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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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篈 (許?, 1551年 ~ 1588年 )은 朝鮮 中期의 文臣, 政治人이자 詩人이다. 字는 미숙(美叔), 號는 荷谷(荷谷), 本貫은 陽川 이다. [1]

아버지 許曄 同人 의 創黨 멤버였으며, 그는 同人 의 初期 멤버였다. 同人 의 先鋒이 되어 西人 들을 攻擊하는데 앞장섰다. 兵曹判書로 있던 李珥 의 勤務 態度를 糾彈했다가 逆으로 유배당한 뒤, 벼슬을 버리고 放浪生活을 하다가 갑자기 死亡하였다. 許曄 의 아들이고 許筠 의 兄이며, 許蘭雪軒 의 오빠이다. 유희춘 (柳希春)의 文人이다.

生涯 [ 編輯 ]

許曄 의 아들이고, 黨色으로는 同人 이었다. 徐坰德 의 文人들과 李滉 , 이언적 , 曺植 의 文人들이 모여서 同人 을 形成했으므로 아버지 許曄 同人 의 黨員이 되었고, 그도 同人의 黨員이 되었다. 허성은 그의 이福 兄이었고, 許筠 許蘭雪軒 이 그의 親同生들이었다.

미암 유희춘 (柳希春)의 門下에서 글을 배웠으며 1568年(宣祖 1)에 生員試에 1等으로 合格하여 生員이 되고, 1572年 親試文科(親試文科)에 應試하여 丙科로 及第하였다. 이듬해 賜暇讀書(賜暇讀書)를 하였으며, 1574年에는 明나라 에 派遣되는 遂行使臣 聖節使(聖節使)의 書狀官(書狀官)으로 自請하여 明나라 에 다녀왔다. 뒤에 明나라 를 다녀온 紀行文 《荷谷朝天記(荷谷朝天記》를 썼다. 1575年 吏曹佐郞(吏曹佐郞)으로 김효원 (金孝元) 等과 同人의 先鋒이 되어 李珥 (李珥), 朴淳 (朴淳), 成婚 (成渾) 等 西人 들을 攻擊하는데 앞장서, 이들과 對立하였다.

1577年(宣祖 10) 敎理를 거쳐 1578年(宣祖 11) 咸鏡道 순무 御史로 다녀왔다. 1583年(宣祖 17) 순무 御史로 景氣에 派遣하여 水原의 軍紀가 허술하다고 府使 한옹을 彈劾하였다. 1583年(宣祖 16) 弘文館 前漢과 그해 9月 昌原府使를 赴任했으며 朝廷의 黨論이 同人 西人 으로 나뉘면서 그는 父親 許曄 을 따라 動因이 되었으며, 김효원 (金孝元) 等과 함께 同人의 先鋒이 되어 西人과 對立하였다. 最終 官職은 通訓大夫 司憲府 掌令, 成均館 傳한에 이르렀으며 1584年 兵曹判書 栗谷 李珥 (李珥)의 職務上 過失을 彈劾하였다가 咸鏡道 宗姓 에 流配되었고, 甲山(甲山)으로 移配되었다. 함께 彈劾을 論議했던 송응개 , 박근원 等 李珥 를 批判하던 3名의 臣下들이 同時에 流配되었는데, 이 事件을 두고 癸未三竄이라고 부른다.

그는 號當(湖堂)에서 같이 讀書한 유성룡 의 도움으로 이듬해 釋放되었다. 풀려난 뒤 政治에 뜻을 버리고 나가지 않는다. 1585年 議政府 領議政 노수신 (盧守愼)의 建議로 다시 調整에 再起用되나 拒絶하고 全國을 流浪, 白雲山(白雲山)을 遊覽하기도 했고, 仁川 으로도 갔다가 春川 等을 訪問하며 流浪하였다. 放浪生活을 하다가 金剛山 에 들어가 隱居하였다. 그는 을 너무 하여 病이 앓다가 冷淡(冷痰)症이 되자 醫師 에게 보이려고 同巧(東郊)로 向해 가다가 1588年(宣祖 21) 金剛山 近處 金化郡 生槍驛(生昌驛)에서 黃疸 症狀으로 38歲의 나이에 갑자기 죽었다. 著書로는 《하곡집》等이 있다.

事後 [ 編輯 ]

한때 長幼 (張維)는 許篈을 當代 朝鮮 最高의 詩人으로 꼽았다고 한다.

