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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事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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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事變
乙未事變
프랑스 週刊誌 『 르 주르날 日뤼스트레 』 表紙記事
<朝鮮 王妃 暗殺 事件( L'ASSASSINAT DE LA REINE DE COREE )>
別稱 明成皇后 暗殺 事件
參加者
座標 北緯 37° 34′ 59.3″ 東經 126° 58′ 38.1″  /  北緯 37.583139° 東京 126.977250°  / 37.583139; 126.977250
場所 조선 朝鮮 漢城府 景福宮 건청궁 鯤녕합 一帶
날짜 1895年 10月 8日 새벽
死亡者 명성황후   · 홍계훈   · 宮女  · 臣下
負傷者 高宗   · 純宗   · 宮女  · 臣下
原因 明成皇后의 朝鮮 侵略 妨害
結果 明成皇后 弑害 成功

乙未事變 (乙未事變, 英語 : Assassination of Empress Myeongseong )은 1895年 10月 8日 ( 陰曆 8月 20日 ) 朝鮮 駐在 日本 公使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의 指揮 아래 [1] 日本軍 漢城 守備隊 미야모토 다케打로 (宮本竹太郞) [2] 等이 景福宮 (景福宮)에 亂入하여 건청궁 (乾淸宮) 鯤녕합 一帶에서 명성황후 閔氏(明成皇后閔氏)를 칼로 찔러 弑害하고 屍身에 石油를 뿌려 불에 태운 事件이다.

名稱 [ 編輯 ]

  • 다른 名稱: 明成皇后 暗殺 事件 (明成皇后暗殺事件), 明成皇后 弑害 事件 (明成皇后弑害事件) [3] [4]
  • 當時 名稱: 乙未의 便 (乙未之變) 또는 乙未 八月의 便 (乙未八月之變) [5]
  • 日本 作戰名: 여우사냥 ( 日本語 : 狐狩り 基쓰네가리 [ * ] )

槪要 [ 編輯 ]

日本 淸日戰爭 에서 勝利한 以後 朝鮮의 支配를 强化하고 經濟的 利益을 獨占하려 했다. 當時 朝鮮에서는 김홍집 等의 親日 內閣이 得勢하였고, 1894年 7月에는 日本 勢力을 등에 업은 大院君이 再登場하며 甲午改革 이 始作됐다. 이에 明成皇后는 러시아 에 接近하여 日本 勢力을 逐出함으로써 日本의 侵略을 沮止하고자 했다. 이에 怏心을 품은 日本 政府는 日本 公使 미우라 고로 를 使嗾하여 명성황후 暗殺을 命令하였고, 朝鮮 側에서도 흥선大院君 , 우범선 , 이두황 , 이진호 , 前 軍部協辦 이주회, 開化派 文身 유길준 , 親日派 송병준 의 사위 구연수 等 親日 勢力들이 政治的 目的으로 內通, 協助했다.

事前에 緻密한 計劃 下에 日本人 浪人 들은 朝鮮人 軍官들의 庇護와 길案內로 景福宮 까지 3~5時間 內에 進入했다. 奇襲的으로 景福宮에 進入한 이들은 宮女 服裝으로 僞裝한 皇后 를 찾아내 弑害한 뒤, 미우라의 指示로 屍身에 石油를 뿌려 消却한 뒤 蓮못에 던졌다. [6] [7]

事後 100年 넘는 동안 日本은 朝鮮의 紛爭에 日本 浪人들이 介入한 事件이라고 主張해왔지만, 乙未事變 事件 두 달 뒤에 日本 領事 우치다 사다쓰지 가 作成하고 日王 이 決裁한 報告書가 2005年 公開되었다. [8] [9]

乙未事變의 犯行은 當時 日本公使 미우라 一黨이 저질렀지만, 그동안의 硏究 結果에 따르면, 그 背後의 眞正한 主動者는 미우라 直前에 工事를 지낸 이노우에 가오루 를 비롯한 日本 政界의 最高委 元老 (元老 : 겐로) [10] [11] 들 및 이토 히로부미 總理를 비롯한 內閣의 閣僚들이었다. [12] 當時 乙未事變 實行者들이 日本 政府의 實權者인 元老들에게 保護 받았는지는 그들의 死後 出世 街道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甚至於 미우라는 裁判을 받고 釋放되자 日本 메이지 天皇 이 直接 侍從을 보내 致賀하기까지 했다. [10]

"皇后 暗殺의 責任을 미우라와 朝鮮人 訓鍊隊에게 돌리려 했지만, 犯人이 日本人이라는 事實이 西洋에 알려지게 되었다[10]"고 적혀 있는데, 이는 創作이다.

當時 目擊者인 純宗, 高宗 等 王族과 러시아 建築 技術者였던 阿罷拿視 세레딘 사바틴, 示威隊 指揮官이었던 美國人 윌리엄 다이 大領이 現場을 目擊했고, 그들의 證言과 報告書에는 皇后 暗殺의 實行者가 6名의 朝鮮人 훈련대원이라는 事實이 記錄되어 있다.

事件 以後 乙未事變이 일어나는 等 日本에 對한 朝鮮人의 反感이 커졌다.

準備 過程 [ 編輯 ]

미우라 고로

高宗과 明成皇后에 對한 計略 [ 編輯 ]

當時 日本은 朝鮮에 對한 計略으로 王室을 懷柔 或은 買收하여 警戒心을 누그러뜨리게 하는 것이었으며, 또 바로 皇后 弑害였다. [13] 乙未事變은 매우 緻密하게 準備되었다.

한국통사 》 等에 따르면, 駐韓 日本公使 이노우에 가오루 夫婦는 乙未事變이 있기 한 달 前 日本을 다녀온 뒤 王宮 을 訪問하여 朝鮮 王室의 安全을 確保한다고 約束하면서 高宗과 明成皇后에게 9千원에 相當하는 膳物을 바쳤다고 한다. 當時 內閣에서 論議하고 있던 朝鮮 政府에 對한 借款을 支給하기로 이미 決定했다고 거짓말까지 한다. 高宗은 이노우에가 너무 眞摯하여 豫防을 疏忽히 했다고 한다. 이때의 이노우에의 行動은 日本에 對한 高宗과 皇后의 警戒心을 풀게 하려는 計算된 演劇이었다는 主張이 있다. [13]

매천야록 》과 《 大韓季年史 》에 따르면, 日本은 고무라(小村室)의 딸을 明成皇后의 養女로 삼게 하였는데, 뒤에 그女는 明成皇后의 身元을 確認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또한 고무라의 딸과 明成皇后가 宮中 演戱(演戱)를 보고 있을 때 俳優 가운데 種왜(從倭, 日本을 따르는 사람)로 하여금 肖像畫를 그리게 했다고 한다. [13]

皇后 弑害 計劃을 세운 이노우에가 日本으로 돌아간 때는 事件 20日 前이었다. 1895年 9月 1日 陸軍 中將 出身 미우라 고로 가 새 公使로 赴任한다. [14] 右翼 軍人 勢力의 거두였던 미우라는 朝鮮에 온 뒤 杜門不出하고 佛經을 외우면서 지냈는데, 그래서 붙여진 別名이 ‘念佛 工事’였고, ‘修道僧 같다’라는 評을 들었는데, 이는 警戒心을 풀기 위한 僞裝術이었다는 主張이 있다. [13]

殺害 計劃과 準備 [ 編輯 ]

오카모토 류노스케

《大韓季年史》에 따르면, 細部 計劃이 세워진 때는 10月 3日 이었고, 場所는 日本 公使館 地下 密室이었다. 그때 미우라의 參謀는 시바 詩로 였는데, 하버드 大學 펜실베이니아 大學 에서 經濟學을 工夫한 高級 知識人이었다. 그는 朝鮮에 나와 있는 日本의 極右 浪人 團體인 천우협 현양사 日人들과 緊密하게 協議하면서 미우라를 補佐하였다. 日本의 浪人들은 目的을 이루기 위해서는 手段과 方法을 가리지 않았으며, 東京帝國大學 出身 等 高級 知識人들이 많았다. 따라서 이들은 職業的 政治깡牌가 아니라 高度로 意識化된 知識인 테러리스트 였다는 主張도 있다. [13]

그날 謀議에 參與한 사람은 公使館 일等書記官 스기무라 후카시 (杉村 濬)와 宮內府 및 軍部 顧問官으로서 平素 興宣大院君과 親分이 두터운 少佐 出身 오카모토 류노스케 , 領事館步 호리구치 구마이치 , 그리고 公使館 無關이자 砲兵 中佐인 구스노세 유키히코 였다. 그밖의 職員들에게는 機密 維持를 위해 一切 알리지 않았다. 우치다 社多쓰値 (?田 定侈?) 一等領事도 이 謀議에서 除外되었다. [15]

當時 謀議한 內容은, '첫番째 弑害의 犯行은 日本 浪人들이 맡고, 外觀 上 興宣大院君과 朝鮮人 訓鍊隊의 叛亂으로 꾸민다. 이 일은 淸日戰爭 直後 甲午更張 때 日本 軍人의 宮闕 占領을 指揮했던 오카모토에게 맡겨졌다. 둘째 日本人 加擔者는 浪人 刺客, 日本 守備隊 軍人, 日本 公使館 巡査들로 構成한다. 이때 浪人 刺客들의 動員은 漢城에서 發行하는 日本 新聞 漢城신보 ( 英語版 ) 의 社長 아다치 겐조 가 맡았다. 구마모토와 후쿠오카 等 규슈 出身 浪人 30餘 名과 漢城신보 主筆 拘泥土毛 시게아키 , 編輯長 고바野歌와 히데오 , 記者 히라야마 이와히코 , 사사키 마사유키 , 기쿠치 겐조 等의 民間人들을 動員하였다. [16] 셋째 日本 守備隊와 巡査, 朝鮮人 訓鍊隊를 움직이는 일은 日本 公使館 所管이다. 그래서 皇后 弑害에 구스노세 유키히코 等이 參與한다. 넷째 巨事日은 10月 10日 새벽으로 한다.' [15] 는 것이었다.

