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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자가 그린 男便 全斗煥의 肖像|週刊東亞

週刊東亞 1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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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

이순자가 그린 男便 全斗煥의 肖像

自敍傳 '當身은 외롭지 않다' 出刊

  • 整理??=??구자홍 記者 jhkoo@donga.com 寫眞 出處?·?이순자 自敍傳

    入力 2017-03-27 09:4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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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全斗煥 政權’은 韓國 現代史에서 論爭이 가장 많은 政權이다. 그 政權의 心臟部에서 令夫人으로 權府(權府)의 一擧手一投足을 지켜봤던 이순자(78) 女史가 自敍傳 ‘當身은 외롭지 않다’를 펴냈다. 全斗煥 夫婦가 靑瓦臺를 나온 지 約 30年 만이다. 23張(章) 719쪽에 達하는 自敍傳은 크게 세 期間으로 區分할 수 있다. 1章부터 5張까지는 本人의 成長史와 全斗煥-이순자 夫婦의 家庭事, 6章부터 14張까지는 제5공화국 靑瓦臺 時節 經驗, 15章부터 23張까지는 大統領 退任 以後 한 世代 가까이 繼續된 全斗煥-이순자 夫婦의 苦難社가 담겨 있다.


    李 女史는 “靑瓦臺와 一般 사람들의 距離가 멀어진 理由가 서로를 너무 모르기 때문”이라며 “7年間 靑瓦臺에 머물렀던 經驗 等을 비디오테이프 찍어서 보여주듯 紹介하고 싶었다”고 執筆動機를 밝혔다. 또 그는 記錄과 記憶 等 ‘事實’에 기초해 記述했다고 强調했다. 勿論 그의 事實이 眞實과는 距離가 있을 수 있다. 다만 그의 글에서 제5공화국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4月 初 ‘全斗煥 回顧錄’李 出刊되면 이들 夫婦는 또 한 番 論難의 中心이 될 것으로 보인다. 李 女史가 쓴 自敍傳의 主要 대목을 拔萃했다(호칭은 省略).?



    李順子의 國寶級 殉愛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산다는 것은 얼마나 幸福한가.”
    梨花女大 醫科大學에 進學한 이순자는 전두환과 戀愛 時節, 日記 속에 사랑의 기쁨을 이렇게 적곤 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전두환은 ‘헤어지자’며 李順子에게 絶交便紙를 보낸다. 急性盲腸炎으로 死境을 헤매던 이순자를 등에 업고 遑急히 病院으로 달려가 手術을 받게 한 전두환은 왜 絶交를 宣言했던 것일까.

    “사랑은 感情만 갖고 되는 일이 아니고 責任이고 現實이라는 걸 깨달았어. 結婚 適齡期인 大尉 俸給이 겨우 쌀 한 말을 살 程度에 不過하다 보니 理想을 實現하기는커녕, 當場 입에 풀漆하기도 힘든 形便이어서 結婚한 將校들의 生活은 正말 눈뜨고 보기 힘들 수밖에.”
    이순자는 이런 전두환 式 絶交 宣言에 도리어 感激의 눈물을 흘렸다.

    “저는 어떤 難關이든지 克服할 準備가 되어 있어요. 이것은 瞬間的인 感傷이 아니라 제 決心이에요.” 전두환과 이순자는 1959年 1月 24日, 大邱 경북고 앞 第一禮式場에서 李順子의 아버지 이규동 氏의 上官인 최영희 第2軍司令官의 主禮로 結婚式을 올렸다.





    國會議員 提案을 뿌리치다

    1961年 5月 16日 軍事쿠데타(冊에는 ‘軍事革命’으로 記述됐다) 이틀 뒤 전두환은 ‘5·16 革命 支持를 위한 陸士生徒들의 市街行進’을 主導했다. 이 市街行進을 契機로 朴正熙는 전두환을 國家再建最高會議 議長室 民願祕書官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얼마 뒤 전두환은 當時 高級將校에게 必須 過程이던 ‘光州步兵學校 高等軍事班’ 入校를 위해 朴正熙에게 民願祕書官 辭任 決心을 밝힌다.

    朴正熙 議長은 “現役 軍人만이 國家에 충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예 이 機會에 軍服을 벗고 나라를 위해 일해보도록 하는 게 어떤가. 國會議員 出馬 準備를 하게. 내가 모든 支援과 뒷받침을 해줄 생각이야.”

