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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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 ( 英語 : Thomas Aquinas , 이탈리아語 : Tommaso d'Aquino , 1224年 / 1225年 ? ~ 1274年 3月 7日 )는 西方敎會 의 著名한 神學者 利子 스콜라 哲學 이다. 또한 自然神學 의 으뜸가는 先驅者이며 西方敎會 에서 오랫동안 主要 哲學的 傳統으로 자리잡고 있는 토마스 學派 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敎會學者 33名 中 하나이며, 現在 로마가톨릭교회는 그를 神學者요 博士로 尊敬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이름을 딴 學校나 硏究所 等이 많이 있다.

生涯 [ 編輯 ]

Super Physicam Aristotelis , 1595

誕生 [ 編輯 ]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 나폴리 近郊 로카세카 性(Roccaseca)에서 아퀴노(Aquino) 地方 領主 中 하나인 란돌포의 9男妹 中 일곱 番째 아들(아들 넷 中에서는 막내)로 태어났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誕生 年月日을 明示한 記錄은 全無하다 [1] . 이에 따라 그가 死亡한 날짜, 卽 1274年 3月 7日 을 基準으로 그가 태어난 해를 推定할 뿐이다.

死亡 [ 編輯 ]

토마스 아퀴나스의 生涯에 對한 最初의 記錄者인 토코의 굴리엘모 (Guillaume de Tocco)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살이 되는 해’에 死亡했다고 傳하고 있다.

한便 또 다른 傳記作家인 베르나르 귀 (Bernard Gui)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살을 넘겨 50番째 해를 막 始作할 무렵’에 死亡했다고 記錄하고 있다. 또한 루카의 톨로메오 (Tolomeo de Lucca)의 境遇, ‘(토마스 아퀴나스는) 50살에 死亡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가 48歲에 死亡했다고 말한다’라고 傳하고 있다.

이런 서로 엇갈리는 記錄들을 통해 볼 때 토마스 아퀴나스가 誕生한 해는 最小限 그가 48살까지는 살았다는 假定下에 1224年 으로부터 1226年 사이로 推定할 수 있다. 그리고 現在 硏究者들이 一般的으로 多少 寫實性이 떨어진다고 評價하는 루카의 톨로메오의 記錄보다는 토코와 베르나르의 記錄에 더 무게를 둔 1224年 1225年 사이에 태어났다는 說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하지만 이를 確定지을 만한 새로운 資料가 發見되지 않는 以上, 1226年 더 나아가 1227年 出生說度 全的으로 排除할 수 없다.

少年期 [ 編輯 ]

그의 아버지는 1230/1231年頃 막내아들 토마스를 聖 베네딕토 修道會 所屬의 몬테 카시노 修道院으로 보냈다. 여기서 토마스는 修道士 授業을 받는다. 傳記作家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몬테 카시노 大修道院에 들어가게 된 까닭이 그가 未來의 修道院長으로 成長하길 바랐던 토마스의 父母들의 起源 때문이었다고 傳한다. 그러나 1239年 警 토마스는 當時의 政治的 混亂 때문에 修道士가 되는 授業을 中斷할 수밖에 없는 狀況에 處한다.

