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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權力 嗅覺 남달랐던 總學生會 ‘꼬마 權力者’들|新東亞

돈·權力 嗅覺 남달랐던 總學生會 ‘꼬마 權力者’들

[奉達號 便宜店 칼럼] 우리는 ‘總學’에 왜 그리 목맸나

  • 奉達號 便宜店主

    runtokorea@gmail.com

    入力 2020-10-3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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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락치 誤認 暴行 事件… “人倫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 總學은 ‘財政的 빨대’이자 ‘大衆的 保護膜’

    • 祕資金은 一般의 想像을 넘어설 程度였다

    • 작은 權力 누리며 거짓말·權謀術數·陣營論理 실컷 익혀

    • 民主主義 惡用하는 온갖 못된 짓을 ‘그곳에서’ 배웠다

    1990년대 초반 대학가 집회 광경.  [동아DB]

    1990年代 初盤 大學街 集會 光景. [東亞DB]

    大學 時節 나는 總學生會長을 지냈다. 全大協, 한총련 議長을 수두룩이 輩出한, NL(民族解放)의 牙城으로 불리는 國立大學을 다녔다. 그런데 나는 NL系列 總學生會長이 아니었다. 우리 大學 歷史上 두 番째로 當選된 비(非)NL 系列 總學生會長이었다. 巷間에는 非運動圈 - 或은 半(反)運動圈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우리 스스로 그러한 呼稱을 眈眈잖게 여겼고, 우리 딴에는 ‘새로운 學生運動’을 主唱하긴 했으나 事實 내가 새로운 學生運動을 위해 뭘 했는지 모르겠다. 只今부터 回顧하는 이야기는 그 오래된 1年에 對한 한참 뒤늦은 告白이자 反省이다.

    프락치 誤認 暴行 事件

    1997年 5月 末 우리 大學에서 死亡 事件이 發生했다. 이튿날 地方紙 社會面에는 “술 醉한 사람이 캠퍼스에 쓰러져 있는 것을 發見해 應急室에 싣고 갔는데 이미 숨진 狀態였다”는 內容의 조그만 토막 記事가 실렸다. 그때만 해도 이 事件의 숨은 內幕을 사람들은 몰랐다. 次次 밝혀진즉, 그것은 우리 大學 總學生會 幹部들이 大學街를 徘徊하던 靑年 한 名을 公安機關 프락치로 指目해 集團으로 毆打해 死亡에 이르게 한 事件이었다. 被害者가 精神을 잃자 强制로 消化劑와 覺醒劑를 먹였는데, 그것이 祈禱에 걸려 窒息해 숨졌다. 

    世上을 놀라게 한 것은 加害者들이 被害者를 偶發的으로 때린 것이 아니라 몇 時間 동안 골房에 가둬놓고 拷問하듯 때렸다는 事實이고, 被害者가 죽자 眞實을 隱蔽하기 위해 對策 會議까지 열었다는 事實이며, 그렇게 보름이나 쉬쉬하다 나중에 알려졌다는 事實이다. 자칫 單純 變死 事件으로 處理될 수도 있었던 이 事件은 被害者 어머니가 “殊常한 電話가 걸려온 적 있다”고 警察에 알리면서 搜査가 始作됐다. 加害者들이 拷問 過程에 被害者 집에 電話를 걸어 우리 大學 在學生이 맞느냐고 確認해 본 것이다. 우리 大學으로서는 20年도 넘게 지나간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부끄럽고 부담스럽게 여길 것이다. 當時에도 學校 이미지가 나빠질까, 그것을 걱정했던 것 같다. 

