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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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첨
李爾瞻
朝鮮 의 文官

이름
別名 득여(得與)
管送(觀松)· 雙利(雙里)
身上情報
出生日 1560年
出生地 朝鮮 忠淸道 陰城郡
死亡日 1623年 3月 14日 (64歲)
死亡地 朝鮮 漢城府
國籍 朝鮮
學歷 1594年 別試文科에 乙과 及第
1608年 文科 重試(重試)에 壯元 及第
經歷 禮曹 板書 , 광창府院君
正當 北人 對北派
本館 光州 (廣州)
子女 原葉(元燁), 紅葉(弘燁), 大葉(大燁)
職業 文官
宗敎 儒敎 ( 性理學 )

이이첨 (李爾瞻, 1560年 ~ 1623年 3月 14日 )은 朝鮮 中期의 文臣이자 外戚이며, 壬辰倭亂 때의 義兵將이다. 本貫은 光州 (廣州). 는 득여(得與), 는 管送(觀松)· 雙利(雙里)이다.

孝行으로 광릉參奉에 除授되었으며, 1592年 (宣祖 25) 壬辰倭亂 이 터지자 도망치지 않고 義兵을 일으켜 日本軍과 맞섰다. 1594年 別試 文科에 乙科로 及第하고 다시 1598年(宣祖 31) 黃海·平安 巡檢해운 暗行御史로 다녀왔다.1599년 吏曹正郞이 되고, 北人 이었다가 北人이 對北 , 小북 으로 나뉠 때는 對北 에 加擔했으며, 對北의 指導者였다.

宣祖 末期 王家의 後嗣問題로 北人이 둘로 나뉘자 對北의 領袖로 정인홍 等과 함께 光海君을 支持했으며, 영창대군 世子 로 擁立하려는 小북의 計劃를 沮止하였으며, 광해군 卽位 以後 류영경 과 小북一派를 除去하였다. 1608年 重試(重試)에 壯元으로 及第한 뒤 大使間, 兵曹參知, 成均館大司成 等의 要職을 거쳤고 광창群(廣昌君)에 封爵된 뒤 禮曹判書와 大提學 等을 지냈으며 광창府院君(廣昌府原君)으로 進封되었다. 光海君 卽位 直後부터 그는 王權에 挑戰한다고 본 임해군 , 진릉군 , 영창대군 等을 廢庶人해 죽임과 同時에 소북파를 肅淸하였고, 1617年 (光海君 9) 鄭仁弘 等과 함께 仁穆大妃 의 廢母論을 主張하여 이듬해 對備를 廢庶人化하여 서궁(西宮)에 幽閉하고, 宣祖의 國舅 金霽南 을 私私시켰다. 그는 壬辰倭亂 때의 功勞로 宣撫原從功臣에 錄勳되었고, 光海君 때의 政治活動으로는 정운공新, 翼社功臣, 兄難功臣 等에 錄勳되었다.

壬辰倭亂 當時 광릉 參奉 으로, 日本軍 광릉 에 불을 지르자 直接 달려가 世祖 의 御眞과 世祖 位牌를 손수 불길로부터 救出해냈다. 어머니에 對한 孝誠과, 아버지 및 계조모의 死亡 後 葬禮式의 至極精誠으로 各各 孝子 旌閭가 내려지기도 했다. 仁祖反正 直後 逃避하려다가 光州의 이보현에서 反正軍에게 잡혀 死刑당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忠淸道 (只今의 忠淸北道 ) 陰城郡 삼성면 양덕리에서 태어났다. 遁村 이집 과 이지직의 後孫으로, 연산군 弔意 文身 이극돈 (李克墩)의 5代孫이며 李克墩의 次男 이세경의 4代孫(李爾瞻의 高祖父)으로, 아버지는 이우선(李友善)이고 어머니는 眞珠인 類唯一(柳惟一)의 딸이다. 그의 5代祖가 戊午士禍 에 原因을 提供하였다하여 어려서부터 賤待와 蔑視를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事後에 議政府領議政에 追贈되고 廣安府院君(廣安府院君)에 追封되었다.

