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蘭雪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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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蘭雪軒
許蘭雪軒
허난설헌 표준영정(보물)
許蘭雪軒 標準影幀(寶物)
身上情報
本名 허초희(許楚姬)  · 虛옥혜(許玉惠)
別稱 號:난설헌(蘭雪軒)·難設齋(蘭雪齋)
者:景樊(景樊)
出生 1563年
朝鮮 江原道 江陵部 초당동
死亡 1589年 3月 19日 (27歲)
朝鮮 漢城府
職業 文人, 詩人, 作家, 畫家
國籍 朝鮮
學歷 漢學 數學
장르 限時 , 時調 , 書畫
分野 詩文學, 書畫
父母 許曄 (簿), 江陵 金氏 夫人(某)
配偶者 安東金氏 김성립
子女 1男 1女(腰絶)
親戚 兄弟 許筠 , 許筬 , 許篈, 異腹 언니 許氏, 兄夫 박순원 , 異腹 언니 許氏, 兄夫 우성전 , 三寸 虛構 , 許浚 (11村숙)
主要 作品
影響
웹사이트 江陵 洪吉童 財團

난설헌 許氏 (蘭雪軒許氏, 1563年 ~ 1589年 3月 19日 )는 朝鮮 中期의 詩人, 作家, 畫家이다. 本名은 초희 (楚姬) [1] 로, 다른 이름은 옥혜(玉惠)이다. 號는 난설헌(蘭雪軒), 難設齋(蘭雪齋)이고, 字는 景樊(景樊)이다. 本貫은 陽川 (陽川)이다.

李達(李達)에게 詩와 學問을 배워 天才的인 詩才(詩才)를 發揮하였다. 1577年 (宣祖 10年) 김성립 (金誠立)과 結婚했으나 結婚 生活은 圓滿하지 못했다고 한다. 自身의 不幸한 處地를 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筆致와 獨特한 感想을 노래했으며, 哀傷的 詩風의 特有의 詩 世界를 이룩하였다. [2]

朝鮮 中期의 代表的인 文人의 한사람이며, 300餘 首의 市와 其他 散文, 隨筆 等을 남겼으며 213修 程度가 現在 傳한다. 書藝와 그림에도 能했다. 男便 김성립 과 媤宅과의 不和와 子女의 죽음과 遺産 等 연이은 不幸을 겪으면서도 많은 作品을 남겼다. 1608年 (宣祖 41年) 男동생 許筠 (許筠)李 그女의 文集을 明나라 에서 出刊함으로써 그女의 名聲이 漸次 널리 알려졌다. 事後 男便 김성립 李朝 參判 追贈 되면서 그 亦是 貞夫人 (貞夫人)으로 追贈 된다.

事後, 作品 一部를 동생 許筠 明나라 의 詩人인 住持番 (朱之蕃)에게 주어 中國 에서 詩集 《蘭雪軒集》(蘭雪軒集)李 刊行되어 激讚을 받았고, 1711年 분다이야 지로 (文台屋次?)에 依해 日本 에서도 刊行, 愛誦되어 當代의 世界的인 女性 詩人으로써 名聲을 떨치게 되었다. [2] 1612年 에는 炊事員窓 이란 이름으로 美刊行 詩集이 發刊되기도 했다. 當代에는 姑婦葛藤과 男便과의 不和 等으로 否定的인 評價를 받았으나, 事後 朝鮮 後期에 이르러 그女의 詩들의 作品成果 藝術性을 인정받게 되었다. 秒當 許曄 의 딸로 許篈 의 女同生이자 校山 許筠 의 親누나이며, 許筬 의 이福 女同生이다. 御醫 許浚 은 그의 11寸 叔父뻘이었다. 蓀谷 이달 (李達)의 文人이다. 江原道 出身.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家計(家戒) 背景 [ 編輯 ]

