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창
(金憲昌, ?~
822年
陰曆 3月
)은
新羅
의 王族이자
장안국
의 創建者로
太宗 武烈王
의 後孫인
김주원
의
아들
이다. 官等은
伊飡
에 이르렀으며
헌덕왕
時節에도 여러 官職을 歷任하였다.
熊川州
度獨逸 때 過去에 김주원이 王位에 오르지 못했던 일을 名分 삼아
822年
陰曆 3月
叛亂을 일으키고 국원경 等을 掌握, 장안국을 建國했다가
新羅
軍에 鎭壓되어
自殺
하였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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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職 生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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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7年
正月(
애장왕
8年, 以下 모두
陰曆
)에 官等은
伊飡
으로서
市中
이 됐다가
[1]
810年
(헌덕왕 2年) 前에 물러났다.
813年
正月
武珍州
都督
에 任命됐고
814年
8月 中央으로 들어와 다시 市中에 올랐다가
816年
正月에
淸州
(菁州) 都督으로 물러났고
821年
4月에는
熊川州
都督으로 轉任됐다.
叛亂 그리고 自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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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2年
3月 過去에 아버지인
김주원
이
원성왕
에게 밀려
王
이 되지 못했음을 理由로 熊川州에서 叛亂을 일으켰다. 國號를
長安
(長安),
年號
를
耕耘
(慶雲)으로 定했으며 4週(武珍州,
完山州
, 淸州,
沙伐州
) 3小京(
국원경
,
西原京
,
金官京
)의 여러
軍
現
을 服屬시켰다. 淸州都督 향영(向榮)은
醜化群
으로 도망갔고
漢山州
,
우두주
,
揷良州
,
패강진
,
北原京
等은 김헌창에게 加擔하지 않고
性
을 지켰다.
3月 18日 完山州 장사(長史) 최웅(崔雄), 주조(州助)
阿飡
精鍊(正連)의 아들 靈蟲(令忠) 等이
수도
金星
에 叛亂을 報告하자,
헌덕왕
은 최웅과 靈蟲에게 官職을 하사한 後 장웅(張雄)을 先發隊로, 위공(衛恭)·帝陵(悌凌)은 그 뒤를 잇게 하고,
김균정
·김웅원(金雄元)·
金祐徵
等이 三軍을 統率하게 하였다.
김충공
과 尹응(允膺)은
文化關門
(蚊火關門)을 지켰다. 明記(明基)와 安樂(安樂) 두
花郞
이 從軍을 請하기에 명기는 郎徒들과 黃酸(黃山)으로, 安樂은 詩味地震(施彌知鎭)으로 가게 했다. 이에 金憲昌은 長壽를 보내 重要한 길목에 자리 잡고 官軍을 기다렸다.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위功過 帝陵은 장웅과 合勢한 後
三年山城
과
俗離山
에서, 김균정은
城山
(星山)에서 金憲昌의 軍隊를 擊破한 뒤 모두
熊津城
으로 進擊하였다. 事勢는 기울어
包圍
攻擊 열흘 만에 金憲昌은
自殺
하고 部下들이
목
을 잘라
머리
와
몸
을 따로 묻었다. 城이 陷落되어 金憲昌의
屍體
는 또 베어지고, 一家와 首腦級 239名은 誅戮당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釋放되었다. 叛亂 鎭壓에 功을 세운
녹진
에게
大阿飡
벼슬을 내렸으나 辭讓하고 받지 않았다.
揷良州
에 屬한
굴者群
은 地理的으로 장안국과 가까웠으나 加擔하지 않아 7年 동안
租稅
를 免除하였다.
825年
正月 아들
김범문
이
북한산주
에서 再次 叛亂을 일으켰지만 敗死하였다.
系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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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 溟州郡王
김주원
- 어머니 : 정숙왕후朴氏(貞淑王后朴氏)
- 兄 :
김종기
- 兄嫂 : 원貨否認朴氏(元和夫人朴氏)
- 동생 :
김신
- 아들 :
김범문
(金梵文) - 825年
고달산
山積
受信(壽神) 等 100餘 明과 叛亂을 일으켜
수도
를
南平壤
(南平壤)에 定하고자
북한산주
를 攻擊했지만, 北漢山州都督 聰明(聰明)에게 鎭壓되어 죽었다.
- 아들 :
김분
(金水+分)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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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三國史記》10卷 新羅本紀 第10 애장왕 8年
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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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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