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鎭奭 (樞機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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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오   鄭鎭奭   私製級 樞機卿
樞機卿 職責 산타 마리아 임마콜라타 디 루르데스 아 보체아 聖堂 名譽 主任司祭
大敎區 서울大敎區長(1998年-2012年)
管區 서울館區 管區長(1998年-2012年)
敎區 淸州敎區長(1970年-1998年)
平壤敎區長 서리(1998年-2012年)
前任者 金壽煥 樞機卿
後任者 廉洙政 樞機卿
聖職
司祭敍品 1961年 3月 18日
授與  盧基南 主敎
主敎敍品 1970年 10月 3日
授與  盧基南 大主敎
樞機卿 2006年 3月 24日
敍任  敎皇 베네딕토 16歲
個人情報
出生 1931年 12月 7日 ( 1931-12-07 )
日帝 强占期 朝鮮 京畿道 京城府
(現 서울特別市 中區 수표동)
腺腫 2021年 4月 27日 ( 2021-04-27 ) (89歲)
가톨릭대학교 서울聖母病院
敎派 天主敎
父母 정원모(簿), 이복순(某)
在職 天主敎 서울大敎區 維持財團 理事長, 가톨릭學院 理事長
學歷 가톨릭대학교 卒業, 로마 우르바노大學校 大學院 碩士, 서울大學校 化學工學科(2018年 名譽卒業)
母校 가톨릭대학교
社目標語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
文章

鄭鎭奭 (鄭鎭奭, 1931年 12月 7日 ~ 2021年 4月 27日 )은 大韓民國 天主敎 聖職者이자 가톨릭 樞機卿 이다. 洗禮名은 니콜라오 이며, 前職 天主敎 서울大敎區 敎區長과 平壤敎區長 署理를 歷任하였다.

幼年 時節 [ 編輯 ]

1931年 12月 7日 京畿道 京城府 獸表情(現 서울特別市 中區 수표동)에서 정원모와 이복순(루시아)의 아들로 出生하였다. 정진석의 아버지 정원모는 日帝强占期 社會主義 運動을 하다가 1931年 여름 朝鮮共産黨 再建 國內工作委員會 事件 의 核心 人物로 拘束돼 3年의 獄苦를 치렀으며 1944年 다시 共産主義者協議會 事件 으로 拘束돼 京畿道警에서 調査 받던 中 光復을 맞아 釋放되었다. 光復 後 越北한 정원모는 北韓 政府에서 工業性 浮上(次官)을 지내다가 肅淸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1年 12月生인 鄭鎭奭은 아버지가 처음 逮捕될 當時 胎中에 있었으며, 獄苦를 치르고 나온 아버지가 새 家庭을 꾸리면서 因緣이 끊어져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 채 외동아들로 成長한 것으로 알려졌다. 鄭鎭奭은 아버지에 對한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하고 자랐으며,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日本 으로 간 다음 連絡이 끊겼다는 이야기만 傳해들었다. [1]

司祭와 主敎 [ 編輯 ]

鄭鎭奭은 계성普通學校(現 계성초등학교 )와 6年制 中央中學校 를 卒業하고 1951年 서울大學校 工大 化工科에 入學했으나 韓國戰爭 으로 中退하고 1955年 誠信大學校(現 가톨릭대학교 )에 入學, 1962年 大學校를 卒業하고 司祭로 敍品되었다.

敍品 後에 그는 중림동 聖堂 補佐神父, 性愼重·高等學校(小神學校) 敎師를 거쳐 1962年 서울大敎區 法院 書記, 1964年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總務, 1965年 서울大敎區長 祕書 兼 上書國 副局長, 1966年 上서국장, 1967年 性愼重·高等學校 副校長 等을 歷任한 後 1968年 로마 우르바노 大學院에 遊學, 1970年 同 大學院에서 敎會法 碩士學位를 取得하고 歸國했고 곧바로 1970年 6月 25日 空席 中이던 淸州敎區長 主敎로 任命되어 그해 10月 3日 主敎 敍品을 받았다.

