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三國 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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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三國
後三國
國家 新羅 泰封 後百濟
수도 金星 1. 松嶽
2. 鐵原
1. 武珍州
2. 完山州
君主
 -建國君主
 -滅亡君主
56 國王
赫居世 居西干
경순왕
1 國王
弓裔
弓裔
2 國王
甄萱
身檢
成立 紀元前 57年
(赫居世 居西干
推戴)
898年
(弓裔
擧兵)
892年
(甄萱
叛亂)
滅亡 935年
( 경순왕 高麗
投降)
918年
( 王建 弓裔
逐出)
936年
(身檢
降伏)
915年 의 版圖.

後三國 時代 (後三國時代, 892年 ~ 936年 )는 新羅 末에 地方의 豪族 들이 叛亂을 일으켜 各地에서 群雄 [1] 이 할거(割據)하던 時代이다. 892年 , 新羅 의 脾臟 甄萱 이 西南部의 武珍州 를 占領 後 한남군 開國公을 稱한 後부터 936年 高麗 王建 百濟 를 멸망시킬 때까지의 時期를 가리킨다. 後百濟의 甄萱이 처음 王을 宣布한 900年 을 時點으로 하기도 한다. 앞서 新羅 , 高句麗 , 百濟 가 對立하던 時期를 三國 時代 라고 稱하고 있으므로 그때와 區分하기 위해 이 時期를 後三國이라 부른다.

9世紀에서 10世紀에 이르는 2世紀는 骨品制를 基盤으로 하는 新羅 가 崩壞되고, 그 속에서 豪族 出身인 王建 이 나타나 高麗 를 建國하였으며, 그 高麗가 漸次 封建的인 貴族 國家로 確立되는 時期였다. 同時에 中國에서도 唐나라 가 亡하고 5代(五代)라는 混亂期가 宋나라 에 依해 收拾·統一되면서 한 文化가 復舊되어 가는 時期이며, 한便으로는 北方 民族의 再登場이 促進되고 있어 그 勢力이 壓力이 南方에 미치던 때였다. 다시 말하면 聖堂 文化(盛唐文化)가 밀려들어 新羅 의 文化가 極盛期에 達했던 8世紀를 끝으로, 新羅는 黨의 衰退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地方의 豪族 들이 叛亂을 일으키면서 結局 崩壞되었으며, 後三國이라는 過渡期를 거쳐 10世紀에 이르러 高麗 王朝로 再整備되어 갔던 것이다. 特히 이 時期는 中國의 干涉이 없는 獨自的인 ‘挫折과 興氣’의 反復으로써 古代 國家가 崩壞되는 歷史의 一大 轉換點이 되는 때였으며, 外部 挑戰과 壓力에서가 아니라 內部的인 昇華 過程이 促進되었던 時期였다.

歷史 [ 編輯 ]

新羅는 統一 以後 安定的인 社會를 維持하며 眞骨 貴族의 힘을 統制하려 하였다. 하지만 8世紀부터 少數의 貴族들에게 權力이 集中되자 王權이 弱化되고 眞骨 貴族들 間에 分裂이 나타났다. 또 繼續된 王位 다툼으로 인해 王權이 흔들리게 되었고, 政府의 地方 統制力도 弱해지면서 地方의 豪族들이 成長하였다. 結局 各 地方에서 强한 影響力을 가진 豪族들이 中央政府에 맞서 叛亂을 일으키는 데에 이르면서 後三國 時代가 展開되기 始作하였다. 또한 이러한 背景은 後三國 統一 以後 高麗 太祖가 地方 豪族을 警戒하여 王權 强化를 爲한 政策들을 펼친 理由가 된다.

民亂의 發生 [ 編輯 ]

脂肪 星州(城主) 및 豪族의 擡頭는 新羅 中央 政府의 支配力을 약화시켰으며, 受取體制度 漸漸 解弛해져 갔다. 더구나 新羅 末期 貴族의 奢侈 享樂은 늘어갔고, 따라서 費用도 增加했지만, 충족시킬 만한 財源(財源)은 反對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財政的인 危機를 打開하기 위해 政府는 地方의 州·郡에 租稅를 督促하게 되니(889년), 農民들은 結局 二重 負擔을 강요받게 되었다.

