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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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筠
許筠
朝鮮 의 左參贊
在任 1605年 ~ 1606年
身上情報
出生日 1569年 12月 10日
出生地 朝鮮 江原道 江陵大都護府
死亡日 1618年 8月 24日 (48歲)
死亡地 朝鮮 漢城府
國籍 朝鮮
職業 文官
本館 陽川
父母 許曄 (簿), 江陵 金氏 (某)
兄弟姊妹 許蘭雪軒 (누나), 許篈 (兄), 許筬 (兄)

許筠 (許筠, 1569年 ~ 12月 10日 1618年 )은 朝鮮 의 文身이다. 本貫은 陽川 (陽川). 字는 단보(端甫), 號는 校山(蛟山)·학산(鶴山)·聖所(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벼슬이 左參贊에 이르렀다. 小說 《 洪吉童傳 》의 作家이다.

生涯 [ 編輯 ]

江陵 出身. 壬辰倭亂 當時 義兵을 일으켜 싸운 功勞로 宣撫 原從功臣 1等(宣武原從功臣一等)에 錄勳되었다. 1594年 (宣祖 27年) 文科 (文科)에 及第하고 1597年 (宣祖 30年) 다시 重視 文科(重試文科)에 及第하여 公主 牧師를 거쳤으나 反對者에게 彈劾받아 罷免되고 유배당했다. [1] 時流에 迎合하지 않고, 妓生과 어울리기도 했고, 佛敎 를 信奉하여 論難을 惹起(惹起)하기도 했다. 1614年 (光海君 6年) 8月 27日 衛星 原從功臣 2等(衛聖原從功臣二等)에 책록되었다. 벼슬은 正憲大夫 議政府 左參贊 禮曹 板書 에 이르렀다. 광해군 對北 에 加擔하여 實勢로 活動하였으며, 1617年 (光海君 10年) 仁穆大妃 폐모론에 積極으로 加擔하였다. 身分制度와 庶孼 差別에 抗拒하려고 庶子와 不滿하는 階層을 糾合하여 革命 을 計劃하다 發覺되어, 이를 批判하던 기자헌 을 除去하려다가 逆으로 反逆을 圖謀하려 했다는 기준격 의 密告로 陵遲處斬 되었다.

그의 文集은 時流에 맞지 않는다는 理由로 朝鮮 王朝 治下에서 모두 湮滅(湮滅)될 뻔하였으나, 그가 죽음을 豫想하고 當時 少年이던 外孫子 이필진 에게 傳해줘서 後代에 傳來되었다. 《 洪吉童傳 》(洪吉童傳)과 《 惺所覆瓿藁 》(惺所覆?藁) 等을 남겼다. 特히 《洪吉童傳》은 무명으로 發表하였으나 나중에 유몽인 이 그의 作品이라는 記錄을 남겨 알려지게 되었다.

黨色(黨色)으로는 同人 이었으며 北人 , 對北 으로 活動하였다. 秒當 許曄 의 아들로, 許筬 의 異服弟(異腹弟)이자 許篈 , 許蘭雪軒 의 親弟(親弟)이다. 우성전 은 그의 異腹 妹夫였다. 蓀谷 이달 과 西厓 류성룡 文人이다. 同人 의 招待 黨首 성암 김효원 (金孝元)의 사위이다.

生涯 初盤 [ 編輯 ]

出生과 家計 背景 [ 編輯 ]

江陵 草堂洞에 取値韓 許筠 生家

許筠은 1569年 ( 宣祖 3年) 陰曆 11月 3日 江陵 초당동 에서 郡守 同知中樞府事 (同知中樞府事)를 지낸 秒當(草堂) 許曄 (許曄)과 둘째 夫人인 江陵 金氏 禮曹 參判 김광철(金光轍)의 딸 사이에서 三南 三女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壬辰倭亂 直前 日本 通信社 書狀官 으로 日本에 다녀온 許筬(許筬)은 그의 異服兄이고 우성전 의 妻가 그의 異腹 누나이며, 後에 栗谷 李珥 를 彈劾했다가 송응개 等과 함께 癸未三竄으로 몰려 逐出된 許篈 과 난설헌(蘭雪軒) 허초희가 各各 冬服 兄과 누나이다.

그의 父親 秒當 許曄 (許曄)은 士林派 의 一員으로, 徐坰德 의 門下와 李滉 의 門下에서 數學(受學)韓 人物이었다. 草堂은 慶尙道 觀察使를 지냈고 同人 의 領袖(領袖)가 되었던 人物로, 한때 江陵 의 맑은 물로 초당 豆腐 를 만들었다. 江陵의 물맛으로 特異한 豆腐를 만들어 초당 豆腐의 名聲은 漢城府 까지 傳來되었으나 草堂은 官僚로서 葬事한다고 하여 彈劾받기도 했다. 父親 草堂은 同人을 創黨한 一圓 中 한 사람으로, 後日 許筠은 同人에서 分離된 北人 의 一員이고 北人의 强勁派인 對北 의 일人으로 活動했다.

許筠의 나이 12歲인 1580年 (宣祖 13年)에 父親 草堂이 尙州 에 있는 客觀에서 別世하였다. 學問은 둘째 兄의 벗인 이달 에게서 배우다가 나중에 류성룡 에게 배웠다. 庶子 出身으로 出世가 어려웠던 이달의 處地에 悲哀를 느끼고 『洪吉童傳』을 지었다. 許筠도 再娶 夫人의 所生으로 庶子와 다름없는 形便이라서 이달의 不遇(不遇)韓 處地에 깊이 共感했다.

幼年期 [ 編輯 ]

어릴 적부터 그의 記憶力은 非常하였고, 10歲 以前의 少年期 때 글을 잘 지어서 周邊을 놀라게 하였다. 유몽인 은 『 於于野談 (於于野談)』에서 “逆賊 許筠은 총명하고 才氣가 뛰어났다”면서 어린 時節의 逸話를 紹介했다. [2]

9歲에 능히 詩를 지었는데 作品이 아주 좋아서 여러 어른이 稱讚(稱讚)하며, ‘이 아이는 나중에 마땅히 文章 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姨母 사위 鄒衍 (秋淵)만은 그 詩를 보고 ‘後日 그가 비록 文章에 뛰어난 선비가 되더라도 許氏 門中을 뒤엎을 者도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於于野談 [2] >)

當代 名詞였던 鄒衍 (秋淵)李 어린아이의 市에서 ‘許氏 門中을 뒤엎을’ 그 무엇을 봤는지는 몰라도 그만큼 許筠은 어린 時節부터 남달랐다. 許筠 自身도 ‘運命을 풀이하는 글’[解命文]에서 이런 事實을 認定한다. [2]

나는 記事年(己巳年·1569, 宣祖 2年) 病者月(丙子月·11月) 妊娠일(壬申日·3일) 癸卯視(癸卯時)에 태어났다. 聲明가(星命家·사주, 觀相家)가 이를 보고 ‘신금(申金)李 名目(命木)을 해(害)치고 身數(身數)가 또 비었으니 液(厄)이 많고 가난하고 病이 잦고 꾀하는 여러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다. 그러나 自首(子水)가 中間에 있는 故(故)로 壽命이 짧지 않겠고 强首가 맑고 깨끗하여 재주가 대단하겠고 墓金(卯金)李 또 울리므로 이름이 天下 後世에 傳하리라’라고 말했다. 나는 그前부터 이 말을 疑心해왔으나 벼슬길에 나온 지 17年에서 18年 以來 全敗(顚沛)와 寵辱(寵辱)李 反復되는 갖가지 樣相이 隱然中(隱然中) 그 말과 符合되고 보니 異常하기도 하다.

