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렌 키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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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렌 키르케고르
Søren Kierkegaard
닐스 크리스티안 키르케고르가 1840년에 그린 키르케고르 스케치
닐스 크리스티안 키르케고르가 1840年에 그린 키르케고르 스케치
學者 情報
本名 Søren Aabye Kierkegaard
出生 1813年 5月 5日 ( 1813-05-05 )
덴마크 코펜하겐
死亡 1855年 11月 11日 ( 1855-11-11 ) (42歲)
덴마크 코펜하겐
國籍 덴마크 王國
學歷 東部 市民 學校
코펜하겐 大學校
父母 미카엘 페데르센 키르케고르
아네 쇠렌多테르 룬 키르케고르
署名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 ( 덴마크語 : Søren Aabye Kierkegaard , 덴마크語 發音:  [?sœː?n ?k?i??g???g??ː?] , 이 소리의 정보듣기   1813年 5月 5日 ~ 1855年 11月 11日 )는 덴마크 哲學者 , 神學者 , 詩人, 社會批評家다. 實存主義 哲學者 先驅者로 評價받기도 한다. 키르케고르는 事實上 實存主義 始祖라고 할 수 있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를 매우 만나고 싶었지만 못했고, 쇼펜하우어 에게 莫大한 影響을 받았다. 쇼펜하우어에 關한 寄稿文을 쓰기도 했다. 키르케고르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觀念論 과 當時 덴마크 루터敎會 의 無意味한 形式主義에 反對하였다. 그 作品 中 大部分 信仰 의 本質, 基督敎 敎會의 制度, 基督敎 倫理와 神學 , 삶에서 決定을 내려야 할 瞬間에 個人이 直面하는 感情 感覺 같은 宗敎的 問題를 다루고 있다. 이 때문에 키르케고르는 無神論的 實存主義者에 屬하는 장폴 사르트르 프리드리히 니체 와 다르게 ‘基督敎 實存主義者’로 評價받기도 한다. 그 初期 著作들은 다양한 筆名 으로 記錄했으며, 그 이름들은 複雜한 對話에서 特有의 觀點을 드러낸다. 그는 많은 作品을 匿名으로 남겼으며, 그가 匿名으로 쓴 作品을 批判하는 또 다른 匿名 作品을 出版하기도 하였다. 키르케고르는 讀者에게 意味를 찾아야 하는 課題를 남겼다. 그것은 “課題란 어려워야만 하고, 오직 어려움만이 高尙한 마음에 靈感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1] 그 뒤에 어떤 사람들은 키르케고르가 實存主義者 , 新正統主義者 , 휴머니즘的인 心理學을 한 人本主義者 , 個人主義者 等等이었다고 解釋한다. 키르케고르는 哲學 神學 , 心理學 그리고 文學 의 境界를 넘나들었기 때문에, 現代 思想에서 매우 重要하고 影響力 있는 人物로 여긴다. [2] [3] [4]

生涯 [ 編輯 ]

初期 (1813~1841年) [ 編輯 ]

出生 [ 編輯 ]

키르케고르는 덴마크 의 數도 코펜하겐 의 富裕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인 아네 쇠렌多테르 룬 키르케고르(Ane Sørensdatter Lund Kierkegaard)는 쇠렌의 아버지와 結婚하기 以前에는 그 집안의 下女로 일했다. 그女는 謙遜한 모습이어서, 조용하고 平凡했으나 正式으로 敎育 을 받지는 않았다. 그女가 키르케고르의 後期 著作에 感銘을 받았지만, 키르케고르의 著作이 出刊되었을 때 곧장 注目하지는 않았다. 키르케고르의 어머니는 1834年 7月 31日 66歲에 死亡하였다.

父親의 影響 [ 編輯 ]

아버지 미카엘 페데르센 키르케고르(Michael Pedersen Kierkegaard)는 憂鬱했고, 걱정이 많았으며, 宗敎心이 깊었고,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다. 미카엘은 自身이 하느님의 瞋怒를 샀다고 確信했기 때문에 그는 自己 子女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世上에 살다간 나이인 33歲를 넘기지 못하리라고 믿었다. 어린 時節 有틀欄 荒野에서 甚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나머지 하느님을 詛呪했던 罪人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婚外情事로 아내를 妊娠 시킨 것은 어떤 形態로든지 處罰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일곱 子女 中 相當數가 어린 나이에 죽었지만, 子女 中 두 名이 33歲를 넘어서 生存했을 때 그의 믿음은 틀렸음이 證明되었다. 그 나이를 넘긴 두 사람은 쇠렌과 몇 살 위 兄인 페테르 크리스티안 (Peter Christian Kierkegaard)이었다. 페테르는 神學者 로 政府에서도 活動했으며, 루터교 主敎를 지냈다.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 의 恩寵으로 自身의 罪를 容恕받고 靈魂의 救援을 받아 永遠한 幸福을 얻고자 했던 篤實한 改新敎 信者였다. 篤實한 改新敎 信者로서 미카엘은 막내아들 쇠렌에게 嚴格한 改新敎 敎育을 베풀었다. [5] 아버지는 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를 믿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곤 했으며, 아들이 神學校를 나와 改新敎 牧師가 되기를 願했다. [5] 쇠렌은 누구보다 아버지를 따랐고, 아버지의 暗鬱한 性格, 信仰心, 그리고 가르침에 依해 많은 影響을 받으며 자랐다. [5] 쇠렌의 暗鬱한 性格과 어떻게 眞實한 그리스도人이 될 수 있는가라는 平生의 問題意識은 아버지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다. [5] 그가 나중에 著述한 偉大한 作品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이러한 遺産의 産物이라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5]

어린 時節부터 이러한 罪와 아버지로부터 自身에 이르는 罪와의 關係를 보아 왔기 때문에 키르케고르는 여러 作品에 그 經驗을 反映할 수밖에 없었다. 키르케고르의 아버지는 때때로 宗敎的인 憂鬱症 에 시달렸음에도 不拘하고, 키르케고르와의 關係는 相當히 가까운 사이이었다. 키르케고르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놀면서 想像力 을 키워 나갔다. 키르케고르의 아버지는 82歲의 나이로 1838年 8月 9日 에 死亡하였다. 그는 죽기 前에, 쇠렌 키르케고르에게 改新敎 牧師 가 될 것이냐고 물었다. 쇠렌은 아버지의 宗敎的인 經驗과 삶에 깊은 影響을 받았고, 아버지의 바람에 忠實히 따라야 할 義務感을 느꼈다. 이틀이 지나고, 8月 11日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의 아버지는 水曜日에 돌아가셨다. [6] 나는 正말로 그분이 몇 해라도 좀 더 오래 살아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죽음이 그분이 나를 사랑해서 나를 위해 바치는 最後의 犧牲祭祀人 듯이 지켜보았다. … 萬若 可能하다면, 그분은 내가 조용히 무엇인가로 變化하게 하기 위해서 나를 위해 죽었을 것이다. 나는 그분에게서 모든 것을 물려받았고, 나는 그분의 모든 것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합쳐진 存在이고, 나는 그를 쏙 빼닮아 若干 變形된 그의 肖像畫처럼 보인다. … 나에게 所願이 하나 있다면, 내가 신중하게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 世上으로부터 그의 記憶을 安全하게 숨겨서 保護하는 일이다. [7]

學業 [ 編輯 ]

키르케고르는 東部 市民 學校 에 다녔다. 그곳에서 라틴語 歷史 에 뛰어난 實力을 보였다. 아버지 미카엘과 兄 페테르의 勸誘를 받아 키르케고르는 18歲에 코펜하겐 大學校 神學部에 入學한다. [5] 大學校에 들어간 以後에 키르케고르는 한동안 放蕩한 生活을 하며 "基督敎는 狂氣"라고 말할 程度로 基督敎에서 멀어진다. [5] 그의 아버지는 自身의 어린 時節을 떠올리며 슬픈 마음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5] 키르케고르에게 破滅의 時期는 1836年 自殺 未遂 事件으로 絶頂에 이르지만, 이 事件 以後에 그는 漸次 安定을 되찾는다. [5]

大學에서 키르케고르는 論文 〈 아이러니의 槪念-소크라테스를 念頭에 두고 〉를 執筆했다. 이 論文은 大學의 審査 敎授 들이 注目할 만큼 잘 만들어졌다는 評價를 받았지만, 너무 길고 哲學 敵人 論文치고는 文學的인 性格이 剛했다. [8] 키르케고르는 1841年 10月 20日 哲學 博士學位를 받고 卒業했다. 그의 家族은 大略 3萬 1千 덴마크 리그스달레르 [9] 程度의 遺産을 相續했고, 그것은 키르케고르가 敎育을 받고 生計를 維持하며 그의 여러 初期 著書를 出版하는 데 밑천이 되었다.

레기네 올센 (1837~1841年) [ 編輯 ]

約婚했다가 破婚했던 레기네 올센 ,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며 그의 著作에서는 "뮤즈"이다.

一般的으로 그의 作業에 主要한 影響을 끼쳤다고 看做되는, 키르케고르 生涯에서 또 다른 重要한 場面은, 레기네 올센 과의 破婚이다. 키르케고르는 5月 8日 에 레기네를 만났고, 卽刻的으로 그의 魅力에 이끌렸는데, 그것은 레기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日記帳에 레기네를 向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그대, 가슴 한복판에 있는 나의 要塞에 깊숙이 숨겨둔 내 마음을 掌握한 主權者, 내 생각의 充滿함, 그곳 … 알 수 없는 神聖! 오, 내가 詩人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 누군가 처음 사랑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그는 그女를 오래前에 본 적이 있었다고 想像하리라, 모든 記憶과 같은 모든 사랑은 記憶이다, 그 사랑은 한 사람에게 그 自體로 充分히 豫言들과 같은 힘을 지닌다. … 그대는 나에게 그대와 같은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내가 모든 少女의 아름다움을 所有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나는 나의 텅 빈 靈魂을 채울 수 있는 場所를 찾아 온 世界를 떠돌아다녀야만 했다. 내 存在 全體가 지니고 있는 깊은 神祕가 가리키는, 그곳을 찾아 다녔다. 그런데 그다음 瞬間에 그대가 나에게로 왔다. 나의 靈魂은 가득 찼고, 그것은 너무도 强力해서 나는 내 自身을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켰고, 나는 只今 이곳에 存在하는 것이 幸福하다고 느낀다.
 