    그해 봄은 殘忍했다. 6月, 한양대에서 또 死亡 事件이 發生했다. 이番에도 大學街를 徘徊하던 靑年을 프락치라며 잡아 毆打했다. 이 事件이 끔찍했던 理由는 暴行 痕跡을 남기지 않으려 被害者를 이불로 둘러싸 물까지 뿌려가며 때렸다는 事實이고, 亦是 밤새도록 가둬놓고 때렸다는 事實이며, 被害者의 코에 催淚彈 粉末을 집어넣어 拷問하면서 프락치라는 事實을 自白하라 다그쳤다는 事實이다. 南營洞 對共分室 風景이 果然 이러했을까. 너무 지나치지 않으냐는 周圍의 挽留에 한총련 祖國統一委員長이라는 사람이 “只今은 戰爭 狀況이다. 人倫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했다는 發言은 當時 言論을 통해 서글프게 膾炙됐다. 그들 또한 對策 會議를 열어 입을 맞추고 事件을 隱蔽하려 애썼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 前해인 1996年 8月, 연세대 事態가 있었다. 光復節을 맞아 이른바 統一 行事를 한다며 한총련 所屬 大學生들이 연세대에 大擧 集結했는데, 警察이 包圍하자 닷새假量 學校 建物을 占據하고 對峙한 事件이다. 6000名이 連行됐고 500名이 拘束됐다. 日本 學生運動의 崩壞를 象徵的으로 보여주는 도쿄大 야스다 講堂 事件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 事件으로 韓國 學生運動은 이미 組織力에 큰 打擊을 입은 狀態였는데, 이듬해 전남대와 한양대에서 잇따라 터진 民間人 暴行 致死 事件으로 道德性까지 무너지며 回復 不能 狀態로 치달았다. 그런 時局에 우리 大學에 半(反)한총련 總學生會가 誕生한 것은 적잖은 話題가 됐다. 조금 政治的으로 느껴지는 表現이긴 하지만 그만큼 우리 大學 ‘學友’들의 判斷이 賢明했다고 眞心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20年이 훌쩍 지난 只今 되돌아봐도 그런 選擇을 고맙게 여긴다. ‘고맙다’는 表現은 이럴 때 使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全南大뿐 아니다. 박근혜를 彈劾하고 치른 選擧처럼, 1997年 大學街 總學生會 選擧는 어쩌면 結果가 뻔한 選擧였는지도 모른다. 그해처럼 全國에 非運動圈-班運動卷 總學生會가 大擧 旗발을 꽂은 적도 없다. 後代에 歷史를 읽는 사람들은 그렇게 情勢의 흐름에 따라 식은 粥 먹는 式으로 當選됐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當事者인 우리로서는 그렇지 않았다. 더욱이 전남대는 그랬다. “富者 亡해도 3年은 간다”는 말처럼, 組織力과 道德性에 큰 打擊을 입었지만 아직 數百~數千 名을 거뜬히 動員할 수 있는 NL系列에 맞서 우리 選擧運動員은 기껏 스무 名 남짓이었다. 한 달 가까운 選擧運動 期間 同僚들이 겪은 苦痛과 受侮는 이루 말할 수 없을 程度였다. 

    그렇게 當選된 後 總學生會 運營은 쉬웠을까? 여기서부터 反省과 悔恨이 始作된다. 總學生會長 選擧는 이겼지만 單科大學 學生會는 候補조차 내놓지 못했기 때문에 於此彼 運命은 定해져 있지 않았나 싶다. 大統領을 당선시켰지만 國會는 極端的 與小野大 狀況이랄까. 總學生會 中央運營委員會에 參席하는 열댓 名假量 單科大學 學生會長 가운데 ‘우리 便’은 두세 名에 不過했고, NL은 3分의 2 以上 壓倒的 多數를 차지했다. 政治權으로 말하면 野黨이 改憲線까지 넉넉히 確保한 셈이다. 그 1年 내내 남아 있는 記憶은 지루한 싸움뿐이다.

    學生會館서 장사하려면 ‘運動圈 運營資金’ 대야

    1996년 이른바 ‘한총련 연세대 사태’. [동아DB]

    1996年 이른바 ‘한총련 연세대 事態’. [東亞DB]

