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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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才 이건창 (寧齋 李建昌, 1852年 ~ 1898年 )의 兒名은 송열(松悅), 字는 봉조(鳳朝·鳳藻), 號는 영재(寧齋)이고, 堂號(堂號)는 명미당(明美堂)이며, 朝鮮 第2代王 정종대王 (定宗)의 열째 王子인 덕천군 (德泉君)의 15代 後孫으로 丙寅洋擾 ( 高宗 3年 , 1866) 때 殉國한 前(前) 開城府 留守 ·吏曹判書 忠情公(忠貞公) 詐欺 이시원 [1] (沙磯 李是遠)의 孫子이다. 공(公)은 朝鮮後期의 文臣, 大文章家(麗韓九大家 [2] )이며, 敎育者· 陽明學 者·思想家·民族保守主義者이고 强化學派 의 繼承者이며, 舊韓末時代 知識人들의 精神的 支柱이었다. 著書로는 《 명미당集 (明美堂集)》과 《 黨議通略 [3] (黨議通略)》等이 있으며,〈전가추석 (田家秋夕:農家의 秋夕) [4] 〉·〈逃亡 (悼亡:아내를 哀悼)(妻 喪)〉詩는 一般에게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공(公)의 著書 《黨議通略(黨議通略)》을 통해 朝鮮後期 社會 黨爭의 弊端을 指摘한 몇 안되는 知識人이다.

生涯 [ 編輯 ]

공(公)은 前(前) 開城府 留守 ·吏曹判書를 歷任한 忠情公(忠貞公) 詐欺 이시원 (沙磯 李是遠)의 孫子이며, 增(贈) 吏曹參判 이상학(李象學)의 아들이다. 江華島 出身으로서 祖父가 開城府留守로 在職할 때 유수부 (留守府) 官衙에서 태어나 出生地는 個性이지만 祖上代代로 江華島에서 살아왔다. 공(公)의 父系(父系)는 朝鮮 第21代王 英祖大王 때 官職을 버리고 江華島로 落鄕하여 知識人學者家門(→ 六鎭팔광 )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그들의 後孫들은 傳統的으로 江華島를 中心으로 陽明學 을 加虐(家學)으로 발전시켰는데 공(公)은 强化學派 의 繼承者이기도 하다.(→ 强化學派 六大繼承 )

祖父 忠情公(忠貞公) 詐欺 이시원 (沙磯 李是遠)으로부터 忠義와 文學을 바탕으로 한 加虐(家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5歲에 文章을 驅使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神童이라는 말을 들었다. 長成한 뒤에는 모든 工事(公私) 生活에서 祖父의 影響을 받았다. 김택영 (金澤榮), 黃玹 (黃玹), 姜瑋 (姜瑋) [5] 等과 交分이 두터웠다. 容貌가 淸水(淸秀)하였으며, 天性이 剛直하여 不正不義를 보면 秋毫도 容納하지 않고 親戚, 地球( 知舊 ), 地位의 高下를 莫論하고 嚴格히 治罪하였으며, 儀禮的인 假飾없이 所信대로 披瀝하여 當時 腐敗한 社會雰圍氣속에서 呻吟하던 百姓들과 知識人들로부터 信望을 얻어 精神的인 支柱가 되었다.

現在 松坡區 松坡1棟 松坡初等學校 옆 近隣公園에는 공(公)의 業績을 記念하기위한 永世不忘非 [6] (行御史 행어社 李公建昌 永世不忘碑 이공건窓 永世不忘非 )가 세워져 있다. 또한, 江華島 사기리에도 獸醫師 永世不忘非 [7] (繡衣使 獸醫師(←繡衣使道), [8] 李建昌 永世不忘碑 이건창 永世不忘非 )가 세워져 있다. 또한 京畿道 하남시에도 不忘碑가 세워져있다.(감북로 39番地)

出仕(出仕) [ 編輯 ]

祖父 忠情公(忠貞公) 詐欺 이시원 (沙磯 李是遠)에게 가르침乙받아 어려서부터 四書五經 에 精通하였으며 高宗 3年 (1866) [9] 에 最年少科擧及第(15歲)로 別試文科 丙科로 及第하였으나 너무 일찍 登科하였기 때문에 高宗 7年 (1870) 19歲에 이르러서야 承政院 州서(注書:정7품)직에 벼슬을 받았다. 高宗 11年 (1874, 23歲) 때 冬至使 [10] (冬至使:外交使節)의 書狀官 (書狀官:記錄管)으로 拔擢되어 淸나라 에 가서 그곳의 文章家 황각( 黃珏 )·張家樣( 張家? )·서보( 徐? ) 等과 交友하고, 이름을 떨쳤다.