— 쇠렌 키르케고르 , 《日記》 [7] ( 2月 2日 1839年 )

1840年 9月 8日 키르케고르는 正式으로 레기네에게 請婚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곧 結婚에 對해서 幻滅을 느끼고 憂鬱해했다. 그가 請婚한 지 1年이 가기도 前에, 1841年 8月 11日 破婚했다. 日記帳에 키르케고르는 自身이 지닌 “憂鬱함”이 結婚에 對해서 그를 不安定하게 만들었다고 믿는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破婚한 正確한 理由는 알 수 없다. 一般的으로 두 사람이 깊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며, 아마도 그 사랑은 레기네가 요한 프레데리크 슐레겔 [10] 과 結婚한 後에도 持續되었을 것이다. 슐레겔은 뛰어난 公務員이었다. 그 後 平生 두 사람이 서로 만날 수 있었던 空間은, 코펜하겐의 거리로 制限되었다. 몇 年이 지나고 키르케고르는 레기네의 男便에게 그女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해달라고 付託했지만, 슐레겔은 拒絶했다.

그 일이 있은 後, 슐레겔 夫婦는 코펜하겐을 떠나게 되었다. 슐레겔이 덴마크領 서인도 諸島 (現在의 美國領 버진아일랜드 )의 總督으로 任命되었기 때문이다. 時間이 흘러 레기네가 덴마크로 돌아왔을 때, 키르케고르는 死亡한 後였다. 레기네 슐레겔은 1904年 까지 生存했으며, 事後에 코펜하겐의 아시스텐스 墓地 에 묻힌 키르케고르 近處에 묻혔다.

初期 著作 (1841~1846年) [ 編輯 ]

키르케고르가 政治 · 女性 및 幼年 時節의 娛樂과 大學 時節에 對한 글을 몇 篇 썼음에도 不拘하고, 키르케고르의 첫 番째 卓越한 作品을 1841年 에 出刊된 大學 論文 〈 아이러니의 槪念-소크라테스를 念頭에 두고 〉 또는 1843年 에 出刊된 《 이것이냐, 저것이냐 》로 보는 學者들이 많다. 앞 冊을 選擇한 立場의 學者는 소크라테스 를 西洋哲學의 主要 人物로 보며, 뒤의 冊을 選擇한 立場의 學者는 헤겔 이 重要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立場을 取하든지 間에, 學者들은 各各의 著書 모두가 키르케고르의 獨特한 글쓰기 形式을 模範的으로 보여주며, 그가 草創期에 이미 글쓰기에서 어느 程度 成熟한 境地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大部分은 베를린 에 머무는 동안에 著述되었으며 1842年 가을에 完成되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가 出刊된 그 해에 키르케고르는 레기네 가 슐레겔과 結婚하기로 約束했다는 事實을 알았다. 이 事實은 키르케고르 自身과 그의 다음 著書들에 깊은 影響을 끼쳤다. 1843年 後半期에 出刊된 《恐怖와 戰慄( 두려움과 떨림 )》을 본 사람은 누구든 그 冊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解釋할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神的 行爲를 통해서 레기네가 自身에게 돌아오기를 期待한다.’ [11] 《恐怖와 戰慄( 두려움과 떨림 )》과 매우 가까운 時期에 出版된 《 反復 》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젊은 紳士에 對해 쓰고 있다. 이 期間에 쓴 다른 여러 著書도 비슷하게 키르케고르와 레기네의 關係를 含蓄하고 있다.

哲學的 短篇 》 肉筆 原稿. [12]

그 期間에 쓴 다른 두드러진 作品들은 헤겔 을 批判하는 데 集中하며, 實存主義 哲學의 基本을 形成한다. 《 哲學的 短篇 》, 《 不安의 槪念 》과 《 人生길의 여러 段階 》는 한 사람의 삶 가운데 個人이 삶에서 直面하게 되는 느낌과 생각들, 실존적인 選擇과 그것의 結果, 그리고 宗敎인 特히 基督敎人인지 아닌지의 與否(‘眞正한 基督敎人은 누구인가?’) 等에 對해 쓴 冊들이다. 헤겔주의 에 對한 가장 勇敢한 挑戰은 아마도 키르케고르가 쓴 冊 《 哲學的 短篇에 부치는 非學問的인 解說文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to Philosophical Fragments|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to Philosophical Fragments)일 것이다. [13] 이 冊에서 키르케고르는 個人과 眞理로서의 主體性이 지닌 重要性을 論하면서, “理性이 眞實이고 眞實은 理性이다.”라고 했다. 卽 있음과 앎이 같다고 말한 것이다. [14] 結局 키르케고르는 個體로서의 人間이 지니는 實存의 意味를 排除한 헤겔에 맞서 있음과 앎이 같으며 各 個人의 삶이 固有하며 人間이 實存한다는 것을 主張하였다. [15]

이 冊의 大部分은 事實上 哲學的이고, 間接的으로 筆名을 使用하여 記錄되었으며, 삶의 方式에 對한 다른 觀點을 나타낸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各各의 哲學的인 作業에 맞추어 두세 卷 程度의 神學的 論說을 失明으로 出刊했다. [16] . 키르케고르는 筆名으로 쓴 冊에 나타난 哲學的 觀點을 明確히 하려고 이러한 論說들을 썼고, 그 作業의 神學的인 觀點을 論했으며, 讀者의 精神을 일깨우려 했다. [17]

《海賊船》 事件 (1845~1846年) [ 編輯 ]

1845年 12月 22日 페테르 루드비히 묄러 가 《 人生길의 여러 段階 》를 批評하는 글을 出刊했다. 이 글은 “段階들”에 對한 형편없는 感想文으로, 키르케고르 思想을 全혀 理解하지 못한 글이었다. 묄러는 有名 人士들을 諷刺하는 덴마크語 諷刺雜誌 《 海賊船 》의 寄稿家이기도 하였다. 키르케고르는 묄러의 비웃음으로부터 自身의 思想을 지키기 위하여 應答하는 글을 썼고, 《海賊船》과의 論爭에서 이기려고 애쓰다가 그 雜誌와 雜誌의 編輯長 마이르 아아론 골드슈미츠 (Meir Aaron Goldschmidt)에게 火를 내기도 하였다

키르케고르가 묄러에 答하기 위해 쓴 글은 〈 旅行하는 美學者의 活動 〉과 〈 文學的 軍事行動의 辨證的 結果 〉로 오직 두 篇뿐이다. 첫 番째 글은 묄러의 正直性을 攻擊하고 그의 批評에 對應하는 데 焦點이 맞추어져 있다. 두 番째 글은 키르케고르를 公公然하게 諷刺하려 했던 《海賊船》을 正面으로 攻擊하고 있다.

只今까지로 보아서는 男女老少를 莫論하고 많은 이들이 《海賊船》 따위의 雜誌를 읽는다. 그리고 그들은 無視되고 蔑視하고 決코 解決될 수 없는, 存在를 認識하는 일을 本質的으로 즐기고 있다. 文學을 表現하기 위해서 이런 式의 글쓰기가 해낼 수 있는 일이란, 똑같은 雜誌에 依해 모욕당하는 事例를 만들기 위해서 稱讚받는 有名 人士를 對象으로 삼고, 貧困한 才能과 엄청난 努力을 바탕으로 事物들이 反映하는 道德的 秩序를 뒤집어 버리고 엎어 버리는 것이다. … 讀者 여러분께 付託드리고 싶다. 《海賊船》李 지나칠 程度로 不滅의 名聲을 附與한 存在를 내가 人格的으로 冒瀆할 수 있었으면 하는데, 許諾해 주시길 바란다.
 
— 쇠렌 키르케고르 , 文學的 軍事行動의 辨證的 結果, 《키르케고르 選集》( Essential Kierkegaard ) 中에서.

몇 달이 채 가기도 前에, 《海賊船》은 侮辱을 주겠다는 키르케고르의 攻擊에 對應했다. 그 雜誌는 키르케고르의 外貌와 목소리, 習慣을 우스갯소리로 만들어 시리즈로 世上에 퍼뜨렸다. 몇 달 동안 키르케고르는 덴마크의 거리를 거닐 때마다 놀림감이 되어야 했다.

1846年 日記 全體를 통해, 키르케고르는 길고도 詳細하게 묄러와 《海賊船》을 批判했다. 또한 이러한 批判 過程에서 自身이 더 以上 間接的으로 筆名을 쓰는 意思疏通 方式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말했다.

글을 쓰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神에게 感謝드린다. 내 나름대로는 지난 歲月이 만족스러웠는데, 그것은 내가 언제 끝장을 내야만 하는지를 理解하게 되었던 時間이었고, 《 이것이냐, 저것이냐 》를 出刊한 다음부터 나는 그것을 神에게 感謝드렸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와는 상관없는 것이지만, 나는 두 마디 말로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正말로 證明할 수 있었다. 나는 나의 著作權에 對해서 매우 잘 안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괴롭게 했다. 이 雰圍氣는 나에게 무슨 冊을 썼는지 다 自白하라고 要求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Let it be.) 萬若에 내가 어떻게든 해서 聖職者가 되었다면, 雰圍氣에 맞추어야 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사는 오늘의 삶에 大部分 滿足하고 있다. 餘裕로운 時間에는 때때로 글을 쓰면서 조용히 活動하는 이 삶이, 나를 조금 더 자유롭게 숨 쉴 수 있게 한다.
 
