統一新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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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新羅

676年 ~ 935年
 

 

  통일신라의 직할령   소고구려와 탐라
   統一新羅의 직할령
수도 金星 北緯 35° 51′ 東京 129° 13′  /  北緯 35.850° 東京 129.217°  / 35.850; 129.217
政治
政治體制 君主制

661年 ~ 681年
742年 ~ 765年
927年 ~ 935年

문무왕
경덕왕
경순왕
국성 慶州 金氏 , 密陽 朴氏
立法府 畫伯
歷史
歷史的 時代 南北國 時代
 ? 百濟 征服 660年
 ? 高句麗 征服 668年
 ?  羅唐戰爭 勝利 675年
 ? 渤海 建國 698年
 ? 渤海 滅亡 926年
 ? 高麗 歸順 935年 10月 [1]
지리
750年 어림 面積 135280 km 2
人文
公用語 古代 韓國語
데모님 新羅人
民族 韓民族
人口
800年 어림 8世紀 新羅 總 450萬名 [2]
8世紀 徐羅伐 約 90萬名 [3] [4] [5]
宗敎
國校 佛敎 [6]
其他 宗敎 儒敎 , 道敎 , 回敎 , 巫俗信仰
기타
現在 國家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統一新羅 (統一新羅)는 676年부터 935年 까지 新羅 高句麗 百濟 를 征服하고, 羅唐戰爭 에서 勝利하여 韓半島 를 統合한 以後의 新羅 를 指稱하는 말이다. 朝鮮 文身 이자 實學者인 유득공 은 北國 渤海 와 對備하여 南國 (南國)이라 부르기도 했다. 代替 用語로는 大新羅 [7] 後期新羅 [8] 가 있다.

名稱 論難 [ 編輯 ]

韓國의 歷史 全體를 놓고 볼 때 一般的으로 第29代 태종무열왕 移轉을 三國 時代 , 그 以後를 統一新羅 時代로 區分짓는다. 羅唐戰爭 以後 統一新羅라는 槪念은 하야시 다이스케 (林泰輔)가 쓴 《朝鮮史 朝鮮史 》(1892)에서 처음 나타난다. [9] 1902年에 大韓帝國 에서 김택영, 玄采 等이 發刊한 歷史敎科書 《동사집략》이나 《東國史略》 亦是 하야시 다이스케의 《朝鮮史》를 거의 그대로 飜譯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統一新羅라는 槪念이 韓國人들의 韓國史 認識에 들어오게 되었다. [10]

그러나 渤海의 存在를 認知하기 始作하면서, 一部 民族主義 史學者를 中心으로 '統一新羅'라는 表現에 異議가 提起되고 있다. [11] '統一新羅 時代'는 분명한 韓國의 歷史이지만, 渤海 가 세워진 698年부터를 南北國 時代 라고 하여 渤海 의 歷史를 어떻게 反映할 것인가 意見이 紛紛하다. [12] 渤海 韓國의 歷史 로 硏究하고, 新羅의 三國統一 또한 穩全한 統一로 보기 어렵다는 觀點이 생기기 始作하여, 이름을 '大新羅' 等으로 代替하기도 한다. [13]

歷史 [ 編輯 ]

三國의 戰爭과 新羅의 勝利 [ 編輯 ]

新羅 振興大王 (在位 540年 ~ 576年) 때에 이르러서는 活潑한 征服 活動을 展開하면서 三國 間의 抗爭을 主導하기 始作하였다. 羅濟 同盟을 맺은 新羅와 백제는 高句麗의 漢江 上流 流域을 攻擊하여 占領하였다(551년). [14] 眞興王은 國家 發展을 위한 人材를 養成하기 위하여 花郞道를 國家的인 組織으로 改編하고, 佛敎 敎團을 整備하여 思想的 統合을 圖謀하였다. 이때부터 新羅 三國 中 가장 强力한 國家로 발돋움하기 始作한다.

