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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에 半導體 工場 지으면 참 이쁘겠재? 바란스 참 맞겠재?”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新東亞

“저기에 半導體 工場 지으면 참 이쁘겠재? 바란스 참 맞겠재?”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

2工場도 노는데 3工場 지으라던 湖巖, 그 反轉 스토리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2-06-1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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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日 半導體戰으로 캄캄하던 하루

    • 인텔도 한 手 배운 三星의 熱情

    • 3라인 세우지 않으면 中小企業 轉落

    • 着工 以後 일어난 奇跡 같은 일

    • 美日, 三星 半導體 獨走 지켜보다

    • 劇的 反轉 보지 못하고 눈감은 湖巖



    三星이 野心차게 64KD램 量産을 始作한 1984年은 不幸히도 D램 市場이 大暴落基로 접어든 初入이었다. 그해 末부터 世界 半導體業界에는 歷史上 最惡으로 記錄된 大暴落 事態가 들이닥쳤다. 美國과 日本 業體들이 덤핑 競爭을 하는 치킨게임이 始作됐다. 그해 初만 해도 個當 3달러였던 價格이 75센트까지 墜落했고 31달러씩 하던 256KD램도 3달러까지 暴落했다. 半토막도 아닌 10分의 1 토막이 난 것이다. 業界 사람들은 하얗게 질리기 始作했다.

    2000년 12월 촬영한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동아DB]

    2000年 12月 撮影한 삼성전자 鬐興事業場. [東亞DB]

    ‘피라미 身世’ 三星… 在庫가 複道까지 쌓였다

    이는 急速한 成長이 낳은 供給 過剩 後果였다. 特히 日本의 高速成長이 한몫을 했다. 메모리 半導體는 인텔이 1971年 1Kb(비트) D램을 처음 開發해 市販한 것을 始作으로 美國이 먼저 뛰어든 市場이다. 그런데 日本이 발 빠르게 國家 프로젝트로 키워 力量을 總動員하면서 美國을 猛追擊했다. 美國이 차근차근 4K, 16K, 64K를 내놓으면서 先頭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日本은 256K를 世界 最初로 開發해 量産에 들어가 世界를 놀라게 했다. 美國과 日本은 銃聲 없는 半導體 戰爭에 突入했다. 이에 設備 投資 競爭이 이뤄지면서 64K, 256K 供給 過剩이 始作된 것이다.

    덤핑 競爭에서 被害者는 美國 業體들이었다. 日本 業體들은 이미 開發費를 回收한 뒤라 損害 볼 게 없었다. 美國 業體들은 暴落 場勢를 견디지 못했다. 페어차일드를 筆頭로 RCA, 詩그네틱스가 무너졌고 GE(제너럴일렉트릭), 인텔, 웨스팅하우스도 D램 事業에서 발을 빼기 始作했다. 그 바람에 1986年 半導體 全體 生産量과 賣出額에서 日本은 처음으로 美國을 追越했다.

    美日 間 고래 싸움에서 새우는커녕 피라미 身世에 不過하던 後發走者 三星의 狀況은 어땠겠는가. 在庫가 倉庫를 넘어 複道까지 쌓였지만 方法이 없었다. 1985年 美國과 유럽에서 팔린 三星의 64K는 大部分 原價 以下로 納品됐다.



    野心차게 半導體 生産國으로 자리매김하자마자 닥친 巨大한 쓰나미 속에서 하루하루를 地獄처럼 보내야 했다. 자칫하면 그룹 全體가 瓦解되지 않을까 하는 不安感이 掩襲했다. 當時 專門 經營을 맡고 있었던 高(故) 강진구 前 會長은 回顧錄에 이렇게 記錄했다.