— 쇠렌 키르케고르 , 《日記》 [7] ( 1846年 3月 9日 )

後期 著作 (1846~1853) [ 編輯 ]

( 죽음에 이르는 病 ) 키르케고르 肉筆 原稿. [12]

키르케고르의 첫 番째 著作이 헤겔 哲學을 反對하는 것에 焦點이 맞추어졌다면, 이 時期 著作에서는 基督敎界의 僞善을 批判하는 데 焦點이 맞추어져 있었다. 키르케고르가 基督敎 自體를 攻擊하지 않았음을 基督敎界가 認識하는 것이 重要하다. 키르케고르가 標的으로 삼은 것은, 敎會와 그가 살던 社會에서 드러난 宗敎의 現實的인 모습이었다. 海賊船 事件 以後에 키르케고르는 “一般 大衆” 및 大衆과 個人의 相互作用에 關心이 생겼다. 이 時期에 그가 처음으로 쓴 글은, 《 두 時代:文學的 感想文 》이었다. 이 글은 토마新 크리스틴 길렘부르크 에흐렌스뵈르트 (Thomasine Christine Gyllembourg-Ehrensvard)가 쓴 小說 《두 時代》 [18] 에 對한 批評이었다. 이 글을 쓴 以後에, 키르케고르는 그 時代 사람들의 本性과 그들이 지닌 삶에 對해 熱情을 느끼지 않는 無關心한 態度에 對해 여러 洞察力 있는 觀察을 할 수 있었다. 近代性에 對한 그의 不平 中 하나는, 그것이 이 世界에 對해 별다른 熱情이 없는 世界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썼다. “現在는 熱情이 없는, 本質的으로 合理的인 時期이다. … 오늘날의 流行은 數學的 같음을 가리키는 方向으로 흐르고 있는데, 그 結果로 모든 階層에서 한결같이 비슷비슷한 匿名의 個人이 誕生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 키르케고르는 個人을 無關心한 大衆으로 바꾸어 가는 體制 順應性과 文化的 童話를 攻擊하고 있다. [19] 비록 키르케고르가 大衆을 攻擊하기는 했지만, 그는 個人들이 自身들의 多樣性과 唯一無二함을 지킬 수 있는 共同體를 支持했다.

다른 著書들은 繼續해서 大衆의 淺薄함이 唯一無二한 個人을 抑壓하려고 試圖하는 것에 集中했다. 《 아들러에 關한 冊 》은 敎會의 성스러움을 侵害하는 啓示를 言及한 아돌프 페터 아들러(Adolf Peter Adler) 牧師의 主張을 담은 冊이다. 아들러 牧師는 그런 主張을 한 結果로 牧師職에서 쫓겨나고 黜敎 當했다.

大衆에 對한 그의 分析에서, 키르케고르는 基督敎 敎會의 腐敗와 沒落을 認識했고, 特히 그것은 덴마크 國敎會를 겨냥하였다. 키르케고르는 基督敎界가 基督敎 信仰에 對해서 “自身의 길을 잃어 버렸다.”라고 믿었다. 이 時期 基督敎界는 基督敎의 元來 가르침을 適當히 無視하거나, 歪曲하거나, 아니면 但只 입에 발린 말(‘lip service’) 程度로 取扱했다. 키르케고르는 後期에 이르러서 所謂 “基督敎人으로서의 삶”이라 불리는 것의 어두운 裏面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義務感을 느꼈다. 그는 當代 基督敎를 批判하는, 《 基督敎人 談論 》(Christian Discourses), 《 사랑의 歷史 》, 그리고 《 다른 種類의 靈魂을 啓發하기 위한 談論 》(Edifying Discourses in Diverse Spirits) 等等의 여러 글을 썼다.

죽음에 이르는 病 》은 키르케고르가 이 時期에 쓴 冊 中 가장 大衆的인 것에 屬한다. 비록 그 時代의 一部 無神論的 哲學者들과 心理學者들이, 키르케고르가 提案한 解決策이 信仰 이라는 事實을 看過해 버렸음에도 不拘하고, 실존적인 絶望의 本性에 對한 그의 分析은 主體에 對한 最高의 說明 中 하나이다. 그의 分析은 또한 뒤이어서 登場하는 哲學者들의 說明과 優劣을 다투어 왔다. 例를 들면, 마르틴 하이데거 의 실존적인 罪(existential guilt) 槪念과 장 폴 사르트르 의 “사르트르와 不信”(Sartre and bad faith)을 들 수 있다.

1848年 키르케고르는 《基督敎의 實踐》( Practice in Christianity ), 《自己反省을 위하여》, 그리고 《너 스스로를 判斷하라》와 같은 그의 冊에서 덴마크 國敎會를 攻擊하기 始作했다. 그 冊들을 통해, 그는 基督敎人이 본받아야 할 模範으로 예수 를 提示하면서, 基督敎의 眞正한 本質을 說明하려고 試圖하였다.

基督敎界에 對한 攻擊 (1854~1855年) [ 編輯 ]

쇠렌 키르케고르의 무덤

키르케고르는 末年에 이르러 꾸준히 덴마크 敎會를 批判했다. 《曺國》이란 이름의 新聞에 記事를 쓰기도 했고, 《瞬間》( Øjeblikket )이란 題目의 雜誌를 直接 發刊하기도 하였다. [20] 또한 키르케고르는 덴마크 敎會의 그리스도人들이 聖書 를 引用할때에 聖書本文의 뜻과는 아무 相關이 없는 엉뚱한 解釋을 하는 問題를 指摘했다. 聖書를 自身의 見解를 正當化하기 위한 道具로 利用하는 聖書 의 道具化에 對해서 批判한 것이다. 實際로 키르케고르는 自身이 다니는 敎會의 牧師 가 ' 예수 나사로 를 살릴 때에 그의 屍身을 옮기게 했다'는 요한福音書 이야기를 引用해서 墓地를 이동시키도록 한 墓地法을 支持한 일을 自身의 冊에서 引用했다. [21]

키르케고르는 한스 라센 마르텐센 敎授가 敎會에서 最近에 死亡한 야코프 P. 뮌스터(Jakob P. Mynster) 全 主敎를 “眞理의 目擊者, 眞實한 眞理의 證人 中 한 사람”이라 부르는 演說을 하자 行動하기 始作하였다. [22]

키르케고르는 민스터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가 지닌 基督敎의 槪念에 비추어 볼 때, 神의 立場이 아니라 人間의 立場에서 민스터의 삶을 ‘眞理의 目擊者’와 比較할 만한 그 어떠한 理由도 없었다.

墓碑의 詳細한 모습

《瞬間》 第10號가 出刊되기 前에, 키르케고르는 거리에서 쓰러졌고, 結局 病院으로 실려 갔다. 그는 病院에 한 달도 넘게 入院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가 但只 公務員에 不過할 뿐 神의 종이 아니라고 여겼던, 牧師에게서 聖晩餐 을 받는 것을 拒絶했다. [23]

그는 에밀 뵈센(Emil Boesen)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밀은 키르케고르와 어렸을 때부터 親舊였고, 키르케고르와의 對話를 記錄했으며, 그 自身이 牧師인 사람이었다. 키르케고르는 그에게 自身의 삶은 엄청나고 알 수 없는 苦痛을 지닌 것이었다고 言及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自身에게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키르케고르는 한 달을 넘게 그곳에 있다가, 프레데리크 病院에서 脊椎 結核 으로 인해 死亡하였다. 그는 코펜하겐에 있는 腦레브로 區域의 아시스텐스 墓地 에 묻혔다. 키르케고르의 葬禮式에서, 그의 조카인 헨리크 룬트는 騷亂을 피웠다. 키르케고르가 그의 삶에서 非難하고 그곳으로부터 脫出하려고 애썼던 것이 덴마크의 國敎會인데, 그 敎會가 키르케고르를 묻는 것에 反撥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後에 룬트는 그런 狀況을 받아들였다.

그는 世上을 떠나며 爆彈이 터져 불이 일어날 것이라고 豫言했다. 그의 豫言대로 그의 思想은 現代 實存主義 哲學과 辨證法的 神學 에 불을 댕겼다. 이제 그의 思想을 빼고 現代 實存主義 哲學과 辨證法的 神學은 말할 것도 없고, 이와 直·間接的으로 關聯이 있는 現代 哲學을 論하는 것은 不可能한 일이 되었다.

史上 [ 編輯 ]

키르케고르의 外貌를 보고 내가 받은 明確한 引上은 거의 우스꽝스러운 쪽에 가까웠다. 그때에 그는 스물세 살이었다. 그의 모습은 全體的인 形態가 무언가 宏壯히 고르지 못했고, 머리 模樣이 異常했다. 머리카락은 새의 볏처럼 흐트러져서 앞이마 위에 거의 6인치나 치솟아 있었다. 그런 모습은 그를 낯설고 여기저기 彷徨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한스 브罍츠너 (Hans Brøchner)가 1836年 피터 키르케고르의 結婚式에서 쇠렌 키르케고르를 보고 난 後의 쓴 回顧 [24] 茶집에 있는 쇠렌 키르케고르, 1843年 크리스티안 올라비우스 가 그렸다.

