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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大統領이 될지 風水로 알 수 있는가|신동아

帝王의 風水學

누가 大統領이 될지 風水로 알 수 있는가

  • 김두규|又石大 敎養學部 敎授·文化財廳 文化財專門委員

    入力 2017-04-27 22: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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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統領이 나올 땅, 帝王之地란 어떤 곳일까
    • 朴正熙·朴槿惠 前 大統領 선영, 明堂인 同時에 逆龍(逆龍)의 땅
    • 文在寅 生家, 金거북이 진흙 속에 숨어드는 ‘金俱沒니型(金龜沒泥形)’
    • 安哲秀 生家와 故鄕, 조심스럽고도 緻密하게 일을 圖謀하는 虎狼이
    • 帝王의 일어남(帝王之興)은 德에 있다

    2015年 11月 下旬 어느 날, 서울 구로의 어느 飮食店에서 筆者는 최창조(전 서울大·風水學) 敎授와 老자키 미쓰히코(野崎充彦) 日本 오사카市立臺(大阪市立大·韓國古典文學) 敎授와 點心을 하던 中이었다. 老자키 敎授가 暫時 韓國을 訪問했기에 셋이 자리를 함께한 것이다.

    ?마침 그날은 며칠 前 他界한 김영삼 前 大統領의 葬禮가 끝난 直後라 放送은 金 前 大統領의 生涯와 무덤에 對한 이야기가 大部分이었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의 關心을 끈 것은 銅雀洞 顯忠院에 安葬된 김영삼 前 大統領의 무덤 터였다. “鳳凰이 알을 낳은 자리”라고 그 터를 잡았던 風水師 黃某 氏 인터뷰가 나오기도 했다.

    그 證據로서 “壙中에서 일곱 個의 큰 바위가 나왔는데 바로 그 바위들이 鳳凰의 알”이라는 것이다. TV 畵面을 보던 최창조 敎授는 “鳳凰이 알을 일곱 個 낳았다고? 그 鳳凰, 肛門 破裂로 죽겠는데…”라고 했다. 勿論 弄談이었지만 金 前 大統領 後孫들이 이 말을 들었으면 어땠을까. 이 말을 듣던 老자키 敎授는 “왜 大統領들이 風水上 吉地에 묻히고자 하는 것일까요”라고 眞摯하게 물었다.

    이에 崔 敎授는 망설임 없이 “後孫이 잘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지요”라고 答辯했다. 權力者들이 風水上 吉地에 무덤을 쓰고자 하는 利己的 目的을 直說的으로 밝힌 것이다. 또 그가 “鳳凰의 肛門 破裂”이라는 多少 過激한 發言을 한 根據는 風水에서 壙中에 돌이 나오는 것은 胸肢임을 證明하는 禁忌 事項이기 때문이다.

    朝鮮時代에 돌이 나온 땅을 王陵으로 小店韓 地官들이 棍杖을 맞아 죽거나 流配를 當한 적이 있었다. 朝鮮 中宗 때 聖譚기와 黃得情이란 風水 管理가 돌이 나온 곳을 王妃(장경왕후 尹氏)의 陵 자리로 잡았다는 理由로 棍杖을 맞아 죽었다. 1901年 風水管理 6人이 長期 流配刑을 받았는데 명성황후 陵域 造成 中 壙中에서 ‘돌痕跡(石痕)’이 보였다는 理由였다. 그만큼 壙中의 돌은 胸肢(凶地)의 象徵이었다.



    그런데 金 前 大統領 墓地를 選定한 이는 그 돌을 ‘鳳凰의 알’이라고? 糊塗했다. 黃氏는 그 무렵 朴正熙 前 大統領 墓를 再整備했다며 自稱 ‘局長(國葬)을 主管’한 사람이라고 자랑했다. 이에 對해 崔 敎授는 “까닭 없이 墓를 건드리는 거 아니다”라며 黃氏에 對해 “큰일 낼 사람”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1年餘 後 그 딸 朴槿惠 前 大統領이 罷免되고 拘束되는 事件이 벌어졌다. 까닭 없이 墓地를 건드린 것과 罷免은 어떤 關聯이 있을까. 崔 敎授를 만나면 한番 물어보고 싶다.



    中國 天子들의 風水 사랑

    只今부터 1400餘 年 前 蘇길(蕭吉)이란 學者가 있었다. 그는 滅亡한 凉나라 無題(梁武帝)의 兄 장사선武王(長沙宣武王)의 孫子였다. 王族의 後孫이다. 博學多識해 陰陽과 風水地理에도 能했으나 自尊心이 强해 朝廷 大臣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는 權力의 周邊을 맴돌 뿐이었다. 權力의 核心으로 들어가기 위해 소길은 自身이 攄得한 陰陽說과 風水地理를 活用한다. 書記 594年 그는 隋文帝(隋文帝)에게 그해 皇帝 運이 아주 좋다는 글을 올려 皇帝의 信任을 얻는다.

    “今年(594年)은 甲寅年입니다. 11月 初하룻날이 六十甲子로 辛酉日로서 冬至날이 되기도 합니다(고대 中國에서는 陰曆 11月 初하루에 同志가 드는 것이 20年 만에 한 番씩 돌아오기 때문에 큰 傾斜로 여겼다). 陰陽서 ‘낙즙도징’에 ‘冬至날이 初하루에 들면 임금에게 하늘의 큰 福이 내린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皇帝께서 卽位하시어 이와 같은 伏날을 맞이하니 이것이 陛下의 慶事입니다.”(‘수서·隋書’, 以下 引用文 出典도 같음)

    蘇길의 글을 읽은 隋文帝는 큰 膳物을 내렸다. 얼마 後 隋文帝의 夫人 헌皇后(獻皇后)가 죽었다. 皇帝는 蘇길에게 葬地를 잡게 했다. 小길은 霧散(筮山)의 한 곳을 小占하면서 皇帝에게 말했다. “이곳은 2000年支持(二千年之地)에 子子孫孫 200歲 後孫까지 保存해줄 자리입니다.”

