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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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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
李山海
아계 이산해
阿桂 이산해
朝鮮 右議政
在任 1588年 10月 1日~1589年 2月 1日
賃金 朝鮮 宣祖
이름
麗水(汝受)
阿桂(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竹皮옹(竹皮翁)·시촌擧事(枾村居士)
시호 문충(文忠)
身上情報
出生日 1539年 7月 20日 ( 1539-07-20 )
出生地 朝鮮 漢城府
居住地 朝鮮 漢城府
死亡日 1609年 8月 2日 ( 1609-08-02 ) (70歲)
死亡地 朝鮮 漢城府
經歷 文官, 作家, 詩人, 文章家
黨派 同人 後裔 系派 北人 中 對北 殘存 勢力
本館 閑散
父親 이지번 (簿)
母親 宜寧 南氏 否認(某)
忠州 池氏 妾室(庶母)
兄弟姊妹 이散光(異腹 男동생)
配偶者 洋酒 조氏 否認
子女 膝下 2男 1女
(그 中 長男 이경백, 次男 이경전(李慶全))
親姻戚 이산보 (四寸 男동생)
이지함 (叔父)
이덕형 (사위)
耳介 (종고조부)
學問 活動
分野 性理學

이산해 (李山海, 1539年 7月 20日 ~ 1609年 陰曆 8月 23日 )는 朝鮮 議政府 領議政을 지낸 朝鮮 中期의 文臣, 政治人, 詩人이며 性理學 者, 敎育者, 畫家이다. 黨籍은 同人, 北人에 屬했으며 黨의 主要 首腦部이자 戰略家였다. 本貫은 閑散 , 者(字)는 麗水(汝受), 號는 鵝溪(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竹皮옹(竹皮翁)·시촌擧事(枾村居士). 諡號는 문충(文忠)이다. 死六臣 의 한사람인 耳介 (李塏)의 종고손이 된다.

官職은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을 거쳐 領中樞府事 에 이르렀다. 朝鮮 明宗 때부터 광해군 때까지 벼슬을 한 朝鮮時代 學者, 文臣으로 여러 官職을 거친 當代의 勢道家이자 文章家이다. [1] 宗系辨誣 (宗系辨誣)의 공으로 光國功臣 (光國功臣) 3等에 徐薰되고 牙城府院君(鵝城府院君)에 冊封되었다.

1561年 式年 文科에 丙科로 及第했다. 文章力을 認定받아 明宗 의 命을 받아서 景福宮 大厄을 썼던 그는 여러 벼슬을 거쳐 1588年 右議政에 올랐다. 己丑獄事 무렵 左議政 , 領議政 에 올랐으며, 1590年 에는 光國功臣 3等으로 冊錄되어 牙城府院君에 冊封되었다. [2] 己丑獄事 의 慘酷함을 보고 西人 에게 怨恨을 품고 西人 攻擊의 先鋒將이 된다.

1591年 世子 冊封波紋(建儲問題)로 失脚한 鄭澈 과 西人의 處罰을 놓고 同人 이 內部의 輿論이 나뉘었을 때는 鄭澈 을 死刑에 處할 것을 主張했으며, 남인 北人 으로 갈릴 때에는 北人 의 指導者가 되었다. 1590年 1591年 , 1592年 , 1599年 1602年 세 番 議政府 領議政 을 歷任했다. 畫家 이산보 의 四寸 兄이며, 土亭祕訣 의 著者인 文身 兼 曆術人 이지함 은 그의 叔父이기도 했다. 土亭 이지함 , 南冥 曺植 의 文人.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家庭 背景 [ 編輯 ]

阿桂 離散해는 1539年 (中宗 34年) 漢城府 에서 1539年 9月 2日(尹 7月 20日)에 태어났다. 高麗 末期의 性理學者 목은 異色 (李穡)의 7代孫으로, 6代祖는 中樞院使 이종선 , 5代祖는 判中樞府事를 지낸 이계전 , 高祖父는 이우, 曾祖父는 이장윤, 祖父는 司憲府 監察을 지낸 理致 , 아버지는 縣監 , 內資寺情(內資寺正)을 지내고 事後 議政府 領議政 追贈 이지번 (李之蕃)이며, 어머니는 宜寧南氏(宜寧南氏)이다.공조판서를 지낸 조언수 의 사위이다. 조언수는 조말생 의 5代孫으로 그의 아우 조사수 는 西厓 류성룡 의 妻外祖父이기도 하다. 作家 兼 文章家 이산보 는 그의 四寸 동생이었다. 土亭祕訣을 지은 土亭 이지함 은 아버지 이지번 의 동생이다. 그의 아버지가 꿈에 山海關 에서 孕胎하는 꿈을 꾸고 그를 낳았다 하여, 이름을 山海關(산하이關)의 山海(山海)에서 따서 이산해라 이름하게 되었다.

목은 異色 의 後孫으로 5代祖 이계전 (李季甸)李 朝鮮 世宗 , 文宗, 端宗組를 거쳐 朝鮮 世祖 定難功臣 이 되었고 高祖父 이우(李?)는 共助 參判 成均館 大司成 을 지냈다. 高祖父 이우의 四寸 兄弟가 死六臣 의 한사람인 백옥헌(白玉軒) 耳介 (李塏)였다.

그러나 曾祖父 張潤(長潤)의 代부터 沒落하여 曾祖父 張潤은 奉化縣監, 할아버지 치(穉)는 우봉현令을 지냈고, 아버지 地番(之蕃)은 郡守를 지냈다. 작은아버지는 著名한 學者인 土亭 이지함 (李之?)으로 다시 家勢를 일으켰다.

兄弟姊妹 中 成人이 될 때까지 生存한 兄弟로는 庶母 忠州池氏(忠州池氏)에게서 10年 터울의 異腹 동생 이散光(李山光)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이지함 에게 學問을 배웠다. 글씨는 6歲 때부터 썼는데 어려서 글씨에 能했으며 그의 총명함이 調整에까지 傳해져 明宗 賃金에 依해 膾炙化될 程度로 有名했다고 傳해진다. 그 뒤 長安의 名人들이 그의 글씨를 받으려고 모여들었다고 하며 明宗에게 불려가 그 앞에서 글씨를 쓰기도 했다. [3] 1545年 乙巳士禍 때 親知들이 禍를 입자 忠淸南道 保寧으로 移住했다. [3]

幼年期와 少年期 [ 編輯 ]

그가 태어났을 때 처음 우는 소리를 듣고 작은아버지였던 이지함 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가 奇特하니 잘 保護하십시오. 우리 門戶가 이로부터 다시 興할 것이오"라 했다. [2] 5歲 때 처음 屛風에 글씨를 썼는데, 運筆하는 것이 鬼神같아서 神童이라고 일컬어졌다. [2]

자라서 돌이 지나자 스스로 글字를 解讀할 수가 있어서 세 갈래로 갈라진 鏜鈀槍(??槍)을 메고 黨(堂) 아래를 지나는 사람이 있었는데, 離散해는 그것을 보고 갑자기 “饊子(山字)다.”라고 말하였다. 성암공이 黃 孤山(黃孤山)의 草書(草書)를 얻어 壁에 붙여놓고 즐겼는데,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종이가 若干 헐고 더럽혀져 있었다. 怪異하게 여기며 그 理由를 묻자, 乳母(乳母)가 말하기를, “아이가 저를 잡아끌기에 안아서 얼굴빛을 보니 기뻐하며 손가락으로 아래 위를 그어대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公이 이에 종이와 붓을 찾아서 이산해에게 쓰게 하니 한 劃도 어긋남이 없었다. 이 일을 神奇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4]

5歲가 되어서 土亭 이지함 이 그의 총명함과 지혜로움을 奇特하게 여겨서 태극도(太極圖)를 가르쳤는데, 한 마디의 말로 곧 天地 陰陽(天地陰陽)의 理致를 알아서 『태극도』를 가리키면서 따져 묻고 非難할 수 있었다. 일찍이 글을 읽기 始作하면 밥 먹는 것을 잊었으므로 이지함 이 或是라도 몸이 傷할까 念慮하여 그가 읽는 것을 그치도록 하였다. 밥을 기다리는 동안 韻字(韻字)을 불러주고 詩를 짓게 하였는데 韻字에 따라 거침없이 詩를 지었다.

밥이 더디 되어도 고민스러운데 하물며 배움이 더디면 어떻겠으며

배가 고파도 고민스러운데 하물며 마음이 고프면 어떠하랴?
집은 가난해도 오히려 마음을 治療할 藥은 있는 法이니
모름지기 領帶(靈臺)에 달이 떠오를 때를 기다려야 하리. [4]

5歲의 나이에 韻에 맞추어 詩를 지으니 土亭 이지함 은 더욱 그를 奇特해하면서도 각별하게 여겼다. 여섯 살때에는 草書(草書)·隸書(隷書)를 잘 써서 이름이 알려졌다.

朝鮮王朝實錄 에 따르면, 離散해는 6歲 때 이미 글씨를 잘 써서 神童이라는 말을 들었고 15歲가 되기도 前에 여러 次例 鄕市 (鄕試)에 壯元 하여 周邊의 많은 사람이 李山海를 우러러 봤으며, 그 사람됨이 旬後(醇厚)하고 熟成하여 얻기 어려운 선비 라는 말을 들었다. 文章이 매우 뛰어나 宣祖代 8文章家의 한 名으로 稱頌되며 나라에 그 文明(文名)을 날렸으며, 書畫 에도 能하여 대자 산수묵도 에 뛰어났다. 少年期에 鄕試(鄕試)에 應試하여 壯元을 하여 大科 應試 資格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過去에 應試하지 않고 작은아버지 이지함 에게서 글과 學問을 繼續 數學한다.

三寸이자 徐坰德 의 文人인 이지함 에게서 學問을 修學하다가 뒤에 南冥 曺植 을 찾아가 그의 文人이 되어 修學하였다. [5] 그 뒤 李滉 의 門下에도 出入하였다. 特히 曺植 의 門下에서 만난 김우옹 , 庭球 , 郭再祐 , 정인홍 等은 그와 같은 北人 을 形成한다. 또한 庭球 김효원 도 그처럼 曺植 의 門下와 李滉 의 門下를 同時에 數學하기도 했다. 李滉 의 門下에서 만난 류성룡 은 後日 그와 같은 同人 의 創黨에 參與하지만 事事件件 對立하게 된다. 以後 鄕試(鄕試)에 壯元하였고, 이어 生員試 에 凝視하게 된다.

한便 그의 총명함을 알고 윤원형 이 自己의 딸과 結婚시키려 하자, 아버지 이지번 은 卽時 벼슬을 버리고 叔父 이지함 (李之?)과 함께 丹陽(丹陽)의 口談(龜潭)으로 避身해서 숨어살았다. [6]

靑年期와 成均館 數學 [ 編輯 ]

生員試 에 合格하여 生員 이 되고 初試 를 거쳐 成均館 에 들어가 儒生으로 受學하였다.

成均館 儒生으로 있던 21살 때는 明宗 에게 그 學問의 뛰어남을 인정받았으며, 1560年 (明宗 15) 4月 明宗 이 親히 主管한 成均館 의 製述에서 1等하여 바로 展示 (殿試)에 直赴(直赴 [7] )될 資格이 주어졌다.

일찍이 그는 學者 兼 豫言家 남사고 (南師古)와 함께 송松亭(宋松亭)에 앉아 西쪽으로 안령(鞍嶺)과 東쪽으로 駱峯(駱峯)을 가리키며 뒷날 調整에 반드시 東西의 黨(黨)이 생길 것이라고 豫言했다는 이야기가 〈於于野談 於于野談〉에 傳한다. [3]

1561年 (明宗 16年) 式年文科에 丙科로 及第하여 承文院 權知에 補任되었다.

官僚 生活 [ 編輯 ]

官僚 生活 初盤 [ 編輯 ]

科擧 及第 直後 그는 承文院 權知를 거쳐 承文院 副正字 가 되었다. 1562年 글씨를 잘 쓴다 하여 推薦을 받아 弘文館 正字가 되었다. 그해 明宗 의 命을 받고 景福宮 (景福宮) 大厄(大額)의 글씨를 썼다. [3] 以後 여러番 官職을 補職移動하였으나 글을 잘 써서 恒常 春秋館 의 士官(史官)을 兼職하여 實錄 作成에 參與하였다. 그 뒤 弘文館 副修撰·兵曹佐郞·修撰 等을 歷任하였다. 그 뒤 副修撰이 되었다가 1563年 (明宗 18年) 3月 弘文館 修撰, 弘文館 著作을 거쳐, 3月 26日 다시 弘文館 亭子 가 되고 4月 弘文館 亭子, 그해 7月 26日 弘文館 咀嚼(著作)을 지냈다. 그해 8月 弘文館 副提學 기대항 , 敎理 崔翁·고경명 等과 함께 上疏를 올려 이량 을 彈劾하는 上疏를 올렸다. 10月 1日 弘文館 博士 가 되었다.

