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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뜨면 코스 생각 유별나게 뛰고 또 뛰었다|주간동아

週刊東亞 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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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뜨면 코스 생각 유별나게 뛰고 또 뛰었다

  • 김원곤 서울대병원 胸部外科 敎授 wongon@plaza.snu.ac.kr

    入力 2012-12-17 09: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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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뜨면 코스 생각 유별나게 뛰고 또 뛰었다

    김원곤 敎授의 달리기 記錄 메모.

    “健康을 위해서는 適切한 有酸素運動이 必要하다”는 말은 이제 常識 中 常識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暫時 눈을 돌려 사람들을 觀察하노라면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有酸素運動의 效果를 얻으려고 熱心히 뛰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굳이 陸上 트랙이 아니더라도 都心 곳곳에 造成된 散策路와 全國에 散在한 헬스클럽 러닝머신 위에서도 每日 많은 사람이 아침저녁 가리지 않고 熱心히 뛴다. 山에서도 뛰고 바닷가에서도 뛴다. 甚至於 出退勤도 뛰어서 解決하는 사람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야말로 ‘길이 있는 곳에 뜻이 있다’가 아니라 ‘길이 있는 곳에 달리기가 있’는 世上이 된 셈이다. 여기에 달리기와 目的을 같이하는 걷기나 自轉車 타기까지 包含하면 그야말로 男女老少를 莫論하고 全 國民이 길을 걷고 달리는 世上이 펼쳐진 것이다.

    ‘健康을 위해 달려라’ 新鮮한 衝擊

    그런데 오늘날에는 當然視되는 이러한 光景이 20~30餘 年 前만 해도 매우 生疏한 風景 가운데 하나였다. 中年 男子가 運動服을 입고 거리를 뛰어다닌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기껏 作心하고 나서본들 周圍 사람들로부터 健康이나 챙기려고 발버둥치는 좀스러운 사람으로 認識되기 일쑤였다. 健康한 사람은 健康하기에 運動을 輕視했고, 高血壓이나 心臟病 같은 慢性疾患으로 苦生하는 사람은 마치 運動이 自身의 生命을 威脅하는 가장 큰 敵인 양 敬遠視했던 것이다.

    내가 달리기에 빠진 건 1980年부터였다. 當時 軍醫官으로 陸軍 大尉 身分이던 나는 바로 그 前해인 1979年 初부터 80年 初까지 1年 동안 臨津閣 自由의 다리 너머에 있는 民統線 北쪽 最前方 地域 지오피(GOP·General Outpost, 北韓과 直接 對峙하는 最前方 地域)에서 勤務하다 部隊 移動으로 京畿 파주시 광탄면에 配置됐다.



    勿論 民統線 안이라고 해서 運動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活動이 制限的일 수밖에 없어 1年 동안 몸이 꽤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한창 혈기왕성하던 때라 如前히 前方인 페바(FEBA·Forward Edge of Battle Area, GOP 바로 後方인 戰鬪地域傳單) 地域이긴 했으나 어느 程度 자유로워진 環境이다 보니 運動을 통해 몸을 추스르고 싶었다.

    그런데 그즈음 偶然히 ‘健康을 위해 달려라’라는 題目의 冊을 보게 됐다. 워낙 오래前 일이고 飜譯本이어서 題目이 正確한지 모르겠고 原著者가 누구였는지도 記憶 나지 않지만, 當時 매우 新鮮한 衝擊을 받았던 것만은 確實하다.

    學窓 時節부터 運動을 좋아하긴 했으나 主로 格鬪技나 筋力運動에 置重했다. 오래달리기 같은 運動에는 별다른 能力이 없다고 생각해 특별한 關心이나 興味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그 冊을 읽고 나서 마치 開眼을 한 것처럼 달리기라는 運動이 새롭게 보이기 始作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을 再整備할 目的으로 本格的으로 運動을 始作하려던 次여서 當場 달리기를 해보기로 決定했다.