(<惺所覆瓿藁. [2] >)

5歲 때부터 兄 許篈 의 벗인 蓀谷 (蓀谷)에게 글을 배우기 始作하였으며 9歲 때 이미 描寫를 잘하여 詩를 잘 지을 줄 알았다. 12歲 때 아버지를 잃고 외로움을 달래려 더욱 詩文 工夫에 專念하였다. 첫 스승인 李達은 둘째 兄의 벗으로서 當時 原州의 손곡리(蓀谷里)에 살았는데 그에게 詩의 妙諦를 깨닫게 해주었으며, 人生觀과 文學館에도 많은 影響을 주었다.

스승 西厓 류성룡

後에 이달에게 詩와 글을 배우다가 妹夫 鄒衍 (秋淵)의 推薦으로, 當代 大學者 류성룡 의 門下에 들어가 性理學 과 글을 배웠다.

靑年期 [ 編輯 ]

初試, 生員試 合格과 壬辰倭亂 [ 編輯 ]

일찍 父親을 여의었으나 20歲 以上 나이 差異가 나는 이福 兄 許筬 의 집과, 江陵 의 外家를 오가며 豐足하지는 않았으나 어렵지 않은 少年期를 보냈다.

그의 나이 17歲 때인 1585年 (宣祖 18年) 初試에 及第하고 安東 金氏 김대섭 (金大涉)의 次女와 婚姻한다. 安東 金氏 夫人의 親庭어머니는 靑松 沈氏 心田 (沈銓)의 딸로, 左議政 심통원 領議政 심연원 의 從孫女이자 인순왕후 , 심의겸 의 6寸 女同生이다.

21歲 때인 1589年 生員 時에 及第하나 열다섯 살 때 그와 가까웠던 親兄 許篈이 李珥 를 彈劾하다가 咸鏡道 終聲으로 流配됐고, 김성립(金誠立)에게 出嫁한 누이 난설헌 은 媤宅과 不和를 겪고 子息들은 잇달아 世上을 떠나서 눈물을 흘리면서 歲月을 보내고 있었다. [2] 許筠이 스무 살 때인 1588年(宣祖 21年) 허봉은 끝내 서울 땅을 밟지 못하고 金剛山에서 病死했다. 生前에 허봉은 許筠에게 “온갖 일이 人間에게 있는 것이어서 높은 재주로도 零落(零落)하여 초망(草莽)을 떠도는구나”(‘아우에게 보냄’, 便紙 「하곡집(荷谷集)」)을 보냈는데 [2] , 兄 許篈 은 곧 金剛山 에서 客死하고 만다.

24歲 때인 1592年 (宣祖 25年) 壬辰倭亂 을 避하던 渦中에 夫人 安東 金氏가 端川에서 첫아들을 낳고 死亡하고 어린 아들도 戰亂 中에 病死한다. 家族을 잃은 許筠은 以後 執筆에 沒頭했는데 外家 애일당 뒷山의 이름을 따서 號 校山(蛟山)을 使用한다.

그 뒤 許筠은 先山 金氏 同人 의 招待 黨首인 김효원 의 딸과 再婚한다. 金孝元의 동생이자 後妻의 叔父인 김이원 北人 의 重鎭이었다. 이때 그는 광해군 을 遂行했는데 그 功勞로 後에 衛星原從功臣 2等에 책록된다.

김종직 批判과 注目 [ 編輯 ]

終戰 後 許筠은 學問 硏究와 科擧를 準備하던 中 글 「김종직론」을 지어, 士林 의 中始祖로 推仰받던 김종직 을 僞善者라고 批判하였다. 이는 社會에 큰 衝擊을 주었다.

김종직론(金宗直論) - 校山(蛟山)

天下에 移錄(利祿)이나 醉하고 自身의 名望을 훔치는 者가 있는데 世上에서 君子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그걸 믿을 것인가? 나는 믿지 못한다고 말하겠다.

왜 그게 믿어지지 않을까? 自己 것으로 해버리거나 훔친다면, 비록 道德(道德)과 仁義(仁義)에서 나왔더라도 거짓 짓임을 面(免)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移錄(利祿)과 名望이겠는가. 이미 移錄을 取하였고 名望을 훔쳐서 한 世上을 속이고 自身의 映畫(榮華)와 祿俸을 누린다면, 正말로 自己의 智慧를 다하고 온 마음을 기울여 自己의 職分으로 當然히 할 일에 맞도록 하여야 그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補完할 수 있다. 그런데 反對로, “映畫와 祿俸은 나의 뜻이 아니다.” 하면서, 능청스럽게 한갓 그 수레를 붉게 꾸미고 그 印끈을 붉게 하면서 一生을 마친다면, 그의 罪惡은 죽음을 當해도 容恕받지 못하리라.

김종직 은 近世에 이른바 대유(大儒)다. 젊은 時節에는 벼슬하려고도 않더니 世祖 (世祖)가 科擧에 應試하도록 다그치니 不得已(不得已) 過去에 올랐으며, 始終(侍從)의 職責에 드나들더니 벼슬이 높아졌다. 그러면서는 母親이 늙었으므로 억지로 벼슬한다고 일컬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天壽(天壽)를 다하고 世上을 마쳤으나 오히려 벼슬을 그만두지 않았었다. 그의 文人(門人) 김굉필 (金宏弼)이 더러 그가 建白(建白, 當代의 重要 問題에 對한 是正策을 建議)하지 않음을 간(諫)하면, 이어서, "벼슬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建議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다. 金宗直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移錄(利祿)을 醉하고 名望을 훔치며 능청스럽게 한갓 수레를 붉게 하고 印끈을 붉게 한다고 말해지는 바의 사람이었다.

癸酉靖難 (癸酉靖亂)을 當하여 김종직 박팽년 · 성삼문 無理처럼 祿을 먹던 사람이 아니었고 김시습 처럼 平素에 恩澤(恩澤)을 입었던 것도 없었다. 다만 시골의 변변찮은 한 선비여서 옛 임금 斷種 을 위하여 죽어야 할 義理도 없었으니 그가 벼슬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 本來 僞善이었다. 비록 僞善이었지만 이미 뜻을 세웠다면, 賃金이 아무리 다그치더라도 죽기를 盟誓(盟誓)하고 가지 않았어야 옳았다. 그런데 火(禍)를 두려워하여 억지로 나온 것처럼 하였다. 이미 過去에 合格해서는 붓을 귀에 얹고 임금의 말을 記錄했으며, 史冊(史策)을 끼고 고운 털자리에 엎드리기도 하였다. 또 고을을 맡아서 그의 어머니를 奉養했으니 그가 移錄(利祿)을 取했던 것은 程度를 넘었었다. 또 名號(名號)를 훔치고 싶어 남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어버이가 있다. 그러나 끝내는 瑞山(西山)의 뜻을 지키리라.” 하였다.

그러나 이미 어머니의 複製(服制)를 벗고도 應敎 (應敎) 벼슬을 받았었고 10年 동안에 刑曹 板書 (刑曹判書)로 뛰어올랐다. 그만 쉴 만도 하나 오히려 더 탐(貪)내며 떠나가지 않았다. 責任을 完遂치 못하면서 職責上 當然히 해야 할 것도 하지 않다가, 文人(門人)이 그 點을 指摘해 주면 謀免(謀免)하려고 꾸며대는 말로써 對答하였다. 이게 果然 君子라고 여길 만한가? 이런 속임數는 마땅히 죽임당해야 한다.