    이에 皇帝는 다음과 같이 핀잔을 주었다. “吉凶禍福이란 人間에게 있지, 땅의 좋고 나쁨에 있지 않다. 北齊(北齊)의 皇帝 高位(高緯)가 그 아버지를 葬事 지내면서 어찌 明堂을 고르지 않았겠느냐. 그럼에도 高位가 다스리던 나라는 얼마 안 가 亡하고 말았다. 萬若 우리 집안 先祖 무덤 자리가 나쁘다고 한다면, 나는 天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萬若 凶하지 않다면 왜 내 동생은 戰爭에서 죽었는가.”

    皇帝는 墓地와 人間의 吉凶禍福이 관계없다는 前提에서 風水學者 小길을 비웃었다. 그러나 隋文帝의 다음 態度가 興味롭다. 그렇게 말해놓고도 끝내 蘇길의 말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蘇길에게 큰 賞을 내렸다. 隋나라 皇室 이야기를 좀 더 紹介하자. 隋文帝보다 좀 더 率直한 사람은 그 둘째 아들 房陵王(房陵王)이었다.

    어머니(헌皇后) 葬地 選定에 小길이 關與함을 알고 그에 接近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빨리 天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자리를 잡아주시오. 내가 天子가 되면 마땅히 그대를 富貴로 報答하겠소.” 房陵王의 隱密한 付託을 받은 소길은 그가 皇帝가 될 자리를 잡아주며 “4年 後에 皇帝가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4年 後인 604年 隋文帝가 죽자 房陵王이 皇帝의 자리에 올랐다. 바로 兩制(煬帝)다. 煬帝는 蘇길의 공을 높이 認定해 太傅소경의 벼슬을 주었다. 비록 情事(正史)에 收錄된 이야기이지만 모두 믿을 수는 없다. 歲月이 흐르면 늘 부풀려지는 것이 ‘道士’들의 誇張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쑨원과 장제스의 權力意志

    20世紀 初의 일이다. 中國 난징(南京) 자금산(紫禁山)에 가면 中國의 國富 쑨원(孫文)의 무덤인 중산릉(中山陵)李 자리하고 있다. 쑨원이 生前에 直接 잡아놓은 자리다. 그가 不幸하게도 베이징 附近에서 病으로 臨終할 즈음 家族과 側近들이 事後 障지를 어디로 할 것인지에 對해 意見이 紛紛했다. 이때 意識이 가물거리던 쑨원이 이들의 對話를 듣고 벌떡 일어나 稀微하게 말했다. “나를 자금산 身後之地에 묻어주시오.” 그리고 얼마 後 죽었다.

    중산릉을 踏査해보면 風水 門外漢이 보아도 참으로 좋은 자리임을 알 수 있다. 뒷山은 일자(一字) 形態의 土型(土形) 山이다. 五行에서 토는 中央이자 皇帝를 象徵하며, 한 日(一)字 模樣의 山은 賃金을 排出할 땅이라고 한다. 쑨원의 무덤에 서서 四方을 바라보면 左右와 앞의 수많은 산이 머리를 조아리는 形象이다. 이른바 뭇 臣下들이 임금에게 절을 하는 ‘軍신봉조型(群臣奉詔形)’의 길지다.

    쑨원의 後繼者가 장제스(蔣介石)다. 그는 쑨원을 尊敬하기에 그의 옆에 묻히고 싶다면서 중산릉이 造成된 直後부터 이곳에 자주 들러 自身의 무덤 자리를 찾았다. 중산릉 左側(正面에서 바라볼 때)의 다른 地脈에 自身의 무덤자리를 잡고 그 表紙로 亭子를 세워놓았다. 亭子 이름을 바른 기운이 흐르는 곳이란 뜻의 ‘정기정(正氣亭)’이라고 지었다. 尊敬하는 쑨원의 무덤보다 等高線上 조금 낮은 자리에 잡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實際로는 조금 높거나 거의 같다고 한다.

    장제스가 自身의 무덤자리로 定해놓은 곳은 風水上 중산릉 못지않게 絶妙하다. 珠算(山 正常)은 중산릉과 마찬가지로 日子(一字) 模樣 土型(土形)이다. 山 頂上에서 무덤자리로 이어지는 中間 部分에 작은 봉우리가 하나 맺혔는데, 種을 엎어놓은 듯한 模樣으로 五行上 金型(金形)에 屬한다.

    그리고 그 아래 무덤자리가 定해지고 다시 그 아래로 數百m 내려가면 자하號(紫霞湖)라는 湖水가 있다. 1930年代 장제스의 指示로 만들어진 人工湖水다. 흐르는 地氣를 멈추게 하는 鎭壓風水의 痕跡이다. 山 頂上에서 湖水까지 五行의 相生關係, 卽 土(土)→金(金)→數(水)를 만들어 생생拂拭(生生不息)으로 좋은 기운이 끊이지 않게 했다. 이렇듯 장제스는 生前에 自身이 묻힐 天下의 明堂을 잡아놓았지만 마오쩌둥의 共産黨에 依해 臺灣으로 쫓겨나면서 그 자리에 묻히지 못하고 만다. 아직도 그 자리는 主人을 기다리며 그대로 있다.

    중산릉(쑨원)과 정기정(장제스) 左側(正面에서 보아) 山줄기가 밑으로 쭉 내려오는 곳에 皇陵이 하나 있다. 明나라 創業者 朱元璋의 무덤 孝陵(孝陵)이다. 朱元璋이 生前에 心血을 기울여 잡은 길지다. 그런데 數百 年 後 쑨원과 장제스는 孝陵보다 等高線上 더 높은 곳에 自身들의 무덤자리를 잡는다. 쑨원은 朱元璋보다 더 큰 權力을 갖겠다는 野心을 보였다. 또 그 後繼者 장제스는 쑨원과 同級이거나 若干 더 큰 權力을 願했음은 그가 잡은 무덤 터의 立地에서 드러난다.

    다시 朱元璋의 이야기다. 元來 이곳 자금산에는 ‘三國志’에 나오는 吳나라 賃金 孫權의 무덤이 있었다. 當然히 孫權도 最高 吉地를 찾아 이곳에 自身의 무덤을 쓰게 했다. 그러나 1000年 歲月이 흐르면서 孫權도 吳나라도 歷史에서 사라졌고 무덤 痕跡만 남아 있다. 朱元璋은 이곳에 自身의 무덤을 잡을 때 孫權의 무덤이 있음을 알았다.