    當然한 이야기지만, 票決에 對한 立場이 完全히 달랐다. 相對便은 數的 優位를 바탕으로 모든 事案을 票決로 밀어붙이려 하고, 우리는 어떻게든 票決을 避하려 애썼다. 相對便은 그것을 ‘民主主義’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猝地에 우리는 班(反)民主가 됐다. 그때의 論爭을 되돌아보면, 形式 論理에 밀리다 보니 나 自身도 억지 主張으로 一貫한 적도 많았다. 告白건대 제발 中央運營委員會가 열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래서 때때로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며 副會長에게 會議 進行權을 넘기고 逃亡가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어찌나 홀가분하던지. 밖에서는 이른바 協治(協治)를 하라, 論理로써 說得하라 勸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애初에 나를 徹天之怨讐이자 敵(敵)으로 認知하는 相對方을 說得하는 일이란 바윗돌 위에 씨앗을 뿌려 꽃을 피우는 일과도 같으리라. 壁을 두고 이야기하는 氣分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는 2年을 執權(?)했다. 첫 總學生會가 어수선했음에도 다음番 選擧에서 學生들이 또 우리를 選擇한 理由는 그만큼 當時에 反NL, 班運動卷 情緖가 强力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와 告白건대 事實은 1期 學生會를 마감하며 우리는 다음番 選擧에 候補를 내지 않으려 했다. 衆寡不敵(衆寡不敵)으로 싸우느라 몸과 마음이 지친 狀態인 데다 ‘이런 式이라면 都大體 總學生會를 이끌어가는 理由가 무엇인가’ 하는 懷疑感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거의 우기다시피 ‘次期 總學生會도 接受할 것’을 主張했고, 스스로 出馬해 當選된 것인데, 權力慾 때문이었을까, 當時 내가 同僚들에게 내걸었던 內部的인 名分은 “NL의 資金줄을 繼續 끊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總學生會를 ‘接受’하고 우리는 NL의 新紀元을 發見했다. 흔히 ‘總學生會 非理’라고 하면 學生會費 流用이나 着服 等을 떠올리지만 事實 運動圈이 掌握한 大學에서 學生會費는 ‘푼돈’에 지나지 않았다. 學生會費는 定期的인 監査를 받는데다 - 그래봤자 監査委員度 全部 한통속이지만 - 使用處가 具體的으로 定해져 있어 有用하기 쉽지 않았다. 間或 그런 所聞으로 口舌에 오르내리는 다른 大學 總學生會를 보면 NL 立場에서는 3流로 느껴졌을 것이다. 學生會費 以外에 形成되는 祕資金(?)李 一般人의 想像을 넘어설 程度인데 굳이 公式的인 學生會費에 손댈 理由가 없는 것이다. 

    只今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當時는 學生會館이 運動圈의 王國처럼 여겨지는 治外法權이었고, 거기서 장사를 하려면 누구든 ‘運動圈 運營資金’을 대야 했다. 가장 큰 ‘돈줄’은 自動車 運轉免許 學院이고, 英語學院이 뒤를 이었던 것 같다. 이건 學生會議 公式的인 輸入으로 잡히지 않는 財源(財源)이다. 그런 輸入이 存在한다는 事實조차 모르는 學生이 太半이니 監視나 牽制도 있을 理 없다. 이 밖에도 學生會 財源은 숱했고, 合法을 假裝한 金錢的인 커넥션 또한 다양했다. 우리 大學 總學生會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規模와 手法은 달랐을지라도 1980~90年代 웬만한 總學生會가 그랬다. 그들이 學生會 選擧에 그토록 死活을 거는 理由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總學生會長을 맡은 鳶島는 學生會館 入住 業體들이 一括 再契約을 하는 해였다. 그분들은 學校 側과 合法的 契約을 하고 장사하지만, 學生會 幹部들이 入札 審査委員으로 參與하는 탓도 있고, 事實 學生會가 名分과 口實을 만들면 業體 하나쯤 넣고 빼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예컨대 現在 業體를 살리고 싶으면 “學生福祉 侵害하는 新規 入札 反對한다”고 示威하면 되는 것이고, 新規 業體를 들이고 싶으면 “無分別한 再契約에 反對한다”고 反對로 示威하면 되는 것 아닌가. 論理 따위 必要 없다. 그 過程에 뒷去來가 오가지 않을 수 없다. 

    ‘腐敗의 百科事典’과도 같은 이런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長期間에 걸쳐 벌어졌다.