미우라는 皇后 弑害를 위한 陰謀를 “여우사냥” [15] [17] 이라고 불렀으며, 豫想보다 일찍 訓鍊隊가 解散되자 擧事 日時를 10月 8日 새벽 4時로 앞당기게 된다. 그러나 바뀐 計劃도 蹉跌이 생긴다. 새벽 4時에 作戰을 끝내려면 늦어도 새벽 3時까지는 興宣大院君과 浪人들이 景福宮에 進入해야 한다. 그러나 大院君이 공덕리 別莊을 떠난 때는 새벽 3時였고, 景福宮에 到着한 때는 새벽 5時가 넘었으며, 明成皇后가 弑害된 때는 6時 頃이었다. 그래서 많은 目擊者들이 나타나게 된다. [15]

1896年 4月 15日 高等裁判所 判事 권재형 이 法部에 提出한 〈권재형 報告書〉에 따르면, 興宣大院君은 入闕하던 날 奸邪한 무리를 몰아낸다는 要旨의 諭示를 내렸다고 한다. [18] 《한국통사》에서는 大院君이 入闕하는 日本人들에게 “오늘의 일은 但只 王室을 護衛하는 것뿐이다. 宮中에서 暴擧를 行하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綜合하면, 興宣大院君이 皇后 弑害에 同意했는지 매우 疑問이다. [15]

한便 日本으로서도 興宣大院君의 政治 參與는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書記官 스기무라가 4個組 約條文을 草案하고, 10月 6日 ( 陰曆 8月 18日 ) 오카모토가 이를 가지고 공덕리에 가서 大院君의 誓約을 받았다. 주된 內容은 大院君이 政治에 參與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5]

朝鮮人 協力者들 [ 編輯 ]

이준용

大院君은 長孫 이준용 이 교동에 幽閉된 以來 不滿을 품고 공덕리의 別莊 아소정(我笑亭)에 蟄居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에 오카모토가 大院君을 찾아 說得하였다. [19]

유길준 흥선大院君 을 明成皇后 暗殺의 朝鮮人 最高 指揮者로 指目했다. [20] 兪吉濬이 美國人 隱士 모스에게 보낸 便紙에서 兪吉濬은 明成皇后를 "世界에서 가장 나쁜 女性"이라고 酷評하였으며, [21] 明成皇后를 開化黨 殺害의 背後로 보았다. 兪吉濬은 閔妃가 도움을 請하기 위해 러시아 公使와 祕密 接觸하였고, 1894年 가을 開化黨 모두를 殺害하려는 計劃을 꾸미다가 大院君에게 發覺되었으며, 大院君은 日本公使 오카모토 류노스케 와 協議 끝에 日本人들로부터 若干의 도움을 얻어 그女를 죽이기로 決定하였다고 陳述하였다. [21] 便紙에서 兪吉濬은 또 明成皇后 暗殺은 實行되었지만 興宣大院君이 明成皇后 暗殺 問題를 日本公使와 協議하고 日本 側에 若干의 도움을 要請한 것은 큰 失手였다고 指摘하였다. [21] 그러나 兪吉濬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方法이 없었다.'는 意見도 덧붙였다. [21] [22] [23]

유길준 , 王妃 暗殺의 朝鮮人 高位層 協力者

윤치호 는 暗殺의 協力者이자 日本 浪人들의 指揮者 中 한사람으로 兪吉濬을 指目하였다. [24] 明成皇后가 암살당할 무렵 尹致昊는 兪吉濬과 日本人 이시쓰카가 事件의 顚末을 隱蔽하기 위해 自身을 그날의 저녁 食事에 自身을 招待했다는 것이다. [24]

興宣大院君과 유길준 外에도 朝鮮軍 1大隊長 우범선 ·2大隊長 이두황 ·3大隊長 이진호 (李軫鎬) 等과, 前 軍部 協辦 이주회 (李周會), 國王 親衛隊 部位(副尉) 윤석우 (尹錫禹), 日本 公使館 通譯官 舶船 , 文身 구연수 等이 協力했고, 宮闕守備隊의 舊式軍隊 出身 朝鮮人 兵士들도 自發的으로 協力했다. 송병준 의 사위이기도 했던 구연수는 日本 浪人들이 閔妃 屍身을 燒却하는 걸 도왔다.

朴泳孝의 明成皇后 暗殺 未遂

한便 1895年 (高宗 32年) 7月 박영효 는 別途로 王妃를 暗殺할 計劃을 세웠다. 開化 以後로 高宗 은 밖으로는 日本의 牽制를 받고 안으로는 軍國機務處 가 마음대로 하여 한 가지 일도 單獨으로 決定할 수 없었다. 明成皇后는 이를 분하게 여겨 漸次로 軍權(軍權)을 回復하기를 計劃하여 러시아와 結託하니, 朴泳孝는 이를 憂慮하였다. [25] 明成皇后는 軍國機務處의 一部 急進開化派가 獨斷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들의 政策을 뒤엎을 機會를 찾았다. 이때 朴泳孝는 單獨으로 計略을 세워 王妃 暗殺을 計劃하였다.

朴泳孝는 王后의 權謀와 計略을 두려워 하여 暗殺을 敢行하지 않으면 禍根을 根絶할 수 없다 생각하고, 1895年 7月 마침내 날짜를 잡아 計策을 定하고 日本에 兵力을 要請하였다. 그는 兪吉濬이 自己와 親近하다고 여겨 가만히 뜻을 알렸다. [25] 그런데 兪吉濬은 바로 朴泳孝의 王妃暗殺 計劃을 임금에게 密告했다. 朴泳孝는 유길준에 依해 일이 漏泄된 것을 알고 洋服으로 바꿔 입고 日本人의 護衛를 받아 都城을 빠져 나와 龍山 에서 汽船을 타고 逃走하였다. 그의 一黨 신응희 , 이규완 等도 따라 逃走하였다. [25] 朴泳孝의 明成皇后 暗殺 陰謀를 暴露한 兪吉濬은 그무렵 따로 大院君과 이준용의 王妃 暗殺 謀議에 加擔한 狀態였다.

進行 過程 [ 編輯 ]

事前 模擬와 武裝 [ 編輯 ]

朝鮮 政府가 訓鍊隊의 解散을 命令한 때는 10月 7日 새벽 2時였다. 이에 軍部 代身 안경수 가 9時 頃 急히 이 事實을 미우라 고로 에게 通報하였고, 뒤이어 우범선 도 달려와 미우라에게 報告했다. 이에 미우라는 擧事 날짜를 그날 밤으로 바꾸고 스기무라와 議論한 뒤 오카모토 류노스케 를 불러들인다. 오카모토는 10月 6日 흥선大院君 을 만난 뒤 日本으로 가는 척하다가 急히 서울로 돌아왔다. [26] [27]

미우라는 擧事 計劃書人 〈入闕方略서〉(入闕方略書)를 領事館보인 호리쿠치 구마이치 에게 주고, 龍山 으로 가서 擧事 準備를 指示한다. 이에 漢城신보 職員들과 浪人들은 칼 또는 銃을 들고 용산으로 모였다. 또 미우라는 誤記하라 히데지로 (荻原 秀次?)에게 領事館 巡査들을 引率하여 私服에 칼을 차고 용산으로 가도록 指示한다. 餓死야마로 하여금 軍部 協辦 이주회 에게 事實을 알리도록 하였고, 이주회가 朝鮮人 몇 名을 糾合하여 공덕리 로 가도록 했다. 그렇게 그날 밤에 공덕리 大院君 別莊에 모인 사람은 公使館 職員, 顧問官, 巡査, 記者 等 約 60餘 名에 達했으며, 이들은 술에 醉한 狀態였고 服裝도 제멋대로였다. [26] [28]

乙未事變을 일으킨 浪人들 ( 漢城신보 ( 英語版 ) 社屋 앞에서)

宮闕까지의 進入 過程 [ 編輯 ]

오카모토가 이끄는 日本人 浪人들이 공덕리에 到着한 때는 子正 쯤이었으나, 興宣大院君이 交與를 타고 떠난 때는 새벽 3時 頃이었다. 大院君은 그들이 온다는 事實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 日本人들은 담을 넘어 가서 別莊 經理(警吏)를 모두 捕縛하여 가두고 옷을 빼앗아 日本人 巡査들이 덧입었는데, 朝鮮軍으로 僞裝하려 함이었다. 오랜 실랑이 끝에 大院君이 집을 나섰는데, 아마도 日本人들이 大院君을 半强制로 끌어냈으리라 여겨지며, [26] [29] 76歲 老齡의 大院君이 이 쿠데타에 加擔했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主張이 있다. [26]

一行이 西大門에 이르렀을 때 우범선이 이끄는 訓鍊隊 第2大隊와 合流했다. 그들은 그때까지는 皇后를 弑害한다는 事實을 몰랐다. 暫時 뒤에 集結場所를 잘못 알아 [30] 엉뚱한 곳으로 갔던 140餘 名의 日本 守備隊 第1中隊가 到着하였다. 여기에서 또 時間이 遲滯되었다. 이때 景福宮에서는 日本 守備隊 第3中隊가 光化門 附近에서 待機하고 있었고, 守備隊 第2中隊長은 訓鍊隊 第2大隊를 引率하고 춘生門(景福宮 東北文) 附近에 集結하였다. 그들은 새벽 2時頃부터 미리 와서 景福宮을 包圍하고 있다가 光化門 쪽에서 銃소리가 들리자 四方에서 宮闕 담을 넘고 外電의 勤政殿(勤政殿) 一圓을 지나 明成皇后가 居處하는 건청궁(乾淸宮) 쪽으로 突進했다. [26]

새벽 2時 頃에 別軍官에게 高宗의 護衛警官 2名이 달려와 三軍府(光化門 앞 警備室)에 日本軍과 朝鮮軍 訓鍊隊가 雲集해 있다고 報告하자, 현흥택 精靈은 卽時 宮闕 警備兵 여럿을 光化門으로 急히 보내 狀況을 確認했다. 時間이 지나 새벽 4時 무렵에 朝鮮軍 訓鍊隊 大隊가 춘生門(春生門, 景福宮 東北文)과 추성문(秋成門, 景福宮 西北門)을 包圍하였다고 현흥택 精靈은 證言했다. 이때 景福宮은 慶會樓와 수정전 一帶를 除外하고 勤政殿 一帶를 包含해 光化門까지 銃擊戰이 벌어져 光化門과 勤政殿을 包含해 銃擊戰으로 亂離가 난 狀態였다. 이때를 機會로 노린 日本軍은 景福宮 곳곳을 뒤지다가 건청궁 一帶에서 明成皇后를 찾은 것이다. [31]

윌리엄 다이 將軍과 阿罷拿視 사바틴 이학균 部令으로부터 報告받자마자 일어나 別軍官실로 갔으나 2名의 部令과 最小限 6~7名의 黨職 將校가 夜勤하고 있어야 함에도 그곳에는 單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고 사바틴은 證言했다. 또한 高宗은 이미 새벽 4時 半 前後로 宮闕이 騷亂함을 알고 있었으며, 明成皇后는 危險한 寢殿인 옥호루(玉壺樓)를 떠나 隱身하였으리라 여겨지나 [32] 宮闕을 벗어나지는 못했으리라 본다. [33]