淸州敎區 敎區長 이 된 정진석 主敎는 40歲의 젊은 나이로 敎區長 主敎가 되었지만 特有의 溫和한 性品으로 28年間 淸州敎區를 이끄는 牧者로서의 司牧을 遂行하였다. 1970年 부터 1998年 까지 財團法人 淸州敎區 天主敎會 維持財團 理事長을 歷任하였으며, 1983年 부터 1993年 까지 韓國 天主敎 主敎會議 總務로 1993年 부터 1996年 까지는 韓國 天主敎 主敎會議 副議長을 지내 韓國 天主敎會의 發展에 큰 役割을 했으며, 1983年 부터 맡기 始作한 韓國 主敎會의 交會法委員會 委員長은 24年이 지난 只今까지도 맡아오고 있다.

1996年 부터 韓國 天主敎 主敎會議 議長을 맡아오고 있던 그는 1998年 高齡의 나이로 隱退하는 서울大敎區 敎區長 兼 서울管區長 金壽煥 樞機卿 의 뒤를 이어 第13代 天主敎 서울大敎區 敎區長인 大主敎로 任命되었고 同時에 서울館區 管區長 大主敎 로 任命되었으며 本人(鄭鎭奭)李 中央中學校 에 다닐 當時 敎師였던 [2] 김형석 延世大學校 名譽敎授가 金壽煥 樞機卿과 함께 조치대學校 에서 [3] 數學하기도 했다. 1998年 평화방송 의 理事로 選任이 되었으며, 1999年 부터 財團法人 서울大敎區 維持財團의 理事長을 現在까지 歷任하고 있으며, 1999年 부터 2002年 까지 學校法人 가톨릭學院 第2代 理事長을 歷任했고, 2004年 부터 2012年 까지 學校法人 가톨릭學院 第4代 理事長을 歷任하였다.

略歷 [ 編輯 ]

  • 1961年 3月 18日: 司祭 敍品
  • 1961年: 中林洞 本堂 補佐神父
  • 1961年 ~ 1967年: 서울 聖神高等學校 敎師
  • 1964年 ~ 1965年: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總務
  • 1965年 ~ 1967年: 서울大敎區長 盧基南 大主敎 祕書
  • 1967年 ~ 1968年: 서울 聖神高等學校 副校長
  • 1968年 ~ 1970年: 로마 遊學
  • 1970年 6月 25日: 第2代 淸州敎區長 任命
  • 1970年 10月 3日: 主敎 敍品, 淸州敎區長 着座
  • 1973年 10月 15日 ~ 1976年 10月 11日: 主敎會의 敎理敎育委員會 委員長
  • 1975年 2月 26日 ~ 1981年 5月 28日: 主敎會議 常任委員
  • 1978年 4月 4日 ~ 1984年 11月 26日: 主敎會議 信仰敎理委員會 委員長
  • 1983年 2月 25日 ~ 2007年 10月: 主敎會의 交會法委員會 委員長
  • 1984年 11月 30日 ~ 1987年 11月 18日: 主敎會議 常任委員
  • 1987年 11月 18日 ~ 1993年 10月 13日: 主敎會의 總務
  • 1991年 3月 4日 ~ 1996年 10月 17日: 主敎會의 敎理敎育委員會 委員長
  • 1993年 10月 14日 ~ 1996年 10月 17日: 主敎會議 副議長
  • 1996年 10月 17日 ~ 1999年 10月 14日: 主敎會議 議長
  • 1998年 4月 3日: 서울大敎區長 任命 및 大主敎 陞品
  • 1998年 6月 6日: 平壤敎區長 署理 任命
  • 1998年 6月 29日: 서울大敎區長 兼 平壤敎區長 서리 着座
  • 1998年 6月 29日 ~ 2003年 2月: 學校法人 가톨릭學院 理事長
  • 1998年 10月 13日 ~ 2004年 10月 14日: 主敎會議 民族和解主敎特別委員會 委員長
  • 1999年 7月 8日 ~ 2012年 5月 10日: 財團法人 天主敎 서울大敎區 維持財團 理事長
  • 2004年 10月 4日 ~ 2012年 6月 20日: 學校法人 가톨릭學院 理事長
  • 2004年 10月 ~ 2012年 5月: 韓國外方宣敎會 總裁
  • 2006年 3月 24日: 樞機卿 敍任
  • 2012年 5月 10日: 서울大敎區長 兼 平壤敎區長 서리 退任
  • 2021年 4月 21日: 腺腫

기타 [ 編輯 ]

生命倫理 强調 [ 編輯 ]

