流域을 中心으로 세웠으며 伽倻는 洛東江 中下流 流域에서 水路 가 세웠다.

周邊國들로는 扶餘 , 沃沮 , 東濊 , 于山國 , 耽羅國 等이 있었다.

新羅는 과 聯合하여 660年 백제를, 668年 에는 高句麗를 멸망시킴으로써 三國 時代는 끝나고, 얼마 後 渤海와 新羅로 이루어진 南北國時代가 왔다.

이때를 記述한 歷史書로 三國史記 三國遺事 , 三國史節要 가 있다.

三國의 政治 構造 [ 編輯 ]

部體制의 構造 [ 編輯 ]

三國은 古朝鮮 社會의 外郭에서 各其 獨自的으로 成立하였고, 4世紀 中盤 以後 서로 國境을 接하게 되기 前까지는 相當 期間 相互 깊은 交涉이 없이 發展해 나갔다. 그에 따라 三國의 政治 組織에는 各各 個性的인 面貌를 보여주는 相異함이 相當히 存在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三國 初期의 政治 組織에서는 當代의 歷史的 條件으로 因한 일정한 共通性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部體制(部體制)가 그것이다.

高句麗의 5部, 新羅의 6部, 百濟의 扶餘·高句麗系 移住民 集團으로 構成된 父 等은 元來 不足이나 小國의 性格을 지닌 單位 政治體였다. 이들은 三國 成立期에 聯盟體를 形成하여 三國 建國의 主體가 되었다. 三國이 膨脹해 나감에 따라 餘他 被征服 地域의 支配層 一部가 이들 富의 住民으로 編入되었다.

三國 初期 各部는 中央 政府에게 對外的인 外交·軍事·貿易權 等은 빼앗겼으나, 部 內部의 일에 對해서는 相當한 自治權을 行使하였다. 3世紀 前半까지도 高句麗에서는 消奴部가 自體의 宗廟와 辭職, 卽 祖上神과 土地神 및 地域 守護神 等에 祭祀를 지내는 等 相當한 獨自性을 維持하고 있었음은 이 같은 點을 말해준다. 또한 富 內部에도 富의 統制를 받으면서 일정하게 自治權을 行使하는, ‘部內部(部內部)’라고 부를 수 있는 작은 下位 集團이 存在하였다. 高句麗의 境遇 椽那部(椽那部) 內에 그러한 集團이 네 個 存在하였고, 新羅의 漢祗部(韓岐部) 內에서도 그러한 集團의 存在를 確認할 수 있다.

各部의 住民은 貴族에서 貧民에 이르기까지 階級的으로 分化되어 있었으나, 三國의 國家 構造 內에서 볼 때 餘他 被服속 地域의 住民에 비해 優越한 地位를 占하였다. 新羅에서는 이러한 點이 相對的으로 늦게까지 남아 있어서, 三國 後期까지도 官等制의 運營에서 原則的으로 6部의 민(民)에게는 經緯(京位)가 주어졌고, 地方民에게는 外位(外位)만 주어졌다. 中央 官職과 地方官의 자리는 警衛를 지닌 者만이 任命되었다.

한便 三國 初期에 吸收된 被征服 地域의 住民은 倂合될 當時의 小國 또는 邑落 單位로 各各 中央 政府에 服屬되었다. 이들은 自治를 行하며 中央 政府에 貢納을 하고 軍事的으로 協力하였다. 各各의 邑과 村落이 三國의 統治 構造 內에서 차지하던 位置가 그에 隸屬된 程度는 다양한 樣相을 띠었는데, 復屬될 當時의 狀況과 勢力 程度에 따라 一部는 5部나 6部의 同盟 勢力으로, 다른 一部는 集團 銳敏으로 編制되었다. 被征服民을 集團別로 隸屬시킨 것은 中央 政府의 支配力이 村落 內部에까지 미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이는 當時까지 村落의 共同體的인 遺制가 殘存하여 社會의 基層에 作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三國 初期 統治 構造의 基本的인 틀은 自治的인 여러 集團을 累層的(累層的)으로 統合하여 支配·禮俗 關係化한 것이었다. 具體的으로 6部가 中央 集團이 되고 復屬된 地域의 邑과 村落들이 그에 隸屬되어 있으며, 各部는 다시 中央 王室에 復屬된 形態였다.