高宗은 日本軍이 宮闕을 包圍했다는 急報를 받고 이범진 에게 時間을 다투어 美國 公使館과 러시아公使館에 뛰어가 도움을 要請하라고 命令했다. 李範晉은 日本人 巡察을 被害 높이가 4~5미터인 담에서 뛰어내려 宮闕을 脫出하였다. 美國 公使館에 到着했을 때 大闕 쪽에서 첫 銃聲이 들려왔다고 李範晉은 證言했다. 李範晉은 美國 公使館을 거쳐서 러시아 公使館을 찾아가 宮闕이 日本軍에 包圍되었음을 알리고 救援을 要請했다. [31] [34] [31]

사바틴의 證言을 보면 事件 前날(10月 6日) 밤에 朝鮮軍 訓鍊隊와 日本軍이 大闕 앞에 모여 騷亂을 피웠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는 當日 밤에는 陰謀가 있으리라는 情報도 中國人으로부터 事前에 入手했다. 그런데도 安易하게 생각하고 對策을 세우지 않다가 結局 大闕이 包圍되는 地境에 이른다. [32]

景福宮 浸透 [ 編輯 ]

當日 새벽 4時 30分頃 日本人 敎官에게 訓鍊받은 朝鮮軍 約 250~300名이 日本人 敎官 4~5名의 引率을 받으며 뭔가 相議하였다. 그 뒤 한 朝鮮人이 큰소리로 大門을 열어 달라고 몇 番 외쳤다. 光化門 을 지키던 警備兵과 巡檢들이 抵抗하여 銃擊戰이 벌어졌다. [32] 새벽 5時 무렵 흥선大院君 一行이 光化門 앞에 이르자, 미리 待機하고 있던 日本 守備隊 第3中隊가 미리 準備한 긴 사다리를 건네고, 日本 巡査들이 담을 넘어 빗장을 풀었다. 光化門이 열리자 日本軍 과 朝鮮人 近衛隊 兵力이 소리를 지르며 景福宮 을 向해 突進했다. 日本 浪人들과 朝鮮人들은 光化門을 넘어 景福宮 앞에 이르렀다.

담을 넘은 日本人 暴徒들이 宮闕 警備兵에게 發砲하자, 警備兵은 武器와 軍服上衣를 벗어던져 버리고 哨所를 떠나 어디론가 달아나기도 했다. 한便 暴徒들은 南쪽의 光化門, 東北쪽의 춘生門, 西北쪽의 추성문 等 3個의 聞으로 侵入하였다. [32]

景福宮 入口에는 美國人 指揮官 윌리엄 다이 가 指揮하는 朝鮮人 警備隊 500餘名이 지키고 있었으나, 이들의 存在를 事前에 알고 있었던 日本人 浪人들과 朝鮮人 兵力은 쉽게 警備隊를 擊退했다. 數많은 死傷者를 낸 다이는 警備隊를 이끌고 도망쳤고, 浪人들과 朝鮮人 길案內者들은 쉽게 景福宮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勤政殿까지는 쉽게 들어갈수 있었으나 勤政殿을 지키는 兵士들과의 銃擊戰을 벌이는 끝에 勤政殿이 뚫려버려 건청궁까지 갈수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人 建築技士 세레딘 사바틴 은 宮闕 안에서 守備하던 途中 暴徒와 宦官(宦官), 벼슬아치, 弓弩(宮奴) 等에게 떠밀렸다가 日本人 隊長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自身의 身分을 밝히고 護衛를 要請했다. 그 뒤 그곳에서 서서 事件을 目擊 中 明成皇后 弑害 直前 두들겨 맞고 現場에서 쫓겨난다. [35]

러시아人 建築技士 사바틴이 高宗을 護衛하고 있었는데, 宮殿 뜰에서 日本人의 行悖를 目擊했다. 윌리엄 다이도 示威隊를 指揮하면서 宮 안에서 이 慘狀을 目擊했다. 사바틴과 다이는 둘 다 日本 軍人들에게 暴行을 當했는데, 뒷날 日本人들의 蠻行을 世界에 暴露하는 證言을 하였다. [36]

法部 協辦 권재형의 報告書(흔히 〈권재형 報告書〉)에 따르면, 高宗은 凶徒들의 注意를 따돌려 明成皇后의 避身을 돕기 위해 密室의 뒷門을 모두 열고 凶徒들이 잘 보이는 房 門앞에 나와 서 있었는데, 凶徒들은 칼날을 휘두르며 그 房에 들어가 高宗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기도 하고, 高宗 옆에서 拳銃을 쏘고 宮女들을 亂打하며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37] 또한 無斷 侵入을 꾸짖는 高宗의 어깨에 無禮하게 손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태者도 다른 房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冠이 벗겨지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얻어맞는 受侮를 當했다. [17] [7]

건청궁 進入 [ 編輯 ]

明成皇后가 居處했던 景福宮 건청궁 鯤녕합 옥호루

景福宮에 王妃가 없음을 안 浪人과 朝鮮人 協力者들은 景福宮 北쪽인 건청궁 으로 向한다. 日本人들을 막으려고 나왔던 홍계훈 과 示威隊는 日本軍과 交戰하였으나 이들의 火繩銃은 日本의 改良된 銃을 當해내지 못했다. 一說에는 洪啓薰이 日本人에게 호통을 치다가 日本 守備隊가 쏜 銃彈에 맞아 쓰러졌다고도 한다.

3百~4百餘 示威隊가 聯隊長 현흥택(玄興澤)과 敎官 다이 將軍의 指揮를 받으며 銃擊戰을 벌였으나, 甲午更張 때 優秀한 武器를 빼앗겨 日本軍을 當할 수가 없었다. [32] [38]

明成皇后가 起居하던 건청궁 까지 다가온 凶徒들은 隊伍를 지어 闔門(閤門)을 包圍하고 把守를 보았다. 刺客들은 殿堂으로 들어가 密室을 搜索하기 始作했고, 흥선大院君 은 勤政殿 뒤 康寧殿 옆에서 기다렸다. 訓鍊隊 軍人들은 件靑軍 앞마당에서 쉬며 皇后 弑害에는 加擔하지 않았다. [38]

明成皇后 弑害 過程 [ 編輯 ]

凶徒들은 宮女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明成皇后의 處所를 대라고 윽박지르는 等 亂暴하게 行動했다. 그러나 宮女들은 두들겨 맞고 내던져졌음에도 不拘하고 呻吟조차 내지 않았다. 건청궁 東쪽 鯤녕합 옥호루에서 皇后를 찾아냈는데, 宮內府 代身 이경직 이 두 팔을 벌려 皇后 앞(또는 皇后가 있는 房門 앞)을 가로막고 나서다가 拳銃을 맞고 쓰러졌으며, 이어 新聞記者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가 다시 칼로 두 팔을 베었다. [35] 그러나 버둥대며 一行을 妨害하던 이경직은 浪人들에 依해 허리가 베여 죽게 된다.

鯤녕合에 進入한 浪人과 朝鮮人 協力者들은 宮女와 尙宮들을 一一이 確認하고 누가 王后인지 索出하던 中 變服한 王后를 찾아내자 殺害한다.

浪人들은 宮女들 사이에 숨었다가 도망치는 明成皇后를 쫓아가 그女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려 [31] 내동댕이친 뒤 맨발로 繼續 밟고 日本軍 4名이 칼로 찔렀다. [17]

英國 데일리 메일 記者이자 朝鮮 駐在 特派員인 프레더릭 매켄지 에 依하면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房 한 구석에 숨은 女人을 發見하고 머리채를 붙잡고 王后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나 王后는 이를 否認하고 몸을 避해 마루 아래로 달아나려는 瞬間 一擊을 當했다 [39] 고 한다. 한便 日本人 浪人과 朝鮮人 앞잡이들 앞에서 堂堂하게 나는 朝鮮의 國母라고 호통쳤다는 公式 記錄과는 달리 暗殺 直前 목숨을 求乞했다는 記錄이 있다. 黃玹 은 浪人들이 王妃의 正體를 確認하자 '살려달라고 哀乞했으나 日本人들이 칼로 내리쳤다. [39] '고 하였다.

明成皇后가 絶命한 視角은 사바틴이 現場을 떠난 지 20~30分 뒤인 새벽 5時50分 以後인 10月 8日 아침 6時 直前이나 直後로 여겨지나, [35] 絶命한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房 안에서 皇后의 屍身을 보았다는 證言은 많다. 또한 浪人들은 皇后를 죽인 뒤에도 그들이 죽인 사람이 皇后임을 알지 못하여 容貌가 비슷한 宮女를 세 名 殺害하였다. 흉도 가운데 皇后를 죽인 사람으로 자주 指目되는 사람은 데라자키 다이키치 (寺崎泰吉)이다. [40]

浪人들은 그들이 殺害한 네 女人 가운데 누가 皇后인지를 確認하는 方法으로, 宮女와 太子를 불러 確認했다는 설, 皇后 얼굴을 잘 아는 고무라의 딸을 불러 確認했다는 설(《매천야록》), 皇后의 얼굴에 있는 媽媽 자국을 보고 確認했다는 설, 처음부터 肖像畫를 들고 들어왔다는 說 等이 있으며, 이러한 여러 方法을 섞어서 썼으리라는 主張도 있다.

當時 浪人들은 남의 나라 國母를 無慘하게 죽이는 일에 加擔하면서도 良心의 呵責은커녕 日本을 위해 충성한다는 自負心에 가득 차 있었다 [7] 고 한다.

刺戟的인 歪曲 論難 [ 編輯 ]

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王妃(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傷處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王妃를 발가벗긴(裸體) 後 國富檢事(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怒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消失(燒失)시키는 等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外에 宮內府 大臣을 慘酷한 方法으로 殺害(殺害)했다.
 
