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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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충 (尹持忠, 1759年 ~ 1791年 12月 8日 )은 朝鮮 後期의 天主敎人으로 韓國 最初의 天主敎 殉敎者이다. 本貫은 海南 이며, 者는 우용(宇庸), 洗禮名은 바오로이다. 新株(神主)를 불사르고 祭祀를 廢止하였으며 母親喪을 天主敎式으로 치루었다가 斬首 當했다. 2014年 8月 16日에 敎皇 프란치스코에 依해 諡福되었다. [1] 2021年 9月 1日에 天主敎 全州敎區는 2021年 3月 超남이성지의 바우배機에서 聖域化 作業을 하던 中 尹持忠의 遺骸가 發見되었다고 發表했다. [2] [3]

一代記 [ 編輯 ]

出生과 成長 [ 編輯 ]

全羅道 鎭山群 長考치(現 忠淸南道 錦山郡 벌곡면 도산리)에서 태어났다. [4] 本貫은 海南 尹氏이다. 윤선도 가 6大棗이고 曾祖父는 尹斗緖 다. 祖上代代로 海南에 살았는데 아버지 윤경이 海南을 떠나 外家인 安東權氏들이 많이 모여 살고있는 鎭山에 옮겨와 살았다. 아버지는 벼슬길에 나아가지는 않았고 大芚山 밑 조용한 마을에서 平凡한 선비로 살았다. [5] 姑母 尹小溫이 丁若鏞의 父親인 정재원과 婚姻하여 丁若鏞을 낳았으므로 정약용 은 尹持忠의 姑從四寸 동생이 된다. [6] 이런 因緣으로 丁若鏞의 兄弟 그리고 그의 妹夫인 이승훈과도 자연스럽게 交際할 수 있었다. 政治的으로는 南人에 屬했는데, 當時 時代的 雰圍氣는 正祖가 南人을 重用하여 西人을 牽制하는 蕩平策을 펼침으로 因해 南人들에게도 官職出師의 機會가 열리기 始作했다. 尹持忠은 벼슬에 뜻을 품고 科擧試驗에 應하여 1783年(正祖 7) 進士試에 合格하였다. [5]

天主敎 入校 [ 編輯 ]

尹持忠은 1783年 進士試에 合格한후 上京하였다. 이때 그의 姑從四寸인 정약용 을 통해 天主學을 接한 뒤 譯官 김범우 의 집에서 열리는 '明禮坊共同體'에도 參與하였다. [7] 그는 成均館에 入學하려던 計劃을 접고 《天主實義》와 《七極》을 얻어 故鄕으로 내려왔다. [8] 敎理를 獨學하며 不足한 部分은 정약종 으로부터 배웠다. 1787年에 정약전 을 代父로 하여 이승훈 에게 洗禮를 받고 敎人이 되었다. [9] [10] 1789年 北京에 가서 堅振聖事를 받고 歸國하였는데 [11] 明禮坊 事件 (1785年)과 班會事件(1787年)以後 天主敎 書籍 消却等 天主敎 信者에 對한 迫害가 심해지자 落鄕하여 조용히 지냈다. 이 時期에 어머니와 동생 윤지헌, 外從四寸 權尙然 에게 敎理를 가르쳐 天主敎 信仰을 받아들이게 했다.

祭祀廢止 [ 編輯 ]

1790年 北京 敎區長인 구베아 主敎가 朝鮮 天主敎人들에게 祭祀 禁止令을 내리자, 尹持忠의 外從四寸 權尙然 은 自身의 집안에 모시고 있던 神主를 불태워 땅에 묻고 祭祀를 더 以上 지내지 않았다. [12] 윤지충度 祭祀를 肺했으나 神主는 그대로 두었다. [13] 이 일로 因해 宗親들이 激怒했고 周邊 선비들의 非難이 쏟아졌다. 尹持忠은 이에 對해 抗辯하기를, 平民들이 神主를 모시지 않는 것을 나라에서 嚴히 團束하지 않으며 살림이 어려운 선비가 祭享을 못하는 것은 禮에 어긋하지 않으니, 敎理를 지키기 위해 士大夫로서 罪를 지었을지언정 나라에서 禁한 일을 犯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自身의 所信을 밝혔다. 儒敎的 祭禮는 法으로 規定한 것이 아니라 士大夫의 慣例라는 것이다. [14]

珍山事件 [ 編輯 ]

