扶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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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餘
扶餘
國家 북부여 東扶餘
수도 부여성 가섭원
君主
 -建國君主
 -滅亡君主
?? 國王
東明王
孱王
?? 國王
해부루王
賢王
成立 紀元前 4世紀 紀元前 2世紀
滅亡 494年
( 高句麗 에 合倂)
410年
(高句麗에 合倂)
夫餘의 遺物이 發見되는 창춘 地域.

扶餘 (扶餘,夫餘, 紀元前 4世紀 ~ 494年 )는 古離國 의 東明王이 建國한 藝脈 族 國家이며, 領土는 只今의 창춘市 이퉁江 流域을 中心으로 솽양과 南쪽으로는 랴오닝省 , 北쪽으로는 아무르江 (헤이룽江)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夫餘의 마지막 王은 孱王 이며, 494年 高句麗 의 攻擊으로 扶餘는 滅亡하였다.

紀元前 4世紀부터 여러 韓民族 藝脈 系列의 나라가 세워졌다. 東明王 이 세운 扶餘, 해모수 가 세운 북부여 해부루 가 세운 東扶餘 , 그리고 高朱蒙 이 세운 高句麗 와 그 影響을 받은 百濟 가 韓民族 藝脈 系列의 나라이다.

이들은 일찍부터 定着하여 農耕生活을 하였고, 殷曆(殷曆, 殷나라 曆法)을 使用하였다는 記錄이 있으며, [1] 宮闕  · 城柵  · 倉庫  · 監獄 等 進步된 制度와 組織을 가졌었다. [2] 身分階級은 王과 그 밑에 마가(馬加)  · 右가(牛加)  · 低價(猪加)  · 區가(狗加) 等 4街(四加) 等의 支配層, 그 밑에 下戶(下戶)라고 불리던 邑人으로 構成된 階級의 둘로 나뉘었다. [3] 이른바 4가는 扶餘 全國을 4等分한 四出道 (四出道)를 各其 맡아 다스렸는데, [4] 國道(國都)만은 王의 直接 支配下에 있었던 것 같다. 卽 4가는 國王의 統率을 받지만, 4秫稻에서 各其 所屬의 豪族과 下號들을 領率해 마치 榮州(領主)와 營邑(領邑)의 關係를 가졌던 것으로 推定된다.

敵의 寢具가 있을 때는 4歌가 親히 出戰하고, 下戶는 모두 軍糧을 負擔했는데, [5] 特히 國民皆兵制 가 實施된 듯 집집이 武器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6] 紀元後 49年 扶餘는 中原에 있는 國家에 使臣을 보내 密接한 關係를 維持하며 婚姻 同盟을 맺기도 하였다.

扶餘는 國力이 强하여 先代부터 한 番도 敗하지 않았고 [7] 한나라 以來로 東쪽의 挹婁 (肅愼)를 臣下로서 服屬시키고 있었다. [8] 또한, 位(魏)나라가 高句麗를 攻擊하려 할 때 高句麗의 侵略을 받던 扶餘는 軍糧을 提供하였고, 附與가 선비족의 侵入으로 위태로울 때 陳(晋)나라는 선비足을 攻擊하였다. 그러나 秦나라의 勢力이 北方 民族에게 쫓겨져 南쪽으로 遷都하면서 附與는 高句麗의 侵略을 더욱 받게 되었다. 西쪽에는 선비足 南쪽에는 高句麗의 侵略을 받았으며 特히 高句麗는 附與를 保護國으로 삼고 附與를 지나서 北中國을 隨時로 攻擊하였고 많은 北中國人들은 高句麗에 끌려가 奴隸가 되었다.

285年, 高句麗 서천왕 16年 선비족 慕容廆 에게 攻擊을 받아 北沃沮 로 逃亡하였다가 後에 다시 本國을 回復하기는 하였으나(이때 北沃沮 地域에 一部가 남아 東扶餘를 形成했다.), 346年 연왕(燕王) 慕容皝 에게 攻擊을 받아 衰弱해졌으며, 以後 高句麗 의 保護를 받다가 494年(文咨王) 高句麗에 倂合되었다.

國號 [ 編輯 ]

扶餘에 對한 國號의 漢字 表記는 夫餘, 扶餘, 扶余, 夫余로 쓰인다. 中國의 文獻에서는 夫餘로, 韓國의 文獻에서는 扶餘로 表記되고 있다. 附與란 名稱은 ?(神明)에서 由來하여 開發(開發)->自慢(滋蔓)->平野(平野)를 意味하는 벌(伐·弗火·夫里)로 變하였다는 說 [9] 과 《 資治通鑑 》의 “初,夫餘居於鹿山,”(처음에 扶餘는 菉山에 자리잡았다.) [10] 라는 技術에서의 “鹿山”과 사슴[鹿]을 滿洲語 에서 Puhu, 몽골語 에서 буга (buga)라고 하는 것을 根據로 夫餘를 사슴의 뜻을 가졌다고 하는 說 [11] 이 있는데 ‘벌’에서 由來되었다는 說이 有力하다. 現在로서는 그 語源의 正確한 推定은 어려우나 平野를 意味하는 부리(夫里) 等과 同音同義語(同音同義語)로 夫餘의 國家的 位置와 關聯된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12] 山海經 》의 “有胡‘不與’之國” (豪族의 나라인 ‘扶餘’가 있어...) [13] 과 關聯하여 예(濊)의 한음(漢音) hui(‘후이’)에서 夫餘의 名稱이 祈願했다는 說(說) [14] 도 있으나, 이는 아직 斷定할 수 없는 問題이다. [15] [16]

歷史 [ 編輯 ]

起源 [ 編輯 ]

扶餘는 일찍부터 文獻에 登場하는데, 《 山海經 》의 記事 外에 복생 의 《上西大田》(尙書大典)에는 “武王克商 海東諸夷‘夫餘’之屬 皆通道焉”이라 하고, 《詐欺》에서 熱戰 貨殖便 吳氏과(烏氏?) 兆에 秦始皇 때 吳氏縣 商人 과(?)와 去來하던 商人 가운데 扶餘 사람이 나온다. [17] [18] 詐欺 》 〈貨殖傳〉(貨殖傳)에는 ‘夫燕 …… 北隣烏桓·夫餘’ [19] 라 하였다. 또한 《 後漢書 》 〈東夷列傳〉에는 “?婁,古肅?之國也。... 自漢興以後 臣屬‘夫餘’”(挹婁는 옛부터 肅愼의 나라이다. ... 한나라가 興한 以後, 扶餘에 臣下로서 服屬했다.) [20] 라고 記錄된 바, 여기서 韓銀 後漢 (後漢, 23~220年)李 아니라, 傳한 (前漢, 紀元前 206年~紀元後 8年)이다. 따라서, 扶餘는 傳한 代부터 東쪽의 挹婁 (肅愼)를 服屬시키고 있을 程度로 國力도 强하였다. [21] [22] 그리고 《 漢書 》(漢書) 〈地理誌〉(地理志)에도 ‘北隙烏丸·夫餘’ [23] 라는 記事가 보인다. 扶餘는 늦어도 1世紀 初의 後漢 (後漢) 臺(代)에는 王號를 쓰는 聯盟 王國으로 成長하였다고 보인다. [24] [25]

扶餘는 貊族(貊族)李 古朝鮮, 卽, 曳引(濊人)의 나라에 建國한 國家란 설 [26] 과 예(濊)의 一部가 脈(貊)에 吸收되어 滿洲로 移動하는 過程에서 形成된 예맥족(濊貊族)에 依해 建國되었다는 說 [27] 이 있다. [28]

領土 [ 編輯 ]

夫餘의 領土 範圍에 關하여는 《 三國志 [29] , 《 後漢書 [30] 等에 言及되어 있다. 이를 綜合하면 扶餘의 領土는 다음과 같다.