그해 10月 이량 의 側近인 司憲府 大司憲 移監 (李戡)으로부터 彈劾을 받았는데, 移監은 기대승 , 윤근수 , 윤두수 , 이문형 , 이산해, 許曄 等이 黨派를 助長한다고 批判했다가 逆으로 弘文館 副提學 기대항 의 彈劾을 받고 逐出되면서 그는 危機를 謀免했다. 그해 10月 弘文館 博士가 되었다. 1563年 (明宗 18年) 12月 讀書堂을 追加 選拔할 때 追加選拔者의 한 사람으로 選拔되어 賜暇讀書 (賜暇讀書)의 命을 받았다.

1564年 2月 副修撰(副修撰), 博士(博士), 修撰(修撰), 司諫院 정언(正言), 兵曹 佐郞 , 弘文館 修撰 을 지내고, 6月 王命으로 洪暹(洪暹)·윤춘년(尹春年)·정유길(鄭惟吉)·閔箕(閔箕)·박충원(朴忠元)·五常(吳祥)·심수경(沈守慶)·金貴榮(金貴榮)·윤의중(尹毅中)·박계현(朴啓賢)·홍천민(洪天民)·丁胤禧(丁胤禧)·遺傳(柳琠)·김계휘(金繼輝)·崔翁(崔?)·심의겸(沈義謙)·이후백(李後白)·奇大升(奇大升)·신응시(辛應時) 等과 함께 그해에 열릴 過去 試驗場에 그려질 屛風의 時祭를 지었다. 1564年 明나라 使臣들이 繼續 訪問하여 朝廷에서는 文學(文學)을 두루 갖춘 사람을 가려서 遠接使(遠接使)를 遂行하게 하였는데 그가 選拔되어 遠接使의 從事官으로 明나라 使臣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해 10月 정언, 1565年 (明宗 21年) 1月 弘文館 副修撰이 되고 以後 司諫院 정언 이 되었다가, 5月 李朝 佐郞 이 되었다.

1565年 2月 王이 直接 선보인 製述 試驗 [8] 에 優秀한 成跡을 거두어 賞을 받았다. 그해 王의 外叔이자 척新人 윤원형 勢力과 심통원 一波 等이 沒落한 뒤 新進 士林들이 政界에 進出하자 그는 同門인 김효원 을 支持하였다.

以後 吏曹佐郞(佐郞)과 正郞(正郞),議政府(議政府)의 檢詳(檢詳)과 死因(舍人),弘文館의 應敎(應敎), 傳한(典翰)을 거쳐 直提學(直提學)李 되고 尙衣院 情(尙衣院正), 知製敎(知製敎), 行 校書館 敎理(行校書館校理) 等을 지냈다. 얼마 뒤 藝文館應敎(藝文館應敎)를 兼職하였다.

1567年 (明宗 22年) 1月 明나라 에서 使臣이 派遣되자 明나라 의 使臣을 맞이할 遠接使 從事官(遠接使從事官)으로 國境에 나가 明나라 調査(詔使) 一行을 迎接하고 돌아왔다. 그해 2月 弘文館 副校理, 4月 弘文館 敎理가 되었다. 그 뒤 明宗 이 죽고 宣祖 가 卽位하자 弘文館 直提學 知製敎 兼 競演 侍講官(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으로 宣祖 卽位 初 春秋館(春秋館)의 史官으로 《 明宗實錄 》編纂에 參與하였다.

1567年 (宣祖 卽位年) 11月 李朝 正郞 , 議政府 死因 , 司憲府 집의 等을 거쳐 相議遠征(尙衣院正)에 올랐다가 다시 行 副校理 를 歷任하고, 直提學 이 되어 知製敎를 겸하였다. 1568年 明나라 의 使臣이 오자 可觀館(假館官)의 한사람으로 迎接하였다. 8月 12日 實錄廳郎廳(郞廳)에 任命되었다. 이어 다시 行 弘文館 敎理, 應敎 等을 歷任한 뒤 1570年 堂上官으로 昇進하여 通政大夫 承政院 同副承旨 (同副承旨)가 되었다. 그해 吏曹參議(吏曹參議), 大司諫(大司諫), 副提學(副提學)을 歷任하였다.

官僚 生活 [ 編輯 ]

李山海의 글씨, 唐나라 詩人 李尙恩作 淸高의 草書體

1570年 (宣祖 4年) 5月 直提學 (直提學)으로 救荒 摘奸 御史(救荒摘奸御史)에 任命되어 派遣되었으며, 1571年 6月 28日 司諫院 大司諫 , 9月 李朝 參議 (吏曹參議), 1572年 司諫院 大司諫 (大司諫), 9月 17日 李朝 參議 , 1573年 (宣祖 6年) 4月 18日 다시 大司諫이 되었다.

그해 4月 21日 倭人의 險抱卵 무게를 다는 일이었다고 거짓으로 告한 司諫院 社間 김규 (金?)를 彈劾하여 罷職시켰다.

사간 김규(金?)는 前에 社間이었을 때에 험포한다는 것과 무게를 알아 본다는 것은 말은 다르나 뜻은 같다고 했는데, 험포한다는 것과 무게를 알아 본다는 것이 果然 같은 것이라면 中國말을 빌어 써도 無妨하겠습니다. 다만, 《속錄(續錄)》에 ‘朕의 輕重을 달아 본다.’ 한 것은 다만 輕重을 달아서 그 男胎를 막는 것이고, 험포라는 것은 그 싼 物件을 檢査하는 것입니다. 中國에서 이 法을 쓰는 것은 實로 禁하는 物件을 함부로 貿易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神이 부경(赴京)에 가장 익숙한 統社(通事)들을 불러서 물었더니, 前부터 禮部의 除毒 主事와 兵部의 거家事 郎中(車駕司郞中)李 玉瑕館(玉河關)에 가서 或 한두 胞子를 뽑아내었다가 준 때도 있었는데 近年 以來로 혹 짐의 數만을 헤아리고 胞子를 풀지 않으나, 險포의 뜻은 輕重을 다는 것과 다르다 합니다. 김규는 近年에 胞子를 풀어 兆占한 例만을 알고 前부터 혹 檢査한 때도 있었다는 것을 몰라서, 中國의 險砲를 우리 나라에서 秤量하는 法과 같은 것으로 돌려, 操縱 때부터 施行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本意를 따져 보면 倭奴(倭奴)의 男胎를 弊端을 막으려는 데에 있었더라도 論啓한 말은 果然 不實한 病弊를 면할 수 없으니 갈아 差出하도록 命하소서.

以後 辭職하였으나 5月 6日 다시 大司諫 이 되었다가 6月 吏曹 參議와 大司成을 지냈다. 6月 12日 (領議政) 權轍(權轍), 坐像(左相) 노수신(盧守愼), 송기수(宋麒壽)·金貴榮(金貴榮)·尹鉉(尹鉉)·이양원(李陽元)·김계(金啓)·許曄(許曄)·김첨경(金添慶) 等과 함께 承文院 의 新任 官員 8名을 選拔하였다. 6月 17日 다시 大司諫 이 되었다. 6月 말 口辯과 忠淸監査 이충작을 彈劾하여 罷職시켰다.

太上(太常)의 長官은 벼슬이 陞秩(陞秩)되어야 할 것인데, 口辯(具?)은 더럽고 바르지 않아서 꺼림없이 放恣하므로, 前에 重한 論駁을 받고 사람들에게 버려졌으니 갈아 差出하도록 命하소서. 忠淸 監査(忠淸監司) 이충작(李忠綽)은 星雲(成運)에 對한 維持 署長(有旨書狀)을 驛卒(驛卒)이 길에서 잃었을 때에 곧 아뢰지 않고 監査에게 父親 維持(有旨)를 사사로이 보냈으니, 罷職하소서.

하니 王이 그의 建議를 받아들여 太上長官과 口辯을 罷職하고, 이충작은 事情(私情)이 없었다 하여 替直당하였다. 그해 7月 24日 세번 辭職을 請하고 물러났다가 8月 6日 다시 大司諫에 任命되었다. 8月 24日 吏曹參議, 10月 6日 大司成(大司成), 10月 15日 副提學(副提學)을 거쳐 12月 16日 다시 大司諫이 되었다.

1574年 1月 7日 다시 大司諫 이 되고 1月 競演에 參與하였다. 그 뒤 물러났다가 새로 大司諫 이 된 栗谷 李珥 가 病으로 遞職되어 그해 4月 13日 다시 大司諫 이 되어 週(紂)와 注意 三人(三仁), 讀書法, 土豪의 弊端, 술버릇 等의 解決 等을 議論하였다. 7月 6日 右承旨가 되었으나 洞 29日 病으로 替直하였다. 9月 20日 다시 大使間, 10月 27日 다시 吏曹 參議, 1575年 (宣祖 9年) 1月 王命으로 2品 以上의 宰相에게 指紋(誌文) 製述을 命하였으나 藝文館 에서 選拔된 유희춘(柳希春)李 스스로 辭職하고 李山海를 薦擧하여 그가 代身 指紋을 짓게 되었다. 2月 11日 大司諫이 되었다.

동인당 組織

南冥 曺植 李退溪 의 門下生이며 徐坰德 系列이기도 한 그는 李珥 가 스승들 中 한사람인 李滉 의 學說인 理氣二元論 을 正面 反駁하는 것을 보고 憤慨하였는데, 류성룡 , 定溫 , 박승임 , 정인홍 等과 함께 同人 (東人) 黨을 形成했다. [9]

그러나 그해 아버지 이지번 의 喪을 當하여 官職을 辭退하고 3年間 喪服을 입었다. 1577年 李朝 參議 가 되고, 禮曹 參議 , 刑曹 參議 , 共助 參議 를 次例로 歷任하고 成均館 大司成 (成均館大司成)으로 2轉任되었다가 承政院 都承旨 로 拔擢되었으나 바로 司諫院 大司諫 이 되었다. 以後 西人 狙擊手가 되어 西人 界 人士들과 親知들의 非理와 疑惑을 集中 浮刻, 攻擊하였다.

西人과의 葛藤 [ 編輯 ]

1578年 (宣祖 11年) 司諫院 大司諫 으로 在職 中 珍島郡 이수의 賂物 事件을 接한 뒤 그는 尹鉉·윤두수·윤근수 세 사람의 罪惡을 파헤쳐 마구 攻擊하였다. 結局 西人 (西人)의 巨物인 윤두수 (尹斗壽), 윤근수 (尹根壽) 等의 非理를 彈劾하여 罷職시켰다. [10]

1578年 (宣祖 11年) 弘文館 大提學 (弘文館大提學)과 承政院 都承旨 (承政院都承旨)에 除授되었고 다시 大司成이 되었다. 그러나 大司諫 으로 있으면서 西人 에게 猛攻擊을 加한 것에 不滿을 품은 西人 들은 그가 要職에 適合하지 않다며 任命에 反對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그의 글재주와 文章力, 言辯을 認定한 宣祖 의 각별한 信賴로 反對를 무릅쓰고 就任할 수 있었다.

1579年 嘉善大夫(嘉善大夫)로 昇進하여 司憲府 大司憲 이 되고, 그해 7月 副提學이 되었다가 8月 김명원 (金命元)을 彈劾하여 義州 牧師 로 左遷시켰다. 1580年 兵曹 參判 을 거쳐, 簡儀臺 數個 도감 上佐 製造(簡儀臺修改都監常坐提調)로 簡儀臺 再建築 工事에 參與하였다. 그해 3月 司憲府 大司憲 에 任命되자 4月 初 守門將 造景(趙瓊)李 闕文의 雜人 出入을 禁止하였는데 司憲府의 서리(書吏)가 함부로 들어왔으므로 造景이 그들을 結縛하였다. 이에 司憲府 의 官員이 憤怒하여 守門將을 處罰하여 物議가 되자, 그는 事件에 責任을 지고 辭職을 請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80年 5月 24日 大司憲이 되어 스스로 辭職을 請하였으나 返戾되었고, 5月 25日 簡儀臺 營建에 參與한 官僚들을 褒賞할 때 簡儀臺 數個 圖鑑 都提調(簡儀臺修改都監都提調) 領議政(領議政) 朴淳(朴淳) 等과 함께 아마 1疋을 膳物로 받았다. 이어 競演 特進官이 되어 競演에 參與하였고, 그해 10月 1日 刑曹 板書 (刑曹判書)로 昇進하였으나 辭職을 請하였다. 10月 20日 다시 刑曹判書 에 任命되고, 스스로 辭職을 請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0月 27日 一週日 만에 就任하였다.

1581年 4月 11日 다시 大司憲 이 되었다가 4月 17日 吏曹 判書(吏曹判書)에 除授되었으나 病을 理由로 辭讓하였다. 그해 6月 1日 어머니 南氏의 喪을 當하여 墓所 앞에서 3年間 侍墓살이를 하였다. 12月 喪中에 宣祖 로부터 特別히 《小學(小學)》의 複寫本을 膳物로 받았다. 1582年 11月 에는 特命으로 쌀과 콩을 下賜받았다. [11]

喪中에 있는 前 領府事 洪暹과 左議政 노수신에게 各各 쌀과 콩을 아울러 15席을 賜給(賜給)하되 洪暹은 對象(大祥)李 臨迫하였으니 쌀 10席을 더 賜給하라. 前 判書 離散해는 地方에서 廬墓를 살고 있으니 祭祀지낼 物資가 또한 어찌 있겠는가. 본도로 하여금 쌀과 콩을 마련하여 除給하도록 河西(下書)하는 것이 좋겠다.