—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 , 〈 에조 報告書 [17]

한 小說家는 〈 에조 報告書 〉를 根據로, 日本 軍人들은 皇后를 凌辱했다는 主張을 했지만 作家의 主張대로 에조는 現場을 目擊한 弑害犯이 아닌 公務員이며 近現代 文獻 最高權威者中 하나인 書誌學者 김종옥, 서울대 신용하 敎授 等 專門家들은 該當 作家의 主張에 對해서 常識에 違背되는 거짓浪說이라 一蹴했다. [41] 이러한 主張은 勿論 <에조 報告書>自體가 實際 目擊者의 陳述이 담겨있는 가장 信憑性있는 資料로 評價받는 <베베르 報告書>를 비롯한 다양한 證言들과 完全하게 違背된다. [42] 여기서 쓰인 '裸體''局部'라는 單語도 論難이 있는데 <에조 報告書>를 信賴한다고 假定해도 히로시마에서 弑害犯들이 證言한 '閔妃의 얼굴을 알 수 없어 中年女性의 身元을 識別하기 위해 가슴을 確認한 行爲'를 指稱했을 蓋然性이 크다. [43]

事後 處理 [ 編輯 ]

乙未事變이 일어난 10月 8日 아침에 高宗은 아침 건청궁 장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高宗이 8時頃 미우라 公使에게 使者를 急히 보내 어젯밤 [44] 일의 內幕을 묻자 미우라는 書記官 스기무라와 通譯官을 데리고 宮으로 들어왔다. 美國과 러시아의 工事도 消息을 듣고 宮으로 왔다. 미우라와 스기무라, 그리고 刺客의 우두머리가 옆에 섰으며, 興宣大院君도 들어와 高宗 옆에 앉았다. 미우라는 高宗을 脅迫하여 金弘集 內閣을 성립시켰다.

縮小 隱蔽 [ 編輯 ]

日本 當局에 弑害事件이 처음 傳達된 것은 8日 午前 6時 32分發 公使館 守備隊 所屬 海軍 少佐 니이로 도키스케 (新納時亮)가 (本局) 이토 미요지 (伊東巳代治) 中將에게 보낸 電報였다. [45] 그리고 다시 그날 午前 9時 20分, 니이로 (新納) 少佐는 本國 大本營 陸軍參謀部에 專門(電文) 한 張을 보냈다. ‘極祕’(極秘)라는 붉은 烙印이 찍힌 이 前文에는 ‘國王無事 王妃殺害’(國王無事 王妃殺害)라고 報告하고 있다. [45] 그것은 日本 政府의 公式 라인을 통해 “여우사냥”이라는 暗號名의 王后 殺害 作戰이 成功했음을 알린 첫 報告였다. [17]

海軍 側의 報告를 듣고, 陸軍 參謀部에서는 電報로 公使館 所屬 陸軍中佐 구스노세에게 事實 確認을 命令하였다. 그는 事件 加擔者로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不拘하고, 同一 午前 8時 50分發 專門에서는 大院君의 入闕과 訓鍊大將 홍계훈 의 죽음만을 報告하고 있다. [45] [46] [45]

日本 外務省에서도, 同日 午後 1時發 電文에서 王妃 殺害 與否를 確認하고 있음에도 當事者인 미우라는 “王妃의 所在 아직 잘 모르겠다”라고 시치미를 떼고, 大院君에 依한 쿠데타라고 報告하고 있다. 이러한 事實 隱蔽는, 스기무라가 直屬上官이었던 이노우에에게 行한 報告에도 一貫되고 있다. [45]

미우라도 사이온지 긴모치 外務大臣에게 끝까지 虛僞報告를 하면서, 日本人의 加擔 與否에 對해서는 一部 肯定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私的 次元(民間人임을 主張)’으로 돌리고 있다. 單, 이토 總理大臣에게는 比較的 詳細히 事實을 報告하고 있는데, 이는 이토와 事前에 어느 程度 交感이 이루어졌음을 傍證하는 것이기도 하다. [45]

證據 湮滅 [ 編輯 ]

金弘集 等이 連絡을 받고 宮으로 들어올 때 미우라는 暫時 자리를 비웠다가 皇后의 屍身을 直接 確認하고 證據를 湮滅하기 위해 오기하라에게 急히 火葬하라고 指示했다. - [47] [48]

凶徒들은 王后의 屍身을 門짝 위에 얹어 이불을 덮고 건청궁 東쪽 鹿苑(鹿園) 숲 속으로 가져간 다음 長斫더미 위에 올려놓고 石油를 뿌려 태웠다. 날이 밝은 뒤 타다 남은 遺骨을 宮闕을 巡視하던 우범선 이 偶然히 發見하여 蓮못 향원정에 넣으려고 했으나, 訓鍊隊 參尉 윤석우 (尹錫禹)가 或是 皇后의 屍身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收拾하여 멀리 떨어진 吳雲閣 西峯(西峰) 밑에 埋葬했다. 뒷날 親日 內閣은 윤석우를 비롯한 軍部 協辦 이주회, 日本語 通譯官 舶船 (朴銑) 等을 無故하게 反逆罪 또는 不敬罪로 死刑에 處했다. [7]

輿論 糊塗 作業 [ 編輯 ]

事件 直後 미우라는 王后 弑害 事件을 朝鮮人의 叛亂으로 糊塗하는 工作을 폈다. 미우라는 이튿날인 10月 9日과 그 다음날인 10月 10日 外部에 公文을 보내었다. 그 渦中에 軍部 代身 조희연이 日本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미우라는 朝鮮 外部(外部)와 軍部(軍部)의 입을 통해 日本이 關與하지 않았다는 거짓 證明을 받아냈다. [48] 事件 發生 다음날인 10月 9日에는 사바틴의 입을 막기 위해 親日 內閣이 그에게 內務部 顧問職을 提議했으나, 사바틴은 拒絶했다. [35]

미우라는 外國人 目擊者인 윌리엄 다이 阿罷拿視 세레딘사바틴 에 依해 事件의 全貌가 明白하게 드러났음에도 不拘하고, 幕僚인 쓰키나리를 불러 日本人 浪人 中에서 重刑을 覺悟하고서 끝까지 責任질 者들을 物色하였다. 그것은 大院君이 日本人 장사를 雇用하였고 浪人들이 이에 附和雷同하여 閔妃를 殺害했다고 僞裝하기 위해서였다. 츠키나리는 후지카쓰와 히로다 도메요시 (廣田止善) 두 사람 中에서 한 사람을 物色하여 對處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日本 政府當局에서, 事實이 밝혀질 것을 두려워하여 10月 14日 加擔한 몇몇 浪人들에 對해 退限(退韓) 措置를 내렸기 때문에 이 僞裝計劃은 水泡로 돌아갔다. [45]

廢庶人 詔勅과 取消 [ 編輯 ]

金弘集 內閣은 세 가지 詔勅을 기초하여 高宗에게 署押(署名)하라고 要請했다. 高宗이 拒否하자 그들은 서로 署押하고 물러났으며, 日本 軍人들도 宮闕에서 撤收하였다. 이날 軍部 大臣은 안경수 에서 日本의 使嗾를 받은 曺喜昖 으로 바뀌었고, 권형진 이 治安을 擔當하는 警務使, 유길준 이 서리內務 代身, 어윤중 이 度支部 代身, 醬粕 이 法部 代身, 서광범 이 學部 代身, 鄭炳昰 가 農商工部 代身으로 任命되었는데, 이들은 皇后 弑害를 幇助 또는 默認한 이들이다. [48]

한便 乙未事變 直後 高宗은 허수아비처럼 되었다. ‘大君主陛下’라는 尊稱을 받고, 皇帝가 쓸 수 있는 ‘詔勅’을 내리고 있지만, 自身의 意志로 내린 詔勅이 없었다. 10月 10日 김홍집 內閣은 ‘王侯’를 西人(庶人)으로 廢位하는 調書(詔書)를 金弘集 內閣이 스스로 署押하여 高宗의 名義로 發表했다. 그 假짜 調書에서 “옛날 壬午 때 와 마찬가지로 짐을 떠나 避難했다.”라는 거짓말을 하였다. 이때 署名한 이는 金弘集을 비롯하여 김윤식, 曺喜昖, 서광범, 鄭炳昰 等이며, 度支部 代身 심상훈 (沈相薰)만 벼슬을 버리고 故鄕으로 내려갔다. 그때 “나라의 怨讐를 갚지 않으면 벼슬하지 않겠다.”라고 말했으며, 그런 까닭에 高宗으로부터 信任을 얻었다. [48]

王太子가 가장 먼저 明成皇后의 廢位에 反撥하면서 太子위를 讓位(讓位)하겠다며 抵抗하자 다음날인 10月 11日 ‘王侯’를 ‘西人’에서 後宮에 該當하는 ‘빈’(嬪)으로 昇格시켰다. 10月 14日 에는 皇后를 새로 揀擇하라는 指示가 내려졌으나, 高宗의 意思와는 關係가 없었고, 高宗은 그 뒤로 1919年 죽을 때까지 皇后를 새로 맞이하지 않았다. 明成皇后 弑害와 廢位 事實이 世上에 알려지자 民心은 極度로 나빠졌으며, 在野에서는 皇后의 復位를 要請하는 上疏를 올리고, 復讐를 외치는 義兵運動( 乙未義兵 )이 全國에서 일어났다. 廢位 消息을 들은 外國 公使들은 高宗이 直接 圖章을 찍지 않았다는 理由로 認准을 拒否하니, 日本을 除外한 모든 나라가 같은 反應을 보였다. [48] 特히 서울 駐在 러시아 代理公使 카를 베베르 는 乙未事變 事件 直後 서울 駐在 外交 代表團의 會合을 周旋하고, 日本 公使 미우라 故로에게 抗議하고 日本 公使가 朝鮮의 國母(國母) 弑害事件의 主謀者였음을 밝혀내는 데 重要한 役割을 하였다. [31]

日本과 金弘集 內閣은 惡化된 國內外 輿論을 撫摩하기 위해 11月 26日 廢后 詔勅을 取消하였다. [48]

事件 以後 [ 編輯 ]

이 事件은 當初 그들의 計劃과 期待, 卽 反日的이며 人痾擧逸(引俄拒日, 러시아 勢力을 끌어들이고 日本 勢力을 물리침) 政策을 取하는 閔妃를 除去하여 日本歲를 다시 回復하려고 하는 것과는 달리, 國際的 非難과 壓力은 勿論 朝鮮의 朝野(朝野)에 反日運動을 誘發시켰고, 淸日戰爭 以後 日本의 朝鮮支配의 政略이 도리어 水泡로 돌아가는 結果를 招來했다. [45]

日本의 蠻行이 滿天下에 드러나고, 列强의 牽制로 日本歲는 더 以上 朝鮮에서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었다. 10月 30日에는 日本이 掌握하고 있던 訓鍊隊가 解散되고 새로 親衛隊(王宮)와 鎭衛隊(地方)가 設置되었다. 11月 26日에는 王妃를 復位하고, 弑害事件에 關係한 軍部大臣 曺喜昖 과 警務使 권형진 을 罷免하였다. 大院君도 스스로 隱退하고, 이준용(李埈鎔)은 日本에 留學의 名目으로 亡命하였다. 그리고 12月 1日에는 王后弑害 事實과 國喪을 公表하여 弑害 事件의 뒷收拾은 一段落되었다. [45]

事件 以後 明成皇后가 復權되면서 朝鮮人 加擔者인 舶船 , 이주회 는 처형당하고, 우범선 , 이두황 , 이진호 는 日本으로 亡命했다. 우범선 은 뒤에 日本으로 찾아간 刺客 고영근 에게 暗殺되었다. 구연수 韓日 合邦 以後에 復權됐다. 興宣大院君이 明成皇后 暗殺에 관여된 것을 알게 된 高宗은 나중에 興宣大院君이 죽었을 때, 殯所에 찾아가지 않았다.