그래서 몬테 카시노 修道院을 나온 後 當時 프레데理쿠스 2世의 後援으로 成長一路에 있던 나폴리 大學校에 入學하게 된다. 나폴리 大學校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當時의 7個의 必須 學問인 文法 , 論理學 , 修辭學 , 代數學 , 幾何學 , 音樂 , 天文學 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歷史學者들은 이때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의 哲學과 도미니코回 修道士들을 接했다고 推定한다. 特히 도미니코回 修道士들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決定的으로 바꾸는 契機로 作用한다. 未來의 몬테 카시노 修道院長으로 成長해줄 것이라는 家族들의 期待를 저버린 채 1244年 토마스 아퀴나스가 當時 프란체스코회와 더불어 새롭게 登場한 도미니코會議 修道士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에 唐慌한 토마스의 家族은 도미니코 修道院의 周旋으로 파리 로 留學 가던 토마스를 途中에 拉致하여 로카세카 性에 監禁했다. 그리고 約 1年餘間 懷柔와 脅迫을 動員하여 도미니코會에서 脫退할 것을 强要했다. 그러나 어떤 努力으로도 그의 所信을 굽힐 수 없음을 알게 된 家族들은 結局 1245年 여름 토마스 아퀴나스를 나폴리의 도미니코回 所屬의 修道院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와 같이 貴族의 아들로서 몬테 카시노의 修道院長이 될 수 있는 華麗한 삶 代身 素朴한 삶을 사는 修道士가 되기를 選擇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逸話는 富裕한 商人의 아들로 누릴 수 있었던 모든 華麗한 삶을 抛棄하고 예수 그리스도 의 삶의 模倣하기로 決心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의 逸話를 聯想시킨다. 더 나아가 華麗한 未來가 保障된 길 代身 淸貧한 修道士의 길을 選擇한 少年 토마스 아퀴나스의 逸話를 통해 우리는 以後 在俗 聖職者들과의 論爭에서 托鉢 修道會의 正當性을 擁護하는 斷乎한 修道士와 대주敎職을 鄭重히 謝絶하게 되는 謙遜한 修道士의 모습을 同時에 엿볼 수 있다.

靑年期 [ 編輯 ]

토마스 아퀴나스가 家族들의 年金에서 풀려나 나폴리로 돌아온 1245年부터 1248年 까지의 行跡, 特히 그가 1245年 부터 1248年 前半期까지, 卽 그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를 따라 獨逸 쾰른 으로 떠날 때까지 約 3年 남짓한 期間의 行跡에 對해서는 意見이 紛紛하다. 特히 그가 파리 大學校의 學生으로서 正規 敎育 過程을 받았는지 與否에 對해 學者들은 論爭을 거듭하고 있다.

그렇지만 最小限 그 3年間 파리 大學校 或은 파리의 도미니코會에서 토마스가 7個의 必須 科目을 工夫했었을 것으로 推定할 수 있다. 하지만 當時 파리대학에서 講義하던 알베르투스의 神學 講義를 들었을 可能性은 거의 없다. 먼저 人文學部에서 受學한 以後에나 神學科에 進學하여 神學授業을 들을 수 있었던 中世 大學 體制 上 토마스에게는 알베르투스의 講義를 들을 資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年間의 파리 體制 以後 1248年 토마스는 쾰른에 있는 도미니코回 修道院에서 비로소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로부터 4年間 指導를 받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蓋然的이다. 이 時期에 토마스는 알베르투스의 影響 아래 아리스토텔레스의 哲學은 勿論 디오니시우스 의 神學에 對한 深度 있는 硏究를 遂行한다. 當時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다른 同僚들이 붙여준 別名은 그의 우람한 몸집과 寡默한 性格을 바라보던 同僚들의 장난氣가 섞인 ‘ 시칠리아 의 벙어리 황소’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別名과 關聯하여 弟子들이 모인 자리에서 알베르투스가 “只今 벙어리 황소라 불리는 저 修道士의 우렁찬 목소리를 온世上이 듣게 될 것”이라고 豫言했다는 逸話가 傳해지고 있다.

이 別名과 이와 얽힌 逸話와 傳說들이 事實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 傳說들은 異國 땅에서 語訥한 外國語 驅使能力으로 인해 或은 몇몇 傳說이 傳하듯이 말더듬이였기 때문에 自身의 立場을 表現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그래서 벙어리 황소라는 別名으로 同僚들에게 놀림을 받았던 이 小心하고 섬세한 感性을 가진 靑年 修道士 토마스의 숨겨진 一面을 드러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더 나아가 小心한 젊은 弟子의 沈默 뒤에 숨겨진 無限한 才能과 力量을 꿰뚫어보고 이것이 꽃피울 수 있는 環境을 마련해준 스승 알베르투스의 仔詳함과 慧眼이 그가 傳授한 學問的 知識과 더불어 未來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어떤 靈感으로 作用하게 되었는지를 미루어 斟酌하는 데 充分한 情報를 提供하고 있다.

