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水 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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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水 戰爭
날짜 598年 - 614年
場所
結果 高句麗 의 勝利
交戰國
高句麗 隋나라
指揮官
영양왕
高巾舞
을지문덕
강이식
수 問題
數 煬帝
量量
往世적
于仲文
宇文述
駐라후
내호아
曲事情 *
兵力
大略 30萬名~40萬名 사이 200萬名~300萬名 사이(正規軍 113萬 3,800名) (612年)
被害 規模
不明 800,000名 以上
  • 標示가 된 人物은 戰爭 途中 降伏한 人物

高句麗-水 戰爭 (高句麗-隋 戰爭) 또는 麗水戰爭 (麗隋戰爭)은 598年 , 612年 , 613年 , 614年 高句麗 隋나라 사이에 벌어진 戰爭이다.

이 戰爭으로 隋나라 는 많은 國力을 消盡하였고, 이것이 地方에서의 叛亂과 中央 勢力의 弱化로 이어져 滅亡의 原因이 되었다. 高句麗 또한 흐트러진 國內 事情을 바로잡기 위해 南쪽의 新羅와 백제를 神經 쓸 겨를이 없었고, 隋나라 以後 中國을 統一한 唐나라 에 好意的인 行動을 取하였다. 唐나라 또한 疲弊해진 國內를 바로 잡아야 했기에 高句麗와 親善 關係를 維持하였다. 高句麗가 唐나라의 要請에 따라 景觀(京觀)을 허문일은 이러한 狀況 때문이었다. 그러나 中華 帝國下의 秩序를 願했던 唐 太宗 이 皇帝에 卽位하면서 狀況은 달라지게 되었다.

唐 太宗 은 진대덕(陳大德)을 高句麗에 보내 諜報 活動을 命令하였다. 이처럼 唐나라의 侵略 意圖가 분명해졌음에도 느슨한 態度를 보이는 榮留王의 態度와 그의 지나친 親堂 政策에 反撥한 연개소문 (淵蓋蘇文)은 영류왕이 自身을 죽이려 한다는 事實을 눈치채자, 榮留王을 弑害한 뒤 保障王 을 擁立하였다. 淵蓋蘇文은 臺當强勁策을 主張해 高句麗와 黨 사이의 關係는 다시 險惡해졌고, 結局 高句麗-水 戰爭이 끝난 지 30餘 年 만에 다시 高句麗-黨 戰爭 이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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