葬禮 論難 [ 編輯 ]

廢后 詔勅이 取消된 뒤 金弘集 內閣을 打倒하고 景福宮에 幽閉되다시피 한 高宗을 救出하여 美國 公使館으로 避身시키려던 춘생문 事件 이 發生하자 [49] 金弘集 內閣은 明成皇后가 殺害된 지 55日 만인 12月 1日 ( 陰曆 10月 15日 )에 그 死亡을 公式 發表하고 國喪을 치르려 했다. 이는 高宗의 親衛 쿠데타 勢力인 정동파가 沒落한 雰圍氣를 利用하여 國喪을 치르려 함이었다. [50]

1896年 2月 11日 俄館播遷 이 일어났으며, 그날 高宗은 詔勅을 내려 金弘集 一波, 곧 김홍집, 유길준, 鄭炳昰, 曺喜昖을 乙未史跡(乙未四賊)이라고 밝히어 驛道로 規定하고, 그들이 進行시키던 國母 再揀擇과 이미 내린 廢妃에 關한 詔勅을 無效로 돌렸다. 1896年 3月 10日 金弘集 內閣이 進行하던 國喪 節次를 中斷시키고, 無期限 延期하였다. 그 뒤 國喪 日程을 몇 次例 더 延期하였다. [51]

明成皇后에 對한 葬禮는 死後 2年이 지나 1897年 에 비로소 進行되었고, 大韓帝國 이 成立된 直後인 1897年 11月 22日 明成皇后의 遺骸는 淸凉里 홍릉 에 安葬되었다. 明成皇后의 葬禮를 치르기 위해 遺骸를 收拾할 때 뼈에 재와 모래가 뒤섞여 身體 部位가 判明되지 않아 高陽郡 에 사는 宦官을 불러 그의 말을 들으면서 石灰를 바르고 緋緞옷을 數十 벌 입혀 구부리고 포개고 묶어서 棺에 넣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궁내관 정만조가 이 光景을 目擊했다고 한다. [7]

關聯 事件 [ 編輯 ]

1896年 2月 當時 21歲였던 靑年 金九 명성황후 의 怨讐를 갚겠다면서 黃海道 치하포에서 日本人 쓰치다 조스케 (土田讓亮)를 殺害했다. 金九는 事件 現場에서 殺人 理由로 國母인 明成皇后의 怨讐를 갚기 爲한 것이라고 밝히고, 食堂 主人이자 洞長(洞長)인 이화보(李化甫)를 시켜 自身의 居處를 적은 布告文을 길거리 壁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逮捕되기를 기다렸다. 自宅에서 逮捕된 金九는 海州 監獄에 收監되었다가 仁川監獄으로 押送되었다. 金九는 死刑宣告를 받고 仁川監獄에서 死刑 執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高宗 의 指示로 死刑 執行이 中止되었다. 1896年 德壽宮 에 磁石式 電話機 가 設置되었는데, 이 電話는 主要 官衙는 勿論 仁川까지 開通되었다. 高宗은 仁川監獄에 直接 電話를 걸어 靑年 金九에 對한 死刑執行을 中止시켰다. 이는 電話가 開通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日本에 依한 明成皇后 弑害 事件은 俄館播遷 大韓帝國 成立 理由 中 하나가 되지 않았다. 1897年 10月 12日 高宗이 새벽 4時에서 6時 사이에 환球團에 나아가 스스로 皇帝에 卽位하고, 낮 12時에 王后를 “明成皇后”로 冊封·追尊하였다. 이튿날인 10月 13日 아침 皇帝는 皇后의 殯殿에 祭祀를 드리고, 午前 8時에 太極戰에 나아가 “ 對한(大韓) ”이라는 國號를 頒布하였다. [52]

高宗과 興宣大院君의 關係 惡化 [ 編輯 ]

高宗은 事件의 背後의 한 사람으로 興宣大院君이라 봤다. 1898年 흥선大院君 이 죽었을 때 아들 高宗이 葬禮式에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父子關係는 惡化되어 있었다. [53]

흥선大院君 이 죽자 漢城府에서는 7日場을 했으나, 高宗은 그의 葬禮式에 參席하지 않았다. 高宗은 그의 葬禮式 參席을 拒否했고, 興親王 李載冕은 或是나 自身도 죽임당할까봐 大院君의 訃音을 알리는 것을 머뭇거리면서 躊躇했다. 그러나 喪輿가 路祭를 한 뒤 序文(西門)으로 나갈 때 高宗은 마루에 서서 담넘어로 바라보며 오랫동안 大聲痛哭을 하였다. [54] 그 痛哭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한다. [54]

喪輿가 공덕리 로 가는 것을 보고 西大門 밖까지도 쫓아갔다고도 한다. [53]

評價 [ 編輯 ]

高宗은 事件 以前에 明成皇后의 身邊을 念慮하여 여러 措置를 取한다. 示威隊를 만들었으며, 그것으로도 安心이 되지 않아 西洋人 宮闕 警備員을 雇用하였다. 그러나 러시아人 警備員 阿罷拿視 세레딘 사바틴은 暴動이 있으리라는 情報를 中國人으로부터 받고도 防禦 對策을 建議하거나 세우지 않아 高宗의 期待에 副應하지 못했다. 또한 示威隊와 宮闕 警備員들은 事件 當日에도 새벽 2時에 이미 日本軍의 受賞한 動態를 把握했으나 安易하게 警備하다가 4時 30分 頃에야 高宗에게 急報를 傳했다. 高宗은 王后가 安全한 곳에 避身했다고 答辯했으나 當時의 急迫한 情況으로 보아 마땅한 避身處를 찾기에는 時間이 너무 促迫했으리라 여겨진다. [33]

當時 高宗은 王의 寢殿만은 敢히 侵犯하지 못하리라 豫想하고 王后를 寢殿인 옥호루에서 高宗의 寢殿인 곤領閤으로 부르고, 그래도 安心이 되지 않아 王后를 一般 宮女와 같은 服裝으로 宮女들과 함께 앉혀 暴徒들의 눈을 避하려는 措置를 取했다. 그러나 日本人 暴徒들은 곤령합마저 서슴없이 蹂躪하였다. [33]

한便 封建君主國家에서 朝鮮의 軍隊는 마땅히 王室 守護와 國土 防衛에 獻身해야 함에도 朝鮮 軍隊인 訓鍊隊 一部는 日本人 暴徒들의 逆謀에 加擔해 그들의 卒개로 轉落, 宮闕 侵入에 加勢했다. 한便 軟弱한 朝鮮 宮女들은 日本 暴徒들의 暴力과 脅迫 앞에 屈服하지 않았으나 1,500名의 宮闕 警備兵들은 怯을 먹고 武器와 軍服 上衣를 벗어던지고 달아나 버렸다. [33] 흥선大院君 은 政治的인 怨恨 關係로 王后 暗殺을 企圖했고, 日本 領事館을 찾아가 도움을 要請했다.

歷史的 評價 [ 編輯 ]

韓國에서는 一般的으로 이 事件을 高宗이 俄館播遷 을 決定하게 된 主要 原因으로 보며, 또한 義兵 蜂起 의 契機가 되었다고 여긴다. 또한 大韓帝國 成立의 한 原因으로 評價한다. 韓國의 親日派나 日本의 極右 人士들은 韓國의 近代化를 妨害하는 “閔妃”가 사라짐으로써 韓國의 近代化가 促進되었다고 主張한다. 反面 그와 같은 主張에 對해 西歐化만을 近代化로 誤解하여 自主的 近代化를 守舊·反動으로 여겨서 일으킨 暴擧라는 視角이 支配的이다.

事件을 照明함에 있어 朝鮮人 協力者들의 存在 亦是 看過하기 힘들다. 흥선大院君 은 日本 公使館을 찾아가 명성황후 除去에 도움을 要請했는데, 이를 두고 여러 가지 相反된 評價가 存在한다. 大院君의 加擔 與否에 對해서는 日本의 臆測이나 陋名이라는 視角이 支配的이었으나, 1990年 代 以後 바뀌었다. 1990年 代 初 大院君의 加擔 疑惑이 提起되었다. 유길준 이 美國人 隱士 모스 牧師에게 보낸 便紙에서 흥선大院君 을 朝鮮人 最高委 協力者로 指目한 것이 알려지게 됐다. 유길준 은 明成皇后 暗殺은 實行되었지만 興宣大院君이 명성황후 暗殺 問題를 日本公使와 協議하고 日本 側에 若干의 도움을 要請한 것은 큰 失手였다고 指摘하였다. [21] 그러나 유길준 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方法이 없었다.'는 意見도 덧붙였다. [21]

박은식 의 韓國通史와 黃玹 의 매천야록 等 서로 다른 視角을 가진 人士들에 依해 興宣大院君이 明成皇后 暗殺 協力者로 指目되었다. 박은식 春秋戰國時代 朝暾 (趙盾)李 王을 暗殺한 것을 比喩하여 이와 다를 바 없다고 하였으며, 感情이 사람의 良心을 가린다며 批判하였다. [23]

大院君을 暗殺 背後로 指目한 유길준 亦是 日本 浪人들의 指揮者로 指目됐다. 윤치호 는 그의 日記에서 명성황후 를 暗殺한 日本 浪人들의 指揮者 中 한사람이라고 指目하였다. [24] 명성황후 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 는 兪吉濬과 日本人 이시쓰카가 事件의 顚末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自身을 저녁 食事에 自身을 招待한 것이라고 主張하였다. [24]

當代에도 朝鮮人 協力者들의 이름이 指目되었으나, 關聯된 朝鮮 인 中 흥선大院君 유길준 亦是 處罰되지 않았다. 흥선大院君 은 高宗의 生父이니 皇帝 高宗 이 아버지 大院君을 處罰할 수는 없었지만, 代身 大院君 이 죽자 葬禮式에 不參한다. 大院君의 孫子이자 自身의 조카인 이준용 은 遊學 形式으로 日本으로 追放한 뒤, 閔氏 勢力은 꾸준히 刺客을 보내 이준용 을 暗殺하려 하였으나 失敗한다. 유길준 은 避身하였고, 處罰은 전 軍部借款 이주회 , 2大隊長 이두황 , 日本 公使館 通譯官 舶船 等을 處罰하는 線에서 終結되었다. 이 事件을 奇貨로 韓國의 開化派들 中 一部는 日本으로 亡命하였다. 事件의 主要 加擔者의 한사람인 朝鮮軍 1大隊長 우범선 은 日本으로 逃避하였으나 後에 朝鮮 朝廷에서 派遣한 刺客人, 閔氏의 側近이자 開化派 文身 고영근 에 依해 暗殺된다.

