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병호
(段炳浩,
1949年
7月 13日
~)는 大韓民國의 政治人이자 勞動運動家이다.
오천초등학교
,
浦項東海中學校
를 卒業하고,
同志商業高等學校
를 中退하였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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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浦項
에서 태어나 자란 단병호는 勞動運動家가 되기 前에는 스스로 保守的인 사람이었다고 評價한다.
同志商業高等學校
를 中退한 以後 父母님과 함께 農事일을 하다가
1980年
에 上京했다.
젊은 時節의 단병호는
民主공화당
의 靑年 黨員이었으며,
朴正熙
大統領을 尊敬했다. 또한
1980年
光州抗爭
當時에는 "光州 사람들 다 때려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以後 어린 時節의 親舊로부터 眞相을 傳해 듣고 나서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1982年
동아건설
에 入社하였으며,
1986年
年末 賞與金 問題로 처음으로
罷業
에 參與하게 되었다. 當時 그는 工場 主任이었는데, 罷業을 말리기는커녕 이를 同調했다는 理由로 會社 側의 退社 要求를 받았다.
1987年
7月에는 이러한 問題認識을 발전시켜
勞動組合
을 結成하였다.
以後 民主勞組 運動이 加速化되면서 그는
1988年
地域業種 勞動組合 全國會議 議長을 거쳐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委員長으로 選出되었다.
1990年
에는
全國勞動組合協議會
(전노협) 委員長이 되어
保安司令部
의 民間人 査察 對象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전노협 結成 當時 한 番, 委員長職 遂行 當時 2番 拘束되기도 하였다.
한便 그는
國軍保安司令部
의 査察 對象 中 한 사람이 되어
노태우 政府
로부터 監視당하였는데,
1990年
10月 4日
午後 6時 40分쯤
외국어대
在學 中 民學투련 出身이었던 脫營兵
윤석양 二兵의 暴露
에 依해 밝혀졌다.
[1]
윤석양
은 脫營 後
서울特別市
鍾路區
연지동 基督敎會館 7層 韓國基督敎敎會協議會 人權委員會 事務室에서 「良心宣言」을 통해 脫營 當時 保安司에서 갖고 나온 動向 把握 對象者 個人索引表 신상철, 이들 內容이 入力된 컴퓨터 디스켓을 公開했다.
[1]
전노협 委員長을 歷任하던
1995年
에는 아직 不法 狀態였던
民主勞總
의 副委員長을 지냈고,
1996年
에는
全國民主金屬勞動組合聯盟
委員長,
1998年
에는
全國民主金屬勞動組合聯盟
의 委員長을 지냈다.
1998年
에는
1997年
의 民主勞總 總罷業을 主導한 嫌疑 等으로 拘束되었다가
1999年
光復節
特赦로 執行이 停止되어 出所했다. 같은 해
8月 29日
에 (
1999年
2月 合法化된) 民主勞總 第3期 委員長에 當選되어
2001年
까지 活動하였다가,
2001年
8月에 다시 收監되어
2002年
2月 懲役 5年刑이 求刑되었다. 그 때
서울地方檢察廳
에서 그를 拘束한 人物이
黃敎安
當時 公安2部 部長檢事였다.
[2]
以後 民主勞總 活動 및
민주노동당
支持 活動을 하다가,
2004年
總選에서
민주노동당
의 比例代表 國會議員이 되었다. 그러나
從北注意
波動 以後 민주노동당이 勞動者 政治 勢力化에 失敗했다고 發言하면서,
2008年
3月 20日
에 脫黨하고 政治界를 떠났다. 類似한 時期에 脫黨한
盧會燦
과
沈想奵
과 달리
進步新黨
에는 入黨하지 않고, 勞動者 代案 敎育 센터 設立을 準備하는 等 政治와는 線을 긋고 距離를 두며 活動하고 있다.
[3]
出身 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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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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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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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 選擧 結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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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實施年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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選擧
|
臺數
|
職責
|
選擧區
|
正當
|
得票數
|
得票率
|
順位
|
當落
|
備考
|
2004年
|
總選
|
17代
|
國會議員
|
比例代表
|
민주노동당
|
2,774,061票
|
|
比例代表 2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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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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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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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脚註 및 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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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
- 編輯部 엮음, 《示唆人物事前 2》 pp 64~71, 人物과사상사, 2000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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