    “半導體 開發은 순조로웠지만 經營에서는 엄청난 試鍊의 連續이었다. 1983年에 事業을 本格化하기 以前에도 半導體 部門 經營 狀況은 좋지 못했으나 64KD램이 出荷되던 1984年부터 赤字가 늘기 始作하더니 이듬해인 1985年에는 3달러50센트하던 國際 價格이 不過 몇 달 만에 50센트로 곤두박질쳤다.

    當時 製造原價가 1달러 70센트였으니 만들면 만들수록 個當 1달러 20센트씩 損害를 보는 거였다. 1985年 累積 赤字는 無慮 428億 원에 達했다. 1986年과 1987年에도 赤字가 繼續되어 1984年 以後 赤字를 다 합치면 無慮 1159億 원에 이르렀다.”


    그나마 多幸이었던 것은 半導體 事業部門이 通信部門에 屬해 있어 通信部門의 黑字로 견딜 수 있었다는 點이다. 이 亦是 湖巖의 卓越한 經營判斷에 따른 것이었다. 마치 最惡의 狀況을 念頭에 두었던 듯 말이다.

    姜 前 會長은 赤字의 늪에 허덕이는 狀況에서도 硏究開發을 놓지 않던 湖巖의 熱情과 意志가 없었다면 三星 半導體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라고 斷言하고 있다. 다시 그의 말이다.

    기흥사업장 완공 후 가동 중인 생산라인을 살펴보는 호암 이병철 회장. [삼성전자]

    鬐興事業場 完工 後 稼動 中인 生産라인을 살펴보는 湖巖 이병철 會長. [삼성전자]

    “只今의 삼성전자 規模로 본다면 (累積 赤字) 1000億 원은 그다지 큰돈으로 여겨지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當時로서는 이만저만한 巨額이 아니었다.

    마침 通信 部分이 每年 200億 원 乃至 300億 원 稅前 利益을 올리는 好調를 보여 赤字를 保全할 수 있었기 때문에 三星半導體通信 全體로서는 1985年(赤字 79億 원) 1987年(赤字 48億 원)을 除外하고 利益을 維持할 수 있었다.


    湖巖은 危機를 미리 豫見이나 한 듯 일찍이 1983年 삼성전자에 屬해 있던 半導體 事業部를 떼어내 通信 部門과 합쳐 ‘三星半導體通信’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體制를 强化시켜 놓았었다.


    이는 事業家로서의 眞面目을 보여주는 참으로 偉大한 戰略的 布石이었다고 늘 생각하고 있다. 半導體 開發에 所要되는 莫大한 投資와 熾烈한 國際競爭에서 派生할 價格 競爭을 미리 洞察해서 醉한 適正한 措置였던 것이다. 이것은 어떤 犧牲을 치르더라도 半導體를 期於이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굳은 意志의 表現이기도 했다.


    湖巖은 엄청난 半導體의 經營損失 안에서도 天文學的 開發投資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湖巖께서 半導體와 關聯되는 사람들과 點心을 같이 하자는 連絡이 왔다.


    累積 赤字가 1200億 원에 達하고 있다는 것과 1M(메가) D램 工場 着工을 當場 하지 않으면 出荷 競爭에서 後發이 될 것이라는 말들이 엇갈리고 있었다.
    湖巖은 斷乎했다. ‘64K, 256K가 늦어서 얼마나 큰 苦生을 했는데 1M 工場 着工이 늦어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來日 아침에 着工式을 하자, 내가 器興 工場으로 가겠다’고 하셨다.”


    앤디 그로브 인텔 會長이 보낸 메모

    앤디 그로브 전 인텔 회장. [인텔]

    앤디 그로브 前 인텔 會長. [인텔]

    三星이 地獄의 터널을 지나는 時節을 이윤우 前 副會長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記憶했다.

    “어떤 때는 鷄卵으로 바위치기 아닌가 하는 絶望感이 掩襲했습니다. 問題는 赤字가 나더라도 希望이 있어야 되는 건데 64K, 256K, 1MD램이 果然 順調롭게 成功的으로 開發될 수 있을지, 價格이 暴落하고 있는데 反騰할 수는 있는 건지, 이렇게 不安한 事業을 繼續 끌고 가야 하는 건지, 果然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宏壯히 많았죠.