命題집 江獨自 [ 編輯 ]

1251年 말에서 1252年 初葉 알베르투스는 도미니코回 總長으로부터 파리에서 講義를 할만한 神學者를 推薦해달라는 付託을 받는다. 이에 알베르투스는 "學問과 삶에서 빛나는 成就를 이룬" 토마스 아퀴나스를 파리 大學校의 敎授로 積極的으로 推薦한다. 벙어리 황소의 力量을 누구보다도 일찍 꿰뚫어 본 알베르투스는 當代 最高의 知性人이었다. 特히 當代 最高의 學者 알베르투스의 講義, 甚至於 그의 神學講義까지도 一部 分擔할 만큼 信賴를 얻고 있다는 事實 하나만으로도 弟子 토마스 아퀴나스의 才能과 力量에 對해 疑心할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斟酌할 수 있다. 그러나 도미니코會議 總長은 토마스가 當時 基督敎 世界의 文化/學問의 中心地로 成長하고 있던 파리大學에 도미니코會議 代表者로서 推薦받았다는 事實에 對해 무엇보다도 그의 어린 나이, 卽 스물 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難色을 표했다. 무엇보다도 總長은 파리大學의 敎授로 學問은 勿論 政治的으로도 수많은 問題들과 씨름을 벌일만한 老鍊한 學者를 願했다. 그의 腹案은 宗團의 精神을 代表하는 자리에 當代 도미니코會에서 가장 影響力이 强했던 人物이자 中世社會 最高의 知性人인 알베르투스를 파리대학으로 불러오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베르투스는 파리대학 敎授로 "벙어리 황소"로 불릴 만큼 조용하고 消極的이며 이제 少年의 티를 갓 벗어난 토마스 아퀴나스를 推薦했다. 總長 立場에서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에 對한 總長의 當惑感과 躊躇함에도 不拘하고 알베르투스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파리로 가야 한다는 立場에서 單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總長의 망설임이 길어지자 알베르투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미니코會議 先輩 修道士이자 當時 樞機卿 이었던 生 셰르의 위그 (Hugues de Saint Cher)까지 說得하여 總長에게 決定的인 壓力을 加한다. 結局 위그의 支援까지 등에 업은 알베르투스의 要求는 貫徹되었다. 이렇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命題집 江讀者로서 파리 大學校에서 神學 講義를 하게 되며 1252年부터 始作하여 1256年에 이르는 期間 동안 이 講義와 더불어 神學敎授로서의 資格을 얻기 위한 必須過程으로서 命題집 主席 執筆에 着手하게 된다.

파리대학敎授(1次 파리滯留機) [ 編輯 ]