當時 各部의 貴族들은 自身의 官員을 두었으며 相當한 自治力을 지닌 勢力 基盤을 가지고 있었다. 王은 超越的인 權力者라기보다는, 그러한 貴族 가운데 代表的으로 有力한 存在였다. 그런 만큼 王國의 重大事를 決定하고, 各部에 對한 統合力과 國家의 動員力을 最大化하는 데는, 各部의 貴族으로 構成된 會議體가 重要한 權能을 지녔다. 때로는 이 貴族會議에서 王을 廢位하고 새로운 王을 擁立하는 일을 決定하는 境遇도 있었다. 貴族會議는 그 뒤 王權의 강대화에 따라 그 權能이 弱化되었으나, 三國 末期까지 存續하였다.

中央集權的 領域國家 體制 [ 編輯 ]

三國 初期의 政治 構造는 三國이 成長해 감에 따라 變貌하였다. 三國 初期의 對內的인 政治情勢는 富의 自治力과 王室의 統制力, 中央 政府의 집權力과 復屬된 各 地域 集團의 自治力 間의 相互關係 속에서 展開되었다.

그것은 漸次 王權과 中央 集權力이 强化되는 方向으로 進展되었다. 이는 鐵製 農器具의 廣範圍한 普及과 그 效率性의 改善, 水利 施設의 擴充, 우경의 補給 等에 따른 生産力의 增大와 征服 戰爭으로 말미암은 社會分化의 進展으로, 各 集團의 自治力을 뒷받침하던 共同體的인 關係가 解體되고 地域 間 發展의 不均等性이 緩和되는 等의 社會的 變化와 함께 進行되었다. 이에 따라 三國은 旣存의 集團別 上下關係를 一元的인 支配秩序로 轉換해 나가기 위해 官等制를 整備하고 官職 體系를 擴充해 갔다.

三國 初期 各部는 自體의 官員이 있었다. 이들은 같은 位階의 王室 官員보다 下位에 놓였다. 그래서 各部가 分立하는 가운데서도 王室을 中心으로 統合的인 上下 秩序가 形成되었다. 그런데 各部의 自治力이 消滅되어 감에 따라 各部의 官員은 王權下의 一元的인 官等體系에 吸收되었다. 各部의 貴族도 이 官等制에 따라 編制되었다. 그 完成된 體系가 高句麗의 14等 官等制, 百濟의 16等 官等制, 新羅의 17等 官等制였다.

나아가 官僚 組織이 擴充되고 官職 體系가 分化되어 갔다. 그中 百濟는 6佐平制(六佐平制)와 22官府(二十二官部)가 있어 세련된 面貌를 보였으며, 新羅에서는 6世紀 初 以後 兵部(兵部)를 爲始한 各種 官署가 만들어졌다. 이 官等制와 官職 體系의 運營은 身分制에 따라 일정한 規制를 받았다. 出身 身分에 따라 일정한 官等까지만 昇進할 수 있었고, 同一한 官職일지라도 身分에 따라 就任할 수 있는 官等에 差異가 있었다. 新羅의 骨品制(骨品制)는 그 두드러진 例로서, 眞骨(眞骨) 貴族이 主要 官署의 腸을 獨占하여 排他的인 優越性을 誇示하였다.

또한 三國은 被征服 地域의 主要 據點에 軍隊를 駐屯시키고, 크고 작은 城(城)을 單位로 地方官을 派遣해 中央 集權化를 圖謀해나갔다. 몇 個의 自然村落으로 構成된 行政村이 基本的인 末端 行政單位가 되었으며, 다시 數個의 行政村의 묶인 上位 行政單位가 設置되었다.

이러한 地方 行政 制度의 整備는 곧 그 地域의 住民과 土地에 對한 支配權을 中央 政府가 掌握해 감을 의미한다. 中央 政府는 支配領域 內의 住民들에게 租稅를 賦課하고 그들의 勞動力을 徵發하였다. 旣存의 各 邑과 村落의 長들은 이제 國家權力을 執行하는 存在로서 地方 支配 組織의 末端에 隸屬되었다. 이는 中央의 部(部)에서 더 빨리 進行되었다. 부는 三國 中期 以後 高句麗와 百濟에선 首都의 行政 區劃 單位로 變하였고, 同時에 部에 敵(籍)을 둔 貴族의 編制單位로서의 機能도 갖게 되었다. 新羅의 境遇도 6世紀가 지나면서 이와 같이 바뀌어갔다.