江陵 草堂洞에 取値韓 許蘭雪軒 生家

1563年 江原道 江陵 에서 同知中樞府事를 지낸 許曄 (許曄)과 그의 夫人 江陵 金氏 (江陵金氏) 김광철(金光轍)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本貫은 陽川(陽川)으로 本名은 초희(楚姬)이고 字는 景樊(景樊)이며 號는 난설헌이다. 許筬 은 이福 오빠였고, 이福 언니 2名과, 親오빠 許篈 (許?)이 있었다. 또한 洪吉童傳 의 著者 校山 許筠 (許筠)은 그의 親 男동생이었다. 後日 동생인 許筠 明나라 에 난설헌의 詩稿를 編纂할 때 記錄되어 이름과 自家 傳하는 女性으로, 當時 女性 中 이름과 自家 傳하는 몇안되는 人物이기도 하다.

本名은 초희이고, 다른 이름은 虛옥혜(許玉惠)였다. 난설헌은 그의 號인데 女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朝鮮 時代의 慣例에 따라 그는 許蘭雪軒, 허난設齋, 난설헌 許氏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버지 許曄 이 첫 夫人 淸州韓氏(淸州韓氏)에게서 許筬 (許筬)과 두 딸을 낳고 死別한 뒤, 다시 江陵金氏 김광철(金光轍)의 딸을 再娶로 삼아 妻家가 있던 江原道 江陵 에서 許篈 , 초희, 許筠 3男妹를 두었다.

그밖에 宣祖 때의 有名한 議官인 語의 許浚 이 그의 먼 親族으로 11寸 아저씨뻘이었다.

幼年期와 數學 [ 編輯 ]

일찍부터 그女는 神童이라는 말을 들을 程度로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아름다운 容貌와 天稟이 뛰어났다. [2]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許蘭雪軒은 記憶力이 좋고 어린 나이에도 을 잘 써서 家族들을 놀라게 했다. 그女의 나이 8歲에 〈廣寒殿白玉樓上樑文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等 神童이라는 評을 들었다. 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許曄 은 直接 글을 가르치고 書藝와 그림도 가르쳤다. 許曄 徐坰德 李滉 의 文人으로 그가 徐坰德 의 門下에서 배운 道學的 思想이 난설헌과 許筠 男妹에게도 影響을 주었다.

女同生의 才能을 아깝게 여긴 오빠 許篈 의 周旋으로 男동생 許筠 이 許筬, 虛封과 平素 親交가 있었던 中인 詩人 蓀谷 이달(李達)에게 와 글을 배울 때 그女도 함께 글과 詩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그림에도 뛰어나 여러 作品을 남기기도 했다. 以後 그는 字號를 난설헌 또는 難設齋라 하였다.

不幸한 結婚 生活 [ 編輯 ]

結婚 生活 初盤 [ 編輯 ]

許蘭雪軒 作 墨詔度

1577年 15歲 무렵 집안의 周旋으로 安東金氏(安東金氏) 김성립 (金誠立)과 婚姻하였는데, 圓滿한 夫婦가 되지 못하였다. 그女의 詩재주와 글재주가 뛰어나자 男便 김성립 은 그女를 避하였고 媤어머니의 驅迫에 시달렸다. 그 뒤 男便은 及第한 뒤 官職에 나갔으나, 種9品 弘文館 咀嚼에 머물렀고 家庭의 즐거움보다 路柳牆花(路柳墻花)의 風流를 즐겼다. [3]

男便 김성립과 親舊들이 書堂에서 工夫하고 있었다. 이때 親舊 中 누군가가 난설헌에게 김성립 이 妓生집에서 술을 먹고 있다고 난설헌에게 傳했다. 이에 난설헌은 按酒와 술을 보내면서 詩(詩)를 한 句節 써보냈다. "郞君子時務심자, 同接하인종半間 (?君自是無心者,同接何人縱半間)" 이는 '郞君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工夫하는 이는 어찌된 사람이길레 離間질을 시키는가.'라고 했던 것이다. 便紙를 본 김성립 의 親舊들은 그女의 글재주에 歎服했다 한다.

한番은 男便 김성립이 書堂 學生들이나 過去에 應試하는 儒生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인 接(接) 모임에 간다 하고 妓生집에 갔다. 許蘭雪軒은 男便에게 다음과 같은 便紙를 보냈다.