戊午士禍와 甲子士禍 廢妃 尹氏 의 死藥을 들고 갔던 이세좌 , 李克墩의 동생으로 燕山君의 實情을 批判하던 左議政 이극균 等이 처형당하고, 戊午士禍 때 살아남은 士林派 는 繼續 이극돈을 非難했다. 그러나 高祖父는 司憲府掌令을 지냈고 曾祖父 이수훈은 敎理를 歷任하고 贈職으로 領議政에 追贈되었다. 그러나 以後 家勢는 漸漸 沒落하여, 그의 집안은 어렵게 生活하여 漢城에서 忠淸道 陰城郡으로 移住해 生活하였다. 오랫동안 가난한 環境에서 學問에 邁進하던 그는 壬辰倭亂 때의 義兵將이자 南冥 曺植 의 學脈을 繼承한 鄭仁弘의 弟子가 되어 그의 門下에서 修學했다. 그의 家庭은 꽤 어려웠고 그의 아내는 배고픔에 失性해 僻地의 풀을 먹었다는 說도 있다.

1582年 (宣祖 15年) 生員·進士에 合格하고 1593年(宣祖 26) 광릉 參奉(光陵參奉)을 지냈으며, 어머니에게 孝道하여 故鄕에 孝子 旌門 (旌門)이 세워졌다.

壬辰倭亂 前後 [ 編輯 ]

1592年 壬辰倭亂 初期에 광릉參奉으로 在職 中일 때 日本軍이 光陵에 放火하였다. 世祖의 御眞 과 位牌를 불길로부터 救해냈다. [1] 처음부터 避難하지 않고 義兵을 모아 늘 軍幕에 있었던 그는 日本軍이 光陵에 불을 지르자 直接 달려가 世祖의 影幀(影幀)과 世祖의 位牌를 품에 안고 나와 話題가 되었다. 1593年 3月 李爾瞻이 世祖의 御眞과 位牌를 들고 行在所를 찾아오자 宣祖는 直接 臣下들을 거느리고 마중나왔다. 壬辰倭亂 때 日本軍의 掠奪 放火 外에도 百姓들이 불을 질러서 朝鮮의 歷代 國王 御眞이 大部分 消失되었다. 이때 집經典參奉 洪女率이 太祖의 御眞을 直接 救해냈고 이어 광릉 參奉 李爾瞻이 世祖의 影幀을 求해냈기에 宣祖는 直接 그를 迎接했다. 이로서 宣祖의 寵愛를 얻어 縣監에 除授되었다.

以後 縣監(縣監)으로 在職 中 1594年 (宣祖 25)에 別試 文科에 乙科로 及第하고 戰績이 되었다. 곧바로 賜暇讀書(賜暇讀書)하였으며, 이때 아버지와 계조모가 連이어 死亡하자 그는 昏絶할 程度로 曲을 하고, 儀禮에 맞춰 葬禮를 치렀으며, 孝行을 認定받아 朝廷으로부터 旌門(旌門)이 세워졌다. 어머니의 喪을 當해서도 葬禮를 極盡히 하여 孝子의 正門이 세워졌다. 壬辰倭亂 當時 義兵을 일으켜 倭敵과 싸운 功勞로 後日 1604年 宣撫 原從功臣 1等에 책록되었다.

官僚 生活 初盤 [ 編輯 ]

1597年 (宣祖 30) 成均館 全的, 兵曹 佐郞 을 거쳐 平康 縣監 으로 나갔다. 그 해에 明나라 使臣 정응태를 만나 日本과의 和議를 議論한 백유함 (白惟咸)을 糾彈하여 流配시켰다.

1598年 (宣祖 31) 司諫院 정언 을 거쳐, 黃海·平安 巡檢 海運 御史(黃海平安巡檢海運御史)로서 刷馬 弊端을 일으켰다는 理由를 들어 義州 府尹 黃進을 彈劾하였다. 다시 돌아와 1598年 世子侍講院에 들어가 司書로서 광해군 을 만났다. 그해에 司憲府 地平, 世子侍講院文學, 弘文館副修撰을 거쳐, 다시 司諫院正言이 되었다가 司諫院獻納, 副校理, 修撰 等을 지냈다.