키르케고르는 哲學者 利子 神學者 로 불려 왔다. [25] 그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들에는, 實存主義 의 아버지, 文學 評論家, [19] 유머가 넘치는 사람, [26] 心理學者 , [27] 그리고 詩人이 있다. [28]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두 가지 思想은 “個體性”과 “信仰의 跳躍”이라고 言及되는 槪念이다. [29]

“信仰을 向한 跳躍(飛躍)”은 널리 言及되는 用語로서, “信仰의 跳躍”이란 말로 表現되기도 한다. [30] “信仰의 跳躍”은 한 個人이 어떻게 神을 믿는가 또는 한 個人이 어떻게 사랑으로 行動하는가에 對한 그의 槪念이다. 그것은 理性的인 決定이 아니고, 좀 더 危險하고 超自然的인 것으로 理性을 超越하는 것이다. 그것이 信仰이다. 이러한 그의 思想에서 信仰을 갖는 것은 同時에 疑心을 갖는 것이다. 例를 들면, 眞實로 神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同時에 疑心을 품고 있다. 疑心은 證據를 따지는 人間 思考의 理性的인 部分으로, 疑心이 없는 信仰은 아무런 意味가 없다. 基督敎 敎理가 本質的으로 의심스러운 것이며 그 眞理에 客觀的 確實性이 없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信仰을 가진 것이 아니라 但只 무언가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일 뿐이다. 例를 들어, 누군가가 直接 보고 만진 後에 鉛筆이나 冊床이 있다고 믿는 것은 信仰이라고 부를 수 없다. 信仰, 卽 神을 믿고 믿음을 가지는 일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으며 神에게 接近할 수 없어도, 如前히 神을 믿는 것이다. [31]

키르케고르는 또한 自己批判과 內的 省察에서, 基盤이 되는 存在로서의 自我의 重要性과 自我가 世界와 맺는 關係를 强調했다. 그는 《 哲學的 短篇에 부치는 非學問的인 解說文 》에서 “個體性이 眞理다.”와 “眞理는 個體性이다.”라고 主張했다. 이러한 主張은 客觀的인 眞理라는 것과, 個人的인 個體性과 眞理와의 關係(無關心하거나 參與하는 것)의 區別과 聯關된다. “어떤 感覺” 안에 있는 사람들은 同一한 것들이 매우 다르게 여러 形態의 믿음과 關係한다고 믿는다. 두 個人이 아마도 그들 周圍에 많은 사람이 도움을 必要로 하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點을 함께 믿는다고 하더라도, 이 知識은 둘 中 오직 한 사람만이 實際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決定을 내리게 引導할 것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基本的으로 個體性이 宗敎的인 問題로 看做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미 적었듯이, 그는 疑心이 信仰의 要素이고, 그 疑心이 神의 存在나 救世主의 삶과 같은 宗敎的인 敎理들에 對해 그 어떠한 客觀的인 確實性도 獲得하지 못하게 한다고 보았다. 大部分의 境遇에 基督敎人은 基督敎 敎理가 眞理라는 것이 論理的으로 合當하다는 結論을 希望한다. 그런데 萬若 한 사람이 그러한 敎理를 眞理인 것 같아 보인다는 程度로 믿는다면, 그/그女는 眞情으로 全혀 宗敎的이지 않은 사람이다. 信仰은 이러한 敎理에 對한 絶對的인 參與의 個人的 關係에 있다. [32]

間接的인 意思傳達 方式과 匿名의 咀嚼 [ 編輯 ]

키르케고르의 冊 中 하나인 《 이것이냐, 저것이냐 》는 匿名人 “A”와 “B,” 그리고 判事 윌리엄(Judge William)李 著者 이름으로 登場하고, 筆名인 빅토르 에레미打(Victor Eremita)가 編輯하였다고 나온다.

키르케고르가 쓴 冊의 折半 程度가, 그가 서로 다른 思考方式을 나타내기 위해 創造한 여러 匿名 人物의 이름으로 記錄되었다. 이것은 키르케고르의 間接的 意思傳達 方式을 보여 준다.

“著者로서 나의 著書에 對한 觀點”과 같이, 그의 冊과 日記 中 여러 部分에서, 키르케고르는 그의 著書가 體系的인 構造를 갖춘 哲學的 體系로 取扱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런 式으로 글을 썼다.

匿名의 著書들에서, 내 것은 單 하나의 單語도 없다. 나는 마치 第三者의 立場인 것처럼 그 著書들에서 個人的인 意見을 表明하지 않았고, 그들의 意味에 對한 아무런 知識이 없었고, 讀者로서 읽었을 뿐, 匿名 著者들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私的 關係조차 맺지 않았다.
 
— 쇠렌 키르케고르, 《觀點》 [33]

키르케고르가 間接的인 意思傳達 方式을 使用한 理由는, 自身이 쓴 글이 어떤 觀點을 드러내고 있는지 間에, 그것을 讀者가 把握하기 어렵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讀者가 그의 삶에 어떤 部分이 글에 反映되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글의 表面的인 意味만 簡單히 읽어내기를 願했다. 키르케고르는 또한 그의 讀者가 그의 思想을 權威的인 體系로 여기지 않기를 願했고, 그런 式으로 信奉하기보다는 차라리 讀者 自身의 解釋으로 自身의 글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아도르노 같은 初期 키르케고르 硏究者들은, 筆名으로 글을 쓴 것이 키르케고르의 意圖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全體 著作이 키르케고르의 個人的이고 宗敎的인 見解를 反映하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主張했다. [34] 이런 見解 탓에 讀者들은 많은 混亂을 겪었고, 키르케고르가 論理的인 一貫性이 不足한 面이 있어서 그의 著作에 相互 矛盾되는 內容이 드러난다고 여기게 되었다. [35] 그러나 後期 構造主義 者들을 비롯한 많은 後期 硏究者는 키르케고르의 意圖가 있었음을 認定하고, 匿名의 著書들이 各 著者마다 그들 나름의 觀點에서 記錄한 것으로 解釋하고 있다.

키르케고르가 만들어낸 主要 筆名을 年代記的 順序로 配列하면 다음과 같다.

  • 빅토르 에레미打(Victor Eremita), 《 이것이냐, 저것이냐 》의 編輯者.
  • A, 《 이것이냐, 저것이냐 》 안에 있는 여러 글을 쓴 著者.
  • 判事 윌리엄(Judge William), 《 이것이냐, 저것이냐 》에서 A에 反對하는 著者.
  • 요한네스 데 실렌티오(Johannes de Silentio), 《 두려움과 떨림 》(Fear and Trembling)의 著者.
  • 콘스탄틴 콘스탄티우스(Constantin Constantius), 《 反復 》의 첫 番째 折半 部分 著者.
  • 젊은이(Young Man), 《 反復 》의 두 番째 折半 部分 著者.
  • 非길리우스 하우프니엔시스(Vigilius Haufniensis), 《不安의 槪念》 著者.
  • 니콜라우스 老打벤(Nicolaus Notabene), 《序文들》 著者.
  • 힐라리우스 北빈더(Hilarius Bookbinder), 《 人生길의 여러 段階 》 編輯者.
  • 요한네스 클리마쿠스(Johannes Climacus), 《 哲學的 短篇 》과 《 哲學的 短篇에 부치는 非學問的인 解說文 》 著者.
  • 인터 엣 인터(Inter et Inter),《危機와 女俳優의 삶에서의 危機》(The Crisis and a Crisis in the Life of an Actress)
  • H.H., 《두 가지 倫理的-宗敎的 에세이》 著者.
  • 안티-클리마쿠스(Anti-Climacus), 《 죽음에 이르는 病 》과 《基督敎의 實踐》 著者.

日記 [ 編輯 ]

"日記"의 첫 番째 英文版 表紙, 알렉산더 드루가 編輯했다. 1938

키르케고르의 日記는 그와 그의 글을 理解하는 데 必須이다. [36] 그는 7000쪽이 넘은 日記를 썼다. 그의 글을 理解하는 열쇠가 되는, 重要한 事件이나 冥想, 생각 들이 그 日記帳에 빼곡히 담겨 있는 것이다. [37] 덴마크語로 記錄된 日記의 全體 母音은 13卷으로 編輯되어 出刊되었다. 그 冊은 索引을 包含하는 25個의 分離된 項目으로 構成되었다. 첫 番째 英文版 編輯은 알렉산더 드루가 했고, 1938年에 出刊되었다. [7]

그의 日記는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의 키르케고르를 드러내며, 그의 생각을 明確하게 把握하는 것을 돕는다. 그의 日記가 지닌 形式은 그의 글 中에서 가장 詩的이고 優雅하다. 키르케고르는 그의 日記를 眞摯하게 記錄했으며, 自身의 日記를 “가장 믿을 수 있는 信實한 親舊”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나는 決코 그 누구도 信賴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作家로서 어느 程度까지 나는 一般 사람들을 나의 親舊로 삼아 왔다. 하지만 現在 내가 一般 大衆과 맺고 있는 關係에 關해서 보면, 나는 다시 한 番 後孫들을 나의 信賴할 수 있는 親舊로 삼아야만 한다. 누군가에 對해서 웃고 있는 똑같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眞正한 親舊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 쇠렌 키르케고르 , 《日記》 [7] ( 1847年 11月 4日 )

그의 日記는 키르케고르의 專賣特許인 수많은 經句(警句)의 源泉이다. 다음에 나오는 句節은 아마도 키르케고르의 日記 中에서 가장 널리 引用되는 것으로, 實存主義者 硏究에서 恒常 重要하게 引用된다.

重要한 것은 나에게 眞理인 眞理를 찾는 것이며, 나의 生死를 左右할 수 있는 생각을 發見하는 것이다.
(The thing is to find a truth which is true for me, to find the idea for which I can live and die.”)
 
