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의 佛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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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의 佛敎 소수림왕 (小獸林王) 2年(372)에 前震 (前秦)王 苻堅 (符堅)이 使臣(使臣)과 함께 純度 (順道)를 보내 佛像과 佛經(佛經)을 傳한 것이 그 始初이다. [1] 2年 後(374) 阿道 (阿道)가 들어와 성문사(省門寺: 肖門寺)와 伊不蘭寺(伊弗蘭寺)를 세운 것이 또 韓國의 (寺刹)의 始作이다. [1] 그러나 이것은 國交를 통한 公式 轉入으로 實狀 民間에 먼저 佛敎 가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1]

高句麗의 佛敎는 한마디로 學術 外交佛敎라고 할 수 있다. [2] 卽, 高句麗의 學僧 等은 中國 에 가서 經典 을 배우고 硏究함을 求法(求法)의 最上目標로 하였으며, 中國 의 僧侶를 指導할 수 있는 高僧도 있었다. [2] 그 代表로 장수왕 (在位 413∼491) 때 태어난 승랑 (僧朗)을 들 수 있다. [2]

승랑 은 中國에 들어가 三論學 (三論學)을 깊이 硏究하여 學問的 體系를 完成함으로써 新三論宗 (新三論宗)이라는 새로운 思想을 開拓했다. [2] 승랑 은 中國 思想界를 指導한 最初의 人物로서, 兩廡制 (梁武帝) 11年(512)에 優秀한 學僧(學僧) 10名을 指導하였으며 中國에서 一生을 마쳤다. [2]

高句麗 學僧들은 中國만이 아니라 日本 에도 건너가 佛敎學術과 藝術面에 큰 貢獻을 하였다. [2] 卽, 最初의 全校自認 慧便 (惠便)을 爲始해서 惠慈 (惠慈), 佛敎 藝術家인 曇徵 (曇徵), 日本 三論學의 始祖인 慧灌 (惠灌) 等이 그 例이다. [2] 그리고 三國統一 新羅 佛敎 를 일으킨 高句麗 勝 惠諒 (惠亮)도 들 수 있다. [2]

各州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