新羅 의 成市(盛時)로부터 무거운 租稅와 力役(力役)을 負擔하고 있던 農民은 流民(流民) 或은 盜賊이 되어 秩序를 攪亂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秩序는 金星 (金城, 慶州)을 中心으로 한 新羅의 舊秩序에 對한 打擊을 뜻한다. 租稅의 督促은 零細한 農民層을 刺戟하여 農民叛亂(農民叛亂)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리하여 眞聲帶王 3年(889年) 元宗 (元宗)과 애盧 (哀奴) 等이 沙伐州를 根據로 하여 叛亂을 일으켰으므로, 나마 靈氣(令奇)에게 命하여 붙잡게 하였다. 영기가 敵의 堡壘(堡壘)를 멀리서 바라보고는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村主(村主) 우련(祐連)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眞性大王은 勅命을 내려 令旗를 목베고 나이 10餘 歲된 우련의 아들로 村主의 職을 잇게 하였다. 이로써 叛亂은 겨우 鎭靜되었으나 豪族들은 大混亂을 틈타 勢를 擴張하고 百姓들은 盜賊의 무리로 變해갔다.

891年 10月에는 北元 (北原)의 盜賊 우두머리 兩길 (梁吉)李 蜂起하였다. 그때 弓裔 는 竹柱의 勢力家 기훤에게 部下가 되겠다고 付託했지만 蔑視되어 梁吉의 手下가 되었다. 弓裔를 얻은 梁吉은 그의 部下 弓裔(弓裔)를 보내 100餘 名의 騎兵을 이끌고 北元의 東쪽 마을 및 名酒(溟州) 管內 酒泉(酒泉) 等 10餘 郡縣을 襲擊하였다.

甄萱의 叛亂 [ 編輯 ]

892年 完山(完山)의 勢力家 甄萱 이 그 州에 根據하여 스스로 後百濟 (後百濟)라 稱하였는데, 茂朱(武州) 東南쪽의 郡과 縣이 降伏하여 所屬되었다. 이어 徐羅伐 西南쪽의 주현(州縣)을 攻擊하며, 甄萱은 自身을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이라 稱하며 義慈王의 怨讐를 갚겠다하니 가는 곳마다 메아리쳐 呼應하여 그 무리가 달포 사이에 5,000餘 名에 達하였다.

弓裔의 勢力擴張 [ 編輯 ]

891年에 竹柱(竹州)의 기훤 의 部下가 되었다가 蔑視를 받자 빠져나와 892年에 北元(北原)의 兩길 의 部下가 되었다. 弓裔는 梁吉의 信任을 받어 軍士를 거느리고 酒泉(酒泉:只今의 醴泉 )·內省(奈城:只今의 寧越 )·御眞(只今의 蔚珍 ) 等을 攻略하여 降伏 받았다. 894年 10月에 名酒(溟州;江陵)를 占領하면서 江陵 地域까지 手中에 넣었다. 그는 餘勢를 몰아 華川 , 鐵原 等 江原道 大部分의 地域을 占領하기에 이르렀다. 弓裔의 勢力이 急成長하자 浿西地域(禮成江 以北 地域) 豪族들이 次例로 弓裔에게 自進 投降하였다. 이렇게 되자 弓裔는 더 以上 梁吉의 存在를 必要로 하지 않았다. 드디어 梁吉과 訣別하고 獨立을 宣言했다.

이때부터 事實上의 泰封 의 建國이다. 896年에는 7月 臨津江을 따라 北上하여 當時 松嶽(松嶽; 只今의 開城 )의 豪族이었던 왕륭 (王建의 아버지)의 投降을 받았다. 例는 왕륭의 아들 王建 을 鐵原郡 太守로 임명하였다. 그는 왕륭과 王建 富者의 도움을 얻어 손쉽게 京畿北部地域과 西海岸 一帶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리고 京畿地域 豪族들의 經濟的 支援에 힘입어 忠州地域 一帶까지 武力으로 倂合하였다. 898年 松嶽을 泰封의 事實上 首都로 삼고, 王建으로 하여금 楊州와 淸州(淸州;溫陽) 等 30餘 城을 征伐하도록 하였다. 899年 淸州 地方을 占領하여, 小白山脈 以北의 漢江 流域 全域을 手中에 넣었다. 弓裔는 이 過程에서 공이 많은 王建에게 新羅의 最高官職인 阿飡 벼슬을 주었다. 또 이때 7月에 梁吉이, 弓裔가 勢力이 急成長 하는 것이 꺼리어 局員(國原) 等 10餘 곳의 城主들과 함께 그를 칠 것을 謀議하고 非雷聲 (非惱城)에서 두 勢力이 激突했고, 梁吉의 軍士가 敗하여 흩어져 달아났다. 弓裔는 梁吉의 모든 勢力들을 吸收하여 더욱 强盛해졌다.