명성황후 生存說

2013年 6月 30日 정상수 韓國방송통신대 敎授는 乙未事變 當時 明成皇后가 日本 浪人들에게 殺害되지 않았다는 內容의 獨逸과 英國의 外交文書를 찾았다고 밝혔다. 정상수가 찾아낸 外交文書에 따르면 乙未事變이 일어난지 4個月 後인 1896年 2月 6日 러시아 駐在 獨逸大使 後考 라돌린은 獨逸帝國 總理 쉴링스퓌르스트 호엔로에게 "明成皇后가 살아있으며, 서울 駐在 러시아 公使로 避身하려 한다"는 趣旨의 祕密文書를 보냈다.

俄館播遷 直後인 1896年 2月 15日 서울 駐在 英國 總領事 윌터 힐리어는 베이징 駐在 英國 代理公使 뷰클럭에게 乙未事變 當時 明成皇后의 死亡 與否에 對해 朝鮮 高宗 이 말하지 않고 있다고 報告했다. 高宗은 乙未事變 以後 明成皇后가 死亡했다고 發表한 바 있는데, 4個月 後에는 英國 總領事에게 明成皇后의 死亡 與否에 對해 沈默한 것이다. 힐리어는 乙未事變 直後인 1895年 10月 9日 乙未事變 當時 宮女 서너 名이 죽었고, 明成皇后는 脫出했다는 內容의 報告를 베이징에 보낸 바 있다.

정상수의 發表에 對해 여러 歷史學者들은 다음과 같은 意見을 發表했다. 전우용 은 정상수가 發掘한 外交資料에 對해 "日本이 事件을 撫摩하기 위해 퍼뜨린 逆宣傳이 包含됐을 可能性이 있다"고 말했다. 이태진 國史編纂委員長은 "獨逸 外交文書가 信賴性이 높다는 點은 首肯한다"면서도 이 文書가 俄館播遷 이 일어난 時期와 비슷한 時點에 作成됐다며 "러시아 公使館으로 避身을 願한 사람은 王妃가 아니라 王의 誤記일 可能性이 있다"고 말했다. 강상규 韓國방송통신대 敎授는 "定說에 安住하지 않고 1次 史料를 土臺로 緻密한 再檢討 作業을 벌여야 한다"고 말했다. [55] [56]

日本人 暗殺犯 後孫들의 謝罪 [ 編輯 ]

2009年 8月 日本 아사히 TV의 "報道 스테이션"은 明成皇后 弑害 事件에 對한 프로그램을 放映하였는데, 犯人들의 後孫中 카와노 타츠미와 이에이리 케이코가 明成皇后의 後孫을 만나 謝罪하는 모습을 담았다. 日本의 一部 極右 性向의 네티즌들은 "歷史 僞造, 虛僞報道"라고 하기도 했으며, "皇后를 殺害한 것은 朝鮮人들이었다"고 主張하였다. [57] [58] 아사히 TV 報道 以後 全 獨立記念館 館長 김삼웅 은 乙未事變에 參與했던 漢城신보 主筆 拘泥土毛 시게아키의 外孫子 카와노 타츠미를 만나 個人的인 反省과 容恕에 그치지 않고, 日本 政府가 反省하고 謝罪할 수 있도록 積極 提案해 달라고 要請했다. [59]

구마모토와 후쿠오카의 組織的 關聯 [ 編輯 ]

乙未事變의 犯行 構造를 보면, 日本은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 미우라 고로 야마구치 出身들이 背後에서 犯行을 敎唆하여 總括 企劃, 指揮하고, 도오街츠 아키 , 츠키 나리히카루 후쿠오카 出身들이 具體的으로 計劃을 樹立하여 아다치 겐조 , 拘泥土毛 시게아키 구마모토 出身들이 必要한 人力을 動員하여 弑害를 實行하였다는, 事件 關聯者들의 地域的 連結고리가 있다. 이는 야마구치가 團地 후쿠오카나 구마모토와 地理的으로 가깝다는 것 뿐 아니라, 후쿠오카에 本部를 둔 현양사 천우협 , 흑룡회 帝國主義 征韓論 에 立脚, 連繫하여 計劃的이고 組織的으로 背後 役割을 한 것이다. 나가사키, 가고시마까지 包含하면 犯行 加擔者들의 絶對 多數가 큐슈 地域 出身이라는 同質性이 있다.

1896年 1月 히로시마 에서 열린 48名의 日本 民間人 身分 犯人들에 對한 豫審과 이에 앞서 8名의 日本軍 現役 軍人들에 對한 軍事裁判 結果는 '證據 不充分'으로 '電源 免訴, 無罪 釋放'이었다.

司法 處理 [ 編輯 ]

乙未事變을 朝鮮人들의 所行으로 돌리려던 미우라의 凶計가 失敗로 끝나자, 日本은 미우라 公使를 비롯, 事件을 主動한 日本軍 陸軍 少佐, 宮內府 및 軍部 顧問官 오카모토 류노스케 , 日本人 領事館步, 浪人들의 길 案內人 호리구치 구마이치 (堀口 九萬一), 領事館 警察總帥 誤記하라 히데지로 等과 外務省 浪人, 日本 領事館 警察 等 暗殺을 主動한 日本人 浪人들 等 關聯者 48名을 召喚하여 히로시마 裁判所에 回附했다. 그러나 豫審 判事 요시오카(吉岡美秀)는 證據가 不確實하다는 理由로 다음해( 1896年 ) 1月 20日 이들을 모두 釋放하였다. [48] 이와 別途로 駐朝鮮 公使館 無關, 日本陸軍 砲兵 中佐 구스노세 유키히코 (楠瀨 幸彦) 等 日本軍 將校 8名은 軍法會議에 回附하는 形式을 取했다. 日本軍의 軍法會議도 關聯者들을 全員 無罪 放免했다. 日本 側 加擔者 54名 中 누구도 刑事處罰받지 않았다.

乙未事變 日本 側 關聯者 [ 編輯 ]

犯行 背後/敎師 [ 編輯 ]

이름 生年 沒年 出身/居住 學歷 軍 經歷 當時 職責 評決 以後 經歷 備考
이노우에 가오루
( 井上 馨 )
1836 1915 야마구치 명륜館, 蘭學 사무라이 前 造船公社, 外務大臣 - 總理大臣 候補 犯行 敎師
야마가타 아리토모
( 山縣有朋 )
1838 1922 야마구치 마쓰시다村숙 陸軍大將 1軍 司令官, 貴族院議員 - 總理大臣 -
하나부사 요시모토
( 花房義質 )
1842 1917 오카야마 적숙(適塾) 蘭學 - 前 造船公社 - 男爵, 自作 -
이토 히로부미
( 伊藤博文 )
1841 1909 야마구치 마쓰시다村숙 사무라이 總理大臣 - 朝鮮痛感 背後
무쓰 무네미쓰
( 陸奧宗光 )
1844 1897 와카야마 고베海軍調鍊소 사무라이 外務大臣 - - -
사이온지 긴모치
( 西園寺公望 )
1849 1940 교토 소르본대학 劍術 外務大臣代理, 文部大臣 - 外務, 總理大臣 -
노무라 야스시
( 野村 靖 )
1842 1909 야마구치 마쓰시다村숙 사무라이 內務大臣 - 遞信大臣 -
요시카와 아키마사
( 芳川?正 )
1842 1920 도쿠시마 - - 私法大臣 - 遞信大臣, 伯爵 -
오야마 이와오
( 大山 ? )
1842 1916 가고시마 - 陸軍大將 陸軍大臣 - 陸軍參謀總長, 工作 -
가와카미 소로쿠
( 川上操六 )
1848 1899 가고시마 - 陸軍中將 陸軍本部 參謀次長 - 陸軍參謀總長 犯行 總責
스에마쓰 겐조
( 末松謙澄 )
1855 1920 후쿠오카 도쿄事犯 - 法制局長 - 遞信, 內務大臣 -
미즈노 렌타로
( 水野 練太郞 )
1868 1949 아키타 도쿄帝大 法學部 - 內務 官僚 - 文簿, 內部大臣 -

犯行 幇助/事後 報告 [ 編輯 ]

이름 生年 沒年 出身/居住 學歷 軍 經歷 當時 職責 評決 以後 經歷 備考
우치다 사다쓰지 (?田定槌) 1865 1942 후쿠오카 도쿄帝大 法科大學 - 朝鮮公使館 一等領事 - 스웨덴 等 各國 公使, 大使 報告書 作成
이시즈카 에이조 (石塚英藏) 1866 1942 후쿠시마 도쿄帝大 政治學 - 朝鮮顧問官 - 臺灣 總督 日本 法制局 報告
니이로 도키스케 (新納時亮) - - - - 海軍少佐 公使館 守備隊 - - 日本軍 本營 報告

犯行 企劃/指揮/直接 加擔 [ 編輯 ]