暗行監察·民生救恤 [ 編輯 ]

高宗 14年 (1877, 26歲) 충청우도 暗行御史 가 되었고, 이듬해 忠淸道 觀察使 조병식 (趙秉式)을 彈劾하다가 도리어 謀陷을 받아 관서지방 의 平安道 碧潼 (碧潼)으로 流配되었고, 1年이 지나서 풀려났다. 工事(公事)에 誠意를 다하다가 도리어 當局者의 미움을 사 귀양까지 갔으며 그 뒤 벼슬에 뜻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高宗 이 親書(親書)로 “내가 그대를 알고있으니 前과 같이 잘하라”는 격려를받고 高宗 17年 (1880, 29歲) 京畿道 暗行御史 로 나가서 官吏들의 飛行을 파헤치는가 하면, 凶年을 當한 農民들을 一一이 찾아다니면서 食糧問題 等 救恤에 힘썼다. 한便 稅金을 減免하여 주기도 하여 百姓들로부터 歡心을 얻어 공(公)의 不忘碑가 各處에 세워졌다.

이 時期에 씌여진

等은 當時의 現實을 赤裸裸하게 알려주고있다. 文學的으로도 우리나라 寫實主義文學의 높은 봉우리를 이루게하였다. 基層民 (貧困層)의 哀歡을 同情하고 祖國의 自主的 富强을 念願하는 뜻에서 나왔기에 그 말이 切實하고 그 思想이 溫和하면서도 剛健했다.

그 뒤 高宗 21年 (1884)에 連이은 父母喪을 當하여 6年間 執喪( 執喪 )을 마치고 高宗 27年 (1890, 39歲) 漢城府少尹 (少尹)이 되었다.

外國人의 土地買收를 制約 [ 編輯 ]

當時 나라 안에 居留하는 淸國人과 日本人들이 우리 百姓들의 家屋이나 土地를 마구 사들여 傍觀하는 사이에 그 規模가 漸次 커지면서 그들이 所有權을 保護한다는 名目으로 온갖 問題를 일으킬 것에 對備, 시급히 國法을 마련하여 國民들이 不動産을 外國人에게 팔아넘기지 못하도록 禁止令을 實施하여야 한다는 上疏를 올렸다. 그때 우리나라에 큰 影響力을 行使하던 北洋群 (北洋軍)出身 北洋大臣 리훙장 (李鴻章)의 部下인 淸國公社 黨샤오이( 唐紹儀 →後(1912年)에 中華民國 初代國務總理를 歷任)가 공(公)의 上疏內容을 알고 “公約으로 淸國사람과 家屋이나 土地賣渡를 禁한다는 條項이 條約上에 없는데 왜 禁止措置를 하려는가?”라고 抗議하였다. 이에 功은 “우리가 우리 國民에게 禁止시키는 것인데 條約이 무슨 相關인가?”라고 一蹴하였다. 그러자 黨샤오이는 리훙장의 抗議를 憑藉하여 우리 政府에 壓力을 加함으로써 禁止令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공은 斷念하지 않고, 外國人에게 不動産을 판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다른 罪目으로써 討罪하고 加重處罰을 하였으므로, 이러한 幾微를 알아차린 百姓들이 敢히 外國人과 賣買를 못하게 되니, 淸國人들度 하는 수 없이 買收計劃을 抛棄하게 되었다.

貪官汚吏 治罪 [ 編輯 ]

高宗 28年 (1891, 40歲)에 承政院 承旨가 되었고, 이듬해 上訴事件으로 全羅道 寶城 (寶城)에 再次 流配되었다가 풀려났다. 高宗 30年 (1893, 42歲)에 함흥부 의 難民을 다스리기 위하여 按覈使 [12] 로 派遣되어 咸鏡道 觀察使 의 罪狀을 明白하게 가려내어 罷免시켰다. 以後 高宗 도 地方官을 보낼 때에는 “그대가 가서 잘못하면 리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라고 警告할 程度로 工事를 執行하는 共의 姿勢는 頑强하고 堂堂하였다.

隱退 [ 編輯 ]

甲午更張 (甲午更張, 高宗 31年 (1894.7)~ 高宗 32年 (1895.8))李 發表되자 이를 反對하여 一切의 官職을 버리고 鄕里인 江華島 화도면 사기리에서 日本 侵略勢力을 排斥할 것을 主張하였다. 高宗 32年 (1895)에 명성황후 (明星皇后) 弑害事件(→ 乙未事變 )이 있었을 때 공은 홍승헌· 정원용 (鄭元容)과 함께 闕文에 나아가 <청토複素 ( 請討復疏 )>를 올렸고, 搪塞의 制限 때문에 政治 理念을 具現하지 못하는 現實을 體驗하고는 朋黨政治死因 ≪黨議通略 (黨議通略)≫을 執筆하였다. 공(公)은 정원하 (鄭元夏)· 홍승헌 (洪承憲)· 이건승 (李建昇)· 이건방 (李建芳)等과 함께 정제두 의 遺風(儒風)을 欽慕해 江華島로 모여 함께 講學을 하여, 새로운 學問 方法과 現實 對處 方案을 討議하였다. 功過 더불어 黃玹 과 交遊한 아우 이건승, 再從弟 이건방이나 마찬가지로 甲午政局 (親日派 김홍집 (金弘集) 內閣)에 對해 批判的이었다.