— 쇠렌 키르케고르 , 《日記》 [7] ( 1835年 8月 1日 )

그의 日記가 그의 삶과 師事의 여러 側面을 明確하게 해주는데도 不拘하고, 키르케고르는 많은 部分을 밝히지 않았다. 思想의 갑작스러운 變化, 反復되는 글쓰기, 그리고 特別한 句節의 轉換은, 讀者를 整頓되고 體系的인 讀書의 길에서 내팽개쳐 버리려고 그가 使用하는 많은 잔재주 中 一部이다. 結果的으로 그의 日記에 對해서는 여러 다양한 解釋이 可能하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未來에 그의 日記가 重要해지리라는 點을 疑心하지 않았다. 1849年 에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덴마크에서 오직 죽은 사람만이 狀況을 支配한다. 不道德함, 嫉妬, 뒷談話, 平凡함은 모든 最高의 空間에 存在한다. 只今 내가 죽는다면, 나의 삶이 남긴 結果는 非凡한 것이 될 것이다. 日記들에서 不注意하게 簡單히 몇 作 적어둔 많은 것이, 매우 큰 重要性을 갖게 될 것이고, 엄청난 結果를 불러올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나와 和解하게 될 것이고, 나를 認定할 수도 있고 내가 올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쇠렌 키르케고르 , 《日記》 [7] ( 1849年 12月 )

키르케고르와 基督敎界 [ 編輯 ]

키르케고르는 그의 末年에 이르러 덴마크루터敎會 組織을 攻擊했다. 그는 國家가 設立한 國家敎會가 個人들에게 해롭다고 여겼다.

위에서 言及한 대로, 키르케고르는 末年에 이르러 持續的으로 政治的인 實體로서의 덴마크敎系와 國家敎會를 批判했다. 19世紀에 大部分의 덴마크人은 덴마크의 市民이자 必須的으로 덴마크 國家敎會의 構成員이었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國家敎會 聯合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것이 基督敎의 眞正한 意味를 歪曲시킨다고 보았다. [22]

그의 批判에서 가장 重要한 要點은 다음과 같다. "敎會 모임은 無意味하다." 모임의 思想은 個人들을 어린아이로 維持시킨다. 왜냐하면 基督敎人들은 그들이 神과 맺는 關係에서 責任을 지고 主導權을 갖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基督敎는 個人이고, 여기에 있는 單獨者이다.
(Christianity is the individual, here, the single individual.)
 
— 키에르케고르, [38]
基督敎界(덴마크敎界)는 世俗化 되고 政治化되어 왔다.

敎會가 國家에 依해 操縱되어온 以來로, 키르케고르는 國家 敎會의 官僚的인 任務가 構成員의 數字를 늘리고, 構成員의 福祉를 監督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 밑바탕에는, 좀 더 많은 構成員이 모여들수록 聖職者는 더 큰 힘을 갖게 된다는 腐敗한 생각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 任務는 全體가 아니라 個人을 强調하는 基督敎의 眞正한 가르침에 비추어보면 異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基督敎(國家敎會)는 텅 빈 宗敎가 되었다. 따라서 政治的 構造로서의 國家敎會는, 個人에게 無禮하고 해를 끼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基督敎人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모른 채 “基督敎人”李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國家 敎會는 宗敎 그 自體를 損傷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지 않는 “믿는 사람들” 卽 사람들의 “돼지 떼 精神”에 따라서, 基督敎를 但只 社交界의 傳統 程度로 格下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萬若에 敎會가 國家로부터 자유롭다면, 모든 것이 좋다. 나는 卽刻的으로 이 狀況을 적합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萬若에 敎會가 政治的으로 解放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質問을 던져야만 한다. 무슨 意味에 依해서, 어떠한 方法으로? 宗敎的 運動은 宗敎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假짜다! 結果的으로 피를 흘리거나 그렇지 않거나 間에, 解放은 苦難을 통해서 와야만 한다. 그것을 購入하는 데 支拂해야 할 값은 精神的인 態度이다. 하지만 苦難 없이 敎會가 世俗的인 意味에서 敎會가 解放되기를 希望하는 사람들은, 全體 世界의 調和를 위한 忍耐라는 槪念을 導入하였다. 이 世界에서 忍耐는 無關心과 같고, 그것은 基督敎에 反對하는 가장 끔찍한 攻擊이다. … 國家的으로 設立된 敎會의 敎理와 그것의 組織은, 둘 다 正말 매우 좋다. 오, 그러나 우리 삶에서 그것들은 正말 가증스럽다.
 
— 쇠렌 키르케고르 , 《日記》 [7] (1851年 1月)

基督敎 敎會의 無能과 腐敗를 批判하는 모습에서, 키르케고르는 基督敎를 批判하는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哲學者의 登場을 豫見한 것처럼 보인다. [39]

나는 묻는다. 우리가 新約 聖書 에 따라서 우리 스스로를 基督敎人이라고 부르면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貫通하는 基準으로 삼아 行動하는 것을 持續할 때, 그것은 무슨 뜻인가? 新約聖書의 생각은 삶에 對해서 뒤떨어진 것인가? 게다가 이 事件들의 狀態가 드러내는 巨大한 不均衡을 많은 이들이 認識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에 이러한 轉換을 주는 것을 좋아한다. 人間 種族은 基督敎에서 벗어나고 있다.
 
— 쇠렌 키르케고르 , 《日記》 [7] ( 1852年 6月 19日 )

批判 [ 編輯 ]

20世紀에 이루어진 키르케고르에 對한 有名한 哲學的 批判에는, 테오도어 아도르노 엠마누엘 레비나스 의 것이 包含된다. 장 폴 사르트르 와 같은 無神論的 哲學者들과 마르틴 하이데거 와 같은 不可知論者 哲學者들은, 大部分 키르케고르의 哲學的 見解를 支持했지만, 그의 宗敎的인 見解는 拒否했다. [40] [41]

아도르노가 키르케고르의 哲學에 加한 批判은, 元來 키르케고르의 意圖보다는 덜 信實한 것이었다. 最小限 아도르노의 批評 中 하나인 그의 冊인 《키르케고르: 美學의 構造》는 “키르케고르에 對한 冊 中에서 가장 無責任한 것”으로 看做된다. 왜냐하면 아도르노는 키르케고르의 匿名 著書들을 文字的으로 理解했고, 그런 理解에 根據하여 키르케고르의 全體 哲學을 構成하는 바람에, 키르케고르의 哲學을 論理的인 一貫性이 不足하고 理解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式의 理解 方式은, 윌리엄 셰익스피어 와 그 가 쓴 作品의 主人公인 오셀로 를 混同하거나, 도스토옙스키 와 그가 쓴 小說 《 罪와 벌 》의 主人公인 라스콜리니코프를 같은 사람으로 여기는 錯覺과 같은 것이다. [42] 또 다른 批評家는 다음과 같이 言及했다. “아도르노는 오늘날 우리가 가진, 키르케고르의 모음집에 對한 信賴할 만한 解釋이나 飜譯과는 距離가 멀었다.” [35]

레비나스가 키르케고르에게 加한 批判의 主要한 內容은, 그의 倫理的이고 宗敎的인 段階들에 集中하였다. 特히 《恐怖와 戰慄》에 對해서 그러했다. 레비나스는 信仰의 跳躍을 批判했는데, 그가 보기에 이러한 倫理的인 매달리기와 信仰으로의 跳躍은 暴力 의 一種이라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暴力은, 實存이 믿음의 領域인 宗敎的인 段階로 跳躍하기 위해서 倫理的인 段階를 抛棄할 때 始作된다. 그러나 믿음은 더 以上 外部的인 正當化를 追求하지 않는다. 內部的으로 조차, 그것은 意思疏通과 孤立이 結合되었고, 따라서 거기에서 暴力과 苦難이 由來하였다. 그것은 倫理的인 現象을 格下시켜 二次的인 地位를 주는 것의 由來가 되었고, 存在의 倫理的인 基礎를 蔑視하는 것이어서, 그것은 니체 를 불러들이고, 니체 를 거치면서 道德觀念이 없는 現代哲學으로 完成되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 實存과 倫理(Existence and Ethics), (1963) [43]

레비나스 는 基督敎人의 信仰이 아브라함 에게 이삭 을 바치라고 처음 言及한 神과, 天使를 보내 아브라함 이삭 을 죽이지 못하게 한 그 神을 믿는 것이라고 指摘한다. 萬若에 아브라함이 正말 宗敎的인 段階에 있었다면, 그는 아들을 죽이려는 自身을 멈추게 한 天使의 音聲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고, 繼續하여 이삭을 죽여 버렸을 것이다.“초월적인 倫理學”은 마치 殺人者들을 그들의 犯罪로부터 容恕해 주기 위해 생긴 구멍처럼 보이고, 따라서 그것은 收容되기 어렵다. [44]

키르케고르의 宗敎的 觀點에 對해, 사르트르는 神의 存在에 反對하는 論爭을 提起한다. 萬若에 實存이 本質에 앞선다면, 그것은 感覺이 있는 存在가 完全할 수 없다는, 感覺에 關한 用語의 意味로부터 뒤따르는 것이다. 《存在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神이 “Pour soi” 卽 혼자 힘으로 存在하는 하나의 意識(感覺)이며 또한 “en-soi” 卽 本質的으로 하나의 存在로서 하나의 事物이라는 것은, 말에서 矛盾된다고 言及했다.