    그런데 그런 否定的인 생각에만 빠져있기에는 닥친 일, 解決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來日이 問題가 아니라 當場 오늘 只今 이 瞬間 내 앞에 닥친 일들을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는 切迫感이 걱정과 두려움을 쫓아내 버린 時節이었습니다. 正말 먹고 자고 일만 했던 그런 時期였습니다.”

    그는 ‘赤字 時代’를 견디던 때 인텔에서 下請을 받아 일하기도 했는데 그게 오히려 自信感을 가져다주기도 했다는 逸話를 紹介했다.

    “딱 1984年, 1985年 일이었죠. 한쪽에서는 2工場 着工이 進行 中이었고 이미 만들어놓은 1工場은 만들면 損害이던 時節이라 돌릴 수가 없었어요.

    할 수 없이 인텔에 가서 ‘일거리 좀 달라’고 事情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피(EP)롬(※아래 編輯者註 參照) 注文을 받았어요. 인텔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工程을 가르치러 왔다가 우리가 목숨 걸고 일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收率이 인텔보다 높았으니까요.

    나중에 納品이 끝났을 때 앤디 그로브 인텔 會長이 제게 ‘YW Congratulation’(李 前 副會長의 英文 이니셜을 따 ‘允友, 祝賀한다’는 뜻)는 메모를 보냈습니다. 그 분 性格이 아주 乖愎해서 部下들한테 絶對 稱讚하지 않는 스타일인데 제게 그런 메모를 보냈다는 건 三星 職員들의 근면함과 일 處理 能力에 매우 만족했다는 메시지였죠.

    앤디 그로브 會長은 元來 學者였는데 그 사람이 쓴 ‘Physics of Semiconductor(※Physics and Technology of Semiconductor Device)’라는 冊으로 제가 大學校 때 半導體 工夫를 했어요.

    나로서는 先生님일 뿐만 아니라 羨望의 對象이었죠. 인텔 創業者들은 半導體 開發로 노벨賞을 받은 사람들이 創業한 會社 아닙니까. 앤디 그로브 會長은 저로서는 그야말로 神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니 그가 親筆로 보내준 메모를 보고 感動해서 家譜(家寶)처럼 간직하겠노라고 생각할 程度였습니다.

    當時 三星 工場을 指導한 인텔의 밥 베이커라는 사람이 當時 우리에게서 배운 工程을 그대로 따라 해 인텔에서 出世 街道를 달렸습니다. 韓國 사람들이 ‘熱心히’는 基本이고 빈틈없이 緻密하게 協業해서 일하는 걸 보고 깊은 印象을 받아갔습니다. 비록 赤字로 허덕이고 있었지만 그런 經驗을 통해서 우리도 하면 할 수 있겠구나 自信感을 얻기도 한 時間이었습니다.”

    <※編輯者註>
    메모리는 크게 램(RAM, Random Access Memory)과 롬(ROM, Read-Only Memory)으로 나뉜다. 램은 記憶된 정보를 읽어내기도 하고 다른 情報를 기억시킬 수도 있는 메모리다. 카세트 테이프를 생각하면 쉽다. 롬은 읽기만 하는 메모리다. 레코드板을 생각하면 쉽다.

    램과 롬의 가장 큰 差異는 電源이 꺼져도 데이터가 사라지느냐(램, 揮發性) 維持되느냐(롬, 非揮發性)에 있다. 그래서 램을 ‘揮發性 메모리(Volatile Memory)’, 롬을 ‘非揮發性 메모리’라고 부른다. 램은 컴퓨터의 主記憶裝置, 應用 프로그램의 一時的 로딩(loading), 데이터의 一時的 貯藏 等에 使用된다.