한便 中央 集權的인 領域 國家 體制가 됨에 따라, 强化된 國家權力을 媒介로 地域 間의 連繫性이 깊어졌고, 人的·物的 交流가 活潑히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各國의 領域 內에 包含된 여러 種族 集團 間의 相互融合이 進展되었다. 예컨대 토기의 境遇를 보면, 三國 初期에는 領土 內의 여러 地域에서 各其 個性的인 面을 지닌 土器가 生産되었는데, 三國 後期에 접어들면서 各國 領域 內의 土器는 質과 樣式에서 일정하게 均質化되어 가는 面을 보였다. 特히 新羅 土器의 境遇 이러한 面이 顯著하였다. 이는 手工業에 從事하던 匠人(匠人) 및 그 生産品의 需給(需給)에 對한 國家의 統制와 關聯이 있다고 여겨진다. 무덤 樣式에서도 窟式 돌房무덤이 一般化되어 갔다. 또한 佛敎의 受容에 따라, 各 集團이 지니고 있던 固有한 信仰과 意識(儀式)이 普遍性을 지닌 宗敎의 湖水(湖水)로 귀合되어 갔다. 나아가 三國間의 交流와 住民 移住, 戰爭과 領域 變動 等에 따라 三國 住民의 存在 樣態도 同質化되어 갔다. 三國 後期에는 三國 住民의 風俗·衣服·文物이 같았음을 當時 中國人의 記錄에서 確認할 수 있다.

政治와 社會 [ 編輯 ]

三國의 政治는 基本的으로 中央集權體制를 土臺로 한 前提王權 또는 貴族政治였다. 高句麗는 5部族 聯盟體로 始作하여 태조왕 以後 中央集權體制를 갖추었다. 백제는 馬韓의 작은 小國에서 發展하여 3世紀 古爾王 中央集權國家 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新羅는 이보다 늦은 時期에 中央集權化되었으며, 貴族會議는 各各 高句麗 齊家會議 , 百濟 政事巖 會議 , 新羅 和白 會議 이다.

初期 [ 編輯 ]

高句麗·백제·新羅의 社會 發展은 各各 그 時期와 樣相을 달리 한다. 三國은 아직 國家로서의 體制를 完備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漸次 不足 聯盟體的인 社會를 넘어서 古代國家의 體制로 變貌해 갔다. 不足 聯盟體의 社會에서 各 部族은 어느 程度 獨立性을 維持하였으나, 支配層이 形成되고 王權이 漸次 世襲化되자 不足 勢力은 王權에 吸收되었다.

또한 大陸과의 頻繁한 接觸과 衝突을 통해서 한(漢)의 政治 組織 形態를 받아들여 足跡(族的) 基盤 위에서 새로운 支配 體制를 構築해 갔다.

特히 大陸과 直接 接觸할 수 있었던 高句麗 는 일찍이 그 社會 體制를 갖추어 갔다. 卽, 1世紀 初 高句麗는 王號(王號)를 稱할 程度로 發展하고, 不足을 一種의 戰士端的(戰士團的) 組織으로 改編하였다. 高句麗는 5部族 聯盟體 로 始作하여 태조왕 때쯤에는 聯盟 勢力의 擴大에 따라 桂婁部 의 族長이 支配權을 掌握하였다. 그러나 아직 不足 勢力은 殘存하면서 王權을 牽制, 制限하였다.

高句麗의 社會 構造는 水車의 對外的인 征服 戰爭 過程에서 漸次 中央集權 體制로 改編되었고, 그 後 4世紀 에 이르러서는 古代 國家로서의 官僚 體制와 身分 體制를 갖추었다. 이러한 推移(趨移)는 社會·經濟的인 面에서도 마찬가지여서 194年 에는 賑貸法 (賑貸法)이 實施되어, 一種의 救恤 機關 性格을 띠기도 한다.

