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의 로마 가톨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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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로마 가톨릭교회 , 또는 韓國의 天主敎會 朝鮮 中葉에서 末期 사이 마테오 리치 의 《 天主實義 》(天主實義)를 通해 ‘西學’(西學)이라는 學問으로서 傳來했으며, 以後 漸次 信徒가 늘어 外部 宣敎 活動 없이 自治 敎會를 세우는 데에 이르렀다. 朝鮮 政府는 가톨릭교회를 傳統的인 儒敎 文化를 破壞하는 것으로 여겨 開港 以前까지 가톨릭교회를 彈壓했지만, 韓國 가톨릭교회는 그러한 迫害에도 敎勢를 完全히 잃지 않았다.

1886年 造佛修好通商條約 以後 天主敎 信仰의 自由가 許容되며 穩全한 司牧活動이 可能해졌으나, 5次例의 迫害로 大多數의 信者가 殉敎하여 敎壇은 위태로운 狀態였다. 같은 時期 美國 宣敎師를 通해 들어온 改新敎는 別 다른 迫害 없이 積極的인 布敎 活動으로 敎勢를 擴張했으며, 1907年 平壤 大復興을 起點으로 改新敎가 天主敎의 信者數를 뛰어넘게 되었다. 이 後 가톨릭은 日帝强占期의 親日과 解放 政局을 거치며 敎勢의 惡化를 면치 못하다가 1970年代의 民主化 運動 參與로 社會的 名聲을 얻고 다시 信者數 增加 等 敎勢의 成功的인 復元을 이루었다.

歷史 [ 編輯 ]

朝鮮 大韓帝國 [1] [ 編輯 ]

天主敎 傳來 [ 編輯 ]

韓半島 天主敎 賈 最初로 뿌리내린 時期는 明確하지 않다. 그 時期는 壬辰倭亂 (1592~1598) 때 日本 軍을 따라온 예수회 宣敎師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 Gregorio Cespedes )가 傳播했다는 [2] 說에서부터, 丙子胡亂 以後 淸나라 에 볼모로 잡혀갔었던 소현세자 1645年 淸나라 에서 돌아오면서 獨逸 예수회 宣敎師 아담 샬 新婦 에게 가톨릭 書籍과 地球의 等을 膳物로 받아 가져와 傳來했다는 說 [3] 까지 거의 100年에 가까운 差異를 보이는 推測이 存在한다.

連帶가 가장 明確한 天主敎 傳來에 關한 記事는 1631年 정두원 明나라 에서 西洋 의 文物과 함께 天主敎 書籍을 가져왔다는 內容이다. [4] 實學者 홍대용 ( 1731年 ~ 1783年 )이 쓴 《湛軒燕記》(湛軒戀記)에도 中國 을 오가던 朝鮮 使臣 一行이 天主敎 를 紹介한 辨證 內容 있다. [3]

康熙帝 年間以後 우리나라 使臣이 北京 에 이르면 間或 天主堂에 가서 西洋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西洋사람들은 반갑게 맞아주며 聖堂 안의 異常한 그림 과 身上(神像) 그리고 奇異한 器物들을 고루 보여주고 西洋 에서 나온 珍貴한 物件들을 膳賜하였다.

朝鮮 使臣들이 西洋 宣敎師들에게 받은 膳物 中에는 科學書籍 以外에도 마테오 리치 神父가 1603年 北京 에서 發行한 基督敎 辨證서 《 天主實義 》 等의 天主敎 書籍들이 있었는데, 天主實義는 朝鮮 사람들이 天主敎를 스스로 받아들이는 데 影響을 주었다.

天主敎가 本格的으로 宗敎 로서 받아들여지기 前에는 天主敎를 '西學(西學)'이라 부르면서 하나의 學問으로 取扱했다. 18世紀 에는 士大夫의 書架에 《 道德經 》과 佛經 과 같이 마테오 리치 의 《 天主實義 》가 꽂혀 있었다고 한다.

正祖 의 治世(1776年 ~ 1800年) 동안에는 停學(正學, 遊學 )이 興하면 邪敎(邪敎, 天主敎)는 저절로 없어진다면서 天主敎를 默認한 正祖 의 政策에 따라 天主敎 에 對한 彈壓이 表面에 드러나지 않았다. 本格的으로 天主敎가 宗敎로서 받아들여진 것이 이때인데, 1779年 겨울에 京畿道 光州 에 있는 천진암 에서 권철신 의 弟子인 李蘗 , 정약용 , 정약전 , 정약종 , 권일신 等을 中心으로 天主敎 書籍 强學會가 열린 게 그 始初로, 이벽이 《천주공경가》를, 丁若銓이 《십계명가》를 짓는 等 天主敎의 敎理를 體化하는 活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特히 韓國 天主敎 信仰의 先驅者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李蘗 인데, 그는 1783年 (正祖 8年) 北京에 갈 機會가 생긴 이승훈 (李承薰)에게, 北京 에서 十字架 等 天主敎 信仰의 象徵物과 天主敎 書籍 等을 가져다 달라고 付託하였다. 當時 朝鮮의 로마 가톨릭 敎會는 北京 敎區 에 屬해 있었다. 1784年 이승훈은 北京 北天主堂에서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 神父에게서 洗禮를 받고 朝鮮에 돌아오면서 十字苦像 , 敎理書, 默珠 等의 聖物들과 天主敎會 文書들을 가져왔다. 그는 李蘗, 정약전 , 정약용 等에게 大勢(代洗) [5] 를 하였으며, 이들을 中心으로 初期 天主敎會의 布敎 活動이 이루어졌다.

明禮坊 事件 [ 編輯 ]

이승훈으로부터 洗禮를 받은 사람으로는 서울 明禮坊(明禮坊)에 사는 中인(中人) 譯官 김범우 도 있었다. 그는 1784年 李蘗 의 집에서 大勢를 받았다. 이 때부터 정약용 兄弟, 李蘗, 이승훈 권일신 等이 김범우 의 집에서 定期的으로 모여 미사 를 執典하고 敎理 工夫 等을 했는데, 1785年 天主敎 敎理 工夫를 하고 있을 때 周圍의 告發로 捕卒이 들어와 그들을 잡아들였다. 이로서 天主敎의 宗敎 活動이 처음으로 朝鮮 朝廷에 露出된 것이다( 서울 明禮坊(明禮坊)에서의 集會 事件 또는 乙巳 秋曹 摘發 事件 (乙巳秋曹摘發事件)). 이 때는 아직 天主敎會 에서 祖上 祭祀 를 하지 않는 等의 朝鮮 의 儒敎的인 價値觀에 어긋나는 行動이 드러나지 않았을 때였고, 金範禹를 除外한 人物들이 兩班들이었기 때문에, 事件은 金範禹가 귀양을 가는 것으로 끝났다. [6] 以後, 金範禹는 拷問 으로 입은 傷處가 惡化되어 귀양 密陽 에서 숨을 거두었다.(1787년) 李蘗 은 背敎者 이기경(李基慶)의 勸誘로 天主敎와 絶緣하고, 同志들과 交際를 끊었으며, 黑死病 으로 죽었다.(1786년)

辛亥迫害과 辛酉迫害 [ 編輯 ]

周文謨 神父 派遣 [ 編輯 ]

이승훈 等이 主導한 이러한 集會는 聖職者 없이 平信徒들만으로 미사와 成事를 執典한 것이었다.( 假聖職(假聖職) 制度 ) 이 制度 下에서 권일신 이 主敎로 選任되기도 하였다.( 1787年 ) 그러다가 문득 敎理 問答을 하던 途中 自身들이 하는 行爲가 天主敎 敎會法에 合致하는지 疑問이 생겼고, 윤유일 (尹有一)을 보내 天主敎 北京 敎區長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主敎에게 有權解釋을 要請하였다.( 1789年 ) 구베아 主敎는 假聖職制度로 敎會法 을 어긴 事實에 對해서는 責望했지만, 그들의 熱情的인 信仰은 稱讚했으며, 朝鮮에 天主敎 神父를 보내 주기로 하는 한便, 그는 1790年 朝鮮에 祭祀 禁止令을 내렸다.