1791年 5月에 尹持忠의 母親 安東權氏가 敎會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지말라는 遺言을 남기고 死亡하였다. [14] 그런데 何必 그때에 地域一帶에 傳染病이 돌아 官衙에서 通行을 禁止하자 尹持忠은 肖像 치룰수 없었다. [14] 8月 그믐날에야 겨우 葬事를 치르렀는데, 모든것을 傳統意識대로 進行하였으나 神主를 만들지 않았고 祭祀 또한 지내지 않았다. 葬禮를 치루는 동안에는 傳染病의 餘波로 인해 條文이 적었고 弔客錄(弔客錄)에 記錄이 많지 않았다. [14] 이를 殊常히 여긴 弔問客들에 依해 神主를 만들지 않았다는 事實과 함께 條文을 故意로 妨害하며 天主敎式으로 祕密裏에 葬禮를 치루었다는 流言蜚語가 퍼져나갔다. 甚至於 母親의 屍身을 버렸다는 式으로 부풀려진 駭怪罔測한 怪所聞이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14]

이런 洶洶한 所聞은 서울에까지 퍼져나가자 朝廷 大臣들間 黨派싸움의 빌미가 되면서 事件이 增幅되었다. 結局 鎭山郡守 신사원에게 尹持忠과 權尙然을 逮捕하여 眞相을 調査하라는 御命이 떨어졌다. 逮捕令이 떨어지자 尹持忠은 京畿道 光州로, 權尙然은 閑散으로 逃避하였다. 鎭山郡守가 尹持忠의 叔父 輪燈을 잡아들였다는 消息을 接한 尹持忠은 그해 10月에 自首하였고 곧 權尙然이도 逮捕되었다. [15]

尹持忠의 抗辯 [ 編輯 ]

鎭山郡守 神社원이 背敎를 强要하며 모진고문을 加했으나 이들은 信仰을 버리지 않았다. [16] 두 사람을 懷柔하는데 失敗한 鎭山郡守는 이들을 全州 의 全羅 監營으로 移送했다. [17] 尹持忠은 全羅監司 정민시의 審問에 모든 것을 吐說한후 다음과 같이 主張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天主敎를 信奉함으로써 제 兩班 稱號를 박탈당해야 한다 해도 저는 天主께 罪를 짓기는 願치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神主를 모시지 않는 庶民들이 그렇다고 하여 政府를 反對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또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祭祀를 規定대로 지내지 못하는 兩班들도 嚴한 責望을 當하지 않는다는 것을 考慮하여 주십시오. 그러므로 제 낮은 생각으로는 神主를 모시지 않고 죽은 이들에게 祭祀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제 집에서 天主敎를 充實히 信奉하는 것은 決코 國法을 어기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18] :79~80 그러나 尹持忠의 抗辯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 :33

處決 [ 編輯 ]

全羅 監營에서 갖은 問招와 酷毒한 拷問 에도 두 사람은 끝까지 信仰을 버리지 않자, 全羅 監査는 調整에 狀啓를 올려 두 사람에 關해 報告했다. 朝廷에서는 두 사람을 處刑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자 結局 正祖는 處刑을 允許한후 天主敎徒로 指目받은 李昇薰과 權日身의 追捕를 命했다. 祖上에게 祭祀하는 것을 拒否하는 것은 儒學의 核心인 '孝'를 否定하는 일로써,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 되는 王에 對한 '衝'을 否定하는 行爲였다. 이런 無父無君(無父無君) 思想의 信奉은 儒敎理念으로 떠받쳐져 있는 朝鮮의 支配體制 自體를 否定하고 挑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天主敎徒들은 '나라를 怨望하며 世上을 뒤엎고자 하는 무리'로 糾彈받아야 하고 逆謀事件 次元에서 다스려서 刑場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다. 이렇듯 朝鮮 支配層이 바라본 天主敎는 體制와 正統에 對해 挑戰하는 邪惡한 宗敎였다. [20] 지난 1787年 班會事件 以後 正祖 亦是 邪敎로 規定했었기 [21] 때문에 死刑으로 處決함에는 問題 될 것이 없었다.