1599年(宣祖 32) 李朝 正郞 이 되었고, 成均館戰績, 文學, 體察使從事官, 李朝正郞을 거쳤다. 以後 여러 벼슬을 거쳐 1608年 重試(重試)에 장원 合格했으며, 吏曹正郞 等을 지냈다. 宣祖가 晩年에 영창大君을 後繼者로 삼으려 할 때, 小북 의 領議政 류영경 이 이에 贊成瑕疵, 李爾瞻은 對北 의 領袖로서 그의 스승인 정인홍 과 함께 靈境을 彈劾하는 한便 광해군(光海君:東宮)李 적합함을 主張하다가 宣祖의 노여움을 사서 원拜領(遠配令)이 그에게 내려졌었다. 그러나, 宣祖가 갑자기 죽고 光海君이 卽位하자, 李爾瞻은 復歸되어 禮曹 判書 大提學 을 兼任하였고 昇進되어 광창軍에 皮封되었다. 以後 過去를 主管하게 된 因緣으로 許筠 等을 調整에 끌어들여 權力의 기틀을 다져 支持 勢力을 넓혔다.

政治 活動 [ 編輯 ]

權力 참취(僭取) 過程 [ 編輯 ]

思想的으로는, 南冥 曺植 의 影響을 받아 南冥의 弟子였던 정인홍 의 門下에 出入했으며, 以後 그와 意氣投合하여 現實政治에 强勁하게 對處하였다. 1608年 宣祖의 後繼者 問題로 對北派 소북파 가 서로 다툴 때에 對北派 의 指導者로서 광해군 便에 섰다.

宣祖 는 庶子 出身에 房繼承通의 劣等感에 시달리다가 晩年에 인목왕후 와 再婚하여 赤字를 보았다. 宣祖 가 晩年에 광해군 을 廢世子하고 어린 영창대군 을 새로 世子로 세우려 할 때, 小북人 領議政 유영경 이 이에 贊成瑕疵, 李爾瞻은 정인홍 과 함께 유영경 을 彈劾하였고, 광해군 이 世子로 적합함을 主張하였다. 이것이 宣祖 의 노여움을 사서 甲山部 流配 命令을 받았다. [2] 宣祖는 그를 정인홍 과 함께 귀양 보내라는 御命까지 내렸는데, 그해 2月 宣祖 가 瞥眼間 죽고 광해군 이 卽位하자 罪가 풀렸다. 광해군 의 卽位로 인하여 宣祖 死後에 인목왕후 에게 영창大君을 卽位시키고 攝政할 것을 慫慂했던 유영경 이 처형당하였고 그 一黨인 소북이 크게 慘禍를 입었다.

宣祖가 飮食을 먹다 갑자기 死亡할 當時 尙宮 金介屎 等이 水剌를 올리는데 參與했는데, 이 때문에 當時 李爾瞻이 尙宮 金介屎 等과 함께 先祖를 毒殺했다는 所聞이 퍼졌다. 仁祖 反正 直後 西人 이 光海君의 罪目에 宣祖 毒殺을 追加해야 한다는 輿論이 나왔지만 西人 內部에서도 터무니없다고 反對하기도 했다.

광해군 登極 以後 [ 編輯 ]

소북파 肅淸과 執權 初期 [ 編輯 ]

1608年 兵曹正郞으로 復權된 以後 弘文館副校理, 弘文館應敎, 司諫院사간, 弘文館應敎, 司憲府執義, 弘文館前漢, 議政府사인 等을 거쳐서 成均館四星(成均館司成)으로 在職 中 重視(重試)에 甲과(甲科) 壯元으로 及第하였다. 光海君 卽位 直後 그는 土役論(討逆論)을 主張하여 소북파 유영경 等의 處斷을 主張했다.

1608年 광해군 登極 後 李爾瞻은 王權에 威脅되거나 反對勢力인 유영경 , 임해군 等을 肅淸하였다. 이산해 等과 함께 유영경 一派를 肅淸한 功勞로 守城決議糞蟲 정운공新 (輸誠結義奮忠定運定運功臣) 1等에 책록되었다. 1609年 (光海君 1) 承政院 同副承旨가 되었다가 右副承旨, 左副承旨에 任命된 뒤 義州 府尹 으로 發令되었다. 1609年 (光海君 1) 임해군 陣을 逆賊으로 糾彈, 江華島 에 流配보내 圍籬安置(圍籬安置)韓 뒤 私私시켰다. 임해군 肅淸에 參與한 功勞로 效忠分의 翼社功臣 (效忠奮義翼社功臣) 3等에 錄勳되었다.