禁止令에 따라, 天主敎 信徒인 윤지충 權尙然 이 祖上의 神主(神主)를 불사르자, 朝鮮 朝廷에서는 天主敎 를 朝鮮의 傳統 敵人 儒敎 價値觀에 反對하는 私學(邪學)으로 規定하고, 1791年 12月 8日 이들을 處刑하였다( 辛亥迫害 ).

北京 敎區는 淸나라 사람 吳 神父를 보냈으나( 1793年 ) 辛亥迫害의 餘波로 朝鮮 入國에 失敗한 後 病死하였다. 再次, 구베아 主敎는 外貌나 雰圍氣가 朝鮮 사람과 매우 닮은 周文謨 新婦를 宣敎師로 派送한다(1794년). 周文謨 神父는 洗禮 미사 執典, 地方 顚倒 等의 天主敎會 宣敎師로서의 所任을 1801年 殉敎할 때까지 實踐하였다.

天主敎에 對하여 比較的 寬大하였던 正祖가 1800年 8月 18日 別世하고 8月 23日 順調 가 11歲로 王位에 오르면서 정순왕후 垂簾聽政 을 始作하였으므로 [7] 定順王后의 親오라버니 金龜柱 (그는 이미 1786年에 死亡하였다)가 主軸을 이루었던 碧波 가 政權을 掌握하였다. 僻派는 邪學(邪學)에 對한 强勁策을 主張해온 터였다. 1801年 2月 22日 定順王后는 天主敎 嚴禁에 關해 下校를 내렸다.

그 內容은 “天主敎 信者는 人倫을 무너뜨리는 私學(邪學)을 믿는 者들이니, 人倫을 威脅하는 禽獸와도 같은 者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開學하게 하고, 그래도 改悛하지 않으면 處罰하라”는 것이다. [8] 이러한 下敎에 따라 1801年 3月부터 10月까지 이승훈 · 정약종 等 많은 天主敎 信者들과 周文謨 神父가 處刑되었다( 辛酉迫害 ). 그 뒤에도, 丁若鍾의 조카 사위였던 天主敎 信者 황사영 (黃嗣永)李 辛酉迫害의 實相과 對應 方案을 적어 淸國 北京 의 구베아 主敎에게 보내려던 密書(密書)가 發覺되었다(1801년 10月 29日(陰曆 9月 22日) 直後). 이 密書에는 朝鮮의 天主敎가 迫害를 받은 事實과 淸나라의 힘에 기대어 武力으로라도 朝鮮에 天主敎를 許容토록 해달라는 內容이 담겨져 있었다. 이 密書를 지은 黃嗣永은 1801年 12月 10日 에 處刑되었다.( 黃嗣永 白書 事件 ) [9]

周文謨의 死亡으로 朝鮮 天主敎會에는 空白이 생겼고, 1805年 에 들어서면서 中國 天主敎會도 亦是, 祭祀를 禁止한 天主敎會를 中國 의 傳統을 破壞하는 무리로 본 中國社會의 抵抗으로, 天主堂(天主堂, 中國 에서 天主敎 聖堂을 가리키는 말)과 神學校 가 破壞당하는 等의 迫害를 받기 始作해, 朝鮮 天主敎會에 宣敎師를 보낼 餘裕가 없어졌다. 이에 朝鮮 天主敎會의 空白은 長期化되었다.

天主敎會의 成長 [ 編輯 ]

하지만 敎皇 레오 12歲 (在位 1823~29年)가 朝鮮에서의 傳敎를 프랑스 파리 外方傳敎會 에 맡기기로 하면서, 朝鮮 天主敎會에 宣敎師 가 派送될 可能性이 생긴다. 이에 파리 外方傳敎會의 바르텔르美 브뤼기에르 神父가 朝鮮 宣敎를 自願하고 나서자(1831년), 敎皇 그레고리오 16歲 (在位 1831~46年)는 1831年 9月 9日 天主敎 朝鮮代牧區 를 設定하고 브뤼기에르를 初代 代牧區長 卽, 朝鮮 天主敎會 招待 主敎로 임명했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主敎는 朝鮮에서의 傳敎를 專擔하고 싶어하는 中國 天主敎會 유방제(劉方濟) 神父의 欲心 때문에 入國의 機會를 얻지 못한 채, 1835年 으로 別世했으며, 代身 파리 外方傳敎會 宣敎師 피에르 模倣 神父가 정하상 을 비롯한 敎友들의 保護를 받으며 入國했다.( 1836年 1月 12日 ( 1835年 陰曆 11月 24日 ) 모방 神父는 유방제 新婦를 中國으로 돌려보냈다.

모방 神父에 이어서, 赴任하지 못했던 브뤼기에르 主敎의 뒤를 이어 朝鮮敎區長으로서 파리 外方傳敎會 로랑마리조제프 앵베르 主敎가 入國(1836年 4月)하였고, 또한 파리 外方傳敎會 자크 샤스탕 이 入國(1836年 末)하였다. 이들 파리 外方傳敎會 出身의 宣敎師들은 朝鮮人 聖職者 가 必要하겠다고 생각했고, 김대건 · 최양업 · 최방제 마카오 神學校에 보내서 工夫하도록 하였다.( 1836年 12月) [10] 當時 模倣 神父는 靑少年 信者들의 洗禮 를 執典하기 위해 미리내 마을을 訪問했는데, 김대건 집안이 殉敎者 들이 나올 程度로 信仰이 깊고, 김대건 自身도 天主敎 神父가 되고 싶어했기 때문에 聖職者 로 키울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피에르 模倣 神父는 朝鮮에서 比較的 가까운 北京神學校나 中國人 新婦養成所를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마카오까지 가서 留學을 하게 된 것이었다. [11] 앵베르 主敎는 마카오에서 工夫하는 神學生들이 司祭敍品을 받을 때까지 時間이 十餘年이나 걸림을 생각하여, 平信徒 神學者인 정하상 (바오로)等에게 神學 과 第2次 바티칸公議會에서 前例를 改革하기전까지 가톨릭교회가 使用한 라틴말 을 가르쳤다.

天主敎는 民衆들에게 널리 퍼졌는데 平等 思想에 共感을 했기 때문이다. 1802年 殉敎한 황일광(시몬, 1752年 ~ 1802年)은 蔑視와 賤待를 받는 白丁 이었는데,“나의 이러한 身分에도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對해 주니, 天堂은 이 世上에 하나가 있고 後世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12] 라고 했다.