1256年 命題집 註釋 作業이 完結될 즈음에 이르러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大學 神學敎授로 就任하게 된다. 하지만 그 過程이 決코 平坦한 것만은 아니었다. 토마스가 파리로 올 當時부터 파리의 雰圍氣는 決코 평화롭지 않았다. 在俗聖職者들과 敎授들이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會와 같은 托鉢修道會 出身 修道士들의 파리대학 敎授 就任에 對해 오랫동안 품어왔던 不滿과 이에 따른 對立이 極에 達하여 在俗敎授들과 修道會出身 敎授들 사이의 紛爭이 流血暴力事態로 이어질 만큼 最惡의 狀況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實際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就任講演은 修道會 出身 敎授를 反對하는 便의 사람들이 聽衆들의 立場을 妨害하는 가운데 萬若의 暴力事態를 막기 위해 프랑스 王의 軍隊가 講演場까지 配置되어 森嚴한 警護를 펼친 狀態로 進行되었다고 傳해진다. 비슷한 時期에 敎授가 된 同時代의 또다른 巨匠 보나벤투라 의 境遇도 神學敎授로 就任할 資格을 갖추고서도 2年에 가까운 時間 동안 이 激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릴없이 歲月을 보내야 했다. 애初에 도미니코回 總長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年輪과 조용한 性格에 對해 憂慮했던 것도 파리가 이런 雰圍氣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쾰른에서의 알베르투스와의 만남은 單純히 토마스의 成就를 單純히 學問의 領域에서만 머물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말대로 "삶"에서도 可能케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쾰른 體制期에 얻었던 스승 알베르투스의 信賴와 命題집 主席 및 强해 過程에서 再次 確認한 自身의 能力에 對한 自信感이 더해지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大學者로서 覺醒하게 된다. 英敏했지만 小心한 性格으로 쉽게 自身을 表現하지는 못하던 才能있는 靑年 토마스 아퀴나스가 自身의 小心함과 섬세함을 신중함과 精巧함으로 변모시켜 體化함으로써 그의 스승 알베르투스 및 親舊 보나벤투라와 더불어 當代 最高의 學者로 脚光받기 始作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덩치만 큰 수줍은 말더듬이 벙어리 황소가 敵들의 立場을 斷乎하게, 그리고 條目條目 徹頭徹尾하게 批判하며 同僚修道士들과 修道會를 危機로부터 救하기 위해 最前線으로 뛰어든 威風堂堂한 英雄으로 變貌한 것 亦是 이 때부터였다. 實際로 修道會를 批判하는 데 앞장섰던 在俗聖職者들 및 敎授들의 首長 기욤 드 生따무르 (Guillaume de Saint Amour)의 立場을 周到綿密하게 反駁함으로써 敎皇廳이 그의 主張을 撤回하라는 命令을 내리기까지 두 未來의 敎會學者, 卽 토마스 아퀴나스와 프란체스코회의 보나벤투라의 鬪爭은 決定的인 것이었다. 이런 意味에서 본다면 비록 소란스러운 가운데 進行되기는 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神學敎授로서의 첫 講演은 代價로서 成熟해가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첫 勝利를 記念하는 里程標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萬若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런 "삶"에서의 勝利를 거두지 못했더라면 '욥기 主席', 그리고 '眞理에 關한 正規討論집', 그리고 自由討論집 VII과 XI과 같은 이 時期에 著述되거나 막 써내려가기 始作한 作品들은 勿論, 오늘날 千私的 博士라 불리는 偉大한 스콜라學者는 存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滯留記 [ 編輯 ]

1259年末부터 1261年까지 토마스 아퀴나스의 行方은 杳然하다. 그가 1259年 말에서 1260年 秒 사이에 後任者에게 敎授職責을 물려준 以後 파리를 떠났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디로 갔는지를 분명하게 確認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때 그가 아냐니 에서 敎皇廳 江讀者로서 2年間 머물렀다는 意見이 注目받은 바 있지만 이는 어떤 飼料에서도 確認할 수 없는 內容이다. 이에 따라 오늘날에는 事實上 이 意見에 同意하는 學者는 찾기 어렵다. 오늘날 많은 學者들은 여러 가지 情況으로 보아 토마스 아퀴나스가 本來 自身이 屬한 敎區인 나폴리로 되돌아갔을 것으로 大槪 推定하고 있다. 한便 그의 行先地만큼 그가 이 時期에 무엇을 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런 漠然한 가운데 唯一하게 確認할 수 있는 것 하나는 파리를 떠날 즈음 토마스 아퀴나스가 ' 臺異敎徒大戰 '을 執筆하기 始作했다는 것 程度다.

이렇게 모든 史料에서 사라졌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1261年 9月 14日 現在 그가 오르非에토에 滯留中임을 確認해주는 記錄에서 約 2年 만에 再登場하게 된다. 以後 1265年 로마 로 떠나기 直前까지 토마스 아퀴나스는 修道會를 代表하는 先生으로서, 學者로서 또한 聖職者로서 活潑한 活動을 展開한다. 이 時期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욥기 主席'과 '臺異敎徒大戰', 그리고 '디오니시우스의 신명論 主席'을 完成했으며 '4福音書 連續註解'의 相當部分을 作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敎會의 要求에 따라 '그리스인들의 誤謬를 反駁하며'을 비롯한 多數의 小論文들을 作成한 것 外에도 오르非에토는 勿論 周邊의 都市까지 訪問하여 聖職者로서의 使命을 充實하게 履行하기도 했다. 이 時期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行跡을 살펴보면 높아져가는 名望과 더불어 文字 그대로 눈코 뜰새 없이 바빠져가는 한 修道士의 强行軍을 確認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높아져 가는 名望과 쌓여가는 疲勞 속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는 周邊사람들에게 謙遜하고 성실한 先生님이자 同僚였고 또 따뜻하고 謙遜한 司牧者이자 修道士였다. 이와 같은 面貌는 다음의 逸話에서 確認할 수 있다.