以後 司諫院 大司諫, 1611年(光海君 3) 弘文館 副提學, 吏曹參議, 兵曹參知, 大司成 等을 거쳐 광창群(廣昌君)에 皮封되었고 그를 功臣으로 冊錄하자는 推薦을 辭讓했다. 그러나 그의 勢力은 광해군 末期 무렵에는 王權을 威脅할 程度로 肥大化되어 버렸다.

1611年(光海君 3年) 陰曆 8月 2日, 그의 外孫女 朴氏가 世子嬪 正式 揀擇을 통해 王世子빈으로 揀擇되었다. [3] 이와 關聯하여 光海君의 特旨로 아버지 박자흥에게 6品의 官職이 祭需되고, [4] 祖父 박승종 에게는 崇政大夫(崇政大夫), 外祖父 이이첨에게는 嘉善大夫(嘉善大夫)가 除授되었다. [5]

李爾瞻은 광해군 이 世子嬪을 揀擇할 때 조국필 等과 함께 박자흥의 딸을 推薦하여 選拔하게 했다. 그런데 外孫女가 世子嬪이 된 뒤 世子嬪의 아버지이자 그의 사위인 박자흥 박자흥 의 아버지 박승종 은 光海君의 信任을 얻는 한便 유희분 等과 結託하여 李爾瞻을 牽制했다. 박승종 은 李爾瞻을 平常時 미워하여 유희분 과 손잡으면서 小북 으로 돌아섰다. 憤怒한 이이첨 은 光海君의 寵愛를 얻은 金介屎와 더 가깝게 지내고, 金介屎의 아버지와도 連絡하여 가깝게 지낸다. 1612年 (光海君 4) 司憲府 大司憲 兼 世子右副賓客(兼世子右副賓客)李 되었다.

김직재의 獄舍와 漆書의변, 金霽南, 영창대군 除去 [ 編輯 ]

1612年 (光海君 4) 김직재의 獄事 를 일으켜 순화군 의 兩者 진릉군 이태경(晋陵君 李泰慶)을 죽였다. 김직재의 獄事를 다스린 功勞로 분충병의결기 兄難功臣 (奮忠秉義決幾亨難功臣) 2等에 녹선되었다.

1613年 (光海君 5年) 癸丑獄事 를 일으키는데 參與하여 金霽南 영창대군 의 죽음에 關與하였다. 서양갑과 박응서 等을 推鞠하여 仁穆大妃 의 아버지 金霽南 (金悌男)李 永昌大君을 王으로 推戴하려 했다고 自白하게 하여 癸丑獄事(癸丑獄事)를 일으켰다. 이때 一部 儒林들은 영창大君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들어 死刑을 反對하는 한便, 그에게 非難을 쏟아냈다. 그해에 그는 崇祿大夫 行禮曹判書가 되어 春秋館 志士와 同志競演成均館社, 藝文館 提學 , 世子右副賓客을 兼職했다.

정원군 의 집에 王氣가 성하다, 인빈 金氏 의 墓가 明堂이다 하는 所聞이 돌자, 1615年 (光海君 7) 정원군과 가깝던 신경희 정원군 의 次男 능창군 奠을 王位에 擁立하려 했다는 告變이 들어왔다. 신경희 는 능창군 推戴 嫌疑로 義禁府 에서 國文을 받고 棍杖을 맞던 中 戕殺되었고, 능창군 江華島 로 流配되었다가 圍籬安置 된 뒤 목을 매 自殺했다. 이때부터 신경희 구굉 等은 金柳 , 李适 , 李貴 等과 손잡고 政變을 計劃하며, 남인 이원익 等을 祕密裏에 包攝한다.

1616年 行 禮曹 板書 로 在職 中 輔國崇祿大夫 (輔國崇祿大夫)로 昇進했으며, 內贍寺 製造, 大提學을 지낸 뒤 1617年 다시 禮曹 板書 가 되었다.