己亥迫害와 丙午迫害 [ 編輯 ]

앵베르 主敎 等 세 名의 新婦에 依하여 天主敎 의 敎勢가 回復되고 信徒는 增加되어 갔다. 이때 朝廷에서는 憲宗의 할머니인 순원왕후 를 中心으로 한 安東 金氏 에 對立하여 憲宗의 母后(母后)인 신정왕후 의 戚族 풍양 조氏 碧波 가 새로 登場하면서 無慈悲한 迫害 旋風이 휘몰아쳤다. 1839年 (憲宗 5年),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 主敎· 피에르 模倣 新婦· 자크 샤스탕 神父를 비롯한 119名의 天主敎人이 投獄·處刑되었다.( 己亥迫害 ) [13] 己亥迫害가 있고나서 5年 뒤, 韓國敎會史 最初의 韓國人 天主敎 司祭가 된 김대건 神父가 앵베르 主敎의 殉敎로 空席이 된 朝鮮代牧區에 새로 任命받은 莊祖제프 페레올 主敎 ,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神父 및 다른 信者들과 함께 라파엘 號를 타고 상하이 港을 떠나 朝鮮으로 入國하였다. 入國 後 金大建 神父는 宣敎를 펼치다가, 祕密 航路를 그린 地圖를 中國으로 가는 中國 漁船에 넘겨주려다가 延坪島 附近에서 巡察하던 官憲들에게 1846年 6月 15日 逮捕되어 같은 해 9月 16日 새남터 에서 處刑되었다( 丙午迫害 ).

丙寅迫害 [ 編輯 ]

1866年 에는 丙寅迫害 가 일어났다. 朝鮮 天主敎는 以前에도 辛亥迫害 ( 1791年 ), 辛酉迫害 ( 1801年 ), 己亥迫害 ( 1839年 ) 等 여러 次例 迫害를 받았는데, 哲宗 安東 金氏 의 天主敎 迫害가 늦추어지면서 敎人들이 많이 늘었다. 이러한 敎人 增加는 흥선 大院君 이하응 時代에도 마찬가지여서, 當時 朝鮮 天主敎會 敎勢는 敎人數 23,000名, 프랑스 파리 外方傳敎會 宣敎師 12名에 達했다. 그래서 大院君은 자주 國境을 侵犯하던 러시아 를 牽制하기 위해, 天主敎 信者 남종삼 , 홍봉주 의 勸誘로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 舟橋를 만나려고 했다. 프랑스 天主敎會 宣敎師들을 통해 英佛同盟(英佛同盟)을 締結하고자 한 것이다. [14] 하지만 政治的인 理由로 인하여 [15] 프랑스 天主敎 宣敎師들과 信者들을 處刑하는 强勁策으로 大院君의 天主敎에 對한 政策은 바뀌었다. 當時 사람들의 말로는 大院君이 十年을 期限으로 하여 天主敎의 싹을 말려버리려 했다고 傳해질만큼 丙寅迫害는 朝鮮 天主敎會로서는 견디기 힘든 深刻한 迫害였다. 1866年 에 始作되어 8年餘에 걸쳐서 繼續된 大院君의 迫害를 통해서 朝鮮에서 宣敎하던 프랑스 天主敎會 宣敎師 9名을 비롯해서 많은 天主敎 信者들이 切頭山 (切頭山), 해미邑城 等에서 殉敎되었다. 虐殺된 사람 가운데는 天主敎 朝鮮代牧區腸 베르뇌 主敎도 있었다. 이때에 犧牲된 信者들에 關해서는 다음과 같은 記錄이 남아 있다.

1868年 9月에 벌써 迫害에 犧牲된 사람이 2千 名이 넘었는데, 그 中에 5百 名이 바로 漢城 에서 죽었다. 1870年 에 朝鮮에서 公公然히 떠도는 風聞에 依하면 에서 굶주림과 困窮으로 죽은 모든 사람을 빼고도 犧牲된 사람의 數가 8千에 이르렀다 한다. 勿論 이 數字를 確認할 道理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이 數字들이 誇張된 것이라 하더라도, 大院君이 그의 約束을 지켜 10年도 안 걸려서 天主敎의 痕跡을 지워버리기를 願하고 있음을 證明해 준다.

大院君의 迫害에도 不拘하고 天主敎會는 決코 죽지 않았다. 迫害는 天主敎를 더욱 擴散시키는 契機로 作用하고 있었다. 그러나 大院君의 政治權力도 10年을 가지 못했다. 그는 高宗 임금이 直接 政治 를 맡게 된 以後 政治 一線에서 물러나야 했다. 自身의 며느리 명성황후 一家와도 熾烈한 權力鬪爭을 했지만 참패당했다. 開港 以後 한때 그가 政權을 다시 掌握하기도 했지만, 곧 밀어닥친 近代化의 過程에서 그가 설 자리는 더 異常 없었다. 그 後에도 그는 政治的 權力을 回復하기 위해서 無盡 애를 썼다. 甚至於 그는 1895年 10月 8日 乙未事變 을 통해 明成皇后의 除去에 介入했다가 徹底히 失脚하게 되었다. 明成皇后가 日本 浪人들에 依해 弑害된 乙未事變 以後 그는 麻布 孔德洞 自宅에서 거의 幽閉生活을 해야 했다.

그의 夫人인 여흥부大夫人 閔氏 는 이미 1896年 10月 朝鮮敎區 主敎인 뮈텔 主敎로부터 ‘마리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洗禮聖事 堅振聖事 를 받아 信者가 된 바 있다. 그렇지만 大院君 自身은 天主敎의 가르침에 對해서는 關心이 없었다. [16]

信仰의 自由 [ 編輯 ]

朝鮮王朝는 19世紀 後半에 이르러 큰 變化를 겪게 되었다. 이 變化에 加速度를 붙여준 事件 가운데 하나가 西洋 國家들과의 開港이었다. 開港으로 因해 朝鮮 은 近代社會로 轉換되어 갔다. 그러나 開港이 곧바로 信仰의 自由를 保障해 주지는 못했다.

  • 天主敎 信仰에 對한 默認

開港 以後 朝鮮 이 外國과 맺은 여러 條約에서도 信仰의 自由에 關한 明白한 規定은 없었다. 極히 드문 條約에 規定된 宗敎 에 關한 條目은 어디까지나 朝鮮에 나와 있는 外國人 만을 對象으로 했지, 朝鮮人 에게도 信仰의 自由를 容認해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開港으로 因해 信仰의 自由에 對한 展望이 좀 더 분명해졌다. 時代變化를 感知한 支配層에서도 天主敎會 問題를 더 以上 박해로만 一貫할 수 없다고 判斷하게 되었다. 그들은 開港 以後 天主敎會 信仰이 朝鮮에 더욱 널리 傳播되어 있고, 파리 外方傳敎會 宣敎師等의 西洋人 天主敎會 宣敎師들이 活動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朝廷은 이들의 信仰實踐을 짐짓 모른 체하면서, 그 活動을 默認하는 立場을 取했다.

  • 프랑스와의 信仰의 自由 論爭

적지 않은 사람들은 天主敎 信仰의 自由가 주어지기 始作한 事件으로, 朝鮮 政府와 프랑스 1886年 에 맺은 《 韓佛修好通商條約 》을 들고 있다. 프랑스 側에서는 이 條約文에 天主敎 朝鮮敎區 블랑 主敎 의 要請에 따라 信仰의 自由 許容에 關한 項目을 揷入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朝鮮 側의 反對로 인해 이를 直接 表現하는 代身에, 프랑스 사람이 朝鮮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敎誨)라는 條文을 揷入시켰다. 天主敎會 側에서는 이를 ‘全校의 自由’에 對한 認定으로 擴大 解釋했다. 勿論 當時 朝鮮 朝廷에서는 이와 같은 解釋에 反對했지만, 블랑 主敎를 비롯한 朝鮮 天主敎會와 프랑스 側은 이 句節이 全校의 自由에 對한 人情이라고 主張하여 그들의 解釋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한便, 信仰의 自由 가운데 重要한 要素가 全校의 自由이므로, 오늘의 硏究者들 가운데 一部는 韓佛條約이 締結된 1886年 을 天主敎會의 信仰의 自由를 얻게 된 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信仰의 自由가 龍仁됨.