(1) 扶餘는 萬里長城 [31] 以北의 玄菟郡 北쪽 千里에 있었다. 《 翰苑 》에서도 《 偉略 》을 引用하면서, 萬里長城 北쪽으로 1千里에 있다고 하였다. [32] 三國志 》의 記事도 이 《 偉略 》에 따른 것으로 推定된다. [33] [34]

(2) 附與는 東쪽으로 挹婁 (?婁)와 接하고 있었다. 《 陳書 》(晋書)에 依하면 挹婁의 後身인 肅愼 이 扶餘에서 60日이면 갈 수 있다 [35] 고 하여, 扶餘 中心部로부터 大略 1,000里의 距離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當時의 挹婁는 扶餘에 隸屬되어 있었던 까닭에 實地 扶餘의 領域은 挹婁의 童便(東邊)인 沿海州 一帶에 미친 것으로 보인다. [36]

(3) 扶餘는 西쪽으로는 紀元前 3世紀 末부터 紀元前 1世紀까지 烏桓 과, 그 以後인 紀元前 1世紀부터 5世紀까지 선비 (鮮卑)와 接하고 있었다. 《 漢書 》(漢書)의 記錄 [37] 에 따르면, 烏桓과 附與가 燕나라 北쪽에서 서로 接하고 있었으며, 扶餘의 西쪽에 오환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後漢書 》에 依하면 紀元前 3世紀 末~2世紀 初에 烏桓(烏丸)李 匈奴(匈奴)에게 정복당한 後에도 오환은 本來 居住地域에 그대로 있었으므로 [38] 扶餘와 烏桓과의 地理的 關係는 紀元前 1世紀까지도 그 前 時期와 다름이 없었다. 紀元前 1世紀에 扶餘의 西쪽에 선비 勢力이 成長하기 始作하여, 紀元前 1世紀 末 ~ 2世紀 初 後漢이 匈奴를 擊破한 後 急速히 장성한 선비족들은 以前 匈奴의 地域을 차지하게 되어 扶餘와 接하게 되었다. 이러한 扶餘의 西邊(西邊)은 서요하(西遼河) 一帶였다. 卽, 祈願後 2世紀 中葉 선비의 右肩(右肩)이었던 단석괴 (檀石槐)는 匈奴의 옛 땅을 차지하고 그 管轄區域을 東部·中部·西部의 3個部로 區分하였는데, 東部地域은 우북평(右北平)으로부터 요동에 이르러 扶餘·藝脈과 接하였다. 3世紀 全般 街非陵 (軻比能) 代의 선비의 東쪽 變更은 要水界線(遼水界線)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39] 2~3世紀의 夭壽(遼水)는 오늘날의 遼河 (遼河)이며, 이 時期의 搖動 도 遼河의 東쪽 地域이다. 그런데 當時 遼河 下流에는 後漢 (魏)의 요동군 · 玄菟郡 等이 있었으므로 선비의 東쪽은 遼河 上流 地域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선비와 接하는 扶餘의 西邊(西邊)도 서요하(西遼河) 一帶라고 할 수 있다. [40]

(4) 扶餘는 北쪽으로 藥水 (弱水)와 接하였다. 《 後漢書 》의 記錄 [41] 으로 보면 厚한 代의 扶餘의 北쪽 疆埸은 藥水(弱水)임이 분명하나, 藥水의 位置에 對해서는 意見이 紛紛하다. ① 《 相서 [42] 와 《通典》(通典) [43] 에 記錄된 藥水의 約(弱)의 옛 發音이 nziak 或은 niak이므로 藥水가 嫩江 을 가리킨다는 說 [44] 이 있으나, ② 《 陳書 》(晋書)의 飼料(史料) [45] 에 依하면 藥水라는 江은 扶餘 뿐 아니라 肅愼의 北쪽까지도 經由하면서 흐르는 큰 江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쑹화江 流域에 있었던 附與와 그 東變異 沿海州 의 海邊地帶까지 이르렀던 肅愼의 北쪽을 經由하여 흐르는 큰 江으로는 아무르江 外에는 없다. 따라서 扶餘의 北京(北境)은 아무르 江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46] [47] 이 學說이 더 妥當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48]

(5) 扶餘는 南쪽으로는 高句麗 玄菟郡 , 烏桓 (烏桓)과 隣接하였고, 진대 (晋代)에 이르러서는 선비 慕容氏 의 進出로 선비와 接한 것으로 보인다.

結局 扶餘의 地域이 四方 2,000里였다는 것은 扶餘가 오늘날 지린省 창춘 市 눙안 現 [49]   · 中心地  · 솽양 區 쓰핑 時 이퉁 滿足 自治縣 一帶(異常, 北에서 南으로)를 中心으로 東쪽으로는 무단강 과 그 너머의 장광재령山脈 (長廣才嶺山脈)과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脂肪 脂肪, 北쪽으로는 아무르江 以南, 西쪽으로는 다싱안링山脈 遼河 (遼河) 下流, 南쪽으로는 白頭山 줄기에 이르고, 揮發하 (輝發河)를 境界로 高句麗와 接하는 넓은 地域을 차지하였다는 것을 意味한다. [50] [51]

북부여 [ 編輯 ]

  • 三國史記 》에는 扶餘의 歷史가 해부루 王부터 登場하는데, 솽양에서 宰相 아란불의 꿈에 天帝가 나타나 해부루王을 가섭원으로 옮겨가게 하고, 해모수 가 天帝의 아들이라 稱하며 북부여(北夫餘)를 建國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쓰여 있다.
  • 三國遺事 》에는 해모수 가 紀元前 59年 북부여를 建國하였으며, 해부루 가 그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또한 하백 의 딸 油畫 에게서 朱蒙 을 낳았다고 傳한다. [52] 하지만 解慕漱는 三國史記 , 三國遺事 에만 나오는 人物로 정작 高句麗 廣開土王陵碑 에는 高句麗 建國 이야기 中에 朱蒙 은 하늘의 아들(天帝地自)이자 하백의 外孫이라고만 할 뿐, 解慕漱는 登場하지 않는다. 이러한 當代 高句麗人들이 直接 새긴 廣開土王陵碑 의 記錄으로 볼 때 解慕漱는 登場하지 않으므로 實存人物인지조차 알 수 없다.
  • 論衡 》에는 同名이 濁里國(= 古離國 )을 脫出하여 夫餘의 땅에 나라를 세웠다고 記錄되어 있다.
  • 夫餘의 流民들이 外勢에 蹂躪되는 附與를 脫出해 옛 북부여의 땅에 두幕루 (豆莫婁)를 세웠다고 《 新唐書 》(新唐書)에 傳해진다.
  • 494年 물길 이 북부여를 壓迫하자 王室이 高句麗에 降伏하면서 完全히 滅亡하였다. [17] [18]

東扶餘 [ 編輯 ]

많은 學者들은 북부여가 高句麗의 北쪽에 있었던 扶餘라는 데 별다른 異見이 없다. 그러나 東扶餘에 對해서는 여러 가지 意見이 擡頭되고 있다. 東扶餘가 나타난 記錄으로는 북부여 王仁 해부루 왕이 都邑을 옮기면서 國號가 變更되었다는 것과, 광개토왕 이 410年에 侵攻했다는 것이 있다. 이러한 해부루 왕이 遷都한 東扶餘와 廣開土大王이 占領한 東扶餘를 같은 國家로 보거나 다르게 보는 等 差異를 보이고 있으며, 북부여와 해부루王의 東扶餘度 完全 別個의 國家로 보는 설과 扶餘 領土 內에서의 移動으로 보는 說이 있다. [53] 북부여와 廣開土大王이 占領한 東扶餘를 各各 別個의 나라로 想定하여 主張을 펴는 見解 [54] 가 多數이나, 북부여와 해부루王의 東扶餘를 同一한 國家라고 主張하는 見解도 있다. [55]

  • 《三國史記》에 依하면 東扶餘는 夫餘의 王이었던 해부루 가 세웠다고 傳하고 있지만, 이 記錄은 歷史的 事實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 2世紀까지 蕃盛하던 扶餘는 3世紀 後半에 北方의 遊牧民들이 中國 大陸으로 大擧 南下하던 時期에 이들로부터 많은 侵略을 當해 急激히 衰弱해졌다. 285年의 선비족 慕容氏 (慕容氏)의 侵攻으로 인해 王 意慮 가 죽고 首都가 점령당하여 王室과 住民 多數가 豆滿江 下流에 있던 北沃沮 로 逃避하게 되었다. 이듬해 그 다음 王 義라 西進 의 도움으로 나라를 回復해 歸還했는데, 그 中 一部가 北沃沮 地域에 繼續 살았다. 이렇게 되어 本來 附與가 있던 곳을 북부여라고 하고, 北沃沮 地域에 남은 무리들이 나라를 形成하여 東扶餘가 되었다는 것이 一般的인 見解이다.
  • 121年, 高句麗가 後漢 과 衝突할 때에 扶餘 王子 위구태 (尉仇台)가 縣都城 을 侵攻한 高句麗의 軍士를 攻擊하여 縣都城을 救援한다. 中國의 《 北史 》와 《 水西 》는 눙안에서 이를 誤解해 舊態가 百濟 의 始祖인 것으로 記錄해 時調 舊態설 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北史》와 《水西》의 誤謬이다. [17] [18]
  • 167年에는 扶餘王 부태 後漢 本土와의 直接 貿易을 試圖하는 過程에서 縣都城과의 貿易 摩擦이 생겨 선비족 과 高句麗의 默認 下에 縣都城을 攻擊하기도 하였다.
  • 4世紀 前半에 高句麗가 북부여를 掌握하자, 本國과 遮斷된 東扶餘는 自立하다가 410年에 광개토왕 高句麗 에 滅亡당했다.