한便 百濟 의 社會는 元來 馬韓 의 여러 部族의 族弟 組織(族制組織)李 統合된 基盤을 갖추지 못한 채 南下한 夫餘族에 依하여 支配權이 確立되고 王權이 世襲 强化되어 가서, 그 傳統的인 社會의 紐帶가 堅固하지 못하였다. 百濟는 도리어 北部의 恨의 郡縣이나 高句麗의 壓力과 影響을 받는 가운데 支配 機構도 갖추어졌으며, 그 領域의 編制에 있어서 土着 社會的인 痕跡을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백제의 王室은 元來 이 地域의 不足 勢力과는 關係없는 流離民(流移民)의 勢力에서 由來되었으며, 王權을 維持하는 勢力은 흔히 8代 姓氏 [4] 로 대표되는 貴族이었다. 그러나 古爾王 때부터는 6佐平 (六佐平)을 두어 職務를 分掌케 하여 中央集權國家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官等은 16等級으로 分化·發展되었다.

新羅 는 慶州를 中心으로 한 여섯 氏族의 基盤에서 漸次 不足 聯盟을 形成하였다.

그 時調 說話가 複雜하고 朴·碩·김 3星(姓) 時調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新羅 社會는 多元的(多元的)인 社會였으며 後進性을 脫皮하지 못하였다. 氏族 基盤인 6寸이 不足 聯盟體를 形成해 가는 過程에서 6部로 改編되고, 勢力의 擴大에 따라 族長의 稱號도 漸次 變하였으며 그 勢力도 强化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變化는 原始社會의 遺風을 존속시키면서 이에 새로운 形態를 加味해 간 듯하다.

한便 伽倻 社會에 對해서는 飼料가 거의 없어서 伽倻가 어떠한 社會 形態를 維持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不足 聯盟體 社會와 거의 恰似한 것이었으리라 斟酌된다.

다른 한便 韓國 古代 社會의 餘名이라 할 수 있는 이 時代의 社會에는 原始 共同體的인 要素가 漸次 解體되고 族長 勢力을 中心으로 土地의 私有化가 나타났으며, 身分 體制도 漸次 整備되기 始作하였고, 또한 收取 體制는 古代 社會로의 轉移(轉移) 過程 속에서 强調되었으리라 생각된다.

中企 [ 編輯 ]

三國은 모두 여러 次例의 陣痛을 겪으면서 不足 聯盟體的인 社會 組織을 淸算하고 古代 國家로서의 體制를 갖추어 갔다. 不足 聯盟體의 盟主는 專制的인 王權으로 轉換·强化되어 王權의 確立, 王位의 父子 相續制가 이루어지고, 律令格式(律令格式)李 頒布되어 中央集權的인 支配 體制가 確立되었다. 元來의 對蘇 부족장은 그들의 獨立性을 喪失하고 中央과 地方의 官僚 組織 속에 吸收되어 貴族化의 길을 밟게 되었다.

高句麗의 貴族 制度에 對해서는 잘 알 수 없으나, 首相인 代代로 에 任命될 수 있고, 또 이를 選擧할 수 있는 일정한 身分層이 있었던 것 같다. 또 그 밑으로 여러 身分層이 갈려지고, 다른 身分 사이에서는 官職의 任命·結婚 等에 限界가 있었던 것 같다.

백제에는 史氏(沙氏)·延氏(燕氏)·協씨(?氏)·該氏(解氏)·晉氏(眞氏) [5] ·國氏(國氏)·睦氏(木氏)·白氏(?氏) [6] 等 여덟 姓이 있어 백제 支配層의 中心的 位置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時代의 貴族 社會의 實態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은 新羅의 骨品 制度 (骨品制度)이다. 骨品에는 聖骨 (聖骨)· 眞骨 (眞骨), 6頭品(六頭品)·5頭品(五頭品)·4頭品(四頭品) 等이 있었으며, 眞骨 中에서는 高句麗의 古鄒加와 비슷한 葛文王 이란 것이 있었다.