1583年 한해 동안 吏曹, 禮曹, 兵曹의 判書(判書)를 거쳤으며, 吏曹, 禮曹, 兵曹判書 를 지내는 동안 知經筵事(知經筵事) 判義禁府事(判義禁府事) 弘文館 大提學(弘文館大提學) 지 成均館 社(知成均館事)를 兼任하였다. 그해 9月 議政府 右贊成 으로 昇進한 뒤, 세番 辭任을 請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9月 初 儒生 박윤(朴淪)으로부터 彈劾을 當했다. 박윤은 김효원(金孝元)·김응남(金應南)·서인원(徐仁元)·紅塵(洪進)·송응개(宋應漑)·許篈(許?)·홍여순(洪汝諄)·홍혼(洪渾)·우성전(禹性傳)·김첨(金瞻)·李澄(李徵)·김우굉(金宇宏)·李山海(李山海)·이기(李?)·박승임(朴承任)·박근원(朴謹元) 等의 奸邪하고 凶測한 頂上을 말하면서 모두 귀양보낼 것을 請하는 한便, 김우옹(金宇?)의 天性은 착한 듯하나 그의 兄 때문에 잘못 들어간 것을 면치 못했다고 적었다. [12]

1583年 10月 12日 에는 平安道 巡撫御使 (平安道巡撫御史) 金睟(金?)가 平安道 의 儒生들을 試驗할 논(論)·部(賦)의 第(題)의 主題를 定하였다. [13] 그 뒤 10月 30日 다시 李朝 板書 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吏曹判書 에 任命된 것에 對해 西人 들의 反撥이 거셌고, 이듬해인 1584年 2月 여러 次例 辭職 上疏를 올렸으나 返戾되었다.

1584年 (宣祖 17年) 2月 1日 吏曹 判書 兼 藝文館 大提學이 되었다. 2月 6日 直接 調整을 찾아 肅拜한 뒤에 辭職하자 宣祖 는 懇曲히 勸誘하면서 辭職하지 말라고 命하였다. 그러나 그는 辭職했고, 바로 大提學 에 任命되었다. 2月 24日 大提學 社稷을 세番 請하였으나 王이 許諾하지 않았다.

1584年 (宣祖 17年) 當時 離散해는 李朝 板書 였다. 이에 西人 鄭澈 의 파인 김응생 (金應生) 等이 한 사람에게 오랫동안 人事權을 주면 權限이 肥大해질 憂慮가 있다고 攻擊했다. 東西 分黨의 時代였던 當時는 同人 이 優勢한 時期였다. [14] 바로 西人 들은 김응생 의 主張에 同調하며, 그의 實名을 言及하지 않고 偏狹하고 한쪽에 치우친 人物이 人事權을 掌握하면 憂慮스럽다며 迂廻的으로 그를 攻擊했다.

그러자 宣祖 는 往年에 경안군이 류성룡 을 讒訴하더니, 今年에는 김응생 이 李山海를 讒訴한다고 逆情을 냈다. 이 두 사람은 國家의 主席(柱石)인데 小人輩들이 헐뜯고 있다는 것이었다. [14] 離散해는 이를 鄭澈 의 使嗾로 解釋했다. 그해 吏曹判書로 弘文館과 藝文館의 大提學을 兼任하였고 [4] , 그 뒤 禮曹 板書 , 兵曹 板書 를 歷任하고 뒤에 大提學 , 判義禁府事 等을 兼任했다. 그러나 西人 들의 攻擊과 所聞, 險談은 繼續되었다.

1585年 1月 김우옹 이산보 等이 입시하여 그가 西人 들에게 攻擊받는 것을 公論化시켰다. 김우옹 은 鄭澈·신응시(辛應時) 等이 祠堂(私黨)을 많이 끌어들여 調整을 托卵시켰는데, 殿下의 名刹(明察)에 힘입어 이산해(李山海)를 戰場(銓長)으로 삼아 委任하셨기 때문에 저들이 放恣하게 行動하지 못하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그가 排斥받는 理由를 '神이 다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사귀고 登用시키려고 한 者들은 모두 群小輩들로 山海가 排斥하여 쓰지 않은 者들이 많습니다. 散步는 같은 집안의 일이니 반드시 모르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위에서 下問하소서.'라 하였다. [15] 結局 宣祖가 이산보 에게 質問하자 이산보 는 그렇지 않다고 答했고, 다시 김우옹 에게 '그대의 뜻으로는 鄭澈이 山海를 謀陷하려고 한다고 여기는가?'하고 되묻자 김우옹 은 '神이 그것을 알 수는 없지만 鄭澈이 사귀는 群小輩들을 山海가 排斥했기 때문에 이 무리들이 갖가지 計策으로 동요시켜 그 形勢가 매우 위태롭습니다.'하였다. 散步가 '산해는 神의 從兄(從兄)으로 어떠한 잘못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非難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替直시켜 穩全하게 해주소서. [15] ' 하니 宣祖가 讒訴에 흔들림은 없을 것이라 安心한 뒤 김우옹 이산보 를 돌려보냈다.

1585年 左贊成(左贊成)이 되고, 그해 4月 司僕寺 (司僕寺)의 空魔(貢馬)가 運送되는 途中 大量으로 斃死하게 되자 스스로 引責辭退하려 하였으나 王이 挽留하였다. 10月 吏曹判書 가 되었으나 新兵으로 10月 28日 情事를 올리자 王은 特別히 며칠 休暇를 주었다. 그 뒤 吏曹判書 로 復歸하였으나 1586年 10月 조헌 이 그를 攻擊하는 上疏를 올리자 出仕를 拒否하고 辭職 上疏를 올렸다.

經의 뜻을 모두 알겠다. 次子나 所長(疏章)을 올려 前後에 걸쳐 辭職을 要求하여 마지 않은 것은 或是 匠人이 없는 사람에게 丈人을 때렸다는 罪名이 미쳐서가 아닌가. 요사이 廉恥가 全部 없어지지는 아니하고 나라 일도 무너지는 데 이르지 않은 것은 내가 卿을 登用하여 總裁(?宰)로 삼았기 때문이다. 充分히 뭇 官僚들의 本보기가 될 만하고 사나운 물살 속의 地主(砥柱)와 같은데 누가 敢히 毁謗할 것인가. 저 鑛夫(狂夫)의 非難하는 말이야 한 아이의 웃음거리도 되지 못할 것이다. 슬프다. 剝製(朴濟)가 卿을 誹謗하고 응生(應生)李 卿을 讒訴하더니, 이제 또 趙憲이 卿을 誣陷하였다. 어찌하여 헐뜯는 者가 이리 많은가. 眞實로 내가 卿을 待遇함이 정성스럽지 못한 때문이리라. 讒訴가 이미 세 番 이르렀으나 어찌 敢히 베틀의 북을 던져버릴 것인가. 速히 出仕(出仕)하라. [16]

이때 여러番 社稷의 뜻을 밝혀 스스로 辭退하려 하였으나 宣祖 가 그를 달래어 返戾하였다.

吏曹判書 任命과 葛藤 [ 編輯 ]

한便 宣祖 는 生前의 李珥 를 尊敬하였으나, 李珥 死後 그의 흉허물을 듣고 그를 否定的으로 보게 되었다. 이에 李珥의 門下人 儒生 曺廣鉉 李貴 等이 '李珥와 親했으면서도 李珥가 무고당하는 것을 坐視했다'고 李山海를 非難하였다. [17]

1587年 3月 심의겸 에 對한 論難이 있자 심의겸 과 別로 親分이 없음을 解明하고 스스로 辭職訴를 올렸으나 返戾되었다. 그러나 그의 解明을 불쾌히 여긴 李貴 로부터 非難을 받자 出仕하지 않았다.

그 뒤 繼續 出仕를 辭讓하다가 王의 慰勞를 받았으나 以後 여러番 辭職 次子를 올렸다. 그해 7月 15日 여러 番 病을 理由로 다섯 番 情事를 올려 吏曹判書에서 辭職하였으나 王이 休暇를 더 주었다. 12月 에 다시 吏曹判書 에 任命되어 出仕하였다.

宗系辨誣 謝恩表文을 쓰다 [ 編輯 ]

1588年 1月 다섯 番의 辭職 上疏를 올려 辭意를 표하였으나 王이 返戾시켰다. [18] 그해 6月 宗系辨誣 社를 통해 보낼 宗契謝恩票를 지었으나 內容이 마음에 들지 않아, 쓰지 않을 것을 請하니 王이 許諾하였다. [19] 7月 大提學이 되고, 7月 4日 宗系辨誣의 謝恩表를 修正하였다. [20]

그해 7月 知春秋館事(知春秋館事), 10月 議政府 左贊成 을 지냈다.

右議政과 左議政 在職 [ 編輯 ]

1588年 11月 20日 議政府 右議政 油田 이 北京에 있을 때 濕症(濕症)을 얻어 걷지 못하므로 辭職하면서, 그가 議政府 右議政 으로 特別 拔擢되었다. 이를 두고 西人 들은 反對를 하였으나 王은 그를 右議政 으로 임명하였다. 11月 25日 辭職 上疏를 올렸으나 王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以前의 官職인 左贊成 을 稱하였다. 그러나 領議政 노수신 의 病이 危篤하게 되자 不得已 出仕하였다. 12月 1日 領議政 노수신 이 病으로 辭職하여 領議政 자리가 비게 되자 王命을 받고 領議政 候補者 推薦의 命을 받았으나 適任者가 없다 하여 後日로 미루게 하였다.

1589年 1月 無人을 불車 採用할 때 손인갑(孫仁甲)·成川地(成天祉)· 李舜臣 (李舜臣)·이명하(李明河)·이빈(李?)·新할(申?)·造景(趙儆) 等을 推薦하였다. [21]

그해 2月 1日 議政府 左議政 이 되고, 9月 偶像 정언신(鄭彦信)과 함께 宣祖 를 毒對하여 日本 通信社 를 보내기로 決定하였다. 11月 다시 議政府 左議政 에 任命되었다.

한便 이무렵 鄭澈 과 함께 奴婢로 환천되는 것을 避하여 도망치던 송익필 의 一家를 숨겨주었다. [22]

鄭汝立 事件과 己丑獄事 [ 編輯 ]

鄭汝立 事件 前後 [ 編輯 ]

1589年 정여립 이 逆謀를 圖謀했다는 黃海監司 한준 의 祕密狀啓가 올라온 날 밤 열린 重鎭會議에서 宣祖는 그에게 鄭汝立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물었다. 告變 內容을 몰랐던 領議政 油田 과 左議政 離散해는 알지 못한다고 했고, 右議政 정언신 은 그가 "讀書人임을 알 뿐"이라고 말했다. 當時 세 사람의 政丞 모두가 同人이었다. [23]

정언신 이 鄭汝立의 獄事를 告變한 者를 죽여야 된다고 하자 그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反駁한다. 정언신 이 했던 " 정여립 을 告發한 者들 10餘 名만 죽이면 뜬말이 스스로 가라앉을 것이다"라는 말에 對하여, 19日 大司憲 홍성민 이 宣祖에게 "정언신의 그 말은 神과 兪泓 과 더불어 혀를 찼고, 이산해도 그 不可함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언신 [23] 이 再三 말하자 이산해도 조금 굽혀서 '다시 생각해보니 率直하게 말하면 偶像의 말도 옳다'하였습니다"라고 말하여 李山海를 謀略했다. [2]

그러자 離散해는 정여립 을 赦免하기를 請했지만 宣祖 는 좋은 말로 挽留했다. [2]

한便 獄事에 정여립 과 前부터 關係있던 사람을 모두 調査하게 되자, 宣祖는 그와 絶交한 사람들은 調査하지 말라는 名을 그에게 내린다. [24]

鄭汝立과 結交(結交)韓 사람들을 論難하는 것은 眞實로 옳은 일이다. 그러나 요즘 狀況으로 보아 事件이 널리 번질 兆朕이 있으니, 의론이 過激한 사람은 制裁하도록 勸誘하거나 혹 免貸(面對)해서 아뢰기를 바란다
鄭汝立의 난 審問과 己丑獄事 [ 編輯 ]

정여립 의 獄事 審問 때 그는 政丞의 한사람으로 刑場에 參與하였다. 宣祖 左議政 이산해, 右議政 정언신 等에게 尉官(委官)李 되어 罪人들을 審問하게 했다. [25] 그러나 西人 의 模寫가인 송익필 (宋翼弼)의 勸誘로 入闕한 鄭澈이 次子를 올렸다. 정철은 정언신 정여립 의 一家이니 裁判官으로는 適當하지 않으므로 交替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結局 宣祖 정언신 代身 鄭澈을 右議政 으로 除授하고 尉官으로 삼았다. [25]