그러나 世上에서는 只今까지 繼續하여 그 사람을 稱讚하고 있으니 무엇 때문일까? 내가 가만히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았더니, 加虐(家學)을 주워 모으고 文章을 工夫해서 스스로 發信(發身)했던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하고 마음은 狡猾(狡猾)하여 그의 名望을 높이려고 한 世上 사람을 龍棟(聳動)시켰고 임금의 들음을 迷惑(迷惑)되게 하여 移錄(利祿)을 훔치는 바탕으로 삼았다. 이미 그러한 꾀를 부렸지만 自己의 才能을 헤아리니 百姓을 便하게 하고 救濟(救濟)하기에는 不足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하고는 自身의 拙劣(拙劣)을 감추는 手段으로 하였으니 그것 또한 공교로웠다.

그가 弔義帝文 (弔義帝文)을 짓고 注視(酒詩)를 記述했던 것은 더욱 가소(可笑)로운 일이다. 이미 벼슬을 했다면 이 분이 우리 賃金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기나 하였으니 그의 罪는 더욱 무겁다. 죽은 뒤에 當했던 和蘭(禍亂)은 不幸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그의 幹事(奸邪)하고 狡猾(狡猾)했던 것에 화내서 사람의 손을 빌어다가 明白하게 살륙(殺戮)한 것이 아닐는지? 나는 世上 사람들이 그의 形跡(形迹)은 살펴보지 않고 괜스레 그의 名聲만 崇尙하여 只今까지 치켜 올려 대유(大儒)로 여기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때문에 特別히 나타내어 記錄한다.

許筠은 김종직 弔義帝文 을 지어 世祖 簒位 를 非難하면서도 그 自身은 世祖 가 주는 官職을 받았다고 非難했다.

許筠은 弔義帝文 따위를 지은 것은 가소롭다고 하고, 金宗直을 가리켜 위學者 (僞學者)라고 非難했다. [3] 許筠은 또한 김종직 을 사기리節氣名(私其利竊其名, 利益과 貫祿을 앉아서 차지했다)고 酷評하기도 했다. 金宗直을 매우 銳利하게 批判했기 때문에 金宗直의 學統을 繼承한 士林派 에게 甚하게 攻擊당하고, 當代와 以後 朝鮮 滅亡 前까지 나타난 온갖 人身攻擊과 祕方의 原因이 된다. 그러나 許筠은 이런 誹謗에 屈服하지 않고 自身의 所信을 堂堂하게 펼친다.

許筠의 著書들은 正祖 以前까지 禁書 (禁書), 不穩書籍 으로 指定, 言及조차 금기시되었다.

科擧 及第와 官僚 生活 初盤 [ 編輯 ]

을병조천록

1592年 當時 壬辰倭亂 當時 義兵을 일으켜 싸운 功勞로 後날 宣撫 原從功臣 1等(宣武原從功臣一等)에 錄勳되었다. [4] 그러나 그가 어느 戰鬪에 出征한 功勞로 宣撫 原從功臣 1等에 錄勳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593年 (宣祖 26年) 그의 나이 25歲 때 韓半島 最初 時評論集인 《 학산初淡 》을 지었고 이듬해인 1594年 (宣祖 27年)에는 정시문과(庭試文科)의 乙科에 及第하였다. 承文院 士官(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 後 [1] (明) 使臣을 接見하는 接伴使(接伴使)로 派遣된 심희수 와 兄 許篈 에 이어 그해 4月 接伴使 로 明나라 使臣을 遂行하고 되돌아왔다. 그해 5月 다시 明나라 使臣 接見에 派遣된 遠接使 隨行員의 物望에 오르기도 했다.

바로 說書(說書)를 지냈고 얼마 뒤 鄭6品 禮曹佐郞으로 뛰어오르고 明나라에 다녀와 兵曹 實勢인 兵曹佐郞(兵曹佐郞)으로 昇進했다. [2] 1597年 3月에는 文科 重試(重試)에 壯元及第를 하여 種3품으로 昇進하였다. 重視에 合格한 官僚는 情3品 堂上官으로의 昇進(陞進)李 慣例였으나 그에게는 人事 不利益 이 加해져 種3品 職責이 附與된다.

1598年 黃海道 道士(都事)로 赴任하였다. 이때 漢城府에 있던 그의 愛妾인 妓女가 黃海道 任地로 와서 그의 수발을 들었다. 그러나 漢城府 의 妓生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彈劾을 받고 여섯 달 만에 罷職되었다. 뒤에 復職하여 春秋館記注官(春秋館記注官), 刑曹正郞 等을 지냈다. 1598年 10月 兵曹 正郞 이 되었다.

政治 活動 [ 編輯 ]

壬辰倭亂 直後 [ 編輯 ]

1599年 5月 다시 黃海道 道士로 나갔다. 그러나 그해 12月 漢城府의 妓生을 데리고 간 일로 司憲府 司諫院 에게 繼續 彈劾받고 罷職당하고 만다. 1600年 復職, 春秋館 記注官(記注官)과 世子侍講院 의 郎官과 知製敎(知製敎)를 거쳐 그해 말 長生殿(長生殿) 郎廳이 되어 의인왕후 國葬都監 (國葬都監)과 頻傳 行事에 參與하였다. 의인왕후 의 局長에 參與한 功勞로 1601年 5月, 特別히 가자(加資)되었다. [5]

1601年(宣祖 34年) 忠淸·全羅 地方의 稅金을 걷는 戰雲判官으로 赴任한다. 戰雲判官이 되었을 때는 扶安의 有名한 詩人이자 妓生인 매창 (梅窓)과 交流한다. 둘은 精神上 일에 重點을 두는 關係였다는 說과 매창이 그의 妾이었다는 說이 傳한다. 後日 許筠은 1609年 (光海君 1年) 매창에게 쓴 便紙에 “그대는 性성옹(惺惺翁)李 [6] 俗世를 떠나겠다는 約束을 어겼다고 分明히 웃을 걸세”라고 쓴다. 매창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隱居하겠다는 約束을 한 事情을 알 수 있는데, 이런 約束은 自身의 생각이 그만큼 危險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 그러나 許筠은 이 約束은 끝내 지키지 못한다.

1601年 11月 刑曹 正郞 이 되어 內職으로 되돌아왔고 1602年 兵曹 正郞이 되었다. 그해 5月, 前에 世子侍講院 으로 있을 때 종1品 大臣인 左贊成 심희수 를 侍講院의 郎官인 그가 물러가라고 했다는 理由로 司憲府 地平 윤경(尹絅)에게 彈劾받고 추고당했다.

1602年 成均館 사예(司藝), 司僕寺 情(司僕寺正)을 歷任하였으며, 同年 明나라에서 派遣되는 使臣을 맞는 名士 遠接使 이정구(李廷龜)의 從事官이 되어 明나라 外交官들을 相對하였다.

彈劾과 罷免, 復職 [ 編輯 ]

以後 私服市井 (司僕寺正)을 거쳐 1604年 (宣祖 37年) 宣撫 原從功臣 1等(宣武原從功臣一等)에 錄勳되었다. 1604年 (宣祖 37年) 7月에 成均館 全的(典籍)李 되고 같은 해 9月 遂安郡守 (遂安郡守)가 되었다. 그러나 佛敎 를 믿는다고 暗行御史 에게 다시 彈劾받아 벼슬에서 辭退하였다.