上疏文(上疏文) : <청토複素 (請討復疏)> [ 編輯 ]

高宗 32年 (1895) 陰曆 8月 20日 乙未事變 (→ 日省錄 , 고종실록 [13] )이 있고나서 달이 바뀌었어도 喪服을 걸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江華島 큰사골 집에 蟄居하던 공(公)은 홍승헌(洪承憲)·정원용(鄭元容)과 함께 闕下에 엎드려 廢妃의 勅命을 거두고 罪人을 잡아 處刑하라고 主張하였다. 日帝侵略勢力의 劫迫으로 因해 王妃의 商道 치르지 못하는 親日派 김홍집 內閣이 寒心했던 것이고, 이보다 더한 變故가 있다면 그것은 祖國의 滅亡이었기 때문이다. 陰曆 9月 5日 에 功은 <청토複素 ( 請討復疏 [14] )>의 上疏文( 上疏文 )을 올렸으나 高宗은 읽어보지도 못한채 返送되었다. 陰曆 9月 13日 에 다시 올렸으나 亦是 親日派 김홍집 內閣에 依해 내쳐졌다. 그러나 공의 上疏를 전후하여 民心은 하나로 合해졌고 義兵들도 일어났다.(→ 乙未義兵 ) 功은 淸나라 洋務運動 (洋務運動)을 이끌었던 리훙장 (李鴻章)李 個國을 圖謀할 때 이미 “스스로 지키는 것 없이 그 自慢 믿는다면 나중에 반드시 나라가 팔리고 말리라” 市井所聞(時政疏文) 을 지어 憂慮하였다.

功은 不義와 不正과 妥協하지 않았고 斥洋斥倭主義者로 一貫하였다. 高宗 33年 (1896)에 親日派 김홍집 內閣에 依해 새로운 管制에 따라 各部의 協辦(協辦:次官級)·特進官(特進官:祕書官)·黃海道 觀察使 에 除授되었으나 모두 拒絶하였다. 結局 功은 日帝侵略勢力(親日派 金弘集內閣)에 協助하지 않아 오히려 全羅道 고군산道 (古群山島: 群山市 )로 세番째 流配刑에 處해졌다.(특지(特旨)로 2個月이 지난 뒤에 풀려났다) 그뒤 鄕里인 江華島에 내려가서 漢城과는 발길을 끊고 지내다가 2年뒤인 大韓帝國 光武 2年 (1898)에 殞命하였고 享年 47歲였다.

事後 記念事業 [ 編輯 ]

공(公)의 詩文은 동생(同生) 경재 이건승 (耕齋 李建昇)李 著者의 事後에 가장草稿(家藏草稿)를 바탕으로 蒐集 偏差(編次:整理 [15] )하여 刪削(刪削:矯正 [16] )한 다음 김택영 (金澤榮)에게 算定(刪正:檢收)을 付託하여 정고본(定稿本) [17] 을 만들었다. 그 後 嶺南의 선비 하겸진(河謙鎭), 이엽(李曄), 안진우(安鎭宇), 문박(文樸), 윤재현(尹在鉉)과 湖南의 선비 荒原(黃瑗), 李炳浩(李炳浩), 안종학(安鍾鶴) 等이 著者의 유고를 湮滅시킬 수 없다 하여 出版 費用을 醵出하고, 김택영 에게 敎授(校?) [18] 를 付託하여 1917年 12月에 金澤榮이 中國(中國) 남통視 (南通市)의 한묵림西國(翰墨林書局)에서 20卷 8冊의 鉛活字本으로 刊行하였다.

《初刊本》 이 冊은 現在 國立中央圖書館 (葦滄古3648-文62-13 [19] ), 성균관대학교 尊經閣(D3B-348), 고려대학교 中央圖書館(D1-A1468) 等에 所藏되어 있다.