정철과 西人 勢力은 鄭汝立의 亂을 同人 勢力을 打倒할 絶好의 機會로 삼아 己丑獄事를 일으켰다. 이때 정언신 , 정개청 (鄭介淸), 백유양 (白惟讓), 理髮 (李潑), 이길 等 많은 同人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25] 이때 鄭澈 全羅道 儒生 정암수 (丁巖壽)를 使嗾해 李山海를 얽어 넣으려고 했으나 이산해에 對한 宣祖 의 信任이 두터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 [25]

1589年 12月 14日 정암수 等이 그를 攻擊하는 上疏를 올린다. 湖南 儒生 정암수 를 비롯한 50餘 名이 '李山海, 류성룡 , 나사침, 나덕준, 정인홍 , 정개청 정여립 과 한몸과 같은 사이였다고 하면서, 그들을 進退시킬 것을 要求하는 上疏를 올렸다. [26] 이 上疏를 받은 宣祖 는 크게 怒하여 오히려 이산해, 류성룡 을 面接해 慰勞하고, 정암수 以下 10餘 名에게 罪를 줄 것을 命했다. 이에 兩社가 啓事를 올려 죄주지 말 것을 請했으나 宣祖 는 應하지 않았다. [26]

그는 尉官인 鄭澈 同人 을 沒殺시키려 했다고 判斷했고, 그 背後로 成婚 을 指目했다. 한便 西人 들이 當時 刑場의 責任者는 鄭澈 이 아니라 同人 류성룡 이라고 主張하자 그는 西人 들에 對한 反感과 怨恨, 不信을 한層 더했다. 그는 政治人이면서 同時에 學者였고, 數 많은 門下生들을 거느린 性理學 者이기도 했다. 1588年 (宣祖 22年) 議政府 右議政 , 1589年 左議政 을 거쳐 1590年 領議政 에 올랐으나 壬辰倭亂 直後 政府의 遷都를 主張했다가 이를 機會삼은 西人 系列 言官들의 猛非難을 받고 罷職되었다.

鄭汝立의 獄事 直後 [ 編輯 ]

右議政 정언신 정여립 의 9寸 아저씨라는 理由로 끌어다 國文을 열었다. 이산해 亦是 尉官으로 參與하였으나 消極的으로 對하였다.

1589年 12月 14日 정암수 等이 長文의 上疏를 올려 그와 류성룡 을 攻擊하였다. [27]

1590年 議政府 領議政 에 任命되었으나 그해 4月 身柄을 理由로 辭職上疏를 올렸다. 그러나 宣祖 는 備忘記를 내려 그를 불러들였다. 西人 에서는 그가 平素 정여립 에게 友好的이었던 點과 한때 그가 鄭汝立을 金堤 郡守 로 推薦했던 點을 指目하며 그가 정여립 과 親한 것처럼 몰고 갔고, 그는 王에게 여러 番 辭意를 표하며 領議政 職에서 물러나려 하였다. 그러나 宣祖 는 그의 辭職意思를 拒絶하였다.

그해 5月 정여립 의 親戚인 정언신 의 發言이 問題視되었다. 그에게도 王이 묻자 '날짜가 오래되어 記憶할 수 없다'면서 黃海 監司가 署長(書狀)으로 會計(回啓)할 적에 언신의 말이 나온 듯하다고 하였다. [28] 5月 20日 다시 身柄을 理由로 情事(呈辭)를 올려 辭職을 請했으나 王이 返戾하였다.

그 뒤 정암수 西人 界 儒生들의 繼續된 攻擊을 받았다. 1590年 8月 宗系辨誣 의 공으로 水蟲 孔性 光國功臣 (輸忠貢誠光國功臣) 3等에 徐薰되고, 土役의 功으로 秋衝 分의 挾冊 評難 功臣(推忠奮義?策平難功臣) 2等에 徐薰되었다.

1591年 7月 에는 정암수 (丁巖壽) 等이 延命으로 上疏를 올려 李山海와 류성룡 等을 咫尺하여 逆黨이라고 하니 床이 그날로 山海와 성룡을 引見하고 慰勞하였다. [29] 이 일로 當時 정암수 等의 國文을 反對했던 때의 司憲府와 司諫院이 當時의 憲府와 懇願으로부터 彈劾을 받았다.

世子 建儲 波動과 西人 肅淸 [ 編輯 ]

宣祖 의 病患이 잦은 데다가 그의 나이가 40을 넘었으므로 後嗣를 빨리 定해야 된다는 公論이 나타나기 始作했다. 이에 離散해는 左議政 鄭澈 과 右議政 류성룡 , 大司憲 이해수 , 이성중 等을 議政府 로 불러 광해군 을 後嗣로 定해야 된다고 決定하였다. 그러나 離散해는 祕密裏에 인빈 金氏 의 親庭 오빠인 김공량 에게 사람을 보내 鄭澈 一派가 인빈 金氏 신성군 을 謀害하려 한다고 告하였고, 김공량 은 다시 인빈 金氏 에게 이 事實을 告했다. 인빈 金氏 宣祖 에게 찾아가 鄭澈 이 自身의 帽子를 除去하려 한다면서 울면서 闕밖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請願했다.

1591年 右議政 으로 昇進하면서 吏曹判書 를 겸하게 된 류성룡이 鄭澈 을 찾아갔다. [30]

우리가 國家의 重한 責任을 맡게 되었으니 마땅히 큰 일을 해야 할 것이오. 整備에게는 王子가 없고 後宮에게는 王子가 많이 있지만 아직 國家의 根本을 定하지 못하고 있으니, 世子 세울 計策을 政府에서 세워야 할 것이고, 우리들이 이 일에 힘써야 할 것이오. [31]

이에 鄭澈이 “옳은 말이오. 그러나 映像이 잘 들을까?”하자, 류성룡은 “우리 두 사람이 하자고 하면 映像이 어찌 듣지 않을 수 있겠소”하니 정철도 그리 하기로 承諾했다. [31] . 두 사람의 要請에 離散해는 左議政 鄭澈 류성룡 , 大司憲 이해수 , 副提學 이성중 等을 議政府 로 불러 광해군 을 後嗣로 定해야 된다고 決定하였다. 두 사람은 領議政이던 이산해에게 議論하여 競演 席上에서 宣祖에게 建儲를 奏請하기로 期約했지만, 離散해는 期約한 첫 날에 나오지 않았고, 두 番째 約束한 날에도 나오지 않았다. [31]

事實 離散해는 겉으로만 朝廷의 議論에 따르는 척 하고 內心으로는 다른 뜻을 갖고 있었다. 離散해는 鄭汝立 事件 鄭澈 과 敵이 되지 않기 爲해 정언신 의 後任으로 鄭澈을 推薦하기도 했지만, 西人 들을 몰아내고 政權을 奪取하기 위해 切齒腐心, 機會를 노리던 中이었다. [31] 또한 그는 宣祖 의 寵愛를 받던 인빈 金氏가 신성군 을 낳자 그를 世子로 밀려 하고 있었다. [31] 當時 宣祖는 인빈 金氏 의 所生인 신성군 에게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離散해는 인빈의 오빠인 김공량 과 가까웠으므로 그 事實을 알고 있었다. [31] 李山海와 김공량 은 相當히 親했는데, 權韠 銀 두 사람의 關係를 "漢나라 丞相의 칠향거(七香車)가 둘둘둘 굴러가서, 金氏, 張氏 집으로 밤마다 흘러가네"라는 詩로 남길 程度였다. [31]

離散해는 세 사람이 함께 모여 建儲를 奏請하기로 約束한 날, 病을 핑계로 政廳에 나가지 않았으며, 建儲 奏請 前날 아들 經典을 시켜 인빈 金氏의 오빠인 김공량을 찾아가 이야기를 모두 傳한 다음 "鄭澈은 광해군 을 世子로 擁立하고 난 다음 인빈과 그 所生인 신성군을 죽이려고 謀議하고 있습니다. [32] "라고 덧붙인다. 이를 들은 김공량 이 卽時 인빈에게 달려가 그 말을 傳했고, 인빈은 宣祖 에게 울면서 하소연했다. [31]

離散해는 滿朝百官들을 이끌고 宣祖 에게 가서 後嗣를 세울 것을 奏請했다. [ 出處 必要 ] 宣祖 는 누가 後嗣로 적합한가를 問議했고, 左議政 鄭澈 은 바로 광해군 이 英明하니 世子로서 적합하다고 推薦했다. 이때, 大司憲 이해수 , 副提學 이성중 등만 정철의 奏請에 同意했고, 同人인 류성룡과 離散해는 沈默을 지켰다. [33] 震怒한 宣祖 는 그자리에서 鄭澈을 罷職하고, 정철의 奏請에 加勢했던 西人인 이해수, 이성중 等의 官職을 降等하고 外地로 쫓아냈다. [33]

류성룡, 우성전과의 葛藤 [ 編輯 ]

1590年 宗系辨誣(宗系辨誣)를 成事시킨 공으로 광국 功臣 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鄭澈 의 處理를 놓고 同人 內에서도 意見이 갈라지게 된다. 罷職, 流配된 鄭澈 의 處罰을 놓고, 政丞을 歷任한 高官이라 차마 죽일 수는 없다며 류성룡 우성전 은 善處를 呼訴했다. 離散해는 鄭汝立의 亂 己丑獄事 를 잊었느냐며 憤慨했고, 정인홍 等은 류성룡 우성전 을 攻駁했다.

强勁派였던 離散해는 司諫院 司憲府 同人 들에게 兩社가 合計하여 彈劾할 것을 指示했고, 金睟 우성전 은 流配로 끝내야 한다는 穩健論을 主張했다. [34] 바로 鄭澈 을 死刑에 處해야 된다는 이산해, 정인홍 의 主張과 死刑은 지나치다는 류성룡 , 우성전 間에 論爭이 벌어졌다. 류성룡 우성전 을 攻擊하면서 우성전 이 蓄妾을 한 것과 父母의 喪中에도 妓生 妾이 隨時로 우성전 의 집에 出入한 點 亦是 指摘했다. 離散해는 己丑獄事 鄭汝立의 亂 으로 連坐되어 抑鬱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怨恨을 어떻게 풀 수 있느냐며 穩健論을 剛하게 批判하였고, 鄭澈 의 處罰 水位 問題를 놓고 同人 은 甚한 內紛에 휩싸인다.

壬辰倭亂 勃發 直前에 鄭澈 의 治罪 問題와 전랑 薦擧 問題 等을 놓고 同人 勢力間 對立하여 東人은 다시 남인 北人 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는 鄭澈 을 죽이자는 强勁派와 죽이지는 말자, 流配를 보내자는 穩健派 사이의 葛藤이 表面化 된 것이다. 이때 離散해는 鄭澈 을 죽여야 된다고 强力하게 力說했다. 鄭澈 을 살려두면 다시 陰謀를 꾸며 同人 을 一網打盡하려 들 것이니, 이番 機會에 鄭澈 을 죽여야 된다는 것이다. [ 出處 必要 ]

南北 盆唐 [ 編輯 ]

파일:류성룡.png
류성룡

우성전 (禹性傳)과 李山海가 對立하게 되면서 류성룡 은 禹性傳의 便을 들어 南人이 되고, 李山海와 정인홍 , 理髮 (李潑) 等은 北人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우성전 의 집이 南山 (南山)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남인 이라 불렀고, 李山海의 집이 서울의 北岳山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北人이라 불렀다. [35] 後에 北人은 宣祖 뒤를 이을 임금 자리를 놓고 光海君을 支持하는 對北 과 영창大君을 支持하는 小북 으로 갈라지는데 離散해는 對北의 便에 섰다.

남인 北人 의 분당은 李山海가 鄭澈 을 죽이자고 하거나 鄭澈 의 處罰이나 전랑 薦擧 以前에 이미 李滉 學派와 曺植 學派 간 事物觀, 理論의 差異 [36] 에 起因한 것으로, 氣를 否定的으로 보고 이로써 氣를 다스려야 된다는 李滉 學派와, 이와 氣를 論하는 것은 空理空談이라고 본 曺植 學派의 理念 葛藤에서 비롯된 것이다.

1591年 아들 이경전(李慶全)을 시켜 鄭澈 (鄭澈)을 彈劾하게 하여 失脚에 成功 江界로 流配시키고, 그밖의 西人의 英受給을 罷職시키거나 귀양 보내 同人의 執權을 確固히 했다. [3] 그는 西人 黨의 領袖 鄭澈 外에도 己丑獄事 鄭汝立의 亂 以前부터 同人 을 攻擊해왔던 西人 모두를 問責해야 한다는 强勁派的인 立場에 있었다. 그의 西人 黨에 對한 處罰에 同人 은 다시 强勁派와 穩健派로 意見이 나뉘어 갈등하게 된다.