1606年 4月에 遠接使 幼根(柳根)의 推薦으로 明나라 使臣 住持番 (朱之蕃)을 迎接하는 從事官에 任命되자 從事官으로 住持番을 만나 司書六卿과 苦戰을 막힘없이 對話하며 글재주와 넓은 學識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이때 그동안 保管하던 누이 난설헌 의 詩選集을 名 使臣으로 온 住持番에게 주어 그女의 事後 18年 뒤에 中國에서 《 蘭雪軒集 》이 出刊된다. 1607年 (宣祖 40年) 相議遠征 (尙衣院正)을 거쳐 그해 봄 三陟府使 (三陟府使)로 나갔다.

1606年 明나라에 난설헌의 詩가 出刊되자 朝鮮의 文化를 明나라에 알린 功勞로 特別히 三陟府使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在職 中 부청 近處의 法堂에 出入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目擊되어 석 달이 못 되어 佛像을 모시고 念佛하고 參禪한다는 理由로 1607年 5月 司諫院 司憲府 에서 彈劾받았다. 그러나 宣祖 는 듣지 않다가 司諫院과 司憲府에서 彈劾이 繼續되자 쫓겨났다.

그해 陰曆 5月 6日 崇佛(崇佛)했다 하여 罷職되었으나 얼마 뒤 從三品 內資寺 情(內資寺正)으로 任命되었다. 1607年 7月 復職하여 內子市政 (內資寺正)李 되고 그해 私服市井 (司僕寺正)을 거쳐 12月 公州 牧師로 赴任하였으며, 《國朝詩刪》을 編纂한다. 公州 牧師로 起用되었을 때는 兩班家의 서자 무리와 孼孫(?孫)들과도 呼兄呼弟하면서 가까이 터 놓고 지냈고 또다시 파직당한 뒤에는 扶安으로 내려가 山川을 遊覽하며 妓生 계생(桂生)을 만났고 賤民 出身의 詩人 유희경(柳希慶)과도 交分을 두터이 하였다.

中國 訪問과 난설헌 文集 編纂 [ 編輯 ]

許蘭雪軒 文集 ( 1608年 刊行本)

1608年 (宣祖 41年) 使臣으로 明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누나인 난설헌 (蘭雪軒)의 詩를 明나라 文人, 作家들에게 보여주었는데 文人들은 난설헌의 作品性에 讚歎(讚嘆)하여 特別히 出刊하고 印刷하는 費用을 대주기도 하였다. 그해 광해군 이 在位에 오르자 對北 이 執權하면서 經筵官(經筵官)이 되어 競演場에 들었다. 이듬해 1609年 (光海君 1年) 行事直으로 溺死原從功臣 1等에 책록되었다. 그해 刑曹 參議 (參議)가 되고 明나라에서 國王 冊封使(冊封使)가 왔을 때 以上의(李尙毅)의 從事官이 되었다. 이해에 僉知中樞府事(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刑曹參議가 되었다. 그해 明나라에 使節團의 隨行員으로 베이징 에 가서 天主敎 의 祈禱文을 얻어 왔다.

國立中央圖書館 李 所長하고 있는 洪吉童傳 첫 쪽

그런데 歸國 後 1610年 2月 에 派遣될 千秋使 로 다시 年庚 에 다녀왔다. 그해 4月 副護軍 에 除授된 뒤 明나라에 다시 갈 千秋使 에 任命되자 病을 핑계로 여러 番 上疏를 올려 拒絶했다. 이 일로 彈劾당하고 副護軍職에서 罷職되었다. 이어 司憲府 에서 여러 番 그를 彈劾하였으나 광해군 이 이를 듣지 않았다.

1610年 10月 展示(殿試)의 對讀官(對讀官)의 한 사람이 되어 過去 答案紙를 採點하면서 自身의 조카와 조카사위를 합격시켰다는 嫌疑로 司憲府 에서 彈劾당하였다. 그러나 王이 듣지 않았으나 11月 내내 司憲府와 司諫院에서 數十 次例 彈劾받고 42日間 義禁府에 갇혀 지내다가 그해 12月 全羅北道 益山郡 함열(咸悅)로 流配됐는데 이때 許筠이 罪를 뒤집어썼다는 輿論도 있었다.

1610年 (光海君 2年) 全羅北道 益山郡 함열에 流配됐고 流配地에 간 뒤에도 兩社(兩司)를 비롯해서 재야 各處에서 그의 圍籬安置 (圍籬安置) 等을 願하는 彈劾과 非難이 繼續되었으나 그가 北人 黨員인 탓에 無事하였다. 配所에서 그는 學童들을 데려다 가르치는 한便 글을 써서 1611年 ( 광해군 3年) 文集 『惺所覆瓿藁』 64卷을 엮었고 1612年 에는 한글 小說 『 洪吉童傳 』을 著述한다. 『惺所覆瓿藁』는 當代의 勇士, 忠臣, 名詞들에 對한 人物評이 담겨 있고 『 洪吉童傳 』은 朝鮮 初 實存한 人物인 盜賊 洪吉童 을 同期(動機)로 하여 理想鄕 을 表現하였다.

許筠은 當時 『 洪吉童傳 』의 著者를 밝히지 않았으나 北人 界 人事 유몽인 이 『洪吉童傳』李 許筠의 作品이라고 外部에 알리면서 그의 作品이라는 事實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610年 5月에는 明나라의 住持番 이 그에게 便紙를 보냈는데 이 便紙의 內容이 話題가 되어 朝廷에 들기도 했다. 1612年 『洪吉童傳』을 完成한 뒤 바로 釋放되었으며, 그 뒤 몇 年間은 태인 (泰仁)에 隱居하였다. 1612年 12月 眞珠紗(陳奏使)에 任命되어 明나라에 다녀왔다.

癸丑獄事와 逆謀 論難 [ 編輯 ]

癸丑獄事 前後 [ 編輯 ]

1613年 (光海君 5年) 初 歸國하였다. 그러나 1613年 癸丑獄事 때 陳述者 名單에 言及이 되어 禍를 입을 뻔했으나 그는 明나라에 千秋使 로 다녀왔으므로 多幸히도 皮靴(避禍)하였다.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 等 名家 出身의 서자 7名이 驪州 南漢江邊에 土窟을 파고 무輪當(無倫堂)이라 명명하고 江邊七友 (江邊七友)라고 自稱하였다. [2] 許筠은 이들과 親하게 지냈지만 이들이 路上에서 强盜 等의 行動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强盜짓을 한다는 것을 官衙(官衙)에 申告하지도 않았다. 이 中 박응서 가 한 銀賞(銀商)을 殺害했다가 逮捕되는데 北人 模寫(謀士) 이이첨 이 이를 영창대군 의 外祖父 金霽南(金悌男)을 除去하려는 ‘癸丑獄事’(癸丑獄事)로 擴大했다. 殺人强盜 事件이 逆謀로 擴大된 것이다. [2] 漆書의 便 關聯者인 庶子들인 박응서, 徐羊甲 等은 그와 平素 親分이 있었다. 그中에는 그의 妻祖父 心田 의 庶子인 심우영 兄弟도 있었다. 또한 許筠의 兄 許篈 의 親舊가 이달 로 庶子 出身이었던 點까지 疑心의 對象이 되었다. 事件 以後 그는 同調하고 加擔했다고 疑心받았으나 劇的으로 危機를 謀免한다.