정진석 大主敎는 황우석 서울大學校 夕座敎授의 胚芽줄기細胞 硏究가 活潑하게 進行되면서 全 世界의 耳目을 받고 있던 2005年 내내, 黃 敎授의 硏究에 對한 매派로 앞장 섰다. 鄭 大主敎는 聲明書를 내고 黃 敎授의 硏究는 “人間胚芽 破壞를 前提로 하는 殺人 行爲”와 같다며 明白히 反對한다고 밝혔다. 鄭 大主敎는 “黃 敎授의 胚芽줄기細胞 硏究가 難治病 治療를 위한 目的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人間 生命이 極度로 毁損된다는 點에서 深刻한 問題”라며 “가톨릭교회는 이에 明白히 反對하며 硏究의 卽刻的인 中斷을 促求한다.”라고 밝혔다.

鄭 大主敎는 또 “敎會가 黃 敎授 硏究에 對해 深刻하게 憂慮하는 것은 複製人間의 出現性이 한層 높아졌다는 것”이라며“인간생명을 複製해 疾病 治療에 利用하는 것은 根本的으로 人間 生命을 죽이는 行爲이자 尊嚴性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鄭 大主敎는 이어 “가톨릭교회는 難治病 患者의 苦痛을 決코 外面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줄기細胞에 對한 硏究가 必要하다면 倫理的으로나 臨床的으로 問題가 없는 聖體줄기細胞 硏究가 對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4]

黃 敎授는 이를 傳해듣고 卽刻 “必要한 境遇 가톨릭 指導者를 만나 理解를 求하겠다.”라고 밝혔다. 이에 鄭 大主敎도 “黃 敎授가 歸國하는 대로 可能한 限 빨리 만나 意見을 나누고 싶다.”라고 밝혔다. [5]

生命倫理에 對한 宗敎人과 科學者의 뜨거운 論爭이 벌어질 것으로 關心을 모았던 鄭 大主敎와 黃 敎授의 만남은 2005年 6月 15日 서울대敎區廳 主敎館의 大敎區長 執務室에서 非公開로 進行됐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1時間假量 和氣靄靄한 雰圍氣 속에 다양한 줄기細胞의 誘導 方法과 그들이 各各 지니고 있는 臨床醫學 敵 長短點 및 生命의 始作과 女性 卵子 使用에 對한 倫理的 問題 等에 對한 폭넓은 意見 交換이 이루어졌으나, 胚芽를 生命體로 볼 수 있느냐는 根本的 問題에 對해서는 異見을 좁히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鄭 大主敎는 “가톨릭교회는 修正을 人間 生命의 始作으로 보고 있어서 胚芽 破壞를 人間 破壞로 看做한다. 이番 黃 敎授의 줄기細胞 亦是 人間胚芽로 規定하고 있다.”라고 言及했다. [6]

胚芽줄기細胞 硏究에 맞서기 위해 聖體줄기細胞 硏究를 積極 弘報 支援키로 한 鄭 樞機卿은 서울大敎區 안에 生命委員會를 新設하면서 聖體줄기 細胞 硏究와 臨床實驗을 위해 約 100億원을 投入하여 細胞治療 事業團을 2005年 10月 5日 發足하였다. 또한, 國內 모든 聖體줄기細胞 硏究 關聯 機關 및 團體와 協力해 硏究를 進行하기 위한 ‘聖體줄기細胞硏究協力團’을 組織하고 서울大敎區를 中心으로 社會 團體와 連帶해 生命尊重運動 機構인 ‘生命連帶’도 發足하였다. [7]


서울市 뉴타운 再開發 [ 編輯 ]

2009年 7月 19日 鄭鎭奭 樞機卿은 서울市의 뉴타운 再開發 政策의 問題點을 指摘하였다. 情 樞機卿은 大規模 再開發 豫定地로 指定되어 强制 撤去될 危機에 處한 서울 西大門區 加佐洞聖堂 에서 主日미사를 執典하면서 講論을 통해 “再開發을 推進하는 過程에서 그 地域의 貰入者와 庶民의 處地를 度外視한다면 그 政策은 補完돼야 한다.”라면서 “가장 重要한 것은 돈보다 사람을 中心으로 한 政策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情 樞機卿은 또 “再開發 事業은 住居福祉 向上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實際로는 福祉는커녕 追加 負擔金 때문에 原住民의 70% 以上이 다른 地域으로 쫓겨나고 있다. 庶民에게 惠澤을 줄 거라는 뉴타운 再開發이 오히려 이들에게 苦痛을 안겨주는 것이라면 이런 政策은 分明히 變해

雙龍自動車 事態 [ 編輯 ]

2009年 7月 30日, 鄭鎭奭 樞機卿은 雙龍自動車 勞使 對立 事態에 對해 “모든 問題를 힘으로만 解決하는 것은 불의”라고 指摘했다.