이름 生年 沒年 出身/居住 學歷 軍 經歷 當時 職責 評決 以後 經歷 備考
미우라 고로 (三浦梧?) 1847 1926 야마구치 명륜館 陸軍中將 造船公社 無罪 [60] 樞密院 顧問官 兼 궁내관 犯行 實行 總括
시바 詩로 (柴 四?) 1853 1922 지바 美 펜실베니아大 사무라이 造船公社 參謀 無罪 [60] 衆議院 10線,
農商務 次官, 外務 참鼎冠
總括 企劃
스기무라 후카시 (杉村 濬) 1848 1906 도쿄 - - 公使館 일等書記官 無罪 [60] 臺灣總督府 內務部長 -
구스노세 유키히코 (楠瀨幸彦) 1858 1927 고치 陸軍士官學校 砲兵中佐 朝鮮公使館 無關 無罪 [61] 陸軍 代身, 陸軍 中將 日 軍警 總括
호리구치 구마이치 (堀口 九萬一) 1865 1945 니가타 도쿄帝大 法學部 - 朝鮮公使館 領事館步 無罪 [60] 停職 1年, 스페인公使 -
아사야마 겐조 (?山??) 1850 - 나가사키 - - 조선국 補佐官 無罪 [60] - -
오카모토 류노스케 (岡本 柳之助) 1852 1912 와카야마 砲術練習所 砲兵少佐 朝鮮宮內部 兼 軍部顧問 無罪 [60] - 朝鮮 側과 共謀,
홍계훈 殺害
시부타니 街土地 (澁谷加藤次) 1855 - 구마모토 - - 朝鮮內部拷問 無罪 [60] - -
시부타니 後尾히데 (澁谷文英) - - - - - 通譯官/一連種 僧侶 - - -
誤오우라 시게히코 (大浦茂彦) 1860 - 나가사키 - - 通譯官 無罪 [60] - -
하스모토 야스마루 (蓮元泰丸) 1867 - 市價 - - 通譯官 無罪 [60] - -
우마야바라 가네모토 (馬屋原 務本) - - - - 陸軍少佐 公使館 守備隊將 無罪 [61] - 日本軍 指揮
이시모리 요시나오 (石森吉猶) - - - - 陸軍大尉 公使館 守備隊 無罪 [61] - -
다카마쓰 데쓰다로 (高松?太?) - - - - 陸軍大尉 公使館 守備隊 無罪 [61] - -
高이토 유키浮靡 (鯉登行文) - - - - 陸軍大尉 公使館 守備隊 無罪 [61] - 홍계훈 에 銃擊
後지土 요조 (藤??三) - - - - 陸軍大尉 守備隊 1中隊長 無罪 [61] - -
무라이 우소 (村井右宗) - - - - 陸軍大尉 守備隊 2中隊長 無罪 [61] - -
마구 마사스게 (馬來政輔) - - - - 陸軍大尉 守備隊 3中隊長 無罪 [61] - -
미야모토 다케打로 (宮本 竹太郞) - - - - 陸軍少尉 公使館 守備隊 - - 王后 弑害
마키 구마토라 (木 熊虎) - - - - - 公使館 守備隊 - - -
誤記하라 히데지로 (荻原 秀次?) 1866 1928 나가노 - - 外務省 京釜 無罪 [60] - 日頃 指揮,
王后 屍身 燒却
와타나베 다카지로 (渡? 鷹次?) 1852 - 도쿄 - - 外務省 巡査 無罪 [60] - -
誤打 토시미쓰 (小田俊光) 1862 - 가고시마 - - 外務省 巡査 無罪 [60] - 宮女 殺害
나루세 기시로 (成? 喜四?) 1865 - 가고시마 - - 外務省 巡査 無罪 [60] - -
요코誤 有志로 (?尾 勇次?) 1867 - 나가사키 - - 外務省 巡査 無罪 [60] - 宮女 殺害
사카이 마스다로 (境 益太?) 1869 - 나가사키 - - 外務省 巡査 無罪 [60] - 이경직 殺害
시라이시 요시다로 (白石 由太?) 1872 - 가고시마 - - 外務省 巡査 無罪 [60] - -
키노와키 요시노리 (木脇祐則) 1873 - 가고시마 - - 外務省 巡査 無罪 [60] - 宮女 殺害
社勢 驅魔테쓰 (佐瀨熊鐵) 1866 - 후쿠시마 - - 警務廳 醫師(醫務) 無罪 [60] 衆議院 -
아다치 겐조 (安達謙?) 1864 1948 구마모토 세이歲이고 - 漢城신보 社長 兼 記者 無罪 [60] 衆議院 14線, 遞信, 內務 代身 浪人 總括
拘泥土毛 시게아키 (國友重章) 1862 1909 구마모토 - - 漢城신보 主筆 無罪 [60] - 浪人 募集責
고바野歌와 히데오 (小早川 秀雄) 1870 1920 구마모토 - - 漢城신보 編輯長 無罪 [60] 큐슈一日新聞 社長 -
히라야마 이와히코 (平山勝熊) 1867 - 구마모토 - - 漢城신보 記者 無罪 [60] - -
사사키 타다시 (佐?木 正) 1873 - 구마모토 - - 漢城신보 記者 無罪 [60] - -
히라야마 쓰마누마 (平山岩彦) 1867 - 구마모토 - - 漢城신보 客員 無罪 [60] 衆議院 5線 이경직 殺害
美野兎모 유키 (宮住勇喜) 1873 - 구마모토 - - 漢城新報 寺院 無罪 [60] - -
우시지마 히데오 (牛嶋英雄) 1873 - 구마모토 - - 漢城新報 寺院 無罪 [60] - -
야마다 레츠歲이 (山田烈盛) 1862 - 지바 - - 日本新聞 特派員 無罪 [60] - -
기쿠치 겐조 (菊池謙讓) 1870 1953 구마모토 도쿄專門學校 - 國民新聞 特派員 無罪 [60] - -
요시다 유키치 (吉田友吉) 1872 - 이와테 - - 보지(報知)신문 通信員 無罪 [60] - -
오오사키 마사요시 (大崎正吉) 1865 - 미야기 - - 천우협(天佑俠) 無罪 [60] - -
다케다 限時 (武田範治) 1863 - 후쿠오카 - - 천우협(天佑俠)/文筆家 無罪 [60] - -
스기야마 시게마루 (衫山茂丸) 1864 1935 후쿠오카 - - 현양사(玄洋社) - 政治運動家, 實業家 -
츠키나리 히카루 (月成 光) 1862 1910 후쿠오카 - - 현양사(玄洋社) 無罪 [60] - 一名 梶川光
도오街츠 아키 (藤勝 顯) 1859 1917 후쿠오카 - - 현양사(玄洋社) 無罪 [60] - 王后 弑害
스즈키 시게모토 (鈴木重元) 1853 - 니가타 - - ?業 無罪 [60] - -
데라자키 다이키치 (寺崎泰吉) 1862 - 가나카와 - - 賣藥商(??商) 無罪 [60] - 王后 自害(刺害)
삿社 마사시 (佐? 正之) 1862 - 구마모토 - - 賣藥商(??商) 無罪 [60] - -
나카무라 多테오 (中村楯雄) 1863 - 구마모토 - - 雜貨商 無罪 [60] - 王后 慘殺(斬殺)
난바 하루키치 (難波春吉) 1864 1930 가나카와 釜山語學校 - 雜商人(??行商) 無罪 [60] - -
마쓰무라 多츠키 (松村辰喜) 1868 1937 구마모토 - - 季冬小學校 敎師 無罪 [60] 구마모토市議員 -
다나카 겐度 (田中賢道) 1856 - 구마모토 - - 農業 無罪 [60] - -
사토 게利他 (佐藤敬太) 1858 - 구마모토 - - 農業 無罪 [60] - -
히로다 토메요시 (廣田止善) 1861 - 구마모토 - - 農業, 구마모토 國權黨원 無罪 [60] - -
驅魔베 요네旗幟 (?部米吉) 1868 - 구마모토 - - 農業 無罪 [60] - -
마에다 都市죠 (前田俊?) 1874 - 구마모토 - - 農業 無罪 [60] - -
스즈키 準켄 (鈴木順見) 1868 - 교토 - - 無職 無罪 [60] - -
街타노 다카오 (片野猛雄) 1873 - 구마모토 - - 無職 無罪 [60] - -
사와무라 요시오 (澤村雅夫) 1873 - 구마모토 - - 無職 無罪 [60] - -
이에이리 街키치 (家入嘉吉) 1877 - 구마모토 - - 無職 無罪 [60] - -
나카지마 히데오 (中島英雄) - - - - - - - - -

日本 側 關聯者들의 靈前 [ 編輯 ]

乙未事變에 關聯된 日本 側 關聯者들은 大部分 榮轉, 크게 榮達하였다. 가장 代表的인 人物 中 하나가 가와카미 소로쿠 , 그 外에 시바 詩로 , 구스노세 유키히코 , 아다치 겐조 等이 있다.

  • 가와카미 소로쿠 (川上操六, 1848年生) : 乙未事變 當時 參謀次長으로 있으면서 總責 役割을 하였다. 그 結果 乙未事變 2年 뒤에 陸軍參謀總長이 된다. 陸軍參謀總長은 歷代로 王族들이 맡아오던 자리인데, 王族이 아니면서 最初로, 또한 中將 階級으로 前無後無하게 陸軍參謀總長이 되었다. 1884年 에 歐美帝國의 兵制를 視察할 때만 해도 吳오야마 이와오 (大山?, 1842年生)를 遂行하고 왔지만, 1898年 같은 가고시마 出身으로 6살이나 先輩인 그를 제치고 參謀總長 자리에 먼저 오른 것이다. 當時 그에 對한 日本 內의 評價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 미우라 고로 (三浦梧?, 1847年生) : 乙未事變 때 造船工事로 犯行 實行을 總括하여 事件이 國際的으로 飛火하자 撫摩 次元에서 一時 拘留되었으나 곧 無罪放免되자 日王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그를 맞았다 한다. 後에 樞密院 顧問官 兼 궁내관으로 登用되었다.
  • 스기무라 후카시 (杉村 濬, 1848年生) : 乙未事變 때 朝鮮公使館 일等書記官으로 無罪 面所되어 석달 뒤 臺灣總督府 內務部長으로 榮轉했다.
  • 시바 詩로 (柴 四?, 1853年生) : 乙未事變 때 朝鮮工事 參謀로 犯行 全般을 總括 企劃했고, 無罪 面所되어 政治家로 變身, 衆議院 10選議員, 農商務 次官, 外務 참定款을 지냈다.
  • 구스노세 유키히코 (楠瀨幸彦, 1858年生) : 乙未事變 때 砲兵中佐로 朝鮮公使館 武官이었다. 浪人 一黨과 日本軍들을 犯罪 現場으로 引率, 指揮하였으나 軍事裁判에서 無罪 面所되어 臺灣總督府 參謀、西部都督府 參謀長, 12師團 參謀長을 거쳐、1901년 將軍이 되었고, 後에 陸軍 中將으로 陸軍大臣을 지냈다.
  • 호리구치 구마이치 (堀口 九萬一, 1865年生) : 乙未事變 때 朝鮮公使館 領事官報로 無罪 面所되어 停職 1年 後 復職되어 後에 스페인公使 等을 지냈다.
  • 이시즈카 에이조 (石塚英藏, 1866年生) : 乙未事變 때 朝鮮顧問官으로 直接 干與하지는 않았으며, 後에 臺灣 總督을 지냈다. 事件 後 그가 作成해 日本 法制局長에게 보낸 報告書는 미우라 고로 等의 處罰 可能性을 開陳해 그나마 最小限의 良心的 斷面을 보여주었다.
  • 아다치 겐조 (安達謙?, 1864年生) : 乙未事變 때 漢城신보 社長 兼 記者로 犯行을 實行할 浪人들을 總括하였으나 無罪 面所되어 以後 衆議院 14線議員에, 遞信, 內務 大臣을 지냈다. 事件에 參與한 純粹 民間人 身分으로서는 最高로 令達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 한영우 (2001年 10月 20日).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初 1刷판. 서울: 효형출판. ISBN   89-86361-57-4 .  