信仰의 自由가 默示的으로 容認된 때는 1882年 이었다. 이 해에 天主敎會 는 仁賢書堂(仁峴書堂, 韓漢學校)을 設立했다. 이 學校에는 信者가 아닌 一般人 學生들도 在學하고 있었다. 그 以後 天主敎會는 서울과 慶尙道 孤兒院 을 세워 運營하기 始作했고, 1885年 10月 28日에는 江原道 原州 부엉골에 神學校를 再建하여 朝鮮人 聖職者 養成에 再着手했다(참고로 天主敎 最初의 神學校는 1855年 忠北 堤川 배론에 最初의 神學校인 聖요셉 神學校가 세워졌다.) [17] . 이러한 一連의 일들은 信仰의 自由에 對한 調整의 默認 없이는 거의 不可能한 일들이었다. 그리하여 韓國 天主敎會 는 敎會가 세워진 後 100年 만에 信仰의 自由를 默認받을 수 있었다.

  • 赦免令과 信仰의 自由 許容

1895年 朝鮮 朝廷은 1866年 丙寅迫害 때에 殉敎한 一部 信徒들에 對한 赦免令을 發表했다. 赦免의 對象이 되었던 信徒들은 少數에 不過했지만, 이 赦免令은 信仰의 自由를 公認하기 爲한 事前 措處로 解釋되었다. 또한 이 해에 天主敎 朝鮮敎區 (現在 天主敎 서울大敎區 ) 제8대 敎區長 利子 프랑스 사람인 뮈텔 主敎는 朝鮮의 國王 高宗 을 만났다. 이때 高宗은 1866年 丙寅迫害 에 對하여 遺憾의 뜻을 표하며, 뮈텔 主敎에게 親善을 提議했다. 國王인 高宗 天主敎 를 認定하고, 從前의 迫害에 對해 遺憾을 표했다는 事實은 信仰의 自由를 公認했음을 뜻했다. 그러므로 뮈텔 主敎 自身도 그날의 日記에서 朝鮮에서 天主敎會 迫害가 公式的으로 幕을 내렸다고 記錄했다. 이러한 情勢의 變化가 法的으로 確認된 것은 1899年 에 調印된 「僑民條約」(敎民條約)에서였다. 이 僑民條約은 朝鮮 朝廷의 官吏와 뮈텔 主敎 사이에 締結되었다. 이 條約을 통하여 朝鮮人 天主敎 信者들에게도 信仰의 自由가 成文法으로 保障되었고, 天主敎 信者들도 一般人과 同等한 權利와 義務가 있음이 認定되었다. 이 「僑民條約」은 1904年 에 締結된 「宣敎條約」(宣敎條約)을 통해서 더욱 補完되었다. 이 「宣敎條約」에 依해 宣敎師들은 開港場 以外의 다른 地域에서도 土地를 買入하고 建物을 세울 수 있는 權利를 保障받았다. [18]

日帝强占期 [ 編輯 ]

抗日鬪爭 [ 編輯 ]

天主敎가 韓國 社會에 자리를 잡을 무렵, 日帝는 韓國 侵略의 野慾을 露骨的으로 드러내기 始作했다. 日帝는 1905年 11月 17日 乙巳條約 으로 外交權을 剝奪하고, 1910年 8月 29日 韓日合邦으로 國權까지 抹殺하며 韓國에 對한 植民支配를 本格化하였다. 이러한 日帝의 侵略에 맞서 韓國人들은 武力을 動員한 直接的인 獨立鬪爭을 展開하거나 愛國啓蒙運動을 통해 民族意識을 鼓吹시키는 等 여러 가지 方法으로 日帝의 侵略에 對應했다.

安重根 (洗禮名: 토마스) 醫師는 가장 代表的인 가톨릭 獨立運動家였다. 1909年 10月 26日 , 安重根은 하얼빈 驛에서 이토 히로부미 를 暗殺했다. 安重根은 死刑宣告를 받은 以後 告解聖事 病者聖事 를 請했다. 그러나 當時 朝鮮大敎區長이었던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主敎는 安重根을 殺人者로 斷罪하고, 朝鮮大敎區의 聖職者들로 하여금 安重根에게 成事를 배푸는 것을 禁했다. 그러자 安重根의 집안과 因緣이 있었던 토마스 빌렘 新婦가 뮈텔 主敎에게 알리지 않고 뤼순 監獄을 찾아가 安重根에게 告解聖事와 病者聖事를 배풀었으며, 安重根은 成事를 받은 뒤 殉國했다.

이 事實을 알게 된 뮈텔 主敎는 主敎에게 不純名했다는 理由로 빌렘 神父의 成事執行權을 정지시켰으나, 빌렘 神父는 敎皇廳 敎會法院에 異議를 提起해 成事執行權 停止는 解除됐다. 이 後 1993年 金壽煥 樞機卿이 安 義士 誕生 記念 미사에서 安重根 義士의 行爲를 殺人이 아닌 獨立運動이자 正當防衛로 判斷한다는 趣旨의 講論을 통해 天主敎에서 安重根의 平信徒 身分은 復權됐다. [19]

韓日 倂合 以後 韓國 天主敎 敎會의 敎勢는 크게 떨치지 못한 채 艱辛히 現狀을 維持할 程度밖에 되지 못했다. 日帝 統治의 壓迫에서 벗어나려는 移民의 增加로 敎人 數는 韓日倂合 當時의 7萬3千餘名 水準을 넘어서지 못했다. 韓國人들이 主로 移民해간 곳은 하와이, 멕시코, 間島 等이었으며 그 中에서도 間島는 天主敎人들이 第一 많이 가는 곳이었다. 1910年 한해동안 間島로 간 移民者 數는 無慮 10萬名에 達했고 이 가운데 天主敎人의 數만도 豫備 信者까지 합쳐 3千5百名이나 되었다. 洗禮 받는 사람은 많았으나 移民者가 增加함으로 因해 敎人 數는 現狀을 維持할 程度였다.

日帝에 對한 沈默 [ 編輯 ]

日帝 强占期의 韓國 天主敎는 主로 프랑스 , 獨逸 , 美國 等의 西歐圈 帝國主義 國家 出身의 宣敎師 들이 指導하고 있었고, 이들은 大體로 日帝의 侵略 行爲와 植民 政策에 沈默하고, 抗日運動을 支持하지 않았다. 뮈텔 主敎는 獨立運動에 參與하는 성신學校 神學生들을 退學 措置시키거나 朝鮮總督府에 密告하였으며, 1930年代에 들어 神社參拜를 許容하는 等 積極的인 親日 反民族 行步를 보였다.

