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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依據 90周年, 評傳으로 다시 태어난 英雄 매헌 尹奉吉 義士|新東亞

상하이依據 90周年, 評傳으로 다시 태어난 英雄 매헌 尹奉吉 義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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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영 記者

    kjy@donga.com

    入力 2022-06-0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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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年 만에 다시 나온 評傳, 누구나 쉽게 읽기 좋아

    • 23歲에 목숨 건 爆彈 投擲, 大韓民國 獨立에 貢獻

    • 명노승 “先覺者的 農民運動家이자 뛰어난 文人이었다”

    4월 29일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 기념식의 다양한 표정. [홍태식 기자]

    4月 29日 매헌 尹奉吉 義士 상하이 依據 90周年 記念式의 다양한 表情. [홍태식 記者]

    1932年 4月 29日 中國 상하이 홍구公園에서 日本 천장절 兼 全勝을 祝賀하는 記念式이 열렸다. 그때 이곳에 爆彈을 던져 日帝 侵略의 元兇인 시라카와 隊長을 비롯한 日本軍 首腦部에 큰 傷害를 입힌 靑年이 있다. 그는 侵略者들을 膺懲해 꺼져가던 獨立運動의 불씨를 되살리고 大韓民國의 獨立 意志를 全 世界에 알렸다. 日帝强占期 獨立運動家이자 先驅的 農民運動家로 猛活躍한 매헌 尹奉吉 意思를 두고 하는 얘기다.

    이 巨事는 장제스 中華民國 總統이 大韓民國臨時政府 金九 主席을 만나 韓國의 獨立運動을 論議하는 契機를 마련해 줬다. 腸 總統이 루스벨트 美國 大統領, 처칠 英國 總理와 함께 署名해 1943年 12月 1日 發表한 카이로宣言에 ‘코리아의 自由와 獨立’을 다짐하는 文句가 담기는 過程에도 影響을 미쳤다.

    大韓民國 獨立運動에 活路를 만든 尹奉吉 義士의 義擧가 올해 90周年을 맞이했다. 매헌尹奉吉醫師記念事業會(會長 명노승, 以下 記念事業會)는 이를 記念해 4月 29日 그의 一生을 照明한 ‘매헌 尹奉吉 義士 評傳’(김학준 지음·동아일보사)을 出刊하고, 서울 서초구 양재동 매헌尹奉吉義士記念館 廣場에서 ‘尹奉吉 義士 상하이依據 90周年 記念式’을 열었다.

    이番 記念式은 記念事業會가 主管하고, 매헌尹奉吉義士 義擧 90周年 記念事業 推進委員會(委員長 李鍾贊)가 主催했다. 食前 尹奉吉 醫師의 삶을 照明한 詩劇과 映像을 선보이고 나서 式이 擧行됐다. 午前 10時 始作된 記念式에는 金富謙 國務總理를 비롯해 황기철 國家報勳處長과 박희태·김형오 前 國會議長, 黃敎安 前 國務總理, 송영길 前 더불어民主黨 代表, 金永培·서정숙·김승수·池成浩 國會議員, 尹柱卿 議員·윤주웅 長孫子 等 遺族, 정창식 艦長을 비롯한 尹奉吉函 乘組員, 先烈團體長과 會員, 市民에 이르기까지 1000餘 名이 參席했다. 문재인 當時 大統領과 尹錫悅 當時 大統領 當選人은 花環으로 代身했다.

    文과 尹도 花環으로 參席

    李鍾贊 90周年記念事業 推進委員長, 명노승 記念事業會長, 金富謙 國務總理, 이성섭 記念事業會 常任理事, 정창식 尹奉吉艦長, 김학준 매헌硏究院長 等이 演士로 나서서 式의 進行을 도왔다. 매헌서포터즈 大學生의 救國靑年 宣布式과 테너 임정화·소프라노 金샤론의 ‘尹奉吉義士’ 노래와 祝歌, 또 尹奉吉 노래를 合唱한 歷史請少年合唱團의 舞臺는 딱딱하고 敬虔한 舞臺에 生氣를 더해 큰 拍手를 받았다.



    같은 날 매헌記念館 駐車場 一帶에서는 ‘상하이依據 90周年 記念 나라사랑 體驗한마당’이라는 部隊 行事가 열렸다. 團體로 事前 豫約한 學生들이 大擧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한 女學生은 “記念式을 지켜보며 尹奉吉 意思가 얼마나 偉大한 분인지 새삼 알게 됐다”며 “尹 義士가 不過 20代 初盤 나이에 擧事를 實行했다는 것이 正말 놀랍다”고 말했다.