한便 그해 8月 賜暇讀書 에 보낼 讀書堂을 揀擇할 때 自身의 아들 이경전 (李慶全)李 빠진 일로 크게 怒했다. 結局 그의 사위 이덕형 을 시켜 아뢰게 하여 이경전 賜暇讀書 로 選拔하게 했다. [37]

壬辰倭亂 前後 [ 編輯 ]

領議政 就任과 免職 [ 編輯 ]

西人 處罰에 對한 싸움에서 强勁派인 北人 이 勝利하여 執權하게 된다. 以後 그는 北人 界 人士들을 多數 推薦하였고, 남인 界 人士 一部를 起用하였지만 敵愾心을 드러냈다.

離散해는 鄭澈 이 獄事를 憑藉해 自身의 勢力을 除去하려 한다고 疑心하여 뜬所聞을 퍼뜨렸다. [38] 이에 賃金이 簡單한 命令을 적은 文書를 承旨 에게 내려 義禁府 에서 獄事를 다스리고 있던 鄭澈 을 쫓아냈다. 司憲府 司諫院 도 함께 鄭澈 의 罪狀을 論하는 글을 올려 그를 멀리 江界로 귀양을 보냈다. 鄭澈에게 또 罰을 더하고자 [38] 했으나 李山海가 옳지 않다 하여 그만두었다. [39]

鄭澈 이 귀양가자 離散해는 同人 가운데 鄭澈에게 쫓겨났던 者들을 불러 朝廷의 官職을 메웠고, 鄭澈 을 따르던 사람들을 내쫓았다. [39]

以後 그는 己丑獄事 의 原因을 提供한 송익필 을 流配시킨다. [40] 1592年 그는 流配된 鄭澈 의 死刑을 王에게 建議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정철의 死刑 建議가 霧散되자 그는 北人 界 言官들을 시켜 鄭澈 을 死刑에 處할 것을 上疏하였으나 霧散된다. 鄭澈 死刑은 失敗하였지만 結局 鄭澈 1593年 配所에서 病死한다.

이 過程에서 이산해에 依해 流配되었다가 풀려난 뒤 親舊 집을 轉轉하고 있던 송익필 은 不遇하게 죽고 말았다. [40] 그러나 同人 들은 鄭澈 의 處罰 過程에서 南北으로 갈라졌다. 强勁派였던 離散해는 司諫院 司憲府 의 同人들에게 兩社가 合計하여 彈劾할 것을 指示했고, 金睟 우성전 은 流配로 끝내야 한다는 穩健論을 主張했다. [40]

1592年 (宣祖 25年) 다시 復職하여 議政府 領議政 을 거쳐 司僕寺 都提調 를 兼任하였다. [41] 그해 4月 朝廷의 播遷을 놓고 朝廷 大臣들 大部分이 反對하였으나 過去에도 播遷한 事例가 있다고 말하여 周邊에서는 웅성대더니 그 責任을 이산해에게 돌렸다. 兩社가 合計하여 罷免을 請했으나 床이 允許하지 않았다. 이때 都城의 百姓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므로 都城을 固守하고 싶어도 그럴 形便이 못되었다. [42] 以後 그는 壬辰倭亂 이 터진 뒤 國政을 잘못 이끌었다는 理由로 西人 界 言官과 成均館 儒生들의 猛攻擊을 받고 파직당한다.

壬辰倭亂 勃發과 流配 生活 [ 編輯 ]

壬辰倭亂 初期의 戰鬪인 東來府 戰鬪
그의 글씨가 새겨진 木版
( 陶淵明 의 ' 歸去來辭 '를 自身의 親筆 草書로 쓴 것을 스스로 板刻하였다.)

1592年 (宣祖 25) 4月 27日 巡邊使 이일이 尙州 戰鬪에서 敗戰했다는 消息이 傳해졌다. 이 戰鬪 結果가 알려지자 漢陽 人心은 洶洶해져 갔다. 이미 先祖는 徐行할 뜻을 갖고 있었다. 大戰 밖에서 서성대고 있던 大臣들은 그러한 事實을 全혀 몰랐다. [41] 그런데 司僕寺의 雜職 김응수(金應壽)가 領議政과 · 右議政 이 執務하는 곳에 이르러 映像 李山海와 귓속말을 주고받고 하며 來往이 잦았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疑心을 품었다. 當時 映像 李山海가 司僕寺 製造 를 맡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41] 都承旨 이항복 (李恒福)李 손바닥에 '立馬영강문內(立馬永康門; 말을 영강문 안에 세웠다)’라는 여섯 글字를 써서 左相 류성룡 에게 내 보였다. [41] 이산해에 對한 좋지 않은 感情을 품었던 류성룡 은 이를 司憲府 司諫院 에 알려 李山海가 陰謀를 꾸미는것 같다는 疑惑을 暗示했다. [41]

이 事實을 알게 된 司憲府 司諫院 은 映像 李山海가 나라를 어지럽힌 罪로 彈劾하여 罷職시킬 것을 請했으나 國王은 듣지 않았다. 宗親들은 閤門 밖에서 痛哭하며 漢城 의 防禦를 抛棄하고 徐行하려는 것을 極口 反對했다. [41] 그 뒤 調整은 平壤 을 거쳐서 義州 로 播遷하였으나, 1592年 5月 2日 調停을 播遷할 것을 請했다는 理由로 彈劾을 받고 삭탈관직되었다. 이어 李山海와 김공량 이 서로 親하게 지내고 密談하는 內容을 그린 房이 붙어서 非難의 素材가 되었다. [43]

宣祖 가 避難하다가 開城 에 이르러 잠깐 머무를 때였다. 宗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上訴하기를, 김공량 (인빈 金氏의 오라버니)李 闕內와 통하여 政事를 어지럽힌 罪를 다스릴 것을 請했다. [39] 또한 李山海가 나라를 그르친 罪를 論駁하며 그를 귀양 보낼 것을 請했다. [39]

以後 5月 3日 兩司에서 그를 流配보내야 된다고 彈劾하였으나 宣祖 削奪官職 에서 마무리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兩社는 5月 4日 부터 5月 17日 까지 繼續 合計하여 그를 攻擊하였고 5月 17日 中途付處의 命이 떨어졌다.

류성룡 司憲府 司諫院 에 알려 李山海가 陰謀를 꾸미는 것 같다는 疑惑을 暗示했다. [41] 以後 류성룡 에 對한 感情과 함께 鄭澈 에 對한 憎惡와 怨恨은 한層 더해졌다. 이때 一部 百姓들이 鄭澈 의 敍用을 主張했는데, 離散해는 鄭澈 이 自身을 落馬시키기 위해 背後에서 操縱한 것이라 疑心했고, 李山海의 門下生과 弟子들은 西人 에 對한 憤怒와 怨恨을 키워갔다. 辭職하고 白衣(白衣)로 王을 遂行하던 中 平壤 에서 다시 西人 界 言官들의 集中 彈劾을 받아 江原道 평해(平海)로 流配되었다가 1595年 다시 海谷(海曲)으로 移配되었다. 流配地에서 그는 詩와 書藝, 그림 等을 그리며 憂鬱함을 달랬다. 全書와 楷書, 草書에 두루 能하여 戰亂 中인데도 그의 作品을 救하러 流配地를 찾아오는 士大夫와 有志들도 있었다.

壬辰倭亂 期間 中 [ 編輯 ]

壬辰倭亂 初期부터 將軍 李舜臣 元均 사이의 內紛이 問題가 되었다. 李舜臣 류성룡 , 權慄 等과 親分이 있자, 그는 相對的으로 元均 을 支持, 擁護하였다.

한便 流配地에서도 北人 의 黨首로서 實力을 行使하였고, 남인 들의 妥協論에 疑惑을 提起하며 남인 들이 西人 들과 內通했다는 輿論을 造成하였다.

1595年 (宣祖 28年) 1月 11日 宣祖 의 特命으로 다시 釋放되고 官爵을 돌려받았다. 西人 들은 그가 壬辰倭亂 初 播遷을 主張했음을 指摘하며 釋放을 反對하였으나 結局 釋放되었다. 1595年 1月 24日 敦寧府 領事 (敦寧府領事)가 되었고, 3月 辭職 上疏를 올렸으나 王이 上訴를 읽고 다시 出仕하게 하였다. 以後 出仕하여 播遷한 調整이 있는 곳으로 갔다. 9月 다시 辭職訴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5年 10月 遷都한 朝廷에서 열린 備邊司 會議에서 備邊司 의 特別 推薦으로 弘文館 藝文館 大提學에 除授되었으나 辭職 상소인 걸退所(乞退疏)를 올리고 며칠의 말미를 얻어 故鄕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宣祖 가 다시 부르자 長文의 辭職 상소인 걸面本職兵士大提學소(乞免本職竝辭大提學疏)를 올려 거듭 辭讓하였다. 上疏는 允許되지 않았고, 다시 西人 界 儒生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西人 들의 反對를 견뎌내고 弘文館 藝文館 大提學 職을 兼職한다. 以後 北人 의 黨首이자 精神的 支柱로 있다가, 北人 內에서도 다시 旣成 北人들에 不滿을 가진 小北과 旣成 勢力인 對北으로 갈라졌는데 離散해는 洪汝諄과 함께 對北勢力을 支持하였으나 消極的으로 觀望하였다.

李夢鶴의 亂 [ 編輯 ]

1596年 (宣祖 29年) 1月 25日 다시 兼任 洋館 大提學 에 任命되었고, 3月 10日 大提學 兼任을 辭職하는 長文의 辭職上疏를 올렸으나 王이 返戾시켰다.

1596年 6月 行판돈녕府使(行判敦寧府事)를 거쳐 6月 19日 다시 영돈녕府使가 되고, 備邊司 有司堂上을 兼任하였다. 7月 이몽학 의 叛亂이 鎭壓되자 류성룡 , 윤두수 , 김응남(金應南), 鄭琢 (鄭琢), 윤자신(尹自新), 大司諫 이기 (李?), 大司憲 유영경 (柳永慶), 右承旨 이광정(李光庭) 等과 함께 李夢鶴의 亂 關聯者들을 잡아들이고 國文醬의 秋官이 되었다. 그해 8月 李夢鶴의 亂 關聯者의 尉官에게 褒賞할 때 賞을 받았다.

壬辰倭亂의 終結과 復歸 [ 編輯 ]

1598年 (宣祖 31年)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죽자 日本軍 이 撤軍하기 始作했다. 離散해는 이미 赦免 [44] 되어 서울에 돌아와 있었고, 그의 아들 이경전 은 이미 過去에 及第해 있었다. 玉堂 官員을 뽑게 되었는데, 이경전 이 글을 잘 한다는 名聲이 있고 또한 大臣의 아들이라 當然히 전랑에 薦擧되었다. [45]

류성룡 一波 攻擊 [ 編輯 ]

그의 아들 이경전이 李朝에 薦擧되자 當時 嶺南 사람 정경세 가 전랑으로 있었는데, 이경전 이 推薦되는 것을 막고자 이렇게 말했다. [45]

이경전 은 儒生 때부터 남에게 誹謗을 많이 들었으므로 李朝 에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45]

이 말을 듣고 李山海와 그를 따르는 者들이 모두 크게 怒했다. [45] 이 發言의 震源地로 離散해는 류성룡 을 疑心하였다. 以後 남인 류성룡 系派에 對한 그의 憤怒와 不滿은 한層 더해갔다.

그때 이덕형 이 宰相으로 있었는데, 祕密裏에 사람을 시켜 이준에게 이렇게 請했다. [45] 當時 이덕형 남인 이었다.

자네가 경암(鄭經世의 者)에게 말하게. 萬若 이경전 전랑 에 薦擧되는 것을 막으면 반드시 큰 風波가 일어날 터이니, 이는 調整을 便安하게 하는 道理가 아닐세. 이는 내가 사사로이(그의 妻男이기도 하다.) 하는 말이 아닐세. [45]

이준은 정경세와 故鄕이 같고, 이경전 이덕형 의 妻男인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정경세 는 듣지 않았다. [46]

얼마 뒤 臺諫 남이공 이 政丞 류성룡 을 慘酷하게 彈劾했다. [46] 이중환 에 依하면 當時 이 彈劾을 두고 ' 정경세 는 本來 류성룡 의 弟子였으므로, 離散해는 류성룡 정경세 를 使嗾한 것이 아닌가 하는 疑心을 했다. 그러므로 남이공 을 시켜 류성룡 을 彈劾하도록 한 것이지, 류성룡 에게 罪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46] '고 보았다.