天主敎 指導者들의 日本에 對한 基本的인 視角은 大體로 否定的이었다. 뮈텔 主敎의 境遇, 1904年부터 1906年까지 일어났던 中國의 男唱敎案에서 發生한 가톨릭 宣敎師들의 被殺 消息을 傳해듣고는 表面的으로는 中國人들이 일으킨 事件이었지만, 그 背後에 日本人들이 있다고 疑心하였다. [20] 또한 日本 政府가 헤이그 密使 事件을 惡意的으로 操縱하였다고 主張하였다. 드網즈 主敎는 1920年代 日本人들이 敎會와 韓國人들 所有의 土地를 强奪해가는 것을 보고, 憤慨하며 日本에 對한 敵愾心을 나타냈다. [21]

그렇지만, 이들은 基本的으로 敎會의 社會 參與, 곧 豫言者 敵 목소리를 人間의 靈魂 을 救援하는 하느님의 事業을 遂行하는 敎會의 任務와 配置되며, 따라서 人間의 靈性 적 生活을 沮害하는 危險한 行爲라 잘못 認識하고 있었고, 韓國이나 日本의 政治 問題에 一切 關與하지 않는다는 徹底한 政敎分離 原則을 堅持하였다. 이것은 結果的으로 以後 韓國人들의 獨立 運動을 沮害하는 要素로 作用하게 되었다. 게다가 獨立運動 過程에서 나타난 몇몇 否定的인 모습으로 인해 自身들의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宣敎師들에게 비친 獨立運動의 否定的 側面 가운데 하나는 獨立運動을 하다가 背信行爲를 하는 이들에 關한 것이었다. 日本軍 에 依해 學校가 불타고 殊常한 사람들이 잡혀갔는데, 그 過程에서 背信行爲를 한 사람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卽, 以前에는 獨立軍이었던 者들이 日本軍의 通譯者가 되고, 그 狀況을 利用해서 自身들에게 過去에 抵抗했던 사람들을 誣告로 連累시킨 일도 생겨났다. 宣敎師들의 눈에는 이러한 사람이 가장 卑劣한 사람으로 보였다. [22] 또한 實力養成을 통한 民族啓蒙에도 天主敎 宣敎師들은 否定的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安重根 義士가 學校를 만들어서 朝鮮 民衆들에 對해 啓蒙活動을 하려고 하자, 天主敎 宣敎師들은 "敎人들이 學問을 하면 信仰에 좋지 못합니다."라면서 朝鮮 天主敎 信者들의 無知를 傍觀하였다. 이에 火가 난 安重根 義士는 天主敎 宣敎師들에게 佛語를 더 以上 배우지 않았다.(안중근 評傳)이는 改新敎 도 마찬가지여서, 日帝强占期 改新敎 宣敎師들은 朝鮮人 牧師 들에게 中等 水準의 神學 敎育 을 했다. 朝鮮人 牧師들의 學問水準을 낮게 만들어야 自身들에게 順從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형묵 牧師는 이러한 宣敎師 들의 差別 敵이고 權威主義 的인 모습이 只今도 韓國敎會에서 猛威를 떨치고 있다고 말한다. 平信徒들은 그저 順從의 美德만 갖추면 그만이지, 神學的으로 헤아리고 따지는 것은 專門的 訓鍊을 받은 聖職者 神學者 에게 맡겨야 한다는 잘못된 認識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基督敎의 根本的 事實과 信條를 徹底히 믿는 사람을 敎役者의 資格으로 定함으로써 韓國 改新敎 敎會에 基督敎 根本主義 가 곧 "예수天堂 不信地獄"같이 單純化한 敎理를 疑問이나 批評없이 무턱대고 믿는 反知性注意를 심었다. 疑問을 가지고 批評하는 理性的인 信仰을 마치 사탄의 짓인양 여기는 態度가 그 例이다. [23] 卽, 天主敎와 改新敎 모두 基督敎 根本主義로 인해 反知性主義가 歷史的으로 宣敎師들의 헤게모니를 强化하는 手段으로 使用되었고, 오늘날에는 敎權主義者들의 敎權强化 手段으로 活用되는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된다.

反論 [ 編輯 ]

그러나 한便에서는 天主敎가 반드시 그런 態度로만 一貫한 것은 아니라는 主張도 提起되고 있다. 卽, 當時 天主敎 平信徒들은 獨立運動을 活潑하게 펼쳤고, 그 數나 比重에 있어서도 다른 宗敎와 比較할 때 뒤지지 않는 水準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天主敎徒 獨立運動에 相當한 寄與를 했다는 主張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1990年代 以後 信實한 天主敎 信者인 安重根 醫師의 業績을 再照明하는 硏究가 活潑히 進行되는 것도 그 一環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義民團 [ 編輯 ]

肝도 地域에서는 龍井村을 中心으로 한 天主敎 信仰共同體가 肝도 民族解放運動의 根據地로서의 役割을 遂行하였다. 韓半島에서 廣範하게 展開된 3·1 運動 을 間島 地域에서 처음으로 蹶起한 곳도 龍井村이었다. 天主敎 信者들이 主軸이 된 武裝獨立運動團體인 義民團(義民團)도 間島에서 組織되었다. 義民團의 團長은 방우룡, 副團長은 金延이었다. 義民團의 財政은 信者들의 獻金으로 充當되었다. 義民團은 1920年 間島국민회에 統合된다. 1915年의 朝鮮總督府 國境地方視察部명서에서는 이러한 肝도 天主敎 敎會에 對해 다음과 같이 說明하고 있다.

間島의 天主敎는 布敎 始初에 醫療를 行하고 金品을 주며 또한 中國 官憲의 暴政을 排除하여 오로지 保護懷柔에 힘쓴 結果, 이 敎會의 基礎가 더욱 튼튼해져 以後 漸次 信徒가 增加하였다. 다른 한便 反日思想을 鼓吹하고 있다.

? 白山學報 9號 224面 朝鮮總督府 國境地方視察부명서 參照.

戰爭 [ 編輯 ]

1914年 第1次 世界大戰 이 勃發하면서 敎勢 擴張은 또 한番 打擊을 입게 되었다. 戰爭으로 프랑스 神父 11名이 召集當해 本國으로 돌아갔고 이에 따라 空席이 된 本堂을 于先 이웃 本堂 神父가 兼任하는 臨時變通의 方法을 썼다. 그러나 워낙 地域이 넓은데다 司祭의 數가 不足해 圓滑한 傳敎事業은 期待하기조차 어려운 形便이었다.

이웃宗敎들의 惡宣傳 [ 編輯 ]

게다가 다른 宗敎에서 戰爭을 오히려 天主敎를 惡宣傳하는데 利用했는데, 그 中에서도 特히 佛敎 側에서 天主敎를 猛烈히 批判하고 나섰다. 佛敎徒들은 “유럽은 只今 屠殺場이 되었으며 그 어느때보다도, 또 어느 民族보다도 그곳 사람들은 苦難을 겪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 싸우는 民族들의 宗敎가 果然 좋을 수 있으며 우리에게 幸福을 줄 수 있을 것인가?”라고 誹謗했다.

뿐만 아니라 改新敎 側에서도 改新敎 信者가 많은 英國과 美國이 日本 帝國과 同盟을 맺은 것을 두고 자랑하는가 하면 “天主敎의 聖職者는 왜 獨身인가?” “왜 마리아를 恭敬하는가?”라는 等의 常套的인 批判을 되풀이했다. 이는 改新敎 宣敎師들이 基督敎 根本主義 性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神學에서 排他的인 性向을 가진 이들은 天主敎에 對해 마리아 崇拜를 하는 偶像宗敎라고 보아서 排斥했다.