<光海君日記>를 보면, 連累(連累)된 김응벽이 “許筠이 金霽南 의 집에 드나들며 날마다 相議했습니다”라고 自白했다고 傳하는데 이덕일 은 後日 '實際로 이 庶子들과 親하게 지낸 許筠이 큰 恐怖를 느낀 것은 當然했다. [2] '고 봤다. 한便 7書로 指目된 庶子들 中 심우영 心田 의 庶子인데 心田의 딸이 그의 本夫人(本夫人) 安東 金 氏의 親庭어머니였다. 심우영은 그에게 서(庶) 처外三寸뻘 되는 人物이었다. 作서의 告變으로 金霽南 과 庶子들은 모두 死刑됐지만 許筠은 安全했는데 <光海君日記>를 보면, 史觀은 이 事件의 불똥이 自身에게 튀는 것을 避하려고 이이첨 에게 接近한 德分이라 한다. [2] 그러나 對北 系列에서는 그를 疑心하는 눈초리로 보게 된다.

對北黨에 入黨 [ 編輯 ]

癸丑獄事에서 平素 親交가 있던 書類 出身의 서양갑·심우영이 처형당하자 그는 本心을 숨기고 身邊의 安全을 圖謀하려고 이이첨 에게 阿附하여 對北當(大北黨)에 參與하였다. 1613年 12月 禮曹 參議 가 되었다. 禮曹參議에 任命되자 바로 司諫院 이 '사람됨이 輕薄하여 본디 幸信에 檢束이 없고 異端을 崇奉해서 名敎(名敎)에 罪를 졌다'며 罷免하고 任用하지 말 것을 建議했지만 광해군 은 이를 듣지 않고 許筠을 信賴하였다. 1614年 (光海君 6年) 行事直(行司直)을 거쳐 好調 參議 가 되었다. 1614年 8月 27日 衛星 原從功臣 2等(衛聖原從功臣二等)에 책록되었다.

1614年 12月 明나라 에 派遣되는 千秋使(千秋使)의 한 사람으로 選拔되어 中國 年庚 에 다녀왔으며, 千秋使로 갔을 때 朝鮮王 李成桂 이인임 의 아들로 記錄된 原因이 된 記錄을 入手하여 1615年 1月 朝鮮으로 보냈다. 그 뒤로도 明나라의 各處와 古書店을 다니며 珍貴한 冊과 儒敎 , 佛敎 經典을 入手하여 朝廷으로 보냈고, 광해군 은 그의 能力을 稱頌하였다. 1615年 2月에는 《학해(學海)》 《임거萬綠(林居漫錄)》을 朝鮮으로 보내고, 이어 몇 卷의 書籍을 다시 朝鮮으로 보냈다.

1615年 2月 歸國하였으며, 2月 中旬 承文院 副提調가 되었다. 그해 5月 文臣들을 相對로 한 定試 文科 에서 仁政殿이란 主題로 詩를 지었는데 首席을 차지하였다. 5月 承政院 同副承旨 가 되었다. 6月에는 前年度 千秋使로 明나라 에 갔을 때 書冊(書冊)을 많이 들여온 功勞와 宗契 辨誣使(辨誣事)에 對한 資料와 情報를 入手해서 보냈고 또한 明나라 世宗 皇帝(世宗皇帝)가 親히 지은 잠(箴)과 어필(御筆)을 求해온 功勞를 인정받아 特別히 種2품으로 가자의 命이 내려졌다. 그해 6月 嘉善大夫 로 昇進하였다.

1615年 8月 右承旨 , 左承旨 等을 지내고 그해 말 同志 兼 晉州府使(冬至兼陳奏副使)로 다시 中國에 다녀왔다. 이 두 次例의 射倖에서 그는 많은 베이징 滯留 中 明나라 學者들과 詩文으로 交流, 그의 秀麗한 文章力에 많은 明나라 文人들과 사귀게 됐다. 明나라 文人들과 사귀면서 그들을 통해 各種 書籍을 入手, 歸國할 때 《太平廣記 太平廣記》를 비롯하여 많은 冊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이 中에는 天主敎 祈禱文과 指導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흉書 問題에 連累 [ 編輯 ]

1616年 (光海君 8年) 辭職 製造(社稷提調)를 거쳐 資憲大夫 로 昇進, 刑曹判書가 되고, 그해 逆謀로 몰린 人士들 中 流竄과의 關係가 問題가 되어 파직당했으나 곧 復職했다. 그해 10月 正憲大夫 로 昇進했다. 1616年 末 眞珠紗(陳奏使) 민형남(閔馨男)李 明나라에 派遣될 때 晉州府使로 年庚 에 가 공빈 金氏 의 追崇을 建議하고 되돌아왔다. 이듬해 1617年 에는 鄭2品 議政府 左參贊 兼 禮曹 板書 에 올랐다. 그러나 胸膈 事件에 連累되어 吉州 에 流配됐다가 풀려났다.

1617年 2月 副司直(副司直)으로 降等당했고 胸膈 事件에 連累되지 않았음을 解明한다. 그해 3月 아무 關聯이 없음으로 드러나 問題는 終結된다. 그러나 그 뒤로도 繼續 이런 저런 逆謀와 흉書 事件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려 困境에 處하게 된다.

仁穆大妃 廢母論 [ 編輯 ]

1617年(光海君 9年) 末부터 許筠은 仁穆大妃 廢黜 論議에 積極的으로 앞장섰다. 仁穆大妃 廢母論에 앞장 선 것은 後日 두고두고 論難거리를 提供한다. [2] 許筠이 死刑당한 後 그의 外孫 이필진은 “仁穆大妃를 廢하자는 議論에 끼어든 것은 本心이 아니었고 奸凶(奸凶·李爾瞻)의 꾐에 빠진 것 [2] ”이라고 그를 辯護했지만, 許筠은 남의 使嗾로 보기에는 지나칠 程度로 廢妃 論議에 앞장섰다. [2] 그해 11月 行 辭職으로 폐모론에 積極 參與하였다. 甚至於 깡牌들을 모아 宮闕 뒷山에서 不溫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는데, 情況上 仁穆大妃 暗殺을 計劃한 것 같다. 이 行動은 後에 許筠 本人이 逆謀를 꾸몄다는 陋名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그가 仁穆大妃 폐모론에 積極 贊成하자 그를 좋게 보던 人士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始作했다. 比較的 그에 對한 批判을 自制하던 기자헌 조차 許筠을 非難하였고, 그의 文人이자 기자헌의 아들인 기준격 亦是 그에게 등을 돌렸다. 한便 身分制度와 序列 差別 等에 抗拒하기 위하여 庶子와 不滿階層을 糾合하여 革命 을 計劃하였으나 그의 擧事 計劃이 所聞이 나면서 外部로 擴散되었다. 이는 이이첨 , 金介屎 等이 漆書의 便 에 連累된 庶子들과 親分이 있던 許筠을 疑心하는 契機를 마련한다.

許筠은 이이첨, 정인홍 보다도 더 仁穆大妃 廢母論에 앞장섰는데, 이 때문에 北人 內에서도 廢母에 反對하는 小北의 領袖이자 領議政 기자헌 과 隨時로 摩擦을 빚었다. [2] 이 일로 廢母를 反對하던 領議政 기자헌과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廢母에 反對한 기자헌이 귀양에 處해지고 吉州로 流配되자, 그 아들 기준격은 許筠이 背後操縱한 것으로 疑心, 父親을 救하기 위해 祕密上疏를 올리고 “許筠이 逆謀를 꾸몄다”고 主張하면서 波瀾이 일어난다. 바로 許筠도 上疏를 올려 自身은 아무 關聯이 없음을 辨明하였다.