生涯 後半 [ 編輯 ]

領議政 在任 時節 [ 編輯 ]

1599年 겨울에 다시 議政府 領議政 에 任命되었다. 1599年(宣祖 32年) 3月 北人 홍여순(洪汝諄)의 大司憲 任命 問題로 다시 葛藤이 생긴다. [47] 홍여순이 大司憲에 任命되자 석 달 後 다른 部署도 아닌 司憲府에서 “‘홍여순은 平生 經營한 일이 모두 財産을 불리고 奢侈를 일삼는 것’이고 北都巡察使(北道巡察使) 時節에는 사람을 풀처럼 여겨 함부로 죽였으므로 온 道(道)의 사람들이 그 살點을 먹으려 했다”고 彈劾할 程度였다. 後날 白虎(白湖) 尹鑴가 左參贊 윤승길(尹承吉)의 ‘領議政 追贈 市場(諡狀)’에서 ‘윤승길이 兵曹參判日 때 兵曹判書 홍여순이 賂物을 멋대로 받아 챙기자 兵曹의 人事가 있는 날(政日)이면 그와 한자리에 앉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病을 稱託하고 나가지 않았다’고 記錄할 程度였다. [47]

北人의 分黨 [ 編輯 ]

黨論이 앞서면 眞實을 外面하듯 洪汝諄을 支持하는 이산해·李爾瞻 等의 對北과 洪汝諄을 批判하는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等의 小북으로 分黨됐다. 그나마 對北은 宣祖 33年(1600) 洪汝諄과 이산해 사이에 다툼이 發生해 李山海가 肉北(肉北), 홍여순이 骨北(骨北)으로 다시 나뉘었다. [47] 그러나 世子 광해군 의 卽位를 反對하는 小북 유영경 과 競爭하면서 骨北과 肉北은 다시 對北으로 統合된다.

1600年 (宣祖 33年) 1月 1日 다시 議政府 領議政 이 되자 1月 25日 辭職을 請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4月 1日 양근(楊根)의 遊學(幼學) 정승민(鄭承閔)에게 同志들과 結託하여 朝臣(朝臣)들을 排斥하려 한다는 彈劾을 들었으나 王이 撫摩시켰다. [48] 當日 王命으로 罷職당하였으나 곧 復職되었다. 4月 28日 홍여순 의 일로 세 番 辭職을 請하여 받아들여졌다. 그해 5月 16日 遊學(幼學) 理解(李海)로부터 홍여순 의 事件과 關聯되어 彈劾을 받았으나 王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시 領議政 職에 復職하고 1601年 6月 牙城府院君(鵝城府院君)에 封君되었다. 그러나 6月 5日 부터 6月 12日 까지 삼사에서 繼續 그의 恕容과 封爵을 反對하는 上疏가 빗발치고 名을 還收하라는 要求가 繼續되었으나 王이 모두 拒絶하였다.

1602年 (宣祖 34年) 領議政 職에서 辭任하였다. 그 뒤 領中樞府事 로 前任한 뒤 牙城府院君을 겸하였으며 그해 耆老所 (耆老所)에 들어갔고, 王으로부터 几杖 (?杖)을 下賜받았다. 以後 領中樞府事와 耆老所大臣이라는 職銜으로 繼續 調整에 出仕하였다. 그해 9月 逆賊 畵手(和愁)를 推鞠한 功勞로 말 1疋을 賞으로 받았다. 以後 病으로 出仕를 하지 못했으므로 領中樞府事의 職銜을 維持하고는 있었으나 그해 10月 祿俸을 받지 않겠다는 上疏를 올렸으나 王이 返戾하였다. 이때부터 여러 大臣들을 이끌고 繼續 世子 冊封을 建議하였다.

1602年 10月 12名의 大臣과 사위 이덕형 (李德馨)을 비롯한 3百 68名, 無關 변양걸(邊良傑) 等 2百 45名 等 625名의 署名을 받고, 광해군 壬辰倭亂 克服에 힘쓴 點을 들어 광해군 을 正式으로 世子冊封을 할 것을 建議하였다. 1603年 領中樞府事 職에서 물러났으나 如前히 牙城府院君과 耆老所 堂上의 資格으로 調整에 出仕하였다. 1606年 1月 다시 大提學 이 되었다.

1605年 (宣祖 38年) 以後 다시 宣祖 의 뒤를 이을 임금 자리를 놓고 광해군 을 支持하는 對北 영창대군 [49] 을 支持하는 小북 으로 갈라지자 그는 葛藤을 縫合하기 어렵다고 判斷, 大勢를 따라 對北의 便에 섰다. 離散해는 宣祖 가 自身이 庶孫(庶孫)인데다가 傍系 僧統이라는 劣等感을 안고 있다는 것과, 唯一한 嫡長子인 영창대군 이 王位를 繼承하기를 願한다는 것을 눈치챘으나 영창대군 을 앉히고 仁穆大妃 가 攝政하는 것은 不可能한 일이라고 판단내렸다.

隱退와 죽음 [ 編輯 ]

1605年 靑難原從功臣 1等에 책록되었다.

1608年 (宣祖 41年) 宣祖 가 갑자기 死亡하자, 原狀으로서 政務를 主管했고 玉璽를 奪取하려는 小북 系列의 陰謀를 事前에 遮斷한 뒤 광해군 에게 玉碎를 넘겨주었다.

文章에 能하여 宣祖代 文章 8大家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3] 官僚生活과 流配生活 中에도 저녁이면 書堂을 열고 學問 硏究와 後學 養成에 힘을 쏟았고, 그의 門下에서는 이홍로(李弘老), 調整(趙挺), 조존세(趙存世), 김선여(金善餘), 임취정(任就正), 朴政賢(朴鼎賢) 等이 그의 文人으로 輩出되었다. 이들 中 김선여 等은 글재주를 認定받아 當代에 史館(史官)으로 拔擢되기도 하였다. 그의 종질人 이기 (李?) 亦是 그의 文人이었다. 그는 書藝와 그림에 能하여 붓글씨와 그림을 배우러 젊은이들이 그의 門下에 모여들었으며, 未遂 許穆 또한 한때 그의 門下에 出入하며 그림과 글씨를 배웠다. 그는 그림도 잘 그렸고, 木刻 工藝 에도 一家見이 있었다. 官職에서 隱退한 以後에도 府院君 의 身分으로 政事에 參與하였으며, 對北 파의 領袖로서 調整에 影響力을 行使하였다.

1609年 봄 둘째 孫子인 한림(翰林) 이구(李久)가 不幸히도 젊은 나이로 死亡하여 傷心이 컸다. [4] 以後 官職에서 隱退해 있다가 1609年 陰曆 8月 病席에 누웠다. 病勢가 惡化되자 王이 親히 語義를 내려보내 診脈하게 하였으나 差度가 없었다. 그해 陰曆 8月 23日에 죽었다. 當時 그의 나이는 항년 70歲였다.

事後 [ 編輯 ]

忠淸南道 禮山郡 대술면 방산리 안골 (내곡) 間)에 安葬되었다. 문충의 諡號가 내려졌다. 그의 同志이자 그가 薦擧한 人物이 임국로(任國老), 남이공 , 홍여순, 송언신(宋言愼), 二刻(李覺), 정인홍(鄭仁弘), 유영경(柳永慶), 이이첨 等으로 이들은 小북 一部를 除去한 뒤 광해군 臺에 對北 政權을 形成하였으나 仁祖 反正 以後로 모두 打倒되었으므로 그에 對한 評價는 否定的인 評價 一色이었다.

그러나 그는 仁穆大妃 廢母論이나 신경진 의 獄事, 영창대군 四史 以前에 死亡하였으므로 仁祖 反正 以後에도 그의 弟子, 門下生들은 連累되거나 禍를 입지 않는다. 仁祖 反正 以後 西人 들 一部는 그에 對한 怨恨으로, 그의 아들 이경전 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이경전 仁祖 反正 을 支持하였고 西人의 便에 붙어 危機를 謀免한다.

1819年 (純祖 19年) 忠淸南道 禮山郡 豫算邑內에 神道碑가 세워졌으며, 그의 8代孫 이정명(李鼎溟)의 付託으로 領議政 을 지낸 남인 黨員 채제공 이 그의 信徒碑文을 썼다.

기타 [ 編輯 ]

1608年 宣祖 가 죽은 後에는 宣祖 의 指紋(誌文)을 지었다. 書畫는 草書(草書) 대자(大字)를 特히 잘 썼으며, 산수묵도(山水墨圖)에도 뛰어났다. 안강의 이언적信徒悲鳴(李彦迪神道碑銘)과 京畿道 龍仁 의 조광조墓碑(趙光祖墓碑)를 썼다. [3] 그림에도 두루 能하여, 文人畫 와 書藝를 배우러 그의 流配地에까지 여러 門下生들이 모여들기도 했다.

그는 비록 한 집안 사람이라 하더라도 眞心으로 서로 對하지 않았고 그 詭譎함을 헤아리기 어려워 大衆은 그를 등지고 親戚은 멀어졌다. [50] 그러나 이는 아들 이경전 이 親舊를 잘못 사귄 탓이라는 反論도 있다. 그에 依하면 '度量이 深厚한 데다 청렴하고 謹愼하기로 이름이 났는데 오랫동안 銓衡(銓衡)의 자리에 있으면서 사류(士類)들을 진출시켜 한때 人望이 높았다. 그러다가 晩年에 이르러 世上에 迎合하여 地位를 잃을까 걱정하는 鄙陋한 人物이라는 非難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大體로 불初寒 아들 經典(慶全)李 사람답지 못한 者들과 서로 結託하여 말을 만들어내고 事件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것이었다 [51] '는 것이다.

學問世界 [ 編輯 ]

文章에 能하여 宣祖代 文章 8大家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書畫(書畵)에 두루 能하여 草書(草書) 대자(大字)와 산수묵도(山水墨圖)를 잘 그렸다. 特히 평해 流配時節에는 수많은 詩文을 남겼다. 文人畫 와 書藝를 배우러 그의 流配地에까지 여러 門下生들이 모여들었다.

未收 許穆 또한 한때 그의 門下에 出入하며 그림과 글씨를 배웠으며 [3] 그밖에 김선여(金善餘) 等이 그의 門下에서 輩出되었다. [52]

1608年 宣祖 가 죽은 後에는 宣祖 의 指紋(誌文)을 지었다. 안강의 이언적信徒悲鳴(李彦迪神道碑銘)과 京畿道 龍仁 의 조광조墓碑(趙光祖墓碑)를 썼다. [3]

그밖에 한글로 된 諺解小學의 跋文 等을 썼다. 木刻 工藝 에도 一家見이 있었다. [3]

咀嚼 [ 編輯 ]

著書 [ 編輯 ]

  • 《아계집》(鵝溪集)
  • 《亞界遺稿》(鵝溪遺稿)

作品 [ 編輯 ]

  • 김시습(金時習) 梅月堂文集 序文
  • 정충록(精忠錄) 序文
  • 諺解小學(諺解小學)의 跋文
  • 조정암狂躁 墓碑銘(趙靜庵光祖墓碑銘)
  • 이언적 墓碑銘
  • 안강의 이언적信徒悲鳴(李彦迪神道碑銘) 글씨
  • 腺腫소경대王 [53] 指紋(墓誌文)
  • 노익(盧珝) 神道碑 글씨
  • 할아버지 理致(李穉) 墓碣銘
  • 處事 최驛(崔?) 墓誌銘
  • 임국로 墓誌銘
  • 임몽정(任蒙正) 墓誌銘
  • 산수묵도(山水墨圖)

[ 編輯 ]

當時 社會를 不義가 판치는 社會라고 確信했던 그는 여러 篇의 諷刺詩를 남겼다. 그 中에는 굶주리다 못해 盜賊이 된 사람, 길에서 굶주려 죽은 사람, 腐敗한 官吏의 賂物과 아부, 百姓의 솥단지까지 긁어가는 慘酷相, 朝鮮 朝廷에서 中國 에 貢女를 보내는 것에 對한 隱喩와 諷刺를 主로 素材로 活用하였다.

老방원(路傍寃) : 길가의 어느 冤鬼

三人死路傍(三人事路傍) / 길가에 죽어 있는 세 사람
皆是流離子(開始유리자) / 모두가 流浪하는 사람들이라
一爲烏鳶食(一位오연식) / 까마귀와 솔개의 먹힌 한 사람
過者不忍視(菓子不仁視) / 지나가던 사람들 차마 못본다
一爲肌民斫(一位機敏作) / 굶주린 사람들이 살 베간 사람
白骨無餘肉(白骨무여陸) / 뼈만 앙상하고 살 한 點 없도다
一爲凶賊頭(일위흉적두) / 나머지 하나는 盜賊의 머리로고
函去賭黃甲(轞車度황갑) / 箱子에 넣어 보내면 懸賞金 많겠다
一死等是寃(日사등시원) / 한番 죽어 원통함은 같아도
淺深猶有異(天心悠悠이) / 깊이는 如前히 差異가 없었도다
人鳥尙可活(人組商家활) / 오히려 새와 사람 살릴 수 있었지만
何如作凶醜(하여작흉추) / 어찌하여 그대는 凶惡한 盜賊이 되었느뇨

장사원(壯士怨) : 어느 壯士의 怨恨

嶺表有奇士(令票유기사) / 嶺南에 奇異한 장사 있었으니
壯勇百夫特(장용백部特) / 勇猛이 모든 사내들 中 特出하였다.
一朝海寇來(日조해구래) / 어느 날 倭敵이 侵略해 왔어도
安閑猶自若(안한유자약) / 便安하고 閑暇하며 泰然自若하였다.
荊妻不下機(형처불하기) / 아내는 베틀에서 내려오지 않고
老母在床席(老母再上席) / 老母는 寢牀 자리에 있었어라.
出門但唾手(出門斷打수) / 文 나서서 손에 침을 뱉더니
挺身恣馳突(精神自治돌) / 몸을 빼어 마음껏 敵을 무찔렀어라.
一箭射巨酋(일戰死거추) / 화살 하나로 우두머리를 죽이자
群醜自奔逐(群酋子分縮) / 部下들은 절로 도망쳐 버렸어라.
公輸奪賊貨(空輸脫赤化) / 빼앗은 敵의 財物은 官家로 보내고
袖有斬賊?(수유참적괵) / 벤 敵의 需給은 소매에 넣어두었어라.
官長本無厭(館長本無染) / 고을 員이 本來 貪慾이 너무 많아
所欲非貨足(所欲飛火族) / 再물로는 欲心 채울 수 없었어라.
居然逢彼怒(거年俸피노) / 이에 뜻하지 않게 노여움을 샀나니
縛虎何太急(박호하太急) / 잡아오라는 命令이 그리도 急하였던가.
朝家重爪牙(兆加重爪牙) / 朝廷은 元來 長壽를 重히 여기는데
胡爲輕殺戮(護衛頃살륙) / 어찌하여 가벼이 殺戮을 行하는가.
古來固如此(고래高如此) / 예로부터 이런 일 많았으니
含寃非爾獨(含怨非이독) / 願한 머금고 죽은 이 그대뿐 아니겠지.

