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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클로 가면 土着倭寇? 低劣한 弱者 괴롭히기|신동아

유니클로 가면 土着倭寇? 低劣한 弱者 괴롭히기

[申平의 ‘풀피리’?] ‘反日’은 權力 쥔 쪽의 救護, 凶測한 業報 될 것

  • 申平 辯護士·㈔公正世上硏究所 理事長

    lawshin@naver.com

    入力 2020-11-1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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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本에서 만난 두 분의 스승

    • 韓 法曹界 前官禮遇 말하자 “그건 賂物” 一鍼

    • ‘土着倭寇’ 規定, 美白人 下層階級의 黑人 差別 聯想

    • 발밑에 다른 人間 깔고 앉아 快感

    • 政府 當局이 몹쓸 行動 助長하는 듯

    • 선량한 市民에게 抑鬱한 陋名 씌워, ‘毒蛇의 子息들’

    • 바이든 當選 以後 文政府 反日政策 修正 幾微

    *19代 大選 當時 申平 辯護士(64·司法硏修院 13期)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候補 中央選對委에서 ‘公益提報 支援委員會’ 委員長과 ‘民主統合포럼’ 常任委員을 지냈다. 그는 文在寅 政府가 들어선 뒤 與圈을 向해 쓴 소리를 아끼지 않으며 公平無私(公平無私)韓 知識人의 本보기 役割을 하고 있다. 只今 慶北 慶州에서 農事를 짓고 詩를 쓰며 산다.

    최근 유니클로 국내 매장에 많은 인파가 몰렸다. 유니클로가 독일 출신 디자이너 질 샌더와 합작한 제품을 사려는 소비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온라인에서는 반일 불매운동의 취지를 져버렸다면서 유니클로에 방문한 사람들을 비난하는 글이 돌았다. [뉴스1]

    最近 유니클로 國內 賣場에 많은 人波가 몰렸다. 유니클로가 獨逸 出身 디자이너 質 샌더와 合作한 製品을 사려는 消費者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온라인에서는 反日 不買運動의 趣旨를 져버렸다면서 유니클로에 訪問한 사람들을 非難하는 글이 돌았다. [뉴스1]

    年末이 다가온다. 쓸쓸하다. 낮은 氣溫이 몸속으로 파고들며 허전함의 空間을 키운다. 年末이 되면 하는 일 中의 하나가 年賀狀을 쓰는 것이다. 韓國에서는 종이 年賀狀이 거의 없어졌다. 옛날 方式으로 한 해를 整理하며 相對와의 살뜰한 因緣을 이야기하는 年賀狀은 사라졌다. 하지만 日本은 아직 舊式 年賀狀에 對한 固執이 조금은 남아있는 社會다. 日本에 留學하며 모시게 된 두 분의 스승들께는 꼭 年賀狀을 보내드린다. 

    나는 1989年 韓國 法官으로는 처음으로 日本에 派遣됐다. 當時만 해도 海外로 派遣되는 判事 數가 적어 競合이 熾烈했다. 14名의 判事가 支援했는데, 序列이 가장 밑인 내가 選拔됐다. 志願者들은 미리 韓國外大에서 日本語 試驗을 치렀다. 試驗管인 敎授가 法院行政處를 일부러 찾아와 내 日本語 實力을 稱讚하는 일이 있었다. 이것이 내 選拔로 連結됐다. 

    그해는 只今 退任한 ‘헤이세이(平成)’ 日王이 卽位한 해였다. 日本 어디에서나 ‘平成元年(平成元年·헤이세이가 始作된 첫해)’의 밝은 소리가 울렸다. 當時 日本은 旭日昇天의 氣勢로 世界經濟를 주름잡기 始作했다. 머지않아 日本의 經濟力이 世界 全體 GNP(國民總生産)의 30% 乃至 40%를 占할 것이라는 豫測도 있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마의 平和)’에 버금가는 ‘팍스 자포니카(Pax Japonica·日本의 平和)’의 時代가 올 것이라는 말까지 膾炙됐다. 世界의 젊은이들이 구름같이 日本을 배우러 몰려왔다. 나는 그 中 한 사람이었다.