이를 土臺로 新羅는 高句麗 의 支配 아래에 있던 漢江 流域을 차지하고 咸鏡道 地域으로 進出하였으며, 南쪽으로는 562年 大伽倻 를 征服하여 洛東江 西쪽을 完全히 掌握하였다. 이러한 新羅의 膨脹은 洛東江 流域과 漢江 流域의 2代 生産力을 所有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高句麗의 南進 政策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仁川만(仁川灣)에서 수·黨(隨唐)과 直接 疏通하여 이들과 聯盟 關係를 맺게 되어 三國의 定立을 보았다. 이때의 新羅 뛰어난 國稅는 이른바 진흥왕 4비(眞興王四碑)인 昌寧碑(昌寧碑:昌寧)·北漢山碑(北漢山碑:서울 北漢山碑峰)·黃草嶺碑(黃草嶺碑:咸南 咸興)·摩雲嶺碑(摩雲嶺碑:咸南 利原) 等이 證明하고 있어서 疑心의 餘地가 없다. [15] 이는 後날 新羅가 三國 競爭에서 主導權을 잡고 勝利하게 되는 契機가 되었다.

이와 같은 新羅의 對外的인 膨脹에 威脅을 느낀 高句麗·백제 兩國은 反擊을 始作하였다. [16] 眞興王 以後에는 진흥왕 臺에 服屬했던 領土들을 조금씩 잃어버리기 始作했으며, 선덕여왕 代에 와서는 百濟(義慈王)가 新羅의 턱밑人 대야성(只今의 慶南 陜川)까지 陷落(642)하여 危機 狀況에 몰리게 되었다.

高句麗 隋나라 唐나라 의 侵略을 막아내는 동안 新羅에서는 金春秋 김유신 과 提携하여 權力 을 掌握한 後 執權 體制를 强化하였다. 이어 高句麗 百濟 에 對抗하여 危機를 克服하고자 했으나, 高句麗의 反擊을 憂慮하여 백제가 侵攻해 오는 것을 效果的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高句麗와의 聯合을 꾀했으나 淵蓋蘇文의 獨裁 政治로 合意에 失敗하였고, 結局 新羅는 唐나라와 나·黨 同盟을 맺어 高句麗와 백제에 反擊을 準備하였다.

나·黨 同盟 以後, 新羅는 反擊하여 백제를 窮地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660年 泗沘城 을 陷落하는데 成功하면서 義慈王과 支配層의 享樂 等으로 政治 秩序가 紊亂해져서 國力이 衰退하고 있었던 百濟 를 征服하였다. 또한 當時 高句麗는 잦은 戰爭으로 國力의 消耗가 甚했고, 淵蓋蘇文의 아들들을 中心으로 地域間 葛藤이 惡化되어 國論이 分裂되고 內戰이 頻繁했었다. 이에 新羅 과 聯合軍을 構成해 668年 에 高句麗를 征服하고 高句麗 貴族을 包攝하기 始作했다. 그러나 唐나라의 最終 目標는 新羅와 聯合하여 高句麗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新羅를 利用해 韓半島를 掌握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唐나라의 野心에 新羅 문무大王 은 高句麗와 백제의 流民과 聯合하여 唐나라와 正面으로 對決하였다.

新羅는 高句麗 復興 運動 勢力을 後援하는 한便, 백제 땅에 對한 支配權 을 完全히 掌握하였다. 이어 唐나라의 20萬 大軍을 매소성 에서 크게 擊破하여 羅唐 戰爭 의 主導權을 잡았고, 錦江 河口의 기벌포 에서 唐나라의 水軍을 殲滅하여 唐나라의 勢力을 韓半島 에서 完全히 몰아내었다(676년). 하지만 옛 高句麗의 北部 領土인 大同江 以北과 滿洲 一帶에는 말갈족이 如前히 버티고 있어서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韓半島 北쪽과 滿洲 一帶는 約 30年의 空白期를 거친 뒤 말갈족이 高句麗를 繼承한 渤海를 세우면서 南北國 時代가 形成되었다.

新羅의 最全盛期 [ 編輯 ]

三國統一 以後 新羅는 領土 擴張과 함께 人口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戰爭이 끝나고 對外 關係가 安定되어 生産力이 增大하였다. 이 무렵, 新羅는 重要한 政治的 變化가 있었는데 武烈王 以後에 王權이 强化되었다는 것이다. 太宗 武烈王은 最初의 眞骨 出身의 王으로 統一 戰爭을 치르는 過程에서 王權을 强化하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太宗 武烈王의 直系 子孫만이 王位를 世襲하였다.

