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藥물中毒서 脫出 希望 있으면 어렵지 않아요|주간동아

週刊東亞 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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藥물中毒서 脫出 希望 있으면 어렵지 않아요

第2回 서울 다르크 포럼, 日本人 40餘 名과 韓國人 20餘 名 ‘아픔 治癒’

  • 이혜민 記者 behappy@donga.com

    入力 2012-12-17 1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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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물중독서 탈출 희망 있으면 어렵지 않아요

    12月 8日 서울유스호스텔에서 열린 서울 다르크 포럼.

    日本 藥물中毒者들이 韓國 藥물中毒者들을 도우려고 特別한 ‘모임’을 가졌다. 12月 8日 서울유스호스텔에서 열린 第2回 서울 다르크 포럼에 參席한 日本 藥물中毒者들이 藥물, 卽 痲藥이나 向精神性醫藥品에 對한 中毒 治癒 過程을 들려주며 民間 社會復歸센터의 重要性을 說破한 것. 이 자리에는 慈悲를 들여 來韓한 日本 藥물中毒者와 그 家族 40餘 名, 韓國 藥물中毒者 20餘 名이 모였다.

    日本에서는 藥물中毒者 相當數가 監獄에서 社會로 나오기 前 民間 社會復歸센터 ‘다르크(DARC·Drug Addiction Rehabilitation Center)’에서 生活하며 再社會化를 거친다. 藥물中毒者들은 하루에 세 番 理想 生活改善 미팅에 參與하는데, 이 자리에서 自身의 아픔을 果敢없이 드러내면 먼저 中毒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支持를 보내면서 살아갈 힘을 준다. 日本 다르크는 1985年 開所海 現在 70餘 個로 擴大됐고, 800餘 名이 머물며 正常的인 삶을 꿈꾼다.

    反面 韓國에는 藥물中毒者를 돕는 民間 社會復歸센터가 드물다. 韓國 다르크는 6月 서울 陽川區 한 多世帶住宅에 開所海 7月 첫 入所者를 받았다. 記者가 7月 現場을 訪問했을 때 日本 다르크에서 마쓰우라 요시아키(韓國 다르크 代表) 氏와 交代로 訪問하는 스태프 유키(假名·34) 氏가 韓國인 스태프 1名, 藥물中毒者 1名과 함께 起居하며 프로그램을 進行하고 있었다.

    王따에서 벗어나려고 藥물 손대

    포럼은 參與者들이 한 名 한 名 壇上에 올라 自己 經驗談을 들려주면 通譯이 그 內容을 傳達하는 式으로 進行됐다. 日本 ‘先輩’들이 韓國 ‘後輩’들에게 들려준 希望의 메시지를 整理해본다.



    A(韓國人) 韓國 다르크가 開所한 지 8個月 程度 됐다. 25年 동안 中毒者로 살았고 10年 間 精神病院行 再活센터 等에서 治療를 받았다. 그동안 家族, 健康, 親舊 모두를 잃었다. 2010年 日本 다르크에서 回復한 依存自家 다른 依存者들을 引導하는 시스템을 보고 效果的이라고 생각해 韓國에 導入하는 데 앞장섰다. 韓國에는 藥물中毒者를 위한 再活 施設이 全無하다. 只今도 작은 房 안에서 홀로 宿食을 解決하며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내 周邊에도 그런 사람이 있는데 이들이 回復할 수 없는 길로 갈까 봐 걱정된다. 48世는 큰 꿈을 꾸기에는 늦은 나이다. 하지만 나는 같은 處地에 놓인 사람들을 다시 살아가게 하고 싶다. 다음 週에 日本에 가서 再敎育을 받은 뒤 回復하고 싶은 분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傳하고 싶다.

    B(日本人) 사랑하는 아내, 中學校 2學年인 아들과 살고 있다. 교토에 있는 다르크에서 運轉을 가르치는 스태프로 일한다. 在日韓國人人 데다 어머니가 술집에서 일하다 나를 낳아 왕따를 當했다. 18歲 때 일터에서 同僚가 藥물을 勸했는데, 拒絶하면 업신여기고 따돌릴까 봐 손을 댔다. 그때는 同僚들이 나를 따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24歲에 처음 精神病院에 갔다. 裸體로 다니거나 女性 스타킹을 蒐集하는 일이 反復됐기 때문에 日常生活이 어려웠다. 그곳에서 다르크를 紹介받았는데, 모임에서 率直하게 내 얘기를 하자 사람들이 拍手를 치면서 激勵해줬다. 예전에는 ‘오늘만’이라도 즐기자며 藥물을 했지만, 只今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만’이라도 眞心으로 잘 보내고 싶다. 더는 고통스럽게 살고 싶지 않다.