    앞에 言及된 EP롬이냐 EEP롬이냐 하는 것은 데이터를 지우는 方法에 따른 區分이다. EP는 자외선으로, EEP는 電氣를 利用한다.

    湖巖 生前 마지막 公式 日程

    1985년 5월 21일 기흥 2라인 준공식. [삼성전자]

    1985年 5月 21日 器興 2라인 竣工式. [삼성전자]

    이 인텔 OEM 製作에 參與한 사람이 임형규 前 社長이다. 그의 말이다.

    “인텔은 우리 製品을 販賣價보다 25%나 싸게 購買하는 것은 勿論 向後 三星이 EP롬 事業에 參與하지 말아야 한다는 條件까지 내걸었습니다. 값을 후려친 것도 후려친 거지만 EP롬은 當時 非揮發性 메모리의 主力 製品群이었는데 이걸 開發하는 걸 源泉的으로 封鎖하겠다는 매우 不利한 契約이었지요.

    하지만 拒絶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狀況이 어려웠고 切迫했으니까요. 게다가 우리가 當面한 더 큰 어려움은 팀員 大部分이 經歷 3年 未滿의 新入 社員에 가까운 技術 人力들이어서 모든 걸 처음부터 가르쳐가며 開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인텔 같은 會社와 比較한다는 것은 想像도 못할 일이었죠.

    그러나 우리가 이 어려움을 克服하려면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고 意氣投合했습니다. 當時엔 모든 部署가 週末도 없이 每日 밤 10時까지 일했습니다. 만들면 만들수록 赤字가 커지는 絶望的 狀況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生存 自體를 위한 鬪爭을 벌여야 하던 때였습니다.

    1986年頃 어느 날 이병철 會長님을 뵙던 記憶이 납니다. 새롭게 三星에 合流한 博士級 硏究員 5, 6名과 함께였습니다.

    當時 일흔을 넘긴 會長님이 우리들 손을 잡아 주시면서 ‘젊은 博士들이 半導體 事業輔國에 參與해 줘서 고맙다’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손의 觸感이 부드러웠지만 힘이 없어서 깜짝 놀랐던 記憶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後 돌아가셨을 때(1987年 11月 19日 湖巖 別世)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湖巖의 企業家 精神에서 놀라운 事實은 앞서 姜 前 會長 말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暗黑 狀況에서도 半導體 開發을 督勵하고 莫大한 돈을 들여 2工場(1984年 8月) 3工場(1987年 3月)을 繼續 지었다는 것이다. 다들 이대로 가면 亡한다고 아우聲을 쳐댔지만 湖巖은 ‘올인하라’고 했다.

    그中에서도 白眉가 3工場 建設이다. 2工場까지는 湖巖의 指示를 그대로 따랐던 三星맨들이었지만 3工場은 此日彼日 미루고 있었다. 김광호 前 副會長의 말이다.

    “初有의 半導體 不況으로 2工場조차 1年 가까이 稼動을 못하고 있었는데 3工場을 지으라니 正말 難堪했습니다. 1974年 韓國半導體 引受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10年 넘게 赤字를 보고 있었고 언제 黑字로 돌아설지 全혀 앞이 보이지 않는 狀況이었는데 말이지요.

    이런 狀況에서 3工場을 지으라는 건 누가 봐도 너무 無謀한 決定이었습니다. 周邊에선 甚至於 ‘이제 湖巖度 나이가 드셔서 判斷이 흐려진 것 아니냐’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아시다시피 工場 建設이란 게 한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1工場은 달러로 1億5000萬 달러, 2工場은 2億5000萬 달러가 들었습니다. 累積 赤字가 堪當하기 어려운 限界線을 넘어가고 있는데 3億4000萬 달러가 들 것으로 推定되는 3라인을 세우라는 건 正말 非現實的인 判斷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當時 湖巖의 모습을 그는 이렇게 記憶하고 있다.