喝死扶餘 [ 編輯 ]

  • 喝死扶餘 (曷思夫餘)는 扶餘 대소왕 의 막내동생인 갈사왕 이 喝死수 가에 세운 나라이다. 喝死(曷思) 또는 曷思國(曷思國)이라고도 한다. 書記 22年 建國되었고, 西紀 68年 갈사왕의 孫子인 桃蠹王 (都頭王)李 나라를 들어 高句麗에 바치고 雨態(于台)라는 벼슬을 받음으로써 喝死扶餘는 滅亡하고 高句麗 에 吸收 倂合되었다.

卒本扶餘 [ 編輯 ]

  • 卒本扶餘(卒本夫餘)는 《 三國遺事 》에는 東明聖王이 卒本 에 세운 高句麗의 別稱으로 記錄되어 있다. 그런데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에는, 卒本扶餘(卒本夫餘)의 王이 朱蒙 을 사위로 삼아 그로 하여금 王位를 繼承케 했다는 傳承(傳承)이 記錄되어 있어서, 卒本扶餘가 高句麗의 前身 國家였을 可能性도 있다. 다만 卒本扶餘가 이미 있었다는 傳承(傳承)은 이 地域에 船主(先住)하고 있었던 集團에 對해서 다른 記錄이 이를 '卒本扶餘'라고 稱했을 可能性이 있는 것으로 推測하는 見解도 있다. [56]

南夫餘 [ 編輯 ]

  • 扶餘(扶餘) [57] 국성 (國姓)이었던 百濟 (百濟)는 聖王 (聖王) 時期에 國號를 一時的으로 '南夫餘(南扶餘)'로 變更하기도 했다. [58] 이 國號와 국성, 建國 神話, 무덤 樣式 等을 보면 백제는 扶餘 繼承 意識이 剛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두幕루 [ 編輯 ]

  • 두幕루 (豆莫婁)는 扶餘의 流民들이 나하 를 건너가 建國한 나라이다. 스스로 북부여의 後繼를 自處했다. 大漠루(大莫婁), 大漠로(大莫盧), 달말루(達末婁)라고도 부른다. 두幕루는 書記 410年頃에 建國되어 約 300年間 存在하다가 726年 渤海 武王 에게 滅亡했다. 두幕壘의 領土는 渤海와 黑穗말갈로 兩分되었다가 結局 渤海 로 吸收되었다.(두막루 索引에서 詳細한 說明)

政治 [ 編輯 ]

扶餘에는 임금 아래에 家畜의 이름을 딴 마가, 牛加, 豬加, 狗加와 大使者, 使者 等의 管理가 있었다. [59] 이들 가(加)는 저마다 따로 行政 區劃인 四出道를 다스리고 있어서, [60] 君主가 直接 統治하는 中央과 合쳐 5部를 이루었다. 가들은 새 君主를 推戴하기도 하였고, 水害나 旱害를 입어 五穀이 잘 익지 않으면 그 責任을 君主에게 묻기도 하였다. [61] 이것은 初期 農耕社會에 一般的으로 보이는 現象으로,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가 《 黃金가지 》에 紹介할 程度로 有名한 것이다. 夫餘의 王 마餘가 이러한 옛 扶餘의 風俗에 依해 죽임을 當했다는 것은 當時 扶餘의 政治體制가 富者(夫子) 相續에 依한 王位세습제가 이루어질 程度로 王權이 伸張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絶對的 王權으로까지는 發展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 見解 [62] 가 있다. 이와 關聯하여 그 當時 扶餘王은 공손탁이 扶餘王에게 一族(一族)의 딸을 시집보내고 있음에서 夫餘國 支配의 實權을 쥐고 있는 權力的인 王으로서의 一面과, 마餘가 옛 遺風에 依해 죽임을 當하는 데에서 原始的인 王으로서의 一面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卽, 3世紀의 扶餘王은 權力的이면서도 原初的이라는 相反된 兩面性을 가지면서 貴族聯合制에 依해 公立(共立)되는 性格이 最高로 强하였다. [63] [64] 그러나 君主가 나온 代表 部族의 勢力은 매우 剛해서 宮闕, 城砦, 監獄, 倉庫 等의 施設을 갖추고 있었다. [65]

支配層 [ 編輯 ]

扶餘 社會의 中心的 支配 階級을 形成한 部族長의 稱號인 '~가(加)'는 氏族長·部族長을 의미하는 것으로 高句麗 에서도 使用되었다. 部族長 中에서 가장 有力한 者는 '마가(馬加)'·'右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 等 家畜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는데, 이들은 各其 四出道(四出道)의 하나씩을 主管하였다. 이들 代가(大加)는 王과 마찬가지로 臺詞(大使)·大使者(大使者)·獅子(使者) 等의 直屬 가신(家臣)을 갖고 있었다. 根本的으로 王과 同質的인 性格을 가진 代價는 君主(君主)인 王의 勢力을 牽制하였다. 여러 가(家)는 各自가 武器를 가지고 戰爭에 出戰할 수 있는 權利를 가진 者였다. 비록 國內에서는 흰옷에 가죽신을 신었으나 使臣으로 外國에 갈 때에는 緋緞옷과 中國人이 부러워하는 값비싼 털옷을 입었으며, 帽子는 金·銀으로 꾸미는 사치스런 옷차림을 하였다. 또한 刁斗(俎頭)라는 高級 밥그릇을 使用하였고, 죽으면 많은 사람을 같이 殉葬하였다. 그들은 社會的으로 權力의 所有者일 뿐만 아니라, 經濟的인 富(富)의 所有者로서 많은 奴隸를 所有하였다. [66]

行政 區劃 [ 編輯 ]

  • 夫餘의 行政 區劃은 四出道(四出道)라 불렀다. 이는 國道(國都)를 中心으로 하여 거기서 四方으로 통하는 네 갈래의 길을 의미하는 것으로, 中央에는 王이 있고 4街(加)가 四出道에 있어 各其 所屬의 豪族과 下戶를 支配하였다.

夫餘의 歷代 國王 [ 編輯 ]

扶餘 國王
王號 이름 在位期間
東明王 (東明王) ? ~ ?
해모수王 (解慕漱王) 해모수 (解慕漱) ? ~ ?
해부루王 (解夫婁王) 해부루 (解夫婁) ? ~ 紀元前 60年 頃
금와왕 (金蛙王) 解禁와 (金蛙) 紀元前 60年 頃 ~ 紀元前 24年 警
대소왕 (帶素王) 해大小 (帶素) 紀元前 24年 警 ~ 書記 22年
갈사왕 (曷思王) 該氏(解氏) 22年 ~ ?
? ~ ?
桃蠹王 (都頭王) 해도두(都頭) ? ~ 68年
不太王 (夫台王) 부태(夫台) ?, 2世紀
위구태王 (尉仇台王) 위구태 (尉仇台) ?, 2世紀
간위거王 (簡位居王) 간위거 (簡位居) ?, 2世紀 ~ 3世紀
마女王 (麻余王) 마餘 (麻余) ?, 3世紀
意慮王 (依慮王) 意慮 (依慮) ? ~ 285年
醫라王 (依羅王) 義라 (依羅) 286年 ~ ?
賢王 (玄王) 扶輿峴 (扶餘玄) ? ~ 346年
孱王 (孱王) 該氏(解氏) ? ~ 494年
三國史記 (三國史記), 後漢書 (後漢書), 三國志 (三國志), 陳書 (晉書)에 依據