오르非에토의 修道院으로 한 젊은 修道士가 修道院長에게 심부름을 왔다가 院長室에서 나가자마자 複道에서 가장 먼저 만난 修道士와 함께 어디에 다녀오라는 院長의 指示를 받게 된다. 이 젊은 修道士는 院長室을 나서자마자 複道에 서있던 뚱뚱한 修道士의 소매를 잡아 채고는 院長의 指示이니 같이 길을 나서자고 했다. 그런데 이 젊은 修道士의 빠른 걸음을 뚱뚱한 修道士가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다. 結局 젊고 팔팔한 修道士는 땀을 뻘뻘 흘리며 따라오는 이 뚱뚱하고 느려터진 修道士에게 그로 인해 遲滯된 時間을 탓하며 오르非에토 市內에서 한복판에서 꽤 고약한 말들을 퍼부었다고 한다. 오르非에토의 사람들은 氣怯을 한 表情과 沈默으로 이 光景을 지켜보았다. 結局 한 사람이 보다 못해 이 젊은 修道士에게 묻기에 이른다. "저 분이 온 世上에 이름난 토마스 아퀴나스 修道士이신 건 알고 계십니까? 都大體 저 분이 무슨 잘못을 하셨고 宅은 누구시길래 저 분을 이리도 酷毒하게 對하십니까?" 이 말을 듣고 젊은 修道士는 예수님을 다시 十字架에 못박은 張本人과 같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토마스 修道士에게 거듭 머리가 땅에 닿도록 숙이며 謝罪를 했다고 한다. 한便 젊은 修道士가 투박을 주는 동안 한숨을 돌렸을 토마스 修道士에게 왜 한마디도 不平없이 그런 不便한 地境을 고스란히 當하셨느냐고 사람들이 묻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修道士의 本分은 順從과 謙讓입니다. 저 젊은 修道士와 저는 그 本分을 따랐을 뿐입니다."

1265年 부터 1268年 까지 그 象徵的인 이름에 걸맞지 않는 學問的 不毛地였던 로마로 불려간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의 修道院에서 敎授로서의 活動은 勿論 著作活動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그의 代表作 '神學大全'의 執筆에 着手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또한 이 時期는 '神의 權能에 關한 正規討論집'을 비롯하여 '靈魂에 關한 正規討論집', 그리고 '靈的被造物에 關한 正規討論집' 等과 같은 作品들이 完成되는 等 풍요로운 結實을 맺는 時期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이 時期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硏究에 重要한 轉機를 마련하는 時期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바로 이 때부터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욤 모어베크 (Guillaume Moerbeke)의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 飜譯本을 使用하여 '靈魂論'으로부터 始作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主要 著作들에 對한 註釋作業을 始作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9年 남짓한 이탈리아 滯在期間은 '臺異敎徒大戰'李 完成되고 '神學大全'과 같은 作品이 집필되기 始作한 時期이자, 그의 成熟한 思惟를 反映하는 수많은 主要著作들이 쏟아져 나오기 始作할 때이다. 하지만 一般的으로 막 꽃피우기 始作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成熟한 思想들이 反映되어 있다고 評價되는 이 時期의 著作들은 골房에 들어앉아 오로지 펜과 冊만 붙들고 앉아 있던 그저 英敏하기만 했던 學者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 時期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무엇보다도 謙遜한 順從의 態度로 信徒와 同僚들에게 잠깐의 講論을 하기 위해 며칠이 걸릴 지 모를 먼길을 떠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責任感과 使命感 强한 聖職者였다. 이런 意味에서 이 時期에 完成되었거나 집필되기 始作한 두 大田을 비롯한 著作들은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責任感과 使命感 强한 人間의 超人的인 努力의 結實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파리대학敎授(2次 파리滯留機) [ 編輯 ]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大學 史上 처음으로 두次例나 敎授職을 歷任하는 榮光을 안게 된다. 하지만 1268年으로부터 1272年까지 4年間의 파리滯在期間은 겉으로 드러난 靈光조차 느낄 時間도 없는 擧論되기까지 했다. 이런 狀況에서 修道會를 代表하는 學者로서, 또한 學生들을 올바르게 指導해야하는 敎授로서, 그리고 聖職者로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느꼈을 責任感과 壓迫感은 엄청 났을 것이다. 그런 壓迫感은 種種 이 時期에 쓰여진 論駁서, 예컨대 '世界의 永遠性에 關하여'와 같은 著書에 自身과 對立하고 있는 相對에 對해 例의 冷靜함과 沈着함을 잃고 怒氣까지 드러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모습을 통해 確認할 수 있다.

