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吉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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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吉飡 (一吉飡)은 520年 ( 법흥왕 7年)에 施行한 新羅의 官等이다. 新羅의 官等은 經緯(京位) 17 官等과 外位(外位) 11官等으로 構成되었는데, 一吉干은 經緯 17官等 가운데 第7官等으로서 6頭品(六頭品)의 身分層이 맡을 수 있었던 棺위이다. 一吉干 (一吉干)· 乙吉干 (乙吉干)이라고도 한다. 比色(緋色:불빛과 같은 짙은 粉紅色)의 公服(公服)으로 身分을 標示하였다.

人物 [ 編輯 ]

  • 金살油 (金薩儒) : 日本에 使臣으로 派遣된 官吏
  • 구수혜 (仇須兮) : 地方官吏이자 185年 ( 罰휴 尼斯今 2年) 2月에 波珍飡 (波珍飡) 構圖(仇道)와 함께 처음으로 左右君主(左右軍主)에 任命되어 所文國(召文國: 慶尙北道 義城郡 ) 征伐
  • 대곡 (大谷) : 292年 (유례이사금 9) 倭兵의 사도성 (沙道城: 慶尙北道 盈德郡 )을 攻擊으로 陷落하였을 때 王命을 받아 軍士를 거느리고 가서 사도성 을 收復한 將軍
  • 김유길 (金儒吉) : 共助社(貢調使)이며 705年 ( 성덕왕 4年)에 日本에 다녀온 使臣
  • 김상경 (金相京) : 668年 漢山州所感(漢山州少監)으로 김유신 (金庾信) 麾下에서 高句麗 遠征에 出戰한 將軍이며 四千원 (蛇川原)에서 大阿飡 김문영(金文潁) 等과 함께 高句麗軍을 크게 擊破하여 勝利를 거두었으나 그는 戰死하였다. 四千원 戰鬪로 高句麗軍의 銳氣가 꺾여 平壤城 이 陷落되는 結果를 낳아 一吉飡(一吉飡)의 官等을 追贈과 兆(租·벼) 1,000席을 받았다.
  • 안나函 (安那含) : 670年 ( 문무왕 ) 一吉飡의 官等으로 新羅軍의 將帥가 되어 高句麗 復興軍 의 太大兄 高延武(高延武)와 新羅 將軍 설吳萸(薛烏儒)가 이끄는 聯合軍이 鴨綠江을 건너 唐나라軍을 攻擊할 때 671年 高句麗 復興軍 의 前哨基地였던 安市城 을 陷落하고, 672年 平壤을 거쳐 백수성(白水城) 收復하는 過程에8월 石門 (石門 : 黃海道 서흥 ) 싸움에 唐나라軍을 擊退하였지만 여러 將帥들과 함께 戰死하였다.
  • 흥선 (興宣) : 155年 ( 아달라 尼斯今 2年) 一吉飡(一吉飡)에 任命. 167年 7月 백제가 新羅 西쪽의 두 性(城)을 攻擊하여 陷落시키자 아달라 尼斯今 이 8,000騎兵을 거느리고 백제의 한手(漢水)에 進軍하여 큰 功을 세웠을 때 168年 4月 에 伊飡(伊飡)에 任命되었다.
  • 者間 (自簡) : 達率(達率), 一吉飡(一吉飡), 荷主摠管(下州摠管)의 官職에 있었다. 660年(太宗武烈王 7) 11月 新羅의 王이 백제에 對한 攻擊을 마치고 專攻을 論할 때 戰死한 新羅將軍 및 其他 專攻이 있는 사람에 對하 官職 뿐만 아니라 百濟의 人員도 모두 그 才能을 헤아려 任用하였는데 백제에서 達率(達率)이었던 者間은 佐平(佐平) 衝上(忠常)·上映(常永)과 함께 一吉飡(一吉飡)의 官等을 받고 摠管(摠管)에 任命되었다. 그뒤 661年 ( 문무왕 1年) 7月 김유신 (金庾信)을 大將軍으로 한 이 戰鬪에서 衝上은 尙州摠管 (上州摠管), 者間은 荷主摠管 (下州摠管)으로서 羅唐聯合軍이 高句麗를 치는 戰鬪에 參加하였다.