    “1984年, 1985年 器興 工場에 오실 때마다 저를 불렀습니다. 當時 器興에는 1工場, 2工場, 龍力動, 管理棟이 있었을 때였는데 管理棟 5層에 會長室이 있었습니다. 제가 들어가면 바깥 窓門을 내다보고 계셨는데 ‘金君, 金君, 이리 와 저기 좀 봐라, 저기다 3工場 지으면 참 이쁘겠재?’ 하시는 거예요.

    그런 말씀을 듣는 제 속이 어땠겠습니까. 祕書팀이고 財務팀이고 눈만 껌뻑 껌뻑하면서 저를 向해 ‘盧(No)라고 말씀하시면 안 된다’고 繼續 눈치를 주는 바람에 저는 안 된다고 말씀도 못 드리고 “예, 檢討하겠습니다” 한 뒤 繼續 미적미적 미뤘습니다. 祕書室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全部 뒤로 빼고 있었죠.”

    이 대목에서 앞서 강진구 前 會長의 記錄에 登場하는 ‘來日 3工場 着工式을 하러 鬐興에 가자’고 한 대목이 紹介된다. 金 前 副會長의 記憶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갑자기 會長님이 ‘來日 아침 9時에 3工場 起工式 하러 갈 테니 準備하라’는 거예요. 한마디로 날벼락이었습니다.

    正말 발칵 뒤집어졌지요. 3工場 터에 잔디를 쭉 심어놨었는데 그걸 하루 만에 다 걷어내고 警察署에 發破 許可받는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꼴딱 밤을 새 亂離법석을 쳐 가지고 겨우 準備를 마쳤어요. 웬 비는 그렇게 억수같이 쏟아지던지…. 湖巖은 期於코 내려오셔서 起工式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生前 마지막 公式 日程이셨습니다.”

    奇跡 같은 好況 局面에서

    이윤우 前 副會長은 起工式에서 湖巖이 여느 때와는 달리 悲壯感에 서려 말을 길게 이었다고 한다. 그의 記憶이다.

    “當場 來日 起工式을 하라는데 어떻게 합니까? 비가 와 가지고 땅이 진흙이 되어 있어서 밤새 모래를 실어다가 다지고 텐트 세우고 해서 겨우 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起工式에서 選對 會長님 말씀이 只今도 잊혀 지지 않아요.”

    그는 “뭐라고 하셨느냐‘는 記者의 質問에 이렇게 湖巖의 育成을 傳했다.

    “6個月 만에 器興 1라인을 完成시켰고 1300億 원이라는 機會損失을 보았다. 富川 工場에서 利益이 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고 硏究室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美國, 日本 企業들이 가장 利益을 많이 내던 1984年과 1985年에 우리는 제대로 된 生産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期間 中에 餘裕를 갖고 訓鍊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256KD램 開發에 成功했다. 奇跡과 같은 일이었고 正말 多幸이었다. 任職員들의 勇敢하고 犧牲的인 覺悟들이 있었기 때문에 可能했다.

    3라인 着工은 1986年부터 생각한 거였다. 3라인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는 中小企業으로 轉落한다. 正말 冒險이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堅固하고 質 좋고 아름답게 지어라.”

    李 前 副會長은 “當時 湖巖의 모습을 보며 3工場을 지어야겠다는 當身의 決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하고는 次元이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結果的으로 湖巖의 判斷은 神의 한수였다. 그의 別世 後 半導體 大好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只今은 어려워도 機會가 반드시 온다, 그때를 準備하고 있어야 한다”며 工場 建設을 督勵한 湖巖의 判斷이 卓越한 先見之明으로 判明되는 瞬間이었다. 다음은 三星電子 社史에 나오는 內容이다.

    ‘모두가 反對하면서 6個月 동안 첫 삽조차 뜨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先代會長의 意志는 한결같아 1987年 8月 3라인을 着工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奇跡 같은 일이 일어났다. 世界 半導體 市場이 3年餘 不況期를 끝내고 好況 局面으로 접어든 것이었다.