各州 [ 編輯 ]

  1. 전계완 <日本, 다시 侵略을 準備한다> 智慧나무 2014年 p163
  2. "明成皇后 弑害犯은 日本軍 미야모토 所謂"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015-11-06 오마이뉴스
  3. '弑害'란 單語는 子息이 父母나 直系尊屬을, 百姓이나 臣下가 王이나 王妃를 殺害했다는 意味이기 때문에 '弑害'란 單語가 들어간 名稱은 適切하지 못하다는 意見이 있다.
  4. "'日帝 蠻行'을 改革이라니, 이것부터 바꿔야" 2015-11-06 오마이뉴스
  5.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陰曆 8月 , 12쪽.
  6. 날이 밝은 뒤 타다 남은 遺骨을 宮闕을 巡視하던 우범선 이 偶然히 發見하여 蓮못 향원정에 넣으려고 했으나, 訓鍊隊 參尉 윤석우 (尹錫禹)가 或是 皇后의 屍身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收拾하여 멀리 떨어진 吳雲閣 西峯(西峰) 밑에 埋葬했다. 뒷날 親日 內閣은 윤석우를 비롯한 軍部 協辦 이주회, 日本語 通譯官 舶船 (朴銑) 等을 無故하게 反逆罪 또는 不敬罪로 死刑에 處했다.
  7.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58~60쪽.
  8. 明成皇后 弑害 事件, "日王도 알았다" 2005-05-10 SBS 뉴스
  9. “明成皇后 弑害 沈澱 마당서” 2005-01-13 京鄕新聞
  10.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42~45쪽.
  11. 《노스 차이나 헤럴드》, 1895年 11月 21日子.
  12. 김기철 (2005年 10月 5日). " 이토 히로부미, 明成皇后 弑害 介入" 뒷받침하는 根據 史料 日 國會圖書館서 發掘” . 朝鮮日報. 2006年 3月 2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9月 5日에 確認함 .  
  13.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45~47쪽.
  14. 外交官이 아닌 軍人 出身을 公社로 보냈다는 事實 自體가 特殊 任務를 띠고 있었음을 暗示한다는 主張이 있다.
  15.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47~50쪽.
  16. 이러한 民間人들의 加擔은 일이 世上에 알려지더라도 公使館이나 日本 政府와 無關하다고 强辯할 수 있었기 때문에 重要했다.
  17. 정지환 (2002年 6月 3日). “[單獨發掘] '에조 報告書' 日本서 入手 國內 첫 公開” (HTML) . 오마이뉴스 . 2008年 9月 4日에 確認함 .  
  18. 그러나 《매천야록》에서는 이 流矢가 金弘集 等이 大院君에게 罪를 뒤집어씌우기 爲해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19. 박은식, 《 한국통사 》(김승일 驛, 범우사. 1997) 193쪽.“當時 日本 公使 이노우에는 歸國하고 미우라(三浦梧樓)가 後任으로 到着하여 스기무라(彩村濬)  · 오카모도(岡本柳之助) 等과 閔妃 除去를 謀議했는데, 大院君을 끌어들여 허수아비로 利用하려고 오카모도가 大院君을 찾아가 說得했다. 그 무렵 大院君은 長孫 準用(埈鎔)李 교동에 갇힌 以來 不滿을 품고 孔德洞 別莊에 蟄居하면서 外出도 하지 않고 있었다.”
  20. 日本 浪人들이 明成皇后를 除去하려 하기 以前에 大院君이 日本 領事館을 찾아가 明成皇后를 除去해 달라고 要請했다는 것이다.
  21. 정용화, <文明의 政治思想: 兪吉濬과 近代韓國> (정용화 지음, 文學과知性社, 2004) 93페이지
  22. 史學者이며 大韓民國 臨時 政府 의 2代 大統領인 박은식 도 明成皇后 暗殺의 重要 背後의 한 사람으로 흥선大院君 을 指目하였다. 朴殷植은 春秋戰國時代 朝暾 (趙盾)李 王을 暗殺한 것을 比喩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評價하였으며 感情이 사람의 良心을 가린다며 批判하였다.
  23. 박은식, 《 한국통사 》(김승일 驛, 범우사. 1997) 193쪽.“...秋菊 春秋時代에 趙淳(趙盾)李 王을 誅殺했다는 것과 그 處地가 다를리 없었다. 아! 哀痛하도다. 感情이 사람의 良心을 가린다더니 어찌 이 地境에까지 이르게 되었단 말인가!”
  24. 윤치호 <윤치호 日記(1916-1943)> (尹致昊, 김상태 便 飜譯, 역사비평사, 2007) 585페이지
  25. 黃玹, 《譯註 매천야록 (上)》 (임형택 外 驛, 文學과 知性史, 2005) 448 페이지
  26.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50~53쪽.
  27. 精巧(鄭喬). 《 大韓季年史 》 卷2 高宗 32年 8月 20日條.
  28. 기쿠치 겐조 , 《近代造船社》 下卷(1939年, 鷄鳴社, 京城), 406~407쪽. 乙未事變 加擔者로서 그날 밤 現場에 있었던 기쿠치 겐조(菊池謙讓)의 記錄에 따르면, 한 무리는 連絡處人 派城館(巴城館)에 모였다가 바로 景福宮으로 가고, 다른 한 무리는 漢城신보에 모였다가 興宣大院君을 護衛하여 弓으로 갔다고 한다.
  29. 우치다 社多쓰値 (?田 定侈?) 一等領事가 事件 直後 作成한 〈王城事變 詳細報告書〉에 따르면, “大院君이 좀체로 나오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면 날이 새기 때문에 많은 日本人 장사들이 함께 억지로 끌어내어 先頭에 세워 王宮으로 向했다.”라고 한다.
  30. 미우라가 方略서 메모를 고쳐쓴 때문이었다.
  31. 박종효 敎授 (2002年 1月 1日). “[資料發掘|베베르의 弑害 報告書와 證言書]” (HTML) . 新東亞. 472~485쪽面 . 2008年 9月 5日에 確認함 .  
  32. 박종효 敎授 (2002年 1月 1日). “[資料發掘|베베르의 弑害 報告書와 證言書]” (HTML) . 新東亞. 472~485쪽面 . 2008年 9月 5日에 確認함 .  
  33. 박종효 敎授 (2002年 1月 1日). “[資料發掘|베베르의 弑害 報告書와 證言書]” (HTML) . 新東亞. 472~485쪽面 . 2008年 9月 5日에 確認함 .  
  34. 高宗이 美國 公使館과 러시아 公使館에 連絡하라고 한 까닭은 美國人과 러시아人이 宮闕 內에서 活動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一例로 示威隊 指揮官은 退役 美軍 大領 出身의 윌리엄 다이 였고, 美國 公使館에서 醫療 宣敎師로 活動하던 앨런은 最初의 外國人 御醫 였다. 또한 美國과 러시아 外交官이 日本은 유럽 을 두려워한다고 建議하자 採用한 유럽人 警備員 가운데 建築技士 사바틴이 있었다.
  35. 박종효 敎授 (2002年 1月 1日). “[資料發掘|베베르의 弑害 報告書와 證言書]” (HTML) . 新東亞. 472~485쪽面 . 2008年 9月 5日에 確認함 .  
  36. 宮 안의 狀況과 兵力들의 宮 안에서의 行動은 資料와 證言마다 差異가 있다.
  37. 기쿠치 겐조, 《近代造船社》 下卷(1939年, 鷄鳴社, 京城), 406~407쪽.
  38. 한영우, 54쪽 ~ 58쪽에서.
  39. 신봉승, 《朝鮮王朝 500年:24. 王朝의 悲劇》 (금성출판사 , 2010) 390페이지
  40. 그밖에도 나카무라 多테오 (中村楯雄), 후지카스, 拘泥土毛 시게아키 (國友重章) 等의 浪人과 미야모토 所謂, 마키 等의 日本 軍人들이 皇后의 寢室에 亂入하여 칼을 휘둘렀기 때문에 누가 犯人인지 指目하기 힘들다는 指摘도 있다.
  41. “[現代史 俗說과 眞實(2)- ‘에조文書 435號’의 實體] “明成皇后 ‘死亡 前 능辱說’… 作家의 想像力 지나쳤다”” . 2004年 12月 1日 . 2020年 9月 14日에 確認함 .  
  42. 新東亞. ““日本人 暴徒가 가슴을 세 番 짓밟고 日本刀로 亂刺했다”” .  
  43. “閔妃弑害에 使用된 칼 日本 神社서 發見” . 2020年 9月 14日에 確認함 .  
  44. 10月 8日 새벽을 말한다.
  45. 『(新編) 韓國史』, 國史編纂委員會, 探究當
  46. 甚至於는 午後 3時 25分發 電報에서도 “韓人 死亡者는 夫人 둘에 兵卒 둘은 確實하다. 王ㆍ世子는 安全, 王妃의 素材는 알지 못하나 달리 도망간 證據는 없다”라고 하여 本國의 上部에까지 事實을 끝까지 숨기고 있다.
  47. 《한국통사》에는 미우라가 高宗을 謁見한 곳이 건청궁으로 되어 있다.
  48.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60~63쪽.
  49. 《고종실록》 卷33, 高宗 32年 11月 15日條.
  50.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64~68쪽.
  51.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68~75쪽.
  52.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154쪽.
  53. 우리곁에 살아 있는 歷史의 脈搏과 숨결 월간조선 2001年 3月號
  54. 나각순, 승상배, 이창훈, 《雲峴宮과 興宣大院君》 (鍾路文化院, 2000) 207페이지
  5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010600035&code=960201
  5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010600025&code=960201
  57. 日本 아사히TV '明成皇后 弑害事件' 報道 論難 朝鮮日報
  58. 그러나, 實狀은 日本 公使館 側에서 미우라 고로가 主導하여 '朝鮮人들이 皇后를 殺害한 것'으로 輿論造作韓 것이 드러났다. <KBS 다큐- 역사스페셜> - 參照.
  59. 심규상 "더 謝罪하기 위해 오래 살고 싶다" , 오마이뉴스
  60. 1896年(明治29年) 1月20日 日本 ?島地裁 予審終結決定書
  61. 1896年(明治29年) 1月14日 日本軍 5師團 軍法?議判決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