인목왕후 幽閉事件과 文廟 從事論難 前後 [ 編輯 ]

1616年부터 그는 정인홍 과 함께 폐모론을 主張하여, 1617年 仁穆大妃의 폐모론을 發議하고 廢母 論議를 主導하였다. 그런데 論議가 進行되면서 許筠 은 이이첨, 정인홍 보다도 더 仁穆大妃 廢母論에 앞장섰다.

朝廷의 論議 끝에 1618年 인목왕후 를 서궁(西宮)에 幽閉시켰다. 이 무렵 그의 專橫을 批判하는 成均館 儒生들의 上疏와 地方 儒林들의 上疏, 仁穆大妃 廢妃 反對가 빗발치기도 했다. 한便 그의 心腹 백대형(白大珩)李 서궁 으로 몰래 들어가 仁穆大妃 暗殺을 試圖했다가 失敗하고 逃走했다. 一角에서는 李爾瞻을 죽여야 한다는 上訴가 올라왔다. 이어 광창府院君(廣昌府院君)으로 封해졌다. 以後 西人 남인 은 立地가 좁아졌고 이들은 聯合하여 政變을 祈禱한다.

1618年 判義禁府事, 禮曹判書, 藥房提調, 1619年 大提學 을 거쳐 1620年 다시 禮曹判書가 되었다. 앞서 잠깐 言及했듯이, 그는 光海君의 幇助 아래 莫强한 勢를 構築하였으며, 이 過程에서 反對派로부터 惡名을 떨쳐 가고 있었다. 百姓들은 그와 함께 유희분 , 박승종 을 일컬어 三蒼(三昌)이라 불렀는데, 이는 세 名의 府院君號(府原君號)에 共通的으로 窓(昌) 字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1620年 에 禮曹判書 자리에서 물러난 뒤로는 右贊成이 되었다. 以後 三政丞( 右議政 , 左議政 , 領議政 )에 오를 수 있었지만 辭讓했다.

1620年 中國 使臣을 맞이하는 遠接使가 되어 明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李滉 , 이언적 文廟 에 從事하는 것을 두고, 思想的으로 南冥學派 인 그가 정인홍 과 함께 反對하여 큰 波紋을 일으켰다. 以後 1621年 부터 李滉 , 이언적 의 文廟종사를 反對한 것과, 廢母論을 主動한 것에 對한 士林 의 上疏와 流配, 彈劾 等이 繼續되었으며, 그의 死後에도 嶺南 士林을 中心으로 近世에 이르기까지 批判과 指彈의 對象이 되었다.

한便 광해군 號牌法 을 다시 導入하려고 하자 그는 이를 反對하여 中斷시켰다. 1621年 科擧에 及第한 박안제(朴安悌)가 官職에 任用되지 못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를 疑心하였다.

許筠과의 葛藤 및 許筠 除去 [ 編輯 ]

1617年 기준격 等은 繼續 上疏를 올려 許筠 이 逆謀를 꾸민다고 攻擊한다. 1618年 1月 기준격은 繼續 上疏를 올려 그를 攻擊했고, 1618年 1月 左參贊이 된 許筠 은 自身이 逆謀와 無關하다며 解明을 한다. 許筠 은 小北의 領袖이자 領議政 기자헌 (奇自獻)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許筠 은 이이첨, 정인홍 보다도 더 仁穆大妃 廢母論에 앞장섰는데, 이 때문에 北人 內에서도 廢母에 反對하는 기자헌 과 隨時로 摩擦을 빚었다. [6] 이 일로 기자헌과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廢母에 反對한 기자헌 이 귀양에 處해지고 吉州로 流配되자, 기자헌 의 아들 기준격은 許筠 이 背後 操縱한 것으로 疑心, 父親을 救하기 위해 祕密上疏를 올리고 “許筠이 逆謀를 꾸몄다”고 主張하면서 波瀾이 일어난다. 바로 許筠도 上疏를 올려 自身은 아무 關聯이 없음을 辨明하였다.