    두 日本人 스승과의 追憶

    當時만 해도 우리는 權威主義 政權에다 社會 모든 部分에 어두운 그늘이 져 있었다. 서울올림픽을 잘 치러냈지만, 그것은 작은 成功이었다. 日本 滯留 中 한 大學의 硏究室을 配定받았다. 또 日本 最高裁判所의 外國裁判官硏修院으로서 東經地方裁判所 判事室에서 日本 判事들과 함께 勤務하기도 했다. 



    이때의 經驗을 바탕으로 歸國 後 ‘日本 땅 日本 바람’이라는 冊을 썼는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冊에 日本과 比較해 韓國 司法府에 對한 赤裸裸한 批判을 담았는데, 이것이 司法府 內에서 激奮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1993年 내가 法官再任命에서 탈락하는 主要 原因 中 하나가 됐다. 

    日本에서 나는 두 분의 貴重한 스승과 因緣을 맺었다. 한 분은 히吐쯔바시(一橋)大學의 스기하라 야스오(衫原泰雄) 先生으로, 日本 進步 憲法學의 泰斗(泰斗)라고 할 수 있는 분이다. 그는 戰爭과 軍隊 保有를 禁止한 憲法 9條를 改正해 日本을 戰爭 할 수 있는 普通 國家로 탈바꿈시키려는 右翼에 맞서 平生을 싸웠다. 또 韓中日 세 나라가 平和로이 共存할 수 있기를 바라며 努力했다. 3國 學者 間의 交流와 協力을 强調하며 頻繁하게 韓國과 中國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2007年 韓國憲法學會長으로 아시아圈의 憲法學者들을 널리 糾合, 韓國 國會에서 ‘아시아憲法포럼’ 創設大會를 열었다. 事實 스기하라 先生이 뿌린 씨를 收穫한 데 不過했다. 

    先生은 언제나 웃음을 머금은 和暢한 얼굴로 조근조근 說明했다. 그 內容은 뼈대가 있고 힘이 들어 있었다. 어느 날 先生의 硏究室을 찾았다. 추운 겨울이었다. 도쿄는 濕度가 높아 겨울에는 추위가 뼛속으로 파고든다. 先生은 옛날 帝國大學 時節 지어진 낡은 硏究室에서 그나마 나오는 暖房을 끄고 있었다. 뜨거운 물을 끓여 만든 茶를 한 番씩 마실 뿐이었다. 

    이런 極度의 耐乏과 節制의 生活을 하는 日本人들을 드문드문 보며 日本社會의 底力을 느낄 때가 한두 番이 아니었다. 그날도 先生은 韓中日 3國의 平和로운 協力이 얼마나 重要한 일인지 力說했다. 近代 以後 日本의 國是가 되다시피 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 西歐로 들어가자)론을 辛辣하게 批判했다. 對話가 끝날 무렵 記念寫眞을 찍었는데, 그것이 그분과 나의 唯一한 寫眞이 됐다. 

    스기하라 先生은 그 무렵 日本에 오신 內 韓國人 스승 김철수 先生을 만나 “新(申)賞은 日本에 있으면 얼마든지 뻗어나갈 수 있는 사람인데, 굳이 歸國한다고 하니 안타깝습니다”라고 했다. 그 後 人生의 여러 어두운 골목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只今의 나이가 되고 보니, 先生의 말씀이 조금은 理解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賂物이지요!”

    또 한 분 小盧베 이쯔誤(園部逸夫) 先生은 1929年 서울에서 태어났다. 當時 先生의 父親은 서울法律專門學校(서울大 法大 前身) 敎授로 있었다. 우리말로 ‘진고개’로 불리던 只今의 退溪路 附近이 先生의 出生地다. 敎授와 判事를 번갈아하다 나중에 最高法院의 判事(우리의 大法官)로 拔擢됐고, 最高法院 副所長을 歷任했다. 退任 後에는 皇室典範(典範)委員會의 委員長을 맡았는데, 주된 議題는 女性이 皇位에 오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잠이 오지 않아 캄캄한 새벽에 일어났다. 마침 配達된 요미우리신문에 ‘서울 出生’의 先生이 最高裁判所 判事로 拔擢됐다는 記事가 났다. 조금 기다려 電話를 드리니 놀랍게도 아직 그 事實을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도쿄地方裁判所에서 判事들에게 弄談調로 이 逸話를 얘기했더니, 어떤 部長判事가 深刻한 表情으로 或是 내가 事務總局(우리의 法院行政處)에 안테나를 갖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失笑하지 않을 수 없었다. 垂直的인 日本社會는 差別이 日常化 돼 있지만, 一旦 自身들이 屬한 ‘나와바리’(領域)에 들어온 사람은 全혀 差別하지 않는다. 그 部長判事는 나를 自己들과 똑같은 日本 判事로 錯覺하고 그런 質問을 한 것이다. 