    C(韓國人) 中毒者들에게 痲藥이 좋지 않다는 메시지를 傳하면서 나 自身이 좋아졌다. 남들에게 痲藥을 하지 마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良心上 내가 할 수는 없지 않나. 내 몸은 痲藥 後遺症으로 망가졌다. 3年 동안 18番 手術했고, 허리가 아파서 木발을 짚고 다닌다. 맑은 精神으로 사는 게 얼마나 感謝한 일인가.

    D(日本人) 中毒됐을 때는 飮食을 넘길 수 없었는데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어 기뻤다. 도쿄 貧民街에서 살던 10歲 때 洞네 兄이 藥물을 勸해 始作했다. 藥에 醉한 狀態로 살았기 때문에 日本語를 읽고 쓸 줄 모른다. 함께 藥물을 하던 女子가 두 番 妊娠中絶手術을 받고 세 番째 妊娠했을 때 結婚했다. 귀여운 딸이 태어나 覺悟를 다졌지만, 더 熱心히 일하려고 同僚와 覺醒劑를 服用했다. 처음에는 에너지가 더 생기는 것 같았지만 依存度가 甚해져 일을 할 수 없었다. 25歲에 精神病院에 간 뒤 다르크를 만났다. 바로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 24年 동안 藥物 없이 살고 있다. 이웃 反對로 다르크를 만드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只今은 定着해 50餘 名과 生活하고 있다. 돌아갈 때 金 50人分을 사 가야 한다(웃음).

    E(韓國人) 只今 55歲로, 2006年부터 혼자 산다. 平坦하게 살았지만 30歲 때 藥을 배운 뒤 競馬, 賭博에까지 손을 대 家庭이 네 番이나 깨졌다. 이제 그만 人生을 마무리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懦弱한 마음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病을 알려야 病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떠올리며 周邊 사람들에게 내 狀態를 알렸고, 支持를 받고 있다. 지난 1年 동안 努力해서 헤어졌던 누나, 아들, 며느리를 만날 수 있었다. 家族을 생각하며 ‘斷藥’을 하겠다. 오늘 韓國 中毒者들을 돕기 위해 오신 日本분들에게 敬意를 표한다.

    약물중독서 탈출 희망 있으면 어렵지 않아요

    올 7月 서울 다르크 첫 入所者가(가운데) 相談을 받고 있다.

    怪力으로 사람 急死시켜

    F(日本人 藥물中毒者 어머니) 아들이 高等學校를 다니면서 藥물을 했고, 結局 大學을 그만뒀다. 正常的인 社會生活이 不可能한데도 精神病院에서 異相 所見을 듣지 못했다. 다만 그곳에서 “藥물中毒에서 벗어나려면 家族이 變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1994年부터 一週日에 한 番씩 알코올中毒 再發防止를 돕는 家族모임에 나갔다. 그러다가 藥물中毒者 家族모임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 오사카에 모임을 만들었다. 더는 살아갈 理由가 없다고 絶望했지만 모임 德分에 아들과 關係가 좋아졌다. 아들을 評價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法을 배웠기 때문이다.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서로 돕는 것이 重要하다고 본다.

    G(日本人) 19歲 때 親舊가 勸誘해 藥물을 始作했다. 覺醒劑 한 放이면 怪力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람을 때려 죽였다. 罪責感이 들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藥물에 빠지는 것뿐이었다. 父母님을 威脅해 돈을 뜯어냈고, 14年 동안 藥물에 빠져 살았다. 女子 스타킹을 얼굴에 쓰고 있는 것을 보고 及其也 어머니가 警察에 申告했다. 監獄에서 나온 後 다르크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새끼손가락이 없는 사람도 있고 온몸에 文身을 새긴 사람도 많아서 처음엔 무섭고 萎縮感度 들었지만, 女子 팬티를 훔친 것과 같은 羞恥스러운 經驗에도 모두 깊이 共感해줬다. 그 德分에 率直히 말하는 것의 重要性을 알았고, 17年 동안 藥物을 끊을 수 있었다. 우리 마을 隣近에서 地震이 일어나 2萬餘 名이 죽었는데, 죽은 사람 家族들이 苦痛을 못 잊고 藥물이나 알코올 等에 依存하면서 살까 봐 걱정이다.