神文王 때에는 김흠돌의 謀逆事件을 契機로 貴族 勢力의 再編을 遂行하였다. 以後, 王命을 받들고 機密 事務를 管掌하는 執事部와 市中의 機能을 强化하고, 和白會議 를 主導하여 貴族 勢力의 利益을 代辯하던 上大等의 勢力을 抑制하였으며, 祿邑을 廢止하고 收租權만을 認定한 官僚田(官僚田)이 支給하는 等 神文王은 眞骨 貴族 勢力을 약화시키고, 王權이 專制化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5墓制를 設置하여, 태종무열왕系의 正統性을 强化하였다. [17] 이 後 685年에 사지(舍知)를 設置하여 英(令)·警(卿)·臺詞(大舍)·사지(舍知)·사(史)의 5段階 官職制度를 完成하였으며, 같은 해에 地方制度人 9州 5小經濟를 確立하였고, 軍事制度로 9書堂 10梃을 마련하였다.

豪族의 成長과 政治의 變動 [ 編輯 ]

8世紀 後半 統一新羅에서는 國家 紀綱이 解弛해지면서 中央 貴族들 間의 權力 鬪爭이 熾烈해지고, 地方에 對한 統制力이 弱化되면서 地方에서는 軍事力과 經濟力, 새로운 思想을 갖춘 豪族 勢力이 成長하였다.

眞骨 貴族들은 祿邑制를 다시 부활시키는 等 經濟 基盤을 擴大하여 士兵을 거느리고 自身들의 勢力 擴張을 위해 權力 鬪爭을 벌였다. 惠恭王이 죽고 上大等 金良相이 선덕왕으로 卽位하면서 眞骨 貴族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君主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經濟力과 軍事力을 確保한 貴族들은 王位 爭奪戰을 벌였다. 王權이 弱化되고 貴族 聯合的인 政治가 運營되었으며, 市中보다 上大等의 權力이 더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過程에서 祿邑을 土臺로 한 貴族들의 支配가 維持되는 한便, 大土地 所有가 擴大되었고, 農民들의 負擔은 加重되었다. 또한 自然 災害가 잇따르고, 王族과 貴族의 奢侈와 享樂으로 國家 財政이 바닥나면서 百姓들에 對한 强壓的인 受取가 뒤따르면서 살기가 어려워진 百姓들은 土地를 잃고 奴婢가 되거나 盜賊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中央 政府에 對한 不滿이 높아지고 地方에서 叛亂이 잦아지게 되었다.

9世紀 中葉의 문성대王(文聖大王) 以後 中央 貴族은 地方 勢力의 威脅에 對處하기 위해 王位 爭奪을 圍繞(圍繞)韓 政爭(政爭)을 식히고 漸次 妥協하는 傾向을 나타내었다. 한便 骨品制로 中央의 政治 舞臺에 參與할 수 없었던 地方 勢力은 重要한 活動 舞臺를 海上貿易(海上貿易)에서 찾게 되었다. 이리하여 公的인 朝貢(朝貢)의 形式으로 行해지던 對外貿易은 漸次 民間貿易에서 主導하였다. 이들은 黨뿐만 아니라 日本과도 活潑히 交易했다. 그러나 黨과의 貿易이 가장 성하여서, 新羅人의 往來가 頻繁한 산둥半島(山東半島)나 장쑤省(江蘇省) 같은 곳에는 新羅坊(新羅坊)李 생기고, 이를 管轄하기 위한 新羅所(新羅所)라는 行政 機關이 設置되었다. 또 거기에는 新羅院(新羅院)이라는 社員이 세워졌는데, 張保皐가 文登縣 적산촌(文登縣赤山村)에 세운 法華院(法花院)은 가장 有名한 것이었다.

地方 勢力家들의 民間 貿易이 盛行하고, 黨의 地方統制權이 弱化되면서 海賊(海賊)의 出沒이 잦았다. 이는 盛行하는 海上貿易에 큰 打擊이 되었는데, 이러한 背景 속에 海上의 軍陣(軍鎭)이 設置되었다. 新羅는 本來 變更의 守備를 위하여 陸地에 設置하던 軍陣(軍鎭)을 海賊들의 活動이 甚한 海岸의 要地에 設置하여 이를 防備하였다. 淸海鎭(淸海鎭 : 莞島)·당성진(唐城鎭 : 南陽)·혈구진(穴口鎭 : 强化) 等이 그것이며, 그 中 興德王 3年(828年) 場보고(張保皐)가 設置한 淸海鎭이 가장 代表的인 것이었다. 張保皐는 海賊 出沒의 防備는 勿論 國際 貿易을 하여 黃海의 王子가 되었고, 다시 中央의 政治에도 關與하였다. 張保皐의 境遇와 類似하게 地方에서 일정한 地域에 對한 實質的인 支配權을 代를 이어가며 行使하는 勢力家들이 이 時期에는 數없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普通 城을 쌓고 스스로 星州(城主)라고 自處하였다.