情 樞機卿은 서울대敎區廳 主敎館에서 事前 調律 없이 찾아온 쌍용자동차 勞組員 家族 10名을 만나 慰勞하며 “모든 問題를 힘으로 解決하려는 것은 不義의 惡循環을 가져온다.”라면서 “모든 問題 解決에는 忍耐의 對話와 妥協이 必要하다.”라고 했다. “이番 問題가 暴力이 아니라 平和的으로 解決되기를 懇切히 바란다. 善意를 가진 많은 이들이 이番 事態가 좋게 解決될 수 있도록 努力하고 있고, 또 努力할 것”이라며 “不足한 나도 最善의 努力을 다하겠다. 여러분을 위해 繼續 祈禱하겠다.”라고 말했다. 서울대敎區廳은 “勞組員 家族들이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으로 多急하고 懇切한 마음에 왔다.’라면서 社側의 醫藥品·飮食·食水 供給 遮斷에 따른 어려움과 人權 侵害 現實을 吐露했고, 鄭 樞機卿은 深刻한 表情으로 傾聽했다.”라고 傳했다. [8]

용산 撤去 現場 火災 事件 [ 編輯 ]

2009年 12月 8日 鄭鎭奭 樞機卿은 龍山4區域 撤去 現場 火災 事故 의 早速한 事態 解決을 呼訴하였다. 情 樞機卿은 “龍山 慘事의 核心은 抑鬱한 사람들이 法의 保護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라며 “再開發을 하는 곳마다 問題가 생기고 抑鬱한 사람들이 法의 保護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關聯法이 未備하다는 것을 뜻하므로, 立法機關 從事者들이 法 制度 整備 等에 積極 나서서 解決해야 한다.”라고 强調했다. 이어 鄭 樞機卿은 “우리 社會는 立法機關 從事者들에게 特權도 附與하고 있지만, 果然 그들이 待遇를 받는 만큼 國民을 위해 奉仕하는지 疑問”이라며 一鍼을 加했다. [9]

天安艦 事件 [ 編輯 ]

2010年 4月 4日 鄭鎭奭 樞機卿은 白翎島 隣近 海上에서 發生한 天安艦 沈沒 事件 을 言及하며, 犧牲者들의 安息을 祈願하고 遺家族들에게는 慰勞의 말을 傳했다.

情 樞機卿은 明洞 主敎座 聖堂에서 主禮한 예수復活大祝日 미사를 始作하면서 “지난 3月 26日 갑작스런 事故로 家族의 生死를 알지 못해 애태우고 있는 天安艦 乘組員 家族들에게 慰勞의 말을 傳한다”며 “失踪者들이 하루빨리 家族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 懇切히 起源드린다.”라고 밝혔다.

情 樞機卿은 또 “失踪者 救助作業을 위해 自身의 몸을 아끼지 않고 애써 주시는 모든 분에게도 感謝의 말씀을 드린다”며 “救助 作業을 하다가 안타깝게 犧牲되신 분들의 靈魂을 위해 이 미사 中에 하느님께 함께 祈禱하자”고 强調했다.

情 樞機卿은 또한 4月 6日 정정길 大統領室 室長의 豫防을 받은 자리에서도 “龍山 慘事 때도 그래야 했지만, 이番 天安艦 犧牲者들과 遺族들에게도 政府가 더욱 따뜻하게 對하고 配慮를 하는 모습이 必要하다.”라면서 “國民들이 잘 理解할 수 있도록 하는 等 政府가 國民과 疏通하는 努力을 보였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10]

文章 [ 編輯 ]

防牌 왼便의 文樣은 大韓民國을 돌보는 聖母 마리아 의 保護(세 별) 아래, 殉敎 成人 들의 精神으로(붉은색 바탕의 빨魔와 칼), 성덕(聖德)을 實踐함으로써(별과 칼의 金色), 韓半島 에 빛을 비추어(노란색 無窮花 ) 韓國 사람들의 福音化와 一致를 이룩하여 온 百姓이 聖家庭 卽, 그리스도 의 父母인 聖 요셉 聖母 마리아 , 아기 예수 가 이룬 家庭을 본받아 和睦한 한 家族을 이루도록 하고자 함을 뜻한다.