이 時期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모습을 보여주는 逸話가 하나 있다. 프랑스 王으로부터 食事招待를 받은 자리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갑자기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모든 사람들이 놀랄 만큼 세게 食卓을 내려치며 "그래! 摩尼敎徒 들을 論駁할 方法을 찾았다"를 큰소리로 외치고는 祕書들에게 自身이 하는 말을 받아 적으라고 호들갑을 떨었던 模樣이다. 어지간하면 王에 對한 缺禮로 큰 罰을 받았을테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學究的 熱意에 感動한 王은 토마스가 祕書들에게 口述하는 동안 조용히 기다렸다고 한다.

두 番째 파리대학敎授로 活動하던 時期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가 處했던 狀況이 어려웠던 것만큼 暫時의 쉴 틈도 없었다. 아마도 이 時期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晩年에 健康惡化의 決定的 原因이 되었을 慢性的인 睡眠不足에 시달렸을 것으로 推定된다. 어쨌든 이런 토마스 아퀴나스의 쉼없는 活動은 이 時期에 完成한 作品들의 想像을 超越하는 質과 量으로 結果를 맺었다. 마태오 福音, 바울書簡 및 요한福音에 對한 厖大한 主席 및 强해를 이 時期에 行했으며 '惡에 關한 正規討論집' 및 自由討論집의 相當數는 이 時期에 討論한 內容을 土臺로 作成한 것이다. 그리고 神學大全의 1部와 2部를 亦是 파리에서 두 番째 敎授生活 當時 完成했으며 '靈魂論 主席'과 '感覺과 感覺물에 關하여 主席'을 除外한 大部分의 아리스토텔레스 主席書들도 이 時期에 完成하거나 執筆했다. 特히 이 時期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活動과 著作活動, 特히 엄청난 著述量과 그것을 凌駕하는 質的인 完成度, 特히 神學大全과 아리스토텔레스의 著書들에 對한 註釋들이 보여주는 完成度는 '奇跡的'이라는 修飾語 外에 달리 表現할 길이 없다.

末年 [ 編輯 ]

1272年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를 떠나 나폴리로 向한다. 이곳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絶筆한 1273年까지 使徒 바울의 書簡文에 關한 註解 作業과 詩篇 註解, 그리고 結局 未完成으로 남게 되는 神學大全의 3部와 같은 大作과 함께 여러 小論文을 作成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執筆에 餘念이 없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1273年 12月 6日 性 니콜라우스 祝日 미사 中 어떤 衝擊을 받은 듯한 모습을 보여 周邊을 唐慌케 했다. 그리고 그 미사 以後 家族들의 年金에서 풀려난 뒤 單 한 次例도 멈추지 않았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偉大한 著作 活動을 完全히 멈춘다. 傳한 바에 따르면, 이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神學大全 3部 가운데 贖罪에 關해 執筆했었다고 한다. 그가 이제 글을 쓰지 않게 된 것을 奇異하게 생각한 그의 祕書 레지날드가 토마스에게 그 理由를 묻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레지날드 난 이제 할 수 없네"라고 答한다. 이 答을 듣고 더욱 걱정이 되어 再次 理由를 묻는 레지날드에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내가 본 것에 비하면 내가 쓴 것들은 모두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以後 토마스 아퀴나스가 種種 冥想 中에 意識을 잃었다는 證言들이 電氣에 登場하고, 1273年 12月부터는 寢臺에서 일어나고 누울 때도 周邊 사람들의 도움이 必要했다는 記錄이 남은 것으로 보아 그의 健康 狀態가 이 무렵부터 急激히 惡化一路를 걸었다고 斟酌할 수 있다.