古之接有才(高止接遺在) / 옛날의 接(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今之接無才(禁止蝶舞再) / 오늘의 接(接)은 재주(才)가 없다.


이 便紙에서 오늘의 接(接)에는 再(才)가 없다, 卽 裁可 빠진 結果 첩(妾, 女子)만 남아 있다며 男便에 直言했다 한다.

媤집살이와 葛藤 [ 編輯 ]

男便의 바람氣 外에도 媤어머니와의 繼續된 葛藤 亦是 그女를 괴롭혔다. 姑婦間에 不和로 媤어머니의 虐待와 嫉視 속에 살았으며, 1580年 (宣祖 13年) 아버지 許曄 이 客死한 以後 아들과 딸을 連이어 病으로 잃었다.

哭子 ( 曲子 )
(아들 딸 여의고서)

去年喪愛女 ( 거年喪애女 ) 今年喪愛子 ( 今年相哀子 )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哀哀廣陵土 ( 哀哀광陵土 ) 雙墳相對起 ( 쌍분상대기 )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蕭蕭白楊風 ( 小소백洋風 ) 鬼火明松楸 ( 歸化名松楸 )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紙錢招汝魄 ( 지全燒餘白 ) 玄酒奠汝丘 ( 縣主戰餘具 ) (소지 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冷水를 부어놓으니)
應知弟兄魂 ( 응지劑形魂 ) 夜夜相追遊 ( 夜夜상추油 )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놀 테지)
縱有腹中孩 ( 從遊卜重해 ) 安可冀長成 ( 安家期將星 )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 한들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浪吟黃臺詞 ( 朗吟黃大使 ) 血泣悲呑聲 ( 穴邑非彈性 ) (부질없이 黃大使 읊조리면서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不幸한 自身의 處地를 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筆致와 獨特한 感想을 노래했으며, 哀傷的 詩風의 特有의 詩 世界를 이룩하였다. [2] 그러나 不幸은 繼續되어 곧 妊娠中이던 뱃속의 아이까지 社傘下였다. 그리고 男便 김성립 은 繼續 밖으로 겉돌았다. 또한 어머니 金氏 亦是 客死하였고, 동생 許筠 도 귀양가고 말았다. 時 재주와 文明은 當代에도 알려졌으나 男便을 기다리는 時 조차도 淫亂하다며 저評價받았다. 朝鮮 封建社會의 矛盾과 잇달은 家庭의 慘禍로, 그의 詩 213修 가운데 俗世를 떠나고 싶은 新鮮市價 128首나 되었다.

生涯 後半 [ 編輯 ]

오빠 許篈 이 栗谷 李珥 를 誹謗하다가 邊方으로 귀양가고, 동생인 許筠 마저 귀양가는 等 悲劇의 連續으로 삶의 意欲을 잃고 冊과 먹(墨)으로 시름을 달랬다. 1589年 初 그女의 나이 27歲에 아무런 甁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遺言과 비슷한 詩를 남겼다 한다.

今年乃三九之數 / 今年이 바로 3·9首에 該當되니

今日霜墮紅 / 오늘 蓮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또한 이런 詩를 남기기도 했다.

碧海浸瑤海 /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 푸른 鸞새는 彩色 鸞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 芙蓉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 달빛 署理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그림에도 能하여 風景畫와 水墨淡彩畫, 蘭草火 等을 남겼다.

許蘭雪軒은 죽기 直前 房 안에 가득했던 自身의 作品들을 모두 燒却시켰다. [4] 그의 詩와 作品들은 親庭집에 있었는데, 自身의 作品을 訴却下라 名했으나 그의 詩才를 아깝게 여긴 許筠 이 이를 保管했다고도 한다. 오늘날 傳해지는 許蘭雪軒의 作品 大部分은 그女가 죽고 난 後 許筠 에 依해 世上에 알려지게 되었다. [4]

1589年 (宣祖 22年) 3月 19日 漢城 自宅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死亡한다. 死因은 未詳이었다. 그가 죽자 男동생 許筠 은 그를 그리워하며 追慕하는 詩 韓脩를 남겼다.