    先生은 特別히 ‘서울 出生’이라는 事實에 매여 있었다. 師母님이 “저이는 大陸의 사람이에요”라고 자주 말한 까닭도 이와 關聯이 있을 것이다. 先生은 韓國과의 因緣을 무척 重히 여겼다. 마침 韓國의 判事로서 내가 처음 日本에 派遣되자 무엇이든지 베풀어주려 애썼다. 先生이 日本 滯留 中인 나의 어려운 事情을 돌봐주는 ‘오세와닌’(お世話人)이라는 所聞이 퍼져 지내기가 무척 便했다. 

    두 분은 精誠을 다해 나를 따뜻하게 보살펴주었다. 나는 두 분의 人格을 欽慕했고, 學問的으로나 人間的으로 많이 배웠다. 기꺼이 尊敬하는 스승으로 모셨다. 歸國 後 그분들이 한 番씩 韓國에 오시거나 내가 學會 參席과 冊 出版 等의 理由로 日本에 갈 때 뵈며 師弟의 情을 나눴다. 

    2006年 10月 釜山大, 慶北大, 司法硏修院, 憲法裁判所에서 小盧베 先生 招請 講演을 計劃해 내가 先生을 모시고 다녔다. 서울 漢江邊 88올림픽道路 위를 택시 타고 지나던 中이었다. 나는 韓國에서 大法官 出身 辯護士라면 圖章 하나 찍어주고서 數千萬 원의 受任料를 챙기는 現實을 慨歎하는 말씀을 드렸다. 先生은 그 말을 듣고 바로 “그것은 賂物이지요!”라고 잘라 말했다. 先生도 日本 大法官 出身이지만 日本에서는 이와 같은 일은 想像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講演을 다니는 途中 法律新聞과 對談이 잡혔다. 先生에 따르면 日本에서는 1868年 메이지 維新 以後 西歐 文物과 制度를 急速히 導入했는데, 法官職을 맡길 資源이 全無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사무라이들을 應急으로 교육시켜 法官에 앉혔다고 한다. 우스운 말인데, 그래도 사무라이들은 名譽를 生命으로 아는 사람들이다. 그로써 日本 法官의 廉潔性(廉潔性) 傳統이 잡힌 셈이다.


    다른 人間을 깔고 앉음으로써 느끼는 快感

    2019년 8월 6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일대에 서울 중구청이 태극기와 ‘노 재팬’ 배너기를 설치한 모습. [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2019年 8月 6日 서울 中區 世宗大路 一帶에 서울 中區廳이 太極旗와 ‘盧 재팬’ 배너氣를 設置한 모습. [박영대 동아일보 記者]

    歲月은 흘러 두 분 다 이제 九旬을 넘겼고 氣力은 몹시 衰했다. 스기하라 先生은 平生에 걸쳐 해온 過度한 執筆 活動으로 只今은 어깨를 잘 쓰지 못한다. 그럼에도 自身이 屬한 地域共同體의 住民들을 對象으로 憲法을 가르치는 데 誠意를 아끼지 않고 있다. 小盧베 先生은 카랑카랑한 音聲, 高位公職者 出身다운 品位와 분명한 態度, 毅然한 몸가짐에서 남다른 분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받은 年賀狀을 보니 글씨가 몹시 구불구불했다. 

    이제 내가 이 글을 쓰는 目的을 披瀝해야 할 때가 됐다. 只今 韓國에는 ‘土着倭寇’니 뭐니 하면서 日本에 好感을 갖는 人士들을 無慈悲하게 攻擊하는 異常한 風潮가 퍼졌다. 어느 有名 作家는 “日本 留學을 다녀오면 無條件 다 親日派가 된다. 民族 反逆者가 된다” “150萬 程度 되는 親日派를 斷罪해야 한다”고 했다.
     