9世紀 以後에 나타난 統一新羅 社會의 이러한 커다란 變化는 商業 發達에 따른 對象인(大商人)의 擡頭와 大土地 所有의 擴大로 漸次 具體化되었다. 中央 集權 體制의 弱化에 따라 地方의 土豪와 貴族들은 占奪 또는 賣買의 方法으로 農莊을 廓大하여 大地主로 成長하였다. 또 新羅 地方 行政의 末端인 村落의 人民을 統制하던 村主(村主)도 亦是 土地와 人民을 다스리며 勢力을 擴張해 갔다. 弱化된 國家 權力은 이들 地方 勢力을 規制할 수 없었다. 한便 國家의 庇護 밑에 發達한 社員도 免稅(免稅) 特權을 가지고 土地를 兼倂(兼倂), 農莊을 擴大해 갔다.

한便, 唐나라로 留學을 갔다가 歸國한 6頭品 出身의 留學生들과 腺腫 僧侶들은 新羅의 骨品制 社會를 批判하면서 새로운 政治 理念을 提示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眞骨 貴族들에 依하여 自身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隱居하거나 地方의 豪族 勢力과 連繫하여 社會 改革을 追求하였다.

衰退와 滅亡 [ 編輯 ]

10世紀로 들어오면서 地方에서 成長하던 甄萱 弓裔 는 新羅 末期의 混亂을 틈타 獨自的인 國家를 樹立하였다. 이에 따라 新羅는 그 支配權이 縮小되면서 후고구려와 後百濟가 對立하는 後三國 時代가 展開되었다.

후고구려 의 弓裔를 失脚시키고 高麗 를 建國한 高麗 太祖 는 新羅에 對하여 積極的인 友好 政策을 내세웠다. 그의 新羅에 對한 友好 政策은 新羅人들을 懷柔하는 데 有用하였다. 實際로 太祖는 後百濟 가 新羅를 攻擊하자 高麗軍을 派遣하여 新羅軍을 도와 後백제군과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新羅人들의 信望을 얻었고, 그 結果 경순왕 의 自進 降伏을 받아내어 新羅를 손쉽게 征服할 수 있었다. 以後 高麗 太祖 는 新羅 繼承을 標榜하였다.

經濟 [ 編輯 ]

三國統一 以後 新羅는 모든 地域의 크기와 人口, 家畜의 數, 特産物 따위를 모두 調査하는 量田을 實施하여 민정文書 를 作成했다. [18] 이 민정文書의 一部가 日本에서 發見되어 現在까지 傳한다.

文化 [ 編輯 ]

9世紀 新羅 의 代表的인 佛敎
文化를 보여주는 石造 毘盧遮那佛 坐像. 寫眞 속 文化財는 國立中央博物館 所長

統一新羅는 唐나라 와 密接한 關係를 가졌고, 中國 文化에 큰 影響을 받았다. 많은 新羅 僧侶들이 中國으로 건너가 佛敎 를 배워 왔고, 慧超 印度 까지 가서 그 旅行記를 남기기도 했다( 往五天竺國傳 ). [19] 腺腫 , 淨土宗 等의 佛敎 宗派가 輸入된 것도 이 때이다. [19]

682年에는 儒敎 를 가르치는 國學 을 設置했고 750年 太學監으로 改稱되기도 했다. [19] 國學의 敎育 惠澤은 貴族 엘리트들만 받을 수 있었다.