900年 10月에 局員(國原), 淸州(靑州), 怪羊(槐壤)의 盜賊 우두머리 請길(淸吉)과 新훤(莘萱) 等이 性을 바쳐 弓裔에게 降伏하였다.

新羅 의 改革 [ 編輯 ]

이러하게 改革이 要求 되는 新羅 최치원 이 나타났다. 그는 唐나라에서 884年 陰曆 10月 歸國했고, 885年 侍讀 兼 翰林學士(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支署暑感(知瑞書監)李 되었으나 紊亂한 國政을 痛歎하고 外職(外職)을 自請, 泰山(太山 : 只今의 全北 태인) 等地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나라의 滅亡을 앞당긴 진성여왕 은 叛亂軍과 豪族勢力이 亂舞하는 가운데서 人材들에게 改革案을 올리라고 督促하였다. 최치원 894年 眞聲帶王에게 時務(時務) 10餘 條(條)를 上疏해서 阿飡 이 되었다. 그러나 貴族들의 거센 反撥로 인하여 그 後 官職을 내놓고 亂世(亂世)를 悲觀, 各地를 流浪하다가 伽倻山 海印寺에서 餘生을 마쳤다. 곧 이와 함께 新羅 의 國運도 終末에 가까워져 갔다.

千年 王國의 都邑 金星 의 西南쪽에서 盜賊이 일어났는데, 그들은 바지를 붉은 色으로 하여서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다르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敵孤寂(赤袴賊)이라 불렀다. 이들은 주현(州縣)을 무찔러 害치고 首都의 西部 모량리(牟梁里)에까지 이르러 民家를 掠奪하여 갔다. 이 事件은 新羅의 改革이 完全히 失敗하고 支配力도 微弱해져 蘇生 可能性이 稀薄해진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後三國의 爭奪 [ 編輯 ]

後三國 의 定立 [ 編輯 ]

이들 中 弓裔 甄萱 은 各各 새로운 政權을 樹立, 建國하여 新羅와 定立(鼎立)하게 되었다. 이를 後三國(後三國)이라 한다.

900年 甄萱은 領土에 對한 支配權을 確實히 하고, 自身의 存在를 明確히 드러내고자 順行을 떠나 完山州에 이르자 住民들이 크게 歡迎하였다. 完山州에서 甄萱은 옛 백제 의자왕 의 鬱憤을 씻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이때 비로소 甄萱은 백제王을 稱하였고, 年號를 정개(政開)라고 定하였으며, 自身이 세운 나라의 制度와 官職을 整備하였으며, 中國 江南의 五月 에 使臣을 보내어 外交 關係를 맺었다. 甄萱의 發言에서 옛 百濟人들은 新羅에 完全히 同化되지 않고 百濟人으로서 正體性을 지녔음을 推測할 수 있다. 나라의 이름을 百濟 라 稱하였으나 三國時代와 區分지어 後百濟라 불린다.

甄萱이 나라를 세우자 901年 弓裔는 효공왕 泰封 을 建國하였다. 다만 初期에는 高句麗系 豪族들의 影響을 받아 나라 이름을 高句麗의 5世紀頃 國號인 '高麗'라고 定했다. 三國史記의 影響으로 高麗 王朝의 正統性 强調를 위해 弓裔의 나라를 후고구려라고 불러왔고, 그 影響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나, 이제는 그와 같은 歷史的 思考觀을 받아들일 必要가 없으며, 泰封이란 國號를 가장 오래 쓴만큼 弓裔의 王朝는 泰封이라고 하는게 맞다.

後百濟와 泰封을 外에도 餘他 豪族들도 新羅 朝廷의 影響力에서 벗어나 獨自的인 勢力을 構築하였다.

後百濟와 泰封의 勢力擴張 [ 編輯 ]

901年 8月에 後百濟 王 甄萱 대야성 이 워낙 堅固하여 攻擊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軍士를 金星(錦城)의 南쪽으로 옮겨 延邊(沿邊)의 마을을 掠奪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903年에 金星(現在 羅州 ) 一帶의 10餘 郡縣을 王建의 水軍 奇襲에 依해 빼앗겼다. 또, 906年에는 尙州의 사화진 一帶에서 王建과 싸워 敗戰하였다. 敗戰을 雪辱하기 위해 軍士를 再整備한 後百濟는 907年 一線郡(一善郡) 以南의 10餘 性을 모두 攻取하였다. 甄萱은 몸소 步兵과 騎兵 3千 名을 이끌고 西海의 海上權 回復을 위해 나주성(羅州城)을 에워싸고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結局, 弓裔가 水軍을 내어 그들을 襲擊하자 甄萱이 軍士를 이끌고 물러갔다.