玉(玉)李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 平生 不幸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色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苛酷하게 罰주고, 速히 빼앗아 가는가?

거문고는 멀리 든 채 켜지도 못하고
좋은 飮食 있어도 맛보지 못하였네
난설헌의 寢室은 孤獨만이 넘치고
蘭草도 싹이 났건만 서리 맞아 꺾였네

하늘로 돌아가 便히 쉬기를
뜬 世上 한瞬間 왔던 것이 슬프기만 하다.
忽然히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니
한 歲月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구나

著書로는 《蘭雪軒集》이 있고, 國漢文歌詞 閨怨歌(閨怨歌)와 鳳仙花가(鳳仙花歌)가 있다. 後日 그의 男便 김성립 壬辰倭亂 때 戰死하고 嘉善大夫 李朝 參判 追贈 되면서 그 亦是 追贈 例兼에 따라 貞夫人 (貞夫人)으로 追贈된다. 死亡當時 그의 나이 享年 27歲였다.

詩文集 刊行 [ 編輯 ]

作品으로는 時에 '유선시', '빈女音', '曲子', '網禪要', '動線요', '犬興' 等 142首가 있고, 歌詞에 '怨婦詞', '鳳仙花歌' 等이 現在 傳한다. 死後 屍身은 京畿道 光州市 초월읍 지월리 산29의 5番地에 安葬되었다가 後日 現 河南市 로 移葬되었다. 그의 作品은 1608年 동생 許筠 明나라 에 使臣으로 가서 明나라 作家들에게 보인 뒤, 그 재주에 歎服한 明나라 官吏들의 周旋으로 費用을 支援받아 出刊하여 朝鮮 에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作品 一部를 동생 許筠 明나라 詩人 住持番 에게 주어 中國 에서 詩集 《蘭雪軒集》이 刊行되어 알려지면서 激讚을 받았다. [2] 한便 1711年 에는 日本 에도 紹介되어 分다이야地로(文台屋次?)가 그女의 詩를 刊行, 한때 愛誦되기도 하였다.

姑婦 葛藤과 男便과의 不和로 當代의 評價는 否定的이었다. 그러나 朝鮮 後期 士大夫 知識人들 사이에서도 再評價되어 그女를 閨房의 唯一한 詩人이자 뛰어난 天才로 認定하기 始作했으며, 英祖 , 正祖 以後에 中人과 平民 等도 文學과 時調 作詩 等의 活動에 參與하면서 作品成果 天才性에 對한 評價가 나타나기 始作하였다.

事後 [ 編輯 ]

事後 明나라 에서 刊行된 詩集 《 炊事員窓

그 뒤 壬辰倭亂 許筠 광해군 末年 獄事당하면서 잊혀졌다가, 1940年 무렵 小說家 月灘 박종화 가 그女의 市와 作品性을 評價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2000年 9月 에는 그의 詩作品 168篇을 모아 靑 萬曆 40年( 1612年 )에 中國에서 刊行한 詩集 ≪炊事員窓≫(聚沙元倡)李 새롭게 發掘됐다. ≪炊事員窓≫은 中國 안후이省 (安徽省) 出身 文人인 半指港 (潘之恒, 1556~1622)의 文集 『矜肆』(亘史)에 1冊으로 收錄되어 들어있었다. 이 詩集에는 許蘭雪軒의 散文 글 1篇도 들어있었는데, 當時 中國 난징大學校 博士課程 留學生인 金英淑이 처음 發見했고 韓中文化交流社 專攻인 順天鄕大 中文學科 敎授 박현규가 臺灣 故宮博物館에 所藏中이던 이 所藏品을 精密分析해 韓國 學界에 紹介하여 알려졌다. 그동안 炊事원창은 中國 學界에서도 好文解(胡文楷)가 1957年 刊行한 『歷代父女咀嚼高(歷代婦女著作考』라는 冊에 이름만 言及되었을 뿐, 失傳된 狀態였다.≪취사원창≫에 나타난 난설헌 市는 五言古詩 14篇, 七言古詩 11篇, 五言律詩 6篇, 七言律詩 14篇, 五言絶句 20篇, 七言絶句 103篇이며 散文 1篇은 그가 8歲 때 지었다는 <白玉樓上樑文>(白玉樓上梁文)이다.

