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州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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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州 金氏
全州 金氏
나라 韓國
貫鄕 全北特別自治道 全州市
時調 김봉모(金鳳毛)
김예(金芮) 또는 김태서(金台瑞)
原始鳥 김알지 (金閼智)
中始祖 김경(金敬), 김달魂(金達渾)
集姓村 兩江道 金亨稷郡
慈江道 楚山郡
平安北道 녕변군
平安南道 平原郡
平壤直轄市
咸鏡南道 金野郡 · 高原郡
江原道 문천시
慶尙北道 義城郡
忠淸北道 槐山郡
主要 人物 김태서 , 김약선 , 김경손 , 金日成 , 金正日 , 金正恩
人口(2015年) 56,989名

全州 金氏 (全州 金氏)는 全北特別自治道 全州 를 本館으로 하는 韓國의 姓氏 이다. 慶州 (慶州)에서 分的하였다.

歷史 [ 編輯 ]

時調 김봉모 (金鳳毛)는 世界(世系)가 新羅(新羅) 王室에서 나왔다. 김알지 (金閼智)의 後裔로 容貌와 態度가 아름다웠다고 傳해진다. 여진어(女眞語)와 漢語(漢語)에 通達하여 每番 金(金)의 使臣이 오면 반드시 그에게 接待하게 하여, 恒常 洞閣(東閣)에 居處하였다. 高麗 新種 (神宗) 때 樞密院副使(樞密院副使)에 任命되었으며, 여러 番 벼슬이 올라 門下侍郞平章事(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그가 죽으니 사흘 間 朝會(朝會)를 멈추었으며, 시호(諡號)를 定評(靖平)이라 하였다. [1]

時調에 對해 [ 編輯 ]

1887年 刊行된 《金氏 分貫祿》에는 時調가 시랑(侍郞) 김봉모 (金鳳毛)라 하는데, 以後 文獻인 《增補文獻備考》에는 時調가 規定(糾正) 김예 (金芮)라 한다. 또 《朝鮮氏族通報》에도 時調를 規定(糾正) 김예 (金芮)라 하며, 일운(一云) 太子太保(太子太保) 定評공(靖平公) 김봉모 (金鳳毛)의 아들 平章太學士(平章太學士) 文章공(文莊公) 김태서 (金台瑞)라 한다.

舌禍 [ 編輯 ]

' 김태서 (金台瑞)의 墓'는 ' 全北特別自治道 完州郡 구이면 원기리( 모악산 )'에 있는데, '육관 손석우'가 金日成 死亡 1年 前에 '터'라는 冊에서, 이 墓는 '天文을 열고, 地軸을 깨는 絶對 權力의 墓 자리' 라며, 김일성 死亡 時期를 '豫言'하였다.

集姓村 [ 編輯 ]

全州 金氏의 主要 集姓村은 平南 平原郡 , 平南 寧遠郡 , 平南 평양시 , 平北 熙川郡 , 平北 碧潼郡 , 平北 慈城郡 , 平北 江界郡 , 平北 厚昌郡 , 咸南 咸州郡 , 咸南 定平郡 , 咸南 永興郡 , 咸南 高原郡 , 咸南 安邊郡 , 咸南 利原郡 , 咸南 新興郡 , 咸北 鏡城郡 , 咸北 明川郡 , 咸北 무산군 , 咸北 경흥군 , 慶北 義城郡 等으로 主로 以北地方에 世居하고 있으며, 朝鮮時代 때 平安道와 咸鏡道로 大擧 移住가 이뤄졌다.

人口 [ 編輯 ]

2015年 統計調査를 基準으로 總 56,989名이다. 具體的으로 살펴보면 서울 15,094名, 釜山 3,376名, 大邱 1,545名, 仁川 4,171名, 光州 348名, 大田 1,543名, 蔚山 822名, 世宗 191, 京畿 18,664名, 江原 3,408名, 忠北 1,471名, 忠南 1,538名, 全北 748名, 全南 421名, 慶北 1,660名, 慶南 1,685名, 濟州 304名이다.

行列字 [ 編輯 ]

全州金氏는 行列字가 統一되지 않은 狀態로 歷史를 이어왔는데, 2004年에 全州金氏 大同譜를 編纂하면서 大同譜에 行列字를 收錄하였다. 向後 몇 勢가 더 흘러야 비로소 統一된 行列字를 使用할 것으로 보인다.

  • 全州金氏 大同譜에 收錄된 行列字(時調를 1歲로 봄) [2]

人物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一說에 時調 金鳳毛는 敬順王의 넷째아들이라는 代案群(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後孫이라 한다. 그러나 김은열(金殷說)에 對해 情事는 勿論 金石文等 어디에도 記錄이 없으며, 다만 朝鮮 後期 들어 墓誌銘만 發見되었다고 하여 그 存在를 推定할 뿐이다. 또한 墓誌銘의 眞僞 與否에 對해서도 論難이 있다.
  2. 全州金氏 大同譜 1卷(2004) 56쪽 參照
  3. 1915年에 全州 金氏 大同譜가 編纂되었으나, 韓國戰爭 을 거치면서 消失되었다. 또한 김일성 一家가 살았던 平南 大同郡 一帶가 漏落되어 김일성 一家가 前週 金氏인지 確認할 수 있는 方法이 없다. 다만, 金日成이 自身의 回顧錄에서 "우리 家門은 김계상 할아버지 代에 살 길을 찾아 全羅北道 全州에서 北으로 들어왔다. 萬景臺에 뿌리를 내린 것은 曾祖할아버지( 김응우 ) 代부터였다." 라고 敍述하고 있다.
  4. 金正日은 2000年 金大中 前 大統領과의 頂上會談 中에 自身의 本館을 前週 金氏라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