梁吉의 勢力을 吸收하고, 羅州를 獲得하여 삼한의 折半을 차지한 弓裔 903年 都邑을 옮기고자 하여 鐵原 과 浮揚(斧壤)에 이르러 算數를 두루 살펴보았다. 904年 에는 여러 官職을 設置하였는데, 一部 官職을 除外하고는 大體로 新羅의 制度를 따랐다. 이 때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에서 마진(摩震)이라 하고 年號를 무태(武泰) 元年(元年)이라 하였다. 牌强盜(浿江道)의 10餘 주현이 弓裔에게 降伏하였다. 905年 7月에 弓裔가 드디어 鐵圓으로 都邑을 옮겼다. 8月에는 弓裔가 軍士를 움직여 新羅의 邊方 고을을 侵略하고 掠奪하며 竹嶺(竹嶺) 東北쪽에까지 이르렀다. 新羅 調整은 땅이 날로 줄어드는 것을 듣고 매우 걱정하였으나 힘으로 막을 수가 없어, 여러 星州(城主)들에게 命하여 나가서 싸우지 말고 城壁을 굳건히 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高麗 - 後百濟 戰爭 [ 編輯 ]

公算 戰鬪 에서
(公山城 戰鬪에서 ( 신숭겸 將軍(右側에 선 이)과 高麗 太祖 王建 (오른쪽에서 두 番째 앉은 이)))

911年 弓裔는 나라 이름을 泰封이라 하였으며, 年號를 水德萬歲로 고쳤다. 弓裔는 彌勒信仰을 바탕으로 强力한 王權을 꿈꾸었으나, 豪族들의 反撥로 內紛이 깊어졌다. 弓裔는 패서 豪族들을 牽制하기 위해 首都를 송악에서 鐵圓으로 옮기고, 高句麗 色彩를 빼고자 마진/泰封과 같은 高句麗와 無關한 國號 變更을 자주 施行했으며, 淸州 豪族들을 重用하는 等 王權强化策을 施行했다. 또한 彌勒關心法으로 王權에 威脅이 될 만한 豪族들을 죽였다. 甚至於 패서 豪族의 딸이었던 糠粃와 子息마저도 죽이고 만다. 이 때문에 臣下들의 反撥이 甚했고, 市中 王建마저 關心法으로 疑心을 하자, 結局 王建과 따르던 將軍들이 易姓革命을 일으켜 나라를 잃고 말았다.

弓裔의 最後는 一般的으로 도망치다가 성난 百姓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外의 설로는 鐵圓 近處의 명성산에서 抵抗하다 죽었다는 설 또한 傳해지고 있으나, 一般的으로는 성난 百姓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 定說이다.

918年 弓裔가 逐出되어 泰封 은 滅亡하고, 王建 은 卽位하면서 高麗 (高麗)를 建國하였다. 年號를 天壽(天授)라 하고 송악으로 遷都하였으며 弓裔를 支持하던 將帥, 豪族들의 反撥과 叛亂試圖가 있었으나 王建은 이를 잘 撫摩하고, 後百濟와 삼한一統의 雌雄을 겨루게 된다.

王建은 처음에는 人質을 交換하며 後百濟와 休戰 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考慮에 있던 백제 人質 진호가 갑자기 死亡하여 交戰狀態에 突入한다. 이로 인해 尙州 一帶는 後百濟와 高麗의 戰爭터가 되었다. 이미 地方에 對한 統制力을 完全히 喪失한 新羅에서는 地方 豪族들이 獨自的으로 考慮나 後百濟와 通交하고 있었다. 豪族들과의 離合集散과 新羅와의 外交關係를 빌미로 삼아 高麗와 後百濟는 삼한의 主人 자리를 놓고 競爭하게 된다. 그 結果로 高麗와 後百濟는 公算(現在 大邱 )과 高敞(現 安東 )의 큰 두番의 戰鬪를 치르게 된다. 空山에서 王建이 大敗하고, 高敞에서는 甄萱의 대패로 끝났다. 以後 韻主星 戰鬪에서 甄萱이 大敗하여 어느덧 高麗가 優位를 占하게 된다. 다만 韻主星 戰鬪 以後로도 둘은 勢力 均衡을 維持하고 있으나, 後百濟는 內部 龜裂로 徐徐히 무너져 내리기 始作한다. [2]

後三國 의 統一 [ 編輯 ]