領所群 1(詠昭君 1) : 蘇軍을 노래하다

三千粉黛鎖金門(三千分臺碎金門) / 三千 宮女들 九重宮闕에 갇혀있어
咫尺無由拜至尊(咫尺무流配地존) / 咫尺에 있어도, 지존인 임금을 뵈지 못했다
不是當年投異城(不時當年투異性) / 當時에 낯선 땅으로 가지 않았다면
漢宮誰識有昭君(한궁수式유소군) / 漢나라 宮闕에서 누가 蘇軍이 있음을 알았으리

領所群 2(詠昭君 2) : 蘇軍을 노래하다

世間恩愛元無定(世間은애원무정) / 世上의 恩惠와 사랑 월리 定해진 것 아니니
未必氈城是異鄕(未必전성시異鄕) / 오랑캐 땅이 반드시 낯선 땅이 되는 것은 아니도다
何似深宮伴孤月(下士心弓班固月) / 구중 깊은 宮闕에서 외로운 달만 짝했다면 어떠했을까
一生難得近君王(一生難得近君王) / 한 平生 동안에도 君王 가까이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離散해는 當時의 詩人, 文人, 妓女들이 主로 짓던 中國 의 古典이나 武陵桃源, 中國의 景致를 담은 詩를 거의 짓지 않고, 現實의 삶을 直說的으로 描寫한 詩를 主로 남겼다. 世上의 現實을 諷刺한 그의 作品傾向은 後에 許穆 , 尹鑴 , 유형원 , 이서우 , 이하진 , 利益 , 오상렴 , 신후담 , 안정복 , 정약용 等으로 이어진다.

年譜 [ 編輯 ]

家族 關係 [ 編輯 ]

그의 둘째 딸이 오성과 한음의 한음 이덕형 의 夫人이다. 둘째 딸 贈呈卿夫人 李氏는 壬辰倭亂 때 미처 避身하지 못하고 日本軍 에게 사로잡혔는데, 節槪를 지키기 위하여 自決하였다. 셋째 사위 流星 은 自身의 아내가 병들어 죽게 되자 斷指하여 피를 흘려넣어주어 劇的으로 소생시켰다 한다. 死六臣 의 한사람인 耳介 (李塏)는 그의 高祖父 이우의 四寸이었다.

評價 [ 編輯 ]

天稟이 뛰어나고 才藝가 熟成하여, 다섯 살에 능히 大文字를 지어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떨쳐졌고 登科한 뒤에는 다시 再行으로써 重望을 받았다. [55] 政治家로서의 活躍이 두드러진 同時에 文章이 뛰어나, 宣祖 임금 當時 8代 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56]

當代 人物들의 評價 [ 編輯 ]

宣祖 는 이산해에 對하여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고 몸은 옷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뭉치의 참된 기운이 속에 차고 쌓여서 바라보면 尊敬心이 생긴다"고 말했으며, 大司憲 으로 있을 때의 李珥 는 競演에서 "李山海가 平時에 벼슬을 지낼 때는 다른 사람 보다 나을 것이 없었는데, 吏曹判書 가 됨에 이르러서는 모든 公論을 따르고 請託을 받지 않아, 뜰 안이 쓸쓸하기가 한 겨울의 선비집 같고, 다만 착한 선비를 듣고 모아 벼슬길을 맑게 하는 것만 마음에 두고 있으니, 이 같은 일이 數年만 持續된다면 世上 風俗이 거의 變化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56]

기자헌 (奇自獻)은 그의 智慧에 感歎하면서도 그를 어려워하며 꺼려했다. 기자헌 은 일찍이 말하기를 “離散해는 아마 龍과 같은 사람이다. 朋黨이 있은 뒤로 이와 같은 사람을 처음 보았다.”고 했으니, 大槪 그 智慧와 術數에 깊이 感服하여 相對하기 어려움을 꺼려서 한 말이었다.

作品性에 對한 評價 [ 編輯 ]

하서 김인후 는 일찍부터 그의 詩의 優秀性을 發掘하고 初步 詩人이었던 그의 詩作品을 評하기도 했다. '下徐先生이 그의 詩文에 對하여 "比喩하면 公衆의 樓閣과 같아서 千分(天分)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萬若 冊읽기에 힘을 들였다면 바로 陳腐한 俗世의 말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57]

그의 時調는 北人 의 沒落 外에도 時流에 批判的이고 社會에 不平不滿이 많다는 理由로 後代의 여러 是認 , 文人들로부터 外面當하였다.

史草에 나타난 評價 [ 編輯 ]

史草에 나타난 이산해에 對한 評價는 모두 羅列하기 힘들 程度로 자주 權謀術數에 能한 逆賊 또는 艱辛等으로 表現되고 있어 매우 否定的이다. [58] 그가 官職에 登用되면 바로 따라서 그를 罷職하라는 上疏가 恒常 있었다. [59]

그는 비록 한 집안 사람이라 하더라도 眞心으로 서로 對하지 않았고 그 詭譎함을 헤아리기 어려워 大衆은 그를 등지고 親戚은 멀어졌다. [60]

그러나 이는 아들 이경전 이 親舊를 잘못 사귄 탓이라는 反論도 있다. 그에 依하면 '度量이 深厚한 데다 청렴하고 謹愼하기로 이름이 났는데 오랫동안 銓衡(銓衡)의 자리에 있으면서 사류(士類)들을 진출시켜 한때 人望이 높았다. 그러다가 晩年에 이르러 世上에 迎合하여 地位를 잃을까 걱정하는 鄙陋한 人物이라는 非難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大體로 불初寒 아들 經典(慶全)李 사람답지 못한 者들과 서로 結託하여 말을 만들어내고 事件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것이었다 [61] '는 것이다.

再評價 [ 編輯 ]

李山海가 6살때부터 天才로 推仰 받을 程度로 英特했고 官職에 나선 것도 23世로 相當히 빠른 便이였으며 當代의 文章家로 손꼽혔으며 書畫에도 그 才能을 보였고 훌륭한 面이 있는 人物임에도 不拘하고 [62] [63] [64] [65] 《宣祖實錄》 以後에서 이런 나쁜 評價만을 받는 것은 壬辰倭亂 前後 그리고 宣祖 末期에 李山海가 跛行的 政治 行步를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66] 또한 人組 反正 以後 그의 政敵이었던 鄭澈 , 成婚 의 黨인 西人 高宗 때까지 340年을 執權하게 되었다. 그 時期에 西人의 主導로 編纂된 光海君日記와 그 以後 記錄에서 西人 의 主要 指導者인 鄭澈 을 가장 甚하게 攻擊했던 이산해에 對한 評價가 좋게 내려질 可能性은 極히 낮았다.

또한 鄭澈 이 다양한 媤家와 作品을 남긴데 反해 그는 作品을 많이 남기지 못했고, 自身을 辯護하거나 辨明할 自敍傳이나 著書를 남기지 못한 것 亦是 後代까지 그에게 不利한 評價가 내려지는 하나의 原因이 됐다.

史草에 나타난 評價가 苛酷했고 그를 彈劾하는 上疏가 많았음에도 離散해는 分明히 宣祖의 寵愛를 받았다. 壬辰倭亂 前의 領議政으로서 分明히 日本의 侵入을 警戒하지 못한 責任을 지고도 宣祖 末期에 다시 映像의 자리에 올랐으며 功臣의 班列에 오르고 宣祖 34年에는 牙城府院君(鵝城府院君)으로 冊封되기까지 했다. 李山海가 죽었다는 消息을 듣고 光海君은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모든 致傷에 關한 일들을 現任 大臣의 禮에 따라 할 것을 海藻에 말하라.”라고 말하며 厚하게 葬禮까지 치러줄 것을 指示한 것으로 보아 光海君의 新任까지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7]

일화 [ 編輯 ]

1575年 아버지 이지번 이 臨終하게 되자 병든 아버지 이지번 을 소생시키려고 스스로 칼로 自身의 넓적다리 살을 벤 일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고 衰弱해지자 그때의 傷處가 病의 빌미가 되어 5年 동안을 病患(病患) 을 앓기도 했다. [4]

鄭汝立의 獄事 關聯 [ 編輯 ]

정여립 의 獄事로 同人 1千餘名이 禍를 입었다. [68] 이 中에는 어린이와 아기도 처형당하였고, 理髮의 10歲 未滿의 두 아들과 80歲 老母가 棍杖을 맞다 죽었다. 當時 刑問을 主管하던 刑官은 松江 鄭澈 로, 刑場의 몰골을 目擊한 離散해는 鄭澈 에게 甚한 反感과 怨恨을 품게 된다.

己丑獄事 當時 홍성민 정여립 의 親戚인 정언신 의 發言에 그를 連累시킨 것도 西人 에 對한 反感을 품는 原因이 됐다. 大司憲 홍성민 이 宣祖에게 "정언신의 그 말은 神과 兪泓 과 더불어 혀를 찼고, 이산해도 그 不可함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언신 [23] 이 再三 말하자 이산해도 조금 굽혀서 '다시 생각해보니 率直하게 말하면 偶像의 말도 옳다'하였습니다"라고 말하여 李山海를 謀略했던 것이다. [2]

世子 建儲 問題 [ 編輯 ]

鄭澈에 對한 復讐를 企劃하던 中, 宣祖 인빈 金氏 의 아들 신성군 에게 마음이 있는 것을 確認하게 됐다. 1591年 初 左議政 鄭澈 의 主管下에 右議政 류성룡 , 領議政 이산해, 大司憲 이해수 , 副提學 이성중 等과 世子 冊封 問題를 놓고 深刻한 論議를 벌였다. 여기서 신성군 을 世子로 推戴하기로 決意하였다. 宣祖 가 신성군을 寵愛하고 있다는 事實에 注目하고 宣祖에게는 신성군을 世子로 推戴하기로 滿場一致로 定했다고 넌저視 귀띔을 한 뒤, 김공량 (인빈 金氏의 오빠)에게 鄭澈이 光海君을 世子로 擁立하려 하며, 인빈과 신성군을 죽이려 한다고 귀띔했다.

離散해는 아들 經典을 시켜 인빈 金氏의 오빠인 김공량을 찾아가 이야기를 모두 傳한 다음 아래와 같은 말을 덧붙이기에 이르러, "鄭澈은 광해군 을 世子로 擁立하고 난 다음 인빈과 그 所生인 신성군을 죽이려고 謀議하고 있습니다. [69] " 金公諒은 인빈에게 달려가 이를 알렸다.