사르트르는 아브라함이 不安 [45] 을 견뎌야 했다는, 키르케고르의 分析에 同意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神이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도록 말했다는 데에는 同意하지 않았다. 그의 講義록認 《實存主義는 人本主義이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自身을 辨明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함을 통해서, 그의 良心이 眞情으로 병들게 해야만 한다. 그 말이 否認하는, 普遍的인 價値를 包含하는 거짓말을 實踐하면서 말이다. 그런 지나친 變裝을 통해, 그의 苦惱는 그 自體를 드러낸다. 이것은 키르케고르가 “아브라함의 苦惱”라고 불렀던 苦惱이다. 當身은 그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한 天使가 아브라함 에게 그의 아들을 犧牲 祭物로 바치라고 命令했다. 그리고 그 命令에 그는 順從했다. 萬若에 正말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天使라면,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아브라함 當身은 當身의 아들을 犧牲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境遇가 닥친 사람이면 누구나, 첫째, “말하는 사람이 正말 天使인가?”라는 疑問을 가질 것이고, 둘째, “내가 正말 아브라함인가?”라는 疑問도 지닐 것이다. 그런 疑問을 解消할 證據가 어디 있는가? 妄想으로 苦痛 받는 어떤 미친 女性은, 사람들이 自身에게 電話를 걸어온다고 말하면서, 그女의 要求 事項을 말한다. 그러면 醫師는 그女에게 묻는다. “그러나 當身에게 말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女는 對答한다. “그는 그것이 神이라고 해요.” 그러면 正말 그女가 말하는 그것이 神인지를 무엇으로 證明할 것인가? 萬若 한 天使가 나에게 나타난다면, 그것이 天使임을 證明하는 것은 무엇이며, 萬若에 내가 소리를 듣는다면, 그 소리가 天國에서 들리는 것으로 地獄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證明할 것이며, 또는 그 소리가 나의 潛在意識이나 病的인 狀態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고 누가 證明하겠는가? 누가 그것들이 나에 對한 것이라고 證明할 수 있겠는가?
 
장폴 사르트르 , 實存主義는 人本主義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40]

키르케고르의 視角에서, 아브라함의 確信은 ‘內面의 목소리’로부터 由來한 것으로, 그 목소리는 實際로 다른 이들이 그 存在를 證明하거나 들을 수 없는 것이다.(“문제는 아브라함이 理解받기를 願하자마자 다가온다.”) 키르케고르에게, 모든 外部의 “證據”나 定義는 但只 主體의 바깥에 있는 것일 따름이었다. [46] 例를 들어, 靈魂의 不滅에 對한 키르케고르의 證據는, 人間이 지닌 永遠히 살고 싶어 하는 마음에 根據한다.

影響과 評判 [ 編輯 ]

코펜하겐에 있는 쇠렌 키르케고르 銅像

初期 [ 編輯 ]

키르케고르의 著書들은 그의 死後 數十 年이 지날 때까지도 널리 有用하게 쓰이지 못했다. 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當時 덴마크 內에 主要한 組織 中 하나였던 덴마크 國敎會는, 될 수 있으면 키르케고르의 冊을 言及하지 않고 回避하려 했고, 다른 덴마크人들度 그렇게 하기를 勸했다. 게다가 獨逸語 프랑스語 , 英語 같은 主要한 言語圈에서 덴마크 言語가 널리 쓰이는 말이 아니어서, 덴마크語 使用者가 아닌 讀者들이 키르케고르를 가까이하여 알기란 거의 不可能한 일이었다.

첫 番째 學究的인 關心이, 獨逸語를 덴마크語만큼 잘했던, 그의 同僚인 덴마크人 게오르그 브란데스 (Georg Brandes)의 活躍 德分에 키르케고르에게 주어졌다. 브란데스는 키르케고르에 關한 첫 公式的인 講義를 했고, 유럽의 다른 地域에서 키르케고르에 對한 關心이 생기게끔 도왔다. [47] 1877年 브란데스는 또한 키르케고르의 哲學과 삶에 對한 첫 番째 冊을 出刊하였다. 戱曲作家 헨리크 입센 도 키르케고르에 興味를 갖고, 그의 著書들을 나머지 스칸디나비아 半島 地域에 紹介하였다. 1870年代 에 키르케고르 著書 中 一部가 獨立的으로 獨逸語로 飜譯되기 始作하였고, [48] 키르케고르 著書 全體에 對한 學問的인 獨逸語 飜譯은 1910年代 에 이르러서야 實現되었다. 이 飜譯들은 키르케고르가 20世紀에 獨逸, 프랑스, 英國의 知識人과 作家 等에게 莫大한 影響力을 發揮하는 데 重要한 役割을 遂行했다.

1930年代 에, 첫 番째 學問的인 英譯本이 나왔다. [49] 飜譯한 사람들은 알렉산더 드루, 데이비드 F. 스웬선, 더글러스 V. 스티어, 그리고 월터 라우리였고, 옥스퍼드 大學 出版部에서 일하는 찰스 윌리엄이 編輯者로 수고했다. [50] 二次的이고 最近에 廣範圍하게 引用되는 學問的인 英語 飜譯本은 프린스턴 大學 出版部에서 1970年代, 1980年代, 1990年代에 出刊하였다. 하워드 V. 洪과 에드나 H. 홍이 監修하였다. 세 番째 公式的 飜譯은 쇠렌 키르케고르 硏究 센터의 指導로, 55卷 分量으로 擴大되어 出刊될 豫定이며, 2009年 以後에 完成되리라 여겨진다. [51]

有神論者 이건 無神論者 이건 많은 20世紀 哲學者와 神學者는, 키르케고르로부터 여러 槪念을 끌어오곤 한다. 憤怒·絶望의 槪念이라든가, 個人의 重要性에 對한 論議를 例로 들 수 있다. 哲學者로서 키르케고르가 지닌 名聲은, 1930年代에 대단했다. 왜냐하면 當時 타오르기 始作한 實存主義 運動이 그를 先驅者로서 注目했기 때문이었다. 勿論 只今도 그는 如前히 매우 重要하고 影響力 있는 思想家이다. [52] 키르케고르는 루터교 敎會의 成人 달曆에서 敎師로서 11月 11日 에 記念되고 있다.

影響을 받은 思想家들 [ 編輯 ]

키르케고르에게 影響을 받은 哲學者와 神學者들은 다음과 같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 (Hans Urs von Balthasar), 칼 바르트 , 자끄 엘뢸, 시몬 드 보부아르 , 닐스 보어 , 디트리히 본회퍼 , 에밀 브루너 , 마르틴 부버 , 루돌프 불트만 , 알베르 카뮈 , 마르틴 하이데거 ,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 , 카를 야스퍼스 , 가브리엘 마르셀 (Gabriel Marcel), 메를로 퐁티 (Maurice Merleau-Ponty), 라인홀트 니부어 , 프란츠 로젠츠바이크 (Franz Rosenzweig), 장 폴 사르트르 , 조셉 솔로베이치크 (Joseph Soloveitchik), 파울 틸리히 , 미겔 데 우나무노 (Miguel de Unamuno) 等이 있다. 파울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의 科學的인 無政府主義는 키르케고르가 言及한 眞理로서의 主體性에 靈感을 받았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도 키르케고르에게 莫大한 影響을 받았다. 그는 “키르케고르는 나에게 멀고도 깊었다. 그가 지닌 靈魂의 깊이가 좋은 結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어도, 그는 나를 唐慌하게 했다.”라고 主張했다. [53] 칼 포퍼 는 키르케고르를 “基督敎 倫理의 偉大한 改革者, 當時 官僚的인 基督敎의 道德性이 事實은 半(反)基督敎的이고 非人間的인 僞善이라고 暴露한 사람”이라고 言及했다. [54]

現代 哲學者 中 엠마누엘 레비나스 ,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 자크 데리다 , 위르겐 하버마스 , 알라스데어 매킨타이어 (Alasdair Macintyre), 그리고 리처드 로티 같은 사람들은, 때때로 매우 批判的이지만, 그들 또한 키르케고르의 洞察 中 一部를 受容하고 있다. [55] [56] [57] 제리 표도르는 키르케고르가 “大家이며, 다른 哲學者들이 뛰노는 舞臺에서 빠져나온 사람”이라고 적었다. [58]

文學에서의 影響 [ 編輯 ]

키르케고르는 또한 20世紀 文學에 影響을 준 것으로 評價된다. 키르케고르에게 影響을 받은 모습을 보이는 作家로는 W. H. 오든(W. H. Auden),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헤르만 헤세 , 프란츠 카프카 [59] 데이비드 로지(David Lodge),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 月커 퍼시(Walker Percy),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존 업다이크(John Updike) 等이 있다. [60]

基督敎 心理學 [ 編輯 ]

키르케고르는 또한 心理學 에 두드러진 影響을 끼쳤고, 基督敎 心理學의 設立者로 불리기도 한다. [61] 實存主義的 心理學科 實存主義的인 治療 療法에도 影響을 주었다. [27] 實存主義者(때때로 “人本主義的”이라 불리는) 心理學者와 治療者에는 루트비히 빈스방거 (Ludwig Binswanger)를 비롯하여 빅토르 프랭클 (Viktor Frankl), 에리히 프롬 , 칼 로저스 (Carl Rogers) 및 롤로 메이(Rollo May)가 包含된다. 메이가 主張한 “不安의 意味”는 키르케고르의 不安의 槪念에 그 根據를 두고 있다. 키르케고르의 社會學的 作業은 〈두 時代: 革命 時代와 現在 時代〉라는 글을 통해, 우리에게 近代性에 對한 興味로운 批判을 提供해 준다. [19] 키르케고르는 포스트모더니즘 의 先驅者로 여겨지기도 한다. [55]

키르케고르는 그가 죽은 後에 얻을 名聲을 豫見했고, 그의 冊들이 主體에 對한 熾烈한 探究로 여겨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日記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時代가 必要한 것은 天才가 아니다. ? 그들은 恒常 넘쳐났다. 時代가 眞正으로 必要로 하는 것은 殉敎者, 卽 사람들로 하여금 服從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그 自身이 먼저 죽기까지 服從할 수 있는 사람이다. 時代가 必要로 하는 것은 覺醒이다. 그러므로 未久에 나의 글뿐만 아니라 나의 全 生涯까지도, 機械의 興味를 자아내는 모든 神祕로서 硏究되고 또 硏究될 것이다. 나는 神이 나를 어떻게 道우셨는지 決코 잊지 않으며, 그러므로 나의 마지막 바람은 모든 榮光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다.
 