    그러나 전두환은 軍에 復歸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순자는 “朴 議長을 補佐하는 일이 重要하고 意味 있는 일이라고 해도 (전두환이) 天職을 버리고 人生의 方向 轉換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고 回顧했다.

    1973年 1月 1日, 전두환은 將軍으로 進級했다. 이순자는 “任官 以後 줄곧 ‘나라 위해 이 生命을’이라는 忠誠의 횃불을 태워온 男便의 어깨와 가슴에 불꽃이 타올라 별이 되어 내려앉았다”고 回顧했다.



    12·12, 그리고 5·18

    “아버지(全斗煥)는 이 歷史的인 大事件의 搜査를 책임진 사람으로서 이 事件이 迷宮에 빠져들지 않도록 徹底히 眞相을 糾明해야 할 責任을 갖고 있다.

    크게는 國民들과 歷史에 對한 責任이고, 또 작게는 한 사람의 人間으로서 오늘의 내가 있도록 보살펴주신 朴 大統領에 對한 義理이고 信義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끝까지 所信을 지킨 아버지를 제대로 記憶해야만 한다.”

    1979年 保安司令官으로 朴正熙 弑害事件 搜査를 맡은 全斗煥이 李順子와 네 子女에게 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12·12事態를 하루 앞둔 12月 11日 밤 전두환은 李順子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일은 하늘에 맡깁시다. 私心 없이 하는 일이니 하늘의 보살핌이 있을 것이오.” 10·26과 12·12라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순자는 1980年 1月 15日 大學 編入試驗을 치렀고, 연세대 語學堂에 다녔다.

    그해 5月 이순자는 中央圖書館 앞 廣場에서 ‘全斗煥 火刑式’을 目擊했다. 이순자는 ‘아니, 男便이 없어져야 하다니. 男便이 언제 政治舞臺에 登場이라도 했단 말인가’라는 생각에 男便에게 씌워진 엄청난 誤解와, 火刑式으로 表現되고 있는 죽음의 詛呪가 무척 抑鬱하고 무서워 그 자리에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고 回顧했다.

    그러나 結局 전두환은 그해 9月 11代 大統領에 就任한다. 이순자는 “지난 25年 동안 自身의 모든 땀과 熱情을 바쳐 獻身했던 軍人으로의 삶과 作別하게 만든 後 想像해본 적도, 所望해본 적도 없는 엄청난 새 召命을 男便에게 안겨주었다”며 全斗煥이 大統領이 된 것을 ‘운명’으로 돌렸다.


    令夫人 李順子의 세일즈 外交淡

    “靑瓦臺에서의 새 生活은 내게도 그 분의 새 任務만큼이나 많은 投資와 奮發을 要求했다. 양념 냄새에나 익숙해 있던 平凡한 主婦로부터 한 나라의 大統領 令夫人으로의 갑작스러운 變身은 責任感과 不安感으로 나를 잠 못 이루게 했다.”

    이순자는 1980年 9月 初 初步 令夫人으로 靑瓦臺에 들어가 겪어야 했던 失手談을 이렇게 回顧했다.

    “내가 參席했던 行事가 텔레비전 뉴스에 報道되는 境遇 失望은 더욱 컸다. 演說文만 너무 들여다보면 聽衆에게 缺禮가 되는 것 같아 演說文에서 자주 눈을 뗀 날은 畵面에 비친 나의 視線이 限없이 不安하고 분주해 보였다.

    平凡한 化粧은 카메라 照明을 받으면 번쩍거리기 때문에 훨씬 더 꼼꼼하게 粉을 발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反復되는 失手와 狼狽한 心情 속에서 괴로워하다 깨달은 일이었다. 助言者가 없으니 結局 施行錯誤를 통해 스스로 배워가는 수밖엔 道理가 없었다.”

    이순자는 令夫人으로서 韓國 세일즈 活動에 나선 逸話도 紹介했다. “當時 ‘經濟 되살리기’를 政府의 當面 最大 目標로 삼고 있던 男便은 只今처럼 나라 形便이 어렵고 貿易만이 살 길인 나라에서는 大統領 家族도 세일즈맨이 되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反復해 强調하곤 했다.

    그래서 外交使節 夫人들과 만날 때 端雅한 線과 담백한 멋을 지닌 白瓷 茶器에 人蔘茶 같은 우리 傳統茶를 담아 내놓고, 適當한 機會에 자연스럽게 話題를 돌려 우리나라 白瓷라든가 人蔘의 效能에 對해 慇懃한 자랑을 試圖하는 役割이 必要했다. 아무리 해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던 힘겨운 課題였다.”