이산해도 인빈 金氏를 찾아가서는 鄭澈이 光海君을 世子로 擁衛하려고 한다는 말을 傳했다. 그리고 光海君을 世子로 擁衛한 뒤 인빈과 신성군을 謀陷하여 죽일 計略을 짜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親庭오빠와 이산해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인빈은 當場 宣祖에게 달려가 鄭澈이 自身들을 죽이려고 謀略을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離散해는 김공량 과 結託하여 計略을 꾸몄다. [33]

인빈을 寵愛하고 있던 宣祖는 이 말을 듣고 鄭澈 을 疑心하였다. 그러나 이런 內幕을 알지 못한 鄭澈은 宣祖 앞에서 鄭澈 은 光海君이 世子로 適任者라 먼저 推薦하였다가 그대로 禍를 當하고 만다. 이때 이해수, 이성중 等만 정철의 奏請에 同意했고, 同人인 류성룡과 離散해는 沈默을 지켰다. [33] 結局 鄭澈은 罷職되고, 西人인 이해수, 이성중 等만 정철의 奏請에 加勢했다가 降等되어 外職으로 쫓겨났다. [33]

關聯 作品 [ 編輯 ]

텔레비전 드라마 [ 編輯 ]

演劇, 映畫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關聯 文化財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各州 [ 編輯 ]

  1. 韓國歷代人物綜合情報시스템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 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朝鮮社會史叢書 6》 (嘉藍企劃, 2000) 300
  3. daum事前
  4. 이산해 信徒鼻紋, 忠淸南道 禮山郡 예산읍 素材
  5. [1] Archived 2016年 3月 5日 - 웨이백 머신 [ 文人 ] 73. 이산해(李山海)
  6. 先祖修正實錄 9卷, 宣祖 8年(1575 乙亥 / 名 萬曆(萬曆) 3年) 12月 1日(乙丑) 4番째記事 "前 內資寺 情 이지번의 졸기"
  7. 明宗實錄 26卷, 明宗 15年(1560 更新 / 名 家庭(嘉靖) 39年) 4月 24日(기미) 1番째記事 "成均館에 擧動해 大聖殿에 焚香하다"
  8. 五言絶句와 七言絶句 各 2首를 짓는 것
  9. 東人은 大部分 徐坰德, 이언적, 이현보, 李滉, 曺植의 文人들로 構成되었으며 後日 南北分黨 時 徐敬德, 曺植의 文人은 北人으로, 이언적, 이현보, 李滉의 文人들은 南人으로 나뉘었다.
  10. 先祖修正實錄 12卷, 宣祖 11年(1578 無人 / 名 萬曆(萬曆) 6年) 10月 1日(無人) 4番째記事 "兩社가 윤두수·윤근수·閏絃을 論劾하여 罷職시키다"
  11. 壬辰倭亂 以前까지만 해도 父母의 3年喪으로 辭職은 하되 侍墓살이를 하는 境遇는 極히 드물었다.
  12. 先祖修正實錄 17卷, 宣祖 16年(1583 癸未 / 名 萬曆(萬曆) 11年) 9月 1日(己卯) 5番째記事 "儒生 박윤이 上疏하여 示唆를 極論하다"
  13. 宣祖實錄 17卷, 宣祖 16年(1583 癸未 / 名 萬曆(萬曆) 11年) 10月 12日(更新) 1番째記事 "平安道 순무 御史 金睟에게 논·富의 課題를 보내 道內 儒生에게 製述하게 하다"
  14. 이성무, 宰相列傳:朝鮮을 이끈 사람들 (청아출판사, 2010) 160페이지
  15. 宣祖實錄 19卷, 宣祖 18年(1585 乙酉 / 名 萬曆(萬曆) 13年) 1月 10張 1面~2面 "競演에서 김우옹·이산보 等이 李珥·成婚·정철·沈義謙의 關係를 論하다"
  16. 宣祖實錄 20卷, 宣祖 19年(1586 丙戌 / 名 萬曆(萬曆) 14年) 10月 27日(戊子) 2番째記事 "吏曹 判書 李山海가 조헌의 上訴에서 排斥을 받았다며 辭職을 請하자 出仕를 命하다"
  17. 宣祖實錄 21卷, 宣祖 20年(1587 定해 / 名 萬曆(萬曆) 15年) 3月 7日(病身) 3番째記事 "儒生 曺廣鉉·已歸 等이 스승 李珥가 無故 받은 일을 極論하고 誓戒하다"
  18. 宣祖實錄 22卷, 宣祖 21年(1588 巫子 / 名 萬曆(萬曆) 16年) 1月 26日(庚戌) 2番째記事 "吏曹 判書 李山海가 身柄으로 情死하다"
  19. 宣祖實錄 22卷, 宣祖 21年(1588 巫子 / 名 萬曆(萬曆) 16年) 6月 1日(癸丑) 1番째記事 "李山海가 除塵한 宗契 謝恩票의 開墾을 名했으나 李山海가 辭讓하자 許諾하다"
  20. 宣祖實錄 22卷, 宣祖 21年(1588 巫子 / 名 萬曆(萬曆) 16年) 7月 4日(乙卯) 1番째記事 "宗契 변무에 對한 師恩 表文을 李山海가 고치다"
  21. 宣祖 23卷, 22年(1589 己丑 / 名 萬曆(萬曆) 17年) 1月 21日(技士) 1番째記事 "備邊司에서 無人을 불車 採用한다고 하자 各 臣僚들이 올린 名單"
  22. 選手 23卷, 22年(1589 己丑 / 名 萬曆(萬曆) 17年) 12月 1日(甲戌) 11番째記事 "宋翼弼 兄弟의 醜聞을 刑曹에 傳敎하다"
  23. 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朝鮮社會史叢書 6》 (嘉藍企劃, 2000) 299
  24. 宣祖實錄 23卷, 宣祖 22年(1589 己丑 / 名 萬曆(萬曆) 17年) 12月 9日(壬午) 1番째記事 "逆賊과 關聯하여 議論이 過激한 사람은 制裁하라고 坐像 이산해에게 全校"
  25. 이성무, 宰相列傳:朝鮮을 이끈 사람들 (청아출판사, 2010) 161페이지
  26. 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朝鮮社會史叢書 6》 (嘉藍企劃, 2000) 143
  27. 宣祖 23卷, 22年(1589 己丑 / 名 萬曆(萬曆) 17年) 12月 14日(定해) 1番째記事 "全羅 儒生 정암수 等이 이산해·鄭彦信·鄭仁弘·류성룡 等을 指斥하는 上疏를 올리다"
  28. 宣祖實錄 24卷, 宣祖 23年(1590 京仁 / 名 萬曆(萬曆) 18年) 5月 19日(기미) 3番째記事 "推鞠했던 大臣과 金部 代身을 불러 정언신의 말을 들었는지 묻다"
  29. 宣祖 25卷, 24年(1591 辛卯 / 名 萬曆(萬曆) 19年) 7月 5日(무진) 1番째記事 "兩社가 정암수의 國文을 反對한 當時 兩司를 彈劾하다"
  30. 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朝鮮社會史叢書 6》 (嘉藍企劃, 2000) 149
  31. 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朝鮮社會史叢書 6》 (嘉藍企劃, 2000) 150
  32. 박찬희, 朝鮮王朝 五百年 野史 (꿈科希望 | 2009) 310
  33. 한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 (들녁 出版社, 1996) 280
  34. 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朝鮮社會史叢書 6》 (嘉藍企劃, 2000) 154
  35. 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朝鮮社會史叢書 6》 (嘉藍企劃, 2000) 155
  36. 政治的으로는 李滉學派나 早食學派는 李珥, 成渾의 畿湖學派에 對抗하여 같은 立場을 取하였다.
  37. 宣祖實錄 25卷, 宣祖 24年(1591 辛卯 / 名 萬曆(萬曆) 19年) 8月 10日(壬人) 1番째記事 "懇願이 讀書堂 揀擇을 다시 할 것을 請하다"
  38. 이중환, 《擇里志》 (김흥식 驛, 서해문집, 2006) 175페이지
  39. 이중환, 《擇里志》 (김흥식 驛, 서해문집, 2006) 176페이지
  40. 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朝鮮社會史叢書 6》 (嘉藍企劃, 2000) 154
  41. 朝鮮 國王 宣祖가 徐行 길에 오르다 - 오마이뉴스 2004年 10月 19日子
  42. 宣祖實錄 26卷, 宣祖 25年(1592 臨津 / 名 萬曆(萬曆) 20年) 4月 28日(정사) 2番째記事 "代身 以下 播遷을 反對했으나 映像 離散해는 播遷의 前例가 있다고 말하다"
  43. 宣祖 26卷, 25年(1592 臨津 / 名 萬曆(萬曆) 20年) 5月 3日(壬戌) 6番째記事 "都承旨 이충원 等을 가자하고 敵의 形勢, 民心의 動向 等을 묻다"
  44. [宣修 29卷, 28年(1595 乙未 / 名 萬曆(萬曆) 23年) 1月 1日(甲戌) 2番째記事]
  45. 이중환, 《擇里志》 (김흥식 驛, 서해문집, 2006) 177페이지
  46. 이중환, 《擇里志》 (김흥식 驛, 서해문집, 2006) 178페이지
  47. 疏通과 統合에 失敗한 君主, 외롭게 沒落하다 中央 오피니언 第100號
  48. 先祖修正實錄 34卷, 宣祖 33年(1600 경자 / 名 萬曆(萬曆) 28年) 4月 1日(甲戌) 10番째記事 "정승민이 李山海와 황우한을 彈劾하니 황우한이 스스로 辨明하다"
  49. 宣祖의 唯一한 赤字
  50. 宣祖實錄 138卷, 宣祖 34年(1601 新築 / 名 萬曆(萬曆) 29年) 6月 3日(技士) 2番째記事 "李山海·이준·張만·최철견 等에게 官職을 除授하다"
  51. 宣祖實錄 182卷, 37年(1604 甲辰 / 名 萬曆(萬曆) 32年) 12月 6日(신해) 4番째記事 "柳永慶·奇自獻 等에게 官職을 除授하다"
  52. 김선여墓碣(金善餘墓碣)
  53. 宣祖의 첫 諡號는 腺腫이었으나 壬辰倭亂 克服의 理由로 仁祖때 先祖로 廟號가 改正되었다.
  54. 先祖修正實錄 28卷, 宣祖 27年(1594 甲午 / 名 萬曆(萬曆) 22年) 11月 1日(乙亥) 2番째記事 "김응남을 右議政으로 삼다"
  55. 明宗實錄 34卷, 明宗 22年(1567 丁卯 / 名 家庭(嘉靖) 46年) 4月 25日(庚戌) 3番째記事 "冤魂·金鎧·박충원 等에게 官職을 除授하다"
  56. 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朝鮮社會史叢書 6》 (嘉藍企劃, 2000) 301
  57. 조기영, 《河西詩學과 湖南詩壇》 (국학자료원, 1995) 79페이지
  58. 《光海君日記》 3卷, 卽位年(1608 무신 / 名 萬曆(萬曆) 36年) 4月 27日(癸未) 7番째 記事.
  59. 《宣祖實錄》 138卷 34年 6月 5日 (辛未) 2番째 記事.
  60. 宣祖實錄 138卷, 宣祖 34年(1601 新築 / 名 萬曆(萬曆) 29年) 6月 3日(技士) 2番째記事 "李山海·이준·張만·최철견 等에게 官職을 除授하다"
  61. 宣祖實錄 182卷, 37年(1604 甲辰 / 名 萬曆(萬曆) 32年) 12月 6日(신해) 4番째記事 "柳永慶·奇自獻 等에게 官職을 除授하다"
  62. 《宣祖實錄》 138卷 34年 6月 5日 (辛未) 2番째 記事.
  63. 《明宗實錄》 28卷, 17年(1562 壬戌 / 名 家庭(嘉靖) 41年) 3月 5日(己丑) 2番째 記事.
  64. 《明宗實錄》 29卷, 18年(1563 癸亥 / 名 家庭(嘉靖) 42年) 10月 1日(丙午) 2番째 記事.
  65. 《明宗實錄》 26卷, 15年(1560 更新 / 名 家庭(嘉靖) 39年) 4月 24日(기미) 1番째 記事.
  66. 《光海君日記》 3卷, 卽位年(1608 무신 / 名 萬曆(萬曆) 36年) 4月 27日(癸未) 7番째 記事.
  67. 《光海君日記》 19卷, 1年(1609 己酉 / 名 萬曆(萬曆) 37年) 8月 23日(辛未) 4番째 記事.
  68. 이용범 , 선비 2(人生의 참스승) (바움, 2004) 192
  69. 박찬희, 朝鮮王朝 五百年 野史 (꿈科希望 | 2009) 310

關聯 書籍 [ 編輯 ]

  • 이성무, 《阿桂 李山海의 學問과 思想》 (지식산업사, 2010)
  • 박찬희, 《朝鮮王朝 五百年 野史》 (꿈科希望, 2009)
  • 李舜臣歷史硏究會, 《李舜臣과 壬辰倭亂 1》 (神에게는 아직도 열두 隻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 (비봉출판사, 2005)
  • 이종묵, 《朝鮮의 文化空間》 (휴머니스트, 2006)
  • 이이화, 《王의 나라 臣下의 나라》 (김영사, 2008)
  • 崔선경, 《王을 낳은 後宮들》 (김영사, 2007)
  • 서광원, 《戰略의 急所》(위즈덤하우스, 2007)
  • 최범서, 《朝鮮 最高의 公職者》 (嘉藍企劃, 2006)
  • 이중환, 《擇里志》 (김흥식 驛, 서해문집, 2006)
  • 이덕일, 《黨爭으로 본 朝鮮歷史》 (石筆, 2005)
  • 著者 未詳, 《壬辰錄:우리苦戰 다시읽기 35》 (구인환 驛, 신원문화사, 2004)
  • 이이화, 《韓國史의 아웃사이더》 (김영사, 2008)
  •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11:朝鮮과 日本의 7年戰爭》 (한길사, 2000)
  • 이덕일, 《士禍로 보는 朝鮮歷史》 (石筆, 1998)
  • 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朝鮮社會史叢書 6》 (嘉藍企劃, 2000)
  • 신봉승, 《權慄》 1,2 (답게, 1999)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