처음 세운 碑石은 失傳되었으나 大韓帝國 滅亡 以後 다시 세워졌다. 새 碑石은 李崇寧(李崇寧) 等에 依해 烏石으로 세웠으며, 前面에는 李崇寧이 지은 '贈呈否認양천許氏至妙'(贈貞夫人陽川許氏之墓)라는 鼻紋(碑文)이 새겨져 있다.

許蘭雪軒墓 》는 京畿道 光州市 초월면 지월리 산 29-5에 있다. 現在의 位置에서 約 500m 右側에 있었으나 1985年 現 位置로 移轉되었다. 文人石을 除外한 墓碑·長明燈(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等)·床石·望柱石·둘레石은 近來에 만들어졌다. 墓碑의 碑文은 李崇寧이 지은 것이며, 墓의 右側에는 1985年 全國市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是非(詩碑)가 서있다. 是非에는 許蘭雪軒의 曲子視(哭子詩)가 새겨져 있으며 詩의 對象인 두 子女의 무덤이 난설헌墓 左側 前面에 나란히 있다. 1986年 5月 7日 京畿道의 記念物 第90號로 指定되었다.

年譜 및 作品 [ 編輯 ]

許蘭雪軒 文集 ( 1608年 刊行本)
  • 1563年 明宗 18年 江陵 秒當 生家에서 當代의 碩學인 秒當 許曄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 1570年 宣祖 3年, 8歲 때 '廣寒殿白玉樓 上樑文'을 지었다.
  • 1577年 宣祖 10年, 15歲 때 安東金氏 家門의 김성립 에게 出嫁를 하게 된다.
  • 1580年 宣祖 13年, 18歲 때 아버지 이준영 이 尙州에서 客死했다.
  • 1582年 宣祖 15年, 20歲 때 前 해 1579年 딸을 잃고나서 또한 아들 박진우 을 잃는다. 曲子를 子息을 잃은 슬픔을 애닳게 그린 詩이다.
  • 1583年 宣祖 16年, 21歲 때 둘째 오빠 許篈이 10萬養兵說을 主張한 李珥 를 彈劾했다가 귀양을 가게 된다.
  • 1588年 宣祖 21年, 26歲 때 둘째 오빠 許篈 이 金剛山에서 客死한다.
  • 1589年 宣祖 22年, 27歲의 나이로, 世上을 떠났다. 京畿道 廣州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묻히게 된다.
  • 1589年 宣祖 22年, 男便 김성립이 增廣文科에 兵科로 及第하여 南陽 洪氏 와 再婚한다.
  • 1590年 宣祖 23年, 동생 許筠 이 親庭에 있던 난설헌의 詩를 모아 《蘭雪軒集》 草稿를 만들고 류성룡 에게 序文을 받았다.
  • 1592年 宣祖 25年, 男便 김성립이 壬辰倭亂 에 參加하여 戰死한다.
  • 1598年 宣祖 31年, 許筠이 丁酉再亂 때 遠征나온 明나라 오명제에게 난설헌의 詩 200餘篇을 傳해주어 이 詩가 明나라에서 編纂한 《朝鮮視線》, 《列朝視線》 等에 실렸다.
  • 1606年 宣祖 39年, 許筠이 明나라 使臣 住持番, 양유년 等에게 난설헌의 詩를 傳해주어 《蘭雪軒集》李 明나라에서 刊行되었다.
  • 1607年 宣祖 40年, 4月 許筠이 《蘭雪軒集》을 木版本으로 出版하였다.
  • 1711年 日本에서 분다이야 지爐베이 에 依해 《蘭雪軒集》奸行. [5]

主要 作品 [ 編輯 ]

著書 [ 編輯 ]

  • 《蘭雪軒集》
  • 《炊事員窓》

그림 [ 編輯 ]