沒落과 죽음 [ 編輯 ]

彈劾과 死刑 [ 編輯 ]

1617年 12月 12日 議政府 左參贊 이 되었다가 그해 12月 26日 右參贊 이 되었다. 그러나 기준격 等은 繼續 上疏를 올려 그가 逆謀를 꾸민다고 攻擊한다. 1618年 1月 기준격은 繼續 上疏를 올려 그를 攻擊했고, 1618年 1月 左參贊이 되고 그 亦是 自身이 逆謀와 無關하다며 解明을 한다. 結局 그해 2月 右議政 한효순 等이 2品 以上의 代身들을 이끌고 許筠과 奇自獻을 推鞠하고 問題를 終結시킬 것을 請한다. 許筠도 自身을 辯護하는 맞床소를 올리는데 光海君은 웬일인지 眞相을 調査하지 않고 묻어두었다. 그 渦中에 許筠은 이이첨 과 關係가 멀어지게 된다 [2] . 이 무렵 李爾瞻의 外孫女인 世子嬪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許筠의 딸이 煬帝(世子의 後宮)로 內定된 것이다. [2] 許筠의 딸은 昭訓 이 되어 入闕하였다. 許筠에 對한 李爾瞻의 境界는 한層 强化되었고, 그를 除去하기로 祈禱한다.

그런데 李爾瞻이 許筠을 除去 對象으로 바라보는 中에 光海君 10年(1618) 8月10日 南大門에 “暴惡한 임금을 치러 河南 大將軍인 鄭아무개가 곧 온다…”는 內容의 壁西가 붙는 事件이 發生한다. 1618年 8月 南大門 檄文은 許筠의 心腹 玄應民(玄應旻)李 붙였다고 한다.

1618年 기준격 이 上疏를 올려 許筠이 王의 信任을 얻은 것을 奇貨로 叛亂을 計劃한다고 謀陷하고, 許筠이 反對 上疏를 올렸으나 許筠에게는 繼續 國文이 열렸고 그때마다 無數한 拷問이 加해졌다. 結局 許筠과 기준격을 對質 審問시킨 끝에 逆賊謀議를 하였다고 應하게 되고, 그의 心腹들과 함께 陵遲處斬 兄을 當해 生을 마감한다. [7]

最後 [ 編輯 ]

그해 司憲府 司諫院 은 繼續 許筠을 彈劾하는 上疏를 올렸고, 그해 8月 21日 司憲府 의 彈劾 上訴가 올려진 뒤 바로 파면당했다.

壁西의 作成者가 許筠이란 所聞이 돌면서 光海君은 過去 기준격의 上疏文을 鞠廳에 내려 調査하게 했다. 自身의 最後를 豫感한 許筠은 8月16日 自身의 文集인 <惺所覆瓿藁>를 딸의 집으로 옮겨 놓고 다음날 逮捕된다. [2] 그는 逃避하라는 知人들의 勸告를 拒絶하고 自身의 著書와 作品들, 누나 許蘭雪軒 의 詩文들을 모두 손수 長女의 집에 옮겼다. 그는 사위 이사성(李士星)에게 나중에 아들에게 물려주어 刊行하도록 할 것을 付託했고, 當時 어린 外孫子인 이필진 에게도 나중에 自身의 文集을 꼭 刊行해줄 것을 遺言으로 남기기도 했다.

當時의 許筠에 對한 評價는 총명하고 英發(英發)하여 능히 詩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文章과 識見에 對한 稱讚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됨에 對하여서는 輕薄하다거나 人倫道德을 어지럽히고 異端을 좋아하여 行實을 더럽혔다는 等 否定的 評價를 내리고 있다. 그해 8月 16日 逮捕되어 義禁府 로 押送된 뒤 國文을 받고 8月 24日 漢城府 에서 車裂刑을 받았다. 시집간 두 딸은 連坐되지 않았고 그의 아들들은 連坐되어 처형당한다. 그러나 다른 아들들은 下人들의 도움으로 鳥嶺 近處로 숨었다가 慶尙北道 永川 蔚山 에 숨어 살았다. 이때 그의 나이 享年 49歲였다.

그가 逮捕되자 그와 關聯된 人物이 大部分 逮捕되었고 사위 이사성 亦是 逮捕되어 國文을 當했으나 그를 別로 좋아하지 않아 親하게 지내지 않았음을 들어 劇的으로 火를 謀免하였다. 그의 조카인 許採, 虛報, 許愼 等도 義禁府 로 잡혀가 國文을 當했지만 許筠과 親하게 지내지 않았음을 들어 火를 謀免하였다. 그가 處刑된 直後에도 繼續 그와 關聯된 人物들이 義禁府 捕盜廳 에 불려다니며 供招를 當했다.

事後 [ 編輯 ]

그의 屍身은 收拾되지 못했고 後날 20世紀 初에 이르러 先山 近處에 家廟가 造成되었다.

그의 死後 緣坐制 가 適用되어 江陵에 있는 아버지 許曄 의 墓所도 剖棺斬屍 의 對象이 되었다고 한다. 以後 비 오는 날이면 許筠의 선영에는 울부짖음소리가 나, 어느 선비가 없는 子息으로 생각하라는 內容의 慰靈祭를 지낸 뒤 울음소리가 그쳤다 한다. 許筠 死後 그의 後孫들은 끊긴 것으로 알려져왔으나, 그의 後孫들 中 一部는 派가 다른 他 門中(許穆 奉禮公派)에 養子로 가거나 他人의 後孫인 것처럼 變姓名을 하고 後孫을 이어왔다. 그러다가 1980年代에 許筠의 살아남은 아들(허굉)의 直系 子孫들이 加疊을 통해 許筠의 直系 後孫임을 主張하여 오다가, 1995年 양천許氏 허추자山公派 世譜에 版圖佐郞공 11世孫(菌)派 校山公派로 숨겨진 血統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의 作品인 洪吉童傳 仁祖 反正 直前 柳夢寅 等이 自身들의 文集과 書信 等에 洪吉童傳의 著者가 許筠이라는 記錄을 남김으로써 後代에 洪吉童傳의 著者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許筠의 文集과 惺所覆瓿藁 等은 1668年 外孫子 이필진 이 刊行하여 徐徐히 알려지게 되었다.

1623年 (仁祖 1年) 仁祖 反正 以後에도 그가 北人 對北 黨員이었던 탓에 復權되지 못하였다. 正祖 때와 高宗 때 그에 對한 復權 輿論이 나타났으나 老論 의 强한 反對로 霧散되었고, 그는 大韓帝國 이 滅亡할 때까지 復權되지 못한다. 1910年 (隆熙 4年) 大韓帝國 滅亡 以後 그의 著書 洪吉童傳 과 그의 思想에 對한 硏究가 始作되었다.

思想과 活動 [ 編輯 ]

그는 自身의 文集에서 〈관론(官論)〉, 〈正論(政論)〉, 〈病論(兵論)〉, 〈遺在論(遺才論)〉等을 통해 民本思想과 國防 强化 政策 推進, 身分階級의 打破와 平等한 人材登用과 朋黨排斥論을 主張하였다.

學問 遍歷, 史上 [ 編輯 ]

그는 嫡庶差別의 不當함과 腐敗官僚를 糾彈하는 글을 여러 篇 남겨 社會批判的인 意識을 보여주었다. 그는 學론(學論)·正論(政論)·遺在論(遺才論)·호민론(豪民論)의 論說을 통해 當時 政府와 社會의 矛盾을 批判하고 改革方案을 提示했다. [8] 內政改革을 主張한 그의 理論은 遠視儒敎思想에 바탕을 둔 것으로 百姓들의 福利增進을 政治의 最終目標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人材 登用론 [ 編輯 ]

그는 嫡子와 庶子 모두에게 公平하고 均等한 機會를 附與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스승 蓀谷 이달 이 庶子로서 出世하지 못한 것이 理由라고도 하고, 許筠 自身이 再娶夫人의 所生으로 庶子들과 다를바 없는 不遇한 處地라서 이에 共感했다는 說도 있다.