防牌 오른便의 文樣은 그리스도 의 몸인 聖體 (작은 원)를 中心으로, 聖靈 (비둘기)과 함께 이 땅에 사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큰 원)李 되어 無限한 사랑을 베풀어 “그들이 (그분 自身이 生命인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하여 永遠한) 生命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도록”( 요한 福音書 10章 10節) 福音을 傳하며, 平和 를 增進하고자 하는 念願을 나타낸다.

왼便은 敎區, 오른便은 自身을 나타냄으로써 完璧한 文章이 된다.

文章 아랫쪽 리본에는 라틴語 로 “OMNIBUS OMNIA”라고 씌어 있는데, 이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라는 意味로 鄭鎭奭 樞機卿의 司牧標語이다.

隱退 [ 編輯 ]

2012年 5月 10日 敎皇 베네딕토 16歲 는 鄭鎭奭 樞機卿의 서울大敎區 敎區長主敎職 隱退를 받아들이고, 後任 敎區長으로 서울大敎區 補佐主敎이자 總代理人 廉洙政 안드레아 主敎 를 새로운 서울大敎區의 敎區長으로 임명하였다.

腺腫 [ 編輯 ]

2021年 2月 老患으로 因해 서울聖母病院 에 入院했고, 깨끗하고 便安한 船種을 準備하고 싶다면서 手術과 延命 治療를 拒否했으며, 두 달 後인 4月 27日 享年 90歲로 善終하였다. 腺腫 直前 事後 臟器寄贈에 誓約하였고, 自身의 角膜을 寄贈한 뒤에 善終하였다. 葬禮는 서울大敎區長으로 명동대성당에서 5日場으로 치러질 豫定이다. [11]

各州 [ 編輯 ]

  1. 권재현 (2006年 3月 2日). “鄭鎭奭 大主敎 황우석 敎授 硏究 反對 表明” . 東亞日報 . 2009年 4月 14日에 確認함 .  
  2. 양민경 (2020年 12月 29日). “[逆境의 열매] 김형석 (11) 중앙중·高서 7年間 敎鞭… 學校 밖에선 聖經工夫” . 國民日報 . 2022年 2月 4日에 確認함 .  
  3. 양민경 (2020年 12月 21日). “[逆境의 열매] 김형석 (5) 學徒兵 徵集 壓迫에 祈禱… 身檢서 ‘不合格’” . 國民日報 . 2022年 2月 4日에 確認함 .  
  4. “鄭鎭奭 大主敎 황우석 敎授 硏究 反對 表明” . 한겨레新聞. 2005年 6月 11日 . 2009年 2月 23日에 確認함 .  
  5. ““정진석 大主敎 만나 硏究 倫理問題 論議” 황우석敎授 밝혀” . 서울新聞. 2005年 6月 12日.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2月 23日에 確認함 .  
  6. “鄭鎭奭 大主敎-황우석 敎授“生命尊重엔 異見없다”” . 크리스천투데이. 2005年 6月 16日 . 2009年 2月 23日에 確認함 .  
  7. “天主敎系, “聖體줄기細胞硏究”..黃敎授 硏究에 맞서” . 크리스천투데이. 2005年 8月 12日 . 2009年 2月 23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8. 김종목 記者 (2009年 7月 30日). “鄭鎭奭 樞機卿, 雙龍車 勞組員 家族 만나 慰勞” . 京鄕新聞 . 2009年 7月 30日에 確認함 .  
  9. 주정아 記者 (2009年 12月 20日). “鄭鎭奭 樞機卿, 龍山慘事 早速한 事態 解決 促求” . 평화신문 . 2011年 3月 2日에 確認함 .  
  10. 주정아 記者 (2010年 4月 11日). “鄭鎭奭 樞機卿, 天安艦 犧牲者 安息 起源” . 평화신문 . 2011年 3月 2日에 確認함 .  
  11.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2&aid=0001580984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제임스 파디
第2代 天主敎 淸州敎區 敎區長
1970年 - 1998年
後任
장봉훈 (가브리엘)
前任
金壽煥 (스테파노)
第13代 天主敎 서울大敎區 敎區長
天主敎 平壤敎區長 서리
1998年 - 2012年 5月 10日
後任
廉洙政 (안드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