— 쇠렌 키르케고르 , 《日記》 [7] ( 1847年 11月 20日 )

主要 著書 [ 編輯 ]

《誘惑者의 日記》, 임규정·演戱원 옮김 (한길사, 2001) - 部分 飜譯 ISBN   89-356-5353-5
《恐怖와 戰慄 / 哲學的 短篇 / 죽음에 이르는 病 / 反復》 손재준 옮김 (삼성출판사, 1982)
《두려움과 떨림》 강학철 옮김 (민음사, 1991)
  • 1843年, 《 反復 》( Gjentagelsen )
《恐怖와 戰慄 / 反復》 임춘갑 옮김 (茶山글房, 2007) ISBN   978-89-85061-31-5
심재언 옮김 (淸算文化史, 1962)
최석천 옮김 (喪門角, 1984)
임춘갑 옮김 (茶山글房, 2007) ISBN   978-89-85061-43-8
《不安의 槪念 / 죽음에 이르는 病》 강성위 옮김 (東西文化銅板株式會社, 2007) ISBN   978-89-497-0417-3
《사랑의 役事》 임춘갑 옮김 (茶山글房, 2005) ISBN   978-89-85061-90-2
  • 1848年, 《危機와 한 여우의 生涯의 危機》( Krisen og en Krise i en Skuespillerindes Liv )
  • 1849年, 《 죽음에 이르는 病 》( Sygdommen til Døden )
박환덕 옮김 (범우사, 1995) ISBN   978-89-08-01007-9
김용일 옮김 (계명대학교 出版部, 2006) ISBN   978-89-7585-372-2
임규정 옮김 (한길사, 2007) ISBN   978-89-356-5708-7
《죽음에 이르는 病 / 觀點》 임춘갑 옮김 (茶山글房, 2007) ISBN   978-89-85061-47-6
  • 1850年, 《基督敎의 訓鍊》( Indøvelse i Christendom )
임춘갑 옮김 (茶山글房, 2005) ISBN   978-89-85061-94-0
《瞬間 / 현대의 批判》 임춘갑 옮김 (茶山글房, 2007) ISBN   978-89-85061-50-6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쇠렌 키르케고르, 《日記와 메모》( Journals and Papers ), 인디애나 大學校 出版部, ISBN   0-253-18239-5 .
  2. 윌리엄 後벤(William Hubben). 《도스토옙스키, 키에르케고르, 니체, 카프카: 우리 運命의 네 豫言者》, New York: Collier Books, 1962.
  3. 립피트, 존과 다니엘 后土(Lippitt, John & Hutto, Daniel), “非論理의 論理(Making Sense of Nonsense): 키르케고르와 비트겐슈타인(Kierkegaard and Wittgenstein)”, 하트퍼드셔 大學(University of Hertfordshire) [1] , 修正一時: 11月 4日, 2007.
  4. 찰스 크리겐(Creegan, Charles), “비트겐슈타인과 키르케고르”(Wittgenstein and Kierkegaard) [2] Archived 2010年 8月 22日 - 웨이백 머신 , 러틀리지, 2006年 4月 23日 修正됨.
  5. 知識을 만드는 知識 , 結婚에 關한 若干의 省察: 反論에 對한 應答, 有婦男 씀 Adskilligt om Ægteskabet mod Indsigelser. Af en Ægtemand [ 깨진 링크 ]
  6. 日記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미카엘은 大略 木曜日 이른 아침인 午前 2時頃에 死亡하였다.
  7. 알렉산더 드루(Dru, Alexander). 《키르케고르의 日記》( The Journals of Søren Kierkegaard ), 옥스퍼드 大學 出版部, 1938.
  8. 쇠렌 키르케고르, 《아이러니의 槪念 - 소크라테스를 念頭에 두고》( The Concept of Irony with Continual Reference to Socrates ), 프린스턴 大學校 出版部, 1989, ISBN   0-691-07354-6 .
  9. Dansk rigsdaler. 크로네 以前의 덴마크 通話이다.
  10. 獨逸 哲學者 ‘ 프리드리히 슐레겔 ’과 다르다.)
  11. 존 립피트 (Lippitt, John) (2003). 《《키르케고르와 그의 恐怖와 戰慄에 對한 러틀리지 哲學 案內書》(Routledge Philosophy Guidebook to Kierkegaard and Fear and Trembling)》. 러틀리지. ISBN   978-0-415-18047-4 .  
  12. “쇠렌 키르케고르 肉筆原稿 古文書” . 덴마크 王立圖書館(Royal Library of Denmark) . 2006年 4月 23日에 確認함 .  
  13. 헤겔 (Hegel, G.W.F) (1979). 《《精神現象學》(Phenomenology of Spirit)》. 옥스퍼드 大學 出版部. ISBN   0-19-824597-1 .  
  14. 정재현 (2003年). 《《神學은 人間學이다》》. 분도출판사. 294쪽쪽. ISBN   978-89-419-0304-8 . 있는 대로 알고, 아는 대로 있을 때, 그것이 참된 것이라는 말이다. 헤겔의 眞理는 普遍的인 本質이었다. 헤겔은 人間이 元來 永遠과 無限 속에서만 完成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헤겔에게 制限된 空間과 有限한 時間 속에서 살아가는 個人은, 全體的인 合理性을 爲해 奉仕하는 別 意味 없는 事例에 不過했다. 이에 맞서 키르케고르는 各 個人의 삶 卽 個體性을 强調했다.  
  15. 정재현 (1999年). 《《티끌만도 못한 主題에》》. 분도출판사. 53쪽쪽. ISBN   978-89-419-9914-0 .  
  16. 英語圈에서, 그 論說들은 다음 冊에 蒐集되었다.
    《《18가지 發展된 談論》(Eighteen Upbuilding Discourses)》. 프린스턴 大學 出版部. ISBN   0-691-02087-6 .  
  17. “談論에 對한 D. 앤서니 스톰의 主席” . 《앤서니 스톰(D. Anthony Storm)》. 2007年 10月 1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11月 9日에 確認함 .  
  18. 《두 世代》로 飜譯되기도 한다.
  19. 쇠렌 키르케고르(Kierkegaard, Søren), 《文學的 感想文( A Literary Review ), 펭귄 클래식, 2001, ISBN   0-14-044801-2 .
  20. Lowrie, Walter. “키르케고르의 基督敎界 批判(Kierkegaard's Attack on Christendom)” . 《하우스 處置(House Church)》 . 4月 23日에 確認함 .  
  21. 《손으로 읽는 新約聖書》/김학철 지음/크리스천헤럴드
  22. 엘머 던캔(Duncan, Elmer), "쇠렌 키르케고르: 近代 神學的 思考의 創造者"( Søren Kierkegaard: Maker of the Modern Theological Mind ), 워드 북스, 1976, ISBN   0-87680-463-6 .
  23. 그 當時 덴마크에서는 宗敎改革 傳統에 따라 改新敎 嚴密하게 말하면 루터敎會 가 國交이었기 때문에, 덴마크 國民은 모두 덴마크 國敎會의 信者였다. 따라서 덴마크 敎會의 牧師는 身分이 公務員이라고 할 수 있다.
  24. 요아킴 街르프(Garff, Joakim), 《쇠렌 키르케고르:電氣》( Søren Kierkegaard: A Biography ), 브루스 킴스 飜譯 (Bruce Kirmmse), 프린스턴 大學 出版部, 2005, ISBN   0-691-09165-X , p.113. 다음의 冊도 有用하다. 《키르케고르와의 만남: 그의 同時代人들에게 비쳐진 生涯》( Encounters With Kierkegaard: A Life As Seen by His Contemporaries ), p.225.
  25. 데이비드 캉가스(Kangas, David), 〈키르케고르, 逆說的 神學者〉(Kierkegaard, the Apophatic Theologian), Enrahonar No. 29, 哲學 分科, 바르셀로나 아우토盧마 大學(Universitat Autonoma de Barcelona), 2006年 4月 23日.
  26. 토마스 C. 오덴, 《키르케고르의 유머: 名言集》( The Humor of Kierkegaard: An Anthology ), 프린스턴 大學 出版部, 2004, ISBN   0-691-02085-X .
  27. 오스텐펠트와 알라스타이어 맥키논(Ostenfeld, Ib and Alastair McKinnon), 《쇠렌 키르케고르의 心理學》( Søren Kierkegaard's Psychology ), 윌프리드 라우러 大學 出版部, 1972, ISBN   0-88920-068-8 .
  28. 루이스 맥케이(MacKey, Louis), 《키르케고르: 한 사람의 詩人》( Kierkegaard: A Kind of Poet ), 펜실베니아 大學 出版部, 1971, ISBN   0-8122-1042-5 .
  29. 키르케고르는 極端的인 個人主義者가 아니었다. 그는 眞理로서의 客觀性이 지닌 重要性을 拒否하지 않았다.
  30. 이러한 用語는 最近 키르케고르 著書의 英語 飜譯本에서는 찾을 수 있으나, 덴마크語 原本에서 “信仰의 跳躍”과 같은 表現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信仰”과 “跳躍”의 槪念을 그의 著書에서 여러 番 함께 言及하고 있다. 〈信仰과 키르케고르의 跳躍〉(Faith and the Kierkegaardian Leap)을 參照하라. 《키르케고르에 對한 캠브리지 指針書》( Cambridge Companion to Kierkegaard )
  31. 키르케고르는 基督敎人의 삶에, 疑心의 重要性에 集中하는 것을 導入하려고 反復的으로 試圖했다. 그의 日記에 나오는 한 文壇에서 그는 罪의 容恕라는 槪念을 다음과 같이 描寫하고 있다. “누군가의 罪가 容恕된다고 믿는 것은, 人間 存在를 靈的으로 變化하게 만드는 重大한 危機이다. 罪의 容恕를 믿지 않는 그는 靈的인 存在가 아니다. … 眞理 안에 있는 사람은, 罪의 容恕를 믿는 것이 사람을 正말 다른 사람으로 變化하게 한다는 것을, 이미 經驗했고, 只今도 經驗하고 있다.”《쇠렌 키르케고르의 日記와 메모》( Søren Kierkegaard's Journals and Papers ), 하워드 V. 洪 編輯, VIII A 673 n.d., 1848, 인디아나 大學 出版部, 1976, ISBN   0-253-18240-9 .
  32. 쇠렌 키르케고르, 《哲學的 短篇에 非科學的인 解說을 덧붙여 끝내기》(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to Philosophical Fragments ), 프린스턴 大學 出版部, 1992, ISBN   0-691-02082-5 .
  33. 쇠렌 키르케고르, 《觀點》, 프린스턴 大學 出版部, 1998, ISBN   0-691-05855-5 .
  34. 아도르노, 《키르케고르: 美學의 構造》, 미네소타 大學 出版部, 1933(裁判 1989), ISBN   0-8166-1186-6 .
  35. 마르시아 모르간(Morgan, Marcia), “아도르노의 키르케고르 受容(Adorno’s Reception of Kierkegaard): 1929?1933” . 《포츠담 大學》. 2006年 6月 1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4月 23日에 確認함 .  
  36. “쇠렌 키르케고르의 日記 主席” . 《D. 앤서니 스톰》. 2006年 5月 2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4月 23日에 確認함 .  
  37. 日記에 重要性을 附與하는 것은, 드루의 1938年度版 《키르케고르의 日記》( Journals, XYZ )에서 參照했다. 그의 日記가 알려졌을 때, 各 日記에 正確한 날짜가 記錄되었다. 正確히 알 수 없으면, 달이나 年度만 記錄되기도 했다.
  38. 브루스 킴스(Kirmmse, Bruce), “하비브 말리크의 感想文, 쇠렌 키르케고르 理解(Review of Habib Malik, Receiving Søren Kierkegaard)” . 스톨라프(Stolaf). 2008年 5月 2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1月 19日에 確認함 .  
  39. 톰 앵지어(Angier, Tom), 《키르케고르냐 니체냐 : 새로운 方向의 道德 哲學》( Either Kierkegaard/or Nietzsche: Moral Philosophy in a New Key ), Ashgate Publishing 2006, ISBN   0-7546-5474-5 .
  40. 장 폴 사르트르(Sartre, Jean-Paul), “實存主義는 人本主義다” . 《World Publishing Company》 . April 14에 確認함 .  
  41. 허버트 드레퓌스(Dreyfus, Hubert), 《世界 內 存在: 하이데거의 存在와 時間에 關한 主席》( Being-in-the-World: A Commentary on Heidegger's Being and Time ), Division I. MIT 出版部, 1998. ISBN   0-262-54056-8 .
  42. 메롤드 웨스트팔(Westphal, Merold), 《키르케고르의 非科學的 追伸으로 結論내리기 읽기》( A Reading of Kierkegaard's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 푸르듀 大學 出版部, 1996, ISBN   1-55753-090-4 .
  43. 존 립피트(Lippitt, John), 《키르케고르와 恐怖와 戰慄》( Kierkegaard and Fear and Trembling ), 러틀리지, 2003, ISBN   0-415-18047-3 .
  44. 클레어 엘리스 카츠(Katz, Claire Elise), “神의 소리와 他者의 얼굴(The Voice of God and the Face of the Other)” . 《펜 州立 大學》. 2007年 11月 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April 23에 確認함 .  
  45. 사르트르는 그것을 ‘苦惱’라고 불렀다.
  46. “D. 앤서니 스톰의 追伸에 對한 主席” . 《D. 앤서니 스톰》. 2007年 5月 1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April 23에 確認함 .  
  47. “게오르그 브란데스” . 《Books and Writers》. 2006年 6月 1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April 24에 確認함 .  
  48. 닐스 J. 캅펠론(Cappelorn, Niels J.), 《記錄된 이미지》( Written Images ), 프린스턴 大學 出版部, 2003, ISBN   0-691-11555-9 .
  49. “그러나 키르케고르 選集에 對한 獨立的인 英語 飜譯은 리 홀렌더가 1923年에 이루었다. 오스틴의 텍사스 大學에서 出版되었다.”
  50. 알라스테이어 限나이와 고든 마리노(Hannay, Alastair and Gordon Marino) 篇, 《키르케고르에 關한 케임브리지 案內書》, 케임브리지 大學 出版部, 1997, ISBN   0-521-47719-0 .
  51. “쇠렌 키르케고르 (Søren Kierkegaard Forskningscenteret)” . 《코펜하겐 大學》. 2006年 7月 1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August 21에 確認함 .  
  52. 마이클 웨스턴(Weston, Michael), 《키르케고르와 現代 大陸哲學》( Kierkegaard and Modern Continental Philosophy ), 러틀리지, 1994, ISBN   0-415-10120-4 .
  53. 찰스 크리件(Creegan, Charles), “비트겐슈타인과 키르케고르” . 《러틀리지》. 2010年 8月 2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April 23에 確認함 .  
  54. 칼 포퍼 警(Popper, Sir Karl R.), 《열린 社會와 그 敵들 第2卷: 헤겔과 마르크스》(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Vol 2: Hegel and Marx ), 러틀리지, 2002, ISBN   0-415-29063-5 .
  55. 마틴 조셉 마투스틱(Matustik, Martin Joseph) 및 메롤드 웨스트팔(Merold Westphal) 編輯, 《포스트모더니티/모더니티에서의 키르케고르》( Kierkegaard in Post/Modernity ), 인디아나 大學 出版部, 1995, ISBN   0-253-20967-6 .
  56. 알라스데어 매킨타이어(Macintyre, Alasdair), 〈다시 한 番 키르케고르〉(Once More on Kierkegaard), 《매킨타이어 以後에 키르케고르》 中에서( Kierkegaard after Macintyre ). Open Court Publishing, 2001, ISBN   0-8126-9452-X .
  57. 리처드 로티(Rorty, Richard), 《偶然, 逆說, 그리고 連帶》( Contingency, Irony, and Solidarity ). 케임브리지 大學 出版部, 1989, ISBN   0-521-36781-6 .
  58. 제리 葡萄르(Fodor, Jerry), “어디 든 있는 월터의 물(Water's water everywhere)” . 《London Review of Books》. 2009年 4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April 23에 確認함 .  
  59. 카일 脈氣(McGee, Kyle), “罪囚 流刑地에서의 恐怖와 戰慄(Fear and Trembling in the Penal Colony)” . 《Kafka Project》 . April 24에 確認함 .  
  60. 존 업다이크가 쓴 쇠렌 키르케고르 冊 序文, 《誘惑者의 日記》( The Seducer's Diary ), 프린스턴 大學 出版部, 1997, ISBN   0-691-01737-9 .
  61. “基督敎 心理學會” . 《Christian Psychology》. 2006年 10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April 24에 確認함 .  