    中國이나 美國에 對해 排斥하는 意見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지만 이들은 公公然하게 나서지는 못한다. 反面 ‘排日’(排日)과 ‘反日’은 ‘反共’처럼 權力을 쥔 쪽에서 외치는 口號에 따라 속 便하게 同調할 수 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마치 自身이 우리 社會의 主流로 編入된 것 같은 즐거운 錯覺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요즘 日本에 留學을 다녀오거나 日本과 去來하며 生計를 維持하는 사람들은 大體로 우리 社會의 平凡한 市民들이다. 過去 帝國主義 日本과는 何等 關聯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을 ‘土着倭寇’라고 攻擊한다. 美國에서 黑人을 攻擊하는 一部 下層階級 白人들의 人種差別主義(racism)와 全혀 다를 바 없다. 自己 발밑에 다른 人間을 깔고 앉음으로써 低劣한 快感을 느끼고자 하는 것이다. 自己보다 弱한 者를 卑怯하게 괴롭히는 典型的인 ‘不利잉’(bulling)이다. 이에 유니클로 賣場에서 物件을 사는 사람들을 ‘유니클로 개돼지’라고 마구 辱하는 것이다. 

    이들은 겉으로 民族主義 或은 親日淸算이라는 巨創한 外觀을 取했으나, 事實은 이와 別로 關係가 없다. 앞에서 말한 그 作家는 至毒한 反美主義者이기도 하다. 그러나 겉으로는 ‘親美派’를 攻擊하지 못한다. 그랬다가는 무슨 後暴風을 겪을지 모른다는 事實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親日派’나 ‘土着倭寇’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우리 社會에서 힘을 못 쓰는 弱한 存在다. 그러니 마음 놓고 프레임에 넣어 一方的으로 攻擊할 수 있다.


    고통스런 絶叫 담긴 한 通의 e메일

    이런 粗雜한 行動을 하는 이들은 自身들의 行動이 被害者들에게 어떤 影響을 미치는지 잘 생각하지 않는다. 政府 當局은 이 몹쓸 行動을 助長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에 被害者들은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다. 이에 對한 本보기로 나에게 온 어떤 e메일을 그대로 紹介하고자 한다. 간醬을 후벼 파는 듯한 고통스런 絶叫가 글에 넘쳐난다. 

    “빨갱이로 烙印찍거나 土着倭寇로 烙印찍거나 그 찍기 手法과 暴力 論理는 別 差異가 없다는 指摘에 共感하고 있습니다. 저는 집사람이 日本人이고 올해 3月 다니고 있던 會社의 日本支社에서 約 2年 勤務하다 韓國에 들어왔는데, 너무나도 變한 大韓民國의 現實 어디에다 눈높이를 맞춰야 할지, 어떻게 適應해야 할지 숨이 막힐 地境이었습니다. 銃칼만 안 들었지 類似階級革命이 進行 中인 內戰國家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門(文) 586集團이 近來 보여주는 悖惡질을 무너져 가는 自身들의 虛構와 矛盾을 지키려는 마지막 몸부림으로 보고 있습니다. 權力은 有限하나 眞實은 永遠하다고 생각합니다.” 

    親日淸算은 分明 必要하다. 그에 못지않게 우리에게 時急한 건 ‘對美 從屬 關係의 淸算’이다. 떳떳한 自主獨立國家 實現을 위해 早晩間 반드시 일궈내야 한다. 그러나 日本이나 美國이 우리의 經濟的 繁榮에 큰 도움을 준 點을 잊지 말아야 한다. 向後 두 나라와 親善 友好關係를 維持해야 한다. 日本人, 美國人들과도 相互信賴와 相互扶助의 틀을 더욱 탄탄히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中國과의 關係에서도 同一하게 適用해야 한다. 

    單純히 留學을 갔다 왔다고 해서, 生業을 爲해 日本과 接觸을 했다고 해서 어찌 모두 賣國의 ‘土着倭寇’인가?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 하루하루 誠實하고 선량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抑鬱한 陋名을 뒤집어씌우는 罪, 나아가 그 사람의 마음에 怨恨을 품게 한 罪가 決코 작지 않다. 영문도 모르는 이들을 自身들의 政治的 目的을 達成하기 위해 꼬드겨 ‘反日’ ‘反美’의 卑劣하고 殘忍한 攻擊 隊列에 加擔시킨 罪는 限없이 크다. 그들은 容恕받을 수 없는 ‘毒蛇의 子息’들이다. 아마 그들의 行爲는 子孫에까지 넘어갈 凶測한 業報가 될 것이다.