    H(日本人) 韓國에도 우리 같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일을 하면서 幸福하게 사는 사람이 正말 적다는 걸 느낀다. 日本에서 韓國 다르크를 위한 募金運動을 할 때 많은 사람이 疑懼心을 보였지만 도와준 사람도 많아서 3000萬 원을 모을 수 있었다. 藥물中毒者들은 自身을 支援해준 누군가의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 重要하다.

    인터뷰Ⅰ다르크 開所子 콘도 츠네오 氏

    “回復하고 싶은 누구에게나 다르크 開放”


    약물중독서 탈출 희망 있으면 어렵지 않아요
    다르크는 現在 日本에 70餘 個가 있으며 필리핀, 터키, 韓國에도 만들어졌다. 遊覽船 乘務員으로 일했던 콘도 츠네오(71·寫眞) 氏는 28歲 때 甚한 齒痛을 잠재우려고 藥물을 始作했다. 하지만 그 後 9年 동안 藥물中毒者로 살면서 家庭이 解體됐고, 1975年 及其也 精神病院에 入院했다. 그 後 다르크를 만들었다.

    사람은 왜 藥물에 中毒되나.

    “藥물中毒은 交通事故와 같다. 나만 해도 스트레스로 齒痛이 甚했는데, 偶然히 藥물에 손을 댔다. 또 다른 키워드는 아픔이다. 父母 사이가 나쁜데 말하지 못하고, 暴力을 經驗하면서도 抵抗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아픔을 治癒하고 依存할 수 있는 뭔가를 찾다가 藥物에 쉽게 中毒되는 것 같다.”

    다르크가 必要한 理由는 뭔가.

    “藥물을 끊으려고 相談을 받고자 했지만, 그럴 만한 곳이 없었다. 苦悶하다 美國 미네소타에 있는 헤즈르텐이라는 大規模 施設을 롤 모델 삼아 共同體를 만들었을 뿐이다. 처음 다르크를 만들겠다고 했을 땐 支持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도 이 모임을 만들어야 했다. 한 달 만에 社會와 家庭에서 버려진 사람 中 藥物中毒者가 될 만한 10名이 모였지만, 結局 7名은 脫退하고 反社會的으로 보이는 3名만 남았다. 只今도 다르크에는 反社會的으로 보이는 사람이 많은데, 이들의 回復 可能性이 더 높다.”

    回復 確率은 어느 程度인가.

    “3割 程度다. 自殺하는 사람도 많고 藥물中毒이 더 甚해져 結局 죽는 사람이 더 많은 게 現實이다. 많은 사람이 回復되길 바라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게 힘들었지만 只今은 中毒者들을 돕겠다는 마음으로만 다가간다. 다르크 構成員들은 오픈 마인드, 停職, 回復 可能性을 갖는 것이 重要하다. 우리 組織은 逆피라미드 構造다. 오늘 다르크를 찾아온 사람이 가장 貴하다. 나는 누군가를 이끌고 있지 않다. 다 함께 갈 뿐이다.”

    다르크 規則은 뭔가.

    “共同生活을 하며 하루에 미팅을 세 番 以上 한다. 藥物中毒者가 相對方 말을 曲解하지 않으려면 3個月이란 時間이 必要하므로 이 期間에는 일을 시키지 않는다. 最小 1年 동안 함께 산다. 다르크에는 高齡者, 無職者, 집 없는 사람이 長期間 머물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섹스, 痲藥, 賭博, 술 等을 禁止한다. 집과 컵, 藥물中毒者만 있으면 어디에든 만들 수 있는 것이 다르크다. 그래서 다르크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自己 經驗을 나누려고 여러 곳에 다르크를 만들었다. 韓國 다르크度 組城南 乙地帶 乙支中毒硏究所長과 아이디어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始作됐다. 運營費는 政府補助金, 後援金 等으로 마련하며, 모임 스태프는 忍耐心이 剛한 藥물中毒 治癒者들로 構成한다.”

    다르크가 持續되는 힘은 뭔가.

    “나에겐 앞날을 計劃할 能力이 없다. 앞일을 생각했더라면 只今처럼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月給 12萬 엔을 받으면서 13萬 엔짜리 月貰집을 빌려 다르크를 始作했다. 社會는 藥물中毒者 앞날을 걱정하면서도 리스크 때문에 支援을 망설인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藥물에 中毒되지 않으리라는 保障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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