經濟 [ 編輯 ]

名産物(名山物)로는 ·赤玉(赤玉)·美洲(美珠) 等과 毛皮 가 있었다. [67]

社會와 文化 [ 編輯 ]

扶餘의 風俗에는 ' 迎鼓 '라는 堤川 行事가 있었는데, 戰爭이 일어났을 때에는 堤川 儀式을 行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吉凶을 점치기도 하였다.(→ #우제占法 ) 迎鼓 (迎鼓 : 맞이굿)는 秋收 後 陰曆 12月에 치르는 祭天儀式 (祭天儀式)이었다. [68] 이것은 狩獵 社會의 傳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때에는 神에게 祭祀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기며, 罪囚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一夫多妻·蓄妾· 殉葬 (殉葬) [69] 等의 風習이 있었으며, 百의(白衣)를 崇尙하였다. [70] 이는 亦是 韓民族의 現在의 風習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男女老少를 가리지 않고, 또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恒時 노래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71]

下戶 [ 編輯 ]

  • 下戶(下戶)는 扶餘에서 大部分의 生産 活動을 擔當한 一般 사람이다. 이들은 身分的으로는 良人(良人)이었지만 奴僕(奴僕)과 같이 使役을 받는 無力한 銳敏(?民)이었다. [72] 또 戰爭이 있을 때는 武器를 들고 싸우지 못하고 軍糧(軍糧)을 運搬하였다. 아마 이들은 身分的으로는 良人이었겠지만 氏族的인 共同體의 乳劑(遺制) 속에서 제家들의 强力한 支配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法律 [ 編輯 ]

附與에서의 社會生活 全般을 規制하던 法律은 初期의 政治的 社會에서 一般的으로 나타나는 바와 같이 嚴格했다. 刑法(刑法)은 아주 峻嚴하여 殺人  · 姦淫  · 父女의 投機 等에 對하여 極刑에 處했다. 殺人者는 死刑에 處하고 그 家族은 奴婢로 삼으며, 남의 物件을 훔쳤을 때에는 物件 값의 12倍를 賠償하게 하고(일책십이법(一策十二法)), 姦淫한 者와 投機가 甚한 者는 死刑에 處하였다. [73] 特히 姦淫과 投機를 한 女子는 그 屍體를 山에 갖다 버려 썩게 만들 程度로 嫌惡했다. [74] 단 그 女子의 집에서 屍體를 가져가려면 소나 말을 바쳐야 한다. 以上의 條目은 古朝鮮 의 法條目( 8條法 )과 若干의 差異는 있으나, 個人의 生命과 私有 財産 및 家父長制的인 家族 制度의 擁護를 위한 것이라는 根本精神은 同一하다. 扶餘는 特히 家族 制度를 重要視하여 兄이 죽으면 동생이 兄嫂를 아내로 삼았다. 投機罪(妬忌罪)에 對한 苛酷한 規定은 아마도 一夫多妻制 (一夫多妻制)의 風習이 權力層에서 一般的으로 行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제占法 [ 編輯 ]

夫餘에서는 戰爭이 있을 때도 祭天儀式(祭天儀式)을 行하고 소(牛)를 죽여 굽(蹄)李 벌어지면 흉(凶), 合치면 길(吉)한 것으로 생각했다. [75] 이러한 우제占法의 占卜(占卜)은 은(殷)의 甲骨占法(甲骨占法)과 同一한 性格의 것으로 여겨진다.

對外關係 [ 編輯 ]

古離國 [ 編輯 ]

  • 夫餘의 뿌리는 滿洲 北쪽 地域에 있었던 古離國 (?離國)이다. 《 論衡 (論衡)》과 《 偉略 》 等의 記錄에 따르면, 扶餘는 濁里國(?離國, 또는 古離國 ?離國) 出身의 東明王 (東明王)李 掩淲水를 건너와 建國한 나라이다. 이러한 夫餘 建國 說話는 以後 高句麗 동명성왕 의 建國 說話로 그대로 借用되었다.

한나라 [ 編輯 ]

  • 120年, 扶餘王의 太子인 위구태 後漢 에 使臣으로 와서, 厚한 眼眥 로부터 引受(印綬)와 金胎(金綵)를 받고 돌아갔다.
  • 122年, 高句麗 · 馬韓 · 藝脈 의 軍士가 玄菟郡 에 쳐들어 오자, 扶餘에서 王子를 보내 救援하도록 하였다.
  • 167年, 扶餘의 不太王 은 2萬 名의 兵士를 거느리고 後漢 玄菟郡 을 攻擊하였다. 現도태수 恭遜驛(公孫?)李 이를 擊退하여, 不太王은 1千餘 名의 死亡者를 내고 敗北하였다.
  • 2世紀 後半 한나라의 軍閥 공손탁 은 夫餘의 王 위구태 에게 종女(宗女 : 조카딸)을 시집보내 婚姻 同盟을 맺었다.

선비족 [ 編輯 ]

  • 285年 선비족 慕容廆 (慕容?)가 附與를 襲擊하였는데, 夫餘의 意慮王 은 戰鬪에서 敗北하여 自殺하였다. 意慮王의 子弟들은 沃沮 로 避身하였고, 扶餘의 都城은 破壞되고 1萬 名의 百姓들이 선비족에게 끌려갔다.
  • 286年 意慮王의 뒤를 이어 王位에 오른 扶餘 醫라王 西進 (西晉)의 동이敎委 (東夷校尉) 下疳(何龕)에게 救援을 要請하였다. 下疳은 犢牛(督郵) 街침(賈沈)을 派遣하여 義라왕을 돕도록 하였는데, 이에 맞서 慕容廆가 손정(孫丁)을 보내 邀擊하게 하였다. 街침이 勝利하고 손정을 죽이자 선비족의 軍士는 물러났으며, 依라왕은 扶餘를 再奪還하였다.
  • 346年 扶餘의 賢王 은 선비족이 세운 全然 의 攻擊을 받아 크게 敗北하고 捕虜가 되었다. 全緣의 王 慕容皝 (慕容?)은 世子인 모용준 과 4男인 毛用角 을 시켜 附與를 攻擊하고, 賢王과 扶餘의 百姓 5萬 名을 全然으로 끌고와 事實上 附與를 멸망시켰다. 慕容皝은 扶餘 流民들을 懷柔하기 위해 賢王을 사위로 삼고 振動將軍(鎭東將軍)에 임명하였다.

高句麗 [ 編輯 ]

  • 東扶餘의 금와왕 이 太白山 南쪽 우발수에서 유화부인 을 얻어 朱蒙 을 낳았다. 紀元前 37年頃 朱蒙이 東扶餘를 脫出하여 高句麗 를 建國했다.
  • 22年 高句麗의 대무신왕 이 扶餘를 侵攻하여 대소왕 李 戰死했다. 대소왕의 막내 동생이었던 갈사왕 殷 나라가 將次 亡할 것을 豫感하고 避難하여 曷思國 을 建國했다.
  • 22年 扶餘 대소왕 의 從弟(從第, 四寸동생)는 扶餘 사람 1萬餘 名을 이끌고 高句麗에 投降하였다. 高句麗 대무신왕 은 대소왕의 從弟에게 落氏(絡氏)라는 姓을 내리고 扶餘王으로 冊封한 後 高句麗 椽那部(?那部)에 居住하게 하였다.
  • 494年 高句麗 문자명왕 때 扶餘의 孱王 과 그 處子가 나라를 들어 高句麗에 降伏하였다고 《 三國史記 》에 記錄되어 있다.

扶餘社 硏究 [ 編輯 ]

遺跡과 遺物 [ 編輯 ]

遺跡群은 確認되지 않으나, 吉林 周邊에 獨特한 鐵器 時代의 遺跡(抛自然類型)들이 發掘되어 이로부터 勢力의 範圍를 推定하고 있다.

