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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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羅
耽羅
? [a] ~ 1404年
  성주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
    星州靑 이 있었던 것으로 推定되는 地域
수도 無根性 (初期)
제주성 (後記)
政治
政治體制 君主制 (? ~ 938年)
성주祭 (938年 ~ 1404年)
國王 / 星州 [b]
? ~ ? [c]
紀元前 58年 ~ 7年
934年 ~ 938年
938年 ~ 1024年
? ~ 1404年

고을나王 (初代?)
侯王
自牽王
고말로
고봉례 (말대)
王子 [d]
662年 ~ ?
? ~ 1043年
1043年 ~ ?
? ~ 1404年

固請 (初代)
兩頭라
良好잉
문충歲 (말대)
국성 양氏 , 高氏 , 夫氏
歷史
 ? 建國 (神話上) 紀元前 2337年
 ? 部族社會 始作 紀元前 58年
 ? 성주祭 始作 938年
 ? 滅亡 1404年
지리
位置 濟州道
面積 1833.2km 2
人文
共通語 耽羅어 , 中世 祭主語 , 日本語 ? [1]
데모님 耽羅人
人口
1400年 어림 約 10萬名 [2]
宗敎
宗敎 佛敎 , 儒敎 , 巫俗信仰
기타
現在 國家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耽羅 (耽羅)는 前近代 濟州道 에 存在했던 王國 이다. 統一新羅時代 까지 韓半島의 나라들과 交流를 하고 後三國 時代 高麗 가 分裂된 三國을 統一한 뒤 으로 服屬되었으며, 400年에 걸친 星州時代 동안 濟州 高氏 星州 로서 鉏耽羅를 다스리고 남평 文氏 가 王子로서 洞耽羅를 다스리는 等 한동안 自治權을 維持하다가 15世紀 初盤에 朝鮮 太宗 時期에 完全 倂合되었다.

國號 [ 編輯 ]

耽羅는 때때로 耽毛羅國 (耽牟羅國), [3] [4] 涉羅 (涉羅), [5] 乇羅 (?羅), [5] 담모라 (耽牟羅), [5] 담라 (憺羅) [5] 로도 指稱되었는데, 이 이름들은 모두 " 섬나라 "를 의미하며, [6] [7] 三國志 》 동이전에서는 주호 (州胡)라고 적고 있다. [8]

알렉산더 보빈 濟州道 의 옛 이름이 탐무라이며 日本語로 他니무라( ) 또는 他미무라( )이기에 15世紀 以前에 韓國語 使用者로 代替되기 前에 濟州島에 日本語 使用者가 存在했다고 主張한다. [9]

建國 神話 [ 編輯 ]

한 傳說에 따르면 耽羅를 建國한 세 名의 神聖한 始祖인 양을나 , 고을나 , 부을나 는 紀元前 24世紀에 땅의 세 個의 구멍에서 나왔다고 한다. 三姓穴 로 알려진 이 구멍은 只今도 濟州市 에 保存되어 있다. [10] [11]

太初(太初)에 사람이 없었는데, 세 新人(神人)李 漢拏山 北쪽 기슭 某興穴(毛興穴)로부터 솟아 나왔다. 맏이는 양을나 (良乙那), 그 다음을 고을나 (高乙那), 셋째는 부을나(夫乙那)라고 했는데 세 사람은 狩獵을 하면서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었다. 어느날 나무 箱子가 東쪽 바닷가로 떠내려 온 것을 發見하고 나가서 열어 보니 그 안에 石函(石函)이 있고 붉은 띠에 紫朱빛 옷을 입은 獅子(使者) 한 사람이 따라와 있었다. 石函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세 處女와 購讀(駒犢; 망아지와 송아지 等 家畜)과 五穀(五穀)의 種子가 있었다. 獅子(使者)가 "우리는 日本국(日本國)의 使臣입니다. 우리 王이 세 王女를 낳고 말하기를 「西海(西海)의 中岳(中嶽)에 信者(神子) 세 사람이 내려와 將次 나라를 열고자 하나 配匹이 없구나」 하고는 저에게 分付하여 세 딸을 모시고 여기에 오도록 한 것입니다. 마땅히 配匹로 삼아 大業(大業)을 이루십시오."라고 말한 後 忽然히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順序에 따라 세 女子를 나누어 아내로 삼고서, 샘이 달고 땅이 肥沃한 곳으로 가서, 화살을 쏘아 땅을 占치고는 양을나 가 사는 곳을 第一도(第一都)라 하였고, 고을나 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都)라 하였으며, 부을나 가 사는 곳을 第三道(第三都)라 하였다. 처음으로 五穀을 播種하고 家畜을 길러 나날이 富裕하고 子孫이 蕃盛하게 되었다. 15貸損에 兄弟 세 사람이 新羅에 照會하니 王이 큰아들을 星州(星主)라 부르고, 둘째 아들을 王子(王子)라 불렀으며, 막내아들을 道內(都內)라 불렀다. 邑號(邑號)는 耽羅(耽羅)라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왔을 때 처음 耽津에 碇泊하였기 때문이다. 各其 寶蓋(寶盖)와 의대(衣帶)를 하사하고 돌려보냈다. 子孫이 蕃盛하면서 高(高)氏가 星州(星主)가 되고, 量(良)氏가 王子(王子)가 되며, 富(夫)氏가 道上(徒上)李 되었다. 後에 兩(良)을 量(梁)으로 고쳤다.