殉敎 [ 編輯 ]

尹持忠과 權尙然은 두 사람이 社會道德을 紊亂케 하고 社交를 信奉했다는 罪名으로 1791年 12月 8日 ( 陰曆 11月 13日 ) 全州 南門 밖(現在 전동성당 자리)에서 次例로 斬首刑에 處해졌다. [22] [23] 이 當時 尹持忠은 32歲, 權尙然은 40歲였다. 이 事件과 關聯하여 李承薰과 權日身이 拘束되었는데 이승훈은 이미 背敎했다는 辯論이 收容되어 釋放되었으나 官職은 박탈당했다. [24] [25] 권일신 은 老母의 懇請으로 背敎함에 따라 [26] [27] 귀양地가 濟州에서 豫算으로 變更되었으나 豫算으로 移動中에 拷問의 後遺症인 醬독(杖毒)으로 죽고말았다. [28] 한便 鎭山軍은 5年동안 縣으로 降等되었고 初期에 느슨하게 對應했던 鎭山郡守 신사원은 流配刑에 處해졌다. [29] [30]

遺産 [ 編輯 ]

전동성당 [ 編輯 ]

現在 全州 殿洞聖堂이 位置한 자리는 윤지충을 비롯한 權尙然, 윤지헌, 유항검 等 많은 天主敎人들이 殉敎한 자리이다. 1908年 洑두레 新婦가 이들의 殉敎를 기리기 위해서 殿洞聖堂을 建築하였다. 日帝强占期中 道路를 開設하며 全州邑城의 豐南門 隣近 城壁을 撤去했는데, 이때 尹持忠이 斬首될 當時 피가 튀었던 돌을 가져와 주춧돌로 삼았다고 한다. [31] [32] [33] 殿洞聖堂은 明洞聖堂, 大邱聖堂과 더불어 韓國에서 가장 오래된 聖堂 建築物로 國家 記念物 私的 288號로 指定되어있으며, 聖堂 한쪽에는 尹持忠의 殉敎 모습이 銅像으로 製作되어 있다. [34] 2014年 8月 韓國을 訪問한 프란치스코 敎皇은 韓國 天主敎 殉敎者 124位에 對한 諡福 宣言을 했는데, 尹持忠은 124位 中 첫 番째 福者로 敍品되었다. [35]

윤지충 日記 [ 編輯 ]

尹持忠은 投獄期間中에 日記를 記錄하였으나 現在에는 傳해지지 않고 있다. 自身의 天主敎 奉行과 逮捕後의 新聞過程, 獄中生活 等을 記錄하였는데 殉敎 後 筆寫되어 널리 읽혔다고 한다. 이 手記는 1801年 辛酉迫害 때 官邊 側 記錄인 ≪사학징의≫에 天主敎들로부터 押收한 書籍目錄 가운데 ≪罪人지충일機≫라는 記錄이 들어 있으나 現在까지 漢文本, 한글本 모두 發見되지 않고 있다. 다만 달레(Dallet) 著述의 ≪韓國天主敎會史≫에 一部 內容이 紹介되어 있다. [36]

事後 [ 編輯 ]

黨派 다툼 [ 編輯 ]

正祖 는 天主敎徒에 對한 迫害를 더 以上 擴大시키지 않고 마무리 짓기를 願했다. 이런 措處는 自身의 側近中에 天主敎에 가까이 간 者들이 많았던 理由도 있었다. [37] 아울러 弘文館에 所藏되어 있던 漢譯 西洋書籍을 燒却하는 等 天主敎의 傳播를 抑制하려 努力하였다. 그러나 正祖의 생각과는 달리 朝廷은 이 事件을 둘러싸고 남인 系統이면서 當時의 相國(相國)인 채제공 을 中心으로 한 所謂 信西派 와 이에 反對하는 홍의호 等의 所謂 攻西派 가 對立하였다. 珍山事件으로 인한 葛藤과 黨爭은 1801年 辛酉迫害 로 信西派가 決定的 打擊을 입을 때까지 10餘 年間 繼續되었다. [38]

傳敎 活動 [ 編輯 ]

신해박해로 인해 天主敎가 政治的 宗敎的 迫害의 對象이 되자 많은 兩班階層 敎人들이 動搖하여 背敎後 떨어져 나갔다. [39] 그 空白은 中人階層이 메워나갔는데, 彈壓에도 不拘하고 1794年 무렵 信徒數가 4千餘 名으로 增加하자 中國 敎會의 구베아 主敎는 珍山事件으로 保留되었던 宣敎師 派遣을 다시 推進하였다. [40] 1795年 初에 서울에 潛入한 中國人 神父 周文謨 는 以內 逮捕令이 떨어져 [41] 隱密히 活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완숙 等의 도움에 힘입어 5年後 敎勢는 1萬名을 肉薄하게 되었다. [42]

기타 [ 編輯 ]