  • 鴻筆 (弘弼) : 841年 ( 문성왕 3年) 一吉飡(一吉飡)의 官等으로서 謀反 을 하다가 發覺되어 해도(海島)로 逃亡친 官僚
  • 良質 (良質) : 281年 ( 미추 尼斯今 20年) 正月에 一吉飡(一吉飡)李 되었으며, 283年 9月 百濟가 變更을 侵犯하여 10月 괴곡性 (槐谷城 : 忠淸北道 槐山 )을 에워싸자, 王命을 받고 軍士를 거느리고 나가 이를 물리친 管理
  • 장웅 (張雄) : 822年 ( 헌덕왕 14年) 3月 熊川州 都督(熊川州都督) 김헌창 (金憲昌)李 亂을 일으켜 國號를 ‘長安(長安)’이라 하고, 年號를 ‘耕耘(慶雲)’이라 하면서 新羅의 9週5小京(九州五小京) 가운데 4週3小京을 掌握하여 氣勢를 떨치자, 一吉飡(一吉飡)의 官等으로 鎭壓部隊의 先發隊(後發隊 : 迊飡?飡 위공衛恭과 波珍飡波珍飡 帝陵悌凌)가 되어 도동현(道冬峴)에서 叛軍을 무찌르고, 다시 위공·帝陵의 軍隊와 合勢하여 三年山城(三年山城: 忠淸北道 報恩郡 )을 攻擊해 陷落하고, 다시 俗離山으로 가 敵兵을 殲滅하였다. 戰爭이 끝난 後 亂을 平定한 功으로 賞을 받았다.
  • 眞空 (眞功) : 681年 ( 신문왕 1年) 8月 18日 에 新聞王妃의 아버지 김흠돌 (金欽突)李 王妃가 廢黜당하자 叛亂을 일으켰는데, 波珍飡 (波珍飡) 흥원(興元)과 함께 이에 同調하였다가 죽임을 當한 一吉飡(一吉飡), 大阿飡 (大阿飡)의 官職에 있던 官僚
  • 良臣 (良臣) : 672年 (文武王 12) 高句麗 復興軍을 鎭壓하기 위하여 平壤에 이르러 한時性(韓始城)·마邑城(馬邑城)을 攻擊하고 백수성(白水城) 附近에 軍營을 짓자 一吉飡(一吉?)의 官等으로 參戰하여 高句麗부흥군과 함께 石文으로 退却한 唐나라軍을 攻擊하였으나 크게 敗하고 戰死하였다.
  • 박경한 (朴京漢) : 668年 ( 문무왕 8年) 8月 新羅 唐나라 의 聯合軍이 高句麗 平壤城 을 攻擊할 때 漢山州所感 (漢山州少監)의 職責으로 出戰하여 平壤城 의 君主(軍主)인 술頉(述脫)을 죽이는 功을 세웠다. 이 싸움으로 高句麗는 滅亡하였고, 保障王 銀 代身 等 20餘萬 名과 함께 唐나라에 捕虜로 끌려갔다. 그해 10月 高句麗 征伐에 對한 專攻을 論議할 때 平壤城 大門의 싸움에서 功이 큰 黑惡靈(黑嶽令) 線劇(宣極)과 泗川싸움에서 공이 큰 臺當所感(大幢小監) 본득(本得)과 함께 一級 功勞者로 認定받아 一吉飡의 官等을 除授받고 兆(租) 1,000席(石)을 下賜받았다.
  • 例派 (穢破) : 量産(陽山 : 忠淸北道 永同郡 量産) 大監(大監)을 지냈다. 655年 百濟·高句麗가 함께 新羅의 變更을 쳐들어오자 花郞 김흠운 (金欽運)과 함께 量産 조천성(助川城 : 忠淸北道 永同郡 양산면 飛鳳山城)에서 백제군과 싸우다가 김흠운 과 함께 戰死하자 一吉飡(一吉飡)에 追贈하여 武勳을 讚揚하였고, 世人들은 量産戰鬪를 「陽山歌(陽山歌)」로 지어 슬퍼하였다.