結局 그해 2月 右議政 한효순 等이 2品 以上의 代身들을 이끌고 許筠과 奇自獻을 推鞠하고 問題를 終結시킬 것을 請한다. 許筠도 自身을 辯護하는 맞床소를 올리는데 光海君은 웬일인지 眞相을 調査하지 않고 묻어두었다. 그 渦中에 許筠은 李爾瞻과 關係가 멀어지게 된다 [6] . 광해군 이 世子嬪을 揀擇하려 할 때 許筠 도 自身의 딸을 世子嬪으로 만들려 했고 이때부터 許筠과의 사이가 틀어졌다. 이 무렵 李爾瞻의 外孫女인 世子嬪 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許筠 의 딸은 煬帝(世子의 後宮)로 內定되었다. [6] 許筠의 딸은 昭訓 이 되어 入闕하였다. 許筠 에 對한 李爾瞻의 境界는 한層 强化되었고, 그를 除去하기로 祈禱한다.

그런데 李爾瞻이 許筠을 除去 對象으로 바라보는 中에 光海君 10年(1618) 8月10日 南大門에 “暴惡한 임금을 치러 河南 大將軍인 鄭아무개가 곧 온다…”는 內容의 壁西가 붙는 事件이 發生한다. 1618年 8月 南大門 檄文은 許筠의 心腹 玄應民(玄應旻)李 붙였다고 한다. 이를 契機로 許筠 을 비롯한 許筠의 心腹들을 잡아다가 國文 끝에 處刑한다.

仁祖 反正과 最後 [ 編輯 ]

仁祖 反正 이 일어났을 當時, 光海君이 反正 主導勢力을 처음에는 李爾瞻의 所行이라고 誤解할 程度로 그 歲는 猛威를 떨쳤으나, 1623年 (光海君 15) 3月 13日 西人 李貴 , 김자점 , 김류 , 李适 等이 능양군 과 함께 叛亂을 謀議하고 大闕을 襲擊한 仁祖反正 의 成功으로, 李爾瞻은 失脚하였고, 家族들을 이끌고 利川 을 거쳐 嶺南地方으로 도망가던 中 光州 이보현(利甫峴)에서 官軍 에 逮捕되어 正祖, 尹訒, 이위경, 이대엽, 이홍엽, 이원엽 等과 함께 鐵物廛(鐵物廛) 앞길에서 [7] 斬刑(死刑) 되었다. 享年 64歲.

이때 그의 心腹으로 알려진 이위경(李偉卿), 正祖(鄭造) 3兄弟, 채겸길(蔡謙吉), 백대형(白大珩), 이정원(李挺元), 박종주(朴宗胄) 等은 모두 붙잡혀 처형당하였고, 그의 心腹으로 指目된 16名은 車裂을, 64名은 福州(伏誅)되었다. 그밖에 그의 側近으로 指目된 人物들은 義禁府 刑曹 에 投獄되었다가 이듬해 李适의 亂 當時 모두 處刑된다. [8] 그의 아들 이원엽, 이홍엽, 이대엽, 사위 박자흥 等도 모두 처형당하여 先代 遁村 이집 으로부터 그의 아들 臺까지 10代 동안 한番도 빠짐없이 연이어 大科에 及第한 來歷의 그의 家門은 이때 滅門之禍를 當했다.

事後 [ 編輯 ]

李爾瞻과 정인홍 이 處刑되어 對北派 는 沒落했고, 그는 1910年 大韓帝國 이 滅亡할 때까지 惡의 化身으로 指彈받았다. 그의 著書와 作品, 文集들은 西人 (西人)과 남인 系列에 依해 湮滅, 遺失되거나 燒却되었다. 1908年 (隆熙 2年) 그의 스승 정인홍 이 復權되면서 再評價 輿論이 나타나기 始作했다.

家族 關係 [ 編輯 ]

이정립 남인 系列로 간 이덕형 은 李爾瞻의 12村아우였다. 며느리 驪州 李氏는 이지완의 딸로, 星湖 利益 의 堂姑母이자, 磻溪 유형원 의 姨母가 된다.