?  高麗史 卷57

說話에 따르면 양을나(楊乙那) [12] 가 濟州島에 온 後, 半神話的인 箱子가 섬 海岸에 밀려왔다. 양을나는 箱子를 뒤져 세 女人, , , 그리고 , 穀食 , 序曲 , 보리 , 대나무 等의 農耕種子를 發見했다. 이윽고 세 사람은 耽羅國을 세웠다. 그는 濟州 量 本館의 始祖인 兩黨의 傳說的인 祖上으로 여겨진다. [13] [14]

歷史 [ 編輯 ]

耽羅의 建國이나 初期 歷史에 對한 歷史的 記錄은 發見되지 않았다. 그러나 濟州 高山梨 遺跡 에서 新石器 時代 의 隆起門 土器와 打製 石槍, 돌도끼 等 紀元前 3000年 以前의 遺物이 發見되었으며 [15] 南濟州郡 의 상모리 貝塚 에서는 韓半島 陸地部의 것과 類似한 민무늬 토기들이 發見되었다. 濟州 삼양동 遺跡 에서는 靑銅器 말에서 初期 鐵器時代에 該當하는 原形 住居 形態가 發見되었고, 濟州 용담동 遺跡 에서는 耽羅時代 初期에 該當하는 遺物들이 大擧 出土되었다. [16] 이를 볼 때 이른 時期부터 濟州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考古學的 證據에 따르면 耽羅人 들은 西紀 1世紀까지 韓半島 뿐만 아니라 中國 , 日本 , 東南아시아 , 남인도 촐라 王朝 와 活潑한 貿易을 벌였다. 王國에 對한 最初의 歷史的 言及은 西紀 3世紀에 쓰여진 中國 正史 歷史書인 三國志 인데, 三國志에 따르면 馬韓 西쪽의 큰 섬에는 주호 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말이 韓人 과 같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의 생김새는 거의 알몸에 가깝게 가죽옷을 걸쳤으며 머리 模樣이 선비족 과 恰似하다고 진수는 적고 있다.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其人差短小校勘 言語不與韓同. 皆?頭如鮮卑 但衣韋校勘 好養牛及?. 其衣有上無下 略如裸勢校勘. 乘船往來 市買韓中.

또 주호(州胡)가 馬韓 西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다. 그 사람들은 大體로 키가 작고 말도 韓人(韓)과 같지 않다. 모두 선비족 처럼 머리를 削髮하였으며, 옷은 오직 가죽으로 해 입고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옷은 上衣만 입고 下衣는 없기 때문에 거의 裸體와 같다. 배를 타고 往來하며 한(韓)에서 物件을 사고판다.

? 三國志(三國志) 胃서 동이전(魏書 東夷傳) 한(韓) [17] [18] [15]

韓半島와 區別되는 獨特한 言語와 文化를 가진 주호인들은 本土의 馬韓 과 交易을 했다. 그러나 주호가 西海 의 작은 섬이었다고 主張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學者들과 當局者들에 依해 耽羅와 함께 주호의 停滯가 論難이 되고 있다.