이밖에도 産業 發展과 生活費의 騰貴 및 婦女子의 工場 進出 等 一連의 唯物的 生活館은 敎人들의 信仰 活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唯物的 敎育 및 生活觀과 싸우기 위해서는 靑年會의 組織과 學校 敎育 等이 緊急한 事業이었다. 그러나 많지 않은 敎會 學校도 朝鮮 總督府의 干涉으로 宗敎敎育을 제대로 하지 못해 間接的인 全校라는 所期의 成果를 거두는 데 그쳤다.

1920年 서울敎區에서 元山敎區가 分離, 獨立되어 間島 地方까지 管轄케 하였다. 이어 1922年에는 元山敎區에서 滿洲 연길교구를 分離하였다. 한便 서울敎區長 뮈텔 主敎는 이 무렵 1839年과 1846年의 天主敎 迫害 때 처형당한 殉敎者 79名의 諡福 運動을 展開했다. 마침내 1925年 7月 바티칸에서 이들의 諡福式이 擧行되었다.

第2次 世界大戰 이 勃發하면서부터 韓半島의 事態도 急變하여 韓國 敎會는 致命的인 時期를 맞게 되었다. 日帝는 모든 西歐人을 間諜으로 看做했으며, 所謂 日本-獨逸 同盟에도 아랑곳 없이 獨逸人 神父마저 間諜으로 봤다. 1941年 日本이 美國에 宣戰布告를 하기 數個月 前부터 全國的으로 外國人의 旅行이 制限되기 始作했다. 旅行 證明書를 갖지 않고서는 病院에도 갈 수 없었고 旅行 申請을 個別的으로 해야 했으며 그 有效期間은 고작 3個月이었다.

日本이 眞珠灣 을 攻擊하자 監禁 狀態는 더욱 嚴해져 겨우 本堂 區域에서 行動의 自由가 許諾될 程度였다.

大韓民國 [ 編輯 ]

韓國 天主敎會는 다음과 같이 自身의 反共戰線에서의 役割을 自任하였다.

우리 大韓民國은 極東의 民主堡壘로서 우리 가톨릭은 千株를 거스르고 신을 否認하는 저 惡魔의 所産 共産主義에 對한 鬪爭을 開始한지 이미 오래前이다. 이렇게 우리는 벌써 다만 國民의 義務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가톨릭의 戰友로서 大韓民國이 가장 必要로 하는 飛行機의 獻納運動에 더욱 힘쓰자. 勿論 우리는 國民으로서 또는 職場의 一員으로 그外 또 여러部分으로 이 國民運動에 벌써 많은 負擔이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우리는 反共의 最後戰死로 自認하는 가톨릭이다. 우리의 精神을 다시 한 番 表示하자. 우리는 가톨릭 信者이기에 누구보다 더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 가톨릭時報 1949年 11月 10日子 社告

이러한 敎會의 政治的 役割을 强化하기 위하여 組織化를 위한 努力이 傾注되었는데, 韓國 天主敎會는 1949年 8月 26日 大韓天主敎聯盟 을 結成한다. 大韓天主敎聯盟은 盧基南 舟橋를 總裁로 하고, “社會 全部門에 걸쳐 가톨릭精神을 普及하자!”는 旗幟 아래 全國의 靑年團體를 中心으로 男女老少를 包括하는 平信徒 가톨릭運動 代表團體로 出帆하였다. 이 團體가 成長하여 1968年 7月 23日 平信徒使徒職協議會가 結成된다. 또한 共産黨 機關誌에 맞서 天主敎會의 가르침과 反共 思想을 廣範하게 流布하기 위하여 主敎會議에서 管掌하는 <경향잡지>, 〈가톨릭靑年〉 等의 全國的 普及을 위하여 全力을 다했다.

이러한 種類의 宣傳物 가운데 가장 代表的인 것은 允恭이 <가톨릭靑年>(1947.11)에 寄稿한 볼세비키的 共産主義를 排擊함이라는 글이다. 允恭은 敎皇 비오 9歲의 말을 빌어 “共産主義라 稱하는 私設(邪說)은 根本的으로 原理와 法則 그 自體들에 背反”하는 것이며, 비오 12歲의 回勅을 引用하여 “人間社會의 核心을 찔러 이것을 全滅시키려는 致命的 疫病(疫病)”이라고 斷罪한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 信者들은 神을 거역하는 共産主義에 맞서 싸우는 十字軍으로 召集되었다고 主張한다.

나는 이같이 부르짖고 싶다.“볼세비키 共産主義는 내 自身의 敵이요, 前 朝鮮 가톨릭 20萬 信徒의 敵이며 이 江山 3千萬 同胞의 敵이며 더한層 全 世界 그리스도교의, 아니 이 宇宙 創造 後 雅淡으로부터 造物主이신 天主를 믿는 全 人類의 무덤과 저의 靈魂의 敵인 것이다. 옛날 네로 皇帝는 로마를 불살랐지만 共産主義는 全 世界의 侵略者며 全 世界에 불을 놓아 滅亡으로 이끌고 있는 20世紀의 네로이며 地上의 뱀은 아담과 하와를 속였지만 共産主義者들은 全 人類를 그 甘言利說로 속여 誘惑하고저 하는 20世紀의 뱀인 것이다. 共産主義的 볼세비키는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 文化에 對한 極度로 徹底한, 卽 다만 理論的이 아니고 實踐的 宣戰布告를 意味한다. 저들은 어떠한 神學的 批判的 神論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戰鬪的 反神主義를 의미하는 것이다. 暗黑의 權力이며 天主를 詛呪하는 魔鬼가 天主께 抗戰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은 우리 모든 信者뿐만 아니라 天主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一致團結하여 最後의 勝利를 天主께 依託하며 그 保護를 믿고 이 挑戰에 應戰하지 않으면 아니되겠다.

한便 이러한 反共主義的 努力은 殉敎精神이나 聖母 信心과 結合하여 效果를 더욱 增幅시키도록 하였다. 1948年 2月 主敎團 共同敎書는 “宗敎的, 民族的, 國家的 危機를 當하여” 殉敎福者들과 聖母 信心께 救援과 保護를 請하도록 當付하고 있다. 더구나 “러시아의 悔改”라는 具體的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파티마의 聖母 發現에 關한 强調는 反共鬪爭의 正當性과 勝利에의 確信을 더욱 鼓吹시켜주는 役割을 하였다. 이는 强力한 反共主義者였던 비오 11世와 비오 12歲가 파티마의 聖母 信心을 强調하였던 것과 脈絡을 같이한다.