    1985年 中盤 30센트까지 떨어졌던 64K는 2달러30센트까지 치솟았고 1986年 1달러50센트였던 256K는 4~6달러까지 뛰어올랐다. 三星은 生産라인을 모두 돌리고도 모자라 64K 專用라인인 1라인을 改造해 256K를 生産할 程度였다.

    드디어 黑字가 始作됐다. 1987年엔 2862億 원으로 前年 對比 71%, 1988年에는 6700億 원으로 前年 對比 134%라는 驚異的인 成長을 記錄했다.

    賣出 大部分은 輸出이 차지했다. 1987年 3億1500萬 달러, 1988年 8億580萬 달러로 前年보다 各各 74%, 155%가 늘었다.

    1988年 한 해 동안 디램 部門에서만 올린 純益이 3200億 원이었으므로 그동안의 累積赤字를 빼고도 1600億 원 黑字를 記錄했다. 그제서야 經營陣은 着工 遲延으로 6個月이란 機會費用 損失을 後悔했고 한便으론 湖巖의 先見之明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日本에 屈辱的인 美日 半導體 協定

    湖巖은 正말 未來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事實 三星 半導體가 赤字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美日 間 半導體 戰爭은 極에 達하고 있었다. 日本이 64K, 256K 덤핑 攻勢에 나서며 收益을 싹쓸이했다. 無慮 80%까지 市場 占有率이 오르자 美國 言論은 ‘第2의 眞珠灣 襲擊’이라는 用語까지 써가며 衝擊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一大 反擊이 始作됐다. 美國 企業들이 貿易委員會(ITC)에 日本 企業들을 무더기 提訴하고 나선 것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ITC는 ‘貿易 報復’의 代名詞다. 美國 業體들이 特定 國家의 덤핑이나 特許 侵害 等 不公正 貿易行爲로 被害를 입었다고 提訴하면 ITC는 調査를 거쳐 덤핑 防止 關稅를 賦課하거나 輸入을 制限하는 等 制裁 措置를 내릴 수 있다. 美國으로 物件을 輸出하는 企業 處地에서는 可히 저승使者라 할 만하다.

    1985年 6月 24日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는 NEC 等 5個 業體를, 인텔사는 히타치 等 8個 業體를 反덤핑 嫌疑로 提訴하면서 歷史的인 ‘美日 半導體 戰爭’을 始作했다. 美國 半導體協會까지 나서 日本 半導體業體들을 相對로 덤핑調査를 要求했다. 大部分 日本 業體들이 二重 三重의 提訴를 當한 셈이다.

    ITC는 보란 듯이 自國 企業의 要求를 卽刻 받아들였다. 提訴 接受 8個月만인 1985年 3月 日本 業體들에 最小 21.7%에서 最大 188%에 이르는 엄청난 덤핑 마진率을 確定한다.

    日本 半導體 業體들은 白旗를 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美日 半導體 貿易協定(1986年 7月 31日)은 日本의 白旗 投降이나 다름없었다.

    日本 企業들은 生産量부터 줄였다. NEC만 해도 한 달에 1500萬 個씩 生産하던 256K를 거의 折半 水準인 800萬 個 水準으로 줄이겠다고 約束했다.

    하지만 이건 藥果였다. 美國 企業들이 덤핑 提訴를 撤回하는 條件으로 半導體 原價까지 모두 公開하기로 한 것이다. 第3局에서 組立해 輸出하던 迂廻 輸出 製品도 例外가 아니었다. 日本에 屈辱的인 美日 半導體 協定이 얼마나 衝擊的이고 巨大한 後暴風을 가져다줬을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市場에서의 供給이 줄자 D램 값은 徐徐히 上昇 曲線을 타기 始作했다. 1986年 末, 1987年을 지나면서 64K가 1달러, 256K가 3달러까지 치솟더니 1988年이 되자 64K는 6달러, 256K는 12달러까지 올랐다.