附與戰(夫餘傳) [ 編輯 ]

三國志 》 위서의 〈오환선飛棟以前〉(卷30) 中, 扶餘 關聯 記事, 卽, 附與戰(夫餘傳)은 總 930字(字)이며, 中國 正史(正史) 中 扶餘에 關한 最初의 列傳(列傳)으로 그 史料的 價値가 높게 評價되고 있다. 그 內容은 扶餘의 位置와 疆埸을 비롯하여 管制·意識(衣食)·儀禮(儀禮)·風俗·産物(産物) 等 附與의 生活習俗에 關한 詳細한 狀態記述과 玄菟郡 · 後漢 (後漢)·공손氏(公孫氏) 等 中國의 第(諸) 勢力과의 關係記事로 構成되어 있다. 文獻學的 硏究에 依하면 記事의 1/3 程度가 《偉略(魏略)》 記事와 關聯된 것인데, 진수가 參考한 《偉略(魏略)》은 配送地 州(注)에 引用된 《偉略(魏略)》과는 다른 이본(異本)이나, 원偉略(原魏略)에 依存하였을 可能性이 크며, 《偉略(魏略)》의 扶餘와 高句麗 共通의 習俗 記事는 省略된 것이라고 한다. [76] 이러한 點에서 附與戰은 從來의 過大한 評價와는 달리 全體的으로는 杜撰(杜撰)이라고 할 수 있으나, 《偉略(魏略)》李 滅失된 現在 附與戰은 配送地 州(注)에 引用된 《偉略(魏略)》 記事와 함께 史料的 價値에 있어서는 다른 어떠한 사서(史書)보다 重要하다고 할 것이다. [77]

參照 項目 [ 編輯 ]

附錄 [ 編輯 ]

參考 文獻(時間順) [ 編輯 ]

各州 [ 編輯 ]