1950年 에 일어난 6.25 戰爭 으로 數많은 가톨릭 司祭와 信者들이 殉敎하면서 이러한 反共主義的 傾向은 絶頂에 達했다. 6.25 戰爭 以前까지 北韓 地域은 '東洋의 예루살렘' 이라고 불릴만큼 가톨릭과 改新敎의 敎勢가 높았으나, 共産政權이 들어서면서 基督敎에 對한 彈壓이 始作되어 가톨릭의 敎勢는 完全히 짓밟혔고 聖職者들과 修道者, 平信徒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韓國 가톨릭의 外向的 反共主義는 以後로 漸次 옅어지기 始作해 內在化하고, 1970年代와 1980年代를 지나면서 '民主化'라는 새로운 時代精神으로 代替되었다. 1960年 4.19 革命 으로 李承晩 獨裁 政權이 무너졌지만, 不過 1年 만인 1961年 5月 16日 朴正熙 가 軍士 쿠데타를 일으켜면서 獨裁 政權이 다시 들어섰다. 韓國의 守舊的 改新敎는 朴正熙 政權과도 손을 잡았지만, 가톨릭은 朴正熙 政權과 손을 잡지 않았다. 1969年 3選 改憲 , 1972年 10月 17日 10月 維新 으로 朴正熙 政權의 民主化運動에 對한 彈壓이 심해지자 1970年代에 主敎會의 傘下에 正義平和委員會가 設置되고, 正義具現司祭團이 組織되면서 金壽煥 樞機卿을 비롯한 敎會 指導者들이 民主化 運動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런 過程을 통해 韓國 가톨릭은 守舊保守派와의 關係를 斷絶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1962年 바티칸 公議會 以後 敎皇廳의 立場 變化도 注目할 必要가 있다. 以前까지 無條件 守舊的 反共만 내세우던 비오 11, 12世와는 달리 요한 23歲, 바오로 6歲, 요한 바오로 2歲 이 세 敎皇은 共産主義의 無神論的 性格과 暴力性은 繼續 批判하면서도, 守舊保守的 政治 이데올로기로부터는 벗어나서 가톨릭 敎會가 積極的으로 正義와 平和를 위해(하느님 나라 實現을 위해) 努力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編輯 ]

北韓 社會 에서 1970年代 以來 祖國 解放과 統一을 위한 統一 戰線論이 强化되면서, 北韓 當局은 宗敎 信仰의 存在를 認定하게 되었다. 1980年代 以來로 北韓 政權 當局은 宗敎 또는 天主敎에 對한 政策을 새로운 方向으로 轉換하여, 1983年 에는 韓國 戰爭 以後 처음으로 福音書가 北韓에서 出刊되었다. 1988年 平壤 에는 改新敎 敎會堂과 天主敎 聖堂이 韓國 戰爭 以後 처음으로 세워졌다. 그리고 天主敎 信者 團體인 “朝鮮 天主敎人 協會”가 天主敎人의 利益을 代辯하는 機構로 創設되어, 1999年 에는 “ 朝鮮카톨릭교協會 ”(委員長: 장재언)로 이름을 바꾸어, 平壤 宣敎區域 에 자리잡은 장충聖堂 을 中心으로 活動하고 있다. 平壤의 “朝鮮 天主敎人 協會 中央 委員會”에서는 1991年 《카톨릭 祈禱書》等을 刊行했다.

大韓民國 敎會와 關係 [ 編輯 ]

大韓民國 敎會는 1984年 韓國 天主敎 200周年을 契機로 北韓 宣敎 委員會를 組織해서 活動하였다. 1995年 天主敎 서울大敎區 는 民族 和解 委員會를 組織했다. 1984年 부터는 外國 國籍을 가진 韓國系 聖職者들의 北韓 訪問이 可能해지면서, 美洲 地域에서 僑民 司牧에 從事하는 聖職者들이 北韓을 定期的으로 訪問, 北韓 信者들과 交流하게 되었다. 1989年 에는 北韓의 金日成 主席이 서울大敎區의 金壽煥 樞機卿을 招請하였지만, 金壽煥 樞機卿은 平壤을 訪問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를 전후하여 北韓 信者들과 南韓 信者들은 海外에서 間歇的으로 만났다. 그뿐 아니라 1998年 5月에는 서울大敎區 民族和解委員會 委員長 최창무 主敎 一行이 司牧的 目的으로 平壤 장충聖堂 을 訪問하여 平壤의 信者들을 直接 만났다.

1945年 解放 當時 北韓에 居住하던 天主敎 信者는 大略 52,000餘 名으로 集計되었다. 그러나 1988年 에는 모두 800餘 名의 信者들을 基盤으로 “朝鮮 天主敎人 協會”가 平壤 에서 創設되었다. 1998年 5月 約 3,000餘 名의 信者들이 北韓에 있는 것으로 推定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韓國 戰爭 以前에 洗禮 를 받은 구교우뿐만 아니라 1980年代 後半 以後 새롭게 零細 入敎한 信者들 多數가 包含되어 있다. 北韓 地域 信者들은 南浦 元山 等에 公所 를 세우려 하고 있었다. 現在 北韓에는 單 한 名의 聖職者나 首都자도 없다. 그러므로 北韓의 信仰 共同體 平信徒 · 修道者 · 聖職者 로 構成되는 하느님 百姓의 共同體로서 7聖事 가 모두 집전되고 敎界 制度를 갖춘 完璧한 敎會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1995年 以後 冷害 洪水 , 海溢 等과 같은 自然 災害로 北韓 飢饉 에 허덕이고 있는 形便이다. 여기에 中央유럽 共産主義 國家 들이 崩壞되면서 北韓은 深刻한 經濟難에 빠졌다. 韓國 敎會는 人道主義的 側面에서 北韓의 飢饉을 돕기 위한 努力을 展開하여, 民族和解委員會 에서는 北韓 돕기 캠페인을 통해서 募金된 金額 60億餘 원으로 食糧과 肥料 等을 購入하여 北韓 住民들을 支援하는 等 北韓의 飢饉 被害者를 돕기 위한 努力이 있었다. [24]

年表 [ 編輯 ]

v   ?   d   ?   e   ?   h 韓國의 天主敎 敎區 分離 年表
朝鮮
代牧區

(1831)
元山代牧區 (1920) 德願自治修道院區 (1940)
咸興代牧區 (1940) 함흥교區 (1962) 서울
管區
平壤지목區 (1927) 平壤代牧區 (1939) 平壤敎區 (1962)
春川指目區 (1939) 春川代牧區 (1955) 春川敎區 (1962)
原州敎區 (1965)
京城代牧區 (1911) 서울代牧區 (1950) 서울大敎區 (1962)

議政府敎區 (2004)
水原敎區 (1963)
仁川代牧區 (1961) 仁川敎區 (1962)
大戰代牧區 (1958) 大田敎區 (1962)
淸州代牧區 (1958) 淸州敎區 (1962) 大邱
管區
大邱代牧區 (1911) 大邱大敎區 (1962)

安東敎區 (1969)
釜山代牧區 (1957) 釜山敎區 (1962)

馬山敎區 (1966)
光州指目區 (1937) 光州代牧區 (1957) 光州大敎區 (1962)

光州
管區
濟州지목區 (1971) 濟州敎區 (1977)
錢主指目區 (1937) 全州代牧區 (1957) 全州敎區 (1962)
軍宗敎區 (1989)
週: 1928年 元山代牧區 擔當이었던 北間島 延吉指目區 를 新設하였는데, 現在는 中國 天主敎會 瀋陽館區 에 屬해 있다.

敎區 [ 編輯 ]

韓國의 가톨릭교회는 大韓民國에 主敎座를 둔 16個 敎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 管轄區域이 있는 2個 敎區 및 1個 自治修道院區 로 構成되어 있다.

各 敎區는 서울大敎區 , 大邱大敎區 , 光州大敎區 를 中心으로 하는 3個의 管球에 所屬되어 있으며, 韓國 內 各 敎區長의 協議會人 韓國 天主敎 主敎會議 (韓國 天主敎 中央協議會)가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內에 管轄 區域이 있는 平壤敎區 , 함흥교區 , 德願自治修道院區 의 세 個 敎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宗敎 不許 政策으로 인해 信者를 잃고 沈默의 敎會 (沈默의 敎會)로 남아 있으며, 現在는 서울大敎區의 敎區長이 平壤敎區의 敎區長 署理를, 春川敎區의 敎區長이 함흥교區의 敎區長署理를, 聖 베네딕도會 倭館修道院 의 修道院長이 德源自治區長 서리를 맡고 있다.