三國은 過去의 多元的인 組織을 淸算하고 王을 中心으로 한 一元化된 官等 體系(官等體系)를 가지고 있었다. 高句麗의 12官等(官等), 百濟의 16官等, 新羅의 17觀燈이 大槪 이때 形成되었다. 官職은 身分에 따라 限界가 있었다. 高句麗의 境遇에는 官府(官府)에 對한 記錄이 없으나 백제는 처음의 6佐平 (六佐平)에서 私費 時代의 22部(部)에 이르러 比較的 整備된 官府들이 이 記錄에 나타난다. 新羅에 있어서는 必要에 따라 兵部(兵部)·娼婦(倉部) 等의 官府가 생겨나서 國務(國務)를 管掌했다.

三國의 政治는 大槪 合坐 制度(合坐制度)로써 行해졌다. 高句麗에서는 首相인 代代로(大對盧)의 任命을 貴族들의 選出한 結果에 따랐으며, 백제에서는 政事巖(政事巖)의 枯死(故事) 같은 것을 미루어 보아 亦是 投票로써 宰相(宰相)을 選出한 듯하다. 新羅의 畫伯 (和白)은 그 뚜렷한 形態로서 私營紙(四靈地)에서 行해졌다.

中央의 權力은 地方에까지 미쳐서 行政的인 區劃이 設定되기에 이르렀다. 過去에 部族들이 雄據하던 地域에는 城(城)을 쌓고 이것을 軍(郡)이라 불렀다. 그 長官을 高句麗에서는 處閭近支(處閭近支) [7] , 백제에서는 軍將(郡將), 新羅에서는 郡太守(郡太守)라고 하였으나 一般的으로 星州(城主)라 했다. 뒤에는 여러 性을 統括하는 行政 區劃이 생겼는데, 이것이 高句麗의 5部(部)였고, 百濟의 5房이었으며, 新羅의 여러 州(州)였다. 그리고 中央 貴族의 根據地인 서울은 高句麗와 백제에서는 모두 5部로, 新羅에서는 6部로 나누는 특별한 行政 區劃을 갖고 있었다.

不足 聯盟 時代의 軍隊는 不足 單位로 組織된 不足軍의 聯盟體였을 것이다. 그러나 古代 國家의 發展은 이러한 聯盟君을 解體시키고 國王의 指揮下에 놓인 全國的인 軍隊를 編成시켰다. 이런 意味에서 王은 곧 全國의 最高 軍司令官이었고, 中央 貴族들이 모두 將軍이 되었다. 新羅의 黨(幢)은 이러한 部隊 組織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貴族君의 補充을 目的으로 하는 靑年 團體가 高句麗의 경당 (?堂)이며, 新羅의 畫廊도 (花郞道)였다. 이 두 組織은 모두 未成年 集團이라는 共同體的인 遺制를 利用하였다는 데에 共通的 特色이 있다. 그들은 모두 國家가 必要로 하는 道義를 硏磨했다. 경당에 모인 靑年들은 經典(經典)을 읽었으며, 花郞道는 圓光(圓光)李 가르쳤다는 世俗오계(世俗五戒)를 믿었다. 그리고 平常時는 名山大川을 찾아다니며 修養했으나 有事時에는 國家를 위한 戰列에 參加했다.

한便 三國은 모두 地方 軍隊를 組織하고 있었다. 地方의 行政 組織은 곧 軍事 組織이기도 했다. 性에는 일정한 數의 軍隊가 駐屯하고, 星州는 곧 指揮官이었다.

古代 國家의 成長에 따라 全國의 모든 土地는 王土(王土)요, 모든 住民은 臣民(臣民)이라는 思想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戰爭에 功이 있는 將軍들에게는 食邑(食邑)이나 祿邑(祿邑)과 같은 名目으로 많은 土地와 捕虜들이 分配되었으며, 그 結果 土地와 奴隸가 私有化되었다.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일정한 地方에 强制로 移動되어서 集團的인 居住를 하는 부곡(部曲)과 같은 賤民集團이 있었다.

또 身分的으로 良人인 農民은 自己들의 自營地(自營地)를 耕作하고 있었다. 國家는 이들을 直接 把握하고 있었으며, 租稅와 力役(力役)을 賦課하였다. 當時는 土地보다도 오히려 人間의 勞動力에 對한 關心이 컸다. 自營農民은 때로는 용민(庸民)으로 轉落하고 또 奴隸가 되기도 했다.