    臣下들이 孫權의 무덤을 없애자고 하자 朱元璋은 이렇게 말했다. “내 두어라. 내 발밑에서 시중이나 들게 하자.” 朱元璋도 孫權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하기를 願했다. 비록 同時代人은 아니지만 孫權·朱元璋·쑨원·장제스 그들은 資金山에서 서로 權力을 다투었다.


    朝鮮 正祖의 風水 工夫


    生家나 무덤을 보고 다음 番 大統領이 누가 될지 紹介하는 글이 넘쳐난다. 自稱 ‘道士’들의 豫言이다. 그러나 정작 지나고 보면 豫言이 的中한 境遇는 全無하다. 왜 그러한가. 선영과 生家를 보고 大統領 當選 與否를 가늠하려면 몇 가지 前提가 必要하다. 앞에서 紹介한 것은 中國의 事例였다. 朝鮮과 光復 以後 우리나라 大統領들은 어떠했을까.

    正祖 임금은 朝鮮 最高의 風水學者였다. 世孫(世孫) 時節인 1774年 아버지 思悼世子의 陵을 省墓하면서 그곳이 所聞대로 胸肢(凶地)임을 確認하고 뉘우치는 바가 있어 風水 工夫를 始作한다. 그는 自身의 風水 工夫 方法과 過程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에는 옛사람들이 風水地理를 論한 여러 가지 冊을 醉하여 專心으로 硏究하여 그 종지를 얻은 듯하였다. 그래서 歷代 祖上 王陵의 溶血死守(龍穴砂水)를 가지고 옛날 房술과 參考하여 보았더니, 瑕疵가 많고 길格(吉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自身을 갖지 못하여 世俗의 志士로서 眼目이 있는 者를 널리 불러 그 사람의 造詣를 試驗해본 바 그들의 言論과 知識이 옛 方術에 어긋나지 않아 곧 앞뒤로 前날 陵園을 論한 것을 찾아 살펴보았더니 그들의 論한 바가 箱子에 넘칠 程度였다.”(‘홍재전서’).

    正祖 임금의 風水 工夫 過程 亦是 다른 風水술社들과 비슷하다. 于先 風水地理書를 많이 읽어 그 大略을 理解한 뒤, 祖上의 陵域을 踏査했고, 마지막으로 當時의 有名하다는 支社들을 불러 未盡한 點들을 確認했다. 正祖는 個人的으로 슬픈 일을 많이 겪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 얻은 王子 문효世子가 다섯 살 때 釋然치 않게 죽었고, 이어서 문효世子의 生母가 다시 妊娠을 했으나 갑자기 죽는 等 王室에 不吉한 일이 繼續 일어났다.

    이것이 모두 生父 思悼世子의 무덤(배봉산, 現在 서울시립대 附近) 터가 나쁜 탓이라는 所聞과 上訴가 이어지자 1789年 그는 思悼世子 무덤을 水原으로 옮긴다(현재의 隆陵). 王陵을 옮기고 1年 안에 國家의 큰 慶事가 있을 것이라는 豫言(‘正祖實錄’에 記錄)이 있었는데, 豫言대로 王子가 태어났다(훗날 順調 賃金). 正祖로서는 生父 思悼世子의 무덤 터가 나빠 王室에 不幸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좋은 땅으로 모시니 그 發福으로 王子를 얻었다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正祖의 事例를 沒落한 王손 흥선군이 모를 理 없었다. 흥선군은 1846年 京畿道 漣川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 무덤을 많은 精誠과 努力 끝에 忠南 豫算 伽倻史 터로 옮긴다. 2名의 天子가 나올 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7年 뒤인 1853年에 둘째 아들 冥福이 태어나고, 名卜이 열두 살 되던 1863年 임금이 된다. 그 後 賃金에서 皇帝로 卽位한다. 結局 高宗 皇帝와 純宗 皇帝 두 名이 나왔으니 豫言된 風水說이 그대로 實現된 셈이다. 當然히 興宣大院君은 風水를 더욱 믿게 된다.

    興宣大院君이 直接 고른 며느리 閔妃(明成皇后)가 媤아버지의 風水를 통한 權力 爭取 事件을 모를 理 없었다. 1866年 王妃가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이 親庭아버지 墓 里長이었다. 1858年 親庭아버지 민치록은 驪州 先塋에 安葬됐다. 비록 沒落했지만 名門家 선영이라 地勢가 좋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堤川·李蕆·光州로 移葬을 거듭한다. 그리고 1894年에는 京畿道를 떠나 멀리 西海岸 바닷가 忠南 保寧으로 里長한다. 이곳을 推薦한 이는 忠淸道 水軍節度使 이봉구였다. 그는 이 功勞로 工曹判書가 된다. 驪州·堤川·李蕆·光州의 땅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王妃가 올바른 風水館·人生觀·國家觀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王妃의 精誠이 不足했는지 名當發福은 고사하고 災殃만 일었다. 里長 다음 해인 1895年 明成皇后는 日本人에게 弑害돼 屍身도 추리지 못했다.?



    吉地라면 暗葬이라도…

    興宣大院君과 明成皇后의 風水行爲에서 本質的 差異는 무엇일까. 흥선군은 아버지 墓를 移葬하고 그곳이 分明 天子가 나올 자리임을 굳게 믿고 그렇게 되도록 處身하고 行動했다. 明成皇后는 風水行爲는 試圖했으나 믿음이 없어 移葬을 反復했다. 風水에 對한 믿음 卽 風水信仰이 없었다. 移葬을 거듭할수록 國庫는 蕩盡됐고 百姓들의 怨恨은 하늘에 뻗쳤다.

    새로 무덤이 造成될 때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田畓을 빼앗기고 정든 故鄕에서 쫓겨났다. 1990年代 中盤, 筆者는 保寧에 있던 명성황후 親庭아버지 墓를 踏査했다. 그때 그곳 村老들은 100餘 年 前 그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當한 苦痛과 怨恨을 생생히 記憶하고 있었다. 2003年 명성황후 親庭아버지 墓는 初場地(初葬地·맨 처음 묻힌 곳)로 다시 里長된다(여주 街남邑 안金2里 마을 뒤). 다섯 番 移葬하고 여섯 番 葬事를 치른 이른바 ‘五千六腸(五遷六葬)’은 朝鮮風水社의 眞記錄이다.