그 後 1978年 에 《명미당集 (明美堂集)》과 《黨議通略 (黨議通略)》을 合本하여 아세아문화사(亞細亞文化社)에서 《이건창全集 (李建昌全集)》上下 2冊을 刊行하였고, 1984年에는 명미당全集 編纂委員會가 《명미당全集 (明美堂全集)》 2冊을 先聞出版社(宣文出版社)에서 刊行하였다. 本書의 底本(底本:文書의 初벌原稿)은 1917年 中國 남통視 한묵림西國에서 鉛活字로 刊行된 初刊本으로 國立中央圖書館 張本이다.(출처: 韓國古典飜譯院 )

學脈繼承 [ 編輯 ]

老成人(老成人·老鍊하고 成熟한 사람)은 갔어도 그 典型은 남겨놓았다. 동생(同生) 경재 이건승 (耕齋 李建昇)은 乙巳勒約 ( 大韓帝國 光武 9年 , 1905)李 强壓的으로 締結된 뒤 江華島 사기리에 남아 誡命義塾 (啓明義塾)을 設立하여 敎育救國運動을 展開하다가 庚戌國恥 ( 大韓帝國 隆熙 4年 , 1910)를 當하자 滿洲(滿洲)로 亡命하였다. 그리고 공이 굳게 지켜낸 强化學派 의 精神과 民族自主理念은 再從弟 난곡 이건방 (蘭谷 李建芳)의 弟子 爲堂 鄭寅普 (爲堂 鄭寅普)·緖餘 민영규(西餘 閔泳奎) 等에게 繼承되어 큰 줄기를 이루었으며, 現代 韓國學 의 뿌리가 되었다.

명미당(明美堂) [ 編輯 ]

명미당(明美堂)은 共의 生家의 堂號(堂號)이며, 祖父 忠情公(忠貞公) 詐欺 이시원 (沙磯 李是遠)李 丙寅洋擾때 殉國하면서 남긴, 時代의 所任을 다하라는 가르침을 지키기 爲해 명미당(明美堂)이라 하였다고한다.

찾아가는 길은 버스停留場:"强化버스터미널"에서 幹線버스 #1, #2, #3, #4, #41番을 搭乘하고 버스停留場:"이건창生家"에서 下車하면되고 바로 隣近距離에 있다. (幹線버스路線 #1, #2, #3, #4, #41番) (→ 다음 指導情報 )

家計와 行力 [ 編輯 ]

主要 著作 [ 編輯 ]

공(公)은 決코 文學家로 自處하지 않았지만 著書 《 黨議通略 (黨議通略)》은 派黨을 超越하고 族親을 超越하여 공정한 立場에서 朋黨의 原因과 展開過程을 記述한 名著로 높이 評價되고 있다.

元來 그의 文筆은 宋代 의 代價인 王安石 (王安石)의 影響을 많이 받았으며, 河谷 정제두 陽明學 (陽明學)의 知行合一 (知行合一)의 學風을 세운 이른바 强化學派 의 學問態度를 敎訓받고 實踐하였다. 舊韓末의 文學家인 滄江 김택영 이 우리 나라 歷代의 文章家를 追崇할 때에 여한구代가(麗韓九大家)라 하여 아홉사람을 選定하면서 그 最後의 사람으로 功을 꼽은 것을 보면, 當代의 文章家라기보다 우리나라 全代(全代)를 통하여 몇 안되는 大文章家의 한 사람임에 遜色이 없을 듯하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性品이 매우 곧아 丙寅洋擾 때에 江華에서 殉國한 祖父 忠情公(忠貞公) 詐欺 이시원 (沙磯 李是遠)의 遺志를 받들어 開化를 뿌리치고 徹底한 斥洋斥倭主義者(斥洋斥倭)로 一貫하였다.

명미당고 (明美堂稿)》12卷,《 黨議通略 (黨議通略)》2卷 外에 《남천機 (南遷記)》,《유독수機(有讀隨記)》1卷,《未濟錄(未濟錄)》1卷이 있다.

著書 [ 編輯 ]

《명미당集(明美堂集)》 [ 編輯 ]

《남천機(南遷記)》 [ 編輯 ]

《黨議通略(黨議通略)》 [ 編輯 ]

祖父 忠情公(忠貞公) 詐欺 이시원 (沙磯 李是遠)이 지은 《 國調文獻 (國朝文獻)》에서 黨爭에 관계된 內容만을 拔萃한 것이다. 이 冊은 朝鮮 第14代王 宣祖 ~ 第21代王 英祖 臺(宣祖-英祖代)에 이르는 各 王代別로 主要한 事件을 記述하는 形式을 取하고 있는데, 宣祖 8年 (1575) 김효원 (金孝元)과 심의겸 (沈義謙)의 對立에서 東西分黨(東西分黨)李 생겨난 것에서 始作하여, 英祖 31年 (1755)까지의 約 180年間을 對象으로 하여 黨爭의 흐름을 記述하고, 末尾에 <原論(原論)>을 附記하였다.