後記 [ 編輯 ]

6世紀 後半에 접어들면서 三國 間의 關係에 새로운 變化가 일어났으며, 이는 大陸의 情勢 變動과 聯關되어 展開되었다. 551年 百濟와 新羅의 聯合軍은 王位 繼承 紛爭의 餘波로 貴族 間의 內紛에 시달리고 있던 高句麗를 攻擊하여 漢江 流域을 占領하였다. 漢江 下流 地域은 百濟가, 上流地域은 新羅가 차지하였다.

高句麗는 이어 北中國의 北齊(北齊)의 軍事的인 壓力과, 柔軟(柔然)을 擊破하고 登場한 몽골 高原의 新興 遊牧民 國家인 突厥 (突厥) [8] 의 積極的인 攻勢에 直面하게 되었다. 이러한 안팎의 危機를 맞아, 高句麗의 貴族들은 對內的으로는 그들間의 紛爭을 收拾하고 貴族 聯立 政權 體制를 성립시켰다. 이는 人 勢力이 되었다. 이 金官伽倻는 5世紀 初 高句麗 광개토왕 (廣開土王)의 洛東江 流域 遠征 以後 크게 衰弱해져, 6世紀 初 新羅에 倂合되었다. 以後 新羅가 洛東江 西쪽 地域으로 勢力을 擴大해나가자, 伽倻의 小國들은 백제나 왜와 聯合하여 對應하였고, 高齡(高靈)의 大伽倻가 이 地域의 中心國이 되었다. 그런데 大伽倻가 554年 의 戰鬪에 敗北한 後 얼마 안 있어 新羅에 竝呑되고, 小白山脈 東쪽의 伽倻地域은 新羅의 領域이 되어, 伽倻는 完全 消滅하였다.

554年 以後 百濟와 新羅 間에는 해를 이은 相쟁이 持續되었다. 그리고 6世紀 終盤 高句麗가 突厥의 攻勢를 沮止한 後 再次 南으로 銳鋒을 돌림에 따라, 高句麗와 新羅의 戰爭이 再開되었다. 이에 三國은 各各 相爭을 벌이는 狀況이 되었다. 領域 國家 體制를 構築한 三國 사이에 더 많은 土地와 人民을 確保하려는 戰爭이 繼續 展開된 것이다.

三國 間에 벌어진 長期間의 戰爭은 社會 分化를 더욱 促進하였다. 貴族은 戰爭을 통해 頻繁히 戰爭에 動員된 小農民層의 境遇, 急迫한 軍事 情勢에 따라 때로는 老弱者도 徵發되었으며, 服務 期間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도 하였다. 그들은 平常時에도 勞役에 動員되었다. 그러한 狀況에서 高利貸가 盛行하였고, 一部 小農民層은 沒落해 갔다.

三國에서 領域 國家 體制가 자리 잡아가고 社會 分化가 進展됨에 따라, 村落의 共同體的 關係가 急速히 解體되고 地域 間의 住民交流가 活潑해졌다.

地方의 有力가나 沒落한 農民의 一部는 首都로 올라와 生存과 出世를 圖謀하였다. 그들은 當時 잦은 戰爭에 따라 늘어난 兵力 需要와 迅速한 動員力의 必要에 따라 行해진 募兵(募兵)에 應하기도 하였으며, 貴族의 麾下에 몸을 依託하여 立身(立身)을 摸索하기도 하였다. 遊歷한 貴族은 政治的·軍事的 必要에 따라 이들을 積極的으로 吸收하여 勢力 擴大를 圖謀하였다.

한便 東아시아의 國際 情勢는 6世紀 後半 中國에서 數(隋)나라가 登場함에 따라 根本的으로 새로운 局面을 맞게 되었다. 隋나라는 3百餘 年間 分裂되어 있던 中國을 統一하고 몽골 高原의 突厥을 擊破·服屬하였다.

經濟 [ 編輯 ]

記錄上으로는 三國 初期부터 貨幣가 使用된 것으로 보이나 遺物이 發掘된 것은 없으나, 物品貨幣가 主를 이루었다고 여겨진다. [9] 新羅에서는 5世紀 말과 6世紀 初, 都邑인 慶州에 市場을 열고 監督하는 機關 [10] 을 두었다.