  1.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오환선飛棟以前 〉 “以殷正月祭天”(殷나라 正月달에 하늘에 祭祀 지내는데)
  2.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오환선飛棟以前 〉 “有宮室、倉庫、牢獄。”(宮闕, 倉庫, 監獄이 있다.)
  3.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오환선飛棟以前 〉 “國有君王,皆以六畜名官,有馬加、牛加、?加、狗加、大使、大使者、使者。邑落有豪民,名下戶皆爲奴僕。”(나라에는 임금이 있다.모두 여섯 種類의 짐승 이름으로 벼슬아치 이름을 삼는다. 馬加(馬加), 牛加(牛加), 豬加(?加), 區가(狗加), 大使(大使),大使者(大使者), 獅子(使者)가 있다. 마을(邑落)에는 우두머리(豪民)가 있다. 身分이 낮은 百姓들(下戶)은 모두 머슴(奴僕)이라고 부른다.)
  4.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오환선飛棟以前 〉 “諸加別主四出,道大者主數千家,小者數百家。”(뭇 우두머리들은 各自(別) 곳곳에서(四出) 우두머리를 맡는다. 큰 區域(道大)을 맡은 이는 數千 집을 다스리고 작은 區域을 맡은 이는 數百 집을 다스린다.)
  5.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오환선飛棟以前 〉 “有敵,諸加自戰,下戶俱擔糧?食之。”(敵이 있거든 뭇 우두머리들은 自進해서 싸우러 간다. 身分이 낮은 사람들은 모두 糧食을 짊어지고 가서 兵士들을 먹인다. )
  6.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오환선飛棟以前 〉 “家家自有鎧仗。”(집집마다 甲옷과 武器를 갖추고 있다. )
  7.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烏丸鮮卑東夷傳 〉 “魏略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嘗破壞。”(偉略에 이르기를, 그 나라는 國力이 强하여 先代부터 한 番도 敗하지 않았다. )
  8.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烏丸鮮卑東夷傳 〉 “?婁...自漢已來,臣屬夫餘,”(挹婁는...한나라 以來로, 扶餘에 臣下로서 服屬하였다.)
  9. 최남선 (崔南善), 《 兒時朝鮮 (兒時朝鮮)》(1926)( 《六堂崔南善全集》2, 1973 中에서) 〈第四章[祭祀場] 朝鮮[朝鮮] 사람의 줄거리〉“ 「?」은 神明[신명]의 原義[圓의]로부터轉滋[전자]하여 開發[開發]·滋蔓[자만]·光明[光明]의 義[議]를 가지게 된 말이며, 後에 漢字[漢字]로 譯[譯]하여 「貊[맥]」「發[발]」「夫里[부리]」等을 作[作]하고, 다시 訛[와]하고 略[略]되어 「番[번]」「方[방]」「夫餘[부여]」등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10. 司馬光 (1084年),《 資治通鑑 》〈 卷097 〉 “初,夫餘居於鹿山,”(처음에 扶餘는 菉山에 자리잡았다.)
  11. 시라토리 구라키치 , 「濊貊民族の由來を述べて, 夫餘高句麗及び百濟の起源に及ぶ」 『白鳥庫吉全集』 3卷, 1970, 岩波書店. p.516
  12. 이병도 ,〈扶餘고(夫餘考)〉《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1976) 226쪽
  13. 山海經 》 〈 zh:s:山海經/大荒北經#大荒北經 〉, “有胡不與之國” (豪族의 나라인 附與가 있어...)
  14. 리지린, 『古朝鮮硏究』1964, 社會科學院出版社
  15. 李基白·李基東 共著,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一潮閣. p.77
  16. “中國正史조선전 主席보기 > 中國正史조선전 主席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註002] 夫餘” . 國史編纂委員會. 여기서의 夫餘는 北夫餘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北夫餘는 韓國史에서 古朝鮮 다음으로 登場하는 國家로 中國文獻에는 夫餘로, 國內文獻에는 扶餘로 表記되고 있다. ① 夫餘란 名稱은 ?(神明)에서 由來하여 開發->滋蔓->平野를 意味하는 벌(伐·弗火·夫里)로 變하였다는 說과(崔南善,『兒時朝鮮』p.158), 『資治通鑑』에 나오는 ‘初夫餘居于鹿山’의 鹿山과 滿洲語에서 사슴(鹿)을 Puhu, 蒙古語에서 Pobgo라고 하는 것을 根據로 夫餘를 사슴의 뜻이라고 하는 說이 있는데(白鳥庫吉,「濊貊民族の由來を述べて, 夫餘高句麗及び百濟の起源に及ぶ」p.516), ‘벌’에서 由來되었다는 說이 有力하다. 現在로서는 그 語源의 正確한 推定은 어려우나 平野를 意味하는 夫里 等과 同音同義語로 夫餘의 國家的 位置와 關聯된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李丙燾,「夫餘考」p.226)『山海經』의 ‘有胡不與之國’과 關聯하여 濊의 漢音 ‘후이’에서 夫餘의 名稱이 祈願했다는 說도 있으나(리지린,『고조선연구』), 이는 아직 斷定할 수 없는 問題이다. ... ≪參考文獻≫ 『山海經』第17「大荒北經」 崔南善, 『兒時朝鮮』1926(『六堂崔南善全集』2, 1973) 李丙燾, 「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리지린, 『古朝鮮硏究』1964, 社會科學院出版社. 白鳥庫吉, 「濊貊民族の由來を述べて, 夫餘高句麗及び百濟の起源に及ぶ」『白鳥庫吉全集』 3卷, 1970, 岩波書店.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57) ( 도움말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7. 이지영 (2003). 《韓國의 神話 이야기》. 四君子. ISBN   9788989751106 .  
  18. 韓國文化歷史地理學會, 이준선 (2011). 《韓國歷史地理》. 푸른길. ISBN   9788962911718 .  
  19. 詐欺 》 〈 貨殖傳 〉“夫燕... 北?烏桓、夫餘。”( 이 北으로 烏桓과 扶餘에 接한다.)
  20. 범엽(5世紀), 《 後漢書 》 〈 東夷列傳 〉“?婁,古肅?之國也。...自漢興以後,臣屬夫餘。”(挹婁는 옛부터 肅愼의 나라이다.부여에 臣下로서 服屬했다.)
  21. 이건재(李健才), 〈北扶餘, 東扶餘, 豆莫婁的由來〉 《東北史地考略》 (中國: 吉林文史出版社, 1986.)
  22. 나하나,〈附與의 變遷과 東扶餘 問題〉강원대학교 《人文科學硏究》 第23輯, 2009.12, 308쪽 “우리 民族의 한 갈래인 예맥족이 세운 扶餘는 늦어도 秦이 戰國을 統一하기 以前에 建國되었다. 1) ... 1) (燕) ?烏桓夫餘 (『詐欺』 卷129 「貨殖列傳」) 自漢興以後 臣屬夫餘 (『後漢書』卷85 「東夷列傳」第75 挹婁) 『詐欺』에 記錄된 燕은 中國 戰國時代의 ‘燕’이기 때문에 西紀前 222年 以前에 聯과 附與가 國境을 맞대고 있었던 것이 된다. 卽, 扶餘는 西紀前 222年 以前에 建國된 것이다. 또한『後漢書』 「挹婁戰」에 記錄된 漢은 東漢(後漢)李 아니라, 西紀前 202年에 建國된 西漢(前漢)이다. (李健才, 「北扶餘, 東扶餘, 豆莫婁的由來」『東北史地考略』(中國: 吉林文史出版社, 1986.)) 이러한 點으로 보아 扶餘는 秦이 全國을 統一하기 以前에 建國되었으며, 前漢代부터 東쪽의 挹婁(肅愼)를 服屬시키고 있을 程度로 國力도 强하였다. 이러한 狀況을 檢討해 보았을 때 扶餘는 西紀前 3世紀 또는 그 以前에 建國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3. 班固 (後漢) (1世紀)《 漢書 》(漢書) 〈 地理誌 〉(地理志) “上谷至遼東,... 北隙烏丸、夫餘”(山西省 상곡群 地域에 搖動軍이 있으며 ... 요동군 北쪽으로 사이를 두고 烏桓(山西省 東北部)이 있고 扶餘가 있다. )
  24. 이기백 (李基白)· 이기동 (李基東) 《한국사강의》(韓國史講座: 古代篇), 1982, 일조각 (一潮閣).p.77
  25. “中國正史조선전 主席보기 > 中國正史조선전 主席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註002] 夫餘” . 國史編纂委員會. ② 夫餘는 일찍부터 中國文獻에 登場하는데, 前記한『山海經』의 記事를 除外하더라도 伏生의『尙書大典』에는 ‘武王克商 海東諸夷夫餘之屬 皆通道焉’ 理라 하고,『史記』「貨殖傳」에는 ‘夫燕 …… 北隣烏桓·夫餘 東?穢?·朝鮮·眞番之利’ 라 하였으며,『漢書』「地理志」에도 ‘北隙烏丸·夫餘 東賈眞番之利’ 라는 記事가 보인다. 따라서 夫餘는 이미 先秦時代부터 古朝鮮과 더불어 中國에 알려질 程度의 國家로 成長하고 있었으며, 늦어도 1世紀 初의 後漢代에는 王號를 쓰는 聯盟 王國으로 成長하였다고 보인다. (李基白·李基東,『韓國史講座』p.77) ...≪參考文獻≫ 『史記』卷129, 「貨殖列傳」69. 『漢書』卷28上下「地理志」 『資治通鑑』卷97. 伏生, 『尙書大典』 李基白·李基東 共著,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一潮閣.   |題目= 에 水平 탭 文字가 있음(위치 16) ( 도움말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6. 리지린, 『古朝鮮硏究』1964, 社會科學院出版社
  27. 理獄(李玉), 《高句麗民族形成과 社會》(高句麗民族形成과 社會) 1984, 敎保文庫.
  28. “中國正史조선전 主席보기 > 中國正史조선전 主席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註002] 夫餘” . 國史編纂委員會. ③ 이와 같은 夫餘는 貊族이 古朝鮮, 卽, 濊人의 나라에 建國한 國家란 說과(리지린, 앞의 冊) 濊의 一部가 貊에 吸收되어 滿洲로 移動하는 過程에서 形成된 濊貊族에 依해 建國되었다는 說이 있다. (李玉,『高句麗民族形成과 社會』) ≪參考文獻≫리지린, 『古朝鮮硏究』1964, 社會科學院出版社. 李 玉, 『高句麗 民族形成과 社會』1984, 敎保文庫.   |題目= 에 水平 탭 文字가 있음(위치 16) ( 도움말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9.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오환선飛棟以前 〉 “夫餘在長城之北,去玄?千里,南與高句麗,東與?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方可二千里。”(扶餘는 萬里長城 以北의) 玄도 北쪽 千 里에 있다. 南으로 高句麗와 接하고, 東으로 挹婁, 서로 선비, 北으로 藥水(弱水)에 接한다.)