本文의 內容에 있어서는 肅宗組 (肅宗朝)의 分量이 全體의 半 以上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이 時期가 黨爭이 熾烈하게 展開되었음에도 原因이 있지만 老少分裂이 展開된 이 時期 少論의 政治的立場을 具體的으로 나타내기 위한 著者의 意圖가 일정하게 反映된 것이기도 하다. <原論>에서는 中國 歷代의 朋黨史를 簡略히 言及한 다음에, 朋黨의 原因으로 道學의 太重, 名義의 太嚴, 文詞의 太繁, 刑獄의 太密, 臺閣의 泰峻, 官職의 太淸, 閥閱의 太盛, 昇平의 太久等 8가지를 그 理由로 들었으며, 名節(名節, 名分과 節義)을 지나치게 崇尙하는 것에서 脫皮하여 實用(實用)에 힘쓰는 것이 朋黨의 弊害를 克服하는 한 方法임을 强調하였다.

18世紀 後半 以後에는 各 黨色(黨色)에 따라 여러 가지 黨論社가 出現하였는데, 본 冊은 著者의 家計上 少論 (少論)의 立場에서 쓴 것으로, 남인 (南人)의 立場에서 쓴 《 동소만록 (桐巢漫錄, 남하정 )》이나 老論 (老論)의 立場에서 쓴《 아아錄 (我我錄, 남기제 )》 等과는 敍述體制에서 많은 差異를 보이고 있다. 特히 老少分黨(老少分黨)의 原因에 對해서 少論 명재 尹拯 (明齋 尹拯)의 立場을 支持하고 老論 의 領袖 尤庵 宋時烈 (宋時烈)을 크게 批判한 點, 景宗 1年 (1721)부터 警鐘 2年 (1722)까지 일어났던 政治的 紛爭, 卽 연잉군 (→ 朝鮮 英祖 )의 王世弟 冊封問題때문에 發生한 辛壬士禍 (辛壬獄事)에 있어서 老論 側의 잘못을 浮刻시킨 點 等은 特히 그러하다.

본 冊은 少論 의 立場이 介入되어 있지만 다른 黨論書에 비해서는 年代記別로 主要한 事件을 比較的 客觀的으로 處理했다는 評價를 받고 있으며, 現在에도 朝鮮後期의 政治史를 理解하는데 必須的인 資料가 된다.

筆寫本으로 傳해지던 것을 對한 隆熙 4年 (1910)에 設置된 朝鮮 光文會 (朝鮮光文會, 古典硏究, 최남선 )에서 新活字本으로 刊行했다. 이를 土臺로 1972年 을유문화사(乙酉文化社)에서 影印本을 刊行했으며, 여강出版社에서 펴낸 《朝鮮時代 黨爭社 資料集 (朝鮮時代黨爭史資料集)》에도 影印本이 收錄되어 있다. 2冊 筆寫本 28.5×17.6cm.

기타 著書 [ 編輯 ]

《忠淸右道 暗行御史 李建昌 別單》 [ 編輯 ]

충청우도 暗行御史 이건창 別單 (忠淸右道 暗行御史 李建昌 別單)》은 공(公)李 高宗 12年 (1875)에 충청우도의 暗行御史로서 暗行中(暗行中)에 올린 狀啓·別單(狀啓·別單:報告書)과 그에 對한 議政府 (議政府)의 界(啓,報告書), 그리고 事後措置 等을 묶어 冊으로 펴낸 것(成冊)이다. 공(公)李 충청우도에 暗行御史로 나간 것은 高宗 12年 (1875)이었는데 이 別單(報告書)李 議政府(議政府)를 통해 高宗 에게 傳達되는 것은 高宗 15年 (1878) 陰曆 4月 14日 [25] 이다. 공(公)은 이 暗行中에 無辜한 선비를 장살(杖殺)했다는 罪目으로 高宗 17年 (1880)까지 관서지방 平安道 碧潼郡 (碧潼郡)에 流配되었다.

西界別單 [26] (書啓別單)은 總 12條로 이루어졌는데, 內容은 官廳의 行政實務를 擔當하는 下級官吏(人吏)와 結託하여 隱結(隱結)로 處理된 土地의 漸增(增加)에 對한 射出(査出:調査), 使喚發賣後 剩餘展(社還發賣後 剩餘錢)에 對한 措置, 보녕(保寧) 等의 合營(合營), 合陣(合鎭)에 따른 不便 解決策, 舒川郡 (舒川郡)의 세美(稅米)·軍田(軍錢) 過多徵收, 충청우도 泰安郡 安眠島 소나무숲(安眠島 松林) 毁損, 西海岸 모든 섬에서의 私設어전염세액(私設漁箭鹽稅額) 等의 社會·經濟的인 閉幕에 關한 件이 大部分이다.