三國의 文化 發達 [ 編輯 ]

佛敎 道敎 의 受容 [ 編輯 ]

三國은 律令을 制定하고 地方制度와 中央組織을 改編하여 王權 强化에 힘쓰던 4世紀에 佛敎를 受容하였다. 高句麗는 中國의 前進을 통하여 小獸林王 때에 佛敎를 受容하였고(372), 百濟는 東進에서 枕流王 때 佛敎를 받아들였다(384). 高句麗를 통하여 佛敎가 傳來된 新羅는 1世紀 가까운 民間傳承을 거쳐 法興王 때 비로소 佛敎를 國家的으로 公認하였다(527).

三國은 佛敎를 信仰으로 널리 受容하였다. 中央集權體制 確立과 地方勢力의 統合에 힘쓰던 이 時期에 佛敎는 새로운 國家 精神의 確立에 寄與하고 强化된 王權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役割을 하였다. 高句麗와 백제에서는 思想的으로 佛敎를 理解하는 데에도 相當히 높은 水準이었다. 特히 新羅에서는 佛敎가 王權과 密着되어 盛行하였다. 僧侶가 醫術을 擔當하고 傳統 信仰에서 神聖하게 여기展 場所에 査察을 建立하면서 佛敎는 漸次 傳統信仰의 機能을 代身하였다. 新羅에서 널리 받아들인 佛敎의 中心 敎理는 業說과 彌勒佛 信仰이었다. 이는 王이 곧 부처라는 思想을 통하여 王의 權威를 높여 주는 한便, 貴族들의 特權을 認定해 주는 一面이 있었다. 新羅의 여러 王들이 佛敎式 이름을 가진 것도 그 때문이다. 아울러 彌勒佛이 나타나 理想的인 佛國土를 建設한다는 彌勒佛 信仰은 眞興王 때 組織化된 花郞 制度와 密接한 關聯을 가지면서 新羅 社會에 定着되었다.

三國에는 道敎도 傳來되어 山川 崇拜나 神聖 思想과 結合하여 貴族 社會를 中心으로 歡迎받았다. 百濟의 算數무늬 甓돌과 山水무늬 기와는 自然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생각을 담고 있으며, 백제 琴童 臺香爐는 神仙들이 사는 理想鄕을 形象으로 表現하였다. 高句麗 古墳에 그려진 四神圖는 道敎의 方位神을 그린 것으로 죽은 者의 死後 世界를 지켜 주리라는 믿음을 表現하고 있다. [11]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김태식, 〈4~5世紀 國際情勢와 伽倻聯盟의 變動〉, 《4~5世紀 東亞細亞 社會와 가야》, 金海市, 2001年.; 弘益大 김태식 敎授의 主張 Archived 2007年 9月 27日 - 웨이백 머신 ; 김태식, 〈사국時代論〉, 《韓國古代史硏究》 46, 한국고대사학회, 2007年 6月, 101~150쪽.
  2. 羅貫中 이 쓴 《 三國志演義 》가 아닌 (晉)의 陳壽가 쓴 《三國志》이다.
  3. <量職工도>는 凉나라의 원제(元帝)인 小疫(蕭繹, 505∼554)李 帝位(帝位)에 오르기 前인 형주自社(荊州刺史) 在任時(526∼539)에 編纂한 圖書(圖書) 이다
  4. 史氏(沙氏)·該氏(解氏)·延氏(燕氏)·協씨(協氏)·晉氏(眞氏)·國氏(國氏)·睦氏(木氏)·墓氏(苗氏)
  5. 또는 신氏(?氏, 愼氏)
  6. 또는 墓氏(苗氏)
  7. 或은 道理(都吏)
  8. 투르크(Turk)
  9. 「貨幣」《韓國民族文化大百科》, 韓國學中央硏究院
  10. 「신라본기」《三國史記》
  11. 國史 編纂 委員會, 《高等學校 國史》, 敎育 人的 資源部, 서울 2004.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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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 의 歷史
以前 時代 三國 時代
紀元前 57年 ~ 668年
다음 時代
元三國 時代 南北國 時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