阿罷拿視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
(
우크라이나語
:
Афанас?й ?ванович Серед?н-Сабат?н
, 1860年 1月 1日 ~ 1921年)은 1890年부터 1904年까지
朝鮮
과
大韓帝國
에서 일했던
러시아 帝國
國籍의
우크라이나人
建築 記事이다.
그는
서울
의 여러 유럽式 建物의 建築에 關與한 것으로 推測되는데,
大韓帝國 高宗
皇帝가
俄館播遷
當時 1年間 묵었던
러시아 公使館
이 그의 作品으로 確認된다. 이때의
舊 러시아 公使館
建物은
大韓民國의 史跡
으로 指定되어 있다. 사바틴은
乙未事變
때
景福宮
건청궁에서 있었던
명성황후
弑害 事件을 直接 目擊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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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年 10月 1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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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年 1月 1日 阿罷拿視 세레딘사바틴은
우크라이나
폴타바週
루브니
에서 태어났다. 세레딘사바틴의 아버지는 이반 바실리예비치 세레딘사바틴으로 우크라이나 地方의 貴族이며, 폴타바注意 州都(州都)인
폴타바
隣近 루브니에 領地가 있었다. 그는 平民 身分의
코사크人
女性과 結婚해 세레딘사바틴을 낳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再婚했다. 繼母는 어린 그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어서 그가 滿 14살이 되던 1874年에 집에서 1,000km 以上 떨어진
상트페테르부르크
의 三寸에게 몸을 依託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王立藝術아카데미에 一 年間 在學했다. 成績이 좋지 않았던 그는 藝術아카데미 1學年만 마친 後 建築學校로 籍을 옮겨봤으나 亦是 成績이 나빠 그마저 그만둬야 했다. 卒業證이 없어 就職을 할 수 없던 그는 이곳저곳을 轉轉하다 겨우 러시아 海軍 養成所에 入校해 航海士가 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
의 極東 艦隊로 任官하게 됐다. 그때 아내
[1]
를 만나게 돼 結婚 生活을 始作했고 以後 極東에서 航海士로 몇 年을 더 보냈다.
1883年 9月 17日 세레딘사바틴은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에게 測量 土木技師로 雇用되어
大韓帝國
으로 떠났다. 그가 처음 맡은 役割은 英祖敎師(營造敎士)로서 王宮 新築을 위한 圖面 作成 準備라던지 甓돌 가마를 짓는 것이 任務였다. 24歲라는 젊은 나이에 바다를 떠나 韓國에 定着하면서 그는 景福宮 關門角 等 宮闕 建築에 關與한 것으로 確認된다. 이러한 途中에 사바틴은
1895年
乙未事變
當時
景福宮
에서 日本 浪人들의 손에
명성황후
가 쓰러지는 모습을 直接 目擊하였고, 이를 證言하였다.
[2]
乙未事變 目擊으로 因해 身邊의 威脅을 느낀 사바틴은 暫時 韓半島를 떠났다가 1899年 警 다시 仁川으로 돌아왔으며, 그때부터 1904年 러일戰爭 後 韓半島를 떠나기까지 建築과 土木事業에 參與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以後 英語를 배워 英國新聞의 極東 特派員을 兼任하기도 했으며
中國
선양
의 북대하(北戴河) 等地에서 住宅開發業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1905年
러일戰爭
直後 그는
神經衰弱
에 걸려 妻子息을 놔두고
블라디보스토크
으로 忽忽單身 떠났다. 거기서 그는 시베리아 等地와 우랄 地方 等 러시아 곳곳을 放浪하다 1921年 死亡했다. 그의 死亡地를 두고 意見이 엇갈리기는 하는데 大略的으로
돈강
流域의
로스토프
나
볼고그라드
어디쯤일 것으로 推測된다.
세레딘사바틴은 사냥을 즐겨 雙熱 散彈銃을 늘 갖고 다녔다고 한다. 水泳 實力이 뛰어나 溺死 危機의 사람들을 여러 番 救助했다고 하며, 相當한 水準의 테니스 實力의 所有者였고, 캠핑을 못하면 안절부절 못할 程度로 自然을 즐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學業에서나 家庭面에서 성실하지 못했으며 輸入이 일정치 않아 家族이 많이 苦生했다고 한다.
스위스 出身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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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은 그의 自敍傳에서 獨立門 設計者를
스위스人
技士라고 言及하였으므로,
[3]
이는 러시아人인 사바틴이 獨立門 設計者가 아니라는 主張의 論據가 되어 왔다. 다만 러시아 國立人文科學大學 타티야나 審비르체바 博士는 2009年 10月 24日
國立故宮博物館
에서 開催된 國際韓國史學會(共同代表 朴精神 숭실대 敎授) 第4回 月例發表會에서 發表된 論文 '朝鮮國王陛下의 建築家 사바親'을 통해, 세레딘사바틴이 出身은 우크라이나이지만 폴란드, 獨逸, 이탈리아, 스위스 等 여러 國家의 血統을 물려받은 國際人이라는 事實을 밝혀내고, 이를 根據로 사바틴이 徐載弼이 言及하였던 스위스人 技士에 該當할 수도 있다는 主張을 펼쳤다.
[4]
그가 남긴 主要 建築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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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틴이 처음 朝鮮에 到着한 1880年代부터 1904年에 大韓帝國을 떠나기 前까지 여러 土木事業에 參與하였다는 事情을 推測할 수는 있으나, 實際로 사바틴이 關與한 建築物이라고 確實하게 立證되는 것은 아래와 같이
舊 러시아 公使館
建物과 關門角의 2個 建築物 뿐이다.
[5]
濟物浦俱樂部 等 그 밖의 建物들은 사바틴이 韓半島에 머무른 時期와 建築時期가 一致하여 사바틴이 關與한 것으로 推定될 뿐, 實際로 사바틴이 關與를 하였는지 與否 또는 關與를 하였다면 어느 程度로 關與를 하였는지 與否에 關하여는 證明된 바가 全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사바틴은 高宗 等 政府의 上級者에게 直接 雇用되었던 것이 아니라 總稅務司 等 中間管理者에게 雇用되었고, 政府도 사바틴을 租界地 測量과 樣式工事 等을 目的으로 一回的인 雇傭에 나섰을 뿐이며, 사바틴은 韓國人들과 隔離되어 朝鮮의 建築 樣式에 별다른 影響을 끼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
- 舊 러시아 公使館
, 서울, 1890年 完工
- 景福宮
關門角, 서울, 1891年 完工, 景福宮 北門 近處에 있었던 西洋式 3層 빌딩. 日帝가 破壞했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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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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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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