  • 《앙간비금도》
  • 《墨詔度》
  • 《芍藥島》

난설헌詩(蘭雪軒詩) [ 編輯 ]

  • 五言古詩에는 少年行(少年行), 甘雨死守(感遇四首), 曲子(哭子), 犬興팔수(遣興八首), 基夏穀(寄荷谷) 等 總 15首의 詩가 있다.
  • 七言古詩는 總 여덟 篇으로 動線요(洞仙謠), 염지鳳仙花가(梁指鳳仙花歌), 網禪要(望仙謠), 상현요(湘絃謠), 社時事死守(四時詞四首)
  • 五言律詩는 總 여덟 篇으로 出새曲履修(出塞曲二首), 孝異議山體 履修(效李義山體二首), 孝心亞遲滯 履修(效沈亞之體 二首), 妓女半(寄女伴), 松下穀賊甲山(送荷谷謫甲山) 等이 있다.
  • 七言律詩는 總 13篇으로 春日儒會(春日有懷), 茶中氏견성암韻 履修( 次仲氏見星庵韻 二首), 숙자守宮贈與管(宿慈壽宮贈女冠), 몽作(夢作), 茶中氏高怨望고대운 死守(次仲氏高原望高臺韻 四首), 송宮人入島(送宮人入道), 제心盟조중연風雨도(題沈孟釣中溟風雨圖), 皇帝類似天壇(皇帝有事天壇), 次孫來韓북리韻(次孫內翰北里韻) 等이 있다.

그 外 五言絶句 24首와 七言節수 總 142區가 있다. [6]

作品 世界 [ 編輯 ]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와 親筆
동생의 才能을 알아본 오빠의 配慮로 글을 배웠다. 어른이 되었을 때 가난한 집 아씨는 熱心히 옷을 만들어도 그 옷의 主人이 되지 못한다면서 
社會
의 不平等을 批評하는 社會批評, 
道敎
的인 價値觀等 다양한 價値觀을 表現, 時人으로서의 才能을 보였다. 그래서 歷史學者 
이덕일
은 許蘭雪軒의 詩를 賃金勞動者는 그가 生産하는 所有物을 갖지 못한다는 
맑스
의 《
疏外論
》과 比較할 程度로 許蘭雪軒의 才能을 極讚하였다.물론 許蘭雪軒은 文人으로서의 知性으로,맑스는 
社會學
者로서의 知性으로 勞動者의 疏外를 말한 것이다.
[7]

하지만 아버지가 病에 걸려 서울로 올라오다 尙州 客觀에서 죽었으며, 오빠 許篈 栗谷 李珥 를 彈劾했다는 理由로 귀양 갔다가 流配가 풀린 뒤에도 서울에 돌아오지 못하고 放浪하다 金剛山 近方에서 죽고, 어머니가 全羅道 鎭山에서 旅行하다가 消化不良 으로 客死했으며, 아들과 딸을 일찍 잃고, 죽기 얼마 前에는 뱃속의 아기까지 잃는 等 不幸한 일도 많이 겪었다. 많은 作品을 生前에 태워버렸으나, 世上을 떠난 後 동생 許筠 이 以前에 베껴 놓은 것과 記憶에 남은 것을 모아 그女의 詩를 《蘭雪軒集》로 펴내 只今까지 傳한다.

家族 關係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기타 [ 編輯 ]

女性運動家 김신명숙 은 許蘭雪軒을 現代 女性의 모델에 적합한 人物이라 評價하였다. 그에 依하면 "許蘭雪軒은 살려야 할 歷史的인 人物이다. 賢母良妻의 銓衡 申師任堂 은 이제 許蘭雪軒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 韓國的 女性主義 者가 없는 狀況에서 韓國籍 모델을 開發해야 한다 [9] "고 主張하였다.