  30. 범엽(5世紀), 《 後漢書 》 〈 卷85 〉“夫余國,在玄?北千里。南與高句驪,東與?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地方二千里,本濊地也。” (夫餘國은 玄도 北쪽 千 里에 있다. 南쪽은 高句麗, 東쪽은 挹婁, 西쪽은 선비와 接해 있다. 北쪽에는 藥水가 있는데, 地方이 二千 里로서 本來 예(濊)의 땅이다.)
  31. “中國正史조선전 主席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註003] 長城之北 去玄?千里” . 國史編纂委員會. 2014年 1月 1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3月 23日에 確認함 . 本傳의 長城은 現在의 萬里長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燕·秦時代에 쌓은 長城을 의미하는 것으로, 1975年 以後 中共에서 發掘된 當時 長城의 東端은 大體로 遼河 本流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3次 玄?郡治인 撫順 地域과 거의 一致하고 있다. 따라서『三國志』의 ‘長城之北 去玄?千里’와『後漢書』의 ‘在玄?北千里’는 表現의 差異는 있으나 같은 意味로 볼 수 있다. ...≪參考文獻≫王國良, 『中國長城沿革攷』1931.?柱臣, 「赤峰附近新發見之漢前土城址與古長城」『歷史與考古』1946, 瀋陽博物館.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編, 『新中國的考古發現和硏究』1984, 文物出版社.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42) ( 도움말 )
  32. 장초金(張楚金, 660年 以前) 《 翰苑 原文 “魚?魏略曰夫餘國在玄?長城北去玄?千餘里 南接句驪 東接?婁?肅愼國者也”(御患의 偉略에서 이르되, 夫餘國은 玄도 將星 北쪽, 卽 현도에서 1千餘里에 있다. 南쪽으로는 高句麗와 接하고 東쪽으로는 挹婁, 卽 숙신국과 接한다. )
  33. 전해종(全海宗), 《동이전의 文獻學的 硏究》(東夷傳의 文獻學的硏究) 1980.
  34. “中國正史조선전 主席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註004] 夫餘在長城之北 …… 東與?婁” . 國史編纂委員會. 『魏略』의 이 佚文 中 ‘?肅愼國者也’를『翰苑』의 註記者인 雍公叡가 添加한 記事로 보아 반드시『魏略』의 舊文은 아닐 것이라는 說이 있으나, 記事 全體는 『魏略』의 舊文일 可能性이 크다고 보여진다. 따라서『三國志』의 ‘長城之北’의 技士도『魏略』의 異本이나 ‘原魏略’에 依據한 記事로 생각된다.(全海宗, 『東夷傳의 文獻學的硏究』) ≪參考文獻≫『翰苑』夫餘條 所引『魏略』全海宗, 『東夷傳의 文獻學的 硏究』1980.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42) ( 도움말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5. 陳書 》(晋書), 四夷傳 , “肅?氏一名?婁...去夫餘可六十日行。”
  36. “中國正史조선전 主席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註006] 方可二千里” . 國史編纂委員會. ② 東境: 夫餘의 東쪽은 ?婁와 接하였다고 하는데, 『晋書』「東夷列傳」에 依하면 ?婁의 後身인 肅愼이 扶餘에서 60日이면 갈 수 있다고 하여, 夫餘 中心部로부터 大略 1,000里의 距離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當時의 挹婁는 夫餘에 隸屬되어 있었던 까닭에 實地 夫餘의 領域은 挹婁의 東邊인 沿海州 一帶에 미친 것으로 보인다....≪參考文獻≫『漢書』卷28下「地理志」8下.『後漢書』卷90「烏桓·鮮卑列傳」, 『晋書』卷97「東夷列傳」肅愼氏條., 『조선전사』2(古代便), 1979, 社會科學院 出版社., 李基白·李基東 共著,『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42) ( 도움말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7. 班固 (後漢) (1世紀)《 漢書 》(漢書) 〈 地理誌 〉(地理志) “上谷至遼東,... 北隙烏丸、夫餘”(山西省 상곡群 地域에 搖動軍이 있으며 ... 요동군 北쪽으로 사이를 두고 烏桓(山西省 東北部)이 있고 扶餘가 있다. )
  38. 범엽(5世紀), 《 後漢書 》 〈 烏桓鮮卑列傳
  39.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오환선飛棟以前
  40. “中國正史조선전 主席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註006] 方可二千里” . 國史編纂委員會. 『後漢書』에는 ‘地方二千里’라 하였으며, 大體的인 夫餘의 領域을 말한다. 各種 史書에 나오는 記錄을 土臺로 夫餘의 領域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西境: 夫餘는 西쪽으로 B.C. 3世紀 末~1世紀에는 烏丸과, 그 以後 時期(B.C. 1~5世紀)에는 鮮卑와 各各 接하고 있었다. 『漢書』「地理志」에 依하면 燕이 ‘北隙烏丸·夫餘’라 하였으니, 烏丸과 附與가 燕나라 北쪽에서 서로 接하고 있었으며, 扶餘의 西쪽에 烏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後漢書』「烏丸·鮮卑傳」에 依하면 紀元前 3世紀 末~2世紀 初에 烏丸이 匈奴에게 정복당한 後에도 烏丸은 本來 居住地域에 그대로 있었으므로 夫餘와 烏丸과의 地理的 關係는 起源 1世紀까지도 그 전시기와 다름이 없었다. 紀元 1世紀에 夫餘의 西쪽에 鮮卑勢力이 成長하기 始作하여, 紀元 1世紀 末~2世紀 初 後漢이 匈奴를 擊破한 後 急速히 장성한 鮮卑族들은 以前 匈奴의 地域을 차지하게 되어 夫餘와 接하게 되었다. 이러한 夫餘의 西邊은 西遼河 一帶였다. 卽, 紀元 2世紀 中葉 鮮卑의 右肩이었던 檀石槐는 匈奴 故地를 차지하고 그 管轄區域을 東部·中部·西部의 3個部로 區分하였는데, 東部地域은 右北平으로부터 遼東에 이르러 夫餘·濊貊과 接하였다. 3世紀 全般 軻比能 代의 鮮卑의 東쪽 變更은 遼水界線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三國志』「烏丸·鮮卑傳」) 起源2~3世紀의 遼水는 오늘의 遼河이며, 이 時期의 遼東도 遼河 東쪽地域이다. 그런데 當時 遼河 下流에는 後漢과 魏의 遼東郡·玄?郡 等이 있었으므로 鮮卑의 東쪽은 遼河 上流地域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鮮卑와 接하는 夫餘의 西邊도 西遼河 一帶라고 할 수 있다. ... ≪參考文獻≫『漢書』卷28下「地理志」8下.『後漢書』卷90「烏桓·鮮卑列傳」, 『晋書』卷97「東夷列傳」肅愼氏條., 『조선전사』2(古代便), 1979, 社會科學院 出版社., 李基白·李基東 共著,『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42) ( 도움말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1. 범엽(5世紀), 《 後漢書 》 〈 卷85 〉 “北有弱水” (北쪽에는 藥水가 있는데,)
  42. 孔子 (紀元前6~5世紀), 《 相서 》(尙書)〈 禹貢篇 〉“黑水西河惟雍州:‘弱水’?西,”(西쪽 끝인 黑手와 冀州 西쪽인 西夏 사이가 翁主이다. 藥水를 西쪽으로 흐르게 하고...)
  43. 杜佑 (8世紀), 《通典》(通典), “營州柳城縣東南有饒樂水 ?‘弱水’也”
  44. 시라토리 구라키치 , 〈夫餘國の始祖東明王の傳說に就いて〉 《白鳥庫吉全集》 券5,1970.
  45. 房玄齡 等(648年), 《 陳書 》(晋書), 〈 四夷傳 〉 “肅?氏...北極弱水。”(肅愼氏는...북으로는 藥水에 이른다.)
  46.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 『東アジア民族史』1974, 平凡社 p.43
  47. “中國正史조선전 主席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註006] 方可二千里” . 國史編纂委員會. ③ 北境: ‘北有弱水’라 하여 後漢代의 夫餘의 北쪽 疆埸은 弱水임이 분명하나, 弱水의 位置에 對하여는 諸說이 紛紛하다. 그런데『晋書』肅愼傳에 依하면 ‘肅愼北極弱水’라 하여 弱水라는 江은 夫餘 뿐 아니라 ?婁(肅愼)의 北쪽까지도 經由하면서 흐르는 큰 江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松花江 流域에 있었던 夫餘와 그 東變異 沿海州의 海邊地帶까지 이르렀던 挹婁의 北쪽을 經由하여 흐르는 큰 江으로는 黑龍江 外에는 없다. 따라서 夫餘의 北境은 黑龍江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參考文獻≫『漢書』卷28下「地理志」8下.『後漢書』卷90「烏桓·鮮卑列傳」, 『晋書』卷97「東夷列傳」肅愼氏條., 『조선전사』2(古代便), 1979, 社會科學院 出版社., 李基白·李基東 共著,『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42) ( 도움말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8. “中國正史조선전 主席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註005] 北有弱水” . 國史編纂委員會. 弱水의 名稱은 『尙書』「禹貢篇」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 『通典』에는 ‘營州柳城縣東南有饒樂水 ?弱水也’라 하였다. 現在에는 黑龍江이라는 說과(井上秀雄, 『東アジア民族史』p.43), 弱의 옛 發音이 nziak 或은 niak이므로 弱水는 松花江의 支流인 嫩江(Nonni江)을 가리킨다는 說이 있다. (白鳥庫吉, 「夫餘國の始祖東明王の傳說に就いて」) 그러나 『晋書』肅愼傳의 ‘北極弱手’라는 史料에 留意한다면 黑龍江이 보다 妥當하리라 생각된다. ...『尙書』「禹貢篇」, 『晋書』卷97「東夷列傳」肅愼氏條., 『通典』, 白鳥庫吉, 「夫餘國の始祖東明王の傳說に就いて」『白鳥庫吉全集』券5,1970., 井上秀雄, 『東アジア民族史』1974, 平凡社.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42) ( 도움말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9. 農安 地域은 所謂 東이(東夷)들의 주지(主地) 속에서는 가장 平野가 넓은 곳이었다.