    極과 極은 통한다고 했던가

    絶對 權力은 絶對 腐敗한다 했던가. 運動圈 勢力이 强力한 大學일수록 그 規模는 크고 隱密했다. 그런데 이렇게 財政과 關聯된 部分은 運動圈에서도 極히 少數만 아는 祕密이고, 甚至於 總學生會長조차 모르는 境遇가 많았다. 이런저런 理由로 總學生會長은 모르는 便이 나은 일이었다. 總學生會長은 拘束될 可能性이 높은 사람이고, ‘偉大한’ 會長님은 至高至順 좋은 것만 보면서 鬪爭에만 專念해야 하니까. 

    그럼 이런 祕資金은 大體 어디에 쓰였을까? 運動圈 學生會에서는 當然히 集會나 示威를 하는 데 使用했고, 運動圈 組織을 運營하는 데 쓰였다. 전대협이나 한총련 議長을 決定하는 過程에도, 勿論 다양한 要素가 考慮됐지만, ‘議長’의 全國的인 活動力을 保障할 수 있는 ‘資金力’李 無視할 수 없는 側面이었다. 우리 大學에서 唯獨 全大協-한총련 議長이 많이 輩出된 理由를 꼽자면 그러한 背景 亦是 無視할 수 없다. 議長을 輩出한 大學은 公式的인 分擔金이 相當했고, 常勤 幹部를 派遣하고 出帆式 等 全國 單位 集會를 開催하는 費用 亦是 學生으로서는 想像 못 할 資金이 所要됐다. 우리는 NL運動圈의 그러한 資金줄을 暫時나마 눌러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當選된 非運動圈-班運動卷 總學生會는 腐敗의 고리를 一切 끊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學生 다이어리 製作이나 祝祭 費用과 같은, 이른바 ‘좋은 일’에 쓰면 된다는 名分이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學生會 外部 收入源을 完全히 公開해 버리자는 內部 意見도 있었으나 亦是 無視했다. 우리도 組織 運營을 하고, 다음 總學生會 選擧를 準備하고, 새로운 學生運動 連帶體를 結成하는 作業 等에 祕資金을 消耗했다. 그러니까 腐敗의 權力者만 바뀐 셈이다. 흥미로운 點은 이러한 祕資金 造成과 運營 實態를 훤히 알고 있는 NL 側에서도 2年 동안 그런 問題는 全혀 건드리지 않았다는 事實이다. 極과 極은 통한다고 했던가. 다음番엔 自身들 차지가 될 수 있는 밥床은 걷어차지 않는 操心스러운 賢明함(?)이 있었던 것이다. 

    가장 크게 反省하는 點은, 내가 任期를 마감하며 後輩들이 다음 總學生會 選擧를 치를 때 우리 幹部 가운데 한 名이 良心宣言을 한 일이다. 財政 파트에 있던 幹部가 아니었기 때문에 具體的인 暴露는 하지 못했고, 굳이 그런 理由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理由로 우리는 다음 選擧에 졌을 可能性이 높지만, 選擧運動 期間 우리는 道德的으로 窮地에 몰렸다. 過程이 어떻든, 選擧 結果를 認定하지 않고 騷亂을 피운 點에 對해서도 뒤돌아 後悔하고 反省한다.

    뒤늦게나마 謝罪하는 理由

    當時 學生會 幹部의 良心宣言에 우리 總學生會는 特別한 立場을 밝히지 않았다. 괜히 可타否타 論駁해 봤자 得이 될 것 없다는 政治的 判斷을 했던 것이다. 가까운 親舊들이 물었을 때도 “告發者가 元來 精神이 좀 異常한 놈” “權力慾에 그러는 것”이라는 式으로, 가벼운 해프닝이라는 듯 거짓말을 했다. 우리는 ‘內部告發者’를 그렇게 對했다. 그렇게 오늘의 政治를 익힌 셈이다. 20年이 지나서야 이토록 뒤늦게, 그때 그 幹部에게 깊은 謝罪의 말씀을 傳한다. 勿論 가장 큰 謝罪는 우리를 믿고 選出해 준 當時 學友들에게 드려야 하겠다. 一抹의 辨明의 餘地가 없다. 

    貴重한 ‘신동아’ 紙面을 빌려 이렇게 個人的인 懺悔의 辯이나 늘어놓는 것을 悚懼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讀者 여러분이 내가 行間에 傳하려는 말을 이미 눈치챘으리라 믿는다. 