關聯 作品 [ 編輯 ]

드라마 [ 編輯 ]

評價 [ 編輯 ]

仁祖反正 以前에 이미 士林으로부터는 明나라만을 섬기지 않고 淸나라와의 等距離 外交韓 點을 始作으로 廢母論을 主導한 點, 光海君으로 하여금 임해군 , 능창군 , 영창대군 을 師事한 것, 李滉 , 이언적 을 文廟에 從事하는 것에 對해 정인홍 과 함께 反對했던 事實로 否定的인 輿論과 批判의 視角이 存在했다. 以後 仁祖反正 以後에는 逆賊으로 매도당해왔으나, 1908年 그의 스승이였던 정인홍 이 復權되고, 1980年 代 以後 荒淫無道한 暴君으로 罵倒되어왔던 광해군 의 再評價 兆朕이 있으면서 그의 行爲 亦是 再評價되고 있다. 一方的인 奸臣, 惡黨, 惡因으로 매도당해왔으나 反對派를 除去하여 壬辰倭亂 後 戰亂 收拾을 위해 現實政治에 强勁하게 對應하여 光海君의 王權을 强化하려는 行動으로 解釋되고 있다.

기타 [ 編輯 ]

仁祖反正 以後 西人 이나 남인 에서 그를 天性的으로 一方的인 惡人으로 罵倒한 것과는 다르게, 李爾瞻은 스스로 自身의 限界를 認定하고, 自身이 偏向된 視角도 있었음을 認定하기도 했다.

南 通判 不용천 送別詩 / 남이흥 通判의 龍泉 赴任 送別詩



내 性品은 편벽됨이 많은데,
그대의 材質은 唯獨 높이 뛰어났네
城(城)을 지킴에는 큰 節槪를 함께 期約하였기로.
富를 나누는 데는 번거로움을 덜었네
後日을 기다려 序奏가 感化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니
어찌 北쪽 오랑캐의 驕慢을 근심하리요. ...以下 中略...

義州府尹으로 在職 中 義州판관에서 湧泉으로 轉勤가는 남이흥 에게 써준 詩 韓脩는 남이흥이 保存하고 있다가 後孫들에게 傳하였다.

漢陰 李德馨과의 關係 [ 編輯 ]

오성과 한음으로 有名한 한음 이덕형 은 그의 親族으로, 이덕형 이극균 의 5代孫이고, 李爾瞻은 이극돈 의 5代孫이다. [9] 그리고 李克墩이 이극균의 親兄으로써, 이들 兄弟는 各各 이인손 의 넷째 아들과 다섯째 아들이었다.

신경진과의 關係 [ 編輯 ]

申砬 의 딸과 結婚한 아들 이대엽을 통해 仁祖反正 때의 신경진, 신경희 等과는 妻男매부지간이다.

各州 [ 編輯 ]

  1. 世祖의 御眞은 몇番의 茅沙를 하였으며, 1928年 以堂 金殷鎬가 模寫한 模寫本이 現在 傳한다.
  2. [네이버 知識百科] 이이첨 [李爾瞻] (두산百科 頭皮디아, 두산百科). ....宣祖가 晩年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後繼로 삼으려 할 때 小北(小北)의 領議政 유영경(柳永慶)이 이에 贊成瑕疵,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東宮(東宮)인 광해군(光海君)의 적합함을 主張하다가 宣祖의 노여움을 사서 원拜領(遠配令)이 내려졌다. 하지만 宣祖가 갑자기 昇遐하고 光海君이 卽位하자 禮曹判書에 올랐다.
  3. 《朝鮮王朝實錄》光海君日記 中草本 44卷, 광해 3年 8月 2日 記事 3番째記事
  4. 《朝鮮王朝實錄》光海君日記 中草本 44卷, 광해 3年 8月 23日 京仁 1番째記事
  5. 《朝鮮王朝實錄》光海君日記 中草本 49卷, 광해 4年 1月 15日 庚戌 6番째記事
  6. 正말 율도국(栗島國)을 세우려 했는가 - 한겨레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007年05月17日
  7. 韓國古典綜合DB 參照 "李爾瞻 等을 處刑할 것을 請하는 義禁府 燈의 界"
  8. 이때 仁穆大妃 廢母를 反對한 기자헌 도 投獄되었다가 함께 처형당한다.
  9. 寸數로는 12寸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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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