    1981年 1月 28日부터 2月 4日까지 전두환 當時 大統領 內外는 美國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워싱턴을 訪問했다. 워싱턴에서 전두환은 當時 美國 大統領이던 레이건과 頂上會談을 했다. 이순자는 美國 訪問 때 僑胞들과 만난 後日談을 이렇게 回顧했다.

    “美國 訪問 途中 우리 內外는 몇몇 場所에서 反政府 團體들의 거센 示威와 대면해야 했다. 甚至於 頂上會談이 있던 날도 白堊館 밖에서는 反政府 勢力들의 示威가 繼續되는 서글픔이 있었다. 當然히 親北勢力의 煽動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中에는 北韓과 아무 相關없이 새 指導者가 된 男便에 對해 깊은 誤解와 批判의 感情을 지닌 사람도 많았던 것으로 斟酌됐다.

    장영자 事件과 아웅산 테러事件

    이순자는 1982年 불거진 장영자 事件에 對해 “事實上 나도 生面不知나 다름없는 한 女子의 大膽한 詐欺行脚의 被害者였다”고 强調했다. 그러면서 “內容이야 어찌됐건 男便으로서는 妻三寸이 連累가 되어 拘束된 事件이었다. 조금씩 民心도 安定되고 經濟도 生氣를 되찾아 겨우 自信感을 얻고 있던 時點에 날벼락같이 찾아온 橫厄과도 같은 事件”이라고 規定했다.

    아웅산 테러事件에 對해 이순자는 두 가지 天行 德에 男便 全斗煥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回顧했다. 하나는 中共(現 中國) 等 共産圈을 近接해 지나는 航路를 變更하는 것이 좋겠다는 友邦 關係當局의 助言으로 迂廻 航路를 擇해 아웅산墓所 參拜 日程이 到着 다음 날로 바뀐 것.

    當初 日程대로 到着 直後 아웅산墓所를 參拜했다면 一行이 同時에 움직여 아무도 慘禍를 면할 수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다른 하나는 行事場 出發 時間이 늦춰진 일이다. 行事場까지 案內해야 할 미얀마 外務長官이 乘用車 故障으로 遲刻하는 바람에 出發 時間이 3分 程度 遲滯됐고 그 德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說明이다.



    6·29 宣言과 1987年 大選

    “國民의 뜻이 直選制라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전두환)
    “直選制 改憲을 選擇할 境遇 大統領 候補職을 辭退하겠다.”(노태우)
    1987年 6·10 民主化運動 當時 두 사람의 意見이 이렇게 갈렸다는 게 李順子의 回顧다.

    結局 直選制를 비롯해 野黨과 國民이 要求하는 모든 民主化 措置를 積極 受容하는 果敢한 構想을 全斗煥이 責任지고 만들고, 그로 인해 거둘 수 있는 모든 收穫과 榮光을 노태우에게 讓步했다는 게 이순자가 記憶하는 6·29 宣言이다.

    이순자는 1987年 노태우 大統領의 當選이 確定된 뒤 두 夫婦끼리 만난 祝賀 자리에서 김옥숙이 싸늘하게 “민정당이 얼마나 人氣가 없던지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고 말해 놀랐다고 썼다. 그는 40年 知己 ‘盧泰愚 夫婦’를 愛憎關係라고 表現했다.


    足鎖가 된 追徵金

    來年 2月이면 全斗煥-이순자 夫婦가 靑瓦臺를 나온 지 꼭 30年이 된다. 그동안 百潭寺 流配, 5共 聽聞會, 5·18 特別法 制定으로 전두환은 2年間 收監生活을 했다. 1997年 12月 赦免復權됐지만, 이番에는 追徵金 還收가 夫婦의 발목을 잡았다. 이순자는 “어떻게 朴正熙의 딸이 우리한테 이럴 수 있나”라고 썼다.

    이순자는 “나는 眞짜 죽으려고 했다. 이렇게 몰면 ‘죽음으로써 報復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追徵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해도 둘째 아들의 離婚한 前妻 집까지 가서 돈 될 만한 것을 다 가져갔다. 그게 祕資金과 關係 있는 건지는 實査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이순자 女史 인터뷰 | “大統領 彈劾, 안타깝기 그지없다”자서전 發刊을 契機로 東亞日報와 채널A는 이순자 女史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自宅에서 두 次例 인터뷰를 進行했다. 다음은 인터뷰 主要 內容.