    光復 以後 우리나라 大統領들의 風水 이야기다. 尹潽善 前 大統領 집안의 境遇다. 尹 前 大統領 夫人 공덕귀 女史의 自敍傳에 따르면 尹 前 大統領 5代祖 할아버지 墓를 李舜臣 將軍 後孫들의 땅에 暗葬했다고 한다. 굶주려 죽기 直前의 스님을 救해준 報答으로 그 스님이 좋은 자리를 찾아주었는데, 그 땅이 李舜臣 將軍 後孫에게 國家가 내린 賜牌之地(賜牌之地)였던 까닭에 不得不 巖嶂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發福으로 집안이 蕃盛했다고 믿고 있고, 尹 大統領도 그 땅을 사랑해 事後 國立墓地가 아닌 그곳에 安葬됐다.

    問題는 박근혜 前 大統領의 境遇다. 그 아버지 朴正熙 前 大統領의 生家가 있는 龜尾詩 상모동의 祖上 墓는 以前부터 길지라고 소문난 곳이다. 그런데 그 자리는 朴正熙 前 大統領이나 그 아버지가 잡은 것이 아니었다. 朴正熙보다 열두 살 많은 셋째 兄 박상희가 젊은 時節에 잡은 자리였다. 박상희는 누구인가. 흔히 元老 政治人 김종필 前 國務總理의 丈人으로 더 잘 알려진 人物이다.

    光復 以後 左翼 活動을 하다 射殺됐지만 光復 前에는 言論人으로 獨立運動을 했다. 그런 그도 當時 知識人들이 그러했듯 風水에 깊은 關心을 가졌다. 現在 구미시 상모동 金烏山 자락에 자리한 朴 前 大統領의 선영은 박상희가 叔父들(박일빈·박용빈)과 共同出資해 購入한 것이라고 한다(1990년대 口味 상모동 踏査 當時 그 마을의 여든 넘은 老人들 및 朴正熙 生家保存會長인 김재학 氏의 證言. 모두 작고).

    그렇게 잡은 자리는 當然 風水上 길지였다. 特히 무덤의 早産(朝山)은 龜尾의 名山 천生産(天生山)이다. 京釜高速道路 龜尾를 지나가다 보면 左側에 보이는 山이다(하행선 方向). 이 山의 생김새는 風水用語로 迫頭(樸頭)라고 하는데 이러한 山의 정기에 感應되면 王后와 烈士를 輩出한다고 한다. 박상희는 帝王支持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被殺됐고 열두 살 어린 아우가 後날 大統領이 됐다.


    朴正熙 祖上墓, 逆龍(逆龍)의 땅

    이러한 天下의 大吉地度 完全할 수 없다. 반드시 欠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風水 苦戰마다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完璧할 수 없다(好地無全美)”라는 但書를 단다. 이 터의 欠은 무엇일까. 바로 墓域 앞에 우뚝 솟아 있는 큰 바위 및 여러 자잘한 바위들이다. 風水 用語로 이것을 逆龍(逆龍)이라고 한다. “이러한 逆龍에선 下剋上을 일으키는 子孫이 나오며, 名當 發福이 다하면 쇠붙이(金)로 인한 죽음 卽 이금치社(以金致死)한다”고 風水술社 金鍾哲(作故) 先生이 現場에서 斷言했다. 아직도 그분의 목소리가 생생하다(1990년대 初).

    “박근혜 前 大統領도 이곳 선영의 明堂 기운을 받았으나 同時에 逆龍(逆龍)의 기운에서 自由롭지 못하며, 同時에 동작동 國立墓地에 安葬된 父母의 墓가 물에 차서 그로 인한 秀才(水災)의 災殃을 避할 길이 없다”고 一部 術師들은 이야기하기도 한다. 實際 朴正熙 前 大統領 夫婦 墓는 壙中에 물이 차서 墓 옆으로 配水施設을 해놓았다. 잔디가 잘 자라지 않아 해마다 交替하는 것도 그 까닭이다. 10餘 年 前 踏査 當時 그곳 管理人의 證言이다.

    不當하게 武力으로 政權을 奪取한 전두환과 그 後任 노태우의 風水 關聯 이야기는 여기서 省略한다. 노벨平和賞을 受賞한 金大中 前 大統領의 風水 關聯 이야기도 잘 알려진 事實이다. 1995年 當時 국민회의 總裁인 金 前 大統領은 父母님 墓를 全南 荷衣島 先塋에서 競技도 용인시 이동면 묘동으로 옮겼다.

    그 자리는 千線下降(天仙下降·神仙이 下降하는 形象)의 明堂으로 ‘南北統一을 完遂할 領導者가 날 자리’라고 1996年 月刊 ‘신동아’가 報道했다. 또 동교동 自宅을 두고 一山 정발산 아래로 移徙했다. 동교동에서는 絶對 大統領이 되지 못하니 帝王의 기운이 있는 정발산 아래로 가야 한다는 參謀들의 意見을 受容했다고 한다. 그 뒤 可能性이 없어 보이던 김대중 總裁가 DJP 聯合을 통해 이회창 候補를 누르고 大統領이 됐다.

    金大中 前 大統領 말고도 政治人들 가운데 大統領을 꿈꾸었거나 出馬한 사람들은 風水說을 믿었다. 2001年 자민련 김종필 名譽總裁, 한화갑 민주당 代表가 祖上의 무덤을 傳說的인 ‘紫微垣(紫微垣)’ 明堂이 있다는 忠淸道로 옮겼고, 이회창 前 한나라당 大統領 候補도 2002年 16代 大選에서 落選한 後 祖上 墓를 移葬했다. 大統領 候補였다가 落選한 이인제 議員도 2005年 父母 墓를 옮겼다. 정동영 國民의黨 議員은 17代 大統領選擧에서 落選한 뒤 風水說을 믿어 祖上 墓 里長에 關心을 갖고 ‘理解 못할 作業’을 했으나 仔細한 이야기는 省略한다.