《三國史記》에는 百濟 문주왕 (文周王) 2年( 476年 )에 該當하는 時期에 탐라가 백제에 使臣을 보내 방물을 바쳤고, 문주왕으로부터 恩率 의 官等을 받았다고 한다. [19] 耽羅側 傳承에 따르면 淡王 (聃王)李 다스리던 때로, 政治的인 服屬이라기보다 獨自的인 政治權力과 自律的인 外交權을 行使하고 있던 耽羅가 主導한 外交 關係였다. 地運王 (指雲王, 483~508)의 治世에 該當하는 백제 東城王(東城王) 20年( 498年 ) 8月, 東城王은 耽羅가 朝貢을 바치지 않는다는 口實로 耽羅를 攻擊하기 위해 武珍州(武珍州)까지 내려왔고, 耽羅가 使臣을 보내 和議(和議)를 맺고 百濟軍을 回軍시켰다고 한다. [20] [21]

耽羅 高氏의 傳承에는 淡王 때 新羅로 보내는 耽羅의 조공선(朝貢船)을 伽倻抛(伽倻浦)에서 가락(駕洛)에 약탈당하거나 檢山砲(劒山浦)에서 百濟軍에게 약탈당하기도 했다고 傳하고 있는데, 百濟 外에도 高句麗 및 新羅와도 耽羅는 緊密한 關係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三國史記》 및 《魏書》(魏書)에는 高句麗 문자명왕 北緯 에 보낸 使臣 豫실불이 北緯 世祖에게 "(高句麗에서) 黃金은 扶餘에서 나고 家屋(珂玉)은 涉羅(涉羅)에서 나는데, 扶餘는 물길에게 쫓겨나고 섭라는 百濟에 倂合되었기로 바치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하는 內容이 있는데, 涉羅를 耽羅로 非情할 境遇 耽羅와 高句麗 사이에는 일찍부터 적지 않은 量의 가(珂) 卽 眞珠를 비롯한 物品들의 交易이 活潑했고, 그것은 力學關係로 보아 政治的인 交涉을 同伴한 것이었지만, 백제가 高句麗 攻擊의 後遺症을 딛고 차츰 黃海 南部의 海上權을 回復해나가면서 高句麗와 耽羅의 交易은 어려워졌고, 東城王이 耽羅를 征伐하기 위해 武珍州까지 내려간 것은 耽羅에 對한 影響力 强化, 乃至 高句麗와의 聯關性을 完璧하게 끊어놓으려는 目的에서였다. 耽羅는 백제의 干涉으로 新羅 및 高句麗와 交易을 더 維持할 수 없게 되었고, 이때 百濟의 內法佐平 (內法佐平) 고진노(?眞老)가 耽羅에 와서 山川地形을 視察하였다고 한다.

日本과의 關係는, 익왕 (翼王, 243~293) 때에 갈나고(曷那古)라는 이름의 倭人이 耽羅에 왔다는 傳承이 있으나 確實하지 않다. 야마토 時代 에는 야마토 王國 에서 耽羅와 交流하기 위해 耽羅에 犬耽羅社 를 派遣하였으며, 《 日本書紀 》에는 백제가 滅亡한 以後 耽羅에서 倭에 여러 次例 使臣을 보냈다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 唐나라에서 歸國하는 日本 遣唐使船이 偶然히 耽羅에 寄港했고, 당군의 侵攻을 두려워하는 耽羅는 한동안 日本에 朝貢을 繼續 보냈다고 한다. 또한 《日本書紀》에는 508年 에 耽羅가 백제와 처음 通交하였다고 되어 있다.

多明王 (多鳴王, 533~558)의 治世에 이르러는 百濟 聖王 (聖王)이 新羅에 反擊하기 위하여 耽羅에서 兵士를 낼 것을 要求하였다고 한다. 《水西》(隋書)에는 當時 이미 耽毛羅國, 卽 耽羅國이 백제에 附屬되어 있다고 되어 있어, 줄곧 백제의 影響力 아래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2] [23] [24] [25] [26]

또한 선덕여왕 時期 新羅가 皇龍寺 9層塔 을 세우면서 제4층에 乇羅(托羅) 卽 耽羅를 配列하고 있다. 體三王 (體參王, 583~608)의 治世에 (隋)의 戰艦 1隻이 颱風으로 耽羅에 漂着한 것을 백제를 經由하여 돌려보냈다고 하며, 凄凉王 (處良王, 658~683)의 治世에 이르러 백제가 滅亡했다. 663年 에 韓半島 陸地部에서 벌어진 백강구 戰鬪 에서 (唐)의 劉仁軌(劉仁軌)에게 降伏한 者들 가운데 耽羅의 使臣도 包含되어 있었는데(《구당서》), 類人猿(劉仁願)에게 三新人(三神人)의 高度地形(古都地形)을 바치고 劉仁軌의 案內로 태山川祭(泰山天祭)에 參席하였다고 한다. 耽羅의 使臣이 백강구 戰鬪 以後 降伏하였다는 記事를 볼 때 백제 復興運動에 탐라도 깊이 介入되어 있었음을 斟酌할 수 있다.