現在 韓國의 敎區 現況은 다음과 같다.

大韓民國의 天主敎 敎區 管轄道
大韓民國의 가톨릭 管區

敎勢 [ 編輯 ]

2024年 4月 22日 에 發表된 “韓國 天主敎會 統計 에 따르면, 2023年 12月 31日 現在 大韓民國 의 韓國人 天主敎 信者의 現在 敎勢는 다음과 같다. 信者 數와 比率은 有效하게 洗禮聖事 를 받은 信者로 限定되어 있다.

  • 總 信者 數 : 5,970,675名 (總 人口 數의 約 11.3%)
  • 前年 對比 增加率 : 1.3%
  • 信者 性別 比率 : 女性 58.5%, 男性 41.5%
  • 女性 信者 數 : 3,398,273名
  • 男性 信者 數 : 2,551,589名
  • 總 聖職者 數 : 5,703名 (主敎 42名, 敎區 所屬 神父 5,661名, 宣敎 修道 團體 所屬 神父 810名)
  • 總 修道者 數 : 女子 9,905名, 男子 1,568名(修鍊者는 除外)
  • 敎會 數 : 本堂 1,789個, 公所 708個 (本堂 1곳當 平均 信者 數 3331名)(司祭 1人當 信者數 2,561名)

批判 [ 編輯 ]

2014年 8月 14日 敎皇 프란치스코 가 大韓民國을 訪問하여 韓國 天主敎 主敎團 을 만난 자리에서, "어떤 敎會와 共同體들은 그 自體가 中産層이 돼 共同體의 一部인 가난한 사람들이 甚至於 羞恥感을 느낄 程度입니다."라고 하며 貧困層을 外面하는 敎會를 正面으로 批判하였다. 하지만 그 날 韓國 天主敎 側이 配布한 敎皇 演說 韓國語 飜譯本에는 이 內容이 빠져 있었다. 이는 가톨릭뉴스 只今여기 에서 敎皇廳 홈페이지에 실린 英語版을 確認하면서 밝혀진 것이다. [26]

이에 對해 主敎會議 의 한 關係者는 "일부러 빠뜨린 것은 아니다" 고 밝혔다. 그리고 "(처음 敎皇廳에서 보내준 敎皇 演說文과는) 敎皇님께서 演說을 直接 하시는 자리에서 若干 달리 하셨다" 며, "바티칸 側에서도 永久的인 記錄을 위해 實際 하신 말씀과 맞추고자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實際로 敎皇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가 重要하므로 그에 따라 飜譯文을 交替할 計劃을 갖고 있다" 고 덧붙였다. [26] 하지만 그럼에도 敎皇의 말 한마디가 歷史에 남는다는 點을 勘案하면 理解하기 어렵다는 指摘이 나왔다. [27]

後에 韓國天主敎主敎會의 에서는 "敎皇廳 사이트에는 敎皇께서 演說과 講論을 한 直後 이 메시지가 揭示됩니다. 이 사이트에 올라가는 內容은 卽席에서 追加한 말씀까지 올라가게 되므로, 訪韓準備委員會 에 보내온 事前 原稿와는 조금 差異가 있습니다. 一部 言論에서 報道하는 것처럼 敎皇의 말씀을 일부러 漏落하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飜譯과 監修 等에 걸리는 時間이 있어 敎皇廳 사이트와 同時에 올릴 수 없고 若干의 時間이 必要함을 諒解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밝히며 [28] , 最終本에는 이 內容을 追加했다. [29] 그리고 9月 2日 에 演說 전 原稿를 公開했는데, 該當 內容이 빠져 있었다. [30]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이덕일 先生의 컬럼 ' 풍양 조氏의 迫害에서 天主敎를 지킨 정하상
  2. 이 時期에 洗禮를 받은 朝鮮人으로 빈센트 卷 이 알려져 있다.
  3. 이덕일 2003 , 345쪽.
  4. 이이화 , 《韓國史 이야기 15:文化君主 正祖의 나라 만들기》, 한길사, p.203
  5. 私製 를 代身해 洗禮 를 주는 것.
  6. [네이버 知識百科] 秋曹摘發事件 [秋曹摘發事件] (韓國民族文化大百科, 韓國學中央硏究院)
  7. 純祖實錄 (1838) 1卷, 純祖 卽位年 7月 4日 甲申 1番째記事
  8. 純祖實錄 (1838) 2卷, 純祖 1年 1月 10日 定해 1番째記事
  9. 純祖實錄 (1838) 3卷, 純祖 1年 10月 5日 무신 2番째記事
  10. 한겨레 21 2008年 2月 14日子, 李德一의 時代에 挑戰한 사람들_풍양 조氏의 迫害에서 天主敎를 지킨 정하상
  11. 朴海鎭 (1994). “歷史探訪 : 民族魂의 祭壇에 바친 밀알 - 金大建과 민영환 -” . 《都市問題》 (대한지방행정공제회) 29 (302): 128. 2016年 2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6年 2月 13日에 確認함 . 朝鮮에서 가까운 北京에 留學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마카오까지 가게 된 데는 模倣新婦의 깊은 配慮가 있었기 때문이다. 模倣新婦는 처음부터 北京神學校나 中國人 新婦養成所를 그렇게 탐탁스럽게 여지지 않고 있었다. 다시 말해 카톨릭正統의 脈을 이어받지 못하고 어딘가 世俗化된 感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12. 주호식. “[前例] 네 兄弟를 어떻게 하였느냐?” . 2018年 9月 9日에 確認함 .  
  13. 獄舍 1名, 死刑 118名 네이버 百科事典 '己亥迫害' 說明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4. 《最近社에 비친 韓國의 實體》/이민식 지음/국학자료원 p.32
  15. “丙寅迫害(丙寅迫害)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16. 가톨릭뉴스 只今여기 2008年 8月 24日子, 興宣大院君과 天主敎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7. “서울大敎區 大神學校 웹사이트” .  
  18. 가톨릭뉴스 只今여기 2008年 11月 29日子, 朝鮮 末, 가톨릭 信仰의 自由를 얻기까지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9.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3/08/22/1993082272304.html
  20. 뮈텔主敎日記 4, 韓國敎會史硏究所, 1998, 27쪽
  21. 드網즈 主敎 日記, 495쪽.
  22. 서울敎區年譜 2, 164쪽
  23. “韓國基督敎長老會 天安살림敎會 최형묵 牧師 神學칼럼” . 2014年 10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4年 10月 10日에 確認함 .  
  24. “韓國敎會의 歷史” . 韓國天主敎主敎會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5年 9月 2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4月 28日에 確認함 .  
  25. “解說/咸興敎區長·德願自治修道院區 自治區長 署理 任命” . 2007年 9月 2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1月 21日에 確認함 .  
  26. 主敎團에 한 敎皇 演說, 한 文段 통째로 빠져
  27. 정아람 記者 (2014年 8月 20日). “韓國 天主敎會, 敎皇의 '富者 敎會' 批判은 쏙 빼놓고…” . JTBC 뉴스 . 2014年 8月 21日에 確認함 .  
  28. 프란치스코 敎皇 메시지의 修正 配布 過程에 對한 案內
  29. 4泊 5日間의 敎皇 메시지 모음
  30. 參考 프란치스코 敎皇, '韓國 主敎團에게 하신 演說' 演說 전 原稿(2014.8.14.)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