  • 第一 (諸逸) : 701年 ( 효소왕 10年) 5月 靈巖郡 (靈巖郡) 태수(太守·地方官)로 있으면서 公益을 違背하고 舍利(私利)를 탐하다가 場(杖) 100의 刑을 받고 섬에 流配되었다.
  • 衝上 (忠常) : 百濟復興運動을 羅唐聯合軍의 一員으로 征伐한 장수이며 官職은 佐平(佐平), 一吉飡(一吉飡), 摠管(摠管), 阿飡(阿飡)
  • 粧痕 (長昕) : 297年 ( 類例 尼斯今 14年) 一吉飡(一吉飡)에 任命되었고, 299年 ( 기림 尼斯今 2年)에는 伊飡(伊飡)에 任命되어 內外(內外)의 兵馬使(兵馬事)를 管掌하였다.
  • 아진함 (阿珍含) : 新羅 第30代 문무왕 때의 官吏이다. 672年 一吉飡의 官等으로 車裂駐大監 으로 在職하였다. 백제와 高句麗가 滅亡한 以後 新羅까지도 차지하려는 唐나라와 敵對關係가 繼續되자 672年 ( 문무왕 12年) 唐나라의 固諫(高侃)李 거느린 軍士 1萬 明과 李謹行(李謹行)李 거느린 軍士 3萬 名이 新羅를 攻擊하였다. 新羅軍과 唐나라軍은 대방(帶方: 黃海道 평산)에서 싸워 처음에는 新羅軍의 長槍幢(長槍幢)의 活躍으로 新羅가 勝利하였으나, 長槍幢의 功을 猜忌한 다른 黨의 後退로 繼續 敗하여 거列柱(居烈州: 慶尙南道 居昌郡 )까지 밀려 내려오자 一吉飡의 官等으로 車裂注意 大監(大監)으로 있던 中 上將軍 (上將軍)에게“공들은 빨리 가라. 내 나이 70이니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는가. 오늘이 바로 내가 죽을 날이다.”라고 하면서 我軍을 避身시키고 敵陣에 突進하여 戰死하였고, 그의 아들도 따라 죽었다.
  • 直線 (直宣) : 266年 ( 미추 尼斯今 5年) 8月 百濟 鳳山性 (烽山城)을 攻擊하여 오자, 當時 이곳의 星州(城主)로 있으면서 장사 200人을 거느리고 나가 敵을 쳐 敗走시킨 공으로 一吉飡(一吉飡)에 任命되고, 士卒들은 厚한 賞을 받았다.
  • 현승 (玄昇) : 918年 ( 경명왕 2年) 2月 謀反 (謀反)하다가 福州 (伏誅)되었다.
  • 김인장 (金仁章) : 重阿飡(重阿飡)의 官等에 올랐으며, 67歲에 執事部侍郞(執事部侍郞) 職에서 물러난 김지성(金志誠)의 아버지다. 아들인 김지성은 돌아가신 아버지 김인장과 어머니 管소리(觀肖里) 夫人을 위해 20餘 里의 戰場(田莊)을 喜捨하여 甘山寺(甘山寺·남월산南月山) 한 채를 造成하고 돌彌勒 하나를 만들었다.(미륵상彌勒像: 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과 阿彌陀上阿彌陀像: 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을 安置) 그리고 開院(愷元) 伊飡(伊飡)과 동생 陽性(良誠) 素砂(小舍)와 現道士(玄度師), 누이 高파리(古巴里), 前妻 고노리(古老里)와 後妻 아호리(阿好里), 庶兄 急한(及漢) 一吉飡과 一黨(一幢) 薩飡(薩飡), 聰敏(聰敏) 大使(大舍)와 누이同生 數힐매(首?買) 등에게까지 미치게 하기 위해 이러한 善을 베풀었다. 어머니 管초리 夫人이 故人이 되자 東海 흔지(欣支) 周邊에 뼈를 뿌렸다.
  • 김흠운 (金歆運·金欽運으로 쓰기도 한다) : 新羅 의 王族으로서 郎幢大監(?幢大監)의 官職에 있던 軍人이다.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