思想의 自由 [ 編輯 ]

儒敎 思想에 얽매이지 않은 思想的 遍歷은 當代에도 回者化되었다. 許筠은 儒敎집안에서 태어나 留學을 工夫한 油價로서 學問의 基本을 留學에 두고 있으나 當時의 異端으로 指目되던 佛敎, 道敎와 노장思想에 對하여 思想的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이러한 思想에 關心을 갖는 것이 아니라 빠질뻔 했다고도 告白하였고, 儒敎 以外의 思想에서도 正答을 찾을 수 있다고 主張하였다. 特히, 佛敎에 對해서는 한때 出嫁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으며 佛敎의 奧妙한 眞理를 接하지 않았더라면 한平生을 헛되이 보낼 뻔하였다는 告白을 하기도 하였다. 佛敎를 믿는다는 司憲府의 彈劾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佛敎에 好感, 興味를 갖는다는 自己의 信念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詩와 便紙글 等을 통해 一部 밝혔다.

道敎思想에 對해서는 主로 그 養生술과 神仙思想에 깊은 關心을 보였으며, 隱遁思想에도 至極한 憧憬을 나타내었다. 隱遁生活의 方法에 對하여 쓴 〈한정록(閑情錄)〉等을 통해 隱遁의 實踐과 方法에 對하여 論하였다. 許筠 自身이 西學(西學)에 對하여 言及한 것은 없으나 몇몇 記錄에 依하면, 許筠이 中國에 가서 天主敎의 祈禱文을 가지고 온 것을 契機로 하늘을 섬기는 鶴을 하였으니, 이는 곧 그가 새로운 文物과 西學의 理論에 남다른 關心을 보였음을 立證한다. 一角에서는 그를 朝鮮人 最初의 天主敎人으로 보기도 한다.

죽음에 對한 疑問點 [ 編輯 ]

그의 處刑을 두고 當時 朝廷의 權臣이었던 유희분 이 罪人에 對한 綿密한 審問 없이 自白 直後 兄을 執行했다 하여 疑問을 提起하면서 작은 騷動이 일었다. 이를 두고 許筠의 處刑을 强力히 主張했던 또 다른 權臣 이이첨 이 處刑의 正當性과 許筠의 逆謀 嫌疑를 强調하면서 이 論難은 가라앉았으나, 許筠이 陵遲處斬되던 날 刑場에서 罪案에 署名하기를 拒否하였다는 證言이 있어 疑問의 餘地를 남겨두고 있다.

김석주


또한 實錄은 '王 亦是 許筠의 逆謀와 關聯하여 事實 關係를 더 把握하려고 하였으나 權臣들의 强壓으로 兄을 執行할 수밖에 없었다.'고 記錄하고 있다. 더군다나 許筠과 함께 陵遲處斬刑을 當한 金鎧는 1678年( 肅宗 4年) '決定的인 罪案이 없다'는 當時 都承旨였던 김석주 의 奏請에 따라 身元되면서 許筠의 罪案의 存在 與否 自體에 對한 疑問을 낳고 있다. 이러한 疑問點 때문에 그의 下獄부터 兄 執行의 瞬間까지를 小說化하거나 드라마로 製作하는 等 많은 興味거리度 낳고 있다.

1623年 3月 仁祖反正 以後 광해군 時節의 無數한 獄事로 犧牲된 사람들은 거의 復權과 추숭이 이루어졌으나, 許筠만은 唯一하게 大韓帝國이 亡하던 時點까지 復權되지 않고, 逆賊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自身의 處刑을 豫感하고 自身의 文集 《惺所覆瓿藁》를 自身의 外家에 祕密裏에 依託했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그의 思想과 學問을 들여다볼 수 있는 貴重한 資料가 되어 있다. 實際 그 後 國家의 變亂을 企圖했다는 罪目으로 斬首刑을 當했다. 逆賊으로 兄을 當한 까닭에 그의 著作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성수시화 惺?詩話〉·〈학산初淡〉(鶴山樵談)·〈惺所覆瓿藁〉 等 一部만이 남아 20世紀까지 傳한다. [8]

죽음이 臨迫해옴을 豫感한 許筠은 1617年 말 맏사위人 이사성 (李士星)에게 自身이 蒐集한 4000餘卷의 藏書도 맏사위 이사성에게 보낸다. [9] 또한 自己 文集을 整理해 큰사위에게 보낸다. 許筠의 文集은 外孫子이자 이사성의 아들인 이필진에게 傳해졌고 이필진의 墓誌銘에 許氏의 冊이라는 이름으로 傳해지게 되었다. [9]

飮食 評論 [ 編輯 ]

屠門大嚼 의 一部

許筠은 韓國 最初의 飮食 評論서도 남겼다. 그가 쓴 우리나라 最初의 飮食 品評서 '屠門大嚼'에 關한 內容으로 꾸며진다. [10] 이 冊에는 許筠이 40 平生 먹어본 朝鮮 最高의 맛이 記錄돼 있다.

3日 동안 입에서 香이 가시지 않는다는 江陵의 防風粥, 回 한 젓가락에 돌아갈 곳을 잊게 한다는 韓江의 숭어와 웅어 等 177가지 別味에 對한 評價가 들어있다. 製作陣은 "이 冊에 登場하는 特産物 中에는 現在 사라졌거나 食材料로 利用되지 않는 것들도 많다"며 "朝鮮 中期 우리 飮食 文化의 實相을 알려주는 貴重한 資料"라고 말했다. [10]

評價 [ 編輯 ]

유몽인 은 그가 "逆賊 許筠은 총명하고 才氣가 뛰어났다. [2] 고 評價했다. 그가 지은 小說 《洪吉童傳》은 社會制度의 矛盾을 批判한 作品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許筠이 進步 敵人 宗敎人 이어서, 賤視 받던 佛敎 는 勿論 天主敎會 까지 信奉하였다는 評價도 있다. [11] 한便 奇人이었다는 批判도 있다.

文集에 실려 있는 그의 漢詩는 많지는 않지만 國內外로부터 品格이 높고 詩語가 精巧하다는 評을 받는다. 始華(詩話)에 실려 있는 그의 文學批評은 當代에는 勿論 現在에도 文學에 對한 眼目을 認定받고 있다. [8]

사람됨에 對하여서는 輕薄하다거나 人倫道德을 어지럽히고 異端을 좋아하여 行實을 더럽혔다는 等 否定的 評價를 내리고 있다. 그의 生涯를 통해볼 때 몇 次例에 걸친 罷職의 理由가 大槪 그러한 否定的 見解를 代辯해주고 있다. [12]

許筠의 社會批判的인 意識과 抑佛崇儒社會에서의 佛敎 崇尙, 格에 얽매이지 않는 行動 等으로 仁祖反正 뒤에도 復權되지 않았다. 洪吉童傳 이 許筠의 作品이라고 알려진 것도 朝鮮 末期 甲午更張 以後부터였다. [13]

家族 [ 編輯 ]

許筠이 처형당할 當時 이미 出嫁한 두 딸은 連坐되지 않았다. 그밖에 이福 兄 許筬 과 親兄 許篈 의 아들들 亦是 連坐되지 않는다. 同人 의 招待 黨首인 성암 김효원 과는 이中 姻戚이 된다. 김효원 은 그의 後妻의 親庭아버지인데 그의 兄 許筬 의 딸이 김효원 의 아들 김극件 의 夫人이 된다. 김효원 의 아들 김극건은 그와 妻男 妹夫間이면서 조카사위-妻三寸間인 이中 姻戚關係를 形成한다.