    山紫水明과 地獄의 도가니

    多幸히 美國에서 조 바이든 大統領 當選人이 勝利한 以後 政府의 反日政策에 修正의 幾微가 나타나고 있다. 바이든 行政府는 ‘캡틴 아메리카’(Captain America)로 復歸해 世界 地圖自國의 地位를 回復하려 할 것이다. 韓美日 3國의 同盟을 戰略的으로 最優先 課題에 넣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를 追從하는 게 妥當한지 與否를 떠나, 過度한 反日 프레임으로 被害를 입은 抑鬱한 사람들이 줄어드는 건 좋은 일이다. 山紫水明(山紫水明)韓 韓國을 地獄의 도가니로 몰고 가며 ‘土着倭寇’ 掃蕩을 부르짖던 모습들이 早晩間 完全히 사라지기를 懇切히 바란다.


    ■ 하늘과 바람과 별 

    日常이 내 生命의 꽃을 짓이기고
    눈앞 風景이 죄다 낡은 灰色으로 비치던
    어느 날
    그것이 삶의 全部가 아니라고 깨달았다
    내 입김이 살아 숨 쉬며 꿈틀거리고
    風景의 內面이 출렁거리며 튀어나왔다

    하늘이 눈 깜빡이며 속삭인다
    이제 너와 나는 親舊가 될 수 있어
    바람이 나직하게 읊조리며 지나간다
    좀 늦긴 했어도 多幸이야
    그런데 頂수리 바로 위 별 하나가 어깃장을 놓는다
    고마움의 울타리를 쳐야
    네가 얻은 것이 그대로 남을 수 있어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심수관’ 도공 일가를 그린 ‘고향을 어찌 잊으리이까’ 작가인 고(故)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선생은 1945년 일본이 세계 최강이라고 자랑하던 만주 관동군에 배속돼 있었다. 소련군이 8월 9일 선전포고 후 막강한 기갑부대를 앞세워 소만국경을 돌파하자 관동군은 순식간에 궤멸됐다. 선생은 패잔병이 돼 도보로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서해안을 따라 내려와 부산으로 가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선생이 전라도 지방을 걸을 때 조선의 하늘이 그토록 맑을 수가 없었다. 조선백자의 맑음과 통하는 것이었다. 패잔병으로서의 참혹한 기억에 남은 조선의 가을하늘은 그에게 평생 큰 영감을 주었다. [신평 제공]

    壬辰倭亂 때 日本에 끌려간 ‘심수관’ 道公 一家를 그린 ‘故鄕을 어찌 잊으리이까’ 作家인 故(故)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先生은 1945年 日本이 世界 最强이라고 자랑하던 滿洲 關東軍에 配屬돼 있었다. 蘇聯軍이 8月 9日 宣戰布告 後 莫强한 機甲部隊를 앞세워 小滿國境을 突破하자 關東軍은 瞬息間에 潰滅됐다. 先生은 敗殘兵이 돼 徒步로 滿洲에서 鴨綠江을 건너 西海岸을 따라 내려와 釜山으로 가서야 歸國할 수 있었다. 先生이 全羅道 地方을 걸을 때 朝鮮의 하늘이 그토록 맑을 수가 없었다. 朝鮮白瓷의 맑음과 통하는 것이었다. 敗殘兵으로서의 慘酷한 記憶에 남은 朝鮮의 가을하늘은 그에게 平生 큰 靈感을 주었다. [申平 提供]


    ● 1956年 出生
    ● 서울대 法學科 卒業
    ● 第23回 司法試驗 合格·司法硏修院 第13期
    ● 仁川地方法院, 서울家庭法院, 大邱地方法院 判事
    ● 경북대 法學專門大學院 敎授, 韓國憲法學會 會長 歷任
    ● 著書: ‘法院을 法廷에 세우다’ ‘로스쿨 敎授를 위한 로스쿨’ ‘들판에 누워’(시집)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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