그에 依하면 "時代가 바뀌면 그 時代가 要求하는 歷史的인 人物도 바뀐다. 朝鮮 時代로 局限시켜 보면 女性들의 境遇는 申師任堂이 가장 代表的인 人物이었다. 申師任堂 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實際로 그랬느냐는 것은 別個의 問題고, 그런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男性들의 歷史에서 男性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申師任堂 이 그 동안 權力을 갖고 影響力을 行使해왔는데, 이제 'History'가 아니라 'Herstory'를 하겠다는 거죠. 女性들은 男性들에 依해서 만들어지고, 甚하게는 造作되고, 隱蔽되었던 歷史를 이제 女性의 視角으로 보겠다는 겁니다. 우리 時代에 必要한 女性이라면 現在 우리 女性主義 者들에게는 申師任堂 보다는 許蘭雪軒이라는 것이다. [9] "라는 것이다. " 申師任堂 도 훌륭한 女性입니다. 申師任堂을 貶下 하자는게 아니고, 그 사람도 훌륭한 사람인데, 그러나 우리 視角으로 새롭게 볼 必要가 있다는 것이다. 只今까지 히스토리에서 만들어진 그런 모습이 아니라, 申師任堂 도 再照明해야 되고, 그리고 特히 새롭게 再照明해야 할 女性像의 모델로는 '許蘭雪軒이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를 비롯한 女性主義 者들의 생각입니다. [10] "라 하였다. 김신명숙 申師任堂 을 代身할 女性의 模範으로 許蘭雪軒을 指目하였다. 그에 依하면 "그래서 2003年 9月 末에 許蘭雪軒 文化祝祭度 열구요. 許蘭雪軒이 어떤 人物인지 잘 모르시죠? 朝鮮 時代에 아내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나로서 存在하려고 했던 사람이거든요. 나로서 存在하려고 몸부림쳤던 女性인데, 27살에 夭折을 했죠. 天才 詩人이고, 아주 뛰어난 女性이었는데, 삶도 아주 드라마틱하고, 劇的 要素도 갖추고 있어요. 女性主義 的인 視角에서 充分히 새로 照明되어야 할, 申師任堂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代身 차지할 만한 歷史的 人物이라고 봅니다. 單純히 許筠 의 누이가 아니라 [10] '는 것이다.

許蘭雪軒을 演技한 俳優 [ 編輯 ]

各州 [ 編輯 ]

  1. 韓國歷史情報統合시스템
  2. 박찬희, 《한卷으로 재미있게 읽는 에세이 朝鮮王朝 五百年 野史》 (꿈科希望, 2009) 380페이지
  3. 吏曹參判은 後日 김성립이 壬辰倭亂 때에 戰死하였으므로 그 功勞로 贈職으로 追敍된 職責이다.
  4. 박찬희, 《한卷으로 재미있게 읽는 에세이 朝鮮王朝 五百年 野史》 (꿈科希望, 2009) 379페이지
  5. “許蘭雪軒의 生涯” . 許筠,許蘭雪軒煽揚事業會 . 2008年 10月 25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6. 류주환. “許蘭雪軒 作品 目錄” . 2008年 10月 25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7. 이덕일 씀, 《 女人列傳 》, 김영사 , 2003年
  8. 許曄의 두 番째 夫人이다
  9. 人物과사상 編輯部, 《人物과 思想 2003年 10月號》 (人物과사상사, 2003) 126페이지
  10. 人物과사상 編輯部, 《人物과 思想 2003年 10月號》 (人物과사상사, 2003) 127페이지

參考 資料 [ 編輯 ]

  • 허경진 엮음, 《許蘭雪軒 視線》 (平民史, 1987)
  • 김지용, 《歷代女流한시문선》 (김지용 便역, 大洋書籍, 1975)
  • 문경현, 《許蘭雪軒硏究》(陶南 趙潤濟博士古稀記念論叢, 1976)
  • 김석하, 허초희의 有線社에 나타난 先現象, 檀國大學校 《國文學 論叢 5·6合執》 (단국대학교, 1972)
  • 성균관대학교, 許筠 全集 (성균관대학교 大東文化硏究院, 1981)
  • 박종화, 〈女流詩人 許蘭雪軒高〉 성균관대학교, 《성균 3》 (성균관대학교, 1950)
  • 홍만종, 《해동利敵:(增補)》 (신해진, 김석태 共譯, 京仁文化史, 2011)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