    記念式은 황길水 記念事業會 名譽會長의 萬歲三唱으로 끝났다. 黃 名譽會長은 “尹 義士의 義擧가 大韓民國의 獨立을 이끌어냈다”며 “이番에 낸 評傳이 널리 읽혀 尹 醫師의 偉大한 삶을 많은 사람이 되새기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부출家生不換’ 남기고 떠나

    명노승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장은 윤봉길 의사가 19세에 직접 교재를 만들어 농민들을 가르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지호영 기자]

    명노승 매헌尹奉吉醫師記念事業會長은 尹奉吉 義士가 19歲에 直接 敎材를 만들어 農民들을 가르친 點을 높이 評價했다. [지호영 記者]

    ‘매헌 尹奉吉 義士 評傳’은 大韓民國 獨立에 至大한 影響을 미친 尹 醫師의 全 生涯를 담고 있다. 尹奉吉 義士가 태어나기 前의 朝鮮과 大韓帝國의 狀況, 尹 義士 出生과 어린 時節, 先驅的 農民運動家로서의 活動과 業績, 中國 亡命 生活을 거쳐 상하이 依據에 이르기까지 時間順으로 一生을 볼 수 있게 집필돼 있다. 상하이 依據 後 尹 醫師의 審問, 處刑, 暗葬, 遺骸 發掘 過程 亦是 詳細히 記錄돼 있다. 尹 義士가 擧行한 상하이 義擧가 大韓民國 獨立에 미친 歷史的 意味와 貢獻에 對한 內容도 실렸다.

    著者는 1992年 펴낸 初版 圖書를 바탕으로 하되, 漢字가 많던 初版本의 어려운 글과 말 代身 한글로 쉽게 풀어 大衆이 더욱 가깝게 읽고 理解할 수 있게 整理했다. 또한 지난 30年間 더해진 尹奉吉 意思에 對한 硏究, 새로 發見된 資料를 보태 執筆했다.

    評傳에 따르면 腸 總統이 尹 義士의 義擧를 接하고 한 말에 對해 學界 意見이 紛紛하다. 어떤 이들은 “中國軍 30萬 大軍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高麗의 한 靑年이 해냈다”고 말했다고 하고, 다른 어떤 이들은 “中國의 100萬 軍人과 4億 國民이 하지 못한 일을 朝鮮의 한 靑年이 해냈다”고 稱頌했다고 主張. 어느 쪽이 맞든 尹 義士의 義擧가 場 總統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 것만은 疑心의 餘地가 없어 보인다.

    尹 醫師의 偉大한 삶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 온 명노승 記念事業會長을 5月 3日 그의 執務室에서 만나 좀 더 仔細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番에 評傳을 새로 냈다. 어떤 意味가 있나.

    “尹 義士의 상하이 依據 90周年을 記念하는 評傳이다. 60周年에 처음 評傳을 냈는데 30年이 지나니 새로운 根據에 따라 修正할 것이 많이 생겼다. 무엇보다 그때는 漢字가 많고 꽤 두꺼워 읽기 부담스러웠다. 이番에 낸 評傳은 量도 많이 줄이고 새로 밝혀진 內容을 補强했으며 漢字를 거의 쓰지 않았다. 一般人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새로 쓰는 水準에서 다시 만들었다.”

    나라를 救한 英雄이 많지만 尹 醫師는 특별하다는 評을 받는다. 理由가 뭘까.

    “尹 醫師는 23歲에 집을 떠날 때 ‘장부출家生不換(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을 남기고 갔다. 사나이가 뜻을 세워 집을 나가니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意味다. 그리고 칭다오에서 어머니에게 이런 便紙를 썼다. ‘父母의 사랑보다, 兄弟의 사랑보다, 妻子의 사랑보다도 더 한層 講義(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右로(雨露)와 나의 江山과 나의 父母를 버리고라도 그 講義韓 사랑을 따르기로 決心해 이 길을 擇했다’는 內容이다. 그런 몇 가지 情況을 살펴보면 죽음을 覺悟하고 집을 나간 것임을 알 수 있다. 獨立運動을 하면서 목숨을 버릴 覺悟를 한 거다. 23歲 때 이미 自己 목숨을 버릴 覺悟로 擧事를 일으킨 尹 醫師는 偉大한 英雄이다. 앞으로도 우리가 英雄으로 모셔야 할 분이다.”

    尹 醫師가 우리나라 獨立에 미친 影響이 크다고 들었다.

    “그 일을 契機로 장제스의 마음을 움직여 장제스가 우리 臨時政府를 도왔고, 카이로宣言 當時 루즈벨트 大統領을 說得해 唯獨 우리나라만 獨立을 保障한다는 內容이 담기도록 했다. 루스벨트 美國 大統領이 (그 內容을 넣자고) 主張했다는 說도 있다. 근데 그 事情은 李承晩 大韓民國臨時政府 初代 大統領이 가장 잘 안다. 李承晩 大統領은 美國에서 루스벨트를 움직이려 갖은 努力을 다했다. 그분이 冊을 통해 ‘카이로宣言에서 우리나라의 獨立을 保障받은 건 尹奉吉의 努力이 있었기에 可能한 일이었다’고 밝혔다. 尹 醫師가 韓國 獨立에 功이 있다는 얘기다.”