이밖에 學行(學行)·烈行(烈行) 等 砲槍(褒彰, 表彰)에 關聯된 것도 있다. 當時 이 別單(別單)에 關聯된 事實들의 公明性(公明性)이 問題되고 있는 飼料(史料)가 보이는 만큼 再考의 餘地가 있으며, 또 이 別單(別單)에 依해서 關聯된 人物들이 治罪·昇進(治罪·陞) 되고 있음도 보게 된다. 朝鮮末期의 충청우도의 社會經濟的인 實相을 把握할 수 있는 한 資料 이다. 1冊(15張) 筆寫本 27×23.5cm.

《督役手記》 [ 編輯 ]

1卷은 晩年에 力學(易學)을 硏究하며 著述한 것으로 刊行되지 못하였다.

알려진 作品들 [ 編輯 ]

〈轉嫁秋夕 (田家秋夕)〉 [ 編輯 ]

轉嫁秋夕( 田家秋夕 )은 高宗 13年 (1878)에 충청우도 暗行御史 때에 目睹한 秋夕을 맞은 農家의 慘狀을 表現하였다.(원문출처: 韓國古典綜合DB )

京師富貴地 四時多佳節 鄕里貧賤人 莫如仲秋日
...(中略)...
抱兒向靈語 氣絶久不續 忽驚吏打門 叫呼覓稅粟

漢城(서울) 富豪 집은 恒常 좋은 時節이지만,
가난한 農村사람에겐 秋夕만이 좋은 때라네.
...(中略)...
男便은 굶주림을 참으며 작은 논에 모내기를 하고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男便이 심은 벼를 收穫한 秋夕날에.
...(中略)...
遺腹子 안고 죽은 男便을 向해 嗚咽하다가, 氣絶한 지 오래지 않아,
突然히 衙前들이 사립門을 부수며, 稅金 내놓으라고 소리 지른다.

 
— 명미당集 卷2, 職지행권(直指行卷) : 轉嫁秋夕(田家秋夕)

〈녹수作 (錄囚作)〉 [ 編輯 ]

녹수作( 錄囚作 )은 충청우도를 暗行할 때 罪人을 訊問하고 쓴 詩이다. 貪慾에 눈먼 人間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고 惻隱해 하였다. (原文出處: → 韓國高種綜合DB )


不知喫打苦 [1] 。但道喫錢甘 [2] 。汝輩亦人耳 [3] 。肌膚何以堪 [4]
一鞭一?間 [5] 。常恐傷而死 [6] 。縱我失之寬 [7] 。我心本如此 [8]

피맺히는 苦痛을 모르고 돈 먹는 달콤함만 말하다니
너희들도 사람이거늘 살가죽이 어찌 견디랴.
채찍 하나 회초리 하나에도 혹 傷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차라리 寬大하다는 잘못이 있을망정 내 마음은 本디 이와 같다.

 
— 명미당集 卷2, 全州이건창鳳詔저(全州李建昌鳳朝著) : 녹수作(錄囚作)

〈逃亡 (悼亡)〉(妻 喪) [ 編輯 ]

逃亡( 悼亡 )이란 詩(詩)는 妻喪(妻 喪)을 當하여 아내를 哀悼하는 內容이다.(번역 : 2,4,5 番째 절구) (原文出處:→ 韓國古典綜合 DB )

在時惟拙婦。沒後乃賢媛。試聽全家哭。人人似有恩。
未乾??淚。仍積?牀塵。更忍中門入。家居亦外人。
鹿場驚曉夢。漁艇?秋暉。不及如皐客。能成一笑歸。
何曾望作郡。稍已識居鄕。小福難消受。門前紫稻香。
兒小不知哭。哭聲似讀書。忽然啼不住。??淚連珠。
龍鍾半七十。那復作人夫。從此一方丈。惟應法喜俱。

未乾?捲淚 (美乾杯勸루) … 술盞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前에
仍積?牀塵 (잉적점상진) … 살平牀엔 먼지만 가득히 쌓였소
更忍中門入 (경인중門입) … 다시 차마 中門으로 들어가 보지만
家居亦外人 (街拒逆外人) … 내 집에 살아도 손님만 같구려

何嘗望作郡 (河上妄作群) … 내어찌 일찍 벼슬하기만을 바랐겠소만
稍已識居鄕 (超移植居鄕) … 이제야 조금 알아 故鄕으로 돌아왔건만
小福難消受 (素服難少數) … 薄福한 當身 享壽를 누리지도 못했는데
門前紫稻香 (문전자塗香) … 只今 門 앞에는 햅쌀 香氣만 그득하구려