백제가 滅亡한 뒤에는 新羅에 附屬되었다. 新羅는 耽羅의 세 王子에게 星州(星主), 王子(王子), 道內(都內)라는 稱號를 주었다. 西紀 7世紀 後半 新羅 文武王 때의 일이라는 說도 있는데, 《三國史記》에는 文武王 2年( 662年 )의 일로, 耽羅國週 道童音律이 와서 降伏하였다고만 되어 있을 뿐 耽羅의 國主가 高氏 姓을 使用한 痕跡은 없다. [27] 《영주지》 및 《성주고氏家電》에는 高乙那의 15代 손이라는 고후(?厚), 固請(?淸), 高階(?季) 三兄弟가 耽津을 거쳐 新羅에 入朝하였다고 적고 있다. [28] 이때 貴한 손님이 南쪽에서 올 것임을 알리는 별이 하늘에 보였다 하여 新羅에서는 고후에게 星州 라는 綽號를 주고, 固請은 新羅王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나오게 한 뒤 '王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王子(王子)라는 稱號를 주었고, 나머지 한 사람 高階에게는 道內(徒內)라는 綽號를 주었다고 한다. 이 星州, 王子라는 綽號는 以後 耽羅 君主의 稱號가 되었다.

南北國時代 東中國海 의 海上交通의 要衝地였던 耽羅國은 海上貿易의 據點이 되었다. 9世紀 新羅 上인 場보고 는 新羅 國王의 인가 아래 耽羅와 莞島 를 據點으로 新羅 黨 日本 三國과의 交易을 活潑히 하였고, 北쪽으로는 日本 壚土半島(이시카와縣)와 쥬雨傘 미나토(아오모리縣 고쇼가와라시)에서 南쪽으로는 광저우, 西쪽으로는 산둥半島에 이르는 海上貿易을 實施하여 航海 安寧을 위해 觀世音菩薩 을 모시기 위한 법화사를 耽羅와 莞島에, 赤山法華院을 산둥半島에 建立하였으며, 이 삼사원의 建立에 依해 耽羅는 大乘 佛敎 에 依한 共通의 信仰과 함께 東아시아 文化圈 에 包攝되었다. [29]

耽羅는 935年 新羅 滅亡 後 暫時 獨立을 되찾았다. 그러나 938年 高麗 에 服屬되었는데, 濟州 高氏의 傳承에서는 민왕(岷王, 908~933)李 이미 高麗에 使臣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쳤다고 적고 있다. 自牽王 (933~938)李 王子 양차미(梁且美)와 함께 938年 12月에 太子 고말로 (末老)를 考慮에 보내 入朝시켰고, 高麗 太祖는 말로에게 星州, 王子 爵位를 除授하고 耽羅의 宮室(宮室)을 星州靑 (星主聽)이라 改稱하였다고 한다. [30] 1105年 ( 高麗 肅宗 10年)에 耽羅軍이 設置되어 高麗의 地方行政區域人 全羅道 에 正式으로 編入되었고 1121年에 제주군으로 改稱되었으며 1153年에는 耽羅縣으로 變更되어 中央에서 地方官(縣令)李 派遣되었지만, 星州, 王子 等 옛 支配者의 稱號들이 認定되는 等 한동안 地方 自治權을 維持했다. 그러나 1168年 羊水의 난 과 같이 高麗의 境內館에 對한 祭主인 들의 叛亂이 여러 次例 일어나기도 하였다. [31]

1271年 元나라 에 抗拒하던 高麗의 三別抄 들이 耽羅에 侵入하여 耽羅 支配層을 몰아낸 後 耽羅를 元나라에 抵抗하는 據點地로 삼았다. 1273年 元나라는 濟州島에 남아있던 三別抄 勢力을 除去한 後 1275年에 耽羅摠管府 를 設置하여 元나라의 直轄地로 삼고 말들을 기르는 牧場들을 세웠으며, [32] 元나라는 몽골軍을 耽羅에 派遣하여 守備隊와 말을 몰게 하였는데, 濟州人들은 이들 몽골軍을 牧胡 라고 불렀다. 그 後 1294年에 원 成宗 이 卽位하자 元나라는 高麗 國王의 要請에 따라 耽羅를 高麗에 返還하고 원과 高麗의 共治下에 두었는데, 1368年 元나라 가 滅亡하고 明나라 가 들어서자 1374年에 牧胡의 난 이 일어났고 考慮는 25,000名의 軍隊를 보내 牧胡 들을 虐殺해 亂을 鎭壓한 後 耽羅를 다시 高麗의 直轄地로 삼았다. [33]