著書 [ 編輯 ]

  • 《하곡집》
  • 《夏穀手語 (荷谷粹語)》

編著 [ 編輯 ]

  • 《海東野言 (海東野言)》
  • 《이산잡술 (伊山雜述)》
  • 《儀禮山主 (儀禮刪註)》
  • 《督役管見 (讀易管見)》

紀行文 [ 編輯 ]

  • 《荷谷朝天記》
  • 《北邊記事 (北邊記事)》

窓빈安氏 첩 論難 [ 編輯 ]

庶孼 콤플렉스에다가 房繼承桶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宣祖 는 덕흥大院君을 王으로 推尊하려는 試圖를 여러番 하였다. 그러나 大小愼慮들은 모두 反對하여 霧散되었다. 이때 그는 宣祖의 面前에서 窓빈 安氏 는 妾이라 했다. 1878年 (宣祖 11) 5月 11日 에는 덕흥大院君 祠堂의 이름을 定하는 것을 놓고 討議하던 中, 經筵官 許篈이 窓빈 安氏를 妾이라고 稱했다가 宣祖는 크게 憤怒하였다.

鋼管(講官) 許篈(許?)李 입시하여 아뢰기를 "名分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順하지 않습니다. 요즘 大院君 祠堂을 일컬어 ‘家廟(家廟)’라 하고 있는데 國家에 어찌 家廟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隊員墓(大院廟)’라고 하거나, 아니면 ‘社親廟(私親廟)’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殿下께서 安貧(安嬪)을 우리 조某라고 하시는 것도 亦是 매우 잘못입니다. 비록 大院君이 계시더라도 嫡母(嫡母)에 壓尊(壓尊)되어 敢히 自己 어머니에게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하는 法인데, 더구나 殿下께서는 大闕에 들어와 대筒(大統)을 이어받으셨으니 어찌 敢히 조某라고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大院君은 諸侯의 別子(別子)로서 百歲토록 옮기지 않는 祠堂이 되었으나 安貧은 바로 睫毛이기 때문에 時調의 祠堂에 들어 갈 수가 없고 다만 事實(私室)에서 祭祀해야 합니다.(名不正則言不順。 今者稱大院君廟曰家廟, 國家安有家廟乎? 只稱大院廟, 或稱私親廟, 可也。 殿下稱安嬪爲我祖, 亦甚非也。 雖大院君在, 亦壓於嫡, 而不敢母其母, 況殿下入承大統, 安敢稱祖乎? 大院君以諸侯別子, 爲百世不遷之廟, 安嬪是妾母, 不可入始祖之廟, 只合祭之私室。)"

하니, 床이 성난 音聲으로 이르기를,

"許篈이 敢히 이런 許多한 이야기를 하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말로써 뜻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安貧은 實地로 祖母인데 우리 할머니라고 한다 해서 무엇이 害롭段 말인가. 그리고 家廟라고 한다 해서 또한 무슨 妨害가 되기에 許篈이 敢히 比較하면서 말을 하여 함부로 議論을 만들어 내는가.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瑕疵, 坐像 洪暹(洪暹)李 아뢰기를,

"나이 젊은 사람이라 옛글만을 읽었을 뿐, 實地로 일을 經驗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너무 지나친 論議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니 賞께서는 모두 包容하셔야 합니다. 萬若 이와 같이 氣를 꺾으신다면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제대로 말하지 않을까 念慮됩니다."

宣祖 는 許篈에게 누가 妾이냐고 따졌다. 宣祖는 許篈이 窓빈 安氏를 妾이라고 대놓고 指摘하자(安嬪是妾母) 불같이 火를 냈는데, 左議政 洪暹 이 겨우 辯護하여 宣祖의 瞋怒를 가라앉힌 일도 있다. 그러나 以後로도 허봉은 窓빈 安氏 를 가리킬 때 첩, 첩夫人이라는 表現을 썼고, 宣祖는 怒氣를 드러냈다. 그러나 宣祖는 許篈을 處罰하려 하지는 않았다. 宣祖는 在位 途中 여러 番에 걸쳐서 生父 덕흥大院君 을 王으로 推尊하려고 試圖하였으나. 士林派의 猛烈한 反對에 부딪쳐 結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家族 關係 [ 編輯 ]

  • 아버지 : 許曄 (許曄)
  • 어머니 : 江陵金氏(江陵金氏) - 禮曹判書 광철(光轍)의 딸.
    • 異服兄 : 許筬 (許筬)
    • 누이 : 許蘭雪軒 (許蘭雪軒)
    • 冬服 동생 : 許筠 (許筠)
    • 否認 : 숙인 全州李氏(全州李氏) 이우빈(李禹賓)의 딸
      • 아들 : 許採(許寀)
      • 딸 : 通川郡守 김극件(金克鍵)에게 出家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韓國歷代人物綜合情報시스템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