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家族은 小說이나 映畫 素材가 될 수 있다. 祕密 없는 家族이 없고, 부끄러운 일 하나쯤 가지지 않은 家族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作家가 家族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한다. 잭 니컬슨처럼 누나인 줄 알았던 女子가 엄마인 境遇까지는 아니겠지만, 映畫나 小說을 보면 기막힌 家族史가 한두 個쯤 登場하는 건 例事다.
꼭 막장드라마에만 出生의 祕密 或은 엄마의 祕密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完璧한 藝術이라고 稱頌한 ‘오이디푸스’도 따지고 보면 出生 및 엄마의 祕密 가운데 놓여 있지 않은가.
映畫 ‘幸福 沐浴湯’은 그런 ‘家族’ 이야기다. 그런데 이 家族의 祕密은 좀 더 여러 겹이라고 할 수 있다. 些少하게 지나칠 수 있는 端緖가 모두 祕密의 反轉을 열어주는 실마리 구실을 한다. 그리고 그 反轉은 全部 아버지를 媒介로 하고 있다.
事實上 ‘幸福 沐浴湯’은 아버지라기보다 어머니의 이야기인데, 아버지가 主로 家族의 祕密을 만드는 觸媒이자 媒介라면 어머니는 그런 祕密을 傷處 아닌 追憶으로 품어주는 포근한 溫氣다.
事故뭉치 아버지가 집을 나간 지 1年째, 딸 아즈미와 함께 하루를 始作하는 엄마(미야자와 리에 분)는 무척 씩씩한 ‘假冒長’이다. 그는 딸의 아침을 準備하고, 學校에 가기 싫어 핑계를 대는 아이를 激勵해 내보낸다.
그리고 自身도 計算員 일을 하려고 出勤한다. 元來는 幸福 沐浴湯을 運營했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 男便이 집을 나간 後론 그렇게 두 사람만의 삶을 살아간다.
問題는 그렇게 씩씩하던 엄마가 일하던 中 갑자기 쓰러지면서 發生한다. 問題는 엄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學校에 가기 싫어하는 딸에게는, 斟酌하듯, 學校 暴力 問題가 쌓여 있다. 아이들은 巧妙하게 그를 놀리고 괴롭히며 따돌린다.
末期癌을 宣告받은 엄마는 自身의 生涯를 그저 病院 寢牀에서 마무리하려고 하지 않는다. 男便을 찾아야 하고, 아직 왕따에 시달리는 딸은 勿論, 自身에게도 꼭 해줘야 할 일들을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幸福 沐浴湯’이라는 題目과 달리, 映畫에선 기쁘기보다 슬프고 마음 아픈 일이 主로 일어난다. 그러나 映畫는 傷處와 苦痛 속에서도 그것을 삶의 에너지로 끌어올릴 수 있는 契機가 바로 家族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家族의 核心에는 ‘엄마’, 卽 生物學的 엄마라기보다 機能으로서의 엄마가 있다. 家族이란 꼭 피와 살로 맺어진 關係가 아니라 體溫과 追憶, 食事를 共有하는 慰安의 集團이라는 意味에서 말이다.
日本 아카데미賞에서 女優主演賞을 受賞한 미야자와 리에는 씩씩하면서도 堂堂하고, 한便으론 多情多感하면서도 寬大한 엄마의 모습을 멋지게 보여준다. 어떤 點에서는 多少 過多한 偶然과 그 偶然을 통한 感情的 飛躍이 發見되기도 하지만, 그렇게 均衡이 무너질 때 미야자와의 演技는 훌륭한 求心點이자 무게重心이 돼준다.
‘幸福 沐浴湯’은 全般的으로 日本 映畫 特有의 靜的이고 羅列的人 에피소드 構成 方式을 보여준다. 어떤 點에서 보면 選擇의 瞬間마다 主人公이 내린 決定이 우리 情緖로는 받아들이기 조금 語塞하거나 낯설다. 特히 마지막 場面에서 그들만의 葬禮 風景 같은 대목 말이다. 그럼에도 ‘幸福 沐浴湯’은 結局 家族 이야기다.
家族이란 누구에게나 조금쯤 무겁고 귀찮은 存在이기도 하지만, 또 한便으론 그렇게 무겁기만 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家族과 엄마, 그리고 家族다움과 엄마다움을 생각하게 하는 映畫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