그의 아들들은 처형당했고, 허굉 等 一部만이 奇跡的으로 숨어서 後嗣를 이었다. 또한 이사성 에게 시집간 큰딸, 광해군 의 世子인 廢世子 異質 의 後宮인 昭訓으로 冊封된 딸, 의창군 에게 시집간 異服兄 허성의 딸은 禍를 면하였다.

  • 祖父 : 虛汗 (許澣)
  • 조某 : 昌寧成氏(昌寧成氏) - 郡守 性戱(成熹)의 딸
    • 伯父 : 허구(許?)
    • 아버지 : 許曄 (許曄) - 徐坰德 의 文人. 慶尙道 觀察使. [14]
    • 全貌 : 淸州韓氏(淸州韓氏) - 서평군 肅唱(叔昌)의 딸
      • 이福 兄 : 許筬 (許筬, 1548年 - 1612年 )
        • 조카 : 虛實(許實)
        • 조카 : 虛儀(許宜)
        • 조카 : 虛報(許)
        • 조카 : 許政(許?)
        • 조카딸 : 心兪(沈愉)에게 出家
        • 조카딸 : 紅纓(洪榮)에게 出家
        • 조카딸 : 박홍도(朴弘道)에게 出家
        • 조카딸 : 의창군 (義昌君)에게 出家
      • 異腹 누나 : 박순원(朴舜元)에게 出家
      • 異腹 누나 : 우성전 (禹性傳, 1542年 ~ 1593年 )에게 出家
    • 生母 : 江陵 金氏(江陵金氏) - 禮曹參判 광철(光轍)의 딸
      • 同腹兄 : 許篈 (許? [15] , 1551年 - 1588年 )
        • 조카 : 許採(許寀)
        • 조카 : 虛像(許?+?)
        • 조카딸 : 김극件(金克鍵)에게 出家
      • 冬服누나 : 허초희 (許楚姬, 1563年 - 1589年 ) 號(號) 난설헌(蘭雪軒)
      • 妹兄 : 김성립 (金誠立)
        • 조카딸 : 金氏(金氏)
        • 조카 : 김희윤(金喜胤)
      • 前妻 : 政府인 安東金氏(安東金氏, 1571年 ~ 1592年 8月 16日 ( 陰曆 7月 10日 [16] )), 道士 김대섭(金大涉)의 딸
        • 아들: 腰絶 (1592 - 1592)
        • 아들: 腰絶 (? - 1618)
        • 長女 : 이사성(李士星)에게 出家
          • 外孫子 : 이필진(李必進, 1610~1671)
        • 딸 : 양천許氏(陽川許氏)
      • 後妻 : 政府인 先山金氏(善山金氏), 성암(省菴) 김효원 (金孝元)의 딸
      • 첩 : 金氏(金氏)
      • 첩 : 송성옥(宋成玉, 良民) - 松翠臺(宋就大)의 딸
      • 첩 : 秋섬(秋蟾), 玄應民(玄應旻) 等과 姦通하였다.
      • 첩 : 玉梅(玉梅)

許筠의 異服兄인 許筬 의 사위가 宣祖와 인빈 金氏 小生의 의창군 (義昌君)이다. [2] 人組 는 의창군의 兄 정원군 의 長男이다.

許浚, 허자, 허잠과의 關係 [ 編輯 ]

許浚 , 許磁 , 許穆 , 허적 等은 그의 먼 親族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許筠의 5代祖 虛秋(許樞)의 兄 虛費(許?)의 後孫들이다.

虛費의 次男 虛暈(許薰)의 孫子가 許磁 이고, 許穆 은 5代孫이다. 虛費의 3男 허지(許芝)의 孫子 虛論의 庶子는 東醫寶鑑 의 著者 許浚 이다. 虛費의 넷째 아들 허형의 曾孫이 허잠 이고, 5代孫이 허적 이다.

許磁 는 8寸, 許浚 은 10寸, 허잠 은 10寸으로, 10寸 以內를 親族으로 看做하고 12寸, 14村에게도 緣坐制를 適用하는 朝鮮 時代에는 比較的 가까운 親戚에 屬했다.

關聯 作品 [ 編輯 ]

드라마 [ 編輯 ]

映畫 [ 編輯 ]

著書와 作品 [ 編輯 ]

著書 [ 編輯 ]

洪吉童傳
  • 洪吉童傳
  • 동국명산동天誅해기 (東國名山洞天註解記)》
  • 屠門大嚼 (屠門大嚼)》
  • 《남궁두展((南宮斗傳)》
  • 《遺在論》
  • 惺所覆瓿藁 (惺所覆?藁)》
  • 《학산初淡(鶴山樵談)》
  • 《國朝詩刪(國朝詩刪)》
  • 《한정록(閑情錄)》
  • 《교산시화(蛟山詩話)》
  • 《성수시화(惺?詩話)》
  • 《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


평론서 [ 編輯 ]

  • 《告示線 古詩選》
  • 《死體聖堂 四體盛唐》
  • 《唐詩選 唐詩選》
  • 《송오가詩抄 宋五家詩抄》
  • 《名사가시선 明四家詩選》

小說 [ 編輯 ]

  • 〈嚴處事前〉
  • 〈손곡산인전〉
  • 〈壯山인전〉
  • 〈長生殿〉
  • 〈남궁선생전〉

許筠文學作家賞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許筠:Daum
  2. 正말 율도국(栗島國)을 세우려 했는가 - 한겨레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007年05月17日
  3. 이이화, 《그대는 敵인가 同志인가》 (김영사, 2009) 50페이지
  4. 宣撫原從功臣 錄券
  5. 正三品 通政大夫(通政大夫) 以上의 品階나 그런 品階를 올리던 일. 朝鮮朝에, 任期가 찼거나 勤務 成績이 좋은 官員의 品階가 올라가다. 王의 卽位나 王子의 誕生과 같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 있거나 叛亂을 平定하는 일이 있을 때에 主로 行하였다.
  6. 聖所(惺所)
  7. “許筠의 生涯” . 許筠,許蘭雪軒煽揚事業會. 2016年 6月 2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10月 27日에 確認함 .  
  8. 다음 百科事典
  9. 東亞닷컴::週刊東亞
  10. '洪吉童' 쓴 許筠은 飮食 評論家였다 朝鮮日報 2008年 9月 12日子
  11. 韓國事前 48回, 朝鮮의 自由主義者 革命을 꿈꾸다 - 許筠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2. 이응백·김원경·김선풍 外, 《國語國文學資料事前》(韓國事前 硏究士, 2002)
  13. 甲午更張 以前까지 洪吉童傳은 作者 未詳, 著者 未詳으로 알려져왔고, 許筠이 지었을 것이라는 言及이 있었으나 意圖的으로 言及되지 않았다. 甲午更張 以後부터 洪吉童傳이 許筠의 作品일 것이라는 言及이 나타나기 始作한다.
  14. 韓國金石文 綜合英情報시스템
  15. 韓國歷代人物綜合情報시스템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6. 許筠, 『惺所覆瓿藁』 卷15, 「文賦」12, 亡妻 叔父인 金氏의 行長

關聯 書籍 [ 編輯 ]

  • 이街園, 《儒敎半島 許筠》(연세대학교出版部, 2000)
  •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 (들녘, 1998)
  • 박은봉, 《韓國史 100 場面》 (嘉藍企劃, 1994)
  • 이이화, 許筠의 생각 (뿌리깊은 나무, 1980)
  • 金東旭, 許筠硏究(새文士, 1981)

外部 링크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兩班文化의 隆盛〉"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