한便 後百濟의 國內 情勢는 王位 繼承 問題로 混亂, 甄萱이 그의 아들 身檢 을 따르는 무리에게 廢位되고 금산사 에 幽閉되어 백제의 政治權은 混亂을 겪는다. 憤怒한 甄萱은 王建에게 降伏 意思를 밝히고, 高麗의 월경지 羅州를 거쳐서 高麗로 歸順한다. 甄萱마저 降伏한 狀況에서, 名目만 維持하던 新羅의 경순왕 935年 考慮에 나라를 바친다. 王建은 백제국의 創業者인 甄萱을 詳報(上父)로써 받아들이고, 경순왕에게서 新羅의 傳統과 權威를 이어받는데에 成功한다. 以後, 936年 王建은 名주대광(大匡) 왕순식과 백제國王 甄萱을 앞세워 말갈기兵科 豪族들을 모두 帶同하여 總 10萬의 兵力을 이끌고 一理千에서 後百濟軍을 물리치고 黃酸에 이르러 降伏을 받아낸다.

後三國의 混亂을 收拾하고 새로운 統一 王朝를 세우는 데 成功한 王建은 高句麗의 繼承者를 내세우며 渤海 流民을 받아들이고, 北進政策을 施行하여 領土를 넓히고, 거란을 警戒했으며, 書經(西京, 平壤 ) 開拓에 努力하였다. 將軍 유금필 로 하여금 東北 地方을 되찾도록 하여 領土를 늘렸다.

또한 新羅가 지니는 傳統的인 權威를 援用(援用)하려 하였다. 敬順王을 慶州의 事審官에 임명하여 新羅의 支配層을 吸收·懷柔하였고, 統一 後 豪族들과 結婚 政策을 통해 査頓 關係를 맺으면서 이들과 聯合하였다. 삼한을 再統一한 王建의 時代에는 큰 問題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런 豪族 懷柔策에도 不拘하고 豪族들의 存在는 王建의 事後 光宗 臺에 이르기까지 混亂을 일으킬 原因이 되었다. 王建이 《政界(政誡)》, 《 誡百僚書 (誡百寮書)》를 著述하고 特히 〈 訓要十條 〉(訓要十條)를 남겨 後世에 政治의 龜鑑으로 삼게 한 것도 豪族들의 發興에 對한 憂慮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3]

年表 [ 編輯 ]

  • 892年 : 甄萱의 叛亂, 光州 占領. 弓裔, 梁吉의 叛軍에 加擔하다.
  • 900年 : 後百濟가 公式的으로 建國
  • 901年 : 弓裔가 泰封를 세운다. 初期에는 國號를 '후고구려'라고 했다.
  • 904年 : 弓裔가 高麗에서 마진으로 國號를 바꾸고 弓裔都城 (江原道 鐵原郡)으로 首都를 옮겼다.
  • 911年 : 마진에서 마지막 이름인 泰封으로 國號를 바꾼다.
  • 917年 : 新羅 景明王의 5男 박언창 後嗣벌 을 建國하다.
  • 918年 : 王建이 易姓革命을 일으켜서 태봉을 멸망시키고 高麗 를 建國한다.
  • 926年 : 거란이 渤海를 侵略. 渤海 太子 大光顯 이 部下 30餘 名을 데리고 高麗 太祖에게 歸順.
  • 928年 : 甄萱이 新羅를 侵攻해 競走를 陷落시킨다. 新羅 景哀王을 甄萱이 射殺한다.
  • 929年 : 甄萱이 後嗣罰을 攻擊해 멸망시킨다.
  • 930年 : 高敞 戰鬪 - 王建이 甄萱에게 新羅 景哀王을 죽인 것을 批判하고 戰爭을 일으킨다.
  • 934年 : 洪城 戰鬪 - 後百濟의 國力을 損傷시킨다. 이 戰鬪에서 後百濟는 8000名의 軍士를 잃는다.
  • 935年 : 甄萱이 錦江 (막내)을 後繼者로 選定한다. 新羅가 高麗 太祖에게 降伏한다.
  • 936年 3月 : 甄萱이 아내 高비녀 朴榮圭 를 데리고 高麗로 亡命한다.
  • 936年 8月 : 甄萱과 王建이 共同으로 指揮했던 黃酸 戰鬪 에서 後百濟를 멸망시킨다. 쿠데타의 主犯인 綾紈과 良劍을 處罰하고, 드디어 後三國 統一을 이룬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弓裔 , 兩길 , 甄萱
  2. 高麗의 統一〔槪說〕 〉. 《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圖書出版 犯한. 2004.  
  3. 高麗의 統一〔槪說〕 〉. 《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圖書出版 犯한. 2004.  
韓國 의 歷史
以前 時代 後三國 時代
892年 ~ 936年
다음 時代
南北國 時代 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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