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炳基 (1818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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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炳基 (金炳冀, 1818年 ~ 1875年 )는 朝鮮 後期의 外戚이자 權臣이다. 字는 성존(聖存). 號는 사영(思穎). 諡號는 文獻(文獻)이며, 本貫은 新 安東 金氏 이다. 生父는 김영근(金泳根), 養아버지는 領議政 김좌근 (金左根). 雅號가 私營이라 사영대감 으로 불렸으며, 同名異人인 다른 여러 金炳基 와 區分을 위해 主로 射影 金炳基 로 불린다.

生涯 [ 編輯 ]

生父는 김창집 의 孫子 김성행(金省行)의 曾孫 김영근인데 9村숙이 되는 김조순 의 아들 김좌근 (金左根)의 養子가 되었다. 순원왕후 의 조카뻘이 된다. 1847年 庭試文科에 丙科로 及第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鄭3品 堂下官 通訓大夫 (通訓大夫)로 昇進, 1848年 私服市井 (司僕寺正)이 되었다. 1849年 哲宗 卽位 後, 다시 昇進하여 성균대사성 이 된 뒤에 종2품으로 거듭 昇進, 禮曹參判 (禮曹參判), 吏曹參判 (吏曹參判] ) 等을 지냈다.

그 뒤 거듭 昇進하여 1853年 摠戎使 (摠戎使), 訓鍊大將 , 吏曹判書 (吏曹判書)를 거쳐 禮曹判書 (禮曹判書), 刑曹判書 (刑曹判書), 工曹判書 (工曹判書) 等 各組의 判書職을 두루 歷任하고, 1862年 判敦寧府事로 轉任되었다. 그 뒤 從一品 議政府 左贊成 (左贊成)으로 있을 때, 1863年 12月 哲宗 이 急逝하자 조大妃와 後繼問題를 놓고 葛藤하였으며, 高宗 1864年 흥선大院君 이 攝政으로 執權하자 광주부留守로 左遷되었다.

金炳冀는 이하전 사사와 이세보 의 流配 以後 흥선군 신정왕후 와 오랫동안 만났다는 것을 눈치채고 흥선군에게 王位 繼承權을 保障하겠다고 提案하였다. 金炳冀는 흥선군을 蔑視하면서도 그를 疑心했다. 그러나 흥선군은 끝까지 바보行世를 하며, 長男 이재면 이 不足한데 官職이나 알아봐 달라고 付託했다. 哲宗의 臨終 後 그는 趙大妃의 王位 繼承權者 指目을 反對했지만 흥선군의 둘째 아들로 落點됐다. 興宣大院君이 執權한 以後 外職을 轉轉하다가, 다시 要職에 登用되었으며 다시 議政府 左贊成 (左讚成))에 이르렀다.

安東金氏 勢道가 한창일 때 沒落王族으로 破落戶生活을 하던 흥선大院君 過度 交流하며 어려움에 處했던 興宣大院君을 財政的으로 도운 關係로, 뒷날 安東金氏 一族이 大部分 肅淸되었을 때에도 살아남아 官職에 繼續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平素 흥선군을 無視하여 世間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다가, 김동인 유주현 의 小說 《 大院君 》에서는 흥선군의 主要 政敵이자, 흥선군을 面駁하는 役割로 描寫된다. 文集에 《 사영집 》이 있다.

기타 [ 編輯 ]

尹孝貞 흥선군 이 그에게 請託을 했다 한다. 흥선군 은 일부러 金炳冀를 찾아가 아들 이재면 文科 合格을 請託했는데, 金炳冀는 마음 속으로는 沒知覺함과 卑劣함을 비웃으며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다. [1] 흥선군은 똑같이 金炳冀의 四寸인 남병철에게도 똑같이 아들의 等과 合格을 請託하니, 南秉哲은 몹시 憤慨했다. 王室의 金枝玉葉인데, 이렇게 초라해진 形便으로 아들의 登科를 請託하니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1] 그런데 박제형 近世朝鮮情感 에는 흥선군을 대놓고 蔑視하던 人物의 한 사람으로 南秉哲을 指目했다.

興宣大院君은 일부러 김좌근 에게 養아버지라 하면서 그에게도 用돈을 얻어 썼고, 金炳冀는 그를 甚하게 無視했다 한다. 그는 金炳冀의 잔치 집에 갔다가 飮食을 먹고는 일부러 嘔逆질을 하다가 吐해내고 쓰러졌는데, 金炳冀는 飮食을 삼켜보았다. 그러자 일어나서는 장난에 過敏反應한다고 答했다. 金炳冀는 憤怒했고 한동안 을 마셨다 한다. 이는 김동인 雲峴宮의 봄 , 유주현 大院君 小說에도 그대로 言及되었다.

다른 安東金氏 人物들은 흥선군을 驅迫하거나 쫓아냈지만 金左根은 쫓아내지 않고 귀찮아하거나 若干의 돈을 주어 내보냈다. 生計가 궁했던 흥선군은 매란국죽 等을 그려서 兩班 士大夫家와 中人家門, 譯官 等에게 팔았는데, 中人과 譯官들을 통해 석波瀾의 名聲이 淸나라 日本 에도 알려졌다. 金炳冀는 흥선군의 蘭草火를 購入하였다. 當時 다른 이들도 흥선군을 無視했고 심의면 等은 露骨的으로 宮도령이라 했는데도, 金炳冀는 興宣大院君의 主敵의 한 사람으로 藝術作品에 描寫되었다. 金炳冀는 1873年 명성황후 흥선大院君 을 逐出하려 하자 그대로 加擔했다.

흥선군 執權 反對 [ 編輯 ]

高宗이 卽位하게 되자 金左根과 金炳冀는 興宣大院君이 執政(執政)하는 데 反對했다. [2] 그러나 조大妃는 김좌근 等의 反撥을 무릅쓰고 흥선군의 政治 參與를 公式化했다. [2]

家族 關係 [ 編輯 ]

  • 生祖父 : 김복순(金復淳)
    • 生父 : 김영근(金泳根)
  • 養祖父 : 김조순(金祖淳)
    • 養父 : 김좌근 (金左根)
    • 養母 : 윤치勝(尹致升)의 딸
      • 否認 : 남구순(南九淳)의 딸
      • 아들 : 김용균(金用均)

關聯 文化財 [ 編輯 ]

各州 [ 編輯 ]

  1. 尹孝貞, 《大韓帝國아 亡해라: 百姓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亡國史》 (다산초당, 2010) 167페이지
  2. 任用한, 《亂世에 길을 찾다》 (박광희 驛, 施工出版社, 2009) 284페이지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