朝鮮 太宗 (太宗) 2年( 1402年 ) 星州 고봉례 (?鳳禮, ?∼1411)의 臺에 이르러, 성주와 王子의 名稱이 分數에 맞지 않는다는 理由로 星州는 座도지관(左都知管), 王子는 右島地官(右都知管)으로 改稱되어, 耽羅에 形式的으로 남아있던 옛 耽羅國의 殘滓는 모두 사라지고 耽羅는 祭主로서 朝廷의 直接支配를 받게 되었다. [34] [35] 城主의 人夫(印符)를 返納한 고봉례는 1407年 5月 友軍同志冢弟(右軍同知摠制), 1410年 에는 濟州按撫使가 되었으며, 1411年 8月 아들 常溫(尙溫)에게 世職(世職)인 濟州道主管座도지관(濟州都州官左都知管)을 물려주고 漢城에서 死亡하였다.

對外 關係 [ 編輯 ]

백제와의 關係 [ 編輯 ]

  • 地運王(指雲王, 483~508) - 8月, 百濟, 耽羅를 치려고 武珍州[(武珍州 : 光州(光州)]까지 내려옴. 耽羅, 使臣을 보내 和議(和議)하고 百濟軍을 回軍(回軍)시킴. 耽羅, 百濟의 干涉으로 新羅 및 高句麗와 交易을 中斷함. 百濟의 內法佐平(內法佐平) 고진노(?眞老), 耽羅의 山川地形을 視察함.
  • 多明王(多鳴王, 533~558) - 10月, 百濟 , 新羅에 反擊하기 위하여 耽羅軍(耽羅軍)의 出兵을 要求함.
  • 동성왕(479~501) - 耽羅國을 服屬시켰다. (498)

高句麗와의 關係 [ 編輯 ]

  • 地運王(指雲王, 483~508) - 特産物 가[(珂 : 晋州(珍珠)]를 高句麗에 보냄.

新羅와의 關係 [ 編輯 ]

  • 淡王(聃王, 453~483) - 新羅에 가는 耽羅의 조공선(朝貢船), 伽倻抛(伽倻浦)에서 가락群 (駕洛軍)에게 약탈당함. [그 後 檢山砲(劒山浦)에서는 百濟軍(百濟軍)에게 약탈당함]

中國과의 關係 [ 編輯 ]

  • 體三王(體參王, 583~608) - (隋)의 戰艦 1隻, 颱風으로 耽羅에 漂着함. 수(隋)의 戰艦과 兵士를 백제를 經由하여 돌려보냄.
  • 凄凉王(處良王, 658~683) - 三新人(三神人)의 高度地形(古都地形)을 (唐)의 五都督府(五都督府) 類人猿(劉仁願)에게 바침. 黨(唐)의 진수사(鎭守使) 劉仁軌(劉仁軌)의 案內로 태山川祭(泰山天祭)에 參席함.

日本과의 關係 [ 編輯 ]

  • 익왕(翼王, 243~293) - 왜(倭) 使臣 갈나고(曷那古) 耽羅에 옴

考慮와의 關係 [ 編輯 ]

  • 민왕(岷王, 908~933) - 高麗에 使臣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침
  • 自牽王(自堅王, 933~938) - 12月, 太子 고말로(?末老)를 高麗에 入朝(入朝)케함. 太祖(太祖) 고말로(?末老)에게 星州(星主), 王子(王者) 爵位를 除授함. 宮室(宮室)을 星州靑(星主聽)이라 改稱함.