    日本의 後退에 기름을 부은 것이 또 있었으니 바로 ‘플라자 合意’(1985年 9月 22日)다. 플라자 合意는 日本의 不動産 거품 崩壞나 ‘잃어버린 10年’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登場하는 素材다. 쿼터制, 덤핑 關稅 等 다양한 貿易制裁에도 對日 貿易赤字가 解消되지 않자 美國이 엔貨 價値를 强制로 올려 日本 製品의 價格 競爭力을 약화시킨 일이다.

    美國의 報復이 부른 나비效果

    이런 걸 하늘이 돕는다고 하는 것인가. 日本이 白旗를 든 美國 市場을 蠶食해 들어간 나라가 바로 大韓民國 三星이다.

    다시 김광호 前 副會長 말이다.

    “急하게 3工場을 完工해서 1M 量産을 막 準備하고 있는데 64K, 256K 값이 마구 올라가는 거 아닙니까, 美國 業體들은 이미 D램에서 撤收한 狀態였고 日本 業體들은 256K를 버리고 1M로 넘어간 狀態였습니다.

    이제는 三星 것이 없어서 못 파는 狀況이 벌어진 겁니다. 美國과 日本 業體들이 三星의 獨走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初有의 狀況이 벌어지기 始作한 거죠.

    돌이켜보니 湖巖께서는 美日 半導體 協定이 締結되기 以前부터 鬐興에 내려올 때마다 ‘美國의 報復이 빨라질 것이니 3工場을 빨리 지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때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몰랐습니다. 저희 같은 任職員들은 當場 눈앞에 닥친 어려움 때문에 追加 工場 建設에 反對했던 거죠.

    그때는 ‘내가 내 목을 걸고 三星을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湖巖의 생각은 달랐던 겁니다. 그의 先見之明은 緻密한 狀況 判斷에 따른 것이었지만 우리로서는 이걸 알 수가 없었던 거죠.”

    안타깝게도 湖巖은 이런 大反轉의 歷史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다시 金 前 副會長의 말이다.

    “그것만 생각하면 恒常 죄스럽지요. 저는 正말 그때 그렇게 工場 建設을 督勵하시던 會長님이 癌 鬪病 中이라는 걸 까맣게 몰랐어요. 나중에 소병해 祕書室長한테 ‘會長님이 抗癌治療 받고 머리가 빠져서 假髮 쓰고 계시면 最小限 우리한테는 알렸어야 할 거 아니냐?’ 따졌을 程度였어요. 그랬다면 3工場 建設을 더 서두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아마 會長님 指示가 처음 떨어지자마자 3工場을 지었더라면 5000億 원은 더 벌었을 거예요. ‘저기에 工場 지으면 참 이쁘겠재? 바란스 참 맞겠재?’ 하시며 첫 指示를 내린 지 6個月 뒤에 着工했으니까요.

    會長님께서 살아계셔서 ‘너, 내가 工場 지으라고 할 때 지었으면 돈을 얼마나 더 버는 건데, 돈 벌 수 있는 機會를 놓쳤으니 대단한 損失 아니냐’ 목을 자르셔도 할 말이 없는 거죠.

    참으로 대단한 兩班이셨습니다. 動物的 感覺을 가졌다고 밖에 表現할 수 없어요. 祕書室이고 뭐고 다 안 된다고 했지 된다고 報告하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그걸 그냥 턱 決定하신 거 아닙니까.

    그리고 타이밍이 아주 正確했어요. 3工場이 조금이라도 더 늦게 새워졌더라면 그렇게 돈을 못 벌었죠. 돌아가시고 바로 이듬해인 1988年 한해에만 1700億 원인가 黑字를 냈는데 10年 넘게 쌓여온 累積 赤字 1300餘億 원을 한꺼번에 다 없애고도 黑字를 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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