1273年 12月 末부터 1274年 1月 初 무렵 女同生 테오도라를 訪問할 무렵의 記錄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거의 아무 말도 못할 地境에 이르렀음을 傳하고 있다. 이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제 내가 바라는 것 한 가지는 神이 내 著述活動에 終止符를 찍었듯이 내 人生도 빨리 끝내줬으면 하는 것이라네"라고 힘겹게 말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利用 公議會 에 參席하라는 敎皇의 命에 따라 利用으로 向하던 2月 中旬 以後로는 旅行의 疲勞까지 겹쳐진 탓인지 記錄에 따르면 食慾까지 完全히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結局 더 以上 旅行을 할 수 없을 만큼 健康狀態가 惡化되어 2月 末 褒姒누오바의 시토회 修道院에 머물게 된다. 一部 眞僞를 確認하기 어려운 記錄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서 一生의 마지막 活動으로서 아가 에 關한 짧은 註解를 남겼다고 하는데, 이 證言이 事實이라면 이 註解는 아마도 구술된 內容에 對한 報告書(Reportatio) 形式이었으리라 推定할 수 있다. 하지만 現在까지 原本이나 寫本은 勿論, 그의 事後 이 註解를 接했다는 證言조차 確認할 수 없다. 1274年 3月 7日 토마스 아퀴나스는 100餘 名 修道士와 平信徒들이 臨終을 지키는 가운데 永眠했다.

事後 [ 編輯 ]

1274年 5月 2日 水曜日 파리大學 總長과 運營陣은 當時 哲學部에 屬해 있는 모든 敎授들의 이름으로 도미니코回 總會에 悲痛함이 담긴 便紙를 보낸다. 이 便紙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죽음을 哀悼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젊을 時節부터 자라고 배우며 가르쳤던 파리에 묻히도록 해달라는 付託이 담겨 있었다. 勿論 이 파리大學 總長과 敎授들의 付託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褒姒누오바의 시토회 修道院이 '偉大한 成人'의 屍身을 내줄 수 없다고 頑剛하게 버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追慕와 尊敬의 表現만이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보내진 反應의 全部는 아니었다. 그가 죽은 지 正確히 3年째 되던 1277年 3月 7日 파리와 3月 18日 옥스퍼드 에서 各各 에티엔 텅피에, 그리고 같은 도미니코回 出身의 로버트 킬워드非 에 依해, 그리고 1286年 4月 30日 또다시 옥스퍼드에서 킬워드비의 後任 요하네스 페캄 에 依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實體的 形象의 單一性 理論을 包含한 몇몇 主要 理論들이 斷罪 當하는 不運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結局 토마스 아퀴나스가 49歲의 나이로 죽은 지 49年째 되던 1323年 7月 18日 가톨릭 敎會의 聖人으로 諡聖되었으며 以後 그의 理論들에 對한 斷罪는 모두 撤回되었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理論이 옥스포드에서 요하네스 페캄에 依해 異端으로 斷罪 當한 지 39年이 지난 해인 1325年 2月 14日 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正統性을 敎皇廳이 再確認하게 된다. 그리고 1567年 4月 15 日 토마스 아퀴나스를 敎會學者 로 公表한다. 한便 토마스 아퀴나스의 諡聖審査와 關聯하여 토마스가 聖人의 格에 어울릴 만한 奇跡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指摘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指摘에 對해 當時 敎皇 요한 22歲 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를 一蹴했다고 한다.