    中國과 우리나라 歷代 임금과 大統領의 事例에서 본 것처럼 風水를 통해 權力을 잡고자 한다면 그에 相應하는 ‘風水行爲’와 ‘風水信仰’이 있어야 한다. 風水行爲와 風水信仰이란 무엇인가.


    名當發福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에른스트 아이텔(Ernst Eitel· 1838~1908)이라는 獨逸人이 있었다. 튀빙겐大學에서 神學과 哲學을 工夫하고 博士學位를 取得한 그는 ‘福音主義 루터 敎團’에 依해 中國 宣敎師로 派遣된다. 1896年 홍콩을 떠나기 前까지 30年間 中國에서 宣敎 活動을 했다. 그런 그가 1878年 ‘風水: 或은 中國에서의 自然科學의 根源(Feng-shui: or, The rudiments of natural science in China)’이라는 冊을 英語로 出刊한다.

    西歐에 風水의 本質을 紹介한 最初의 冊이다. 그가 風水에 關心을 갖게 된 것은 福音을 傳播하는 데 가장 큰 障礙物이 風水라는 事實을 알고부터였다. 住宅·무덤·官公署·道路에서 鑛山 開發에 이르기까지 風水가 關與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百姓뿐만 아니라 官吏들도 風水에 ‘絶對的 信仰心’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텔은 中國人들의 이 어리석은 迷信을 反駁하고 啓蒙하기 위해 風水를 工夫한다.

    그런데 처음 意圖와 달리 그는 漸次 風水에 빠져들기 始作한다. 나중에 그는 風水가 하느님의 말씀과 配置되지 않는다는 確信에 이른다. 그는 風水를 하늘과 땅을 잇는 調和의 理論으로서 中國的 自然科學으로 定義한다. “風水의 目的은 이러한 自然의 法則을 읽어내는 것”이며 그 副産物로서 大地 위에 居住하는 被造物들의 吉凶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當身의 運命을 알고 싶은가요. 그렇다면 다음 세 가지 가르침을 認定하십시오. 첫째, 하늘(하느님)이 이 땅을 支配합니다. 둘째, 하늘과 땅이 모든 被造物에 影響을 끼치는데, 이것의 活用 與否는 當身에게 달려 있습니다. 셋째, 運命은 當身의 善한 意志와 돌아가신 祖上의 影響力에 左右됩니다.”

    세 番째 文章과 關聯해 著者는 “後孫이 돌아가신 祖上을 眞心으로 恭敬하면 祖上의 魂靈이 나에게 다가온다”고 親切한 說明을 덧붙인다. ‘懇切히 祈禱할 때 主님이 함께하신다’는 것과 같은 脈絡이다. 그는 祖上에게 祭祀 지내는 것 亦是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祖上을 至極 精誠으로 잘 모실 것을 注文하기도 한다. 徹底히 中國化하여 基督敎 福音을 傳播하고자 했다.

    아이텔의 이러한 主張은 앞에서 言及한 ‘風水行爲’와 ‘風水信仰’을 前提한다. 風水行爲란 風水說을 바탕으로 땅을 고르고 建物을 짓고 墓地를 쓴 行爲를 말한다. 風水說을 믿어 吉地로 移徙를 하거나 移葬을 하는 行爲도 包含된다. 風水信仰이란 그를 통해서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말한다. 그러한 確固한 믿음에는 風水理論의 根幹을 이루는 動機感應(同氣感應)을 前提한다. 동기감응은 ‘周易’에 登場하는 槪念이다. 이에 對한 孔子의 敷衍說明이다.

    “같은 소리는 서로 應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를 救한다. (萬物 가운데) 물은 濕한 곳으로 흐르고, 불은 乾燥한 곳으로 번지고, 龍이 昇天하는 데에는 구름이 뒤따르고, 虎狼이 咆哮에 골짜기 바람이 흔들린다. 成人의 出現에 萬人이 우러러본다. 하늘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해와 달과 별(日月星辰)은 慰勞 親하고, 땅에 뿌리를 둔 것은 아래와 親하니, 萬物도 各其 그 同類끼리 共感 相通하는 것이다.”

    後世의 儒學者들이 引用하는 것이 앞에서 紹介한 ‘同聲相應 同氣相求(同聲相應. 同氣相求)’란 文章이다. 卽 “같은 소리는 서로 應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를 救한다”는 意味인데 風水의 동기감응論(同氣感應論)의 土臺가 된다. 自己가 眞正 이루고자 하는 바를 위해 그에 相應하는 땅을 찾아서 무덤을 쓰고 집터를 定한다는 風水信仰의 典據로 삼았다. 이때 ‘서로서로 應하고 서로서로 求하는’ 行爲에서 前提되는 것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믿음이다. 이를 다시 主役 中孚卦(中孚卦)는 다음과 같이 說明하고 있다.

    ‘학이 언덕 모퉁이에서 우니 새끼가 和答을 하는구나(鳴鶴在陰. 其子和之).’ 어미와 새끼들이 交感하고 和答하는 것은 지성한 마음 때문이다. 祖上과 後孫의 關係도 마찬가지이다. 어미가 새끼 새를 발톱에 쥐고 하늘을 날아 다른 곳으로 移動할 때 새끼 새는 그 어미가 自身을 떨어뜨리리라는 생각을 單 한 番도 하지 않는다. ‘風水信仰’ 亦是 그러하다. 祖上을 좋은 자리에 모시고 나면 그로 인해 좋은 일이 생길 것임은 분명한 ‘事實’이다. 秋毫의 疑心도 없다. 朝鮮의 儒學者들이 風水說을 盲信한 것도 이와 같은 思想的 土臺 때문이었다.