參考 文獻 [ 編輯 ]

  • 월터 라우리, 《키르케고르 評傳 - 키르케고르의 生涯와 思想》, 임춘갑 옮김, 茶山글房, 2007年 ISBN   978-89-85061-57-5
  • 하워드 A.존슨, 《키르케고르 思想의 열쇠》, 임춘갑 옮김, 茶山글房, 2005年 ISBN   978-89-85061-40-7
  • 윌리엄 後벤, 《도스토옙스키, 키에르케고르, 니체, 카프카》, 윤지관 옮김, 까치, 1983年
  • 半 리이센 外, 《니체/사르트르/프로이트/키르케고르》, 이창우, 종로서적, 1983年 ISBN   978-89-305-0124-8
  • 샤를 르 블랑, 《키에르케고르 (文藝臣庶 282)》, 이창실 옮김, 東文選, 2004年 ISBN   978-89-8038-510-2
  • 페테 로데, 《키에르케고르 코펜하겐의 孤獨한 靈魂》, 임규정 옮김, 한길사, 2003年 ISBN   978-89-356-5013-2
  • 김종두, 《키에르케고르의 實存思想과 現代人의 自我理解》, 엠애드, 2002年 ISBN   978-89-88277-16-4
  • 페리 D 르페브르, 《키에르케고르의 祈禱》, 基督敎聯合新聞社, 2004年 ISBN   978-89-86046-71-7
  • 정재현, 《티끌만도 못한 主題에》, 분도출판사, 1999年 ISBN   978-89-419-9914-0
  • 정재현, 《神學은 人間學이다》, 분도출판사, 2003年 ISBN   978-89-419-0304-8
  • 로날드 J. 萬하이머, 《키에르케고르의 敎育理論(敎育學 飜譯叢書 5)》, 이홍우 外 옮김, 교육과학사, 2003年 ISBN   978-89-8287-748-3
  • Woo, B. Hoon (우병훈) (2014). “Kierkegaard’s Influence on Karl Barth’s Early Theology” . 《Journal of Christian Philosophy》 18 : 197?245.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