"그가 問題를 解決할 때마다 그만큼의 奇跡들을 行한 것이다"

哲學思想 [ 編輯 ]

그는 基督敎 敎理와 아리스토텔레스 의 哲學을 綜合하여 스콜라 哲學 을 大成한 中世 基督敎 最大의 神學者이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를 受容할 때 " 恩寵은 自然을 破壞하지 않고 오히려 自然을 完成시킨다 "는 態度를 갖고 恩寵과 自然, 信仰과 理性 사이에 調和로운 統一을 附與했다. 그의 이러한 그리스도교的 휴머니즘은 特記할 만한 것이다. 前 自然은 神이 創造한 것이다. 人間의 理性은 自然 가운데서 가장 高尙한 部分이므로 人間이 自然 全體에 對한 理解를 통해 神의 存在를 推論(推論)하는 것은 神을 讚美하는 길인 것이다.

于先 그의 存在論(存在論)은 神學 全體의 特徵을 이루는 것으로 實在的 色彩가 剛하다. 神과 被造物(被造物)의 關係에 對한 理解에는 '存在의 類比(類比)'를 使用하여 劉備와 參與의 槪念에 依해 同一性 안에 差別을 갖고 있는 存在의 把握을 可能케 하여 不可知論 (不可知論)과 汎神論 (汎神論)의 危險을 避하였다. 本質構造(本質構造)의 規定原理(規定原理)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質料(質料)와 形象(形相), 可能胎(可能態)와 現實態(現實態)의 槪念을 使用하였다. 더욱이 아비體나 에게서 發見한 '本質과 存在'의 區別을 利用, 그의 獨自的 原理를 展開하고, 本質과 存在가 一致하는 神(神) 存在의 必然性, 무(無)로부터의 創造라는 觀念을 確立하였다.

神의 存在 證明에는 本體論的(本體論的) 證明을 避하고, 經驗에 依해 주어진 事實로부터 出發하여 第1原因인 다섯 가지 길 을 使用한다. 惡의 問題는 善意 缺如라는 觀點에서 解釋한다. 다음에 人格의 單一性을 믿는 그는 靈魂의 唯一形像性(唯一形相性)에 바탕을 둔 人間學을 轉載한다. 理性的 動物로서 靈과 肉의 合成체인 人間에게 있어서는 靈魂에는 理性作用(理性作用)과 意志作用(意志作用)이 있으며, 靈魂은 理性的 認識作用의 原理일 뿐 아니라 動物的·植物的 生命原理度 된다고 主張한다. 그의 認識論은 本質的으로 存在論的인데 理性은 感覺이 주는 內容으로부터 抽象作用에 依해 對象의 本質槪念을 形成한다고 主張하고 能動知性(能動知性)과 手動知性(受動知性)을 區別한다.

道德論에서는 모든 道德은 神을 向하는 異性과 被造物의 運動이라고 把握하므로 終局的인 目標는 彼岸에 있어서의 新直觀(神直觀)李 된다. 여기에 引導하는 手段으로서 倫理的 行爲를 心理學的으로 分析한다. 道德律을 永遠法의 反映이라 보고 超自然的 神에 立脚하여 神을 向하는 目的論的 存在論의 體系 안에서 把握한다. 따라서 超越的인 것인 同時에 自然의 理性의 소리가 된다. 異性에 服從하는 習性으로서의 德에는 세 倫理德(倫理德-正義·節制·勇氣)에 思慮(思慮)의 德을 追加하고, 그 위에 恩寵에 依한 神學的 德(信望愛)을 追加한다. 그中에도 사랑이 여러 德의 形象으로서 人格의 最終的 完成을 이루게 한다고 主張한다.

主要著作 [ 編輯 ]

Super libros de generatione et corruptione

大戰 [ 編輯 ]

正規討論집 [ 編輯 ]

自由討論집 [ 編輯 ]

聖書註解 및 講讀 [ 編輯 ]


아리스토텔레스 主席 [ 編輯 ]

Super libros de generatione et corruptione

기타주석서 [ 編輯 ]

論駁서 [ 編輯 ]

小論文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各州 [ 編輯 ]

  1. 當時 유럽은 幼兒 死亡率이 높아 貴族과 王族조차도 生年을 모르는 境遇가 흔했다.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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