    山과 물 모두 힘이 있어야

    中國에서 7世紀 隋나라 皇帝 兩制에서 20世紀 쑨원과 장제스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19世紀 正朝와 興宣大院君, 20世紀 金大中 前 大統領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大權을 掌握하기 위한 수많은 手段 가운데 하나로 風水를 活用했으며(풍수행위), 一旦 일을 圖謀하면 그 結果를 全혀 疑心하지 않았다(풍수신앙).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有力 大統領候補가 落選 뒤에 先塋을 移葬하고 里長을 거듭한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大統領이 나올 터(帝王支持·帝王之地)는 어떤 곳일까. 傳統的으로 帝王知지는 하늘이 내는 것이라서 術師들이 함부로 論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風水 古典의 基本 前提다. 朝鮮朝 風水學 必修科目이던 ‘감룡경’은 다음과 같은 文章으로 始作한다.

    “紫微垣(帝王支持)에 있는 北極星이 하늘에서 가장 尊貴하며, 想像(上相·宰相)과 上場(上將·上將軍)의 별자리가 네 모퉁이에 이를 補佐하고 있다. 千乙과 太乙(天乙太乙)은 明堂을 비추고, 화개(華蓋)와 삼태(三台) 별자리가 앞뒤에서 補佐하고 있다. 이 별(北辰)의 照應을 받은 穴(帝王支持)은 萬 里에 걸쳐 하나 얻을까 말까 하는데, 이 별에 相應하는 龍(龍)을 世俗의 術師들은 認識할 수 없다. 設使 알았다 할지라도 그 땅을 쓸 수 없고, 임금에게 주어지거나 나라를 平安케 하는 用途로 쓰일 뿐이다.”(‘감룡경’)

    卽 “帝王知지는 하찮은 風水술社들이 함부로 關心을 가져서는 안 되니, 平凡하게 一般人이 쓸 수 있는 땅에나 關心을 가져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風水술社들이 帝王支持에 對한 關心을 抛棄할 수는 없었다. 가장 오래된 風水書이며 亦是 朝鮮王朝에서 風水學 必修科目이던 ‘請五經’은 帝王은 아니나 그에 버금하는 땅을 論하고 있다.

    ‘請五經’은 箜篌(公侯)가 나올 땅, 宰相이 나올 땅, 높은 벼슬을 할 땅, 文士가 나올 땅, 큰 富者가 나올 땅, 가난하고 賤하게 될 땅 等을 細分해 그 立地 條件을 說明한다. 여기서 箜篌가 나올 땅이라면 5年짜리 普通 大統領 자리에 버금할지 모르겠다. ‘請五經’은 箜篌가 나올 자리를 “龍馬(龍馬)가 뛰어오르는 듯 날아오르는 듯하고, (앞쪽의) 面對한 玉圭(玉圭)봉이 작지만 봉우리가 날렵한 곳으로 坐向만 제대로 되면 배움이 없이도 箜篌에 이를 것이다(不學而至)고 하였다.”

    風水의 妙味는 바로 위 引用文의 줄親 文章과 같은 部分일 것이다. 제대로 된 자리만 쓰면 “배우지 않아도 절로 箜篌의 자리에 오른다”니 누군들 欲心을 내보지 않겠는가. 中國과 우리나라 歷代 수많은 權力者가 風水라는 ‘阿片(阿片)’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理由를 說明해주는 文章이다.

    朝鮮朝에서 風水管理(地官)가 되려면 달달 외워야 했던 ‘金囊頃’은 “形勢가 屛風을 둘러쳐놓은 것 같은데, 그 가운데 우뚝 솟은 山稜線이 있어, 그 끝 地點에 葬事를 지내면 王后가 나온다”고 했다. 또 “山稜線의 氣勢가 마치 萬 마리의 말이 하늘에서 節度 있게 내려오는 듯 멀리서 雄壯하게 뻗어내리는 그러한 땅에 葬事 지내면 王이 나오며” “山稜線 氣勢가 큰 波濤같이 山봉우리가 重疊하여 이어져 있으면 큰 諸侯가 나올 땅이다”고 했다.

    ‘請五經’과 ‘金囊頃’보다 훨씬 後에 쓰여진 ‘(九天元女靑囊海角經구천원녀청낭해각경)’은 “王이 나올 땅은 큰 물결이 江을 가로지르듯 하며, 運氣가 서로 따르되 그 變化가 구불구불하며(산능선의 變化가 마치 구름이 연이어 흘러가면서 구불구불하며) 큰물이 감싸 도는 形勢”라고 敍述한다. 이어서 “恭敬 諸侯가 나올 땅은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이며, 흙은 두텁고 草木은 茂盛하며, 구부린 다리에 머리를 수그린 形象(卽 左右 山들이 안으로 감싸고, 主山은 머리를 숙이고 있는 形象)”이라고 描寫한다.

    이처럼 여러 風水 古典에서 描寫하는 帝王知지는 山과 물 모두가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但只 規模가 雄壯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單 한 坪의 땅일지라도 剛한 기운과 四方을 감싸는 山들의 政治(精緻)함이 있어야 한다. 아버지 思悼世子를 위해 正祖 임금이 터를 잡은 隆陵이 그렇고, 흥선군이 天子 子息을 두기 위해 이장한 禮山郡 남연군 墓가 그러하다. 또한 윤보선·金大中·김종필 等 以前 政治人들의 선영 亦是 ‘單獨住宅(個人墓地)’으로서 周邊 山들을 壓倒하며 中心的 役割을 하면서 風水 古典에서 말하는 帝王의 땅과 어울리는 雰圍氣였다.


    문재인과 安哲秀의 선영

    朴槿惠 前 大統領의 罷免으로 大選日子가 12月이 아닌 5月 9日로 당겨 잡히면서 벌써 各 黨의 候補들이 定해졌다. 候補들이 있으나 現在의 支持率로 보면 문재인과 安哲秀 두 候補의 對決로 歸着될 것이다. 그런데 5年 前인 2012年 18代 大選과 비슷한 狀況이다. 當時 박근혜·文在寅·安哲秀의 支持率이 가장 높았기에 3人 가운데 누가 될 것인지가 關心事였다.