    元來 무언가를 한番 始作하면 무섭게 빠져드는 性格이라, 그렇게 始作한 달리기는 곧 全 部隊員 사이에서 심심찮은 所聞距離가 됐다. 달리기에 漸漸 더 强하게 沒入하면서 달리기 때문에 體重이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잘 달리려고 體重을 意圖的으로 줄이는 形局이 됐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業務時間 以後 어떤 코스를 뛸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日曜日은 밝은 대낮부터 自然과 呼吸하며 部隊 周圍 山길을 마음껏 뛰어다녔다. 어떤 날은 部隊가 있는 광탄에서 山길을 따라 精神없이 뛰어가다가 議政府 市內가 보이자 遑急히 뒤돌아 뛰어온 적도 있었다.

    以後 日就月將하는 달리기 實力과 아무리 뛰어도 좀처럼 숨이 가빠지지 않는 몸 狀態에 漸漸 鼓舞됐다. 그러나 社會의 全般的인 雰圍氣 탓이었겠지만 周圍 사람들은 나의 달리기 趣味를 쉽게 理解하지 못했다. 間或 休暇를 나가면 오랜만에 보는 親舊들조차 體重이 많이 빠진 나를 보고 무슨 큰 病치레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軍 除隊 後 인턴, 레지던트 時節에도 마찬가지였다. 自他가 公認하는 가장 어려운 修鍊 過程인 胸部外科 時節에도 잠을 犧牲하면서까지 한밤中이나 새벽이면 달리기를 위해 밖으로 나갔다.

    1982年 1月 通禁制度가 없어지자 이때다 싶어 새벽 두서너 時면 서울大病院에서 南山을 넘어 高速버스터미널까지 갔다오거나 구파발을 往復하기도 했다. 時間이 없을 때는 制限된 時間에 오래달리기 效果를 얻으려고 運動用品店에서 산 납주머니를 발목에 차고 病院 周邊을 달리기도 했다.

    30年間 持續한 달리기 履歷

    그 前해인 1981年 여름, 當時 春川 講院道立醫療院에 3個月間 派遣 나갔을 때는 日課가 끝나기만 하면 隨時로 春川 郊外 義王댐 頂上까지 달려갔다. 어느 日曜日엔 아예 作定하고 加平을 往復하기도 했다. 레지던트 時節엔 여름休暇를 濟州로 가서는 漢拏山 進入路에서부터 道路를 따라 길이 끝나는 地點까지 뛰어서 올라가는, 只今 생각하면 無謀하기까지 한 試圖도 했는데, 當時 專攻醫 사이에선 그런 내 行動이 傳說처럼 傳해졌다고 나중에 傳해 듣기도 했다.

    그런데 힘든 專攻의 過程 中에 제대로 자지도, 쉬지도 못하는 狀況에서 無理하게 運動을 繼續하자 亦是 問題가 發生했다. 어느 날 期於이 血尿를 본 것이다. 長距離 달리기 選手에게서 種種 나타나는 이른바 ‘달리기選手 血尿(runner’s hematuria)’가 생긴 것이다. 그렇지만 이틀 程度 쉬고 나자 血尿가 사라졌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달리기를 始作했다.

    當時 熾烈하게 달렸던 記錄을 簡單하게나마 남겨보고자 每日 달린 時間과 場所를 記錄해두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긴 歲月이 지나면서 大部分 流失되고 只今은 찢어진 노트 쪽紙 한 張만 그때 記憶을 되살려준다(사진 參照). 只今이라면 모든 記錄을 컴퓨터에 깔끔하게 貯藏하고 백업度 간간히 해두면 잃어버릴 危險性이 거의 없겠지만 當時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 當時 記錄을 보면, 달린 時間을 基準으로 大綱은 얼마나 달렸는지 알 수 있다. 납주머니를 차고 뛴 境遇에는 이를 따로 表示했고 달린 場所도 함께 記錄했는데, 例를 들어 寫眞에서 보면 왼쪽 熱에 있는 5月의 境遇, 서울 종로구 연건동에 있는 서울대病院 本院에서 勤務하던 때라 長距離 달리기가 可能한 성북동이나 정릉 쪽 스카이웨이에서 主로 뛰었다. 어떤 날은 運動量이 不足하다고 생각해 스카이웨이 始作點에서 八角亭까지 몇 番이고 往復했다. 오른쪽 熱은 6月 記錄인데 앞서 말한 대로 春川 派遣 期間으로 義菴댐까지 뛰어갔던 記錄들을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렇게 사뭇 ‘搖亂했던’ 나의 달리기 履歷은 그 後에도 中斷 없이 持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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