兒小不知哭 (아소敷地曲) … 아이는 어려서 哭을 할 줄 몰라서
哭聲似讀書 (谷城社讀書) … 哭聲이 글 읽는 소리와도 같다가
忽然啼不住 (홀연제부주) … 갑자기 엉엉 울며 멈추지 않더니
??淚連珠 (속俗陋連奏) … 하염없는 눈물만 구슬같이 흘렀소

 
— 명미당集 卷4, 時·小休數秒(詩·少休收草) : 逃亡(悼亡) , 이건창을 欽慕하는 사람들

〈峽村記事 (峽村記事)〉 [ 編輯 ]

峽村( 峽村 )이란 '깊은 山골마을'을 뜻한다.(원문출처:→ 韓國古典綜合DB )


峽人豈好險。野居無田宅。靑山不拒貧。赤手來謀食。
烈炬燎灌莽。勁?鑽?。皇天均雨露。歲課收粟麥。
爲農誰不苦。此穀眞堪惜。當盂不忍飽。暗喜?中積。
邇來逢穀貴。出山利販?。前年買一犢。今歲屋?壁。
且令兒有匙。寧可婦無?。人生稍備物。如?方長?。
豈敢望富厚。庶期償筋力。此山無虎豹。旁郡無盜賊。
白晝屋中坐。何意轟霹靂。官校直入來。未聲面先赤。
?衣肩半?。紅?手雙擲。?翁與竊嫂。極口無倫脊。
一辭那可鳴。生死繫拳?。罪狀且姑舍。財物先搜斥。
瓮?無藩蔽。何由得藏匿。頃刻盡掃去。霜林風捲?。
出門尙咆哮。餘怒猶未釋。惡鬼生搏人。隣里誰敢逼。
山日?將墜。籬落異前夕。啼兒色半死。?犬猶喘息。
何用更點檢。空坑餘弊席。氣結不能?。叩心復何益。
所悲力田久。氣衰髮盡白。已老不重少。已失難再得。
此地不可住。舍此無所適。城中多富人。破?猶得職。

 
— 명미당集 卷4, 時·小休數秒(詩·少休收草) : 峽村記事(峽村記事)

參考 項目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 三娶헌 이대성 墓域
    • 域內 參議공 이광명, 忠情公 이시원 墓所 (明美堂:명미당 近處)
  • 英才 이건창 墓域 (仁川廣域市 記念物 29號), 北緯 37° 40′ 49″ 東經 126° 24′ 5″  /  北緯 37.68028° 東京 126.40139°  / 37.68028; 126.40139
  • 英才 이건창 生家 (明美堂, 仁川廣域市 記念物 30號), 北緯 37° 36′ 59″ 東經 126° 27′ 24″  /  北緯 37.61639° 東京 126.45667°  / 37.61639; 126.45667
  • 反哭 이덕성 (李德成)의 肖像 Archived 2014年 8月 6日 - 웨이백 머신 , 釜山市立博物館 所藏, 寶物 1501號
  • 永世不忘非 (功德碑)
  • 送波나루터 (松坡津址, 現在 石村湖水 ), 松坡近隣公園
  • 《黨議通略 (黨議通略)》
    • 지은이 이건창(李建昌), 옮긴이 이근호( 韓國學中央硏究院 藏書閣 前任硏究員), ISBN   9788966802524
    • 펴낸이 知識乙만드는지식(지만지), 初版發行 2012.01.30.
    • 原電에서 核心內容만 뽑아내는 拔萃方式으로 敍述.