朝鮮과의 關係 [ 編輯 ]

  • 星州 고봉례(星主 ?鳳禮, ?∼1411) - 高麗末에 탐라가 여러番 謀反 (謀反)하므로 이를 懷柔하려는 調整에 依하여 1386年 典衣副正(典醫副正) 履行 (李行)과 大護軍 眞如의(陳如儀)가 耽羅를 慰撫하고 돌아올 때 함께 開京으로 들어와서 1388年 濟州畜馬 兼 安武別監(濟州畜馬兼安撫別監)李 되었다. 太祖 때는 頻繁히 軍馬를 바치는 等 誠意를 다하였다. 1402年 耽羅星州 在職時에 新羅 以來로 提州를 支配한 高氏(?氏)와 양氏(梁氏)가 世襲한 星州(星主)와 王子(王者)의 名稱이 分數에 맞지 않는다고 改正하여줄 것을 請하여, 星州는 座도지관(左都知管), 王子는 右島地官(右都知管)으로 改稱되었다. 1407年 5月 友軍同志冢弟(右軍同知摠制), 1410年頃에는 濟州按撫使가 되었다. 1411年 8月 아들 常溫(尙溫)에게 世職(世職)인 濟州道主管座도지관(濟州都州官左都知管)을 承襲시켜 줄 것을 請하여 承繼시키고 漢城에서 死亡했다. 麗末鮮初에 提州를 安武艦에 큰 功이 있었고, 太宗 의 至極한 恩寵을 받았다.

歸屬 [ 編輯 ]

遺跡 發掘 [ 編輯 ]

  • 1997年 耽羅國 形成期 집터.돌 담牆 發掘 [39]
  • 2011年 濟州海軍基地 現場서 송국리型住居地 等 發掘 濟州海軍基地 建設 現場에서 耽羅國時代 成立期에 形成된 송국리型住居地와 유구 等이 大量 發掘됐다 [40]
  • 2012年 文化財廳(廳長 金 찬)은 26日 濟州特別自治道 제주시 용담동 2696-2番地 一帶 先史遺跡地와 支石墓 3基를 包含한 21筆地(10,279m 2 )의 ‘濟州 용담동 遺跡’을 國家指定文化財인 史跡으로 指定 豫告한다고 밝혔다. [41]

歷代 君主 [ 編輯 ]

耽羅 國王 [ 編輯 ]

  • 고을나王 (高乙那王) (紀元前 2337年 ~ 2205年)
  • 件王 (建王) (紀元前 2205年 ~ 1766年)
  • 三界王 (三繼王) (紀元前 1766年 ~ 1122年)
  • 一望王 (日望王) (紀元前 1122年 ~ 934年)
  • 度帝王 (島濟王) (紀元前 934年 ~ 770年)
  • 언경王 (彦卿王) (紀元前 770年 ~ 618年)
  • 步明王 (寶明王) (紀元前 618年 ~ 519年)
  • 行天王 (幸天王) (紀元前 519年 ~ 425年)
  • 환왕 (歡王) (紀元前 425年 ~ 314年)
  • 式王 (湜王) (紀元前 314年 ~ 246年)
  • 욱王 (煜王) (紀元前 246年 ~ 206年)
  • 皇王 (惶王) (紀元前 206年 ~ 156年)
  • 위왕 (偉王) (紀元前 156年 ~ 104年)
  • 영왕 (榮王) (紀元前 104年 ~ 57年)
  • 侯王 (厚王) (紀元前 57年 ~ 6年)
  • 두明王 (斗明王) (紀元前 6年 ~ 紀元後 44年)
  • 船主王 (善主王) (祈願後 44年 ~ 93年)
  • 指南王 (知南王) (祈願後 93年 ~ 144年)
  • 成方王 (聖邦王) (祈願後 144年 ~ 195年)
  • 문성왕 (文星王) (祈願後 195年 ~ 243年)
  • 익왕 (翼王) (祈願後 243年 ~ 293年)
  • 지효왕 (之孝王) (祈願後 293年 ~ 343年)
  • 숙王 (淑王) (祈願後 343年 ~ 393年)
  • 懸房王 (賢方王) (紀元後 393年 ~ 423年)
  • 旣往 (璣王) (祈願後 423年 ~ 453年)
  • 淡王 (聃王) (祈願後 453年 ~ 483年)
  • 地運王 (指雲王) (祈願後 483年 ~ 508年)
  • 서왕 (瑞王) (祈願後 508年 ~ 533年)
  • 多明王 (多鳴王) (祈願後 533年 ~ 558年)
  • 淡王 (談王) (祈願後 558年 ~ 583年)
  • 體三王 (體參王) (祈願後 583年 ~ 608年)
  • 성진王 (聲振王) (祈願後 608年 ~ 633年)
  • 洪王 (鴻王) (祈願後 633年 ~ 658年)
  • 凄凉王 (處良王) (祈願後 658年 ~ 683年)
  • 冤枉 (遠王) (祈願後 683年 ~ 708年)
  • 漂淪王 (表倫王) (祈願後 708年 ~ 733年)
  • 兄王 (逈王) (祈願後 733年 ~ 758年)
  • 治道王 (致道王) (祈願後 758年 ~ 783年)
  • 욱王 (勖王) (祈願後 783年 ~ 808年)
  • 千원王 (天元王) (祈願後 808年 ~ 833年)
  • 好空王 (好恭王) (祈願後 833年 ~ 858年)
  • 소왕 (昭王) (祈願後 858年 ~ 883年)
  • 硬直王 (敬直王) (祈願後 883年 ~ 908年)
  • 민왕 (岷王) (祈願後 908年 ~ 933年)
  • 自牽王 (自堅王) (祈願後 933年 ~ 938年)
[42]