    5年 前 筆者는 大選候補 3人의 生家와 先塋을 踏査했다. 그리고 1年 前인 2016年 5月 다시 문재인과 安哲秀 두 候補의 生家와 先塋을 踏査했다. 5年이란 時差가 있지만 보고 느끼는 바는 같았다. 旣存의 歷代 大統領이나 大選候補들의 선영과 많은 部分에서 달랐다. 一旦 두 候補의 선영 모두 公園墓地에 자리하고 있다. 文在寅 父親 墓는 양산시 상북면 天主敎 하늘公園에(묘번호: 8-11), 그 윗代 祖上墓는 以北에 있어 確認할 方法이 없다. 安哲秀 祖父母 墓는 釜山 機張郡 鼎冠邑 대정公園墓地에 있다(묘번호: 35-563).

    公園墓地이기는 하나 安 候補 祖父母의 左側 上段의 높은 山 頂上에 있는 바위는 벼슬鳳으로 剛한 힘을 보여주고 있다.
    社說 公園墓地는 風水를 考慮하기보다 더 많은 收益을 위해 墓域을 造成한다. 더 많은 무덤을 造成하기 위한 넓은 敷地를 값싼 林野에서 찾기 때문에 大統領이 나올 만한 吉地를 期待하기 어렵다.

    筆者와 다른 意見을 主張하는 분들도 있다. 2016年 5月 踏査에 筆者와 同行한 劉基相 博士(전북대 史學科, 全羅北道 盜聽 企劃管理室長 歷任)는 筆者와 다른 意見을 開陳했다. 柳 博士는 ‘朝鮮後期 湖南派 實學者의 風水認識과 風水生活’로 博士學位를 取得했기에 參考로 그의 意見을 紹介한다.

    “文在寅 父親 墓는 公園墓地 內 中出맥(中出脈)에 있으므로 最上의 穴자리를 차지한다. 左靑龍이 없는 듯 있는 것이 特異하고 멀리 安山의 貴人(貴人)봉이 아름답다. 文在寅의 貴人은 盧武鉉 前 大統領일까. 共同墓地에도 明堂이 있다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實感하는 穴處다. 北韓에 있을 文 候補 祖父母 以上의 墓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安哲秀 祖父母 墓所도 共同墓地 안에 있다. 白雲山 너른 품안에 있는 數百 基 共同墓地 속에서도 결穴(結穴)誌를 차지한다. 一種의 怪穴(怪穴)로 여겨진다. 安山이 기울고 달아나는 것이 좀 아쉽다. 安 候補 高祖父母 墓所(梁山市 龍主로 附近)는 祖父母 墓所보다 더 좋다. 무덤 앞 바위맥(石脈)李 큰 기운을 凝縮한다(좋은 바위는 權力을 거머쥐게 한다고 한다). 安山은 露積峯과 천마사(天馬砂)가 있어 富貴兼全의 땅이다. 龍띠인 문재인과 虎狼이띠人 安哲秀는 文字 그대로 龍虎相搏(龍虎相搏)이다.”



    文在寅 生家

    한 人間의 興亡盛衰에서 집터가 重要할까, 祖上 墓가 重要할까. 陽宅風水 古典 ‘황제택頃(黃帝宅經)’은 이를 다음과 같이 整理한다. “묏자리가 凶하고 집터가 좋으면 子孫은 벼슬길이 좋다. 묏자리가 좋고 집터가 나쁘면 子孫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모자란다. 묏자리와 집터가 모두 좋으면 子孫이 映畫를 누린다. 묏자리와 집터가 모두 나쁘면 子孫이 他鄕살이에 손이 끊긴다.” 묏자리와 집터 가운데 집터가 더 重要함을 말하고 있다. 그 가운데 特히 生家와 어린 時節을 보낸 집터가 重要하다.

    文在寅 候補의 生家는 巨濟市 거제면 명진 1길 27番地다. 6·25戰爭 때 以北에서 家族이 배를 타고 避亂 와서 처음 貰를 얻어 산 곳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6歲까지 살다가 山 넘어 龍山에서 다시 1年을 더 살고 7歲에 釜山으로 移徙를 갔다. 따라서 文 候補에게는 巨濟가 眞正한 故鄕인 셈이며, 巨濟의 땅 기운을 充分히 받고 成長했다 말할 수 있다. 文 候補 生家는 巨濟의 鎭山 鷄龍山(570m)에서 뻗어 나온 扇子山을 主山으로 하고 있다.

    흔히 鷄龍山 하면 忠南의 鷄龍山이 떠오르지만 元來 우리 民族에게 3個의 鷄龍山이 存在했다. 北朝鮮의 鷄龍山(滿洲 所在), 中朝鮮의 鷄龍山(忠南 所在), 南朝鮮의 鷄龍山(巨濟 所在)이 바로 그것이다. ‘鷄龍山 帝王支持說’은 아주 옛날부터 있었으며 朝鮮朝 ‘鄭鑑錄’에도 登場한다.

    鷄龍山 精氣를 끌어온 마을 珠算 扇子山(扇子山)은 이름 그대로 ‘부채 模樣의 山’이다. 마을을 屛風처럼 감싸는 山으로 主山이 되기에 充分하다. 鷄龍山과 扇子山의 强한 바위 기운이 부드러운 땅의 기운으로 바뀌고(박환·剝換), 그 가운데 숨은 地脈 하나가 밭과 논으로 숨어들어 들판 한 가운데 작은 터를 이루고 있다.

    이른바 金거북이 진흙 속에 숨어드는 ‘金俱沒니型(金龜沒泥形)’이다. 또 生家 앞으로는 明堂水(明堂水) 오수천이 흘러 閑山島 섬을 바라보고 客水(客水) 南海로 흘러들어간다. 섬이기는 하지만 드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四方의 山과 섬들이 아름답게 펼쳐지는데 그것은 밤하늘 수많은 별이 오롯이 내려와 제 모습들을 드러낸 듯하다. 한려海上公園이 바로 그곳이다.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땅이다. 朝鮮朝 風水學 必修科目 ‘감룡경’은 이와 같은 땅을 다음과 같이 讚美했다.

    “山의 形象은 땅에 있지만 그 形象의 原形은 하늘에 있으며, 하늘의 참 기운이 땅에 내려와 感應을 하면 그 結果가 그 땅위에 사는 사람들에 對한 吉凶禍福으로 應驗한다(山形在地星在天. 星氣下感禍福驗).”