各州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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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高宗 3年 (1866)에 丙寅洋擾 가 일어나 프랑스 軍隊가 쳐들어와 江華島가 陷落되자 住民들 모두가 避身하는 것을 慨歎하고, 臣下로서 逃亡갈 수는 없다면서 柳韶(遺疏)를 올리고 殉國하여 住民들의 意識을 깨운 醫師(義士)이다. 이때 아우 이지원(李止遠)도 함께 殉國했다. 著書로 《詐欺집(沙磯集)》이 있다. 領議政에 追贈되었다.
  2. 滄江 김택영 (滄江 金澤榮)은 여한구代가 (麗韓九大家)의 마지막 文章家로서 이건창을 꼽았다.
  3. * 政治歷史 年代記
  4. 충청우도 暗行御史 時節 目睹한 農家의 慘狀을 表現함, 高宗 13年 (1876)
  5. 姜瑋, 當時 開化派의 思想的 指導者
  6. 송파구 송파동의 永世不忘非, 이 碑石은 이건창이 暗行御史로 活動하던 1882年 이곳 京畿道 廣州郡 중대면 送波마을(現在의 송파동 一帶) 場에 들러 身分을 감춘 체 場터住民들을 만나 그들의 苦衷을 들어주면서 勇氣를 북돋아 주었는데 이에 感動한 送波住民과 장사꾼들이 그의 功績과 行跡을 기리기 위해 1883年 5月에 그가 머물었던 場터 入口(중대면)에 世運것이다. 그後 1925年 乙丑年 7月 18日 大洪水에 떠밀려 流失 되었던 것을 55年이 지난후인 1979年에 送波 地域의 鄕土史學者에 依해 發見되어 옛 모습을 되찾아 現在의 位置에 세웠다한다
  7. 江華島 사기리의 永世不忘非, 이 碑石은 1885年 6月에 세운 碑石으로 暗行御史 李建昌의 業績을 기리기위해 마을 사람들이 세운 碑石이다.
  8. * 壽衣를 입은 使道(使道)를 뜻하며 御史또(御使道:暗行御史를 높여부르는 말)라고도 한다.
  9. * 이때 丙寅洋擾 가 發生하여 祖父 忠情公(忠貞公) 詐欺 이시원 (沙磯 李是遠)과 叔祖父 이지원(李止遠)李 死亡하였다.
  10. * 冬至使 (冬至使), 朝鮮時代 每年 冬至달에 中國으로 보내던 使臣. 正朝使(正朝使)·聖節使(聖節使)와 함께 三絶社(三節使)라 했다. 書狀官 (書狀官)이란 外國에 보내던 蛇行館(使行官:隨行員)의 한사람이다. 臨時 官職으로 위로 正使(正使), 副使(副使)와 함께 3社(三使)의 하나이고, 記錄觀이라고도 하여 行臺御使(行臺御使)를 겸하였다. 日本에 보내던 通信社(通信使)에도 書狀官이 따라갔다. 仁祖 以前의 命(明)나라, 仁祖 以後의 靑(淸)나라에 定期?不定期的으로 보내던 蛇行에는 兩國 協約에 따라 規定된 人員을 보냈는데, 書狀官은 情事?府使와 함께 3사라 하여 外交 實務에 큰 役割을 하였다. (注意) 同音異義語 冬至使(同知事)는 朝鮮時代 鐘2品 官職이며, 敦寧府 (敦寧府), 義禁府 (義禁府), 經筵廳 (經筵廳), 成均館 (成均館), 春秋館 (春秋館), 三軍府 (三軍府) 等에 配置되었다.
  11. * 還穀(還穀),農民들에게 봄에 穀食을 빌려주고 가을에 받아들이는 制度
  12. 按覈使, 朝鮮後期 地方에 事件이 생겼을 때 派遣되어 事件의 解決을 擔當하던 臨時官職
  13. * 高宗 33卷, 32年(1895 乙未 / 靑 光緖(光緖) 21年) 8月 20日(戊子) 1番째記事
  14. * 請討復疏:明成皇后의 身元復元에 關한 議論을 請하다.
  15. * 偏差(編次), (資料 따위를)순서를 따라 編輯함
  16. * 刪削(刪削), 必要 없는 글字나 句節을 지워 버림
  17. 정고본, 마지막 손질을 통해 完成된 冊
  18. 敎授, 두 種類 以上의 異本(異本)을 對照하여 틀린 데를 바로잡음.
  19. * 日帝式 文書分類 表記法이다.
  20. 朝鮮 時代, 임금에게 敎書(敎書) 等의 글을 지어 바치는 일을 맡은 重要한 벼슬이다.《 大典通編 》에 依하면
    • 弘文館 副提學 以下의 官員이 兼任하는 것을 內知製敎,
    • 弘文館 大提學이 吏曹判書와 相議하여 6品 以上의 官員 가운데 特別히 뽑은 候補者를 草綠(抄錄)·常住하여 知製敎로 임명하는 것을 外知製敎라고 불렀다.
  21. 湖西(忠淸)와 湖南(全羅)
  22. 王에게 警笛·四書를 講論하는 官職
  23. * 請討:日帝侵略勢力을 討伐할 것을 請하다. * 復疏:明成皇后의 身元을 復元하다.
  24. * 隆熙 元年 이기도 하다.
  25. * 高宗 15卷, 15年(1878 無人 / 靑 光緖(光緖) 4年) 4月 14日(癸巳) 1番째記事
  26. 西界別單, 暗行御史는 西界(書啓: 繡啓)에 守令의 行跡에 對해서 詳細히 記錄하고, 別單(別單)에 自身이 보고들은 민정과 孝子·烈女 等의 美談을 적어 國王에게 바쳐 地方行政의 改善을 促求하였다.
  27. 咸興民亂, 1892年 咸鏡道 觀察使 이원일 과 中軍 惟政(劉貞)의 佛法藏誤(不法贓汚, 贓物喝取)로 인해 全(前) 司諫院 정언(正言) 주욱환(朱昱煥)李 主導하여 일으킴. 觀察使 이원일은 罷職, 流配되었으나 司憲府 大司憲으로 재임용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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