鉏耽羅의 星州 [ 編輯 ]

  • 고말로 (?末老) (938年 ~ 1030年)
  • 固有(?維) (1030年 ~ 1088年)
  • 고조기(?兆基) (1088年 ~ 1157年)
  • 고정익(?挺益) (1157年 ~ 1214年)
  • 古跡(?適) (1214年 ~ 1270年)
  • 고여림(?汝霖) (1270年 ~ 1276年)
  • 고정간(?貞幹) (1276年 ~ ?)
  • 고순(?巡) (? ~ ?)
  • 고복수(?福壽) (? ~ 1281年)
  • 고인단(?仁旦) (1281年 ~ ?)
  • 高首座(?秀佐) (? ~ 1318年)
  • 고석(?碩) (1318年 ~ ?)
  • 高純良(?順良) (? ~ 1357年)
  • 고순원(?順元) (1357年 ~ ?)
  • 高명걸(?明傑) (? ~ 1372年)
  • 고신걸(?臣傑) (1372年 ~ 1387年)
  • 고봉례 (?鳳禮) [43] (1387年 ~ 1411年)
[44] [45]

桐耽羅의 王子 [ 編輯 ]

  • 固請(高淸) 王子(王子)
  • 量龜尾(梁具美) 王子(王子)
  • 兩頭라(梁豆羅) 王子(王子)
  • 良好잉(梁號仍) 王子(王子)
  • 水雲나(殊雲那) 王子(王子), 中護將軍
  • 門착(文??) 王子(王子)
  • 문양부(文陽夫) 王子(王子)
  • 문영희(文永禧) 王子(王子)
  • 文身(文愼) 王子(王子)
  • 문창우(文昌祐) 王子(王子)
  • 文創油(文昌裕) 王子(王子) 및 星州(星主)
  • 《燃藜室記述》 및 《同門廣告》

    "耽羅摠管府가 廢止되고 난 뒤인 1294年 11月 4日에 文創油는 以前 性主人 고인단(高仁旦)의 職位와 함께, 耽羅의 星州 및 王子로서 紅晶(紅?), 象牙 홀(牙笏), 母子(帽), 量産(盖), 그리고 신발(靴)을 하나씩 받았다. 高麗에서는 耽羅가 自身들에게 歸順했다(歸于我)는 理由로 이 物品들을 하사했는데, 耽羅에는 如前히 많은 몽골人 牧胡들이 남아있었고, 高麗가 亡하기 直前까지 이들의 叛亂은 持續됐다."

《燃藜室記述》 "王子 文創油는 忠烈王에 依해 耽羅의 성주로 任命되었다."

《同門廣告》 "王子인 文創柳에게 城主의 稱號가 下賜됐고, 그를 補佐하는 고인조(高仁朝) 等은 장복(章服)을 받았다."

? 《燃藜室記述》 및 《同門廣告》
  • 門控除(文公濟) 王子(王子)
  • 문승서(文承瑞) 王子(王子)
  • 文身步(文臣補) 王子(王子)
  • 문충걸(文忠桀) 王子(王子)
  • 문충歲(文忠世) 王子(王子)


문탁의 5世孫 문창우가 濟州고씨의 사위가 되면서 耽羅의 王子職을 世襲하였다. 近來에 硏究陣에 依해 復元된 氏族源流 및 東文選의 復元에 따르면, "문탁의 5世孫이자, 문극겸의 長男 문후식의 次男인 門착(文??)부터 문양부(文陽夫), 문영희(文永禧), 文身(文愼), 문창우(文昌祐), 門控除(文公濟), 문승서(文承瑞), 文身步(文臣補), 문충걸(文忠桀), 문충歲(文忠世)로 이어지는 王子職 世襲으로 高氏의 星州家門에 버금가는 家門이 되었다고 傳해진다.