  50. “中國正史조선전 主席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註006] 方可二千里” . 國史編纂委員會. ④ 南境: 南쪽은 大體로 高句麗와 接하였다. 晋代에 이르러서는 鮮卑 慕容氏의 進出로 鮮卑와 接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扶餘의 地域이 四方 2,000里였다는 것은 扶餘가 오늘의 夫餘府 一帶를 中心으로 東쪽으로는 沿海州 地方, 北쪽으로는 黑龍江 以南, 西쪽으로는 遼河 下流, 南쪽으로는 白頭山 줄기에 이르는 넓은 地域을 차지하였다는 것을 意味한다.≪參考文獻≫『漢書』卷28下「地理志」8下.『後漢書』卷90「烏桓·鮮卑列傳」, 『晋書』卷97「東夷列傳」肅愼氏條., 『조선전사』2(古代便), 1979, 社會科學院 出版社., 李基白·李基東 共著,『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42) ( 도움말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51. 나하나,〈附與의 變遷과 東扶餘 問題〉강원대학교 《人文科學硏究》 第23輯, 2009.12. 309쪽. “이를 통해서 扶餘의 領域을 살펴보면 南으로는 輝發河를 中心으로 高句麗와 國境을 接하였고, 東으로는 牧丹江 流域의 西쪽인 長廣才嶺山脈, 西로는 大興安嶺山脈의 東쪽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北으로는 黑龍江까지였다.”
  52. 新三國史記 高句麗 本紀, 朴榮圭 저, 웅진출판, 1997. p 17.
  53. 나하나,〈附與의 變遷과 東扶餘 問題〉강원대학교 《人文科學硏究》 第23輯, 2009.12. 309쪽. “많은 學者들은 북부여가 高句麗의 北쪽에 있었던 扶餘라는 데 별다른 異見이 없다. 그러나 東扶餘에 對해서는 여러 가지 意見이 擡頭되고 있다. 東扶餘가 나타난 記錄으로는 북부여 王인 해부루왕이 都邑을 옮기면서 國號가 變更되었다는 것과, 廣開土大王이 410年에 侵攻했다는 것이 있다. 이러한 해부루 왕이 遷都한 東扶餘와 廣開土大王이 占領한 東扶餘를 같은 國家로 보거나 다르게 보는 等 差異를 보이고 있으며, 북부여와 해부루王의 東扶餘度 完全 別個의 國家로 보는 설과 扶餘 領土 內에서의 移動으로 보는 說이 있다.”
  54. 宋호정, 《韓國史 4 初期國家-古朝鮮·扶餘·삼한》 (果川: 國史編纂委員會, 1997), 서영수, 〈廣開土王陵碑門의 征服技士의 再檢討(中)〉 (《歷史學報》 119號, 1988), 노태돈, 〈夫餘國의 境域과 그 變遷〉 (《국사관論叢》 4號, 1989), 이도학, 〈方位名 夫餘國의 成立에 關한 檢討〉 (《白山學報》 38號, 1991)
  55. 나하나,〈附與의 變遷과 東扶餘 問題〉강원대학교 《人文科學硏究》 第23輯, 2009.12.
  56. 文化콘텐츠닷컴
  57. 大韓民國 宜寧 呂氏 (宜寧 余氏)는 百濟의 국성 (國姓)이었던 扶餘氏를 起源으로 두고 있는 姓氏다.
  58. 文化콘텐츠닷컴
  59.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烏丸鮮卑東夷傳 〉 “國有君王,皆以六畜名官,有馬加、牛加、?加、狗加、大使、大使者、使者。”(나라에는 임금이 있다.모두 여섯 種類의 짐승 이름으로 벼슬아치 이름을 삼는다. 馬加(馬加), 牛加(牛加), 豬加(?加), 區가(狗加), 大使(大使),大使者(大使者), 獅子(使者)가 있다. )
  60.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烏丸鮮卑東夷傳 〉 “諸加別主四出,道大者主數千家,小者數百家。”(뭇 우두머리들은 各自(別) 곳곳에서(四出) 우두머리를 맡는다. 큰 區域(道大)을 맡은 이는 數千 집을 다스리고 작은 區域을 맡은 이는 數百 집을 다스린다.)
  61.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烏丸鮮卑東夷傳 〉 “舊夫餘俗,水旱不調,五穀不熟,輒歸咎於王,或言當易,或言當殺。”(옛 扶餘의 風俗에 장마와 가뭄이 連이어 五穀이 익지 않을 때 그때마다 王에게 허물을 돌려서 或은 ‘王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或은 ‘王은 마땅히 죽어야한다’고 하였다.)
  62. 이병도 ,〈扶餘고(夫餘考)〉《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1976)
  63.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 〈朝鮮の初期國家〉《日本文化硏究所硏究報告》第 12集.78~79쪽.
  64. “中國正史조선전 主席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 國史編纂委員會. 옛 夫餘의 風俗에 水旱이 繼續되어 5穀이 제대로 여물지 않을 때에 그 허물을 王에게 돌려 或은 갈자느니 或은 죽이자느니 했다는 記事는 初期 農耕社會에 一般的으로 보이는 現象으로, J.G. Frazer가『黃金의 가지』에 紹介할 程度로 有名한 것이다. 麻余가 이러한 옛 夫餘의 風俗에 依해 죽임을 當했다는 것은 當時 夫餘의 政治體制가 夫子相續에 依한 王位世襲制가 이루어질 程度로 王權이 伸張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絶對的 王權으로까지는 發展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 見解가 있다.(李丙燾,「夫餘考」p.216) 이와 關聯하여 그 當時 夫餘王은 公孫度가 夫餘王에게 一族의 딸을 시집보내고 있음에서 夫餘國 支配의 實權을 쥐고 있는 權力的인 王으로서의 一面과, 麻余가 옛 遺風에 依해 죽임을 當하는 데에서 原始的인 王으로서의 一面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卽, 3世紀의 夫餘王은 權力的이면서도 原初的이라는 相反된 兩面性을 가지면서 貴族聯合制에 依해 共立되는 性格이 最高로 强하였다.(井上秀雄, 「朝鮮の初期國家」pp.78~79)≪參考文獻≫李丙燾,「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井上秀雄, 「朝鮮の初期國家」『日本文化硏究所硏究報告』第 12集.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65.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烏丸鮮卑東夷傳 〉 “有宮室、倉庫、牢獄。”(宮闕, 倉庫, 監獄이 있다.)
  66. 진수 저, 김원중 驛 (2007). 《情事 三國志(魏書)》. 민음사. ISBN   9788937425820 .  
  67.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烏丸鮮卑東夷傳 〉 “出名馬、赤玉、貂?、美珠。”(훌륭한 말, 붉은 玉, 담비, 원숭이, 玲瓏한 구슬이 난다. )
  68.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오환선飛棟以前 〉 “以殷正月祭天”(殷나라 正月달에 하늘에 祭祀 지내는데)
  69.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오환선飛棟以前 〉“殺人徇葬,多者百數。”(사람을 죽여 殉葬(徇葬)하는데 많게는 百餘 名에 이른다. )
  70.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오환선飛棟以前 〉 “在國衣?白”(그 나라에서는 흰 옷을 崇尙한다. )
  71. 진수 (3世紀),《 三國志 》《 三國志 》〈 卷30 오환선飛棟以前 〉“行道晝夜無老幼皆歌,通日聲不?。”(길을 갈 때는 밤낮으로 늙은이, 젊은이 區別없이 모두 노래 부르니 하루終日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
  72.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오환선飛棟以前 〉 “名下戶皆爲奴僕。”(身分이 낮은 百姓들(下戶)은 모두 머슴(奴僕)이라고 부른다.)
  73.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오환선飛棟以前 〉 “用刑嚴急,殺人者死,沒其家人爲奴婢。竊盜一責十二。男女淫,婦人?,皆殺之”(刑罰(刑)을 執行할 때는 嚴格하고 迅速하게 한다. 사람을 죽인 者는 死刑에 處하고 그 집안 사람들은 잡아들여 奴婢(奴婢)로 만든다. 物件을 훔치면 하나에 對해 열두 倍로 갚게 한다. 淫蕩한 男女와 시샘하는 女子는 모두 죽인다.)
  74.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오환선飛棟以前 〉 “尤憎?,已殺,屍之國南山上,至腐爛。”(시샘하는 것을 特히 싫어하여 (시샘하는 女子가) 이미 죽었어도 나라 南쪽의 山 위에 송장을 버리고 썩도록 내버려둔다. )
  75. 진수 (3世紀),《 三國志 》〈 卷30 오환선飛棟以前 〉 “有軍事亦祭天,殺牛觀蹄以占吉凶,蹄解者爲凶,合者爲吉。”(싸움(軍事)이 있을 때도 하늘에 祭祀를 지낸다. 소를 잡아 발굽을 보고 吉凶(吉凶)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져 있으면 나쁜(凶) 것으로 여기고 발굽이 붙어 있으면 좋은(吉) 것으로 여긴다. )
  76. 전해종(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일조각 (一潮閣).pp.39~64
  77. “中國正史조선전 主席보기 > 三國志 卷 030 魏書 30 東夷傳 第 030 [註001] 夫餘傳” . 國史編纂委員會. 2013年 12月 1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3月 19日에 確認함 . 『三國志』夫餘傳은 總 930字이며, 中國正史 中 夫餘에 關한 最初의 列傳으로 그 史料的 價値가 높게 評價되고 있다. 그 內容은 夫餘의 位置와 疆埸을 비롯하여 官制·衣食·儀禮·風俗·産物 等 夫餘의 生活習俗에 關한 詳細한 狀態記述과 玄?郡·後漢·公孫氏 等 中國의 諸 勢力과의 關係記事로 構成되어 있다. 文獻學的 硏究에 依하면 記事의 1/3 程度가『魏略』기사와 關聯된 것인데, 撰者인 陳壽가 參考한『魏略』은 裵松之 注에 引用된『魏略』과는 다른 異本이나, 原魏略에 依存하였을 可能性이 크며,『魏略』의 夫餘와 高句麗 共通의 習俗記事는 省略된 것이라고 한다.(全海宗,『東夷傳의 文獻的 硏究』pp.39~64) 이러한 點에서『三國志』夫餘傳은 從來의 過大한 評價와는 달리 全體的으로는 杜撰이라고 할 수 있으나,『魏略』이 逸失된 現在『三國志』夫餘傳은 裵松之 注에 引用된『魏略』기사와 함께 史料的 價値에 있어서는 다른 어떠한 史書보다 重要하다고 할 것이다. ≪參考文獻≫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出版部.李丙燾, 「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一潮閣.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42) ( 도움말 )

外部 링크 [ 編輯 ]

韓國 의 歷史
以前 時代 扶餘
紀元前 3世紀~494年
다음 時代
古朝鮮 高句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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