이番 事件으로 丁若鏞의 집안은 큰 衝擊에 휩싸였다. 尹持忠이 丁若鏞의 外四寸이었기 때문이다. 丁若鏞과 둘째兄 丁若銓은 이番 事件을 契機로 背敎하며 天主敎와 關係를 完全히 淸算했으나 尹持忠과 親戚이라는 事實과 윤지충에게 天主敎를 紹介한 自家 丁若鏞이었기 때문에 庶人들로부터 攻擊을 받았다. [43] 丁若鏞의 셋째 兄인 丁若鍾은 信仰을 지키며 敎理에 따라 집안에 祭祀를 拒否하며 갈등하다가 妻子息을 데리고 漢江 건너 양근의 分院으로 移徙를 가버렸다. [44]

祖上祭祀 拒否 敎理가 널히 알져지게 되었고 向後 天主敎 彈壓의 名分으로 活用되었다.

遺骸發掘 [ 編輯 ]

2021年 9月 1日 天主敎 全州敎區의 發表에 따르면 尹持忠, 權尙然, 윤지헌의 遺骸가 發掘되었다고 한다. 같은해 3月에 全北 完州郡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超남이성지의 바우배機에서 聖域化 作業을 하던 中에 出土된 遺骸와 遺物에 對해 그間 綿密히 檢査한 結果 殉敎한 세분의 遺骸임이 確認되었다고 한다. [2] 윤지헌은 尹持忠의 동생으로 1801年 辛酉迫害때 殉敎하여 지난 2014年에 諡福된바가 있다.

發掘以後 出土物의 放射性炭素年代측정을 통해서도 墓所 造成 連帶等이 세사람이 殉敎한 1791年과 時期的으로 符合한다는 事實을 把握했다. 遺骸에 對해서는 性別檢査, 齒牙와 骨化度를 통한 年齡檢査 및 解剖學的 調査, Y廉冊體 父系 確認檢査(Y-STR)를 進行해 殉敎者들의 遺骸가 確實하다는 結論을 얻었다. 尹持忠과 權尙然의 遺骸 목뼈 部分은 날카로운 道具로 자른 '禮記 損傷'이 있어 斬首되었음을 確認할 수 있었다고 한다. [2]

韓國 天主敎 歷史上 最初의 殉敎者로 記錄되어 있는 尹持忠과 權尙然의 墓를 찾는 것은 韓國 天主敎의 課題였다. 天主敎 迫害에 關한 朝鮮 政府 側 記錄을 蒐集, 整理한 <사학징의(邪學懲義)>에는 尹持忠과 權尙然의 무덤이 存在한다는 事實만 나올 뿐 具體的 場所는 記錄되어 있지 않았다. [3] 그間 바우배期에 殉敎者 墓所가 있다고만 口傳되어 왔었는데 이番에 230年만에 發掘하게 된 것이다.

家計 [ 編輯 ]

※ 家計 參考 資料 [4] [46]

外部 링크 [ 編輯 ]

各州 [ 編輯 ]