    安哲秀 生家와 故鄕


    國民의黨 安哲秀 候補의 生家와 故鄕은 두 곳으로 보아야 한다. 그가 태어난 곳은 密陽이지만 靑少年 時節을 보낸 곳은 釜山이다. 父親 안영모 先生이 密陽에서 軍醫官으로 在職할 때 安 候補가 태어나 두 살까지 그곳에서 살았다(밀양시 來日商家 1길 10) 現在 이곳엔 ‘鄕村’이라는 飮食店이 있는데 筆者가 5年 前인 2012年 이곳을 踏査했을 때에도 盛業 中이었는데, 2016年 5月에 갔을 때에도 如前히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以後 안영모 先生이 釜山 범천동에서 梵天議員을 開業하면서 安 候補는 그곳에서 자란다(부산 東區 亡羊로 911). 따라서 安 候補는 이 두 곳을 모두 살펴야 한다.?

    密陽의 安 候補 生家는 嶺南樓를 左靑龍(左靑龍)으로 하여 그 안쪽에 작은 地脈이 내려와 뭉친 곳으로 全體的으로 嶺南樓 知己(地氣)圈이다. 嶺南樓는 朝鮮 最高의 名勝地 가운데 하나로 密陽의 뒷山 秋火山(243m) 地氣가 흘러가다가 밀陽川乙 만나 땅기운이 멈춘 곳에 세워졌다.

    수많은 詩人墨客이 嶺南樓에 對한 評을 樓閣 懸板에다가 남겼는데, 그 가운데 ‘天地東南第一樓. 洗來千古丈夫愁’란 文章이 壓卷이다. ‘嶺南의 第一 좋은 터에 자리한 樓閣은 옛날부터 帳簿의 근심을 씻어주었다’란 뜻이다. 이 땅의 기운을 端的으로 表現한 文章이다. 맑은 선비의 精神과 符合하는 땅이다. ‘帳簿의 근심’이란 다름 아닌 國家와 百姓을 위한 선비의 근심이다. 그러한 근심을 씻어줄 人物을 排出할 터이다. ‘淸雅한 선비(淸儒)’의 땅이다.

    安 候補 父親 안영모 先生이 開業해 몇 年 前까지 49年間 醫療 活動을 한 梵天議員은 安 候補가 靑少年 時節을 보낸 그의 ‘故鄕집’이다. 그리 높지 않지만 端嚴한 好천산(虎川山) 地脈을 받은 곳이다. 犯(虎)李 작은 내(川)를 뛰어넘은 形局, 卽 ‘맹호도天刑(猛虎跳川形)’의 땅이다.

    虎狼이가 비록 뭇 짐승의 으뜸이지만 작은 내 하나를 건너려 할 때도 신중함을 期하여 일에 失敗가 없게 한다는 것이 ‘맹호도天刑’이다. 安 候補의 生家와 故鄕, 이 두 곳은 安 候補에게 어떤 땅기운을 주었을까. ‘맑은 선비의 精神으로 조심스럽고도 緻密하게 일을 圖謀하는 虎狼이’ 기운이다.

    그런데 風水說 自體를 非難하는 사람들이 反問할 것이다. “그렇게 좋은 땅이라면 왜 巨濟島 명진마을과 密陽의 嶺南樓에서는 只今까지 大統領은커녕 大統領候補조차 나오지 않았는가. 왜 以前에 거기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문재인이나 安哲秀처럼 되지 않았는가.” 맞는 말이다. 한 사람의 成功과 失敗에는 風水가 全部가 아니다. 風水술社들 가운데 그렇게 主張하는 이들도 있으나 어리석은 者들이다. 한 人間과 한 家門의 興亡盛衰에는 다섯 가지가 順序대로 影響을 끼친다.?


    結局은 德에 달렸다

    ‘一名(一命)·利運(二運)·삼풍수(三風水)·私的蔭德(四積陰德)·誤讀書(五讀書)’

    첫째는 名(命)이다. 金수저로 태어난 것도 名이고, 흙수저로 태어난 것도 名이다. 둘째는 韻(運)이다. 같은 金수저로 태어났어도 가는 길이 다르면 後날 삶의 結果는 달라진다. 明과 韻을 合해서 ‘운명’이라 하며 이것을 엿보고자 하는 숱한 試圖가 使嗾·觀相·宮合 等과 같은 術數다.

    셋째, 風水(風水)다. 어느 곳에 터(집터와 무덤터)를 잡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成功과 失敗가 左右된다. 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없다. 王이 되려면 帝王支持에 터를 잡으면 된다는 믿음으로 只今까지 수많은 사람이 里長과 巖嶂을 通해서라도 天下의 大權을 잡으려 했다. 넷째는 陰德 쌓기다(積陰德). 훌륭한 德을 많이 쌓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섯 番째가 工夫다(讀書). 工夫를 잘하면 人生 初盤에는 分明 有利하게 作用한다.

    위 다섯 가지 要素 가운데 ‘名(命)’과 ‘運(運)’ 그리고 ‘工夫’는 先天的인 것이기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自己 努力으로 할 수 있는 것은 ‘風水’와 ‘陰德 쌓기’다. 中國과 우리나라에서 只今까지 千年 넘게 風水가 受容돼온 것은 風水를 통해 하늘이 自身의 運命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風水 古典 ‘金囊頃’은 이를 ‘脫身公開闡明(奪神功改天命)’, 卽 “하늘이 하는 일을 빼앗아 自身의 運命을 고친다”라고 定義했다. 많은 사람이 좋은 집터와 좋은 무덤 자리를 찾는 理由이기도 하다. 風水 다음으로 重要한 것은 德(德)을 쌓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德에 對해 朝鮮朝 風水學 考試科目이었던 ‘濁옥부’는 말한다. 이 글 ‘帝王의 風水學’의 結論이기도 하다.

    ‘帝王之興也以德而不以力. 其守也以道而不以地.’ 飜譯하면 다음과 같다. ‘帝王의 일어남은 德에 있는 것이지 힘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지킴은 道에 있는 것이지 땅에 依한 것이 아니다.’ 結局 사람의 德에 달려 있다. 그 德이란 時代精神을 正確하게 읽어내고 그것을 具現할 수 있는 意志와 能力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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