    19歲 때부터 直接 만든 敎材로 農民 가르쳐

    評傳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傳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고달픈 日帝强占期에 自身의 목숨을 걸 程度의 愛國心을 發揮한 尹奉吉 醫師의 一生을 評傳을 통해 接하다 보면 나라를 한 番 더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 젊은이들이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한 番 더 走馬加鞭(走馬加鞭)이 되길 바란다. 우리나라 獨立이 尹 醫師 한 사람에 依해 이뤄진 건 아니다. 숱하게 많은 獨立運動家가 獻身하시고, 3·1運動과 國民의 抵抗 精神 等 많은 이의 努力이 이뤄낸 結果다.”

    尹 醫師가 한 일 가운데 印象的인 것을 떠올린다면.

    “尹奉吉 醫師는 獨特하게 先覺者的 面이 있었다. 19歲부터 農民을 相對로 夜學을 열었다. 尹 醫師의 生家를 2002年에 처음 가봤는데 ‘農民農本’이라는 夜學 敎材를 直接 만들어 農民을 가르쳤더라. 그 當時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내가 그 나이에 뭘했나 돌아보니 入試 工夫하기에 바빴다. 근데 尹 醫師는 배움이 차고 넘쳐 農民을 無知에서 救濟하고자 直接 만든 敎材로 農民들에게 講義한 것이다. 그렇게 19歲부터 23歲까지 夜學을 運營하고 救國을 위해 목숨을 버릴 覺悟로 中國으로 건너갔다. 그뿐만이 아니다. 尹 醫師는 16歲 때 오치서숙의 同接·老少 儒生들과 함께 參加한 仲秋節 詩會에서 毒壯元을 차지했을 程度로 相當한 水準의 文人이었다. 스승이 李朝時代 最高 선비인 성삼문 동생의 後孫인 星州錄 先生이었는데 그분이 19歲가 된 尹奉吉에게 더 가르칠 게 없다며 매헌이라는 號를 지어주셨다. 成三問의 呼價 梅竹軒이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氣槪를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인지 尹奉吉 醫師는 선비의 氣槪와 節槪를 갖췄다. 또한 獨立運動家 中 缺點이 없는 사람이다. 擧事에 失敗한 적이 없다. 徹頭徹尾하고 完璧했다.”

    尹 醫師를 金九 先生의 行動隊員으로 아는 이도 있다.

    “尹奉吉 義士가 金九 先生을 만났고 金九 先生이 爆彈을 求해 준 건 맞다. 하지만 金九 先生이 시켜서 爆彈 던진 게 아니다. 尹 醫師는 爆彈을 求할 수 없으니까 金九 先生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고 金九 先生의 影響이 全혀 없었던 건 아니다. 늘 金九 先生과 相議해 巨事를 했다. 그리고 아무리 金九 先生이 훌륭해도 산 사람을 죽을 자리에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죽을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의롭게 죽으라고 하면 목숨을 던지겠나. 그건 刑法上 自殺幇助4다. 尹 醫師는 이미 죽을 覺悟가 돼 있었기에 自殺 幇助가 成立되지 않는다.”

    統一에 對한 期待가 있나.

    “懇切히 바란다. 尹奉吉 醫師는 夜學을 運營하며 韓國 地圖도 가르쳤다. 그 地圖에는 咸鏡南道와 咸鏡北道가 다 標示돼 있다. 日本人들이 當時 日本海라 하던 곳을 東海라고 表記해 가르쳤다. 우리 民族이 하나로 統一되길 바란 것이다.”

    只今은 어떤 時代精神이 必要하다고 보는가.

    “빨리 統一해서 南北이 다 잘사는 게 時代精神이다. 南北이 異質的이라 統一이 돼도 融和가 힘들지 않을까 하고 憂慮하는 사람도 있는데 大韓民國 獨立보다는 쉽지 않겠나. 어렵지만 같은 말 쓰고 얼굴色度 같은 하나의 民族 아닌가.”

    記念事業會는 尹奉吉 義士의 상하이依據 90周年을 記念해 書藝展示會, 誕辰音樂會, 特別展示會, 詩朗誦大會, 全國書藝揮毫大會, 國際學術會議 等 다채로운 行事를 매헌記念館에서 펼칠 豫定이다. 6月 7日에는 매헌 尹奉吉 義士 상하이依據 90周年 記念音樂會가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김지영 기자

    김지영 記者

    放送, 映畫, 演劇, 뮤지컬 等 大衆文化를 좋아하며 人物 인터뷰(INTER+VIEW)를 즐깁니다. 요즘은 팬덤 文化와 不動産, 流通 分野에도 특별한 關心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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