    大體로 大學街는 11月에 各級 學生會 選擧를 치른다. 大學을 나온 以後로 總學生會 選擧에는 關心조차 없다가, 最近 後輩에게 “아직 大學에 NL系列 學生會가 存在한다”는 말을 듣고 적이 놀랐다. 하지만 이내 ‘그들이 그것을 쉽게 抛棄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럼 그렇지’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如前히 ‘단물’은 남아 있는 것이다. 오늘도 大學街에는 運動圈과 非運動圈이 熾烈하게 다투고, 汝矣島 國會 뺨치는 政治 活劇이 캠퍼스 안에서 벌어지고, 腐敗의 커넥션은 如前히 强固하고, 選擧에 이기기 위해서는 - 밥그릇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 手段과 方法을 가리지 않는다는 消息 또한 傳해 들었다. 왜 歷史는 1㎜도 進步하지 않는가.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이런 것도 우리의 ‘種特’인가 싶은 씁쓸한 自愧感마저 밀려왔다. 

    大抵 學生會 活動을 통해 對話하고 妥協하고 協商하고 討論하고 說得하는 民主와 包容의 姿勢를 익혀야 할 텐데, 現實은 反對의 것들로 가득 차 있다. 大學에서 작은 權力의 맛을 限껏 누리고, 民主主義를 惡用하는 온갖 못된 짓을 배우고, 强한 權力意志를 키우고, 거짓말과 權謀術數, 억지스러운 陣營論理만 실컷 익힌 사람들이 그때의 經歷을 바탕으로 어디에서 또 어떤 能力을 發揮할지! 이제는 國民도 대충 아는 事實이다. 꼰대가 젊은이들 하는 일에 끼어드는 것과 같이, 내가 이런 訓手 둘 資格이 있는가 싶지만, 反省의 意味로 남기는 말이다.

    民主主義를 假裝한 어떤 것

    時間을 거슬러 1985年, 學徒護國團이 廢止되고 學生會가 復活했다. NL은 빠르고 靈惡하게 全國 學生會를 掌握했다. 그때 내세운 理論이 이른바 ‘戰鬪的 學生會론’인데, 말이 ‘理論’이지 內容은 簡單하다. “地下組織을 감추기 위한 外皮로 學生會를 活用하자.” 속셈은 그 以上도 以下도 아니었다. 亦是 NL은 對中 感覺, 政治와 權力에 對한 嗅覺만큼은 始作부터 남달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學生會는 좋게 말하면 運動圈 路線과 理念을 實現하기 위한 ‘大衆的 保護膜’이 됐고, 거칠게 表現하자면 ‘財政的 빨대’ 구실을 遂行했다. 그렇게 그들은 大學街에 ‘鐵甕城’을 構築했다. 40年 가까운 歲月, 거기서 숱한 ‘꼬마 權力者’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 學生會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只今 우리 政治에 어떤 影響을 미치고 있는지, 조용히 省察하며 되돌아볼 일이다. 

    요즘처럼 民主主義란 무엇인지에 對해 眞摯하게 생각해 보는 時節도 없는 것 같다. ‘民主主義를 假裝한 어떤 것’을 皮膚로 强하게 느끼는 季節이다. 올가을에도 짙어가는 落葉과 함께 大學街 選擧 消息이 들릴 것이다. 올해도 投票率이 未達해 總學生會를 構成하지 못했다는 消息이 곳곳에서 들려올 것이고, 選擧 日程을 몇 番이나 延長하고 있다는 消息도 들릴 것이며, 저것이 果然 스무 살 學生들의 所行이 맞을까 싶어 쯧쯧 혀를 차게 되는, 싯누런 銀行(銀杏) 냄새와도 같은 事緣 또한 振動할 것이다. 

    陣營論理의 背後에 숨어 실컷 私益을 追求하며 會心의 微笑를 짓고 있는 오늘의 爲政者를 보면서, 理念集團이 아니라 利益集團이 된 지 오래인 盲目的 追從者들을 보면서, 20年 前이나 只今이나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은 大學 學生會 風景을 보면서, 많은 것이 겹쳐 떠오른다. 우리는 學生會를 통해 果然 무엇을 배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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