耽羅社에 남평 文氏가 登場하는 理由는 耽羅 西쪽의 高氏 勢力이 耽羅 東쪽의 양氏 勢力에게 威脅받자, 陸地의 勢力인 高麗의 中央政府 貴族들과 權力的으로 連帶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사서는 傳한다. 當時 高麗는 武臣들間의 다툼으로 混沌의 狀態에 놓여있었기에, 武臣들에게 잘못 줄을 대었다가는 逆으로 肅淸될 危險이 높았다. 따라서 文身 出身이면서 武臣들과 가깝고, 또한 地理的으로 濟州島에 가까운 남평(羅州)의 文氏가 政治的 車線敵으로 選擇되었다.

高麗史節要 第14卷에서 第17卷 그리고 高麗時期의 氏族源流에 따르면, 濟州 高氏는 耽羅에서의 地位를 지키고자 宰相이자 上將軍이었던 문극겸에게 持續的으로 接觸하였고, 문극겸의 아들들인 문후식, 문유필때 되어서(고려 高宗時期) 本格的으로 軍事와 親族을 보내어 濟州 梁氏를 逐出하고 濟州 高氏는 耽羅의 西쪽, 남평 文氏는 耽羅의 東쪽으로 完全히 權力을 分店했다. 그 結果, 濟州 高氏는 高麗의 中央政府와 緣줄을 대고, 持續的으로 城主의 地位를 維持할 수 있었고, 남평 文氏는 約 400年間 獨立的인 權限으로 耽羅의 東쪽을 安定的으로 統治할 수 있었다.

  • 《여지도서》(輿地圖書)

    "元宗 11年(1270年) 庚午年에 반炙 金通精이 三別抄를 거느리고 珍島에 머무르다 이듬해 辛未年에 耽羅를 侵略하니, 星州 故人?와 王子 문창우 等이 (王에게) 아뢰었다(十一年庚午反賊金通精領三別抄據珍島翌年辛未來據侵掠星主高仁朝王子文昌祐等以聞越)"고 한다."

    ? 《여지도서》(輿地圖書)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引用株 [ 編輯 ]

  1. 耽羅國王世紀라는 記錄에서는 紀元前 2337年이라고 나와있으나, 信憑性은 낮다.
  2. 王國時代에는 耽羅 全體를 支配하였으나 星州時代부터는 主로 鉏耽羅 一帶를 支配하였으며, 大部分 濟州 高氏 出身이 擔當하였다.
  3. BC 2337年 ~ BC 2206年이라는 說이 있지만 信憑性은 낮다.
  4. 主로 洞耽羅 一帶를 支配함.
  5. 이로써 16代 464年間의 耽羅星州時代(耽羅星主時代)는 끝을 맺음

參照週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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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8月, 耽羅가 貢物과 租稅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임금이 直接 치려고 武珍州 (武珍州, 光州 )에 이르니, 耽羅에서 所聞을 듣고 使臣을 보내 謝罪하므로 곧 中止하였다. [耽羅는 곧 耽毛羅(耽牟羅)이다.] (原文: 八月 王以耽羅不修貢賦 親征 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 乃止 [耽羅 卽耽牟羅]) 《 三國史記 》 第26卷 백제본기 第4 동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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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滿洲源流考 - 隋
  25. <解說> 담모라國과 백제 統治疆埸
  26. "臺灣은 百濟 屬國"-소진철 敎授
  27. 耽羅國週(耽羅國主)인 佐平 道童音律(徒冬音律)[또는 道童陰地(津)]이 降伏해왔다. 耽羅는 武德(武德, 百濟 위덕왕 ) 以來로 百濟의 屬國이었기에 佐平을 官職의 呼稱으로 삼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降伏하여 新羅의 屬國이 되었다. (原文: 耽羅國主佐平徒冬音律[一作津] 來降 耽羅自武德以來 臣屬百濟 故以佐平爲官號 至是 降爲屬國) 《 三國史記 》 第6卷 新羅本紀 第6 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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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濟州海軍基地 現場서 송국리型住居地 等 發掘
  41. 耽羅國 最大 聚落地區 용담동 遺跡 國家史跡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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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耽羅 마지막 星主 推定 墳墓 發掘調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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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