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우
(崔承祐, ? ~
935年
)는
新羅
末期의 文人이자,
後三國時代
後百濟
의 官僚 · 政治가 · 文人이다.
[1]
이른바 "一帶三崔(一代三崔)"로 일컬어지는 人物 中 한 名이다.
[2]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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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承祐는
최치원
,
최언위
等과 아울러 門韓的 能力으로 이름을 떨친
新羅
下臺와
後三國時代
의 官僚,
儒學者
, 文人, 政治家이다.
그는 崔致遠, 崔彦撝와 같은
慶州 崔氏
로 慶州에서 出生하였다고 한다. 十代 무렵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890年
中國 唐나라
로 留學을 떠나 國學에서 3年間 工夫하였다. 以後
893年
에 賓貢科에 合格하여,
黨
의 官職을 지냈고, 文人 및 政治家들과 交遊하였다. 다만, 그의 行跡은
900年
以後로 疏略해진다. 그 무렵에는 그가 五月 地域에서 活動한 痕跡이 一部 確認되며, 그 以後 어느 時點에
新羅
로 歸國한 것으로 보인다. 崔承祐는 黨에서의 폭넓은 交流를 통해 母國인
新羅
의 狀況에 對해서 잘 알고 있었을 可能性이 높다. 그가 남긴 詩에는 糖으로 派遣된 新羅의 使臣과의 交遊 關係를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歸國을 擇한 것은 아마도 黨의 滅亡(907) 때문이었을 것이다.
崔承祐는 歸國 後
後百濟
甄萱
政權에 參與하였다. 이러한 그의 活動은 崔致遠이나 崔彦撝가 新羅 中央 政界에서 活動한 것과는 다르다. 甄萱은 新羅의 서남해에서
軍事
를 일으켰으며, 그가 歸國하던 900年 무렵에는 國家體系를 갖추어 百濟(後百濟)를 建國한 狀態였다. 歸國 以後 그는 甄萱 政權에서 政治家로 活動하였다. 이 時期 崔承祐의 活動에 對한 具體的 記錄은 없지만,
927年
에
甄萱
이
王建
에게 보낸 書信人 <臺甄萱機高麗王서>를 그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어, 主로 外交와 文翰의 業務에 從事한 것으로 判斷된다.
<臺甄萱機高麗王서>는 매우 流麗한 文體의 四六騈儷文으로 되어 있는데, 그는 수많은 故事와 經典의 語句들을 빌어, 剛한 語調로 後百濟 政權의 正當性을 說破하며, 後三國의 形勢 속에
王建
의 天運이 다했음을 主張하였다. 이 글은 비록 後三國을 統一한 高麗에 反對하는 立場의 글이지만, 流麗한 名門으로 손꼽히는 文章으로 후세인들의 注目을 받아, 《
三國史記
》와 《
高麗史
》, 《
東文選
》에 실려 傳하고 있다. 後날 成立한 統一國家 高麗에서는 그에 對한 立場이 肯定的이기 어려웠음에도 不拘하고, 이 글이 남겨진 것은 文章 自體에 對한 評價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한便, 이에 對해
王建
을 섬기고 있던
최언위
가 反駁하는 內容의 <代高麗王답甄萱서>를 써서 보내기도 하였다.
그의 著述로는 四六騈儷文을 모은 《호본집》 5卷이 있다고 알려졌으나, 오늘날 傳하지 않는다. 崔承祐의 著作으로 現在 傳하는 글에는 《
三國史記
》와 《東文選》에 傳하는 <臺甄萱機高麗王서>, 《協奏瞑眩십초시》와 《東文選》에 傳하고 있는 10首의 7언律詩가 있다. 外交 關係나 國家 儀禮와 關聯된 文章으로 推定된 四六騈儷文을 모은 《호본집》은 《三國史記》가 著述된 高麗 電氣까지 傳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臺甄萱機高麗王서>도 傳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가 中國에서 지은 詩文이 後代의 詩文集에 傳해진 것으로 보아 別途의 文集 亦是 傳해졌을 可能性이 있다.
최승우가 登場한 作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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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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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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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재훈, 〈入黨 留學生 崔承祐와 後百濟 甄萱 政權〉, 《新羅史學報》 26, 2012.
- 姜昌求, 〈朴仁範、崔匡裕、崔承佑、金立之與唐人的交遊詩考〉, 《中國人文科學》 42,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