  1. [諡福諡聖主敎特別委員會] 福者 124位 藥典
  2. 양정우 (2021年 9月 1日). “韓國 天主敎 첫 殉敎者 遺骸 事後 200餘 年만에 發見” . 聯合뉴스 . 2021年 9月 1日에 確認함 .  
  3. 김종목 (2021年 9月 1日). “尹持忠과 權尙然, 윤지헌 遺骸 230餘 年만에 찾았다…참수형과 陵遲處斬의 痕跡 確認” . 京鄕新聞 . 2021年 9月 1日에 確認함 .  
  4. “最初 天主敎 殉敎者 尹持忠과 정약용” . 오마이뉴스. 2007年 3月 19日 . 2011年 9月 23日에 確認함 .  
  5.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15> 한길사 2009.4.10 p209
  6.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1>김영사 2004年 p38
  7.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15> 한길사 2009.4.10 p208
  8.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15> 한길사 2009.4.10 p209
  9.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15> 한길사 2009.4.10 p211
  10. [天主敎 全州敎區 전동성당] 전동성당 歷史, 전동성당의 由來
  11. [네이버 知識百科] 윤지충 [尹持忠] (두산百科)
  12.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15> 한길사 2009.4.10 p214.... 權尙然 이 神主를 불태운 일은 그의 一家인 권상희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13.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15> 한길사 2009.4.10 p212
  14.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15> 한길사 2009.4.10 p213
  15.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15> 한길사 2009.4.10 p216
  16. [네이버 知識百科] 윤지충 [尹持忠] (두산百科)
  17. [네이버 知識百科] 珍山事件 [珍山事件] (두산百科)
  18. 韓國基督敎歷史硏究所, 《韓國 基督敎의 歷史1》 기독교문사(1989)
  19. 康俊晩, 《韓國 近代史 散策 1》 (天主敎 迫害에서 甲申政變까지) 人物과 思想史 (2007)
  20. 박은봉 <한 卷으로 보는 韓國史> 嘉藍企劃 1993年 p210
  21.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15> 한길사 2009.4.10 p210
  22. [그림으로 보는 殉敎者 列傳]-(1) 윤지충, 카톨릭 평화신문
  23. [그림으로 보는 殉敎者 列傳]-(3) 權尙然, 카톨릭 평화 新聞
  24. 正祖實錄 1805 33卷, 正祖 15年 11月 8日 己卯 6番째記事
  25. 正祖實錄 1805 33卷, 正祖 15年 11月 3日 甲戌 2番째記事 " 그 아버지의 使行(使行)에 따라가 數百 卷의 사서(邪書)를 널리 가져와 젊고 가르칠 만한 사람들을 그르친 者가 있으니, 바로 平澤 縣監 이승훈이 그 사람입니다. "
  26. [네이버 知識百科] 권일신 [權日身] (두산百科)...權日身은 濟州島 流配刑을 받았으나 老母의 懷柔로 獄中에서 悔悟門(悔悟文)을 쓰면서 豫算(禮山)으로 流配地가 바뀌었다.
  27. [韓國民族文化 大百科事典] 권일신(權日身)...流配地로 出發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妹夫 이윤하(李潤夏)의 집에서 傷處를 治療하며 行裝을 準備하고 있을 때, 正祖의 命令을 받은 別監이 와서 當時 80歲가 된 어머니와 流配地인 濟州의 거리를 다시금 喚起시키며 天主敎와 儒敎에 對한 曖昧한 글句를 내놓고 手決(手決) 週 02) 하기를 勸하자 마음대로 處理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流配地가 豫算으로 바뀌게 되었지만, 한便으로 달레(Ch. Dallet)의 『韓國天主敎會史』에는 父母에 對한 지나친 人性的(人性的) 사랑 때문에 背敎했다고 記錄되기에 이르렀다.
  28. [네이버 知識百科] 권일신 [權日身] (두산百科)
  29.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1>김영사 2004年 p107
  30.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15> 한길사 2009.4.10 p217
  31. 康俊晩 <韓國 近代史 散策 1> 人物과 思想史 2011.3.31 p33
  32. [카톨릭 평화신문] 全州敎區 전동성당(上) 殉敎 1番地에 우뚝 선 信仰의 搖籃
  33. [天主敎 全州敎區 전동성당] 전동성당 歷史, 力動性黨의 由來 ...聖殿의 주춧돌로는 全州城의 城壁 돌이 使用되었는데, 一部 돌은 斬首된 殉敎者들의 머리가 城壁에 매달렸을 때 피가 스며든 돌인 것으로 推定된다. 보두네 神父는 當時 當局에서 新作路를 開設하는 過程에서 城壁을 허물면서 버리던 돌을 購入하였다.
  34. [네이버 知識百科] 윤지충 [尹持忠] (韓國鄕土文化電磁大展)
  35. “"[그림으로 보는 殉敎者 列傳]-(1) 윤지충 "” . 평화신문. 2009年 3月 8日. 2016年 9月 2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4月 16日에 確認함 .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1) ( 도움말 )
  36. [Good News 카톨릭事前] 윤지충 日記
  37. [네이버 知識百科] 正祖 [正祖] (두산百科)
  38.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 辛亥邪獄
  39. 康俊晩 <韓國 近代史 散策 1> 人物과 思想史 2011.3.31 p33
  40. 이덕일 <李德一의 女人列傳> 김영사 2003年 p346
  41. 이덕일 <李德一의 女人列傳> 김영사 2003年 p347
  42. 이덕일 <李德一의 女人列傳> 김영사 2003年 p354
  43. [네이버 知識百科] 珍山事件 [珍山事件] (두산百科)
  44.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2>김영사 2004年 p45
  45. [디지털 藏書閣] 1717年 윤덕렬(尹德烈) 等(等) 簡札(簡札)
  46. “天主敎 첫 殉敎者 尹持忠의 最後陳述과 奇跡” . 海南尹氏 光州 宗親會. 2004年 10月 21日 . 2011年 9月 23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