佛敎의 수트라 및 儒敎 經典을 찍어내기 위한 木版 印刷 도 發達했다. 釋迦塔 안에서 發見된 無垢淨光大陀羅尼經 은 紀元後 751年頃의 物件이며 現在까지 남아있는 木版印刷物 中 世界 最高(古)의 것이다. [19]

對外 關係 [ 編輯 ]

日本 [ 編輯 ]

多子以後 를 비롯한 규슈 地域으로 新羅 商人 의 往來가 頻繁해지면서, 9世紀 初盤부터 統一 新羅의 海賊 이 규슈 地域을 襲擊하는 일이 發生하기도 하였다. [20] 869年 경문왕 9年에 新羅의 海賊船 2隻이 租稅 運搬船에 실려 있던 緋緞 을 掠奪하여 달아났다. [20] 894年 眞性 女王 8年에는 100隻, 2,500名에 達하는 大選段이 對馬島 의 사스우라(佐須浦)를 襲擊하였다. [20] 統一 新羅 末期에 極甚하게 어려워진 新羅 사람들의 海賊 活動이라 여겨진다. [20]

各州 [ 編輯 ]

  1. 亡國의 恨 싣고… 高麗時代에도 慶州는 있었다 東亞日報 2016年 7月 14日
  2. 다윗(Davia)과 골리앗(Goliath) 大邱新聞 2011年 9月 13日
  3. 林下筆記
  4. 三國遺事 》卷第一 紀異第一 辰韓
  5. 깊이 잠들어 있던 王國, 千年古都 新羅가 復活한다 朝鮮日報 2014年 12月 26日
  6. 圓光(圓光)의 佛敎思想과 새로운 社會倫理觀 법보신문 2020年 4月 28日
  7. 北韓 歷史學者들은 後期新羅로 指稱하지만, 大韓民國 歷史學者들은 新羅와 大新羅라는 用語를 竝行 使用하고 있다.
  8. 北 “첫 統一國家는 統一新羅 아닌 高麗”
  9. 金英夏, 1993, 「韓末ㆍ日帝時期의 新羅ㆍ渤海認識」, 胎動古典硏究 pp. 532~533
  10. 조동걸 (1998). 《현대韓國史學士》 . 나남출판. ISBN   89-300-3632-5 .  
  11. 윤선태. “統一新羅의 發明과 近代歷史學의 成立”. 《新羅文化》 (동국대 新羅文化硏究所).  
  12. 聯合뉴스. " 百濟·高句麗 滅亡 惹起한 戰爭 名稱서 '統一' 빼야 " .  
  13. 이종욱, 《新羅의 歷史》2, 김영사, 2002
  14. 新羅의 建國과 發展〔槪說〕 〉. 《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圖書出版 犯한. 2004. 551年(眞興王)에는 백제와 더불어 北進하여 漢江 上流 地域을 占領하였다.  
  15. 新羅의 建國과 發展〔槪說〕 〉. 《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圖書出版 犯한. 2004. 553年에는 백제가 占領하였던 漢江 下流 地域을 奪取하여 백제를 包圍하였다. 이러한 新羅의 膨脹은 洛東江 流域과 漢江 流域의 2代 生産力을 所有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高句麗의 南進 勢力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仁川만(仁川灣)에서 수·黨(隨唐)과 職통하여 이들과 聯盟 關係를 맺게 되어 三國의 定立을 보았다. 이때의 新羅 國稅는 이른바 진흥왕 4비(眞興王四碑)인 昌寧碑(昌寧碑:昌寧)·北漢山碑(北漢山碑:서울 北漢山碑峰)·黃草嶺碑(黃草嶺碑:咸南 咸興)·摩雲嶺碑(摩雲嶺碑:咸南 利原) 等이 證明하는 바이다.  
  16. 新羅의 建國과 發展〔槪說〕 〉. 《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圖書出版 犯한. 2004. 이와 같은 新羅의 對外的인 膨脹에 威脅을 느낀 與·第(麗濟) 兩國은 反擊을 始作하였다.  
  17. <韓國의 傳統藝術> ( 韓國文化財 保護財團 編輯部 저 ) 304p
  18. Korean history for high school p.141, issued by The National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of the Republic of Korea.
  19. Stearns, Peter N., 編輯. (2001). The Encyclopedia of World History: Ancient, Medieval, and Modern, Chronologically Arranged 6板. New York: Houghton Mifflin Company. 155?6쪽. ISBN   0-395-65237-5 . 2010年 8月 22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0. “統一 新羅 時代의 海洋 交流” . 《부산역사文化大展》. 韓國學中央硏究院.  

參考 資料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