    朴槿惠 前 大統領을 본 적 있나.
    “(朴正熙 大統領) 돌아가시고 直接 본 적이 있는데, 沈着하고 나이에 비해 카리스마가 있었다. 普通 사람에게서 느낄 수 없는 뭔가가 있더라.”


    彈劾 大統領이 됐는데.
    “正말 안타깝기 限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輩出한 女性 大統領인데, 成功的으로 任期를 마무리하고 나왔다면 兩性平等 次元에서도 참 좋은 例가 됐으련만, 잘잘못을 떠나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많다.”

    朴槿惠 政府에서 ‘全斗煥 追徵法’을 만들었는데.
    “좀 過하다 생각했다. 政治 支持基盤이 없는 狀態로 (靑瓦臺) 들어가 正말 잘해놓고 나오려고 있는 힘을 다해 任期를 마치고 나왔는데, 以後 30年 동안 眞짜 苦難의 歲月을 살았다. 어떤 사람은 나라를 外換危機 事態로 몰고 가도 나쁜 소리를 안 듣더라.”




    장영자 事件으로 別居에 離婚까지 생각했다고 冊에 썼는데, 아직도 世間에서는 이순자와 장영자가 많이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거꾸로 質問하겠다. 親庭 작은어머님의 동생하고 交分이 있는지. 없지 않나. 나도 그랬다. 世上 살다 보면 別 抑鬱한 일이 다 있다. 내가 (장영자 事件 所聞이 떠돌기에) 알아보라고 했는데, 거꾸로 被害는 내가 봤다. 그 事件 後로 別의別 소리가 다 돌았다. 張玲子하고 내가 빨간바지 입고 빨간모자 쓰고 不動産 보러 다닌다고. 아휴, 靑瓦臺는 갈 곳이 못 되는 것 같다. 근데 大統領이 되면 別의別 사람이 다 애를 먹인다.”

    “이희호 女史 尊敬한다”

    金大中 前 大統領을 肯定的으로 評價했던데.
    “김대중 大統領 時節에 우리가 第一 便安하게 살았던 것 같다. 金 前 大統領은 1年에 每分期마다 重要한 國家 懸案이 있을 때면 前職 大統領들을 靑瓦臺로 불렀다. 關係長官으로부터 懸案을 詳細하게 報告하게 해줬다.”

    이희호 女史에 對한 尊敬心이 깊다고.
    “참 尊敬한다. 설, 秋夕, 그이 生日, 내 生日 한 番도 빠지지 않고 亂과 長腦蔘을 보내주시는데, 꼭 署名을 한 便紙를 함께 보내온다. 모든 걸 떠나 같은 前職 大統領 夫人으로서 본받을 點이라고 생각한다.”

    直接 往來는?
    “電話는 한 番 드린 적 있다. 感謝하다고.” 노태우 前 大統領 夫人인 김옥숙 女史에게 서운한 마음을 冊에 썼던데.
    “百潭寺 갔을 때가 서운함의 클라이맥스였다. 하지만 只今은 그런 거 없다. 最近에도 (김옥숙 女史가) 집에 다녀갔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前 代表가 ‘全斗煥 表彰狀’을 받았다고 얘기했다 批判받고 있는데 .
    “表彰狀 줄 때는 大統領이 되기 훨씬 前이다. 그런 것까지 政治 選擧에 利用되는 現實이 참 안타깝다. 그이가 大統領에 在任할 때 表彰, 勳章을 받은 사람들은 그 時代에 正말 뭐든지 잘해서 國家에서 준 것이지 전 아무개가 준 것이 아니다. 그런 걸로 전 아무개가 줬으니까 집어던져야 한다는 것은 조금 偏狹한 생각 아닌가.”

    6??·??29 宣言은 市民들이 爭取한 것 아닌가.
    “市民이 爭取한 건 맞다. 그런데 市民이 爭取한 건 直選制다. 直選制 自體가 民主化는 아니지 않나. 大統領이 때가 되면 憲法을 막 바꿔서 長期執權하던 時節에서 (全斗煥 退任으로) 大統領도 任期를 마치고 돌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게 民主化 아닐까. 우리나라에 그런 (權力의) 善循環이 始作됐다는 게 民主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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